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0 21:35:44

페르디난도 1세(나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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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페르디난도 1세(나폴리).jpg
Ferdinando I
가문 트라스타마라 왕조
출생 1423년 6월 2일
아라곤 왕국 발렌시아
사망 1494년 1월 25일 (향년 70세)
나폴리 왕국 나폴리
재위
기간
나폴리 왕국 국왕 1458년 ~ 1494년
아버지 알폰소 5세
어머니 게랄도나 칼리노
형제자매 마리아, 레오노라
배우자 클레르몽의 이자벨, 아라곤의 후아나
자녀 알폰소 2세, 엘레오노라, 페데리코, 베아트리체, 조반나 등
종교 로마 가톨릭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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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폴리 왕국 제12대 국왕. '페란테(Ferrante)'라는 별칭으로 알려졌으며, 동시대인들은 그를 '돈 페르난도(Don Ferrando)'라고 불렀다. 사생아라는 핸디캡으로 인해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정적들의 음모에 시달렸지만 모조리 물리치고 나폴리 왕국에 번영을 안겨주면서 재위 36년간 이탈리아의 정세에 막중한 영향력을 행사한 명군이다.

2. 생애

1423년 6월 2일 아라곤 왕국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알폰소 5세와 나폴리 출신의 정부 게랄도나 칼리노(Gueraldona Carlino)의 사생아로 출생했다. 칼리노는 나중에 바르셀로나에서 가스파 르베르디(Gaspar Reverdit)와 결혼했다고 전해질 뿐, 이 이상의 정보는 기록이 미비해 확인하기 어렵다.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함께 바르셀로나에 지내던 그는 1438년 7월 나폴리 왕국 정복에 나선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나폴리로 향했다.

지금까지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생부와 만난 페르디난도는 얼마 안가 알폰소 5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중간 키에 큰 머리, 아름다운 이마와 균형이 잡힌 허리, 다소 어두워보이는 인상을 갖췄으며, 체격이 건장하고 힘이 세면서도 머리가 매우 비상해 탁월한 논리를 구사할 줄 알았고 언변 능력이 뛰어났으며, 매사에 겸손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기회가 올 때마다 잇속을 챙겼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한 번 정한 목표를 이룰 때까지 끊임없이 도전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깊은 존경심을 표하며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다. 알폰소 5세는 그런 아들을 마음에 들어 해 전장에서 활약할 기회를 줬다.

1438년 9월 레나토와의 전쟁에 참여한 페르디난도는 최전선에서 용맹을 떨쳤고, 아버지로부터 기사로 선임되었다. 1439년 9월 나폴리 공방전에서 알폰소 5세의 동생 페드로가 전사하자, 알폰소 5세는 페르디난도를 시칠리아 왕국군 부사령관으로 선임했다. 이후 아들의 활약으로 레나토를 상대로 승승장구하자, 1440년 2월 17일에는 페르디난도를 자신의 친자식이자 나폴리 왕위 계승자로 선포했고, 1441년 1월 베네벤토에 소집한 회의에서 귀족들로부터 페르디난도에게 충성을 바치겠다는 맹세를 받아냈다. 1443년 3월 산 리구오로 수도원에서 페르디난도에게 칼라브리아 공작 작위를 수여했다.

