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04:11:53

태종 이방원(드라마)/역사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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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회차별 탐구
2.1. 1회2.2. 2회2.3. 3회2.4. 4회2.5. 5회2.6. 6회2.7. 7회2.8. 8회2.9. 9회2.10. 10회2.11. 11회2.12. 12회2.13. 13회2.14. 14회2.15. 15회2.16. 16회2.17. 17회2.18. 18회2.19. 19회2.20. 20회2.21. 21회2.22. 22회2.23. 23회2.24. 24회2.25. 25회2.26. 26회2.27. 27회2.28. 28회2.29. 29회2.30. 30회2.31. 31회2.32. 32회

1. 개요

드라마 태종 이방원의 역사적 내용에 대한 탐구 문서이다.

2. 회차별 탐구

2.1. 1회

  • 1회 프롤로그의 양위( 1418년 음력 8월 8일) 부분에 나오는 임금 태종 이방원과 세자 이도(훗날 세종)와의 대화 장면에서 두 사람 모두 빨간색 곤룡포를 입고 등장하는데, 당시에는 세자의 복식이 아직 정립되지 않아서 세자도 신하들이 입는 옷과 동일하게 입었다. 그리고 조선 임금이 확실하게 빨간색 곤룡포를 입기 시작한 것은 이도가 세종으로 즉위하고 26년 뒤인 1444년 명나라에서 빨간색 곤룡포를 보내준 이후부터고, 그 전에는 국보로 지정받은 태조 이성계 어진처럼 청색 곤룡포를 입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리고 이방원의 곤룡포의 용이 오조룡의(五爪龍衣)인데, 이 역시 세종이 즉위한 후에 확립된 관례로, 이전에는 사조룡의(四爪龍衣)를 입었다. #
  • 이방원 이방과를 본 드라마에서 아래처럼 실제 역사대로 표현했다.
    • 당시 전리사의 정랑으로 있었던 이방원은 문인으로서 싸움에 익숙하지 않은 모습을 한 회차에 많이 표현했다. 우선, 궁에서 자신을 잡으려 오던 군사들을 피해서 달아날 때 바로 앞에 풀려 있던 말들을 제대로 컨트롤 못해서 멀리 묶여 있던 말[1]을 잡아 달아날려다 달려온 한 병사와 격투를 벌였고, 그 병사의 가슴에 주먹을 날리지만 병사가 입고 있던 갑옷에 손이 깨지고 이후 일방적으로 내동댕이 쳐졌고[2], 식솔들을 이끌고 동북면으로 향하다가 자신들을 잡으러 온 장수[3]와 싸울 때도 일방적으로 밀렸다.
    • 이방과는 당시 형 이방우와 사촌 격인 이화상( 이성계의 의형제인 이지란의 아들)과 함께 서경(평양)에서 인질로 잡혀 있던 이방과는 이들과 같이 탈출을 할 때, 잡으러 온 병사들을 칼 손잡이와 무술을 능숙하게 사용해 죽이지 않고 기절만 시키고 이성계의 군영이 있는 곳으로 간다.[4] 다만 이들이 인질로 갇혀있는 곳이 창살이 있고 지푸라기가 깔려있어서 흡사 감옥같은 느낌을 주는데, 아직 반역을 저지르지도 않은 아군 장수의 가족, 그것도 이성계 급의 고위 관료의 가족을 감옥에 가두는 것은 무리한 설정이다. 충성심이 의심스러워서 가족을 인질로 잡는다 하더라도 가택 연금 정도로 처리하고 정중하게 대우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다만 이화상이 나와서 형님들이 죽었다고 소리치는 걸 보면 적어도 밖에서 문을 잠근 건 아닌 모양이고, 감옥에 가둔 건 아니지만 창고를 거처로 주어 대놓고 홀대한 것인 듯 하다. 물론 감시는 하더라도 방은 제대로 줄 수 있으니 이것도 과하게 대한 건 맞다.
  • 등청할 때, 이방원이 두 딸(후에 정순공주와 경정공주)의 배웅을 받는데, 이 당시(위화도 회군이 있던 1388년) 정순공주( 1385년생)는 3살, 경정공주( 1387년생)은 1살 정도 되었는데, 드라마에서는 다소 큰 아이들이 나왔다.[5] 또한 이방원의 이복동생인 방번과 방석도 각각 1381년 1382년생이라서 당시 나이로는 7살, 6살이라 어린 축에 드는데, 역시 좀 큰 아이들이 나온다.
  • 우왕 최영 서경에 머물면서 공요군의 동향을 지켜보다가 위화도 회군이 시작되자 개경으로 후퇴하는데, 이 때 최영이 우왕에게 ' 폐하'라는 경칭을 사용한다. 이는 전작인 〈정도전〉에서도 묘사된 바가 있다.
  • 개경에 당도한 공요군이 피아식별을 위해 머리에 띠를 두르고 있다. 실제 역사적으로나 기존 사극에서도 내전시 같은 복장을 한 군대가 피아식별을 위해 띠를 두르고 한 묘사가 있기는 한데 문제는 고려군이 바로 얼마 전까지 치열하게 싸운 적처럼 머리에 빨간 띠두르고 있다. 단순한 드립으로 볼 게 아니라 정치적인 면을 많이 따지는 내전 특성상 바로 얼마 전에 쳐들어온 외적 생각나는 모양새는 민심 뒤숭숭하기 딱 좋다. 여담으로 다음 화에서 서로 싸운 아들들 야단칠 때 이성계가 네 형이 홍건적이냐!고 말하기도 한다. 참고로 정도전의 개경 전투에서도 똑같이 띠를 둘렀기 때문에 피아를 식별하기 위해서 시청자들을 위한 배려로 봐야한다. 다만, 현재 대한민국의 군인들처럼 팔 같은 부위에 띠를 두르는 방법도 있는데 굳이 머리에 두르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라는 반응도 있다.
  • 개경 공방전에서는 이미 제식화된 구포 주화가 쓰였을 가능성도 있는데, 드라마나 실제에서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여기에 병사들이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는데 투석기가 성벽을 때리는, 재현 이전에 현실적으로도 무리가 많은 연출이 나왔다. 당연히 아군을 쓸데없이 죽이고 싶지 않으면, 병사들이 성벽에 근접했을 때에는 투석기는 사격을 멈추는 게 상식이다.[6]
  • 〈정도전〉에서 이방원의 수하로 묘사되는 조영규 조영무가 역사대로 이성계 휘하의 무장이었음이 묘사되었고, 위화도 회군에서도 둘이 선봉에 서서 성벽을 넘어 성문을 열어버리는 활약을 한다.

2.2. 2회

  • 그간 이방원을 다룬 사극에서 지적되던 사항 중 하나로 조영무가 이방원의 수하처럼 묘사되는 게 있었는데 나이상으로나 경력 상으로나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의 직속 부하인 조영무를 함부로 하대하며 다룰 수 없었다. 때문에 직접 다룰 수 없는 위치인 건 물론 이방원도 영무 아재라 호칭하고 하오체 쓰며 존대하는 걸로 묘사된다. 반면 조영규는 하대하며 병력을 빼낼 수 있을 정도로 묘사되는데 조영규는 관직 변천사로 볼 때 평민이나 몰락한 상류층으로 보이는 조영무와 달리 괜찮은 집안이었던 걸로 보여 반대가 더 적절하다. 조영규 역에 조영무 역 김법래보다 젊은 배우를 캐스팅한 걸 보면 드라마는 생년이 전해지지 않는 조영규가 이성계와 거의 동년배인 조영무보다 어리다는 설정인 모양.
  • 위화도 회군 이후 꼭두각시로 전락해버린 우왕이 무장한 병력들을 이끌고 이성계의 저택을 습격한다. 이는 《 고려사》에 기록된 실제 사실이며 〈 정도전〉에서도 다뤄진 일이다. 또한 정도전에서는 처음부터 이성계가 군사를 데리고 기다리고 있던 것과 달리, 여기서는 고려사 내용에 충실하게 조민수와 변안열 집을 차례로 찾았다가 부재 중이어서 이성계 집을 노렸으나 이성계 역시 군영에 있어서 부재 중이었던 것으로 묘사되었다. 다만 극적인 전개를 위해 이성계가 부재중인 줄 모르고[7] 조영무가 이끄는 가별초와 싸우다가 이방원이 데리고 온 조영규의 지원군 때문에 패배하는 것으로 나온다.
  • 우왕의 병력들이 쳐들어와 가별초와 난전이 벌어지자 민씨가 시어머니들과 어린 시누이 등을 안방에 있게 하고 문앞에서 임신한 몸으로 칼을 뽑고 대기한다. 실제로 2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이 타고 나간 말이 혼자 돌아오자 남편이 죽은 줄 알고 자기도 나가서 싸우다 죽겠다며 창을 들고 뛰쳐나갈 정도로 대단한 여걸이었다.
  • 우왕이 폐위되어 강화도로 떠날 때 옆에 말을 탄 여성이 함께 있다. 우왕의 귀양살이는 물론 우왕 사후에는 시체를 끌어안고 자고, 생전처럼 식사를 올리며 통곡했다는 영비 최씨(최영의 서녀)로 보인다.
  • 이성계가 대업에 참여하고 싶다는 이방원을 만류하며 세상의 욕은 다 들어먹어야 한다는 대목에서 저자거리를 잠행하는 장면이 회상되는데 장사꾼이 돼지고기 썰며 성계탕을 호객한다. 이전 장면에서 최영이 끌려가는 것을 보며 백성들이 통곡하는 모습과 더불어 개경의 민심이 얼마나 악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위한 각색.[8] 실제로 일제강점기에 최영을 신으로 모시던 개성 덕물산 부락[9]에서 돼지고기를 '성계 고기'라고 부른 기록이 확인될 뿐이다.
  • 이방원의 부인 민씨가 창왕이 즉위한 뒤 아들을 출산했는데, 출산 전에 민씨가 "핏덩이를 둘이나 잃었다."라든가.“또 아들이다. 이번에는 잘 기르겠다.”란 말로 이제(훗날 양녕대군) 바로 앞에 태어났다는 걸 알 수 있고 역시 일찍 죽은 세 번째 아들임을 알 수 있다.
  • 대하 사극이 나올 때마다 지적이 되어오던 부분 중 죄인을 소달구지로 귀양을 보내는 장면이 해당 회차에서 최영이 귀양을 갈 때 나왔다.[10] 보통 귀양은 걷거나 여유가 좀 있으면 우왕처럼 말을 타고 갔으며 소달구지는 사형수를 끌고 갈 때나 사용했다. 그런데 이런 인식은 조선시대에도 있어서 소달구지에 실려 사형장에 끌려가는 죄수가 "지금 어디로 귀양을 가는 것이냐?"고 묻자 주위에서 듣고 가엽게 여겼다고 한다.
  • 신하들은 관모로 1화에서부터 둥근 사모를 쓰고 있는데 왕은 관모로 각진 절상건을 쓰고 있다. 전작 정도전에서는 신하들의 관모가 각진 복두일 때는 각진 절상건이었다가 신하들의 관모가 둥근 사모로 바뀌면서 같이 둥근 익선관으로 바뀌는 것으로 묘사되었었다.
  • 우왕은 폐위되어 쫓겨날 때까지 계속해서 왕으로서 '폐하'란 경칭을 받으며, 강화도에 유배된 후 김저와 정득후를 불러 이성계 암살을 사주하는 장면에서 우왕이 두 사람에게 '상왕 폐하'라고 불린다. 이 당시 우왕은 상왕이란 작호를 정식으로 받지는 못했으나 우왕의 사람들인 두 사람 입장에선 충분히 우왕을 상왕이라 부를 수 있는 일이다.[11]
  • 마지막 부분에서 팔관회가 CG 등을 통해 짧게 묘사되었다.

