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2 22:44:10

조지프 매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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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파일:미국 상원 문장.svg 미국 연방 상원의원 (위스콘신 주 클래스 1)
제69~79대
로버트 M. 라폴레트 주니어
제80~85대
조지프 매카시
제85~100대
윌리엄 프록시마이어[1]
미합중국 제80-85대 연방 상원의원
조지프 레이먼드 매카시
Joseph Raymond McCarthy
파일:조셉 매카시.jpg
<colbgcolor=#E81018><colcolor=#fff> 출생 1908년 11월 14일
미국 위스콘신 주 그랜드추트
사망 1957년 5월 2일 (향년 48세)
미국 메릴랜드 주 베데스다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가족 진 커 (결혼: 1953년, 사별: 1957년)
자녀 1명 (1957년 입양)
학력 마케트 대학교 ( 법학 / LL.B.)
종교 가톨릭
정당

(1936~1944)


(1944~1957)
의원 선수 2 (상원)
의원 대수 80, 81, 82, 83, 84, 85[2] (상원)
지역구 위스콘신 주 클래스 1[3]
경력 위스콘신 순회법원 판사 (1940~1947)
미 해군 복무 (1942~1945)
연방 상원의원 (1947~1957 / 위스콘신 클래스 1)
상원 정부운영위원회 위원장 (1953~1955)
서명
파일:Joe_Mccarthy_Signature.svg
1. 개요2. 생애
2.1. 상원의원이 되기까지2.2. 상원의원 매카시2.3. 매카시즘2.4. 최후
3. 실제 그가 밝혀낸 내부 스파이들4. 영향5. 미국내 평가6. 선거 이력7. 여담

[clearfix]

1. 개요

미국 정치인.

미국을 공산주의로부터 지킨다는 명분 아래에 수많은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어 매장해 버리는 행위들을 저질렀는데 여기서 ' 매카시즘'이라는 표현이 탄생했다.

유명세로 인해 미국의 실세 상원의원이었던 것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지만 매카시즘 당시 초재선 상원의원이었다. 정치 초년생이 이데올로기 진영 어그로로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은 인물관종에 가까웠고 실제 정치행보가 기승전결, 매카시즘뿐이다.

파일:18782751-1914-4a17-8c83-4ee9afbeb855-1946_MJS_Joe_McCarthy_Historical_Archive.6.jpg

2. 생애

2.1. 상원의원이 되기까지

사실 알고 보면 입지전적 인물의 전형이다. 매카시는 척박한 위스콘신 주의 농가에서 태어났고[4] 아일랜드계 미국인이었다. # #[5] 가정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20세가 되어서야 고등학교를 갈 수 있었다.

속성으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후 밀워키에 있는 예수회 계통의 마케트 대학교에서 고학하였고 그 학교의 법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으며, 1936년 위스콘신 주의 지방검사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변호사 개업을 했는데 법조계에 처음 발을 들인 1936년부터 조지프 매카시에겐 불법 자금 의혹이 불거진다. 28세의 조지프 매카시는 젊은이 치고도 야심가에 어릴 때 가난함의 보상 심리 때문인지 특히 돈을 굉장히 밝혔다고 한다. 그 후 1939년 같은 주의 순회 판사가 되었다.[6] 당시 불과 31세로 위스콘신 주 역사상 최연소 순회 판사라고 한다. # 판사로 재직하던 당시 그는 엄청나게 빠른 일처리로 유명했으나, 반대로 판결에 문제가 있다는 비난도 받았다. 이 중 가장 유명한 판결은 낙농업 가격제란에 대한 판결로, 요약하면 아래와 같은 식이다.
  1. 당시 미 연방정부 농산물의 가격을 어느 일정기준 이하로 팔지 못하도록 최저가격제를 정하였다.
  2. 이 때 어느 낙농업자가 기준보다 낮은 가격으로 우유를 팔다가 연방정부에게 걸려서 기소가 된다.
  3. 매카시가 짧고 강력한 판결문을 쓴다. '우유를 값 싸게 파는 것은 소비자에게 좋은 일인데 이런 재판을 하는 것은 시간낭비다!'[7]

이 판결은 대놓고 상인들에게 유리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상인의 비율이 높은 위스콘신에서 큰 인기를 모았다고 전해진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자 해병대에 지원하여 임관했는데, 주로 비행대의 정보 장교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전쟁에서 자신이 32번의 비행 작전에 참여했고, 임무 중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으며, 니미츠 제독이 직접 표창장을 써줬다는 주장을 했는데, 이후 이는 대부분 거짓으로 드러났다. 비행 작전에도 참여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12번에 불과했고, 대부분 안전한 비전투 임무였다. 이 과정에서 후방기총사수 자리에 앉아서 기총을 쏴보기는 했지만, 목표물은 적기가 아닌 야자수였다고 한다. 또한 다리부상은 전투에서 입은 것이 아니라 배 위에서 적도제[8] 파티를 여는 중에 입은 것이었으며, 표창장에 니미츠가 서명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내용은 매카시 본인이 써넣고는 다른 결재 서류들 사이에 끼워넣었던 것이다.

아직 군에 복무중이던 1944년 상원의원에 도전했으나 낙선했고, 45년에 해병대에서 예편했다. 46년에는 공화당의 거물이었던 토마스 콜먼의 지지를 얻어 상원 의원 선거에 출마하게 된다.

파일:joseph-mccarthy-9390801-1-402.jpg

2.2. 상원의원 매카시

그리하여 매카시는 1946년 홈그라운드인 위스콘신 지역구의 연방상원의원 선거에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때 조지프 매카시에겐 운이 많이 따랐는데, 1946년 로버트 M. 라폴레트 주니어 진보당(미국 1924년) 해산 및 공화당 복당 결정은 결과적으로 진보적 지지자들의 지지를 잃었고, 보수적인 공화당 측은 로버트 M. 라폴레트 주니어를 필요할 때만 자신들의 당으로 돌아오는 기회주의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 이때 분산된 표들을 어부지리로 조지프 매카시가 가져갔다.