1443년 7월,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교령 <가장 높은 곳에서 군림하다(Regnans in altissimis)>는 페르디난도가 나폴리 차기 국왕으로 선임되는 것을 용인했다. 1451년 즉위한 신임 교황 니콜라오 5세 역시 페르디난도의 즉위를 승인했다. 페르디난도는 1444년 코페르티노 백작 바르톨로뮤 '트리스탄' 드 클레르몽의 장녀이며 나폴리 전임 국왕 라디슬라오와 뤼지냥의 마리아의 손녀인 이자벨과 결혼했다. 1458년 6월 27일 제노바를 향한 원정에 착수하려던 아버지가 갑작스런 중병에 걸려 나폴리의 카스텔 누오보에서 사망한 뒤, 나폴리 왕국의 새 국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알폰소 5세 생전에는 페르디난도의 나폴리 왕 즉위를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던 이들은 정작 페르디난도가 등극하자마자 "사생아가 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문제삼기 시작했다. 교황 갈리스토 3세는 1458년 7월 12일 칙서에서 페르디난도를 "무어인 하인의 아들"이라고 깎아내리며 나폴리의 왕좌가 비었으니 새 국왕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갈리스토 3세는 한 달 후인 1458년 8월에 세상을 떠났고, 새 교황 비오 2세는 페르디난도를 왕으로 인정하고 1459년 2월 4일 바를레타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폴리 귀족들은 여전히 그의 집권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타란토 공작 조반니 안토니오 오르시니 델 발초, 로사노 공작 마리노 마르차노, 크로토네 후작 안토니오 센텔레스, 아티 공작 지오시아 아쿠아비바, 컨버사노 백작 줄리아 안토니오 아쿠아비바는 아라곤-시칠리아 국왕 후안 2세에게 사절을 보내 나폴리로 와서 사생아를 쫓아내고 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페르디난도는 그들의 동태를 눈치채고 투르코 치치넬로, 안토니오 달레산드로를 아라곤으로 보내 후안 2세에게 자신을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후안 2세는 내심 나폴리 왕국도 자기 것으로 삼고 싶었지만, 카탈루냐, 아라곤, 나바라 등지에서 발발한 대규모 반란을 수습하는 데 골머리를 앓고 있어서 나폴리에 군대를 보낼 수는 없었기에 일단 페르디난도의 집권을 용인하기로 했다.

후안 2세가 요청에 응하지 않자, 귀족들은 로렌 공작이자 알폰소 5세와의 전쟁에서 패배해 나폴리 왕위를 잃어버린 레나토의 장남이었던 장 2세를 추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장 2세는 귀족들의 요청을 받고, 지금이야말로 아버지가 잃어버린 왕좌를 되찾을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1460년 마르세유에서 대규모 함선을 이끌고 나폴리로 항해했다. 페르디난도는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해 전국의 귀족들에게 소집령을 내렸지만 이에 응한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고, 많은 귀족들은 앞다퉈 장 2세에게 투항했다. 이때 타란토 공국, 시트라 공국, 바실리카타, 칼라브리아, 크로토네 일대가 장 2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장 2세는 내친김에 나폴리를 공략하려 했지만, 다른 곳에서 반란을 진압하고 있는 남편을 대신해 나폴리 수비를 맡은 이자벨 왕비가 결사적으로 항전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로사노 공작 마리노 마르차노는 아예 페르디난도를 죽이고 수급을 장 2세에게 바쳐서 신임을 독차지하기로 마음먹고 페르디난도를 함정으로 유인하려 했다. 그는 페르디난도의 스승이었던 카탈루냐 출신 인문학자 그레고리오 코레글리아에게 국왕과 화해하고 그의 은총을 빌고 싶으니 국왕과 대면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페르디난도는 나폴리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갖춘 귀족 중 한 명인 로사노 공작이 귀순하겠다고 제안한 것에 반색하며 1460년 5월 29일 테아노 근처 토리첼라에 있느 작은 교회에서 만나기로 각각 2명의 동반자를 데리고 만나기로 했다. 이후 마리노와 만난 페르디난도는 프랑스군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며 좀더 깊숙한 곳으로 이동하자는 마리노의 제안을 수상하게 여기다가, 마리노와 함께 온 데이포보가 손에 숨기고 있던 단검을 보고 그들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들었다. 마리노와 데이포보는 페르디난도의 압도적인 용력을 당해내지 못하고 부상을 입은 채 도주했다.

1460년 7월 7일, 페르디난도는 장 2세의 프랑스군과 반란군을 상대로 사르노에서 맞붙었으나 패배를 면치 못했고, 적에게 포위되어 목숨을 잃을 위기에 몰렸다. 이때 조수에(Giosuè)와 마리오 롱고(Marino Longo)가 이끄는 카바 데 티레니(Cava de' Tirreni) 시 의용병 및 징집병 부대가 전장에 도착한 뒤 산을 올라 프랑스군을 요격하자, 장 2세는 새로운 적의 출현에 놀라 물러섰다. 페르디난도는 그 덕분에 포위망을 뚫고 놀라를 통해 나폴리로 후퇴했다. 이후 로렌 공작이 나폴리 왕국을 삼키면 자기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한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페르디난도를 돕기로 마음먹고, 형제 알레산드로 스포르차와 조카 로베르토 산세베리노에게 병력을 맡겨 나폴리로 파견했다.