2.3. 3회

  • 우왕의 암살 사주를 받고 이성계의 자택에 잠입한 김저와 정득후가 곽충보의 배신으로 인해 암살에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역사대로 정득후는 도망치다 군사들한테 포위당하자 스스로 목에 칼을 그어서 자결을 했고, 김저는 현장에서 곧바로 붙잡혔다.
  • 김저 사건을 저지하는 것과 '폐가입진론'이 모두 이방원의 공으로 묘사된다. 실제로는 당연히 이성계와 참모들이 의논해서 결정했을 것이지만, 전주 이씨 집안 사람들을 주역으로 그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면서 정도전, 조준, 남은, 정몽주 등 기존 여말선초 드라마의 주역들이 모두 최소한의 역할만 하고 빠지는 캐릭터로 묘사되면서 나온 전개. 문제는 개국 전의 모든 정치적 격변 속 핵심 사건들의 비중을 이방원에게 몰아주다보니 역성 혁명의 다른 주역들은 거의 공기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전락하고, 이방원 혼자 모든 것을 다 해결하는, 실제 역사와도 맞지 않고 개연성도 부족한 전개가 이 회차 이후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 정몽주가 창왕 폐위 이후 이성계와 반목하는 묘사가 나온다. 정몽주는 공양왕을 옹립한 흥국사 9공신 중 한명이며, 정몽주가 본격적으로 이성계와 척을 지기 시작한 건 이성계를 돌려놓는 게 불가능함을 알고 난 뒤이다.
  • 공양왕은 역사대로 공양왕 이성계에 맞서며 대항마로 이색과 변안열을 중용하면서 이성계와 그 일파를 싫어하는 티를 대놓고 냈다. 그런 공양왕이 3년 가까이 버티고 이성계가 실권을 틀어쥐고도 쉽게 쳐내지 못한 건 즉위 명분 때문이다. 이성계 본인이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명분이 '왕을 참칭한 신씨를 폐하고 진짜 왕을 세운다.'였고, 즉위 절차도 철저하게 밟아 정통성을 갖추게 해주었다.[12] 합당한 정통성을 갖춘 사람이 선양을 해야 받는 사람의 명분과 자격도 확실해지니까. 사돈 댁인 공양왕이 순순히 선양해 주는 줄 알고 세운 계획이었는데 공양왕은 초장부터 선양할 생각이 없음을 명백하게 드러냈다. 그렇다고 끌어내리자니 실권을 다 틀어쥔 이성계가 진짜 왕씨를 세운다며 스스로 세운 왕이고 재위 기간도 짧아 폭정을 명분으로 폐위하기도 마뜩찮았다. 결국 다 포기하고 혼군이라 왕 자격이 없다며 어거지로 끌어내렸는데 이는 폭군을 몰아낸 반정도 아니고, 천명을 받는 선양도 아니었다. 이로 인한 명분 부족은 조선 개국 세력의 위기감을 가중시켰고, 결국 왕씨 제거로 이어진다. 그러나 문제는 공양왕이 속으로는 이성계 일파를 싫어하고, 끝까지 대항하려 했다고는 해도 겉으로는 즉위를 한 첫 날부터 그것을 티낸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고려사를 봐도 공양왕은 즉위 첫 날부터 눈물을 흘리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했고, 나중에도 남면하지 않으려 하는 등 자신은 정치적 욕심이 없다는 것을 최대한 어필하려고 했지, 드라마처럼 이성계와 첫 날부터 대립각을 세우지는 않았다. 실제로도 정치판에서 저런 식으로 첫날부터 '나 너 싫어'를 드러낸다는 것은 아마추어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리고 목소리가 작다며 이성계 길들이기를 하는 묘사도 고려, 조선 시대 정치판의 모습과는 백만광년 떨어져있다. 이걸 편수가 압축돼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호하는 경우도 있지만, '편수 압축'은 개연성 부족을 설명하는 전가의 보도가 될 수 없다.
  • 왕에 대한 경칭이 다시 격하되어 '전하'라고 불린다.
  • 이방원이 정몽주를 스승으로 칭하는데, 실제로 정몽주가 이방원의 스승이었다는 기록은 없다. 마찬가지로 극 중 묘사처럼 정도전을 숙부라고 부른 기록 역시 없는데, 정도전에서의 각색을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2.4. 4회

  • 변안열이 도중에 이방원에게 겁을 먹은 공양왕에 의해 조정에서 퇴출되는데, 변안열은 창왕 시절에 이미 유배를 갔기에 잘못된 묘사다.
  • 역사대로 폐위된 우왕과 창왕의 처형을 공양왕이 주도하고, 이성계는 반대하는 모습이 나왔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는 자신의 정통성에 방해가 되는 이들이 살아있어봐야 좋을 것도 없고, 죽이면 자신의 정통성은 강해지기에[13] 행한 일이라면, 드라마에서는 이방원의 협박에 겁을 먹고 시행한 것으로 묘사되었고 이후 해당 회차의 후반부를 보면, 먼치킨 주인공이 다 해먹는 식의 전개는 아니고 지나치게 급한 젊은 이방원의 미숙함을 드러내고, 형제 간의 갈등을 극대화시키는 장치로 활용되었다.
  • 우왕 창왕이 기록대로 참수당한다. 특히 창왕의 참수를 묘사한 것은 여말선초를 다룬 사극 중 처음이다.[14] 다만 그 잔인성 때문인지 우왕에 비해서는 곱게 죽는 것으로 묘사되었다.[15]
  • 이방우가 고려에 충성해야 한다며 아버지 이성계에게 울면서 개국을 반대하고, 동생 이방원을 직접 죽이고 역성혁명을 끝내려는 시도를 하다가 비통해하며 멈춘다. 이후 "고려에 불충하는 것이 아닌 새 왕조에 헌신하는 것이며, 새 왕조를 세운 이들은 모두 역적이다.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 역시 반란으로 나라를 세웠다."라는 방원의 설득에 넘어간다. 또한 동북면으로 돌아가려는 것을 동생 방원과 함께 가로막으며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다. 아버지를 열심히 거들고, 조선 건국 이후에도 맏이로서 역할을 한 고려 말, 조선 초기 기록과 조선 후기에 지어낸 '고려 충신설'을 섞어서 각색한 것이다. 참고로 이방우의 '고려 충신설'은 17세기 이지란의 후손들이 발간한 문집에 처음 등장했으며, 이후 18세기 장릉 배식단, 이충무공전서, 유몽인 복권 등 온갖 충신 선양 사업을 하던 정조의 눈에 들어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고 한다.

2.5. 5회

  • 피카레스크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윤이·이초의 옥사를 이성계와 정도전 측의 일방적인 무고로 묘사하였는데, 물론 관련자들을 줄줄이 엮어넣는 행위는 무고가 맞으나 윤이·이초의 옥사 문서에도 나왔듯, 윤이와 이초가 실제로 이성계를 터무니없이 무고한 것이 사실이다. 만약 이성계 측이 일방적으로 지어낸 이야기라면 중국에는 이와 관련된 일이 없어야 하지만 종계변무라 하여 이들이 어처구니없게도 "이성계는 권신 이인임의 아들이다"라고 무고한 것이 실제로 사실인 것처럼 중국 역사서에 기록되었고 수정되지 않아 조선이 지속적으로 수정을 요청하고 마침내 선조(...) 대가 되어서야[16] 수정이 이루어지게 된다. 즉, 반이성계 파가 실제로 일으킨 나라 망신이자 매국에 가까운 행동이었으며, 정도전 측이 다수를 마구 얽어넣어 문초한 것도 정치적 이유가 있었을지언정 충분히 그럴 만했다.
  • 정도전과 정몽주가 '윤이 이초 사건'을 계기로 대립을 겪으며 갈라진다. 정몽주가 정도전에게 '훗날 큰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경고하나, 정도전은 비웃는 표정으로 무시한다. 개국 후 정도전이 맞이하는 운명을 예고했다고 볼 수도 있다.
  • 이색 권근 등이 고문받는 장면에서 주리틀기가 나오는데, 정강이가 아닌 허벅지를 조이는 식으로 묘사된다. 원래는 정강이를 비트는 것이 맞다. 또한 해당 형벌은 조선시대에 명나라로부터 전래되었기에 한국 사극의 고질적인 오류라고 볼 수 있다.
  • 이방원이 장인인 민제에게 가르침을 얻는데 실제로 이방원의 과거제 스승은 민제였다. 극 중 민제가 민씨 집안에서 이성계가 왕이 되면 곧 이방원이 후계자가 될 것이며 가문의 앞날이 더 좋게 될 것이라며 화기애애 한다. 훗날 이방원이 왕이 된 후 어떤 운명을 맞이하는지 생각하면 최후의 만찬이 될 것이라는 암시이다.
  • 정몽주가 공양왕과 협력하고 다른 대신들과 함께 카리스마를 뿜어내며 '고려를 지키려는 이들이 아직 많다.'라는 메시지를 이성계에게 전달하라며 이방원을 압박한다. 이는 개혁파와 보수파로 나누어진 당대 사대부들 중 보수파의 수장이 사실상 정몽주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 5회 후반부부터 6회 초반까지 폭우가 쏟아져 청주성이 물에 잠기는데, 이는 드라마의 창작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사건으로, 이색, 권근 등 수감됐던 사람들은 감옥 앞 나무에 올라가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실제 사건 당시 이색과 권근 등을 구한 그 나무는 지금도 살아 남아 충청북도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옛 청주 관아가 자리해 있는 청주시 상당구의 청주중앙공원에서 볼 수 있다.

2.6. 6회

  • 윤이, 이초의 옥사의 종료 날짜인 1390년 11월과 한씨의 사망 날짜인 1391년 10월 21일까지 약 1년 남짓의 시간이 존재하나 드라마상에선 그 시간의 흐름이 자세하게 묘사되지는 않는다. 또한 정몽주 일파의 간관 김진양은 옥사의 중대함을 논하다가 이를 경솔히 누설하였다 하여 헌사(憲司)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고, 1391년에서야 겨우 조정으로 복귀하였는데, 드라마에선 빠른 진행을 위해 이 과정을 생략하였다.
  • 본래 역사에서는 정도전이 유배를 가게 될 때에 봉화로 가기로 예정되었으나 곧 나주로 귀양 목적지가 바뀌며, 1392년 봄에 공양왕이 정도전을 즉결처벌하라는 정몽주의 요구에 반대하여 고향인 영주로 가게 되나 이성계 낙마 직후 김진양의 상소에 의하여 남은, 윤소종 등과 함께 유배형에 걸쳐서 옥에 갇혀 처결될 신세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드라마상에선 정도전의 유배지 이동 과정이 생략되었다.
  • 이방원이 극 중 삼년상을 치르게 되는데 실제로 1392년(공양왕 4년) 3월 당시 이방원은 친어머니의 삼년상(1391년 사망)을 치르고 있었다. 유교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던 시대이지만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역사가 깊은 전통이었으며 정몽주가 삼년상을 치른 이후 더욱 유행하였다. 극 중 이성계는 자기 가문의 이름이 유자들 사이에서 높아진다는 이유로 이방원에게 3년상을 치르기를 명하는데, 실제로 이방원은 시묘살이까지 하면서 그 이름이 높아졌다. 다만 정몽주가 그를 맞이하러 온 것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창작이다.
    여담으로 드라마에서는 한씨의 묘가 산 꼭대기 부근에 자리했는데, 실제 신의왕후 한씨가 묻힌 제릉은 당시 고려의 수도 개성 인근인 개풍군 상도면에 자리해 있다.
  • 정몽주가 이방원 옆에서 한씨를 회상하며 이성계와 함께 전장을 누볐던 시절에 대해 얘기하는데, 실제로 정몽주 역시 여러 차례 전투 경험이 있었다. 1380년 이성계와 함께 왜구를 토벌하는 데에 참여했고, 이성계가 왜구를 싹쓸이한 황산대첩 때에도 이성계의 부장이었다.

2.7. 7회

  • 이성계가 해주로 가 명에 다녀온 세자 왕석을 맞이한 후 배웅한 후 사냥에 나섰다가 낙마 사고를 당하고 쓰러진다. 이로 인해 정몽주와 보수파 사대부는 이성계 일파에 대한 탄핵 상소를 써서 화를 입히고, 공양왕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심문을 명한다. 이는 《 고려사》에도 기록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다.
  • 이성계가 낙마 사고를 당한 후 이지란이 '마파리'와 '아지'라는 만주어[17]를 쓰며 제발 살려달라고 통곡한다. 쌍성총관부 출신에 귀화한 여진족이라는 점을 반영했다. 그런데 이런 만주어 대사를 외치기 전에, 드라마에서 혼용하는 우리말 대사 역시 현대 한국어가 아니라 당시의 중세 한국어로 써야 한다는 점에서 연출이 다소 어색했다는 지적도 있다. 그렇다고 중세 한국어를 쓰자는 게 아니라, 만주어 장면이 불필요했다는 평.[18]
  • 이성계의 부상을 틈타 정몽주가 정도전측을 강경하게 숙청하려 하지만 공양왕이 처형을 불허한다. 이에 정몽주는 처형을 윤허받기 위해 고문을 지시하고 그와중에 고문 충격으로 죽어도 된다는 극단적인 지시를 내린다. 실제로 정몽주가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고문 받은 자가 살아 있으면 안된다는 지시를 내렸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정몽주 사후에 정권을 잡은 정도전 일파가 남은 정몽주 일파에게 이 방법을 그대로 써먹어 숙청에 성공한다.
  • 이성계가 부상 당한 틈을 타 정도전 등 당여들이 숙청되는 위기가 닥침에도 이성계가 끝까지 정몽주를 처치하려 하지 않자 이방원이 우리끼리 처리하자고 나서고 다른 가족들도 동의하지만 이지란이 누가 형님 뜻을 거스릴 것이냐며 나서서 반대한다. 실제로 이방원이 정몽주를 해치우자는 의견을 냈을 때 이지란은 “우리 공께서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습니까?”라며 반대를 분명히 했다. #

