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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001b> 테오도어 아도르노 Theodor W. Adorn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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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테오도어 루트비히 비젠그룬트 Theodor Ludwig Wiesengrund[1] |
출생 | 1903년 9월 11일 |
독일국 프랑크푸르트 | |
사망 | 1969년 8월 6일 (향년 65세) |
스위스 발레주 피스프 | |
국적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경력 |
프랑크푸르트 대학 객원 강사 프랑크푸르트 대학 교수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 정회원 |
직업 | 철학자 |
학파 | 비판 이론 |
배우자 | 그레텔 아도르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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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철학자, 사회학자, 음악비평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 이론을 대표하는 학자이다.2. 생애
2.1. 초년기
아도르노는 1903년 9월 11일에 프랑크푸르트의 개신교로 개종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오스카 알렉산더 비젠그룬트는 포도주를 취급하는 부유한 상인이었고 어머니 마리아 칼벨리-아도르노는 오페라 가수였다. 어머니 마리아와 '두 번째 어머니'라고 불렀던 피아니스트 이모 아가테(Agate, 1868~1935)에게 어린 시절부터 큰 영향을 받아 음악과 예술을 접했는데, 이때부터 음악은 아도르노의 인격에 있어서 근원적인 뿌리가 되었다.학교에서 동급생에게 응석받이로 보이던 소년 아도르노는 의외로 비교적 일찍 철학적 훈련을 받는 기회를 가졌다. 아도르노가 아직 고등학생이었을 때, 교육자적 자질이 대단했던 크라카우어[2]를 만나 칸트의 철학을 배웠던 것이다. 크라카우어는 아도르노에게 단순한 철학 공부가 아니라 '철학책을 읽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한편, 철학 공부를 하지 않을 때는 대부분 음악을 하면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프랑크푸르트 음악원에서 작곡과 피아노를 배운 그는 두 명이 함께 치는 피아노 연탄곡을 특히 즐겼다고 한다. 그는 음악 분야에 광범위한 친분을 쌓고 있어서 하이든, 브람스, 슈베르트는 물론 말러의 곡까지도 함께 연주할 파트너를 언제든지 구할 수 있었다고.
1921년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아도르노는 아직 18세가 채 안 된 나이였다. 여기서 이후 평생 동안 학문의 동료가 되는 호르크하이머를 만난다.[3] 대학교에서는 철학, 심리학, 사회학, 음악학 분야의 강의들을 수강하였고, 1924년 21세의 나이에 철학전공으로 학위를 받았다. 학위논문의 주제는 후설의 현상학이었다. 이때부터 교수자격 논문이 통과될 1931년까지 아도르노는 본격적으로 음악에 몰두했다. 직업으로서 음악평론가의 길을 진지하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음악을 향한 열정이 넘쳤던 아도르노는 어느날 오스트리아에 있는 작곡가 알반 베르크에게 편지를 썼다. "선생님께서 저를 받아주실 수 있는지 이 자리를 빌려 여쭙고 싶습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쓴 악보를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아도르노는 베르크에게 진지하게 작곡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자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빈에서 머문 기간은 1년이 채 못 되었다.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교수자격을 취득하기 위한 박사학위 논문[4]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음악세계와 끈을 놓지 않았다. 음악잡지 『시작anbruch』에 음악평론을 쓰면서 편집에도 관여했고, 자신의 곡을 연주무대에 올리기 위해 빈과 베를린을 방문하기도 했다.
2.2. 사회조사연구소와 미국 망명
호르크하이머가 1930년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철학과 정교수로 임명되는 동시에 사회조사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했을 때, 아도르노는 사회조사연구소의 비공식 연구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교수자격 논문도 통과되어 대학에서 강의를 하려고 했으나 아도르노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소속되어야 했던 제3제국문화공무부의 회원이 될 수 없었다. 게다가 1933년 9월 11일, 30세가 되던 생일날, 나치는 아도르노의 강의허가증 마저 무효화시킨다. 독일에서의 생활을 더 이상 불가능해졌고, 이제 아도르노는 영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1934년에서 1938년까지 옥스퍼드 머튼 칼리지 박사과정 학생 자격으로 4년간 런던에 머물렀다. 이시기 아도르노의 자존심은 최악의 상태였는데, 몇 편의 글을 썼지만 영국의 지식 클럽 어디에서도 강연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 옥스퍼드의 누구도 아도르노를 진지하게 상대하지 않았고 그저 댄디(멋쟁이)로만 취급했다.수정의 밤으로 나치의 유대인 탄압이 본격화되자, 호르크하이머는 아도르노에게 미국으로 넘어오라고 권유했고, 1938년 아도르노는 이를 받아들여 뉴욕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아도르노가 얻은 첫 직장은 프린스턴 라디오연구 프로젝트였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록펠러재단이 준 지원금으로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새로운 형식의 대중매체가 미국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계획이었다. 아도르노는 이 프로젝트의 음악감독으로 고용되었다. 하지만 실제 업무는 프로그램 제작자에게 어떤 종류의 방송이 시청률을 극대화하는가에 대한 데이터를 제공하는 것이었고, 그는 이런 일에 회의감을 느꼈다. 그는 1941년 일을 그만두기 전까지, 이런 실증주의적 방식이 음악을 수량화시키고 청취자와 음악 그 자체의 관계를 오직 경제적 가치로만 결정되게 만든다는 몇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상업라디오는 청취자에게 라디오가 제공한 상품음악만 선택하게 만들어, 청취자를 저질음악만 소비하는 수동적인 소비자로 만든다는 것이 그 비판의 요지였다. 일단 공식이 성공적이면 산업은 똑같은 것을 반복해서 틀어대고, 그 결과 청취자는 똑같은 것만 듣고 그 형식이 대단한 것마냥 치켜세운다. 아도르노는 「플러깅 연구」라는 글에서 라디오 음악산업의 성공공식을 다음과 같이 비꼬았다. "밥그릇에 개밥을 쏟아 붓는 소리가 나면, 그것을 들은 개가 달려오는 것과 같다."[5]
1941년 4월 호르크하이머는 심장이 좋지 않아 온화한 기후에서 지내라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뉴욕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같은 해 11월 아도르노 부부도 호르크하이머를 따라 미국 서부 로스앤젤레스 서쪽에 위치한 부촌 브렌트우드에 월세를 얻었다. 여기에는 나치의 핍박을 피해 도망쳐 온 망명 독일 지식인들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토마스 만, 브레히트, 쇤베르크, 프리츠 랑, 한스 아이슬러 등등 저명한 예술가들이 이웃이었기 때문에, 당시 아도르노는 무명의 철학자에 불과했지만 그들 몇몇과 교류를 할 수 있었다. 그런 대가들의 예술과는 대조적으로, 바로 옆 할리우드에서는 저질 영화를 일회용 상품처럼 대량생산하고 있었고, 아도르노는 문화마저도 산업화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정형화된 공식과 이미지들을 반복하여 무의미한 웃음을 안겨주는 할리우드 영화는, 여가와 오락를 제공하므로써 환상을 만들고 그 환상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효과적으로 숨겨주고 있었다. 사람을 돈으로 파악하고 돈이 권위가 되어버린다는 것이 자본주의 문제점인데, 대중문화는 그 문제점마저도 마치 가벼운 일인양 웃어 넘기거나 도리어 매혹적으로 보이도록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돈의 권위에 순응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이러한 순응은 분명 권위친화적인 태도를 확산시키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게 아도르노의 생각이었다.