그의 당선은 진보주의자로 유명했던 로버트 M. 라폴레트(1906~1925)[9], 로버트 M. 라폴레트 주니어(1925~1947)[10] 부자의 40년 왕조를 끝낸 사건이기도 했다. 라폴레트 주니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위스콘신 지역당으로 아버지가 창당한 진보당을 이끌었지만 1946년에는 선거를 위해 자신들의 지지자들과 함께 급히 공화당에 복당한 상태였다. 그러나 매카시가 라폴레트 주니어를 (207,935 vs 202,557) 불과 1.3%, 5378표 차이로 꺾고 공화당 후보가 되었다. 이 당시 로버트 M. 라폴레트 주니어는 상당한 지지를 잃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건 순회판사 시절부터 출처를 알 수 없는 거액으로 주식 노름하거나, 조삼모사 식의 판결로 유명세를 얻은 조지프 매카시를 같은 공화당 내에서도 경계했단 방증이다.

매카시는 자신의 참전경력을 강조해 테일거너 조(Tail Gunner Joe)[11]가 국회에 필요하다고 선전했고, 상대후보 라폴레트 주니어는 병역을 기피했고 전쟁중에 후방에서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고 비난했다. 사실 라폴레트 주니어는 1895년생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때에는 군복무가 적합하지 않은 40대 후반이었고, 매카시 역시 전쟁 중 주식투자[12]를 해서 라폴레트 주니어에 못지않은 소득을 올렸지만, 어쨌든 이 카피가 먹혀들어 민주당 후보 하워드 J. 맥머레이를 쉽게 꺾고 당선된다. # 한편 라폴레트 주니어는 경선 낙선 후 아예 트루먼 행정부의 해외 원조 사업에 뛰어들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당시 라폴레트 주니어는 반공 진보주의를 모토로 삼고 있었으며, 매카시를 친공산적이라고 비난했다는 점이었다. 이로 인해 이 선거에서 매카시가 사회주의적인 성향의 미국 전자-라디오 노조의 지지를 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결국 첫 선거에서 친공몰이를 당한 매카시가 무분별한 반공주의의 상징이 된 셈이다.

그는 미국 정계에서 비주류인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역으로 아일랜드계 정치집단에서 많은 후원을 받았으며 특히 소속정당은 달랐지만, 역시 아일랜드계인 케네디 가의 지원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13]

상원 의원으로서 조지프 매카시는 무능했지만 굉장히 출세지향적인 태도를 보였으므로 공화당 후원회 칵테일파티의 얼굴마담을 담당했다. 말발이 좋았던 조지프 매카시를 후원회 사람들과 공화당 지지자들은 좋아했지만 같은 공화당의 다른 의원들 마저 조지프 매카시가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 무능한 작자임을 간파했고 이 무렵 조지프 매카시는 폭격기 비행대 브리핑 장교였지 Tail Gunner Joe였던 적이 없단 사실도 들통났기에 말만 번지르르한 무능한 작자란 의미로 (후방 사수 아닌 후방 사수)란 의미로 Tail Gunner Joe라고 불렀다. 1977년 조지프 매카시의 삶을 소재로 한 ' Tail Gunner Joe'라는 미국 드라마의 제목은 이런 의미라고 한다.

조지프 매카시의 매카시즘 바로 직전의 업적은 설탕값 동결이었고 이 과정도 참 뜬금없었는데 펩시로부터 $20,000 후원받자마자 갑자기 의회에 설탕값을 동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다른 의원들은 이런 그를 "The Pepsi-Cola Kid"라 부르며 조롱했다. #

의외의 사실이지만 상원의원 재직 시절에 한 또 다른 업적이 바로 더글러스 맥아더를 경선에서 낙선시킨 것이었다. 너무나 잘 어울릴 것 같은 듀오지만 이엔 복잡한 사정이 얽혀있다.

위스콘신 공화당에는 라폴레트 가문이 이끄는 진보파와 기타 보수파가 있었는데 라폴레트는 지연[14] 등으로 얽힌 관계로 인해 맥아더를 지지했다. 진영논리에 입각한 보수파는 위스콘신에서 맥아더의 가장 큰 맞수가 될 해럴드 스타센을 지지했는데 마침 스타센과 친분이 있던 매카시[15]이 스타센 선거운동을 이끌게 된 것이다. 그렇게 위스콘신 경선에서 스타센이 대의원 19명 (맥아더는 8명)을 얻는 대승을 거두며 맥아더의 야망은 끝나게 된다.

어쨌든 후원회 후원금 모금하는 얼굴마담으로선 그럭저럭 자신의 몫을 해냈기에 여기까지는 근성으로 자수성가한 한 정치인의 모범적인 일화로 볼 수도 있지만 이후 엄청난 악행과 실책들을 저지르게 된다.

2.3. 매카시즘

그때까지 매카시는 정치적으로 햇병아리에 불과한 위스콘신 주를 대표하는 초선 상원의원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권력기반을 튼튼히 하고 자신을 일약 정치적 거물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편법을 발견했으니 그것은 바로 반공주의 선동이었다.