2.8. 8회

  • 선죽교 사건은 (아무도 이씨 가문에 거역하지 못하게 하려는 이방원의 의도가 반영되어) 백주대낮에 일어나는 것으로 묘사된다. 정몽주가 죽은 시간과 장소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의 죽음이 유력하며, 전기가 없는 고려시대에 그러려면 퇴청하고 문병을 다녀왔다는 기록까지 더해 늦은 오후 정도로 보는 게 타당하다. 정몽주가 말을 타고 가다 무사들을 만나자 말을 박차 달아나려고 시도하는 묘사는 태조실록 총서의 기록을 정확히 반영했다.
  • 조영규가 정몽주를 죽일 때 사용한 철퇴는 자루에 긴 사슬이 달려있고 그 끝에 가시 박힌 철구가 달려있는데, 이는 한국 전통 철퇴보다는 서양의 플레일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이는 용의 눈물에서도 나타난 오류이다. 사실 마상편곤 같은 형태와 달리 저렇게 사슬이 긴 형태는 스웡 잘못 돌리면 자기가 맞는다. 특히나 말달리는 불안정한 자세에선 더더욱.
  • 실제 역사에서 이방원의 정몽주 암살 계획은 이미 정몽주도 알고 있었다. 이성계의 일파지만 정몽주의 제자이기도 했던 변중량이 이방원의 계획을 듣고 사전에 정몽주에게 알렸지만 정몽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계를 만나러 간다. 극 중에선 변중량이 애초부터 등장하지 않으며, 그나마 김진양이 가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지만 정몽주는 끝까지 암살 계획을 모른다.[19]
  • 이방의와 이방간이 가별초를 이끌고 와서 몰려있는 백성들과 정몽주의 제자들을 강제로 해산시킨 뒤 정몽주의 시신을 효수하는 데 실제 정몽주를 역적으로 선포하고 효수한 기록을 반영한 것이다.
  • 어디까지나 야사인 하여가 단심가는 깔끔히 생략. 그런 뉘앙스를 띠는 대사는 이전에 몇 번 등장했으나 두 시조가 직접 등장하지는 않고, 미니 다큐에서 짤막하게 다루어지는 정도로 넘어간다.
  • 정몽주의 죽음 직후 이방과가 이화, 이제와 함께 공양왕에게 찾아가서 정도전 일파를 석방시키고 김진양을 국문에 처해달라고 공양왕을 압박한다. 실제로 이때는 이방과가 주도해서 '자신들을 처벌하든지 아니면 정몽주 일파를 처벌하든지 해달라며' 공양왕을 압박했다. 이화, 이제는 이방과가 이끄는 친위무장세력의 핵심이고 정몽주 제거논의에도 참여한 만큼 같이 나오는 게 이상한 묘사가 아니다.
  • 기존 여말선초를 다룬 사극들과 달리 정몽주 참살 사건의 계획부터 실행까지 주모자가 이방원으로만 묘사되지 않는다. 정몽주 참살의 주체는 이성계, 이지란을 제외한 전주 이씨 일가고 이방원은 그중 이성계의 미움을 사기 가장 좋은 살해자 역 맡는 것으로 묘사되며 상술한 형제들의 역적몰이 공작은 다 끝나고나서야 전모를 들었을 정도로 살해역 이외에는 비중없는 모습을 보인다. 이전까지는 이방원을 사건의 주체로 다루었다면 이번에는 사건을 일으킨 다수의 일원일 뿐이라는 시각인 것이다. 조선 개국 과정에서 기록된 이방원의 공적이 과장되었다는 지적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으므로 개연성은 충분하다.[20]
  • 이방과에게 고문받는 장면이 나오는 김진양은 실제로 국문을 당해 정몽주, 이색, 우현보 등의 사주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그후 장 100대를 맞고 귀양갔다 후유증을 버티지 못하고 사망.
  • 태조실록에 의하면 강씨가 이방원의 말을 듣고 이성계에게 이방원을 용서해달라고 하지만 본작에선 기록을 각색하여 겉으로는 그리 말하되 속으로는 한씨 소생의 아들들을 이성계로부터 멀어지게 책략을 썼다고 묘사된다.
  • 당시 11살, 10살이었던 이방번과 이방석을 이 시점부터 성인 배우가 연기하는데, 빠른 진행상 몇 화 지나지 않아 왕자의 난이 방영되고 두 형제는 그 때 자식을 둔 시기라서 아역을 생략하고 빨리 내보낸 것으로 보인다.

2.9. 9회

  • 대신들이 국새를 들고와 왕이 되줄 것을 간청하자 이성계는 그럴 수 없다며 거부하는데 실제로 대신들이 찾아오자 이성계는 제왕의 일어남은 예로부터 천명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실로 덕이 없으니 이를 감당할 수 없다라며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고 국새를 받아 즉위했다.
  • 이방번이 왕씨 가문과 혼인했다는 이유로 세자 책봉에서 탈락한다. 물론 이런 사유로 탈락한 것은 맞지만, 가장인 태조가 정한 혼인을 대놓고 거론할 순 없으니 성격 문제[21]를 거론하며 제외됐다.
  • 공신책봉에서 왕자들을 제외한 조치가 철저히 이성계의 의지로 그려진다. 정도전이 적극 개입해 처리하는 기존 사극들[22]보다 정확한 반영이다. 태조는 공신책봉, 후계자 선정, 천도 모두 자신의 의지대로 처리했다.
  • 여타 여말선초 사극들과는 달리 즉위식에 한씨 소생 왕자들이 쫓겨나 궁궐에 들어가지도 못하는데, 실록 기록에서도 왕자들이 참여했다는 기록이 없기에 이에 대하여 과감하게 각색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 이성계의 즉위식 장면에서 나레이션의 목소리로 이때 시기가 '음력 7월'이라고 나오는데, 잘 보면 배우들이 말할 때 입김이 나온다(...) 이는 드라마 촬영 시기상 어쩔 수 없었던 문제로 보인다.[23]
  • 군신동맹 제의가 생략이 된 채 공양왕이 폐위된 뒤 기록대로 원주로 유배된다.
  • 실제 역사처럼 이성계는 즉위를 치르고 한동안은 수창궁의 정비와 여론 악화 문제 때문에 자신의 자택에서 궁궐로 출퇴근하는 것을 반영했다.
  • 세자 책봉 문제에 대해서 태종실록 조준의 졸기에 적힌 부분을 채용하여 조준이 나라가 평안할 때에는 적장자를, 그렇지 않을 때에는 능력이 있고 개국에 공헌을 가장 많이 한 자를 세자로 삼아야한다며 이방원을 적극적으로 밀었다.
  • 이전의 여말선초를 다룬 작품들처럼 이번 작품의 이성계 역시 즉위 후에 청룡포를 입고 있다. 그리고 관모로 둥근 익선관을 쓰고 있다.[24]
  • 조정에서 세자 책봉 관련 논의를 하던 도중 밖에 있던 강씨가 대화에 끼어들면서 이방석이 세자가 되는 것이 잘못이냐며 따지는데, 이는 조준의 졸기에서의 기록에 대한 각색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태조가 처음에 배극렴, 조준, 정도전과 의논할 때 갑자기 중전 강씨가 침전 밖에서 큰 소리로 통곡을 하는지라 태조가 무안군을 단호히 세자를 지목했다. 그러나 배극렴, 조준, 정도전이 퇴궐한 이후 다시 의논한 끝에 태조를 알현한 자리에서 방석을 밀었고 이에 이방석이 세자가 된 것이다.[25]
  • 이성계를 즉위시키기 위해서 신하들이 이성계의 집으로 찾아가서 국새를 바칠 때, 국새를 들고 있는 이가 정도전인데, 사실은 당시 신료들 중에서 연장자이던 배극렴이었다. 회수제한으로 등장인물을 쳐내며 배극렴이 등장하지 않아 정도전이 대신한 것.[26]
  • 2010년대 사극들을 보면 왕자들을 개국과 동시에 군호, 그것도 대군 마마로 부르는 오류를 일상적으로 범했는데[27] 아직 군호도 내리지 않은 개국 바로 직후임을 반영하여 누구누구 왕자라 부른다. 마찬가지 이유로 왕자 신분인 방원에게 이지란이나 민제가 편한 반말투로 대한다.
  • 예전 사극들에서 왕자나 공주들이 왕과 왕비를 아바마마, 어마마마라고 부르는 오류를 일상적으로 범했었는데, 여기선 전하, 중전마마 등으로 부르며 제대로 반영했다.
  • 강씨부인이 이성계에게 "자식을 살리려거든 절대로 어여삐 여기지 말라"고 말한 대목이 있는데, 이 당시의 '어여쁘다'는 예쁘다는 뜻이 아니라 가엾다는 뜻이므로[28] 예쁘게 여긴다는 의미에서 쓰는 단어로는 옳지 않다.

2.10. 10회

  • 이방원의 아들이 죽으면서 이방원의 장모인 송씨가 아들이 3명이나 죽었다라고 언급하였다.
  • 이방번이 경순공주에게 왜 자신이 형인데 세자가 아니냐며 분노를 터뜨리자, 이에 경순공주는 네가 고려 왕씨와 혼인을 해서 그런 거라고 다시 설명해주었지만, 자기가 결정한 혼사였냐고 분통을 터뜨리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실록에 따르면 방번은 방석이 방원에 의해 살해당할 때 자기 동생을 지키기는커녕 오히려 방석의 죽음을 방조하였으니 방번이 실제로 세자 책봉에 강한 불만을 품었을 가능성이 높다.
  • 왕자들에게 군호가 내려지면서 그들도 군호대로 불리게 된다. 다만 여타 여말선초 사극들처럼 이방석이 의안군[29]으로 칭해지는데, 의안대군이라는 군호는 숙종 때 추증된 군호로, 이방석을 당대에 그렇게 부르는 것은 잘못된 묘사다.[30]
  • 이방석이 홍룡포를 입는데, 세종 대 이전까지는 왕세자의 곤룡포가 정해지지 않았고 성종 대까지 옷감이 명나라로부터 내려오지 않았다. 따라서 세자 시절의 이방석은 조정의 신하들의 옷처럼 용보가 붙지 않은 관복을 입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는 작품에 나오는 모든 조선 초기 세자들에게서 발견된 오류지만, 정황상 세자가 누구인지 구분하기 힘들다는 한계가 있기에 기존 사극들의 묘사를 따른 것으로 추측된다.
  • 강씨 왕비로 책봉될 때 기존의 여말선초 사극들과 다르게 이 당시 왕비의 대례복으로 활용되었던 적의(翟衣)와 칠휘이봉관(七翬二鳳冠)이 나오지 않았는데 이는 정황상 2020년대 들어 심해지고 있는 중국의 한복 공정 논란을 피하기 위한 제작진측의 선택인 걸로 추정된다. 우리가 흔히 조선 시대 왕비의 대례복 하면 가장 보편적으로 떠올리는 대수머리와 대홍색 적의(翟衣)가 아닌 중국 명나라로부터 직접 도입한 용봉관(龍鳳冠)과 심청색 적의(翟衣)를 왕비의 예복으로 활용하고 있었다.[31] 만약 나왔다면 중국의 국수주의적 성향을 띄는 소분홍들로부터 “왜 중국 명나라옷이 한국사극에 나오냐”, “한국은 중국옷을 입었으니 중국의 속국이다” 등등 별 헛소리를 들으면서 공격을 받을 확률이 높다.[32] 다만 이렇게 따지면 왕비의 대례복 뿐만 아니라 왕과 신하의 대례복도 중국 한족 왕조의 영향이라는 점에서 소분홍들의 트집잡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무엇보다 중국의 한복 공정은 2010년대 후반 이후로는 조선 전기 한복보다 구한말 한복에 집중되는 경향이 강하므로[33] 모든 한복이 소분홍들의 트집잡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더군다나 이후에 나온 민씨의 왕비 책봉 장면에서는 민씨가 칠적관만 안 썼을 뿐 적의는 잘만 입고 나왔다.[34][35]
  • 현빈 류씨가 자신이 아직 세자빈에 책봉되지 않은 것에 대해 세자 책봉문에 몇 자 더 적으면 되는 것을 해주지 않았다고 내시에게 불만을 표한다. 원래는 왕비든 세자빈이든 부인의 책봉도 엄연히 독립적인 것으로서, 남편의 책봉에 끼워넣는 게 아니라 별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정상이다. 신덕왕후도 저번 회에서 이성계와 같이 등극하지 않고 이번 회에서 별도로 책봉을 받았다. 철없는 현빈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 정황상 이 내시는 간통을 저지르게 되는 이만으로 보인다. 그리고 12화에서 이만으로 확정되었다.

2.11. 11회

  • 명나라 황제가 사신을 통해 화령과 조선 중 하나로 정하고, 사신을 통해 전달한 요구를 모두 묵살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태조실록에 기록된 즉위 초의 사실을 그대로 가져왔다.
  • 이방우가 잠깐이나마 조선의 세자가 되고 싶었던 욕망을 품었다고 말하면서 조선 후기에 받아들여진 야사에 불과한 고려 충신설과 대치되는 해석을 그려냈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선 이방우가 고려에 충심을 가졌다고 볼 여지가 없다. 더불어 방우가 고려의 충신과 조선의 다음 왕을 두고 크게 갈등하며 자학하다가 몸이 약해진 것으로 묘사했는데, 이제까지 고려의 멸망을 슬퍼하며 병사한 것으로 묘사한 것과 큰 차이가 있다. 고려 충신설과 야심설을 적절히 뒤섞은 묘사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신덕왕후가 이런 이방우의 심리를 찔러 은둔하게 했다는 묘사가 추가되었다.
  • 즉위 직후 왕자와 종친들을 중심으로한 군권 재편이 잠시 다뤄졌다. 방과가 의흥친군위 절제사로 임명받는데 왕자들과 사위의 군호를 정하면서 이들의 절제사(節制使) 임명도 병행해 이방과와 이방번, 이제가 함께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임명되어 친위군의 중추가 되었다.
  • 이방원이 가별초 500호를 받았다가 이를 도로 양보한 것은 실록에 기록된 사실이다. 실록에선 이방원이 방번에게 양보하자 방번이 사양하지 않았고, 이성계가 따로 돌려주란 말을 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으나 실제론 명에 따랐다고 봐야한다. 구체적인 시기는 나오지 않으나 이방원이 명으로 떠나기 3개월 전쯤인 태조 3년 2월 말에 정도전이 군제개편을 제안했기에 이때쯤으로 추정된다. 가별초는 이방번이 넘겨 받았고, 방원은 전라도 절제사로 전임되었다가 명나라 사행길에 나선다.
  • 나라 사람들이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인 것을 두고 이성계가 시켰다고 오해한다는 강씨의 언급이 나온다. 실제로 태조실록에서 이성계는 정몽주를 죽이라고 시킨 이방원에게 나라 사람들이 본인이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냐며 꾸짖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대중들 사이에서 이방원이 이성계의 명을 받고 정몽주를 죽였다는 인식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
  • 실제 역사에서 이성계는 명나라로 가려는 이방원을 두고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만리의 먼 길을 탈 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라고 눈물을 글썽이며 물어보면서 걱정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본작에선 그런 묘사는 극 중 둘 사이의 관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이성계가 이방원에게 무표정하게 어명이니 다녀오라는 식으로 각색을 하였다.
  • 극 중 11회 시점은 1394년으로 이 당시에 윤소종은 이미 죽었으나 드라마에선 아직도 살아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2.12. 12회

