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18:34:55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라틴어: Marcus Livius Drusus
이름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Marcus Livius Drusus)
가문 리비우스 드루수스(Livius Drusus)[1]
출생 기원전 122/124년, 로마 공화국 이탈리아
사망 기원전 91년, 로마 공화국 이탈리아 로마(향년 31/33세)
직위 원로원 의원, 호민관
계급 노빌레스
종교 로마 다신교
선출직 안찰관(기원전 94년)
호민관(기원전 91년)
부모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아버지)
코르넬리아(어머니)
배우자 세르빌리아(기원전 100년경 결혼 ~ 기원전 97년 이혼)
형제자매 이름 미상의 여자형제(누나)[2]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형)[3]
리비아(여동생)[4]
자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양자, 조카)
리비아(추정)[5]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초창기의 삶2.2. 호민관 출마 배경과 당선2.3.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개혁2.4. 필리푸스와의 갈등 그리고 드루수스의 반발2.5. 암살
3. 가족 관계4. 사후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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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정 후기의 로마 원로원 의원, 호민관.

서구권에서는 평민귀족으로 공화정 후기의 옵티마테스 거두인 동명이인 아버지와 구분하고자, 소(小)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라고 한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인, 리비아 드루실라의 법적 할아버지[6]로,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개혁에 일부 영향을 끼친 인물로 유명하다.[7] 따라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서 공화정 시대의 정통성상 언급되는 궁극적 조상으로 추앙됐고, 그의 가문 성씨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그와 그 일가의 특별한 개인이름으로 남녀 황족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아버지, 친형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 매형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양자이자 외조카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 외조카 소 카토와 달리, 상당히 온건하고 합리적인 옵티마테스였다. 따라서 그라쿠스 형제 중 온건하고 합리적인 개혁가로 평가받는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와 많이 비교된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마찬가지로, 포에니 전쟁 이후의 로마 현실을 개혁하고자 입법 개혁, 이탈리아인들에게 시민권 개방 등을 추진했다고 알려져 있다. 호민관으로 있던 중 이탈리아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려고 했다가, 신원 미상의 암살범들의 공격을 받아 자택 근처에서 암살됐고, 이 사건은 동맹시 전쟁 발발 원인이 된다.

2. 생애

2.1. 출생과 초창기의 삶

기원전 122년 또는 124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 로마인이 말한 "요람에서부터 집정관으로 만들어진 사람"의 전형으로, 그 가계과 혈통은 그라쿠스 형제와 비슷했다.

그라쿠스 형제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의 정적인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아들로, 어머니는 오래된 파트리키인 코르넬리우스 가문 출신의 코르넬리아이다. 아버지는 기원전 122년 호민관, 기원전 112년 집정관, 기원전 109년 감찰관을 역임했고, 아버지의 증조부는 칸나이 전투에서 전사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였다. 소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고모 리비아는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의 아내였고, 고종사촌형은 원로원 의원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누두스이다. 고모부 루틸리우스 루푸스는 기원전 105년 집정관을 지내고, 아프리카에서 메텔루스 누미디쿠스를 보좌하고, 가이우스 마리우스 휘하에서 게르만족의 침공을 격퇴한 로마군 훈련을 담당한 거물 중 거물 정치인이었고, 청렴하고 정의로운 성격을 가지고 있어, 어린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위로는 이름 미상의 누나, 1~2살 위의 형이 있고, 아래엔 소 카토의 어머니로 유명한 여동생 리비아가 있다. 4남매 중 맏이인 누나는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결혼했다.

1~2살 위의 형이 알바롱가 시절까지 올라갈 만큼, 유서 깊은 파트리키 계급의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문에 영아때 입양됐다. 그 이유는 아버지의 증조부 집안에서 대가 끊겨 이를 잇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태어난 직후부터 가문의 후계자가 됐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에게 가문의 후계자로 길러졌는데, 기원전 109년 감찰관인 아버지가 임기 중 사망하자, 일찌감치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의 당주가 됐다.

동시대 로마인으로, 그를 잘 알고 있던 키케로에 따르면, 어릴 때부터 원칙적이고, 정의롭고, 성실한 청년로, 허례허식을 좋아하지 않고, 예의가 바르기로 유명했다. 또 자신감이 대단하고, 열정적이고, 머리가 좋고 유능하기로 유명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기원전 102년 아시아 속주에 파견된 재무관 시절, 다른 재무관들과 달리 존경의 표시로 받을 수 있는 공식 휘장 착용을 거절했다. 이때 그는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동료 귀족들에게, 당돌하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가진 휘장은 바로 나 자신이다."