파일:McCarthy060921GettyCROP.gif

당시 미국은 마오쩌둥 공산당 장제스 중국국민당 대만으로 몰아내고 중국을 건국한 사실과 소련의 원폭실험 등으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심이 과대하게 퍼져 있었고 마침 하늘이 도와주듯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맞붙은 6.25 전쟁이 터졌다. 매카시는 이 시기를 잘 이용해먹은 셈이다. 그는 자신과 사상이 다르면 바로 사상검증에 들어갔으며 그의 검증을 통과하지 못할 시 그 대상은 빨갱이였으며 사회적으로 매장당했다.[16]

그리하여 6.25 전쟁으로 절정에 이른 매카시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극렬 반공 활동을 벌여 조금이라도 사회 비판적 혹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성향이 있다면 무섭게 청문회에 소환하고 다짜고짜 소련 스파이로 몰아붙여 사회적으로 매장시켰다.[17] 그의 마녀사냥에 희생된 사람들 중 유명한 사람이 원자폭탄을 개발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18]와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19]

그가 매카시즘으로 알려진 극렬 반공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1950년 2월 9일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휠링에서 열린 공화당 집회였는데 공산주의자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그 명단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특히 국무부 내에 205인의 간첩이 있다면서 정체 모를 문건을 흔들어 보이기까지 했는데 항상 가지고 다니던 서류가방에 그 명단이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는 이후에도 기자들의 질문에 항상 웃으면서 '이 안에 모든 이름이 있다!'고 계속 주장했다. 물론 가방을 열어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20]

애초에 위스콘신주 우윳값 해결하고 설탕값 걱정하던 양반이 갑자기 반공 전문가를 자처하며 공산당 색출 및 일망타진을 부르짖으니 일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다. 뭣보다 조지프 매카시가 이런 일을 벌인 이유는 적색공포로 경직된 당시 미국 사회에 상원의원이란 자신의 신분을 악용해 오로지 자신이 출세하기 위해서였단 평이 지배적이다.

2.4. 최후

파일:mccarthy-newspaper-1024x810.jpg
McCARTHYISM IS TREASON TO AMERICA
매카시즘은 미국에 대한 반역이다

그렇게 미 전국이 매카시를 지지하며 지지 기반이 확고해지는 듯 했지만 그의 아무 근거도 없는 소련 스파이(혹은 빨갱이) 사냥은 곧 밑천을 드러냈고 사람들도 점차 반공에 지쳐가 거품이 꺼지고 있었다. 결정타로 미국 저널리즘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CBS의 앵커 에드워드 머로가 자신이 진행한 시사 프로그램인 '씨잇 나우(See it now)'에서 그를 매우 논리적으로 비판한 반면 매카시는 그저 인신공격과 어거지 논리만 주장하자 그 영향력을 잃었다.[21] 이 과정은 조지 클루니가 감독한 굿나잇 앤 굿럭이라는 영화에 상세히 나와 있다.[22] 또 유명한 첩보 스릴러 영화인 1962년 맨츄리안 켄디데이트에서도 매카시를 모델로 한 캐릭터가 나온다.

이렇게 반공 선동의 반작용으로 매카시는 궁지에 몰렸다. 이 시기 조바심에 최악의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는데 바로 군부를 적으로 돌렸다는 것이었다.[23] 매카시는 군부 내의 고위 장교 및 장성들 사이에도 소련 간첩이 있다고 주장했으며 결정적으로 미국에서 민관군을 아울러 존경받는 원로였던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국방부장관[24] 비난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이러한 육군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육군을 비롯한 미군 내부의 분노를 불러왔을 뿐 아니라, 마셜 장관의 부하였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기도 하였다.[25] 더욱이 육군 고위급에 스파이가 있다는 주장은 몇 년 전까지 육군의 최고위층이었던 아이젠하워에게까지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문제였다. 아이젠하워는 공화당이 민주당 20년 정권 끝내 보자고 원래 민주당 성향이었던 인물을 정말 온갖 노력과 설득으로 영입해서 대통령까지 만든 인물이었기에, 공화당으로선 자당 소속 대통령은 물론 공화당까지 팀킬[26]할 수 있는 매카시의 최후의 발악에 가까운 돌출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다. 때문에 매카시가 속했던 공화당조차 그에게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1954년 4월 21일 육군-매카시 상원 청문회가 열렸고 청문회가 한창이던 6월 9일, 보스턴에서 변호사 업무를 맡다가 육군측 변호사 조지프 나이 웰치와 설전을 벌였는데, 여기에서 논리에서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완패했다. 그러던 중 매카시는 웰치의 법무부관인 프레드 피셔가 공산당에 몸담은 적 있다며 공세를 펼치려 했는데, 웰치는 이에 대해 즉각 역공에 나서며 한 젊은이의 신상을 전국 생방송에서 까발리며 의혹을 사실처럼 제기하는 것을 문제삼았다. 그리고 나온 것이 바로 웰치의 이 말이다.
Let us not assassinate this lad further, Senator. You've done enough. Have you no sense of decency, sir? At long last, have you left no sense of decency?
이 젊은이를 더 이상 죽이지 마시지요, 상원의원. 당신은 할 만큼 했습니다. 당신께서는 품위가 없으십니까? 마침내, 당신께서는 품위를 남김없이 잃어버리신 겁니까?

이때 나온 위의 웰치의 말은 매카시에게 결정타를 날려주었고, 청문회 종료 후 1954년 12월에는 매카시가 속한 상원에서까지 비난결의가 채택되기에 이르렀다[27]. 비록 상원의원으로서의 신분은 유지했으나 사실상 민주당과 소속당 공화당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그의 정치 생명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의에 빠진 매카시는 지병인 편두통이 더욱 심해졌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더욱 술에 빠져들게 되었다.

결국 실의에 빠진 채 1957년 만 48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과음이 원인으로 추정되는 급성 간염이었다. 반공주의 열풍을 이용해 권력을 쥐기 위해 무지성 반공운동에 앞장서 칼자루를 휘둘렀으나, 결국 자신이 해 온 모든 악행을 돌려받은 채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그야말로 인과응보인 셈이었다. 용케도 죽을 때까지 상원의원의 신분은 유지해서[28] 장례식에 당시 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과 양 당의 주요 인사들이 의례적으로 참석해 주긴 했다.