  • 12회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사실 한양 천도와 죽음을 앞둔 강씨의 상황을 제외하면, 후술되어 있는 사건들 대부분은 이숙번의 과거 응시와 더불어 이방원이 명나라에 입조하기 전에 벌어진 일들이다.
  • 조선 최초의 문과는 1393년 6월 13일에 치러졌고 이 때 이숙번이 급제한다. 두문동 설화에는 고려에 절개를 지키는 선비들이 집단으로 시험을 거부하고 두문동에 들어갔고 이를 박종화의 소설인 『세종대왕』과 이를 원작으로 잡은 용의 눈물이나 이후에 등장한 정도전에는 아예 시험을 치르려는 이들이 하나도 없을 정도[36]로 조선 조정의 새로운 인재 등용 시도가 파탄난 것처럼 묘사했지만, 실상 조선 최초의 과거 시험은 목표한 인원 전원을 선발해 낼 정도로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더구나 이보다 앞선 고려 마지막 문과는 1392년 5월에 치러졌기에 딱 1년 정도 되는 이 사이에 또 다른 문과가 존재했을 가능성은 없다. 조선에서 문과를 치는 것을 거부하는 선비들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대세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을 이 작품에서는 이숙번의 대사를 통해 표현했다. 한편, 이숙번이 고려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는 유생들을 무술로 제압하는데, 비록 그가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었지만, 무예도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 왕씨 제거가 간략하게나마 묘사되었다. 특히 조영규가 숨어있는 어린 왕씨 성을 가진 아이를 모른 체하고 넘어갔고, 곧바로 그 어린아이는 도망갔지만 그걸 본 조영무가 화살을 쏴서 맞혀 죽여버리면서 잔혹성을 한층 더 부각시켰다. 그런데 실제로 당시 왕씨 학살을 위해 강화와 거제로 파견된 이들은 이방석의 장인인 심효생과 손흥종[37], 오몽을[38], 윤방경으로 이 중 심효생을 제외하면 나머지 인물들은 역사 비중상 극 중에 등장시키기 애매한 면이 있었기 때문인지 조영무와 조영규가 파견된 것으로 각색한 것 같다. 대신 이성계의 심복이었던 조영무가 이성계와 멀어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고, 건국 이후 문관 직을 맡다가 몇 년이 지난 1395년에 세상을 떠난 조영규라는 인물의 배경과 극 중에서 퇴장함을 표현하였다. 이 장면에서 조영규가 조영무에게 죽은 정몽주가 꿈에 나타난다며, 자신을 데려가려는 것 같다고 호소하면서 자신은 칼을 내려놓고 쉬겠다고 한다.
  • 실제 왕씨 제거를 주도한 건 개국공신들을 비롯한 신료들이다. 도당의 정승부터 젊은 간원들까지 모두가 왕씨 처분을 주장했다. 사대부 신하들보다 명분에 덜 얽매였던 이성계는 방치봉건론 입장에서 우리에게 충성하는 왕씨는 조정에 등용해도 되지 않겠냐는 온건한 입장이었다. 이성계는 사돈인 정양군 왕우, 조선 건국에 협력한 순흥군 왕승 등 일부 왕씨를 끝까지 보호해줬고 인척지간인 단양 우씨 우현보의 연고지인 공주로 유배간 왕승 일가가 문종 대 고려의 제사를 맡게 된다.
  • 강화도에 왕씨들을 모아 놓고 남녀불문 다 죽인걸로 묘사하는데 실제 강화도에서 죽은 왕씨는 공양왕의 숙부인 학성부원군 왕향 등 왕씨 남성 16명 이다. 삼척에서 공양군 왕요와 폐세자 왕석 포함 8명, 거제에서 수연군 왕규 등 111명해서 135명.(공주 동학사 초혼기 기준), 1차 왕자의 난때 제거된 왕조와 왕관(이방번 처남)까지 싸잡아 계산한 개성 왕씨 대동보 기준으론 157명 가량이다. 왕씨 직계는 근친혼 + 왕자의 출가관습 + 무신정권에게 제거 + 원의 간섭 등으로 급격히 손이 귀해져 창왕이 왕통을 부정당하자 창왕과 부계 18촌, 모계 9촌인 공양왕이 가장 가까운 왕통이었을 정도로 수가 줄었다. 여기서 공양왕 중심으로 왕씨 남성 135명을 제거해 직계만 끊어 놓고 나머지는 성을 바꾸게 해 말 그대로 왕씨가 아니게 만드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다. 이성계 가계에서만 개성 왕씨 며느리 1명, 손주며느리 2명이다. 개성 왕씨는 조선건국세력을 비롯한 당대 지배층들과 혼맥으로 폭넓게 엮여 있었다. 이 가계도만 살펴봐도 여자들까지 다 죽이는 묘사는 절대 나올 수 없다.[39]
  • 홍무제를 비롯한 명나라 인물들의 의관이 이전에 제작된 정도전이나 징비록에서 나타난 기존의 장발 상투 + 당나라 풍 복식이 아니라, 당대의 초상화 등에 나타나는 그 시대 명나라의 복식에 맞게 그려졌다. 한편, 이방원과 남재가 선 자리 뒤 쪽은 명나라 조정의 규모를 표현하기 위해 CG로 처리했다. 단발성 장면인데다 표현하고자 하는 규모에 맞는 세트도 없을뿐더러[40], 엑스트라를 많이 사용할 수 없는 상황 때문으로 보인다. 이후 이방원이 귀국하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크기의 한계와 힘의 격차를 느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내심 조선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힘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 실제 역사에서 이방원과 남재 등이 사신으로 갈 때에 나룻배를 타고 벽란도에서 출발해 평양성에서 내린 다음에 걸어서 북평(북경)을 거쳐 남경(지금의 난징)의 명나라의 황궁까지 갔지만 본작에선 마치 배만 타고 간 듯이 묘사하였다. 또한 사행길 도중에 천도가 이뤄진 것도 사행길 이후로 수정되었다. 육룡이 나르샤에서도 등장하는 영락제가 되는 연왕 주체와의 만남, 홍무제의 의도적 정안군 환대 등이 모두 생략되었다.
  • 명나라로 배를 타고 가는 장면에서 남재가 이방원에게 조공이 바친 것 이상으로 하사품을 되돌려받는다는, 이른바 흑자 무역의 측면이 있다는 점을 언급한다. 이 때문에 남재가 태조 앞에서 1년에 3번 조공 행렬이 오가게될 것이라는 점을 성과로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건문제가 즉위한 뒤인 정종 이후의 성과이므로 실제와는 다르다.
  • 기록대로 현빈 유씨가 내시와 간통을 저지르면서 결국 폐서인되어 궁에서 쫓겨났다. 플롯상 현빈 사건은 스토리를 가뜩이나 안 좋던 민심을 악화해 왕씨 몰살과 한양 천도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장치 중 하나로 사용되었다. 다만 한양 천도 과정이 상당 부분 생략되었다.

2.13. 13회

  • 정도전이 작성한 외교 문서가 잘못되었다는 핑계로 명의 황제에게 당장 오지 않으면 사신들을 압류하겠다는 협박을 받자 가지 않겠다고 한다. 그러자 권근이 스스로 명나라에 가 황제의 노여움을 풀겠다고 하는데, 이는 실록의 기록을 정확히 반영했다.
  • 이후에 시간이 스킵되면서 민씨가 이도를 낳은 후, 먼저 태어났던 이제와 이보 형제가 등장한다. 당시 이방원과 민씨 부부 사이에는 조선 건국 전에 태어난 정순공주(1397년 당시 12살)와 경정공주(당시 10살)에 건국 이후인 1393년에 태어난 경안공주(당시 4살), 이제(당시 3살), 이보(당시 1살), 이도 이렇게 3남 3녀를 두었다. 한편, 이도를 낳기 전 송씨가 민씨에게 "액이 끼면 안되니 다 따로 키워야겠다. 첫째는 여기( 민제의 집)에서, 둘째는 고모 댁에 맡기고, 막내는 네가 직접 키워라"고 말했고, 이후 이제가 외갓집( 여흥 민씨)에서 외삼촌들과 잘 노는 모습이 그러졌는데 실제로 이제( 양녕대군)는 외갓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이때 어린 이제를 데리고 민무질, 민무구 형제가 칼싸움 놀이하다가 장난스럽게 죽는 척해주며 재밌게 놀아주는 삼촌 역할에 충실한데 미래에 세자가 된 양녕대군이 외삼촌들 통수치고 태종의 외척 숙청에 한수 거들 거라는 암시로 보인다. 실제로 태종의 압박이 거세지자 민씨 형제들이 아빠한테 말 좀 잘해주라고 했다가 오히려 양녕의 냉대만 당했고 그걸 그대로 태종에게 일러바쳐 숙청을 거들었다.

2.14. 14회

  • 정도전이 이방원을 비롯한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사병 혁파를 단행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 태조가 세자를 위해 신덕왕후의 권위를 세우려는 의도로 신덕왕후의 릉을 도성 안에다 조성해놨다는 것이 묘사되었다.[41]

2.15. 15회

  • 이화가 정도전에게 사병을 뺏긴 뒤 민제와의 만남을 통해 기록대로 이방원의 반란을 지지해주기로 약속하였다. 반대로 이방과는 이방원의 반란을 지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서 태조의 효자로써의 모습이 부각되었다.
  • 이방원이 정도전과의 대화에서 명나라에서 연왕 주체와 만났던 경험을 언급하였다. 이방원은 연왕을 가리켜 호전적인 야심가에 치밀한 전략가라고 정도전에게 경고하는데, 이러한 말은 실제 주체의 인물됨을 잘 표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태종 이방원은 명나라를 다녀온 후 조선으로 귀국하여 연왕이 왕에만 머무를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하였고, 훗날 영락제가 되는 연왕도 본인처럼 정변을 주도하여 보위에 등극한 태종을 조선의 국왕으로 인정하였다.
  • 정도전이 왕자들을 살해하려고 들어 태종이 부득이하게 들고 일어났다는 태종실록의 기록을 그대로 차용했다. 이 때문에 왕자의 난 과정에서 정도전이 보인 행보가 매우 모순적이고 비합리적이라 보는 시각도 있다.
  • 민씨가 사병이 혁파되자 집안에다 몰래 무기를 숨겨놓은걸로 묘사되면서 적극적으로 이방원의 반란을 도와주었다. 또한 이방원이 무방비 상태로 궁에 입궐하자 이화상을 통해서 배가 아프다는 소식을 전하게 하였다.
  • 이방석이 이방원에게 자신을 쫓아낼려는걸 잘 알고 있다 라고 말하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하게 있다가 당하던 모습보다는 어느정도 계획을 알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2.16. 16회

  • 민씨가 선덕여왕 내지 주몽에 나올 법한 판타지갑옷을 입고 등장한다. 굳이 민씨에게도 갑옷을 입혀줬어야 했다면 찰갑, 경번갑, 두정갑 등 당대의 갑옷을 활용하거나, 작중 등장한 하륜처럼 갑옷을 입지 않고 진영을 시찰하는 정도로 묘사할 수 있었는데 아쉬운 부분이다.
  • 정도전은 죽으면서 자신 세자 운명에 대한 안타까움, 이방원의 권력욕에 대한 꾸짖음 등을 유언으로 남긴다. 다른 창작물 가운데 고우영 수레바퀴에 나타난 묘사와 흡사하다. 실록에서 정도전은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다가 이방원에게 죽였다고 쓰여 있다. 한편 용의 눈물이나 정도전에서 묘사된 분위기와는 꽤 비슷하지만 정도전의 자조가가 직접적으로 읊어지지는 않는다.
  • 이방번이 이방원에게 협조하지 않으면서도, 이방석의 도움 요청도 거절하면서 사실상 강 건너 불구경 하는 태도로 그려졌다. 기록에 따르면 이방번은 실제로도 방관자적 태도를 보이면서 어느쪽에도 확실히 서지 않았다고 한다.
  • 이방석이 멀리서 전황을 살펴보고서는 직접 반란을 진압하는데 기록대로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 조영무가 기록에서는 반란 초기부터 이방원 측에 합류했던 것과 달리 막판까지 고심하다가 결국에 합류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2.17. 17회

  • 전작과 달리 남은은 기록에 충실하게 자신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입궐했다가 죽음을 맞는다.
  • 방과를 세자로 세우는 장면, 그리고 바로 뒤에 이성계와 이방원의 대담 장면에서 이성계가 홍룡포를 입고 있다.

2.18. 18회

  • 실록대로 태조가 경순공주를 살리기 위해 비구니가 되달라고 말했고, 결국 비구니가 되면서 직접 머리도 깎아준다.
  • 통념과는 달리 여기서는 이방과도 나름대로 자신의 권좌에 야심을 갖고 이방원을 견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이방과의 명분은 가족 간의 화친 회복. 수단으로 삼은것은 첩과의 사이에서 낳은 불노를 원자로 삼기 위한것.