1944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아도르노는 파시스트 프로파간다의 성공을 분석한다. 그는 이 분석에서, 나치의 프로파간다와 캘리포니아의 목사들이 라디오방송에서 한 설교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했다. 이 두 부류는 자신의 연설을 듣는 청중으로부터 권위를 얻어내기 위해 두 단계의 수사적 과정을 활용했다. 첫째, 자신의 나약함을 표명하면서 메시지를 듣는 나약한 청중과 동일시한다. 둘째, 자신이 선택된 소수의 한 사람임을 강조하면서 청취자들이 자신의 권위에 복종하면 이 소수에 동참할 수 있다고 설득한다. 결국 성공한 선동가가 되기 위해서는 '평범함을 강조하는 위대한 소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추종자들과 하나가 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들에게 집단적 희망과 덕목을 강요할 수 있다. 아도르노에 의하면, 히틀러의 천재성은 "킹콩과 이발사를 결합시킨 태도를 보여주었다"[6]는 데 있었다.[7]
이 심포지엄은 아도르노가 1947년에 연구한 '캘리포니아 F지표'로 알려져 있는 성격테스트 개발로 이어졌다. F지표(Fascist scale)는 '권위주의적 성격'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탐색하기 위해 고안되었는데, 아도르노는 이 지표를 사용한 연구[8]에서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았다.[9]
1947년은 또한 호르크하이머와의 공저 『계몽의 변증법』(Dialektik der Aufklarung)을 발표한 해이기도 하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는, 자연을 지배하고자 발달된 인간의 이성(계몽)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을 넘어서서 도리어 인간 자신까지도 지배하게 되는 역설을 밝히고 있다. 가설에 의하면 가치중립적인 과학과 자본주의는 세상을 더 효율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자연을 '수량화'한다. 나무를 있는 그대로의 나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땔감 1개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성의 합리성이 극한으로 확대됨에 따라, 이성의 방법에 불과한 '수량화' 개념 그 자체가 역사적 환경이나 구체적 현실과 관계없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리인 듯 믿어져 따르게 되고, 기어코 인간 자신에게도 이런 '수량화' 개념이 그대로 적용되어진다. 예를 들어, 철수와 영희는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인간이 아니라, 단지 '2명의 노동력'에 불과한 것으로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2명의 노동력은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고 소모될 수 있는 일종의 물건으로 취급된다. 즉,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자연을 효과적으로 지배하는 '인간의 이성'을 발전시켜 왔으나, 결국 이 이성에 인간마저도 효과적으로 지배당하게 됨으로써, 역설적으로 우리 인간의 자유는 사라져버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성의 지배가 인간을 향할 때, 우리는 '그 이성이 무엇을 희망하고 있었던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주장이었다. 이성은 본래 인간의 자유를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만약 '형식화된 이성'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에 대해 어떠한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한다면,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같은 비극은 언제든지 다시 반복될 수 있다.
2.3. 프랑크푸르트로 귀환
나치가 패망한 후, 아도르노는 1949년 프랑크푸르트 대학교로 돌아와달라는 공식 서한을 받고 독일로 귀환했다. 나치에 동조했던 자신의 동포들은 전쟁이 끝난지 얼마지나지 않았는데도 마치 나치가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아도르노는 그들이 지난 과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집단적 부인(denial) 상태에 놓여있음을 목도했다. 캘리포니아에서부터 서류가방에 넣어 들고 왔던 원고였고 1951년 극찬을 받으며 출간된 격언집인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아도르노는 이렇게 쓴다. "재난의 자명성이 변명하는 이들에게 자산이 되었다."[10] 이런 점에서 상징적인 인물은 하이데거였다. 이 위대한 독일 철학자는 나치 당원이었고 나치의 가장 강력한 정신적 수호자로서 자신이 했던 연설들을 공식적으로 단 한 번도 철회하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전후 독일에서 어떤 역할을 의도했다면 그것은 자신의 과오를 고통스럽게 마주하기보다는 도피처를 제공했던 이 침묵과 부인의 문화에 도전하는 것이었다.1950년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 소장에 다시 취임한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아도르노는 연구소의 재건에 힘썼다. 새롭게 바뀐 연구소는 당시 독일에 퍼져있던 침묵의 공모를 조사하기 위한 새로운 사회학적 기획에 착수했다. '집단 실험'이라고 알려진 이 연구는 죄의식과 방어태세를 조사하기 위해, 한 그룹 당 20명 정도의 사람을 모아서 나치에 대해 토론을 하게 만들었다. 1800명의 참가자를 대상으로 1220개에 달하는 토론을 진행하였으며, 참가자들은 전직 군인, 패션전공학생들, 홈리스와 심지어 전 SS요원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아도르노는 이 연구에서 참가자들이 나치 전범의 극악무도함을 의식하면 할수록 더욱 방어적이 되어가는 경향을 발견했다. 