매카시 사후 그의 선동에 의해 사회적 매장을 당한 인물들 중 죽은 자들은 사회적 지위와 공적이 복원되었고 살아남은 자와 친인척들도 사회에 돌아와 일상 생활에 복귀할 수 있었다.

3. 실제 그가 밝혀낸 내부 스파이들

그의 사후 버킷 리스트의 159명 중 오직 9명만이 스파이로 입증되었다. 즉, 정확도 5.66%란 차라리 찍어 맞춰도 그보단 나을 낮은 확률이 나왔다.(...) #

핵에 대한 정보 등을 넘겨준 것으로 기소된 줄리어스와 에델 로젠버그 부부는 간첩죄가 인정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사형을 당했다. 이 사건을 로젠버그 부부 간첩 사건이라고 한다. # 그나마도 남편인 줄리어스는 스파이가 맞지만 에델 로젠버그의 혐의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 외 앨저 히스 역시 간첩으로 지목했다.

이 기사에서는 오언 래티모어와 해리 홉킨스도 소련 스파이로 지목하는데 두 사람은 스파이가 아니다. 논설위원이 잘못 알았거나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오언 래티모어는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었지만, 어릴적 부모를 따라 중국에서 성장하여, 중국의 신문사 기자가 되어 중국 각지를 여행했다. 이후 대학에서도 중앙아시아와 만주를 연구했고, 1930년대에는 중국관련 논문들을 출판하는 학술저널의 편집자가 되는 등 저명한 중국통이 되었다. 그는 중국을 침략하려는 소련을 경계했고 미국이 장제스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추천으로 1941년 장제스의 보좌관이 되었는데, 얼마안가 장제스와 사이가 매우 나빠졌다. 위에서 언급했듯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소수민족을 취재했던 그는 당연히 소수 민족들을 옹호했고, 장제스가 그들의 문화를 보존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장제스는 한족 우선의 파시즘에 가까운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장제스는 국민당의 비밀경찰인 남의사(藍衣社)에게 래티모어 감시를 맡겼지만, 첩자로 볼 만한 부분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더 큰 적이 있었으니, 그는 알프레드 콜버그라는 인물이었다. 콜버그는 직물 무역업자로 세계각지의 원료를 중국으로 들여와 중국공장의 저임금 노동력으로 가공해 미국에 팔고 있었다. 그는 당연히 반공주의자로 강력한 장제스 옹호자였으며, 미국 언론에 " 장제스의 국민당이 부패했다는 말은 다 거짓이고, 장제스를 음해하는 놈들은 공산주의자이다."라고 주장했다. 물론 당시 미정부는 이를 씹었지만, 콜버그는 아예 반공단체를 만들고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했는데, 비난의 대상에는 당연히 래티모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이후 매카시의 고문이 되었고, 매카시는 콜버그의 명단을 활용하게 된다.

하지만 매카시파의 공격과 FBI 후버 국장의 닦달에도 그가 간첩이라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고 독일과 중국에서 활동한 소련 첩자 조르게의 정보에서도 래티모어에 대한 것은 없었다. 심지어 소련 해체 이후 드러난 정보에서도 래티모어가 첩자라는 증거는 없었다.

그나마 남은 증거라곤 그가 저널의 편집장이던 시절, 후에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이 드러난 인물의 논문을 실어준 것과, 전쟁말기 소련을 방문했을 때, 소련의 굴라그에 대해 긍정적인 언급을 했다는 정도인데, 래티모어는 자신의 견해와 다르더라도 다양성을 존중해 논문을 실어주는 편집자였고, 후자의 경우 미정부 공식사절로 부통령을 수행하는 입장이라 방문국을 공공연히 비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청문회에선 "그가 대학시절 친구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는데, 그건 그 친구가 비밀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을 알고 지은거다."라는 주장이 나와, 이게 '공산주의적 미소'냐 '비공산주의적 미소'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1952년 12월 의회에서의 위증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1953년 5월 연방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되었고 1955년 6월 두 번째 기소에서도 무죄판결이 났다. 이후 래티모어는 미국의 존스 홉킨스 대학교와 영국의 리즈 대학에서 중국학을 교육했고 1989년에 사망했다. 한편 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 소련 출신 귀순자 이고르 보골레포프는 1973년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 정보기관의 강요로 허위진술을 했다며 래티모어에게 사과하기도 했다. 다만 한국인들에게 래티모어는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인물인데, 해방이후 한반도의 남북분쟁에 대해서 "민족문제에 개입해봐야 분쟁은 막을 수 없고 미국은 손해만 볼 것."이라며 당사자들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내버려두라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후 한국전쟁이 터지고 많은 미군이 희생되었기에, 미국의 관점에서는 래티모어의 예상이 맞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미국이 그의 조언을 따랐다면 한국의 입장에선 꽤나 무서운 현실이 일어날 뻔 했다.

파일:Joseph-McCarthy-William-Benton-elections-rules-subcomittee (1).jpg

해리 홉킨스는 뉴딜 정책의 기초를 디자인한 FDR의 측근이었다. 2차대전 중에는 무기대여법이 실행되는 와중에 무기대여법의 수혜국인 소련과 만남을 가졌는데 극렬 반공주의자 쪽에서는 이 과정에서 홉킨스가 소련에 핵무기의 비밀을 팔아넘겼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가 되는 것은 조지 R. 조던( George R. Jordan) 당시 소령이 정리한 소련측에 전달된 무기대여법 물자 목록으로, 그 중에서 핵실험에 필요한 것으로 보이는 원자재와 천파운드 가량의 우라늄 화합물이 소련측으로 전달된 것이 쟁점이 되었다. 레슬리 그로브스는 우라늄 화합물이 소련으로 전달된 것은 사실이나 소련측에서 미국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연막이었을 뿐이라고 증언했다. 결국 이 주장은 근거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예를 들면 반공주의자 측에서 홉킨스가 워싱턴에서 소련 요원과 접선했다고 주장한 바로 그 시간에 홉킨스 자신은 암 치료를 위해 미네소타에 있었다. 1963년 FBI조사에서는 이 주장의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기록되었다. 조지 R. 조던은 청문회 증언 이후 극우주의에 경도되어 수돗물 불소화가 소련의 음모라고 주장하는 등 안타깝게도 음모론에 빠지고 말았다.[29] 조던 당시 소령의 기록은 오히려 미국이 소련에 그 정도의 물자를 지원해주고도 여유있을 정도로 막강한 공업 기반을 갖추었다는 홍보 자료로 대신 쓰이고 있다.