2.19. 19회

  • 개경 천도가 삭제되었다. 덕분에 2차 왕자의 난, 사병혁파 등 개경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의 배경이 모두 한성이 되었다.
  • 이방의가 초반에는 이방간의 편에 붙는 모습을 보였는데, 실제 이방의는 정치 얘기만 나오면 입을 꾹 닫는 처세를 보인 인물이었다.그러나 막판에는 형제 간 전투가 벌어지자 자택에서 머물며 사태를 관망하기만 하는데 이는 기록을 따라간 면모. 방의가 2차 왕자의 난에 가담했다는 묘사를 두고 익안대군 후손들이 항의했는지, 19회, 20회 다시보기 방송 앞에 정정문이 올라왔다.
    본 회차 드라마 내용의 일부는 실제 내용과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리며, 이와 관련하여 익안대군 후손들은 "익안대군 방의는 2차 왕자의 난에 가담한 역사적 기록이나 가담한 정황조차 전혀 없었다."고 알려왔습니다. 이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 2차 왕자의 난이 초고속으로 전개되고[42], (실록에도 기록된) 이방간이 태조와 정종을 찾아가 설득하려다 퇴짜맞는 장면도 생략된다. 또한 박포의 숙청 역시 귀양을 갔다 풀려나 방간에게 접근하는 정사와 달리 관직만 삭탈당하고 그 직후 바로 이방간에게 포섭되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 이방원이 형까지 죽여야 하냐며 넋나간 듯 웃고 밤까지 새가며 괴로워하다가 아무 일 없이 출전하는데, 실제로는 더 심한 오버액션을 하였다. 이화가 '정에 휘말려 국가 대사를 저버릴 것인가'하는 말까지 해서야 마지못해 나왔으며 갑옷을 입고 말까지 올라서도 '진짜 이래야 하는가!' 하며 울면서 병사들까지 감동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속이야 계획대로라며 싱글벙글 했겠지만 엄청난 연기력을 선보였다.[43]
  • 드라마에서는 액션씬과 권력 투쟁의 비극을 강조하기 위해 도성 한복판에서 전면전까지 벌어지고, 민가까지 전투가 번져서 백성들이 수없이 휘말려 죽었는데, 실제 전투는 이방원 측이 이방간 측의 일거수일투족까지 다 감시해내서 계획을 다 짜둔 상태였고,[44] 이방간이 아버지와 형을 설득하려 했으나 양쪽 다 '너 미쳤니? 되도 않는 소리 말고 빨리 해산해!' 라고 되레 퇴짜를 놓아 이미 이방간이 전의를 엄청나게 상실해버려 죽은 사람도 거의 없이 이방간 쪽 군사가 알아서 와해될 정도로 이방원 측의 압승이었다. 당연하게도 백성들이 휘말려 죽는 일은 없었다. 드라마다 보니 명분없는 싸움의 비극성을 보여주기 위한 극중 장치로써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 2차 왕자의 난 직전 이방간의 아들 이맹종이 거사 시작전 이방원의 집으로 대놓고 염탐을 오는데 이는 실록에도 기록된 내용이다.

2.20. 20회

  • 하륜과 이숙번이 술 마시는 기방의 기녀들이 입은 저고리는 조선 중~후기 양식으로 보인다.
  • 난 직후 눈이 돌아가 보일 것 없던 이방원을 정종이 적당히 제재하면서 이방간을 살려주라고 명한다. 실제로 정종은 2차 왕자의 난 당시 이방간에게 군대 해산하고 오면 책임지고 살려주겠다고 한 적 있다.
  • 실록대로 이방원은 정종의 양자로 들어가고 세자로 책봉된다. 작중에서는 그렇게 해서라도 적장자 계승 원칙을 지키고 싶다는 이방원의 뜻으로 묘사된다.

2.21. 21회

  • 태조가 조사의에게 병력과 함께 군수물자 등을 챙기라고 지시하면서 반란을 직접 지휘하겠다고 말한다. 태조가 단순히 반란을 사주할 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 주도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 조영무가 회암사에 머무르는 태조를 찾아가자 태조는 자신을 배신한 조영무를 매섭게 비난하며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태조는 상왕으로 물러난 후 세자인 태종을 압박하기 위해 전장에서 같이 구른 나도 배신한 놈이 조영무인데 너라고 배신 안하겠냐며 다그쳤다. 태조의 압박은 사병 혁파 당시 조영무의 행동과 맞물려 조영무가 유배되는 원인이 되었다.
  • 조영무가 사병 혁파의 명을 받고 온 군관들을 폭행한 이유가 가별초에 대한 애착 때문인 것으로 묘사된다. 실제로 가별초는 왕족이 부리던 동북면 사람들을 폭넓게 부르는 말이었고 혁파도 사병 혁파로부터 10여 년 뒤인 1411년에서야 이루어졌기 때문에 조영무의 사병은 가별초와 직접적인 관련 없을 가능성이 크다.

2.22. 22회

  • 원경왕후가 절차대로 혼자서 왕비 책봉식을 치렀다. 왕비 책봉 의례 절차상 왕이 이미 즉위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왕비가 따로 의례를 치르는 것은 특이한 일은 아니다. 예전 사극 중에는 대왕 세종에서 소헌왕후가 따로 책봉 의례를 치르는 장면이 묘사된 적도 있다. 의상 면에서는 강씨가 책봉될 때와는 달리 실제 고증대로 중국식 심청색 적의(翟衣)를 입고 책봉식을 치렀다. 하지만 머리에는 용봉관을 쓰지 않고 평소처럼 가체만 얹고 나오는 걸로 묘사되었다.
  • 태종이 궁녀들과 합방을 일삼은 이유가 민씨를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술수로 묘사되었다.
  • 민제가 후학을 사주하여 태종을 비판하는 시퀀스에 대해 각색을 넘어 왜곡 수준이라는 혹평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사헌부 압송까지는 아니지만 전가식이 상소를 올린 것은 사실이고,[45][46] 그가 순군에 압송된 후 민제를 언급하는 것도 사실이다.[47] 이 사건은 차후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죄 중 하나로 언급되기도 한다.[48]
  • 태종이 원경왕후가 사가에서 데려온 여종과 합방하자 원경왕후를 모시는 대전상궁이 중전마마를 제치고 주상에게 교태를 부린 괘씸한 년이라며 한밤중까지 비맞게 하고 탈진해 쓰러지게 한다. 모티브인 효빈 김씨는 실제로 민씨 집안 여종이었다가 태종의 승은을 입고 아들을 낳자 격노한 원경왕후에 의해 한겨울에 내쫒겼다가 겨우 살아났다고 태종은 증언했다. 오늘날에는 이 발언의 진위 여부에 대해 여러 의견들이 있다. 자세한 것은 효빈 김씨 참조.
  • 말미에 묘사된 민씨의 투기를 접하고 노한 태종이 가례색 설치 명령을 내리는 장면도 의외로 실제 기록에 근거한 묘사다. 태종실록 1권에는 민씨가 궁인들을 가까이하는 태종에 분노하여 한 궁인을 힐문한 것에 태종이 노하여 중궁전의 내관과 궁녀들을 쫓아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태종실록 3권에 가례색 설치 명령을 내리고 하륜 등을 제조로 삼으라 지시한 기록이 존재한다.

2.23. 23회

  • 사헌부로 압송되어 하륜에게 조사를 받던 민제가 분노해서 그러다가 삼봉 꼴 날 거라고 힐난한다. 이에 하륜이 맞받아치는 장면은 실제로 민제가 하륜의 다소 독선적이고 일방적인 일처리 방식을 못마땅해 하면서 볼멘소리를 하자, 하륜이 어차피 생사란 하늘이 정하는 것이니 걱정하시지 말라고 능글맞게 넘겼다는 일화에서 따와 각색한 것이다.
  • 태종의 압박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한 민제가 일선에서 물러나 제자도 두지 않고, 있었던 제자들과 연락도 하지 않으며 조용히 살겠다며 백기투항한다. 실제로 전가식 사건 이후 민제는 문하생을 만나지 않았고, 아들들에게도 주상의 뜻이 이러하니 우리들도 조용히 지내야 한다며 당부했다.물론 아들들은 말을 안듣다가 날라갔다
  • 정종이 태종에게 '아버지가 강씨를 들여 우리 형제들이 그런 일을 겪었는데 그걸 네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으냐'는 식으로 중전에 대한 노여움을 풀라고 설득하였고, 이에 태종이 고민을 하다가 가례색을 파하고 민제를 석방시키면서 일단 물러서는 모습이 그려졌다. 실록에는 정종이 '자신은 본처에게서 아들이 없지만 그래도 잘사는데 너는 아들도 많이 낳게 해준 본처한테 왜 그러냐'는 식으로 설득해서 가례색을 파했다고 한다. 실록과 각색을 적절히 섞은 묘사라고 볼 수 있다.

2.24. 24회

  • 조사의의 난 진행 과정이 기록과는 다르거나 정황이 생략되었다. 인터넷에 널리 퍼진 조사의의 난과 관련된 재해석을 바탕으로 작중에서 실록의 기록과 가장 동떨어진 오리지널 스토리로 전개된다.
  • 조사의의 난이 일어나자 이거이가 조영무에게 상왕이라면 사병을 혁파하지 않았을 것이고, 사병이 있었다면 군사들을 빨리 소집할 수 있었을 것이라 불평하자 여기에 조영무가 반발하는 모습은 이거이의 탄핵 정국을 염두에 둔 각색이다.
  • 이천우는 이성계의 이동 경로에 있던 맹주를 습격하기 위해 적의 배후지로 100여 명의 습격대를 보냈다가 조사의 군에 본인까지 포위를 당해 10여 명과 함께 겨우 빠져나왔다. 이것이 조사의의 난 중 실록에 나오는 유일한 교전이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이천우가 단순히 호승심에 적군 깊이 진격했다가 포위당하는 것으로 나왔다.
  • 조사의의 군대에 이천우가 이끄는 선봉이 패해 사기가 떨어지자 태종이 사기를 올리고 군율을 바로잡겠다며 민제에게 수성도통사를 맡기고 이거이가 이끄는 전선의 주력군을 직접 찾아가 앞장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거이는 반란이 진압되기 불과 이틀 전에 군직을 받았고 그 다음에도 본인이 직접 출정했는지 아니면 군관들만 출정한 것인지 실록만 보면 불분명하다. 태종도 도성을 출발한 지 하루만에 금교역에서 원중포라고 하는 정체불명의 장소에 틀어박히는데 정황상 전선을 효율적으로 지휘하고 파악하기 위해 육로와 수로 양쪽으로 정보를 빠르게 수집할 수 있는 역참 인근의 포구에 지휘부를 차렸을 가능성이 있지만 전선에서 직접 군을 지휘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유일하게 실록과 일치하는 내용은 민제가 수성도통사가 된 것 뿐이다.
  • 작중에서도 그렇고, 그간 여러 매체에서 하륜이 조사의의 난 당시 태종 옆에서 그를 돕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태종이 하륜의 이름을 최고 지휘부 명단에 올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륜은 당시 명나라에서 영락제가 즉위하여 이를 축하하기 위한 사신으로 조사의의 난이 발생하기 전인 태종 2년 10월 15일에 출발해서 태종 3년 3월 17일에 조선에 돌아왔다고 한다.[49][50]
  • 관군이 동북면의 배후를 차단한 것 외에는 양 측 주력군끼리 충돌하지 않고 전략 기동만 반복하다가, 이방원이 원중포라고 하는 장소를 갔다온 후 조사의 군에 잡힌 포로가 관군이 점거한 거점 위치와 병력 규모를 늘어놓자 조사의 군이 자멸하는 것이 교전 기록의 전부이다. 오늘날에는 정황상 이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이방원이 직접 이성계의 신병을 확보했다는 재해석이 각광받고 있고 드라마도 그러한 해석을 따랐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방원이 습격을 당하고 지원군의 도움으로 격퇴한 뒤 반대로 이성계를 급습하는 일련의 과정은 전적으로 드라마의 창작이다.
  • 동북면 방면으로 파견된 민무질이 극중에서는 서북면으로 온 것으로 묘사되었다. 실록에 따르면 민무질과 같이 17일에 출발했던 신극례가 13일에 먼저 출발한 조영무 등과 합류해 21일에 철령으로 갔고, 민무질은 25일에 이거이, 이숙번과 더불어 군직을 제수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에 동북면으로 간 것이 아니라 따로이 움직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있던 하륜도 지휘부에 이름을 올렸기 때문에 단정짓기는 어렵다. 한편으로는 관련 기록에 전혀 이름이 나오지 않는 박은도 조사의의 난 진압에 참여한다.