일부 답변자들은 유죄를 인정했지만 그것을 개인적인 문제로 환원시키며 자기연민의 주제로 삼았다. 나머지 참가자들은 마치 히틀러와 나치 비밀결사단의 권력 앞에서 무력감을 느꼈다고 암시하려는 듯이 나치의 지도자들에게 죄를 돌렸다. 이 집단토론에 참가한 절반 정도가 나치의 범죄에 대한 죄의식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 연구가 1955년 공개되었을 때 아도르노에 대한 공격이 쏟아졌다. 함부르크의 사회심리학자 페터 호프슈타터는 한 평론에서 아도르노가 전 국민에게 반성을 강요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비판했다. " '한 국가'의 구성원 대다수가 수년 동안 끝없이 자기비난을 해야할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도르노는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수형 집행인의 집에서는 밧줄이란 말을 언급하면 안 된다. 만일 그렇게 하면 당신은 원한에 찬 사람이라고 의심받게 된다."[11]
침묵과 부인의 문화를 겨냥하기 위해 아도르노는 독일의 정신을 대변하는 철학, 그 중에서도 헤겔의 철학을 비판할 필요를 느꼈다. 1966년 출간된 『부정변증법』에서 아도르노는 헤겔을 본격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한다. 헤겔은 변증법적 부정을 옹호했지만 그 부정의 모순을 끝내 화해시켰기 때문에, 그 과정에 잘못이 있더라도 역사발전에 있어서 어쩔 수 없는 단계라고 합리화하는 변명을 제공한다. 그 역사에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절대 정신이라는 큰 목표 앞에서는 모든 것이 정당화되어 버리는 것이다. 헤겔이 "진리는 전체다"라고 말했던 것도 이 의미를 함축한다. 그래서 아도르노에 따르면, 변증법적 부정은 더 이상 화해되어서는 안 되며 어떤 절대적인 목표(절대 정신)에 수렴되어서도 안 된다. 대상의 이해는 고정된 개념으로의 흡수가 아니라, 다른 대상들 사이와의 역사적인 관계 속에서 위치하는 것으로 그쳐야 된다. 아도르노는 여기서 벤야민의 '성좌적 사유'를 빌려 온다. 별과 별의 관계에서 우리는 이야기에 따라 수많은 별자리(성좌; constellation)들을 만들 수 있고, 관계가 변화하면 별자리도 이야기도 달라지므로 이를 통해 동일성의 사유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또한 이런 사유는 과거에 잊혀진 이야기들을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에, 비동일성으로 취급되어 침묵하고 있었던 과거의 고통들에게도 목소리를 부여한다. 즉, 동일성이 자신을 중심으로 나머지 비동일성을 흡수하려는 것은 막으면서, 동일성이 자신의 관점에서 벗어나 수많은 다양한 경우의 비동일성의 관점과 연결되게는 만드는 것,[12] ㅡ 그것이 아도르노의 목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동일성(正)과 비동일성(反)의 동일성(合)'을 추구하는 헤겔의 긍정변증법은, 이제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비동일성'을 추구하는 부정변증법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주장이었다.
2.4. 신좌파와의 대결과 말년
부정변증법은 이제 아도르노의 사유 모델이 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도르노는 이 변증법을 '악의적인 형태'로 경험해야 했다는 것이 그의 불행이었다.[13] 당시 베트남 전쟁과 냉전군사주의로 인한 핵전쟁의 위협으로 학생들의 시위가 상시적으로 벌어졌다. 시위가 일어났던 초기에는 아도르노도 학생시위대들과 연대를 표명했었다. 그 해 6월에는 이란의 독재자인 팔라비가 서독을 방문하는 것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이 쏜 총을 맞고 사망한 오네조르크를 추모하기 위해 아도르노는 학생들을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묵념을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낡은 권위주의적 대학구조 마저도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했고,[14] 강의를 방해하면서 대학의 교원들에게 자아비판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아도르노도 권위주의적인 대학구조를 바꿔야 된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그는 자아비판에 참여하라고 요구하면서 강의를 방해하는 것은 스탈린주의적인 것이고, 폭력과 침묵을 강요하는 전술은 파시즘적인 것이라고 학생들을 비난했다. 비판이론은 그동안 파시즘과 선진산업사회의 행정통제시스템 사이의 유사성을 주장해왔지만, 이 역사적 순간에서 아도르노는 국가의 편을 들면서 이 공화국을 파시스트국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에 맞서게 되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아무리 개선할 점이 많은 민주주의라고 해도, 민주주의의 적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15]고 경고했다.여기에다 불을 붙인 것은 하버마스였다. 하버마스는 당시 학생운동 지도자였던 한스-위르겐 크랄을 상대로 한 「대학과 민주주의」라는 주제의 토론에서, 학생들의 급진적 프로그램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는 반면, 그들의 방법을 문제 삼았다. 그는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혁명을 꾀하려고 하는 것은 '좌파파시즘'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이 발언에 분노했지만, 아도르노는 하버마스의 발언을 옹호했다. 그 결과 ㅡ 그 동안 아도르노가 교육개혁에 대해서 말했던 수많은 지지발언에도 불구하고 ㅡ 그는 독일사회주의학생연맹의 가장 대표적인 표적 중 하나가 되었다. 한 번은 아도르노가 강연할 때 두 명의 학생이 나와서 "베를린의 좌익파시스트들이 고전주의자 테디(아도르노의 별명)에게 보내는 인사"라고 쓴 깃발을 흔들었다. 강연 말미에는 한 여성이 그에게 빨강색 곰 인형을 선물하려고 했다. 실천하지 않는 이론은 인형과 같다는 비꼼이었다.[16] 나중에 아도르노는 이러한 "폭력적인 행위"로부터 꿋꿋이 버텼다고 진술했다.