칼리초 백작 로베르토 산세베리노는 페르디난도에게 반란을 일으킨 마르시코 백작과 산세베리노 백작의 친척인 점을 살려 두 사람을 설득했고, 두 사람은 '왕자'라는 칭호를 자유롭게 쓸 수 있고 동전을 독자적으로 주조할 수 있는 등 많은 혜택을 주겠다는 페르디난도의 제안에 따라 페르디난도를 지지하기로 했다. 여기에 교황령 북쪽과 남쪽에 단일 국가가 세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비오 2세 역시 페르디난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자, 장 2세를 지지했던 나폴리 귀족들 상당수가 페르디난도 쪽으로 도로 귀순했다. 게다가 알폰소 5세의 봉신을 자처한 이래 나폴리 왕국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았던 알바니아의 군주 제르지 카스트리오티가 페르디난도를 돕기 위해 수많은 수송선과 700명의 기병, 1,000명의 베테랑 보병을 파견하자, 전세는 페르디난도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1462년 8월 18일, 페르디난도와 알레산드로 스포르차는 트로이아 전투에서 로렌 공작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1463년 9월 세사에서 포위된 타란토와 로사노 공작 마리노 마르차노는 항복 후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고, 장 2세는 이스키아 섬으로 피신했다. 그해 11월 16일, 가장 강력한 반 페르디난도 세력 지도자였던 타란토 공작 조반니 안토니오 오르시니 델 바조가 병사하면서, 반란군은 지리멸렬해졌다. 페르디난도는 장 2세가 도망친 이스키아 섬을 제외한 왕국 전역을 회복한 뒤 아풀리아 영지를 왕비 이자벨에게 양도했다.

장 2세가 이스키아 섬에서 버티면서 나폴리 만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하자, 페르디난도는 아라곤 국왕 후안 2세에게 함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1464년 봄 카탈루냐 함대가 이스키아 섬으로 다가와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자, 더 이상 저항할 여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장 2세는 2척의 갤리선과 함께 프로방스로 달아났다. 니콜라 디 캄포바소 백작, 자코모 갈레오타, 로팔로 델 주디체 등이 장 2세를 따라 망명했다. 페르디난도는 카탈루냐 함대에 막대한 보물을 하사하고 돌려보냈고, 장 2세가 아버지 레나토의 지시에 따라 아라곤으로 쳐들어가자 나폴리 민병대를 아라곤으로 보내 후안 2세를 도왔다.

이리하여 로렌 공작의 침략과 귀족들의 반란을 극복한 페르디난도는 왕국이 전쟁의 참화로부터 회복될 시간을 벌기 위해 결혼 동맹을 추진했다. 장남 알폰소와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딸 이폴리타 마리아 스포르차의 결혼을 주선했으며, 큰딸 엘레오노라를 페라라 공작 에르콜레 1세 데스테와 결혼시켰으며, 작은딸 베아트리체를 헝가리 왕국의 국왕 마차시 1세와 결혼시켰다. 1465년 3월 30일 장 2세의 침략으로부터 나폴리를 끝까지 사수하는 등 페르디난도를 적극적으로 도왔고 자식을 6명이나 낳아줬던 왕비 이자벨이 사망하자, 그는 장례식을 정성껏 치르고 유해를 산 피에트로 마르티레 성당에 안장했다. 이후 12년간 홀아비로 지내다가 1477년 후안 2세의 딸인 후안나와 재혼했다.