4. 영향

A disgrace to Wisconsin, to the Senate, and to America.
(故 매카시 상원의원은) 위스콘신에 대한 치욕이요, 상원에 대한 치욕이며, 미국에 대한 치욕이다.

윌리엄 프록시마이어 상원의원[30]
There was never quite anyone like McCarthy in the Senate, before or after; nor has this chamber ever gone through a more painful period.
매카시와 같은 상원의원은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가 재직했던 시기만큼이나 상원이 고통스러웠던 시기도 없었다.

로버트 버드 상원의원 겸 상원 역사가[31]
이러한 매카시즘 열풍에 의해 불과 4년 동안 사상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약 1만 명에 가까운 미국 행정부 내의 인사와 비판적인 지식인들이 구속되거나 누명을 쓴 채 현직에서 물러났다. 거기다가 인문학/ 사회과학 연구는 침체되었고 대중문화 예술이 극도로 위축되었으며 사회비판적인 시민운동도 거의 봉쇄되었다.[32] 이 모든 악영향은 반지성주의라는 이름으로 70년이 지난 뒤에도 미국 사회를 계속 좀먹고 있다. 하지만 매카시가 주도한 전미반미활동 조사위원회는 끝내 소련 간첩을 하나도 잡지 못했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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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매카시가 공산주의자로 몰았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실제 소련과 어떠한 형태로든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주장이 2003년 앤 콜터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녀의 주장에 의하면, 매카시에게 이 리스트를 넘겨 준 것이 CIA라고 한다. 그러나 알아둬야 할 것은 이 발언 당사자인 앤 콜터는 학자도 기자도 아닌 칼럼니스트에 불과하고 미국에서도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예를 든다면 '이슬람교도는 비행기 탑승이 금지되어야 한다.'거나 '방사능 노출은 암을 예방한다.' 같은 반지성주의를 공공연히 선동하는 정신 나간 사람이다.

그리고 매카시즘의 피해는 일부 좌파를 제외하고는 없었다는 게 콜터의 주장이지만 이 견해는 사실 주류 학계와 언론에선 거의 부인주의[34] 취급당한다. 실제 매카시와 동시대에 FBI가 수행한 소련 간첩 색출 프로젝트인 베노나(Venona)와 대조해 보면 "매카시 리스트"는 "베노나 리스트"와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 #

또 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극우 인사들은 매카시즘 열풍이 가라앉은 이후 반공주의에 대한 혐오 증세가 심해져서 소련 간첩을 열심히 잡고 신고하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미국의 방첩망에도 악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전후 인과관계를 혼동한 주장이다. 그러한 반공주의에 대한 혐오 증세가 일어나게 된 원인부터가 무리한 매카시즘 열풍으로 인한 역풍이기 때문이다.

매카시 리스트의 참담한 적중률(9/159)도 그렇고 매카시의 행동은 당시 시점으로 보든 지금 와서 보든 민주주의의 원칙을 거의 정면으로 부정하는 수준의 폭압이다. 매카시 때문에 찰리 채플린 1972년 아카데미 공로상을 받을 때까지 미국에서 추방되었고, 핵무기를 만드는 맨해튼 계획의 책임자인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을 근본부터 재설계하고 대전략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조지 C. 마셜까지 스파이로 공격당했다. 미국이 내세울 만한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지극히 유능한 인재들도 이랬으니 일반 시민들은 오죽할까. 하루 하루에 충실하던 성실하고 선량한 사람이 갑자기 매카시 때문에 간첩으로 몰려 직업을 잃고, 아이들에게도 여파가 끼쳤다. 실제로 이 때문에 이역만리 타국으로 망명하거나 자살하는 사람들이 하루하루 속출할 만큼 미국 사회에 불합리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게다가 매카시의 반공쇼는 민주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건전한 비판'을 억압했다.

게다가 조지프 매카시는 민주주의 원칙과 상충되는 위원회를 세워서 어거지로 사람에게 낙인을 찍었다. 이단심문소 성격이 농후한 방식이 저때도 나왔다는 뜻이다. 사실 매카시의 방법은 마녀사냥과 똑같았다. '미국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 그 사람을 잡아와 윽박지른다 → 너 소련 간첩이지? → 친구 있지? → 그 친구 잡혀옴 → 친구 있지? → 무한반복이었다.'