이듬해가 되자 상황은 심각해졌다. 한스-위르겐 크랄[17]은 학생들의 시위 앞에서도 수업을 강행한 아도르노를 비판했다. 그의 사회학 세미나는 강의개혁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수업거부 외침에 휩쓸려 버렸다. 게다가 크랄이 이끌던 독일사회주의학생연맹의 시위대가 방 하나를 점령했고, 아도르노와 하버마스는 나가달라고 요청했지만 학생들에게 거부당했다. 아도르노는 건물을 점거하면서까지 자신에게 자아비판에 참여하라고 강요하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도르노는 학생시위대를 내쫓기 위해서 경찰을 불렀다. 학생들은 또다시 분노했다. 그들은 "제도가 된 아도르노는 이제 죽었다"고 선언했다. 옛 동료 마르쿠제도 아도르노에게 편지를 보내 학생들의 편을 들었다. 아도르노는 답변에서 이렇게 으르렁거렸다. "마치 그런 모순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는군. (그들의 폭력적인 태도와 실천은) 내재적 이율배반의 힘을 통해 운동이 변질되어서 반대쪽으로 향하지 않겠나? 나는 매순간 현재의 학생운동이 대학의 기술 관료화를 향해가고 있다는 의혹을 갖고 있네. 그들은 관료화를 막겠다고 소리치지만, 사실은 그쪽으로 곧장 향하고 있지."
상황은 점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1969년 4월 22일, 아도르노는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일을 겪는다. "유방 테러(Busenattentat)"라고 불리는 이 유명한 사건의 경과는 이렇게 진행됐다. 강의 도중 두 명의 학생이 그에게, 경찰을 부른 것과 크랄을 상대로 법적 소송을 한 것에 대한 사과와 자아비판을 요구했다. 그때 한 학생이 칠판에 이렇게 썼다. "누가 평생동안 자본주의를 유지하게 만들었던 친애하는 아도르노만이 지배하도록 놔두는가."[18] 다른 학생들은 소리쳤다. "고발자를 타도하라!" 아도르노는 모두에게 5분의 시간을 줄 테니 강의를 계속할지를 결정하라고 했다. 그러자 긴 가죽 재킷을 입은 세 명의 여성시위자가 갑자기 앞으로 나와서 연단 위의 아도르노를 에워싼 채 마치 바바리맨처럼 벌거 벗은 가슴을 노출했다. 그들 중 한 명은 그의 뺨에 립스틱 키스를 시도했고 나머지 둘은 장미와 튤립 꽃잎을 그의 머리 위에 뿌려댔다.[19] 붉어진 얼굴로 격렬하게 몸부림치며 그녀들에게서 벗어난 아도르노는 곧장 모자와 외투를 집어 들고는 강의실을 박차고 나간 뒤 자신의 강의를 모두 취소해버렸다.
2주 뒤 『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아도르노는 자신이 목표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바로 저한테 그렇게 하다니. 모든 종류의 성적 억압과 성적 금기에 반대해 온 저한테 말입니다… 그들은 조롱하려고 저에게 히피 복장을 한 세 명의 소녀를 풀었습니다. 그것은 역겨운 일입니다. 그들이 그것으로 달성하는 희극적 효과는 단지 가슴을 드러낸 소녀를 보고 낄낄대는 속물의 반응이었습니다. 물론 이 바보같은 짓은 사전에 계산된 것입니다."[20] 그리고 자신의 철학이 '실천없는 이론'이라는 『슈피겔』의 지적에는 이렇게 대답했다. "철학은 본질적으로 즉각적인 조치나 변화를 제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 남은 이론은 정확히 변화를 초래합니다. 내가 쓰는 방식(부정변증법)대로 생각하고 쓰는 것도 저항의 한 형태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한 번 쯤은 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론도 진정한 실천의 한 형태가 아닙니까?"[21]
아도르노는 이 사건으로 인해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학교에서 잠시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었다. 그와 그의 부인 그레텔은 스위스의 알프스로 휴가를 떠났다. 긴 산책을 하면서 최근에 겪은 시련을 극복하려던 계획이었다. 주치의가 힘든 활동을 피하라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도르노는 케이블카를 타고 해발 3천 미터로 올라가 스위스의 산악을 등산했다. 하이킹 도중에 그는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날 늦게 스위스 비스프(Visp)에 있는 병원으로 갔다. 그 다음날 그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3.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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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계몽의 변증법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책"
위르겐 하버마스
위르겐 하버마스
"알아들을 수 없는 희망 상실의 절규"
레셰크 코와코프스키
계몽이란, 신화와 무지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성의 힘으로 세상을 밝힌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성'은 사고의 방향을 고정시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과학적', '수학적'인 사고방식만을 통해 이성이 합리적인 도구로 사용될수록, 우리의 '기분'이나 세계의 '분위기' 등의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은 '이성적'이지 않은 것으로 제외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이성'은 '합리성에서 벗어난 다른 생각'들을 막음으로써, 계몽의 체계에서 '동일한 생각'을 교육받게 한다.레셰크 코와코프스키
즉, 계몽은 동일한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며, 동일한 생각의 사회는 '비판'의 능력이 사라져 버린 사회이다. 비판이 사라진 사회란, 나치와 같은 파시즘의 사회와 다를 바 없다. 나치가 합리성을 주장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었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계몽'은 또다른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신화'를 분석해보면, 그것은 계몽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주장이기도 하다. 따라서, 계몽과 신화는 변증법의 형태로 시대에 따라 변화해온 것에 불과하며, 이것의 배후에는 '이성'의 힘을 과신하는 우리의 '사고체계'가 있음을 밝혀낸 것이 《계몽의 변증법》이 된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이성 전부를 부정했던 것'은 아니다. 아도르노는 헤겔의 변증법을 통해 '하나'로 귀결되는 이성의 개념을 문제시했지, 이성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도르노는 '이성'의 비판적 반성적 기능을 중요시하여 새로운 이성 법칙을 구상한다. 그것이 '부정 변증법' 체계이다. 즉, 그는 '이성의 동일화 하려는 힘'을 비판한 것이지(즉, 헤겔의 정반합에서 '합(合)'을 비판), '이성이 가진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의 힘'에 대해서는 결코 비판하지 않았다. 