한편, 페르디난도는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을 숙청하고 그들의 영지를 몰수한 뒤 자신에게 충성한 이들에게 나눠줬다. 또한 귀족들이 언제 또다시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여기고,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평민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1466년 농부들이 그들의 생산물을 지역 영주에게 정해진 가격에 팔아야 하는 의무에서 해방시켜, 귀족들이 이전보다 비싼 값을 치르게 만들었다. 또한 국가 소유의 도시들에게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부여하고 도시 귀족들에게 특혜를 줌으로써 기존의 봉건 귀족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도구로 키웠다.

또한 토지를 사재기하는 귀족들을 견제하고자 농부들이 그 토지에서 나는 과실을 판매하는 것에 대해 귀족이 간섭할 수 없게 했으며, 1469년에는 교회의 면책권을 재조사해 실제로 예배에 헌신하는 사람들에게만 면책권을 맡겼다. 또한 산업, 특히 비단과 양모 산업 육성에 힘을 기울여 왕국의 국력 증진에 보탬이 되게 했다. 페르디난도의 이같은 정책은 큰 성과를 거두어, 전쟁으로 피폐해졌던 나폴리 왕국은 빠르게 회복되었고 국고는 충실해졌다. 그는 재원이 풍족해지자 예술가, 인문학자, 철학자, 법학자, 그리고 과학자들을 전폭적으로 후원했다. 또한 그는 나폴리에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실시하고 주변 지역의 실업자들을 나폴리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실시했고, 나폴리는 이를 통해 남부 이탈리아 최대의 도시로 성장했다. 그는 나폴리 대학교에 막대한 지원을 했으며, 명망높은 교수들을 초빙해 학생들이 우수한 교육을 받게 했다.

1464년 8월 19일, 페르디난도를 성심껏 도왔던 교황 비오 2세가 선종했다. 그 후 새 교황에 즉위한 바오로 2세는 페르디난도에게 그동안 보내지 않은 십일조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페르디난도는 지난 전쟁으로 인해 나폴리 왕국이 피폐해져서 돈을 지불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또한 시칠리아는 삼촌인 후안 2세가 지배하고 있고 자신은 나폴리만 다스리고 있는 상황에서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이 한 나라였을 때 부과된 십일조 전부를 자신만 지불하는 것은 부당하니 감면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바오로 2세는 그가 전임 교황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으니 보답해야 한다며 묵살했다. 여기에 알폰소 5세가 교황청에 양도했던 영토를 돌려달라는 페르디난도의 요구에 교황청이 난색을 표하면서, 양자간의 갈등은 고조되었다. 그러다가 1471년 7월 26일 바오로 2세가 사망한 뒤 새 교황 식스토 4세가 교황에 올랐다. 나폴리 왕국과 갈등을 벌여봐야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식스토 4세는 1475년 나폴리 왕국에 인구 조사를 벌이는 것을 중단하면서도 매년 잘 손질된 백마를 로마에 보내게 했다. 페르디난도는 이에 보답하고자 소라 공국을 식스토 4세의 친족인 레오나르도 델라 로베레에게 양도했다.

페르디난도는 평화를 지속하기 위해 피렌체, 밀라노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1470년 3월 밀라노 공국이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와 동맹을 맺으면서 왕국의 안위가 위험해지자, 그는 밀라노를 지배하는 스포르차 가문이 본래는 제노바 출신인 것에 많은 밀라노인들이 반감을 품고 있다는 점을 활용해 주빈들을 설득해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1471년에는 잉글랜드 왕국, 부르고뉴국, 베네치아 공화국과 동맹을 맺고 에게 해에서 위협을 가하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 공동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아드리아 해 에게 해에서 막강한 위세를 떨치는 베네치아를 질시한 식스토 4세의 권고에 따라 1473년 베네치아와 동맹을 끊었고, 1474년 11월 2일 밀라노, 피렌체 등이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자 1475년 1월 교황령과 동맹을 맺고 대항했다.