이런 발언처럼 그는 늘 떳떳했는데, 출신 가문이 명문가 중 명문가이고, 외가 역시 코르넬리우스 가문이면서도, 부모와 외가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많았던 것은 이런 그를 더 빛나게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진중하고, 항상 검소하고, 잘난 척을 하지 않아, 원로원 의원들과 로마귀족들은 이런 그가 아버지 대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받은 칭호 "파트로누스 세나투스(원로원의 수호자)"를 물려받아도 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성격과 모습처럼 그는 항상 남에게 베풀고, 아랫사람들이 실수를 해도 관대하게 이해한 인격자로도 주변에게 큰 존경을 받았다. 따라서 주변에선 이런 그가 너무 많은 돈을 쓰면서, 남에게 베푼 것을 두고, 걱정을 했다. 그렇지만 그는 이런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기원전 94년 일시금으로 대규모 검투사 경기 비용 일체를 지불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흙과 공기 외에는 누구에게도 줄 것이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고 평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런 모습에도 워낙 검소해, 여전히 부유했다.

2.2. 호민관 출마 배경과 당선

아버지에게 원로원 의석을 세습했고, 부모와 외가에게 일찍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많아,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사실 호민관에 굳이 나설 이유가 많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 경력 역시 그랬는데, 그는 어머니와 친척들의 응원 아래에서 명예로운 경력을 밞아 나갔다. 기원전 102년 재무관, 기원전 94년 안찰관을 지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소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기원전 91년 호민관에 입후보했다.

그가 이렇게 한 이유는 아주 어릴 적 그에게 큰 인상을 준 사건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그가 존경한 고모부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가 재산 강탈 혐의로 유죄선고를 받은 일이었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고모부 루푸스는 아시아 속주에서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총독 아래에서 부총독으로 있었는데, 그는 조카 소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존경할 만큼, 강직하고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루푸스는 세금 징수 민간조합인 푸블리카니[8]의 과도한 세금 징수를 규제하고, 그들을 법 테두리 안의 잔혹한 고리대금업자라면서 법대로 처벌하면서 속주민들을 보호했다. 이 조치는 속주에 파견된 공화정 ~ 원수정 시대의 푸블리카니 선정이 입찰을 통해 최저가를 제시한 쪽에서 낙찰자가 된 이후, 세금 징수 용역 분야의 경우에는 속주민에게 일명 통행세 명목 등으로 과도하게 세금을 징수하거나 약탈하듯이 속주민 재산을 강탈해 집어 삼키는 것으로 원성을 산 일명 '로마의 속주화'라는 이름의 행태를 로마 정부의 관료가 처음으로 개입했다는 점에서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줬다. 특히, 포에니 전쟁 이후 푸블리카니가 로마가 패권국이 되면서 간접세가 생기고, 그 과정에서 항만세, 통행세를 만들어 징수한 뒤 이를 원로원, 총독과 막대한 이득을 호주머니에 넣어 이윤을 남기는 행태에 대한 첫 도전이라는 점에서 이는 옵티마테스, 포풀라레스 상관없이 목소리 높아지는 기사계급을 견제했다는 점에서 큰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푸블리카니의 이런 행태는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 대 카토,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처럼 대쪽 같고, 이런 부패를 극도로 혐오한 인사들 외에게는 대개는 눈 감고 봐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더해 호민관들과 민회 안에서는 푸블리카니와 연관된 인사가 많아, 이 점은 드루수스의 고모부를 곧 위험에 빠뜨렸다. 결국 루푸스는 기사계급이 장악한 법원 배심원들에게 누명을 쓰고, 민회에서 열린 재판에 회부됐다.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던 민회에선 루푸스를 질타했고, 그는 국외 추방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자연스레 어린 드루수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더군다나, 그는 늘 남에게 베풀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포풀라레스와 옵티마테스가 기사계급, 고리대금업자들과 함께 부정부패하고 농민과 도시 빈민들에게 무관심한 것을 본 뒤, 호민관 입후보를 다짐했다. 하여 그는 기원전 91년 호민관 선거에 직접 입후보해, 자신이 이런 로마의 현실을 바꾸려고 했다.