매카시가 저 난리를 칠 때 공개적으로 전향하고 반공 열풍에 동조했던 영화 감독 엘리아 카잔(1909~2003)이 특히 비난에 휩싸였다. 1999년에 아카데미 공로상을 받을 때도 반대 시위가 줄을 이었다. 공로상 수여식이 열리면 모든 참석자가 의례적으로 기립박수를 하는 것이 관례인데, 카잔이 수상할 당시에는 참석한 영화인의 절반 정도가 일어서지도 않고 손뼉을 치지도 않았다. 영상 참고로 이날 카잔에게 상을 수여한 사람들이 공교롭게도 리버럴 성향으로 유명한 마틴 스코세이지 로버트 드 니로다. 다만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Arthur M. Schlesinger Jr.는 시상식의 해당 장면을 본 뒤 "매카시즘 당시 침묵, 외면으로 일관한 자들, 그 시절을 겪어 보지 못한 자들이 왜 엘리아 카잔에게만 십자가를 지우려 하는가?"라고 거세게 비판했고 #, 매카시즘에 저항했고, 그로 인해 갖은 고초를 직접 겪은 한때 엘리아 카잔의 절친이자 예술적 동지였던, 아서 밀러 역시 엘리아 카잔의 아카데미 공로상 수상을 지지하며 당시 시상식에서 카잔을 냉대하던 이들을 “an orgy of self-righteous frenzy.”(독선적인 광란의 난교)라고 비판했다. # 그리고 드 니로의 경우 훗날 매카시즘을 다룬 영화 Guilty by Suspicion 출연 직후 인터뷰에서 "(영화 출연을 위해 관련 자료를 수집, 연구하면서) 당시 많은 사람이 고통받았던 것을 알았다. 하지만 엘리아 카잔도 자기 나름대로 신념을 갖고 행동했던 모양이다."라며 조심스럽게 실드를 쳐주긴 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엘리아 카잔 문서 참조. 한편 매카시즘 때문에 억울하게 1952년에 미국에서 추방당한 찰리 채플린이 1972년 아카데미가 바치는 평생공로상을 수상하기 위하여 미국을 방문했을 때는 모든 할리우드 관계자들이 빠짐없이 기립 박수로 경의를 표했다. 영상

일단 엘리아 카잔의 전향은 1934년~1936년 사이로 HUAC 청문회에 소집된 1952년 4월보다 훨씬 전의 일이다. 또 엘리아 카잔이 밀고한 8명은 Clifford Odets, J. Edward Bromberg, Lewis Leverett, Morris Carnovsky, Phoebe Brand, Tony Kraber, Ted Wellman, Paula Strasberg으로 숀 펜의 아버지 리오 펜(Leo Penn)을 밀고한 적 없다. 이들 8명은 모두 실제 미국 공산당 소속이었다. 해당 청문회에서 엘리아 카잔은 자신이 분명 한때 미국 공산당 소속이었고 이들과 교류한 것은 맞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항변했다. 엘리아 카잔은 자기 혼자서만 살아남으려는 추악한 속셈으로 영화계의 동료들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빨갱이로 몰아 모함을 해 몰락시켰던 적이 없다. 즉, 위증죄, 무고죄 등등의 타인에게 누명을 씌운 죄를 지은 적이 없다. 근데 한국에선 이상하게 이런 인식이 강하고 엄연히 원흉은 조지프 매카시임에도 애꿎은 엘리아 카잔만 집요하게 공격하는 경향이 강하다.(...)

또 매카시즘은 결과적으로 중국의 핵개발에 크게 일조했다. 당시 첸쉐썬을 비롯한 중국인 물리학자 및 공학 기술자 대다수는 단순히 중국계/아시아계 출신이라는 이유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스파이로 내몰려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일단 첸쉐썬 본인은 장인이 장제스의 고문이었고 미국에 유학 올 당시 중국국민당 정부에서 신분을 보증할 정도였는데도 이 꼴을 당했으니 그 정도 빽도 없었던 다른 아시아계 인물들은 얼마나 징그러운 억압을 당했을지 알 만 하다. 첸쉐썬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 할아버지는 입학 시 엄청난 실력과 스펙이 요구되는 최상위권 대학인 Caltech의 졸업생이자 박사였으며 전미의 공학도들이 한번쯤은 들어가서 일하고 싶어서 난리인 NASA 산하 제트추진연구소를 설립한 메이커 중 하나이며 자신 역시 선통제도 집권하기 전에 태어난 청나라에서 온 사람이었다. 저 제트추진연구소는 냉전의 최전선에 서서 엄청난 양의 발사체들과 제트기들을 개발한 기관이다. 결국 첸쉐썬을 비롯한 중국인 과학자들은 미국인들과 미국에게 환멸을 느껴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중국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만드는 데 동조하고 21세기에도 중국을 이끌고 있는 기술 관료들을 육성해냈다. 지난 이야기지만, 이들이 없었다면 중국은 핵과 미사일을 백지 상태에서부터 개발하느라 더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고, 공산당의 중책을 차지한 기술관료 집단이 주도하는 과학 기술의 개발 역시 느려졌을 것이다. 21세기에 중국이 미국의 최대의 적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매카시는 공산당을 잡는답시고 공산당을 득세하게 만든 최악의 트롤링 한 것이다.

매카시의 견책안 통과 보고를 받은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매카시즘은 이제 매카시워즘[35]이다.(McCarthyism is now McCarthywasm)"라는 명언을 남겼다. be동사의 현재형, 과거형 변화를 가지고 한 말장난.

1957년 매카시가 사망하자 위스콘신주에서는 새로운 상원의원을 뽑는 보궐선거가 열렸다. 이때 공화당 경선에서는 아직도 매카시즘을 추종하는 전직 하원의원 글렌 로버트 데이비스(Glenn Robert Davis)와 매카시즘을 반대하는 위스콘신 주지사 월터 J. 콜러 주니어(Walter J. Kohler Jr.)가 맞붙었는데 월터 J. 콜러 주니어가 승리해서 상원의원 후보가 되었다. 이렇게 공화당도 매카시를 외면했지만, 민주당 측 후보인 윌리엄 프록시마이어[36]가 당선되면서 공화당은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리고 2010년대까지 위스콘신주에서는 공화당이 기를 못 썼고, 특히 Class 1 상원의원 의석(현역 민주당 태미 볼드윈)은 2022년 현재까지도 매카시가 마지막 공화당 상원의원으로 남아 있을 정도다. 위스콘신주가 원래 진보적인 성향이 강한 주이기는 하나, 매카시의 뻘짓이 위스콘신 주에서의 공화당의 미래를 한동안 날려먹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5. 미국내 평가

미국 공화당 금기어이자 흑역사적 존재.[37] "히로시마 원폭(1945)""한국 전쟁(1950)"으로 인한 미-소 핵전쟁 공포의 확산과 '엘저 히스 사건' 등 미국 정부 지휘부를 관통한 간첩 사건에 미국 여론은 냉전시대 초기부터 집단적 사회 공포에 가까웠다. 이 대중적 공포를 자양분 삼아 매카시가 허위 공산주의자 리스트로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펼친 것이 매카시즘이라는 평가이다. 그가 반공 아이콘으로 급부상하면서 전국적인 여론을 주도하고, 정치권과 미디어가 동조하면서 국가적인 광풍이 일어난 것. 결과적으로 경직된 숙청 국면[38]이 펼쳐졌다.