1475년,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가 앙주를 차지하면서 나폴리 왕위에 대한 앙주 공국의 권리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조카딸 안 드 사보이아와 페르디난도의 아들 페데리코의 결혼을 제안했지만, 프랑스의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질 것을 우려한 페르디난도는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았다. 1476년 밀라노 공작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가 죽자, 페르디난도는 교황 식스토 4세와 손잡고 밀라노 공국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했다. 그는 제노바와 스위스를 선동해 밀라노를 공격하게 했고, 밀라노의 지배를 받던 제노바와 사보나가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여기에 더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딸 쿠니쿤데를 페데리코와 결혼시킴으로써 신성 로마 제국이 북이탈리아 공략을 도와주기를 희망했지만,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이탈리아 정세에 뛰어들기를 꺼린 프리드리히 3세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무산되었다.

제노바 공화국은 페르디난도의 지원에 힘입어 스포르차 가문의 지배에서 독립했지만, 사보나는 독립에 실패했다. 여기에 밀라노가 스위스의 공세를 어렵사리 물리치는 데 성공했고, 교황 식스토 4세 마저 입장을 바꿔 밀라노 편을 들어버리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에 앙심을 품은 페르디난도는 교황령에 속한 치타 디 카스텔로에서 교황을 상대로 반기를 일으킨 니콜로 비텔리(Niccolò Vitelli)를 은밀히 지원했으며, 베네치아 공화국에 맞설 동맹을 찾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와 비밀 동맹을 맺었다. 메흐메트 2세는 골치거리인 베네치아를 견제할 동맹을 찾은 것에 기뻐하며 나폴리 상인들이 시리아, 이집트, 튀니지 등지에서 자유롭게 상업 활동을 할 수 있게 해줬다. 또한 페르디난도는 1478년 루이 11세의 제안에 따라 페데리코와 안 드 사보이아를 결혼시켰다.

1478년 4월 26일, 파치 가문이 교황 식스토 4세, 살비아티 가문, 그리고 리아리오 가문과 함께 피렌체의 통치 가문으로 군림하던 메디치 가문을 처단하기 위해 벌인 '파치 음모(Congiura dei Pazzi)'가 발발했다. 메디치 가문의 수장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는 이때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피렌체를 무사히 빠져나갔지만, 그의 동생 줄리아노 디 피에로 데 메디치는 살해되었다. 피렌체 시민들은 이 사건에 분노해 공모자들을 모조리 잡아서 즉결 심판을 통해 교수형에 처했는데, 그 과정에서 식스토 4세의 심복이자 피사 대주교인 프란체스코 살비아티가 시민들에 의해 효수되었다. 식스토 4세는 이에 분노해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 시, 토스카나 전역에 파문을 선고하고 성무금지령을 내렸다. 여기에 더해 로마의 메디치 은행을 비롯한 메디치 가문의 모든 재산을 몰수했고, 피렌체 정부에게 로렌초를 로마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피렌체 시가 거부하자, 식스토 4세는 페르디난도 1세와 동맹을 맺고 피렌체에 전쟁을 선포했다.

이후 이 전쟁을 영토 확장의 기회로 보고 아들 알폰소에게 군대를 맡겨 피렌체를 공격하게 했다. 피렌체는 나폴리-교황 연합군에 맞서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연전연패했고, 무역 활동이 끊겨 경제가 쇠퇴하고 역병마저 창궐해 수많은 이가 죽어나가자 시민들이 견디다 못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이에 로렌초는 1479년 12월 단신으로 나폴리로 가서 페르디난도 1세와 평화 협약을 교섭했다. 그는 교황이 바뀔 때마다 교황청의 정책이 계속 바뀌니 그들을 신뢰할 수 없으며, 피렌체 만큼 나폴리 왕국에 가치있는 우방이 없다는 점 등을 들며 페르디난도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처음에는 로렌초의 주장을 거들떠 보지 않고 피렌체 공략을 이어갔지만, 3개월 만에 마음을 바꿔먹고 "전쟁 배상금을 나폴리 왕국에 지불하고 파치 가문 인사들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전쟁을 끝내기로 했다. 삭스토 1세는 이에 분노해 전쟁 지속을 천명했지만, 나폴리가 이탈한 상황에서 피렌체를 꺾을 길이 없다는 게 분명해지자 어쩔 수 없이 피렌체에 대한 성무금지령을 철회하고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한편,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마지막 군주 레오나르도 3세는 1477년 페르디난도의 조카 프란체스카 마르자노와 결혼했다. 그는 이를 통해 나폴리의 지원을 받기를 희망했지만, 페르디난도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고 오히려 나폴리의 영향력이 자칸토스 제도에 미치기를 바라지 않았던 베네치아의 반감만 사, 이후로는 베네치아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결국 1479년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을 상실하고 나폴리로 망명한 레오나르도 3세는 페르디난도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고, 칼라브리아의 브라이티코와 칼리메라를 영지로 부여받았다. 하지만 자칸토스 제도를 탈환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달라는 요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480년, 메흐메트 2세가 파견한 오스만군이 오트란토 시를 기습 공격해 함락시키고 주민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페르디난도는 급히 브린디시를 요새화하여 오스만군의 북상을 저지한 뒤 유럽의 모든 군주들에게 구원을 호소하는 한편 피렌체에게 일전의 전쟁에서 빼앗아갔던 모든 영토를 돌려주는 대가로 자신을 도울 병력을 보내게 했다. 얼마 후,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가 장인을 돕기 위해 파견한 1,700명의 보병과 300명의 기병이 브린디시에 도착했다. 교황 역시 22척의 제노바 갤리선과 함께 추기경을 파견했으며, 피렌체에 내렸던 파문을 취소하고 오스만군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낼 때까지 기독교인간의 전쟁을 금지한다고 선포했다.