2.25. 25회

  • 조사의의 난 재해석의 연장으로 태종이 의도적으로 태상왕을 모시던 조사의 군 포로들을 풀어주고 이들이 태상왕의 신병과 진압군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게 하여 조사의 군이 무너지게 만든다. 원래는 조사의 군에 포로로 잡힌 관군 소속 포로가 관군이 어떠어떠한 거점을 장악했고 그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떠벌리자 조사의 군이 스스로 무너졌다.
  • 실제 역사에선 1400년 복권되는 정몽주가 이 시점에 복권되는 것으로 나온다.
  • 조사의의 난 2년 뒤인 1404년에 파직된 이거이가 파직되는 시점이 조사의의 난 바로 직후인 것으로 묘사되었다. 또한 이거이의 사형을 유배로 감형시킨 태조의 중재는 생략되었다.
  • 민씨 집안에 대한 경계심이 누그러진 태종이 원경왕후와 왕자들과 함께 처가를 방문할 계획을 세우나 효순궁주의 일이 밝혀지자 격분하며 취소한다. 원래는 이 시기에 태종 부부가 왕자, 공주들과 함께 민제의 집에 실제로 방문했으며,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사가에 있을 때처럼 하자며 태종이 민제에게 사부님이라 부르고 민제는 태종에게 이 선달이라고 부르는 진풍경을 보여줬다.
  • 태종이 이화상에게 그도 어엿한 공신이라고 말하며 조정에 출사하라면서 그를 선공감 주부라는 종6품의 관직에 임명하는데, 일단 이화상이 태조 7년에 사망했던 것으로 보이는 만큼 살아있는 것이 역사상 안맞지만, 이미 이화상은 태조 7년에 공조전서에 올랐던 인물이었고, 작중 이화상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동생들 중 이화영, 이화미는 조사의의 난 당시 동북면에서 도망쳐 온 직후 각각 좌군동지총제, 대호군이라는 종3품 이상의 높은 무관직에 오른 이들이었기에 이것 또한 맞지 않다.

2.26. 26회

  • 하륜이 이숙번, 조영무와 대화할 때 한나라 성제 시절 5명의 외숙부들이 권력을 잡고 결국 나라를 무너뜨린 이야기를 하면서 외척 견제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실제로 성제가 즉위한 뒤 황후의 남자형제들이 나라의 전권을 잡았고, 결국 그 중 왕만이라는 사람의 아들이 전한을 멸망시켰는데 이 사람이 바로 왕망이다. 이 대화에 나오는 왕씨는 고려 왕씨가 아니라 바로 이 왕망의 집안이다.
  • 태종이 내관에게 태형을 선고하지만, 내관이 맞는 매의 크기는 곤장이다.[51] 실제 태형은 가는 회초리로 때리는 것.
  • 태종이 선위의 뜻을 거두었을때 민씨 형제가 다른 대신들 처럼 기뻐하거나 하지 않고 당황해하다가 이숙번, 조영무 등에게 빌미를 잡히는 모습이 나오는데 실제로 실록에서 둘이 슬퍼했다고 적혀있다. 결국 탄핵을 당하고 유배를 떠나는데, 여기서 실제로 행동대장 역할을 했던 이화가 등장하지 않았다.[52]
  • 이화가 탄핵을 할 때 즈음 이방원이 하륜에게 민씨 형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슬쩍 떠봤는데, 하륜은 눈치없이 둘을 가볍게 처리하자고 했다가 이방원에게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닌데'란 뉘앙스의 핀잔을 듣는데, 드라마에선 이화의 분량이 잘리면서 같이 잘려나가 묘사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후에 또 '세자를 죽이려 한 게 아니고 왕자들을 죽이려고 한 거니 죄가 크진 않아요'라고 했다가 이방원에게 '그런 말은 두 번 다시 입밖에 내지 말고 생각없이 말하지 말라'죽기 싫으면 그런 개드립 치지 마라며 제대로 조인트를 먹고 싹싹 빈 적이 있다.[53]
  • 26화 후반부에 시간이 흘렀다는 묘사로 이방원의 세 아들들이 장성하고 이방원도 수염이 더 난 모습으로 나오는데, 민씨 형제를 유배보낸 것이 1407년 11월이며, 27화 예고편에서 여전히 이성계[54]가 등장하기에 실제로는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다.[55]

2.27. 27회

  • 이성계가 위독했다가 고비를 넘기고, 이방원의 생일 축하 자리에 가서 화해하고 얼마 안돼 이성계가 사망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1408년의 실록을 보면 정말로 이성계가 5월 2일에 위독해서 이방원이 5월 4일에 문병을 갔었고, 5월 16일에 태종의 생일이라 조회를 하지 않았다가 8일 후인 음력 5월 24일에 태조가 승하하여 기록과 딱 맞는다.
  • 민제가 사망했을 때, 이방원이 직접 조문도 하고 유배 간 민무구와 민무질도 다시 불러서 상주 노릇을 하게끔 했었는데, 드라마에서는 앞으로의 피바람과 부부싸움을 위해서인지 이방원이 찾아오거나 민무구, 민무질이 상주를 하는 묘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양녕대군이 와서 조문하였다.
  • 엔딩에서 양녕대군이 민무구와 민무질의 사사를 주청한 장면은 태종실록 19권에서 태종에게 세자와 의정부 등이 민무구 등의 처벌을 청원하였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장면으로 보인다.

2.28. 28회

  • 민무구와 민무질에게 극형을 내리자 원경왕후 민씨가 대문 밖에서 가체도 풀어버리고 눈물샘이 마르고, 목소리가 다 나갈 때까지 통곡하다가 쓰러진다. 민무구와 민무질의 죽음에 피눈물을 흘렸다는 실록의 기록을 참고한 장면으로 보인다.
  • 충녕군이 몰래 나가서 술 마시고 기생까지 끼고 들어오는 세자를 기다렸다가 '이미 다 보고했다'라며 똑바로 하시라고 경고하는데, 실제로 충녕대군은 형 양녕대군의 죄를 거짓 하나 없이 아버지 태종에게 일러바치며 양녕대군에게 미움을 샀다.

2.29. 29회

  • 양녕이 대학연의 마친 것을 축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 양녕은 대학연의를 오랫동안 떼지 못하다 충녕이 자기 어필로 점수를 쌓아가자 뒤늦게 진도를 뺐다. 위기 의식의 발로였다. 그 과정에서 보여준 병풍 해석 장면은 정사에도 기록된 사실이다.
  • 조영무가 늙었다며 사직을 청하는 장면이 나왔을 때는 1412년으로, 이 때의 조영무는 일흔을 훌쩍 넘은 고령이다. 한양 조씨 족보에 따르면 생년이 1338년이니, 무려 정몽주와 동갑이며, 먼저 떠난 태조 이성계와는 고작 3살 차이다. 1335년 이후 조영무는 2년 후 1414년에 사망했고, 바로 민무휼과 민무회가 사망하므로(1416년) 사망 순서도 맞게 반영되었다.
  • 민무휼과 민무회가 고문당하고 있자 양녕이 점수를 따기 위해 민무회가 자신에게 불충한 언사를 했다고 고발했는데, 효순궁주의 고변이 순서상 뒤쪽이다. 그리고 애초에 둘은 다른 이유로 국문의 스타트를 끊었다. 염치용이란 사람이 태종과 하륜이 노비에게 뇌물을 받아 부당한 판결을 내렸다고 민무회에게 거짓말을 했는데, 진위여부를 떠나 어쨌건 왕이 내린 결정인데 민무회는 눈치없이 충녕대군에게 이 판결 부당해요 라고 고변했고 충녕대군은 그걸 그대로 태종에게 고했다. 당연히 태종은 내가 일개 노비 뇌물 때문에 그딴 판결을 했냐며 대노하여 둘을 잡아들였고, 그 뒤로 양녕과 효순궁주의 고변이 연달아 터졌다. 물론 심각성 면에서는 민무회의 불충이 제일 큰 문제였다. 28회에서 세자에게 대놓고 '형들 죽은 걸 어떻게 그렇게 태평하게 말씀하시냐'고, 실록에서는 '저하는 어렸을 때 어디서 자라셨느냐!' 하고 대놓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세자의 품행을 떠나 이건 세자를 대놓고 겁박한 것이기 때문에 양녕의 고변 이후로 여론이 '둘을 죽여야 한다'로 급격하게 쏠렸다.
  • 오랜만에 사극에서 고문을 묘사할 때 조선 후기에 명나라에서 들어온 주리틀기 등이 아닌, 조선 전기에 실제로 쓰인 압슬이 잘 묘사된다.
  • 양녕이 어리라는 곽선의 첩을 납치해 데리고 가 첩으로 삼았던 건 사실이다. 심지어 상왕인 정종이 아끼던 기생도 탐했다고 나오는데 이 역시 사실이다.
  • 양녕이 민씨에게 "지는 쪽이 죽는 것"이라고 할 때 이방석을 거론하는데, 이때도 '의안군'이라고 말한다. 이방석이 태종 때 추증받은 군호는 소도군(昭悼君)이다. 숙종 때 가서야 의안대군으로 추증받았다. 비록 이방석이 '소도군'이라고 불렸던 걸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그랬을 수는 있으나, 이 정도는 자막으로도 해설이 가능한 범위이니 다소 아쉬운 점.
  • 양녕이 민씨에게 구차한 변명을 할때 "지는 쪽이 죽는 것"이라는 말을 하는데 실제 양녕은 폐세자된 후 "예로부터 나의 처지에 빠진 사람들이 살아남는 걸 본 적이 없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 극중 어리의 일이 태종에게 발각되어 사가로 쫒겨난 양녕이 충녕에게 "네놈이 그런 것이냐."며 따져묻는 장면이 있는데 실록에서도 비슷하게 양녕이 충녕에게 어리의 일에 대해 태종에게 고변했는지 캐묻는 장면이 등장한다.

2.30. 30회

  • 이숙번이 하륜과 술을 마시면서 간관들의 일을 가지고 불평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륜의 인사청탁이야 뭐 실록에 수두룩한 부분이고(...), 이숙번이 상왕에게 무례했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아마 자기 집 앞에 문을 내는 것이 시끄럽다고 상왕이 있는 인덕궁 앞으로 문을 내라고 한 일을 말한듯 하다. 《태종실록》 권25 13년 6월 19일 병인 2번째 기사
  • 이숙번이 유배를 떠날 때, 하륜이 몰래 뒤에서 지켜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숙번이 함양으로 유배를 간 해는 태종 17년인 1417년의 일인지라 이보다 1년 앞선 태종 16년에 이미 세상을 떠난 하륜이 그의 뒷모습을 보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숙번이 그간의 행적이 문제되어 태종으로부터 이숙번 본인의 자원에 따라 연안부의 농장에 거주하라는 명을 받아 정계를 떠난 것과 얼마 뒤 공신녹권과 직첩을 회수당한 때는 하륜이 사망한 11월보다 몇개월 전인 태종 16년 6월에 벌어진 일이기에 약간 애매한 부분이 없잖아 있다. 드라마가 32부작이다 보니 전개 속도가 너무 빠른 탓에 좀 뭉뚱그려서 서술되어서 그렇다.
  • 이숙번이 대신을 압박하여 자신을 탄핵한 간관 처벌 상소에 서명하게 한 사건은 원래 작중 시점보다 전인 태종 14년에 일어난 사건이다.[56]
  • 이숙번의 실각은 실제로는 구종수의 뇌물질 로비에 연루된 것과 이숙번 자신의 땡깡이 결정타였다. 양녕 옆에서 알랑거리던 구종수가 귀양 갔다가 돌아와서 양녕에게 뇌물과 주색을 제공하다가 다시 또 함경도로 유배를 간 와중에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세자에게 말과 활을 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이숙번에게 보냈는데, 구종수를 족치는 와중에 이 내용까지 덩달아 나왔다. 한편 이 시기에는 큰 가뭄이 돌아 태종 포함 모든 신하들이 해결책을 찾고자 분주한 상황이었는데, 이숙번은 이 상황에서 병을 핑계로 몇 달 째 궁에 나가지조차 않았다. 심지어 태종이 직접 오라고 불렀는데도! 이에 태종이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치자, 어심이 바뀌었음을 알았는지 곧바로 앞서 이숙번이 저질렀던 패악질이 누적된 상소가 줄을 이었고, 태종도 기다렸다는 듯이 이숙번을 바로 지방으로 내쳐버렸다.
  • 원경왕후가 충녕대군에게 세자 및 보위에 대한 야심을 말리려 충녕의 집에 서책들을 모조리 치우게 하는데, 실제로는 책을 너무 열심이 읽은 나머지 병이 들었음에도 책을 손에 놓지 않자 걱정된 부왕 태종이 충녕의 서책들을 모두 수거하라고 명했고, 이 이야기가 더 널리 퍼져 있다. 작중의 태종은 충녕의 야심을 읽고 무언으로 지원하는 태도를 보였고, 오히려 원경왕후가 세자 및 보위 자리를 두고 형제들간의 골육상쟁이 자식들에게까지 일어날까봐 두려워 충녕 집의 서책을 치움으로써 충녕에게 정치에 대한 관심을 끄게 만드는 걸로 각색되었다.
  • 양녕은 작중에서는 어리를 궁에 다시 데려왔지만 실제로는 아예 장인어른인 김한로의 집에다 데려다놓고 겁탈하여 임신까지 시켰다. 드라마보다 현실이 더 막장이다.[57]
  • 형인 세자를 껄끄러워하는 충녕에게 태종은 그럴수록 더 가까이 해야 한다며 형제 사이를 다독이려고 한다. 실제로 태종은 아무래도 본인의 전과도 있다 보니(...) 본인의 아들들도 그럴까봐 틈만 나면 형제간 우애를 강조했다. 그러나 둘째손주까진 신경쓰지 못했다.[58]

2.31. 31회

  • 양녕대군이 스스로를 파멸시킬 항의문을 쓴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태종을 모시는 여인들도 있는데, 왜 나한테만 이러느냐(...)는 내용도 실제로 있는 부분.[59] 《태종실록》35권 태종 18년 5월 30일 기묘 1번째 기사