그렇지만 이런 드루수스의 입후보는, 원로원 내 과격한 옵티마테스, 포풀라레스들이 그를 미워한 이유가 됐다. 이때 옵티마테스 중 일부는 그를 "선동가", "그라쿠스의 재림"이라고 욕하고 중상모략했고, 일부는 그의 행보를 아버지와 비교하면서 포풀라레스로 변심했다며 증오심을 표출했다. 이는 포풀라레스 일부도 비슷했는데, 그들은 타고난 부자인 그가 논란을 만든다고 나쁘게 봤다.

하지만 동시대 키케로가 증언했듯이,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되레 가난하고 헐벗게 된 로마 농민, 서민들의 삶을 개선해야,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 체제가 안정된다고 믿었다고 한다. 즉, 원로원 통치를 강화하면서 흔들리는 공화정 체제를 항구적으로 안정시키기 위해선, 호민관이 되어 민회 속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려고 이렇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키케로를 비롯해, 당시 프린켑스 세나투스였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 친형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연설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등은 이런 그의 진심을 알고,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원로원 내에서 그를 의심하던 옵티마테스, 포풀라레스 동료들 역시 그 속뜻을 알고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그는 입후보 후 쉽게 당선됐다.

2.3.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개혁

기원전 91년 호민관에 당선된 직후, 당시 노년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는 소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지나치게 세력이 커지고, 원로원의 권위에 도전한 기사계급들이 법정 배심원단에 참여해 벌인 반(反) 공화정 움직임을 제어해 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는 연설가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도 비슷했다.

당선 이후, 소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곧바로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법안들을 발의했다. 그 모습은 그라쿠스 형제 중 온건하고, 현실개혁적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의 행보와 비슷했다.

내용이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지만, 그는 모든 법안 발의의 구상을 포에니 전쟁 후 로마와 이탈리아 전역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는 것에 중점을 뒀다. 그러면서 그는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법을 개정해 법정 배심원단에 기사계급을 넣고, 법정을 당파 싸움으로 몰아간 법정 지배권 제도를 타파하는데 힘을 냈다. 그는 기사계급을 마냥 개혁 대상으로 보기 보다는, 원로원 의석 수를 대폭 늘려 유력하고 존경받는 기사계급 300명에게 신참자로서 의석을 준다는 당근책을 개혁 법안에 담았다. 따라서 교활하고 영악한 스카우루스 등은 드루수스가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 체제 유지를 위해 벌인 이 방법에 큰 만족감을 표했다.

그렇지만 드루수스가 보다 중점을 둔 것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처음 제기하고 입안한 농지법과 곡물 및 토지 개혁안, 푸블리카니의 편법 행위 제약 조치였다. 따라서 이런 드루수스의 개혁은 당연히 과거 그라쿠스 형제의 생전처럼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소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과거의 그라쿠스 형제와 달리, 이 개혁안의 주요 내용과 골자는 "평민과 민회의 지지를 얻어, 원로원 주도의 소수 지배 체제를 확고히 한다."는 사탕발림이 많았다고 한다. 일례로 그는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새로운 로마인 정착 도시를 건설하자고 했고, 로마시민권을 가진 가난한 서민들에게 제공할 공공 토지 역시 새롭게 건설될 도시들을 중심으로 분배토록 했다. 또 그는 그라쿠스 형제와 달리, 본인이 재분배 10인 위원회에 참가하지 않고, 이를 원로원에게 할당해, 원로원의 권위를 세우는데 중점을 뒀다. 그래서 그가 입안한 토지법안은 통과됐다.

이렇게 토지분배법을 통과시키자, 소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곡물 가격을 낮추는 법안을 민회에 입안했다. 그러면서 그는 기사계급, 고리대금업자들이 뇌물을 수수하면 기소 후 처벌받도록 하는 법안을 입안했다. 이는 그동안 그들이 뇌물을 받아도 기소할 수 없는 사각지대를 해소하고자 한 목적, 그들과 공생관계인 푸블리카니에게 재갈을 물리고자 한 목적이 결합된 법안이었다. 이 법안은 특히 로마인 모두가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긴 청렴을 내세운 점에서 민회, 원로원의 압도적 지지 아래 통과됐다.

그리고 기원전 91년 말, 드루수스는 이탈리아인의 로마 시민화를 위한 특별법을 제안했다. 흔히 로마시민권 확대를 위한 법령 발의인데, 그 내용은 모든 이탈리아 내 자유민에게 로마시민권을 주자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2.4. 필리푸스와의 갈등 그리고 드루수스의 반발

소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연이은 법안 입안 중 가장 큰 논쟁을 일으킨 것은, 이탈리아인에게 로마시민권을 주자는 법안이었다.