오스만군은 북상을 시도했지만 거센 저항에 부딪치자 오트란토로 후퇴한 뒤 그곳에서 농성하다가 1481년 5월 3일 메흐메트 2세가 사망하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철수했다. 이후 페르디난도는 레오나르도 3세에게 12,000두카트의 돈을 빌려줘서 자칸토스 섬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공략하게 했으며, 1483년 로도스가 바예지트 2세가 파견한 오스만군에게 포위되자, 즉시 구원군을 보내 그들을 격퇴했다. 로도스를 지키던 구호 기사단은 자신들을 구원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페르디난도를 기사단장으로 추대했다.

1482년, 교황 식스토 4세와 베네치아 공화국이 동맹을 맺고 페르디난도의 사위인 페라리 공작 에스콜레 데스테를 상대로 전쟁을 단행했다. 페르디난도는 오스만군의 침략으로 벌어진 오트란토 전쟁에서 입은 피해가 컸기에 페라라 공작을 섣불리 돕지 못했다. 그러다 페라라 공국의 영토 대부분이 교황-베네치아 연합군에게 짓밟히자, 베네치아와 교황령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위를 돕기로 했다. 나폴리 왕국이 페라라를 도우면서 전쟁이 장기화되자, 교황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기세는 점점 약해졌다. 이에 삭스토 4세는 1483년 돌연 방침을 바꿔 나폴리와 평화 협약을 맺고 베네치아인들에게 그들이 점령한 모든 것을 페라라 공작에게 돌려주라고 지시했다. 베네치아인들이 거부하자, 교황은 베네치아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베네치아인들은 오히려 전의를 불태우며 전쟁을 이어갔다.