매카시가 지속적으로 강조했던 "공산주의자 명단"은 끝내 명확하게 공개되지도 않았으며 공개 고발된 공산주의자 중 상당수가 누명이었다는 사실만 확인되었다. 결국 매카시즘은 무작위 난사 수준의 모함이었던 것은 공인된 팩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미국 내 암약 간첩이 다수 확인된 "베노나(VENONA) 프로젝트 사건"[39]이나 동독 비밀정보국 슈타지(Stasi)의 대서독 스파이전, 베트공의 대남 간첩 작전 등에서 확인된 사회주의 체제의 적대국가 잠입 스파이전은 모든 이데올로기 대치 전장에서 예외없이 사실로 드러났다. 이러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매카시의 " 블러핑"이 미국 역사에서 인정받지 못한 것은 당연히 안 하느니만 못했던 짓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매카시즘은 매카시라는 허황된 정치인이 정치적인 위기에서 이를 반전시키고자 내세운 허위의 공산주의자 리스트로 전국적인 화제 인물이 되면서 수 년간 미국 전역을 혼돈에 빠뜨린 해프닝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 여파가 당시로서는 워낙 전국적이고, 파괴적이어서 단순 해프닝을 넘어서 이데올로기가 남긴 희대의 사회적 상처로 인식되고 역사적 실책으로 공히 인식된다.

정치인뿐만 아니라 학자, 연예인, 외교관 등 다수에게 끼친 피해가 크다 보니 조지 W. 부시, 도널드 트럼프와 함께 미국의 정치만평가들이 작품에서 가장 애용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 한국에서는 매카시의 악행이 매카시즘[40]으로만 알려졌기 때문에 상원의원 매카시의 행각 중 안 알려진 것이 꽤 있는데 가장 심각한 것이 반유대주의에 기반한 나치 옹호, 그것도 말메디 학살을 덮고 이 사건과 관련된 증거물들을 전부 국가기밀문서로 고의로 지정해 차후 조사가 불가능하도록 사실상 증거인멸을 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외에도, 헝가리 출신 유대인이자 트루먼 행정부에서 국방부 차관보를 지낸 애나 로젠버그[41]에 대한 강력한 임명반대 운동을 밀어붙이면서 애나 로젠버그를 빨갱이 유대인으로 매도하는 등 반공과 반유대주의의 결합을 서슴치 않았다. #

6.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46 미국 연방상원의원선거 위스콘신

620,430 (61.15%) 당선 (1위) 초선
1952 미국 연방상원의원선거 870,444 (54.23%) 재선[42]