    다만 그 전후 과정과 항의문 내용은 성녕대군이 등장하지 않아 각색되었다. 드라마에선 태종과 대신들, 양녕이 모두 한양에 있는 상태에서 해당 글을 올리지만 고증대로면 태종은 성녕대군 사후 한양에 머물기 괴롭단 이유로 문무백관을 이끌고 제2 도읍지 개경으로 임어하고 양녕 한명만 한양에서 조정을 돌보란 명목으로 남겨뒀다. 백관을 모두 개성으로 데려가고 원로대신들이 양녕을 문안하는 것조차 차단해 완전히 고립시킨 다음 어리 사건을 공개했고, 이 사태에 기겁한 양녕이 개경까지 달려가 용서를 빌고 한양으로 돌아온 다음 제 성질을 못이겨 직접 적어 올린 글이다. 즉, 드라마와 달리 세자위에서 내려올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드라마보다 원문이 훨씬 더 불손하다. 원문에는 한고제까지 거론해 자신의 엽색 행각을 변호하고 '전하는 어찌 신이 끝내 크게 효도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라며 부왕을 협박한다고 여길 수도 있는 구절들이 들어있다.
  • 태종이 원경왕후에게 새롭게 세자가 된 이도에게 양위를 할 것을 밝히면서 "18년 동안이나 호랑이 등에 올라탔으니 그걸로 족하다"라는 식으로 말하는데, 기록에도 이 말을 한 것으로 적혀있다. 다만 실제로는 원경왕후가 아니라 신하들에게 말했다.
  • 기록대로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된 뒤 경기도 광주로 보내졌고, 황희는 양녕대군의 폐세자에 반대하다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 이전 회에서는 원경왕후가 충녕대군의 집을 방문할 때 충녕의 장남인 향만 보였는데, 폐세자가 되어 떠나는 양녕과 세자가 되어 입궁하는 충녕의 아이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보면 이 당시 충녕과 심씨 사이엔 2남 2녀가 이미 있었고, 심씨는 안평대군을 임신 중이었던 시기다.
  • 드라마에서는 심온이 그간의 다른 드라마들처럼 태종이 자신의 가문을 노리는 것을 눈치채고 각별히 처신에 신경을 쓰는 모습이 나온다. 실제로는 심온이 억울하게 숙청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평소에 딱히 몸을 사리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큰 야심을 가지고 세종의 즉위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도 작중 그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떠날 때 수많은 배웅 인파가 몰렸으며 이를 본 태종이 그를 숙청할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잘 묘사되었다. 또한 원경왕후의 대사를 통해 영향력 큰 명문가인 청송 심씨가 외척까지 되었기에 숙청 대상이 되었다는 것도 언급하였다.
  • 강상인이 상왕전에 보고를 빠트린 것은, 상아패와 오매패에 관한 일이다. 실제로 이 일은 세종이 즉위한 지 보름만에 벌어진 일로, 이전의 상왕들과 달리 태종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강상인의 국문은 8월이었고, 태종이 다시 일을 끄집어 내어 영의정의 심온의 이름을 끌어낸 것이 11월이다. 그 사이 강상인은 함길도에 관노로 보내졌다가 다시 불려와 국문을 받았다.

2.32. 32회

  • 강상인과 심온이 압슬형을 받은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심온은 실록대로 사약으로 죽었고, 강상인은 등이 베이는 참수로 죽은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실제로는 더 끔찍한 형벌인 거열형으로 죽었다. 죽기 전에 "나는 죄가 없는데 매를 견디지 못해 죽는다!"고 소리쳤다고.(...) 거열형이라는게 촬영 준비에 시간과 인력이 제법 많이 소모되고, 배우의 신체에도 부담이 가기 때문에 단역 캐릭터 죽음 묘사할 때 굳이 넣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듯하다.[60]
  • 실제로 심온은 혹독하게 고문을 받아도 승복하지 않다가 유정현이 정치적 상황을 암시해 준 후 혐의를 인정하고 다음 날 사약을 받았고, 소헌왕후의 어머니와 누이들이 관노가 된 것 역시 유정현의 주장이었다. 박은은 심온의 죄를 가족에게 연좌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드라마에서는 이 모든 일을 박은이 주도한 것으로 각색되었다. 용의 눈물에서의 묘사와는 정반대로, 용의 눈물에서는 유정현이 더 강경한 태도로 나오고 박은이 좌불안석이었다면 이 드라마에서는 정반대로 묘사되었다.
  • 심온 사건 이후 신하들이 죄인의 딸인 소헌왕후를 폐하자고 주장한 것은 사실이다. 수사를 주도한 박은도 크게 목소리를 냈다. 이러한 주장에 맞서 왕비를 폐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한 사람은 태종이었다. 《세종실록》2권, 세종 즉위년 11월 29일 을해 5번째기사 애초에 태종이 이 시나리오를 쓴 이유도 왕비를 폐하는 것이 아니라, 외척의 힘을 꺾는데 목적이 있었다. 왕비를 폐한다면 또 새로운 왕비를 들이고 다시 피바람을 보아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이 시점에서 왕비는 문종을 비롯한 아들을 셋이나 낳은 상태였다. 드라마에서는 세종이 적극적으로 반대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묘사된다.
  • 원경왕후의 승하 이후 세종이 상왕인 태종에게 반기(?)를 든 사실은 실록에도 있다. 물론 드라마처럼 노골적으로 한 것은 아니고, 역월지제에 따라 최복을 13일에 벗으라는 태종의 뜻을 따르지 않고 산릉을 마칠 때까지 최복을 입었다. 세종이 태종의 뜻을 거역한 유일한 사례. 또한 비록 관철시키지는 못했지만, 능 곁에 절을 세우는 문제와 관련해서도 완강하게 자기주장을 폈다. 어머니에 대한 효심+어머니에게 가혹했던 아버지에 대한 나름의 항변이었을지도...
  • 태종의 상왕 시절 직접 포고령을 내리고 진행하였던 대마도 정벌은 다뤄지지 않았다.
  • 태종이 죽는 순간까지 일에만 열중하다 승하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대마도 정벌를 끝마치고 병권을 세종에게 넘겨줬으며, 이후 사냥을 다니거나 형인 정종과 아들인 세종과 나들이를 즐기는 등 열심히 놀았다.(...) 여담으로, 드라마에서는 1419년 10월에 형 정종 이방과가 사망한 것을 다루지 않았다.
  • 태종이 청계천 치수사업을 진행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태종의 지휘하에 진행된 사업이다. 다만 시간상 문제도 있거니와 막판에 아들 세종과 담담한 분위기 잡는 거 깨기가 그랬는지 신덕왕후 무덤 허물어 가져온 석재로 치수 공사했다는 패드립은 안 나온다(...).
  • 태종이 직접 기우제를 지내는 장면을 통해 태종이 승하한 날 내린 비라는 태종우도 짧게 언급된다. 이는 용의 눈물의 엔딩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61]. 실록의 내용이 아닌 야사의 내용이긴 하나, 현존 자료들 중에서는 당장 조선 전기의 개인 문집에서부터 몇 백년 뒤의 난중일기 영조실록에도 나오는 조선시대에도 이미 유명한 고사였다.