페르디난도는 베네치아를 굴복시켜야 전쟁이 끝날 것임을 깨닫고 교황을 설득해 베네치아인들에게 파문을 선고하고 이탈리아 각 도시들에게 베네치아 상인들을 추방하라고 권고하게 했다. 이후 아들 페데리코에게 50척의 갤리선을 줘서 안코나 해안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베네치아 함대는 거센 반격을 해 이들을 격파했고, 1484년 봄 로렌 공작 르네 2세가 지휘하는 120명의 프랑스 기사와 베네치아 보병대로 이뤄진 군대를 바다를 거쳐 이동시켜 갈리폴리, 나르데, 모노폴리 등 오트란토 일대의 여러 해안 도시들을 공략했다. 페르디난도는 베네치아를 무력으로 꺾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1484년 8월 27일 베네치아에 평화를 요청했다. 이후의 협상 결과, 나폴리 왕국이 빼앗아간 베네치아의 영토와 베네치아인들이 빼앗아간 오트란토 일대의 영토를 맞교환하며, 페라라는 일전에 빼앗겼던 영토를 되돌려받는 대신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1484년 8월 12일 삭스토 4세가 선종한 뒤 새 교황에 즉위한 인노첸시오 8세는 전임 교황이 베네치아에 선고했던 파문을 해제한 뒤 나폴리 왕국에서 인구 조사를 벌여서 인두세를 거두려 했다. 1485년 6월 29일, 페르디난도는 안토니오 달레산드로를 로마에 보내 교황에게 백마를 바쳤지만, 교황은 이를 받기를 거부했다. 교황이 페르디난도와 마찰을 벌이자, 페르디난도의 귀족 억압 정책에 불만을 품어왔던 귀족들은 교황청에 전령을 보내 교황청이 나폴리 왕국에서 인구 조사를 벌이도록 할 의향이 있으니 자신들이 페르디난도를 축출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교황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에게 로렌 공작 르네 2세를 보내 나폴리 왕국을 정복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얼마 후, 귀족들의 음모를 포착한 칼라브리아 공작이자 페르디난도의 장남 알폰소가 놀라 백작령을 기습 공략해 놀라 백작의 아내와 두 자녀를 나폴리에 있는 카스텔 누오보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자, 다른 귀족들은 자신들의 영토에 대해서도 똑같이 할 것을 두려워해 곧장 반란을 일으켰다. 이리하여 왕국이 혼란에 빠지자, 페르디난도는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과 협상하기 위해 차남 페데리코를 사절로 보냈다. 페데리코는 반란군의 본거지인 살레르노에 들어가 협상을 시작했다. 이때 귀족들이 잔혹하기 짝이 없는 알폰소를 몰아내고 왕위 후계자가 되라고 꼬드겼다. 그러나 페데리코는 "모든 자연법과 아버지의 뜻, 그리고 동생으로서의 도리를 볼 때 절대로 그럴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에 귀족들은 페데리코를 반란에 끌어들일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감옥에 가둔 뒤 교황의 깃발을 성루에 내걸었다.