그가 제안한 이 법안을 찬성한 사람에는 막강한 마르키우스 가의 수장인 퀸투스 포파이디우스 실로, 연설가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등이 있었다. 하지만 이 법안은 기본적으로 원로원 내에서 큰 논쟁거리가 될 만큼, 반발이 강했다. 하여 그 해 집정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함께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고, 젊은 호민관 드루수스의 행동을 그라쿠스 형제 중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같다고 여겼다.

당시 집정관인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는 법적 지식이 해박하고, 뛰어난 변호사였다. 그래서 그는 드루수스의 법안이 설령 원로원의 위엄을 강화할 목적이 있더라도, 법안의 성격과 상위 로마법과의 관계상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드루수스의 법안이 서로 다른 내용들을 하나의 법안으로 통합하지 못하게 규정한 로마법을 위반할 염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집정관 자격으로 드루수스가 가결시킨 법안의 상당 부분을 직권 폐기했다.

이렇게 되자, 드루수스는 물러서지 않고 필리푸스의 조치에 항의했다. 그는 이미 로마인과 이탈리아인이 오랫동안 함께 피를 흘린 사이이며, 둘을 나누는 것이 현실상 불가능함을 주지해, 미리 법제화하여 원로원 의원들이 새롭게 로마 시민권을 얻은 이탈리아인들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필리푸스는 이렇게 주장한 소 리비우스 드루수스에게 인격적 모독이 담긴 발언을 하면서, 드루수스가 출석한 회의에서 면전에 대고 맹렬히 비난했다.이에 소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당돌하게, 호민관을 비난한 필리푸스를 체포하라고 지시했다.(또는 직접 체포했다는 말도 있다.) 따라서 법안 통과를 막고 반드시 투표를 막으려고 한 필리푸스와 이를 강행하려는 드루수스 쪽에서 몸싸움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필리푸스의 코에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따라서 잠깐의 혼란이 벌어졌는데, 이때 소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필리푸스가 이름난 미식가로 사치스럽고 이기적인 행태를 비꼬기 위해, 냉정하고 당돌하게 이렇게 외쳤다.
"뭐, 코피라고? 저건 고기 수프일 뿐일세!"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처남인 법무관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역시 누이의 남편인 드루수스를 맹렬히 비난했다. 이때 카이피오는 피를 흘려가면서 저항한 필리푸스를 지지하면서, 투표 당일엔 법안 통과를 계속 반대했다. 이에 드루수스는 모든 법안을 하나로 합쳐 통과시키면서, 처남 카이피오에게 이렇게 외쳤다.
"가족이라고 해도 법무관 자리에서 내쫓아버리겠다!"

기원전 91년 9월, 상황은 험악하게 변했다. 드루수스의 연이은 법안(농지개혁법, 토지분배법, 곡물법, 기사계급 뇌물 수수 처벌법 등) 속에서 9월 13일에는 필리푸스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사이에서 험악한 논쟁이 벌어졌다. 필리푸스는 크라수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 이런 원로원과 일할 수 없다!"

필리푸스의 발언은 보수적이고 완고한 원로원 안에서 상황이 나빠지더라도 금기시된 유형의 발언으로, 험한 말이었다. 이는 협박으로 크라수스와 원로원 동료들에게는 선전포고였다. 그러니 상대에게 제대로 자신의 위엄이 손상된 크라수스는 필리푸스가 집정관 지위를 가지고 이렇게 원로원에서 협박을 하자, 이렇게 발언하면서 거칠게 되치기 했다.[9]
"내가 (당신을) 원로원 의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당신을 왜 집정관으로 봐야 합니까?"

필리푸스, 크라수스의 논쟁 속에서 필리푸스를 지지한 원로원 의원들은 곧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법안을 방해하는 법안을 냈다. 그렇지만 드루수스는 꿋꿋하고 떳떳하게 설득을 위한 연설을 할 뿐, 원로원의 권위를 존중하면서 호민관 권한 중 가장 강력한 거부권 등을 행사하지 않았다. 이 모습은 격론이 벌어지면 호민관이 거부권 행사를 행사한 기원전 2세기 이래의 분위기상 오랜만에 나온 신사 같은 행동이었고, 드루수스의 고결함 속에서 유혈사태로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막았다.