따라서 '기존 이성 체계'[22]의 문제점을 분석하여 '새로운 이성 체계'를 세우는 것이 아도르노의 다음 과제가 되었으며, 이는 '부정변증법'이라는 새로운 비판적 이성체계를 만들게 되는 계기가 된다.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헤겔의 정반합에서 '반(反)'을 끊임없이 수행함으로써, '이성의 동일화(추상화)가 저지르는 폭력'을 막고, 이를 통해 '이성의 합리적 비판 체계'를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68혁명 때 실천을 주장하는 학생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학생들이 '이성적'으로 비판하고 행동했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보기에 학생들은 '비이성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학생들은 행동의 정당성을 '비판이론가'에게 찾지 않고, '비이성'을 통해 '이성 그 자체'를 비판한 '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에게 그 정당성을 찾게 된다. 이런 작업이 70~80년도에 이뤄지면서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같은 철학자들이 주류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23]
3.2. 부정변증법
스피노자가 "(개념의) 규정은 부정이다"라고 주장했듯이 사유체계가 형성되면 그 사유체계 밖의 부정성이 형성된다. 헤겔은 여기서부터 부정을 다시 부정하여 '부정하면서 (원래 개념의 일부를) 보존하여 새로운 개념으로 고양시킨다'(지양)는, 독창적인 변증법 체계를 만들어 내었다. 아도르노는 여기서 시작한다. 헤겔은 이중부정을 통해서 하나로 동일화시키기 때문에 '전체성'의 위험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부정은 하되 하나의 개념으로까지는 동일화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도르노가 주장하는 '부정 변증법'이다.우선 아도르노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대상의 수많은 면을 하나의 개념으로 표현하려는 헤겔식 '이성' 개념을 비판한다. '개념 아닌 것'(고정되지 않는 운동성)을 '개념'(고정)화 하려고 하는데서, 대상의 여러가지면을 동일화하여 하나의 모습으로만 보여주게 되는 '동일화의 폭력'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원래 시간에 따라 '대상'은 무수히 많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이를 개념화할 때는 오직 하나의 모습만을 고정하여 나머지는 그 하나에 다 맞추어버리게 된다. 마치 개인은 제각각 다른 모습을 지니지만 국가가 질서라는 명목으로 하나의 기준을 요구할 때 나타나는 폭력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개념'은 어떻게 '폭력'을 저지르지 않고서, '대상의 변화하는 모습'(개념 아닌 것)을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것은 '개념으로 대상을 표현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반성)'를 통해 가능하다고 아도르노는 말한다. 즉, 주체의 수많은 '반성'은 '개념의 운동'을 만들어내며 이러한 '개념의 운동'을 통해, '대상의 변화하는 모습'에 가까이 갈 수 있다. 예를 들면, A가 맞을까? B가 맞을까? C가 맞을까? D가 맞을까? 등 '개념'의 끊임없는 반성을 통해, 하나의 '고정'된 개념은, 수많은 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통한 '운동'으로 바뀌게 되며, 우리는 이 '개념의 운동'을 가지고 '대상의 변화하는 수많은 면'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 또한 이러한 '개념의 운동'을 두고, 더이상 하나의 '고정'된 개념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평소의 우리는 이런 시도들을 하지 못하고, '기존 동일화된 개념의 사고체계'에 종속되어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어떤 '계기'를 통해 '충격'을 받고 '현기증'을 느끼게 될 때에야, 우리는 '반성'적 사고를 통해 변화하는 대상의 다른 면을 파악하려고 할 것이다. 이를 통해, 반성으로 동작하는 '개념의 운동'과 '변화하는 대상'의 순간적인 일치가 '섬광'처럼 스쳐지나가고, 우리는 여기에서 새로운 깨달음('짜임; 성좌')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잠깐 동안의 '섬광'에도 불구하고 대상이란 '무한'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완전한 이해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유토피아')이다. 즉, '완전한 이해'를 한다고 하는 순간 그것은 또다른 '동일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상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이상향(수만가지로 변화하는 대상)에 끊임없이 다가가지 않으면[24] 그 대상은 반대로 '개념'에 의해 '동일화'되게 되므로, 우리는 '거리두기'와 '다가감'의 끊임없는 변증법을 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정 변증법'이 된다. 그리고 이런 과정 전체에서 대상을 향한 끊임없는 접근(이해)을, 아도르노는 '미메시스'라고 부른다. 즉, 부정변증법의 다른 말이 '미메시스'인 것이다.[25]
따라서 아도르노에게 있어서 개념과 개념 아닌 것은, 헤겔의 이론에서처럼 변증법적인 전복 운동을 통해서 모순이 해소되어 버리는 것(개념의 동일화)이 아니라, 변증법을 통한 수많은 부정(반성)의 시도로 긴장 관계가 끊임없이 유지(개념의 운동)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부정)을 하기 위해서는,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만하는 '타율성'을 방치할 것이 아니라, 개개인들이 각자 스스로의 생각을 지니며 비판할 수 있는 '자율성'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 '부정변증법의 사고체계'로 생각해보자고 아도르노는 권장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객체(대상)는 '나'라는 주체(개념화하려는 의식)에 종속되지 않고, 반대로 '타자'의 주체(개념화하려는 의식)에 '나'라는 객체(대상) 역시 종속되지 않아, 각각의 개개인이 '사물화'되는 것을 피하고, 이를 통해 나치로 대표되는 '전체성'을 경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26]
아도르노가 주도적으로 전개한 비판 이론은 프랑크푸르트학파를 통해 학계의 주류로 우뚝섰고, 이는 현재 철학적 비판 담론의 모태가 되었다. 그렇기에 현대 대륙철학을 이해하려면 『부정의 변증법』을 읽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이 책을 이해하려면 우선 철학계에서 최고 난이도로 손꼽히는 헤겔을 먼저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책의 난이도는 매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4. 어록