그제야 귀족들의 반란의 배후에 교황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페르디난도는 몹시 격분해 알폰소에게 대규모 병력을 주고 교황령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알폰소는 교황령과의 전쟁에 돌입하기 전에 로마에 사절을 보내 "나는 교황과 사도의 순종적인 아들이므로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반역자들의 올가미에서 왕국을 해방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라며, 로마에 거주하는 모든 나폴리 왕국의 대주교, 주교, 성직자들에게 15일 이내에 나폴리로 와서 왕을 알현하고 담당 교구에 거주하라고 덧붙였다. 로마에 있던 살레르노 대주교와 밀레투스 주교, 테아노 주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수입을 박탈당했다. 페르디난도는 또다른 군대를 모아 조카이자 알폰소의 장남인 카푸아 공작 페르디난도에게 맡기고 알폰소를 돕게 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8세는 나폴리 왕국군이 금방이라도 교황령으로 쳐들어 오려 하자 겁에 질려 베네치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교황청을 돕기를 거부했고, 그 사이에 나폴리군이 교황령에 쳐들어가 교황군을 여러 차례 격파한 뒤 로마를 포위했다. 인노첸시오 8세는 3개월간 로마에 꼼짝없이 틀어박혀 있다가 르노 2세는 올 기미가 없고 베네치아도 돕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나폴리 왕국과 화해하기로 하고 나폴리 귀족들에게 페르디난도와 화해하라고 지시했다. 이리하여 아라곤-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페르난도 2세의 중재하에 나폴리 국왕과 교황-나폴리 귀족들간의 평화 협약이 맺어졌다. 페르디난도는 로마 교황을 인정하고 그에게 일정한 교회수입과 십일조를 지불하며, 귀족들을 괴롭히는 것을 중단하기로 했다. 그 대신 교황은 나폴리 왕국에 대한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으며, 귀족들은 왕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귀족들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페르디난도는 살레르노 백작의 아들인 마르코와 자신의 조카인 아말피 공작의 딸과의 결혼식 행사를 카스텔 누오보 성당에서 열게 한 뒤, 반란에 가담했던 귀족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 모조리 체포한 뒤 모든 명예와 직위를 박탈하고 참수형에 처했다. 이후 장남 알폰소의 주관하에 모든 시신을 자루에 담은 뒤 바다에 내던졌다. 이 사건이 나중에 유럽 각지에 알려지자, 왕이 약속을 위반한 것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일었다. 페르디난도와 알폰소는 귀족들이 또다시 반란을 일으키려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조치를 내렸을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노첸시오 8세는 샤를 8세에게 나폴리 왕국을 침략하라고 촉구했지만, 당시 샤를 8세는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 오를레앙 공작 루이 2세를 중심으로 뭉친 귀족들의 반란에 시달렸기 때문에 나폴리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한편, 페르난도 2세는 자기가 중재한 평화 협정을 위반한 것에 거세게 항의하면서, 이를 빌미삼아 나폴리 왕국을 집어삼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페르디난도는 조반니 나쿠클레리오를 바르셀로나에 보내 협약을 위반한 것에 사과하면서, 알폰소의 장남 페르디난도와 페르난도 2세의 딸들 중 한 명을 결혼시키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페르난도 2세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양국간의 협약은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아라곤 왕국이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토후국과의 전쟁에 몰두하느라 나폴리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나폴리 왕국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1493년, 프랑스 국왕 샤를 8세가 밀라노 공작이 되기 위해 나폴리 왕국의 영향력을 배제하려 한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요청에 따라 나폴리 왕국을 향한 원정을 준비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페르디난도는 프랑스 왕국군이 이탈리아에 쳐들어오면 장차 나폴리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에 재앙이 닥칠 것이라 여기고 이탈리아 각국의 군주들에게 하나로 뭉쳐서 프랑스 왕국에 대항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나폴리 왕국의 앞날을 근심하다가 1494년 1월 25일에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산 도메니코 마조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이후 장남 알폰소가 알폰소 2세로서 나폴리 왕위에 올랐지만, 얼마 후 샤를 8세의 프랑스군이 나폴리로 쳐들어오면서 나폴리를 포함한 이탈리아 전역이 장장 60여 년간 혼란에 빠지게 될 이탈리아 전쟁의 막이 올랐다.

3. 가족 관계

  • 클레르몽의 이자벨(1424 ~ 1465): 코페르티노 백작 바르톨로뮤 '트리스탄' 드 클레르몽의 장녀.
    • 알폰소 2세(1448 ~ 1495): 나폴리 국왕.
    • 엘레오노라(1450 ~ 1493): 바리 공작 스포르차 마리아 스포르차와 초혼, 페라라 공작 에스콜레 데스테와 재혼.
    • 페데리코(1452 ~ 1504): 나폴리 국왕.
    • 조반니 다라고나(1456 ~ 1485): 타란토 추기경.
    • 베아트리체(1457 ~ 1508):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의 왕비.
    • 프란체스코(1461 ~ 1486): 산탈젤로 공작 겸 비셀리 후작.
  • 아라곤의 후아나(1455 ~ 1517): 아라곤 국왕 추안 2세의 딸.
    • 조반나(1479 ~ 1518):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2세의 왕비.
    • 카를로(1480 ~ 1486): 요절.
  • 다이애나 과르다토: 정부 1.
    • 마리아(1440 ~ 1460): 아말피 공작 안토니오 토데스키니 피콜로미니의 아내.
    • 조반나(? ~ 1475): 아르세와 소라 공작 레오나르도 델라 로베레의 아내.
    • 일라리아(? ~ ?): 로마 총독 조반니 델 데베레의 아내.
    • 엔리코(? ~ 1478): 게라체 후작.
  • 마르첼라 스피차타: 정부 2.
    • 마리아(1451 ~ ?)
  • 피카셀라 피치첼리: 정부 3.
    • 체사레(? ~ ?): 산타 아가타 후작.
  • 에우랄리아 라비냐노: 정부 4.
    • 마리아 세실리아: 브리차노 영주 잔 조르다노 오르시니
    • 루크레치아: 폰디 백작 겸 트라에토 공작 오노라토 3세 가에타니의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