2.5. 암살

이런 가운데, 드루수스의 조치를 지지한 이탈리아인들 사이에서 필리푸스를 반드시 죽여버리겠다고 암살 모의가 돌기 시작했다. 이때 드루수스는 주변에 이탈리아 출신 친구들이 많고, 주변에 관련 정보망이 많아, 이를 가장 먼저 알게 됐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적대하긴 하지만 로마의 집정관인 필리푸스를 구하고자, 그에게 암살 위험을 경고했다. 그리고 며칠 후, 소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자신의 가문 클리엔테스와 친구들의 경호 속에 집으로 가는 도중, 제화용 칼에 복부와 목, 허리 등을 연이어 공격받고, 죽었다. 암살자들은 모두 도망쳤다. 그래서 드루수스는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 이때 그는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누가 나처럼 우리 공화국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Ecquandone similem mei civem habebit res publica)

이 사건 후 이탈리아인들은 분노해 일제히 무장 봉기 후 로마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그것이 바로 동맹시 전쟁이다.

3. 가족 관계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카이피오 가문 출신의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어릴 적부터 가장 친한 사이였다. 그리고 이런 인연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누이와 각각 결혼해, 서로 매형과 처남 사이를 맺었다. 하지만 둘은 기원전 91년 이탈리아인의 로마시민권 부여 문제로 정적이 됐고, 카이피오는 소 리비우스 드루수스 암살의 배후로 의심받아 필리푸스와 함께 법정에 기소돼 "친구이자 매형을 죽인 나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받았다.

드루수스는 카이피오의 여자형제 세르빌리아와 기원전 100년경 결혼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사이에서 아이를 얻지 못했고, 부부 사이의 갈등 문제 등으로 기원전 97년경 상호 합의 하에 이혼했다. 사이에 자녀가 있다는 기록이 뚜렷하게 없지만, 21세기 초에 추가 발굴, 연구 등으로 공화정 말의 귀부인으로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의 누이 리비아가 있어 일부 학자들은 사이에서 리비아를 얻었다고도 추정 중이다.

기원전 97년경 세르빌리아와 이혼한 뒤, 재혼을 하지 않았고 기원전 91년 말 살해됐다. 그래서 혈연상 직계는 끊겼다. 그러나 그는 세르빌리아와 이혼 이후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으로 시집을 간 이름 미상의 누나의 둘째 아들을 암살 전에 약조한 조치 아래에서 입양해 기원전 92년경부터 손수 키웠다.[10] 이렇게 입양해 친아들로 정성껏 키운 조카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인데, 두르수스의 조카이자 양자인 이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는 로마와 유럽 최초의 아우구스타인 리비아 드루실라의 아버지로,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외조부로 유명하다.

4. 사후 평가

여러 부분에서 그라쿠스 형제 중 합리적이었고, 고결했던 개혁가 내지 호민관으로 추앙받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많이 비견되고 있는 인물이다. 다만, 소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보다 당대부터 그와 달리 반(反) 공화적이지 않다고 대체로 평가받았고, 옵티마테스 포풀라레스 모두에게 그라쿠스 형제와 같은 수준의 논란 많은 인물까진 아니라고 평가됐다. 그래서 그는 공화정 체제의 위험 인물이라는 악평보다는 미래를 예측해 공화국을 지키고자 한 비운의 개혁가, 비극의 이상주의자라는 평이 늘 함께 따라 다녔다. 그리고 이런 평처럼 동맹시 전쟁 이후, 로마인들은 동맹시 전쟁이 시민권 확대 속에서 마무리되자, 대체로 드루수스의 말을 듣지 않아 세계 최고의 정예군인 로마군이 둘로 나뉘어 서로 싸우게 됐다면서 막을 수 있던 전쟁을 막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완고한 전통주의자 필리푸스, 카이피오 등에게는 큰 미움을 받았고, 기사계급과 고리대금업자들은 대놓고 리비우스 드루수스에 대한 증오심을 표출했다. 이들은 입을 모아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을 때, 드루수스를 모든 사건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욕을 했다. 이때 필리푸스, 카이피오를 필두로 한 이들은 "리비우스 드루수스 때문에 내전이 터졌다.", "드루수스가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다."며 맹렬히 비난했고, 그가 이탈리아인들을 자신의 클리엔테스로 만들어 세를 불리려고 한 야심가라고 맹비난했다. 이는 당대에 그의 개혁을 지지하지 않은 마리우스 등도 비슷했는데, 이들의 평 역시 드루수스가 무리하게 일을 벌여 동족상잔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그의 평은 당대부터 명암이 분명했고 논란의 인물로 분류됐다.