자유란 흑백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규정된 선택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다.[29]
형이상학적 변론은 적어도 개념과 현실의 불일치를 통해 기존 질서의 부당함을 폭로했다. (그러나) 과학적 언어의 공평성은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만드는 힘이 무력할 수 있음을 허용하지 않고 그저 기존 질서에 중립적 기호를 제공했다. 그러한 중립성은 형이상학보다 더 형이상학적이다.[30]
5. 주요 저술
제목 | 발간 연도 |
<colbgcolor=#fff,#1f2023>
계몽의 변증법[31] Dialektik der Aufklärung |
<colbgcolor=#fff,#1f2023> 1947년 |
신음악의 철학 Philosophie der neuen Musik |
1949년 |
권위주의적 성격 The Authoritarian Personality[32] |
1950년 |
최소한의 도덕[33] Minima Moralia |
1951년 |
부정변증법 Negative Dialektik |
1966년 |
미학 이론[34] Ästhetische Theorie |
1970년 |
6. 관련 영상
[navertv(1692794)]
|
문광훈 교수의 아도르노의 비판 이론 |
7. 여담
- 아도르노는 젊었을 때 자신보다 11살 연상인 발터 벤야민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아도르노는 벤야민을 스승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35] 이 둘은 서로에게 주고받은 방대한 양의 편지를 남겼다. 쓰고 있는 글에 대한 생각, 머리에 떠오르는 이런저런 구상들에서부터 개인사적 이야기까지 광범위한 주제를 넘나들면서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아도르노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벤야민을 극히 아꼈다. 1939년에 독일 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프랑스 당국은 독일어권의 망명자들을 모조리 수용소로 몰아넣었는데, 이 때 벤야민도 수용소에 갇혀버렸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아도르노는 호르크하이머를 닦달해서 벤야민에게 긴급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고는 벤야민이 뉴욕에 오면 살게 될 집을 보러다니던 참이었다. 하지만 1940년 10월, 아도르노는 친구 구를란트[36]에게서 벤야민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아도르노는 벤야민이 12시간만 더 버텼다면 탈출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어쩔 줄 몰라했다고 한다. 그는 벤야민이 죽음으로서 "철학에서 최고의 것이, 철학이 바랄 수 있는 최고의 것이 상실되었다고" 한탄했다.[37]
- 미국 망명 중이었을 때 할리우드 근처에서 살았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벨상 수상자 토마스 만이 이웃이었다. 토마스 만이 『파우스트 박사』라는 작품을 쓸 때, 아도르노는 이 저명한 소설가에게 음악학 강의를 해주는 등 도움을 주기도 했다. 토마스 만은 감사의 표시로 8장에서 '비젠그룬트(Wiesengrund)'라는 단어를 언급한다. 물론 이 단어는 미국에서는 사용하지 않은 아도르노의 성(姓)이다. 아도르노는 훗날 미국 망명기에 가장 좋았던 일로 토마스 만과 교류했던 것을 꼽았다.
- 젊은 시절 쇤베르크의 제자인 알반 베르크에게 음악을 배운 적 있었는데, 그때 아도르노는 12음 기법을 사용한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에 푹 빠졌다. 아도르노가 작곡한 음악을 들어보면 쇤베르크와 스타일이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다만 아도르노의 음악은 거기서 우울함이 더 느껴진다. 재밌는 것은 미국 망명시 아도르노는 쇤베르크와 이웃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이 만난 것 같지는 않다.[38] 쇤베르크는 쇤베르크대로 자신을 과도하게 치켜세우는 아도르노를 불편하게 여겼다.
- 재즈를 싫어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도르노는 재즈가 독일 상류층의 오락과 같은 것으로서 "살롱음악과 행군음악(행진곡)을 섞어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살롱음악은 사회적 환영에 불과하고 행군음악은 허구적인 공동체를 가리키므로, 재즈에 흑인의 저항의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노예제에 대한 반란의 표현이 아니라, 백인 관객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는 흑인 음악가의 분노에 가득찬 복종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재즈는 자신의 나약함에서 쾌락을 느끼기 때문에, 재즈의 섹스어필은 권위에 반발하는 듯 보이면서도, 그 나약함으로 권위에 대한 복종에 기여한다는 것.[39] 이것은 아도르노가 독일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는 걸을 감안해야 한다. 1920년대-30년대 스윙 재즈는 유럽 각지에서 대인기였는데, 이때의 재즈는 이후 예술적 성격이 강화되는 비밥이나 프리 재즈와는 달리 유흥적인 대중음악에 가까웠다. 오늘날 클래식 음악처럼 마이너화된 재즈를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 영국 망명 시기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도 영국에 있었는데, 아쉽게도 둘은 만나지는 못했다. 비트겐슈타인의 기질과 아도르노의 성마른 성격을 고려하면, 비트겐슈타인은 변증법적 방법에 관심이 없었고, 아도르노는 영국철학의 실증주의를 경멸했기 때문에 그들의 만남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40]
- 아도르노는 1964년 『본래성의 은어』에서,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등의 실존주의 철학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이 개별 철학자들은 '불안'이나 '도약' 등과 같은 용어로 짐짓 광희를 만들어내어 그 속에 편안히 몸을 숨긴 채, 시대의 어둠을 대면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도르노가 보기에 그것은 주관적 내면성에서 지원군을 얻으려고 하는 망상적 경향이었다.[41]
- 칼 포퍼와 싸운 적이 있다. 시비는 칼 포퍼가 먼저 걸었다. 1961년 튀빙겐에서 열린 독일사회학회 개회연설에서 칼 포퍼는 27개의 테제를 제시하면서, 아도르노에게 자신의 테제를 지지하든 반대하든 결정하라고 촉구하였다. 포퍼는 서구의 '열린사회'에서만 과학적으로 객관적인 진리 추구가 가능하고 이로 인해 자유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아도르노는 과학적 진리 추구가 그것 자체만으로는 '과학이 어떤 목적에 사용되는지'를 묻지 않기 때문에 '비자유의 조건'에 연루된다고 보았다. 과학이 일종의 시장이어서 지적인 경쟁과 상호비판 덕택에 가장 최악의 가설들을 걸러낸다는 포퍼의 주장은, 정작 현실에서 '과학의 가면을 쓴 권위주의'를 상대할 때에는 작동되지 않았다. 나치가 인종청소의 근거로 든 것은 다름 아닌 과학이었다. 그래서 과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반박이었다.