[1] 자세히 보면, 말 안장에 칼이 매달려 있는데, 등청하러 갈 때 부인 민씨가 건내둔 말이었다. 즉 방원의 말 다루는 수준은 집에서 키우던 익숙한 말이 아닌 낯선 말은 단번에 다루지 못하는 정도임을 표현한 것이다. [2] 나중에 겨우 머리를 써서 말발굽으로 그 병사의 얼굴을 후려치고 달아난다. [3] 재미있게도 SBS 드라마 〈 야인시대〉에서 아버지 부하 역을 맡았던 조상기가 일회성으로 맡았다. [4] 실제 역사에서 두들겨 패고 달아났으리라는 추측은 다소 무리이다. 아마 실제 역사에서는 보초병들에게 술을 먹여 재우고 달아났거나, 감시가 생각보다 심하지 않아 뇌물을 바치고 도주했을 가능성이 더 확실시된다. [5] 메이킹 필름에서 해당 배역을 맡은 아이와 대화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때 아이가 6살이라고 말하긴 했다. [6] 굳이 변명을 하자면 한 화 만에 개경 함락 직전까지 밀고 가야 하는 제작진의 사정상 개연성보다 압축적인 묘사를 우선해서 투석기 공격과 성벽 근접을 한 프레임에 우겨넣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우겨넣기를 통해서 개연성이라는걸 날려먹었다는 점에서 잘한 결정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보병의 상륙과 공수부대의 강하를 한장면에 우겨넣은 마이웨이의 연출이 결코 좋은 평을 못 듣는 것과 같다. [7] 물론 우왕 입장에선 이성계의 가족들이라도 도모해 볼 가능성이라도 잡아야 했다. [8] 정도전〉에서도 '성계탕' 에피소드로 좀 더 긴 시간을 할애해 이 각색을 쓴 바 있다. [9] 지금은 조선인민군이 주둔하고 있는 군사기지다. [10] 심지어 이후 4회에서 이색이 귀양 갈 때, 6회에서 정도전이 귀양을 갈 때, 26회에서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귀양을 갈 때에도 똑같이 사용했다. [11] 여태까지 한국 사극에서 '상왕'이란 작호와 '폐하'란 경칭이 결합되어 나타난 적이 없었다. 왕이 죽을 때까지 하는 게 일반적이라서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이 많지 않아서. [12] 흥국사 회동에서 우창비왕(禑昌非王)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논의에 따라 종실 중 가장 가까운 족속으로 거명되었고, 논란을 없애기 위해 종친 여러 명에 대한 명단을 써서 계명전(啓明殿)에 나아가 태조 왕건에게 고하고 탐주(探籌)하는 절차까지 거쳐 이성계 등 흥국사 9공신이 함께 정비(定妃)의 뜻을 받들어 추대하였다. 그리고 공양왕은 즉위 후 순안군(順安君) 왕방(王昉)과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조반(趙胖)을 명에 보내 즉위를 알리고 친조(親朝)하여 면주(面奏, 마주보고 상주함)일을 허락받게끔 했다. 친조면주는 이행되지 않았으나 공양왕 3년 12월 명에서 승휘원사(承徽院使) 강완자독(康完者篤) 등 3인을 보내와 공양왕의 국가 운영을 위로하며 정사를 살피라는 조서를 내림으로서 실질적으로 명의 승인도 떨어졌다. [13] 폐가입진을 명분으로 즉위한 공양왕이기에 신우와 신창을 죽이면 정통성은 더욱 강화되고, 그 정통성 있는 임금이 선양을 거부하고 버티면 이성계가 모양 좋게 즉위하기 난감해진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우, 창에 대한 동정여론을 환기시켜 민심을 이성계에서 등돌리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설명하는데, 개경 민심이 나빴을 때는 최영이 죽었을 때고 왕씨들에 대해선 이성계가 공양왕 부자와 공양왕의 삼촌들을 포함 유력 왕씨 135명을 목 매달고 바다에 던져도 아무 문제없었다. 정치적 실책이 분명한 우왕과 너무 어려 권위가 없었던 창왕의 죽음으로 민심이 동요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고 그런 기록도 없다. 무엇보다 공양왕은 우, 창이 역적이어여만 권위가 올라가는 사람인데 그들에 대한 동정여론을 기대하고 적극적으로 처형을 추진했다는 건 무리한 주장으로서 비전공자들이 민심이라는 모호한 요소를 너무 쉽게 가져다 붙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 케이스다. [14] 그 동안 대부분의 사극들에서는 창왕의 실제 나이를 추정했을 때, 어린 나이의 아역 배우들이 배역을 맡다 보니 시청자의 정서를 의식해서 사약을 먹고 죽는 걸로 순화시켜 묘사했었다. 개국에서는 창왕의 처형이 역사대로 묘사되지만 직접 베는 장면은 넣지 않았다. [15] 우왕은 이성계와 전주 이씨 가문에게 반복해서 저주를 남기며 완전히 죽을 때까지 몇 번이나 칼에 베이고 찔리지만, 창왕은 죽음이 두려워 눈물을 흘리며 눈을 꼭 감은 채로 한 번에 베여 죽어 유모의 품에서 숨을 거뒀다. [16] 거의 200년 만이다(...) [17] '마파리(mafari)'는 조상님들, 아지는 '형(age)'이라는 뜻이다. [18] 예컨대, 영어로 된 한국 역사물에서 '김치를 만들었다.'를 두고, '딤채를 맹그난다.'가 아닌 'I made 딤채.'라고 하는 거랑 비슷하다. [19] 용재총화에 기록된 야사에 따르면 권근이 이때 정몽주를 만났는데 일단의 군사들이 정몽주 일행을 앞질러가니 정몽주가 권근더러 나를 따라오지 말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20] 정몽주의 피살은 1390년 윤이, 이초 사건 이듬해부터 이어지는 급박한 흐름속에 있다. 1391년 9월 정도전 유배&세자 왕석의 명 입조 -> 1392년 3월 세자의 귀국행렬 맞으러 간 이성계 해주에서 낙마 -> 1392년 4월 정몽주 피살 -> 1392년 6월 말 공양왕 명에 책봉요청 사신 파견 -> 1392년 7월 공양왕 폐위와 사신단 중도귀환까지 숨 쉴 틈없이 돌아갔고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부터 이어진 정치적 숙청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정몽주 격살 파트에 들어가면 '죽고 사는건 하늘에 달렸다'며 손놓고 방관하고, 이걸 이방원이 해결하는 전개가 튀어나온다. 그것도 이방과, 이화, 이제 같이 쟁쟁한 무장들을 그때까지 다른 사람 보좌역만 했고, 군무에 인연 없던 20대 문관 이방원이 다 끌고가는 전개로. 다섯째가 3년상을 치르는 (정통성을 위해 가필했다는 의심을 해볼수 있는)기술까지 더해서. [21] 실제로 성격이 포악하긴 했다. [22] 2010년대 사극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용의 눈물에서도 이렇게 묘사되었다. 왕자들이 제외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남은과 심효생이 정도전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라며 묻고 정도전이 그에 답하는 것으로 처음 언급된다. 이후 "그런데 왕자들이 모두 빠졌구려...?" 라는 태조에게 정도전이 "왕자라는 신분 자체가 지극한 영광이니, 그 정도로 만족들 하셔야..." 라는 요지로 답하는 장면도 있다. [23] 여담으로 저 장면은 < 다큐멘터리 3일> 방송이나 이화 역의 이원발 배우의 유튜브에서도 나왔는데, 저 당시 날짜가 2021년 11월 28일이다. [24] 위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용의 눈물이나 정도전과는 달리 고려 국왕은 고려가 멸망하는 날까지 관모로 각진 절상건을 착용했다. [25] 본작에서도 이방번을 먼저 지목하다가 약간의 반발 이후에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겠다고 선언한다. [26] 드라마 제작 예산이 빡빡하기 때문에 그렇게 진행에 필요없는 경우는 쳐내면서 각색으로 바꿔버리는 경우가 많다. 전작 정도전에서 그렇게 등장할 필요가 없는 이방의 이방간이 각각 직접 나오지 않았거나 언급만 되었으며, 배극렴이 사라진 것도 위화도 회군으로 시작하고 한동안은 고려를 무너트리기 위해 정치적 충돌이 주가 되기 때문에 뺀 것으로 보인다. 물론 건국 후에 얼마 안 가 죽었다는 것도 사실이기도 하다. [27] 그나마 2014년의 정도전은 대군 마마 호칭을 쓰지 않고 정확하게 (누구누구) 군 대감 호칭을 썼지만, 그 작품도 이방석을 의안군으로 칭하는 오류를 범했다. [28] 해당 대목의 시기인 여말선초보다는 후대인 세종 시기에 편찬된 훈민정음에도 이 단어가 해당 뜻으로 쓰였다. 이렇게 쓰인 부분이 (내〮이〮ᄅᆞᆯ〮為윙〮ᄒᆞ〮야〮어〯엿비〮너겨〮 새〮로〮스〮믈〮여듧〮字ᄍᆞᆼ〮ᄅᆞᆯ〮ᄆᆡᇰᄀᆞ〮노니〮) 내가 이를 위해 가엽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노니 부분에서 이런 의도로 쓰였다. [29] 이방석은 생전엔 세자였으니 군호가 없었고, 태종때 소도군, 숙종때 가서야 의안대군으로 추증받는다. 즉, 숙종 대 전에 실록에서 언급되는 의안대군은 십중팔구 이화다. [30] 뒤에 양녕대군의 경우는 좀 더 알려져서인지 이름을 지어줄 때 군호가 나오지 않았다. [31] 중국에서는 송나라 시절부터 활용되었던 황후의 예복으로 원나라 때 잠깐 자취를 감추었다가 명나라 때 다시 부활한 예복이다. 그래서 송나라를 배경으로 한 중국 사극에서 많이 등장하는 예복이기도 하다. [32] 실제로 SBS 홍천기의 경우 극 중 조선초기식 장저고리가 나왔다는 이유로 중국 네티즌들로부터 어이없게 명나라 한푸가 나왔다고 공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33] 조선 전기 한복은 명나라 의상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확실한 반면 조선 후기 한복은 조선만의 색채가 점차 강해졌기 때문인 측면도 있다. 명나라 등 한족 왕조에서 찾을 수 없는 한민족만의 독창적인 문화를 빼앗는 것이 중국의 한국 문화 예속화 시도의 주된 의도이니 말이다. [34] 다만 칠적관까지 썼으면 다소 중국색이 짙어보이게 되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중국 소분홍들로부터는 “저 봐라, 우리 중국옷을 입으니까 허구한날 한국은 중국을 따라한다”, 한국의 국수주의자들로부터는 “왜 한국 사극에 한복이 안나오고 중국 소품과 중국 의상이 나왔냐”라고 양쪽으로 뭇매를 맞았을 가능성도 있기때문에 칠적관은 빼서 그나마 중국색이 옅어보이게 만들려고 연출한 걸로 추정된다. 그러나 사실 조선 국왕이 착용한 곤룡포 익선관부터가 명나라에서 넘어온 건데 대중적으로 이 사실은 많이 알려져있지 않다. 결국에는 실제 중국에서 넘어왔냐 아니냐 역사적 사실보다는 대중적 인식이 더 좌지우지를 한 셈. 이 점을 감안하면 제작진의 설레발로도 볼 수 있다. [35] 다만 SBS 조선구마사에서 극 중 무녀가 중국색이 꽤 짙은 의상을 입고나왔다가 크게 비난당하고 드라마 자체가 폐지되었던 전적이 있는만큼 사극 제작진들 입장에서는 중국색이 짙은 의상이나 소품은 거의 지양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36] 정도전에서는 정도전과 남은 윤소종 등의 대화에 언급이 되었다. 육룡이 나르샤에서도 첫 과거장에 선비들이 거부하여 아무도 없는 것처럼 묘사하는 건 물론 이 일이 그 두문동 72현 전설으로 넘어갔다. [37] 유배 중이었던 정몽주 일파의 장살에 관련된 인물이기도 하다 [38] 후일 무인정사 직후 정도전 일파로서 처형을 당하게 되는 인물이다. [39] 공양왕 가계만쳐도 단양 우씨, 진주 강씨, 전주 이씨, 청송 심씨, 순천 박씨 등 폭넓게 엮여 있다. 여자들까지 건드렸다간 이 집안들까지 다 건드린다는건데 그게 될리가 있나. [40] 그나마 중국풍을 표현한 세트가 과거 대조영을 촬영했던 강원도 속초 설악씨네라마가 있었지만, 2019년 산불로 인해 완전 전소되었다. [41] 실제로 정릉은 처음엔 왕릉은 도성에서 10리(4km) 밖에 위치해야 한다는 예법마저 무시하고 4대문 안인 서울 중구 정동에 조성되었었다. 현재 정릉의 위치는 태조 사후에 태종에 의해 도성 10리 밖으로 이장된 것이다.(현 성북구 정릉동은 당시 도성 밖이었다.) 태종은 그때 정릉을 왕비의 능에서 후궁의 묘로 격하시킬 뿐만 아니라 석물들은 당시 준설 공사를 하던 청계천 광통교를 세울 때 그 재료로 사용하면서 거꾸로 뒤집어 박아버린다. [42] 이럴수 밖에 없는게 시간이 너무 없다. 1400년에 일어난 2차 왕자의 난부터 태종 승하까지 22년이나 남았는데 남은 홧수가 달랑 13화 밖에 없다(...) [43] 물론 이방간을 죽이지 않으려는 것은 진심이었다. 전투중에도 이방간에게 활을 쏘는 자는 베겠다며 수시로 외쳤고, 승리 이후에도 어떻게든 이방간을 죽이지 않기 위해 박포에게 독박을 씌워 박포만 죽이고 이방간은 귀양을 보냈다. [44] 오죽하면 2차 왕자의 난은 이방원이 경쟁자인 방간을 없애기 위해 기획했다고 보는 의견들도 있을 정도다. 박포를 이용해서 쿠데타를 부추키고 이로써 명분을 얻은 후에 방간의 정치적 생명을 끊어버린 것이 아니냐는 것. [45] 태종 2년 4월 1일 계축 1번째기사 [46] 다만 실제로는 호색 문제만 아니라 다른 정책들에 대해서도 주장한 상소였다. 그런데 호색 문제 지적에 대한 표현이 문제가 되어 논란이 되었다. [47] 태종 2년 5월 11일 계사 1번째기사 [48] 태종 8년 10월 1일 을해 4번째기사 [49] 태종 2년 10월 15일 을축 2번째기사, 태종 3년 3월 17일 갑오 1번째기사 [50] 용의 눈물에서는 하륜이 태종의 곁에 없었던 것을 정확히 묘사했다. 하륜이 이숙번에게 정국이 이렇게 불안정한데 명나라로 가야 한다며 한탄하는 장면도 있고 하륜이 사행을 최대한 빨리 마치려고 길을 서두르는 대목도 있으며, 난을 진압한 태종이 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인 하륜을 만나 군신 간의 격의도 잠시 내려놓고 포옹하는 장면도 있다. 다만 조사의의 난에 여진족이 개입하려 했으며 이 때 하륜이 영락제를 설득해 여진족이 물러가게 했다는 창작이 들어간 것이 문제. [51] 넙데데한 곤장으로 때리는 형벌은 곤형이고, 장형은 태형 매보다 조금 더 굵은 회초리~몽둥이로 때리는 형벌이다. 게다가 곤장은 특수한 영역에서만 쓰는 형벌 도구이다. [52] 과거에 방영된 용의 눈물에서는 하륜, 조영무를 정승에서 해임하고 이화를 영의정에 앉혀서 민씨 형제 탄핵을 주도시키는 장면이 자세히 그려진 바 있다. 같은 공신들보다는 왕족인 이화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한 이방원의 정치적 판단이었던 것. 이화 역시 태종의 뜻을 알고 영의정이 되자마자 민씨 형제 탄핵을 주도하고, 둘의 유배 이후 바로 자리에서 물러나고 하륜과 조영무가 다시 복귀한다. [53] 이 발언이 왜 위험한고 하니, 이방원은 세자 출신이 아니면서 다른 형제들을 죽이거나 쫓아내며 왕에 오른 인물이다. 당연히 가족간의 피를 보는 것이 좋던 싫던 트라우마로 남았을 텐데, 이 트라우마를 제대로 건드린 것. 또한 정도전이 죽은 뒤에 어떤 중죄가 씌워졌는지 생각해보자. 왕자를 죽이려 한 종친 모해죄였다. 이방원 입장에서 나쁘게 들으면 '효령, 충녕, 성녕대군이 죽어도 아무튼 가벼운 죄에요'라고 해석할 수도 있으므로 나이 들어서 자꾸 헛소리 하는 하륜이 아니었으면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위험한 발언이다. [54] 1408년 6월 사망 [55] 이 무렵에 양녕대군이 사춘기 나이에 들어서는데다 주요 사건들이 촘촘한 간격으로 일어나 긴 시간을 한번에 넘길만한 시점을 찾기 힘들고 아역에서 성인 배역으로 넘어가기 전에 청소년 배역을 더 넣으면 배우의 얼굴이 달라지는게 너무 눈에 띄어 몰입감이 떨어지기에 나이에 얽매이지 않고 성인 배역으로 바로 교체할 수 밖에 없다. [56] 태종 14년 1월 2일 정축 1번째기사 중 : 이숙번이 임금의 총애(寵愛)를 믿고 친히 성석린과 남재의 집에 가서 강제로 서명하게 하니, 성석린이 부득이하여 서명하였다. 그러나 임금에게 올리지는 못하였다. 이숙번이 또 헌부(憲府)를 사주(使嗾)하여 간관(諫官)의 죄를 탄핵하여 청하였다. [57] 용의 눈물에서는 이 부분이 충실히 묘사되어, 김한로가 "주상께서 내치라 하신 여인이 우리 집에 있으니..." 하는 식으로 독백하며 우려하는 장면이 있다. 또 충녕대군의 세자 책봉식에서 황희가 이를 비판하자 태종이 그를 유배에 처하라고 명령하는 한편 김한로가 폐세자를 잘못 이끌었을 뿐 아니라 그 집에 어리를 감추어 두고 있다니 그 또한 죄가 된다며 역시 끌어내라고 명하는 장면이 있다. [58] 태종 입장에서는 어쩔 수가 없는 게 세종 4년인 1422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사망한 해가 앞에 썼던 것처럼 1422년인데, 문종은 1414년, 세조는 1417년에 각각 출생했다. 훗날의 왕이 되는 두 사람은 할아버지 태종이 사망하는 해에 백부 양녕대군이 세자에 책봉된 나이보다 훨씬 어렸기 때문에 태종 입장에서는 그저 귀여운 손자들일 뿐이었다. 설마 둘째 손자가 증손자를 죽이고 왕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59] 애초에 항의문이 다음 문장으로 시작한다. 전하(殿下)의 시녀(侍女)는 다 궁중(宮中)에 들이는데, 어찌 다 중하게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입니까? [60] 2011년 KBS 공주의 남자에서 정종 역을 맡은 이민우는 허리에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거열형 촬영을 강행하는 투혼을 발휘했는데 이 대가로 허리부상이 심하게 도져서 하무지 역으로 출연이 예정되어 있던 광개토태왕 출연이 불발되고, 종영 2달 뒤 열린 연말 시상식에도 불참했다. 공교롭게도 온녕군 역의 윤승원이 하무지 역으로 출연했다. [61] 다만 차이가 하나 있는데, 용의 눈물에서의 태종은 기우제를 지내다가 비가 내리는 것을 직접 보고 "드디어 이 몸을 용서하여 주시나이까!" 를 외친 뒤 승하한 반면 본작에서의 태종은 비가 내리는 것을 끝내 보지 못한 채 승하했고 그 뒤에 비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