따라서 이런 분위기를 기술한 아피아노스는 《로마사》에서 이렇게 드루수스를 평가하면서 기술했다.
원로원과 기사계급은 여전히 서로 반목했지만, 리비우스 드루수스를 증오하는 것에서는 모두 한 마음이었다. 다만, 그의 정책에 만족한 사람들은 평민들 뿐이었다. 드루수스가 그 일을 추진한 것은 누구보다도 이탈리아인을 위해서였지만, 그들 역시 결과를 낙관하지 못했다.
아피아노스, 《로마사》






[1] 라틴어:Livii Drusi [2] 양자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의 어머니이다. [3] 이름에서 드러나듯, 아주 어릴 때,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문에 입양됐다. [4] 소 카토의 어머니. [5] 아우구스투스의 고모,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의 법적 남매이자 외사촌누나로 알려진 귀부인이다. 다만, 세르빌리아가 낳았는지, 아니면 드루수스가 기원전 97년경 재혼한 뒤 이름 미상의 아내와의 사이에서 얻었는지는 불분명하다. [6] 리비아 드루실라의 아버지인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의 어머니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누나이고, 양아버지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이다. [7] 아우구스투스가 집권한 뒤, 취한 개혁 중 심혈을 기울여 취한 것은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호민관에 입후보하고 당선된 뒤에 최선을 다했던 푸블리카니를 규제하고 그들의 권한을 무력화한 일련의 개혁이었다. 물론, 아우구스투스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개혁을 벌이면서, 푸블리카니와 한 몸과 같은 원로원까지 박살냈다. 그는 이들의 행동을 자신이 엿가락 늘리고 줄이듯 설계한 새로운 반역법 안에 명시해 그들을 사실상 범죄집단으로 규정한 조치를 취했고, 이렇게 하면서 원로원의 권한을 무력화시켰다. 아우구스투스는 속주에서 온갖 이름으로 은광, 금광, 로마군 군수품, 항구, 도로 등을 장악해 편법 아래에서 막대한 세금을 먹어치우고, 속주 총독과 손잡고 속주민들을 약탈하는데 열을 올린 푸블리카니를 자신의 주특기인 서서히 잠식해나가는 방법 아래 박살냈다. 로마군 군수품을 놓고, 협상이라는 이름으로 옥타비아누스 시절부터 친구 아그리파와 함께 이를 간 일 등을 떠올려, 그런 협상 자체도 금지하고, 만약 그런 기미라도 있으면 조합 자체를 박살냈다. 이는 후임자들인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아래에서도 이어졌고, 클라우디우스 1세 시대에도 계속 되었는데, 세 황제는 문자 그대로 부패 처벌, 군수품 관리 문제, 귀금속 광산 국유화 등을 이유로 푸블리카니에게 치명타를 입힌 것을 넘어 그들의 세입을 전부 전쟁비용, 속주 통치자금으로 돌렸다. 또 온갖 구실로 속주 총독에게 명령해, 이들을 무시무시한 반역죄로 철저히 때려 잡았다. 그 결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래에서부터 푸블리카니가 하던 일은 황제가 파견한 관료와 속주 총독 밑에 배속된 전문 세금 징수 관료가 가져간다. [8] 민간 조합 기업이다. 통상적으로 원로원에서 감독했고, 감찰관이 푸블리카니 특허권 선정, 철회를 담당했다. 특허를 받아 담당한 사업은 공공사업(도로, 상하수도, 수도교 건설 및 보수), 군 보급품(기병용 말, 로마군 갑옷, 무기), 세금 징수 용역 등이 있었는데, 이중 로마인 모두에게 악명 높기로 유명한 분야는 세금 징수 용역이었다. [9] 키케로에 따르면, 이 발언 일주일 후인 9월 20일 크라수스는 갑자기 사망했다고 한다. [10] 서구권 고전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소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누나의 둘째 아들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기원전 93년생)을 누나 부부의 허락 아래 자신의 호적에 올리고 친양자로 키운 것은, 당시 로마 귀족 사회에서도 진짜 빨리 조카를 양자로 맞이한 부분에서 이례적이었다. 왜냐하면 보통 로마귀족 사이에서 자녀가 없거나, 더 이상의 재혼 생각이 없는 로마귀족이 누나, 여동생의 자녀를 양자로 빨리 입양해도 보통은 2~4살 사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