- 아도르노는 찰리 채플린를 만난 적이 있다. 채플린을 위해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 채플린의 새 영화 〈무슈 베르두〉의 비공식 상영에 초대받았는데, 이어지는 저녁모임에서 아도르노가 피아노를 쳤던 것. 그 후 채플린도 보답으로 아도르노의 음악을 패러디 연주했다.[42] 재밌는 것은, 아도르노는 자신의 책 『계몽의 변증법』에서 채플린의 영화 〈위대한 독재자〉를 깐다는 것이다. 물론 채플린이 그 내용을 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43]
[1]
'풀밭'이란 의미를 지닌 비젠그룬트(Wiesengrund)는 아버지의 성(姓)이고, 아도르노(Adorno)는 코르시카계 이탈리아인이었던 어머니, 마리아 칼벨리아도르노(Maria Calvelli-Adorno, 1865–1952)의 성(姓)이다. 처음에는 Wiesengrund-Adorno로 병기하다가, 미국에 망명하면서 어머니 성(姓) '아도르노'만 남겨, Theodor Adorno로 이름을 바꿨다. 동료 프리드리히 폴록이 미국으로 건너온 아도르노한테 유대계 성(姓) '비젠그룬트'를 포기하라고 권고했고 아도르노가 이를 받아들였던 것. 미국이 유대인 이민자 수를 제한하는 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한 명이라도 미국 내 유대인 수를 줄일 필요가 있었다. Theodor W. Adorno (W.는 Wiesengrund의 축약)는 전쟁이 끝나고 독일로 돌아와 유명해지면서 공식화한 이름이다. (이순예 『아도르노 : 현실이 이론보다 엄정하다』 한길사, 2015, p.387) (권고한 사람이 폴록이라는 사실은 ㅡ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285 참조.)
[2]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Siegfride Kracauer, 1889~1966) : 1921년부터 독일에서 가장 명망 있는 신문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에서 기자로 일했다. 아도르노는 아마도 크라카우어를 통해
벤야민을 알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3]
아데마겔프의 심리학 세미나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게르하르트 슈베펜호이저 『아도르노, 사유의 모티브들』 한상원 옮김, 에디투스, 2020, p.13)
[4]
『키르케고르, 미적인 것의 구성』이라는 제목으로 출판.
[5]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295
[6]
킹콩은 '위대한 사람'을 뜻하고, 이발사는 '평범한 사람'을 뜻한다.
[7]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391
[8]
총 2099명의 백인 중산층 미국인들이 질문지를 작성하였고, F지표에서 높은 점수와 낮은 점수를 받은 사람들을 초청해서 좀 더 긴 평가면접을 시행했다.
[9]
이 연구는 1950년에 『권위주의적 성격』(The authoritarian personality)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됨.
[10]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384
[11]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386
[12]
아도르노는 이를 '매개(Vermittlung)'라고 말한다. 여기서 '매개'란, 상황과 현실에 따라 유연하게 이론을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상황이 바뀌었는데도 예전에 유용했던 이론을 예전의 방식 그대로 적용해야 된다고 고집해선 안 된다는 것.
[13]
여기서 '변증법'이라는 말은, 자신의 비판이론이 자신에게 적용되는 상황을 말한다.
[14]
당시 학생들은 학사진행 결정권을 학생들에게도 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었다. 대학당국, 교수진, 학생회 삼자가 동등한 권한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개혁안이 나오고 있었다. (이순예 『아도르노 : 현실이 이론보다 엄정하다』 한길사, 2015, p.71)
[15]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481
[16]
아도르노의 별명이 '테디'(테오도어의 애칭)였는데, 곰 인형
테디 베어는 이제 그(테디)가 인형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17]
한스-위르겐 크랄은 아도르노의 박사 과정 제자였으며, 프랑크푸르트 대학 학생운동 조직 SDS의 리더였다. 1968년 1월 학생 시위대가 사회조사연구를 점거할 때 그는 이 운동을 이끌었고, 이 때문에 아도르노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크랄과 학생 시위대는 비판이론가인 아도르노가 자신들을 경찰에 신고하여 해산을 요구했다는 사실에 격분했고, 거꾸로 아도르노는 제자들과 시위대가 우파 기관이 아닌 사회조사연구소를 점거하여 연구와 학술 활동을 방해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아도르노는 이후 알몸 퍼포먼스에 충격을 받고 이듬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 시위 퍼포먼스가 그의 죽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가 몹시 수치심을 느끼며 말년을 보냈으며, 그와 학생운동 진영 사이에 감정적인 간극이 생겼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아도르노가 사망한 다음 해 2월 크랄도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게르하르트 슈베펜호이저 『아도르노, 사유의 모티브들』 한상원 옮김, 에디투스, 2020, p.21~22)
[18]
"Wer nur den lieben Adorno lässt walten, der wird den Kapitalismus ein Leben lang behalten."
#
[19]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세 여성은 페미니즘은 물론 운동권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며, 단지 과격파 남학생이 주도한 기획에 행동대원으로 동참했을 뿐이다. 일명 '가죽점퍼 지부'로 불리던 그룹의 남학생이 공동주택 옆방에 살던 여학생을 끌어들인 뒤 그날 아침에 대학 주변의 카페를 돌아다니며 행동에 참여할 여자들을 모집했다고 한다. 세 여자는 모두 서로 초면이었고 그 이후로도 접촉이 없었다. 그리고 그 테러 이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몰랐다. 옆방에 살던 여학생은 얼마 후 베를린으로 갔고 그곳에서 공부했다. 그 여학생은 테러 순간을 찍은 사진에서 얼굴을 볼 수 있는 중앙의 여학생이다. 나중에 '죽은 뒤 아도르노를 만나면 미안하다고 말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또 다른 한 명은 이름을 추적해 어렵사리 연락이 되었지만 신원을 밝히기를 꺼렸으며 당시 유치원 교사였다는 점만 밝혔다. 나머지 한 명은 누군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이순예 『아도르노 : 현실이 이론보다 엄정하다』 한길사, 2015, p.74)
[20]
이순예 『아도르노 : 현실이 이론보다 엄정하다』 한길사, 2015, p.75 와 해당 인터뷰 원문
# 참조.
[21]
"Philosophy cannot in and of itself recommend immediate measures or changes. It effects change precisely by remaining theory. I think that for once the question should be asked whether it is not also a form of resistance when a human being thinks and writes things the way I write them. Is theory not also a genuine form of praxis?"
#
[22]
칸트와 헤겔, 하이데거와 실존주의까지 모두 해당된다.
[23]
21세기를 넘어서면서부터, 아도르노의 미적 유명론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예술 이론을 연구하면서, 데리다가 주장한 해체주의적 텍스트 이론과 비교하여 연구하는 추세가 증가하고 있다. 이는 아도르노가 문화산업을 비판했던 내용과 궤를 같이 한다.
#
[24]
즉, 끊임없는 이해를 하려고 하지 않으면..
[25]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미메시스'는 '(화가의) 모방'에 불과했지만, 아도르노는 '(화가가) 대상에 접근하고자하는 끊임없는 이해의 시도'를 '미메시스'라고 보았다. 즉, 부정변증법의 미학적 표현이 '미메시스'인 셈이다.
[26]
심지어 아도르노는 부정변증법 자체의 부정 가능성도 인정한다. 다만, 부정변증법을 부정할 수 있는 사회란, 적어도 체계 속의 모든 위계적 관계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교환가치(돈)가 아닌 자신의 사용가치를 통해 관계 맺을 수 있는 사회이어야 할 것이다.
[27]
하지만 나중에 아도르노는 강제수용소 생존자였던
파울 첼란의 시집을 읽고 "고문당한 자가 비명 지를 권한을 지니듯이, 끊임없는 괴로움은 표현의 권리를 지닌다. 따라서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시를 쓸 수 없으리라고 한 말은 잘못이었을 것이다." 라고 정정한다. 그러나 여기서 아도르노가 의미하는 서정시는 사회적 고통이 존재하지 않기라도 하는 듯이 사회적 모순과 고통을 표현하지 않고 그것을 은폐하는 기만적인 예술이기에, 말하고자 하는 바 자체는 딱히 변하지 않았다.
[28]
『미니마 모랄리아』 Minima Moralia, Aphorismus 18.에 나오는 맥락을 보면, richtiges는 '옳음(참)', falschen은 '그름(거짓)'을 뜻한다. 하지만 이것은 삶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려는 의도가 있다기 보다는, 거짓된 삶 속에도 옳은 삶이 있다는 것이 거짓된 삶을 정당화하는 변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9]
테오도어 아도르노 『한줌의 도덕』 최문규 옮김, 솔 출판사, 2000, p.187
[30]
The metaphysical apologia at least betrayed the injustice of the established order through the incongruence of concept and reality. The impartiality of scientific language deprived what was powerless of the strength to make itself heard and merely provided the existing order with a neutral sign for itself. Such neutrality is more metaphysical than metaphysics. (Dialektik der Aufklärung; 계몽의 변증법)
[31]
『계몽의 변증법』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공저이지만, 기여한 지분에는 조금 차이가 있다. 제일 처음에 나오는 논문 「계몽의 개념」은 공동작업이었으나, 첫 번째 보론 「오디세우스 또는 신화와 계몽」은 아도르노가, 두 번째 보론 「줄리엣 또는 계몽과 도덕」은 호르크하이머가 각각 분담한 작업이라고 알려져 있다. Müller-Dohm의 아도르노 전기 참조. (이순예 『아도르노 : 현실이 이론보다 엄정하다』 한길사, 2015, p.390)
[32]
영어로 출판되었고, 아도르노 사후(1973년)에 "Studien zum autoritären Charakter"이라는 제목으로 독일어로 번역되었다.
[33]
한국에는 『미니마 모랄리아』 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34]
유고집 가운데 가장 주목되고 있는 저술이다.
[35]
"나는 벤야민을 정말로 자주, 적어도 매주 한 번은 만났고, 그가 프랑크푸르트에 살던 시기에는 아마도 더 자주 만난 것 같다"고 아도르노는 나중에 그가 크라카우어를 통해 벤야민을 알게 된 1923년 이후의 시기에 대해 썼다. "나중에도 정기적으로 그가 이곳을 방문할 때뿐만이 아니라 베를린에서도 그를 자주 만났다. 그 당시 나는 새파란 젊은 나이였고, 그는 나보다 11살이 많았다. 나는 스스로를 그로부터 배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엄청난 매력을 느끼고 그의 말을 경청했으며, 그에게 상세한 것들을 묻곤 했던 것을 기억한다. 더불어 그가 내게 준, 아직 출판되지 않은 원고들도 보았다." (게르하르트 슈베펜호이저 『아도르노, 사유의 모티브들』 한상원 옮김, 에디투스, 2020, p.14~15)
[36]
나중에
에리히 프롬과 결혼한다.
[37]
이순예 『아도르노 : 현실이 이론보다 엄정하다』 한길사, 2015, p.44
[38]
아도르노에 관한 수 권의 책에서 만났다는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검색을 해도 마찬가지.
[39]
지나친 해석이긴 하지만 아도르노가 추구하는 음악을 살펴보면 이해가 될만도 하다. 아도르노의 음악은 그 유대인 탄압의 시대를 반영하는 듯 우울한데다 불협화음까지 있어 기괴하게 들리는데, 이를 세련된 재즈와 비교한다면 재즈는 허영이 섞여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40]
"아도르노는 영국망명시기에 비트겐슈타인을 만나지는 못했다. 이는 대단히 애석한 일이다. 두 사람은 매우 공통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부정의 철학에 대한 감수성, 문화적 우상타파주의와 비관주의를 공유했다. 참고로 비트겐슈타인의 기질과 아도르노의 성마른 성격을 고려하면, 비트겐슈타인은 변증법적 방법에 관심이 없었고, 아도르노는 영국철학의 실증주의를 경멸했기 때문에 그들의 만남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으리라."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282)
[41]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465 참조. (이 책에서는 『진정성의 은어』라고 번역되어 있으나, 하이데거의 '본래성(Eigentlichkeit)'을 저격하는 책이므로, 『본래성의 은어』로 번역해야 한다.)
[42]
채플린은 음악적 조예가 깊었으며, 당대의 대작곡가들과도 교류가 많았다.
[43]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326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