7. 여담

  • 그의 이름 때문에 비영어권에서는 매카시라는 성을 가진 정치인들이 오해를 받곤 한다. 케빈 매카시, 유진 매카시 등. 물론 매카시는 미국에서 가장 흔한 성 중 하나이기 때문에 영미권에서는 성으로 문제가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오히려 조지프 매카시의 이름을 잘 모르는 젊은 미국인들에게서는 매카시즘이 매카트니주의로 오해되고 있다.
  •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로버트 F. 케네디가 처음에 모신 정치인이 조지프 매카시였다. 조지프 매카시는 아일랜드계 미국인 커뮤니티의 인맥으로 조지프 케네디[43]와 친분이 있었고 로버트 F. 케네디가 정계에 입문하려 하자 그의 아버지가 매카시를 소개시켜줘 매카시가 이끄는 상원 특별위원회의 보좌진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44] 다만 로버트 케네디는 조지프 매카시의 과장된 수사와 행동을 좋아하지 않아서 매카시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하며, 매카시가 사망한 이후에는 민주당 상원의원을 모시게 된다. 이를 묘사한 영화가 아이리시맨.
파일:암약단체.jpg
  • 한국 인터넷에서 밈으로도 쓰이고 있는데 주로 만화 소설을 1편만 만들고는 도망가는 작가들이 사실은 조직적인 암약단체를 갖추고 활동한다는 음모론을 설파하면서 마녀사냥을 하는 인물로 쓰인다. 바리에이션이 많아서 NTR물을 그리는 작가 명단을 올리거나 # 사실은 매카시가 암약단체 수장이라든가 #, 2편이 있으면 3편을 요구한다든가, 아니면 매카시 혼자 2편을 확보하고 자기 자신만 보는 등의 행동을 한다. # 밈의 불문율로는 실제 매카시처럼 절대로 명단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 해당 드립을 치기도 했다.
  • 폴아웃 시리즈에서는 사람들의 사상이 1900년대 중반에 정체되어 있고, 매카시즘은 핵전쟁 터지는 2077년까지 수명이 늘어나 매카시 본인은 상당한 이익을 누렸을 것이 뻔하다.
  • 하츠 오브 아이언 4의 모드인 카이저리덕스에서는 미입헌국의 장군진과 대선후보로 등장하기도 한다.
  • 엄청난 위세를 자랑하던 1950년에는 드류 피어슨을 찾아가 문자 그대로의 귀싸대기를 날리기도 했다.
  • 동성애 성향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네바다주의 언론인인 행크 그린스펀은 매카시가 밀워키에 위치한 게이바에 자주 출입했으며, 그의 동성 애인 중 하나가 매카시의 지령을 받고 스위스에 주재하는 미국 외교관들을 사찰했다고 주장했다. 매카시를 다룬 FBI의 기록에도 매카시가 한 육군 중위에게 술을 먹이고 성행위를 시도했다는 진술이 나온다. 다만 이는 정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1] 전임자 조지프 매카시의 사망으로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당선. [2] 제85대 의회 임기 중 사망. [3] 현재까지 이 지역구에서 당선된 마지막 공화당 소속 상원의원이다. [4] 맥(Mc)이 들어간 성씨를 보면 알다시피 스코틀랜드계 내지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다. 미국에서 같은 백인들 사이에서조차 알게 모르게 차별 대우를 받던 아일랜드계 미국인이 판사라는 나름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건 일단 대단한 일이다. [5] 아일랜드계 미국인, 가톨릭 이 인연으로 케네디 가문의 후원을 받았다. [6] 이때 매카시는 순회판사 자리를 놓고 경쟁자 Edgar V. Werner 판사가 73세로 순회 판사직을 수행하기엔 너무 고령이라 공격했지만, 당시 Edgar V. Werner 판사는 66세였다. 이때 자신의 나이가 66세라 항변해도 업무를 보기에 고령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렇게 사실보다 과장된 선동질로 훗날 로버트 M. 라폴레트 주니어와의 경합 때도 똑같은 수법을 썼다. 로버트 M. 라폴레트 주니어가 나이 때문에 군복무하지 않았음을 이런 식으로 물고 늘어졌다. [7] 대중적인 지지를 얻기엔 딱 좋은 말이지만, 국가가 가격의 하한을 통제하는 품목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가격 하한이 없으면 가격을 낮추기 위한 경쟁이 심화하며 상인의 생태계가 파괴되고 제품의 질 역시 보장되지 않아 최종적으론 소비자에게 악영향을 미친다. 비슷한 사례가 보험의 경우인데, 보험료도 하한을 통제하며 그 이유는 보험사가 보험료 인하 경쟁을 펼치다 다 같이 망하면 그 피해가 국민에 미치기 때문이다. [8] 배가 적도선을 지나갈 때 하는 축제로 범선 시절에는 항해를 무사히 마치기를 기원하는 나름 경건한 축제였지만, 기선의 시대에는 그냥 신입생 환영회 같은 광란의 축제가 되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신입생 환영회처럼 후배 괴롭히기가 메인 행사다. 그 배의 수준에 따라 강도가 달라지는 것도 신입생 환영회와 비슷하다. 매카시의 경우 군함이었으므로 그 강도가 상당했을 것이다. 물론 여객선에서도 적도제를 하는 경우가 있지만, 승객들 보는 앞에서 신입 선원 다리 부러질 일을 시킬 눈살 찌푸리게 할 고참 선원은 없으므로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9] 오랫동안 공화당 소속이었지만, 1924년 대선에서 자신이 창당한 진보당으로 독자 출마해 16.6%를 득표했다. 다음 해 심장마비로 급서. [10] 아버지 로버트 M. 라폴레트 시니어와 함께 오랫동안 공화당 소속이었지만 아버지와 함께 진보당(미국 1924년)을 창설했다. 조지프 매카시 상대로 낙선한 후 우울증을 앓다가 1953년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11] 테일거너는 비행기 뒤쪽에서 기관총을 쏘는 후방사수를 뜻한다. 매카시는 2차대전 참전 당시 자신의 보직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그의 보직은 지상 임무였다. [12] 가난한 집안 출신에 순회 판사였던 그가 어디서 거액의 주식투자 자금을 모았는지가 나중에 이슈가 되었는데, 아직까지 자금 출처가 밝혀진 바 없다. 그는 판사 초기 시절부터 유명한 도박광이었으므로, 도박으로 거금을 모았다고 추정할 수도 있겠지만, 매카시의 도박 실력은 그런저런 수준이고 사실 도박판에서 일부러 져서 돈 잃어주는 방식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뇌물 상납의 수단으로 애용되는지라 즉, 이런 식으로 정치에 입문하기 전부터 판사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거액을 챙긴 부패한 인물이었다. [13] 이는 후에 대통령이 되는 존 F. 케네디에게 정치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사실 케네디도 정계 입문 초기에는 닉슨과 함께 강력한 반공주의 활동으로 입지를 다졌기 때문에 케네디는 생각보다 훨씬 강경파인데, 한 예로 1960년 대선에서도 ' 미사일 격차'라는 일종의 정치적 수사로 닉슨을 유약한 인물로 몰아세웠다. 물론 이건 나중에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패러디, 풍자되었다. [14] 필립 라폴레트가 맥아더 부하로 일했다. [15] 스타센은 매카시를 '건설적이고 진보적'이라 부르며 지지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정신나간 반공주의만 빼면 매카시가 그리 보수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16] 악명높은 매카시즘의 창시자답게 판단 기준도 상당히 자의적이었는데 빨갱이의 기준이라는 것이 완전히 공산주의를 신봉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의 폐해를 비판하거나 아나키즘 성향을 보이는 사람, 미국 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비판하는 사람, 소련이나 중국 등 공산 국가에 조금이라도 연줄이 있거나 그들에 대한 강경책을 비판하고 평화 협정 등 평화적인 수단을 주장하는 사람, 공산주의에 대해서 단순히 사회학적 연구 목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도 공산주의자로 몰았다는 것이다. 더 가관인 건 공산주의와 관련 없어도 자기보다 더 뛰어나거나 자신에게 마음에 안 드는 사람도 빨갱이로 찍어 버렸다. 즉, 공산주의자든 아니든 미국의 정책에 무조건 복종을 거부하고 옹호하지 않거나 자기 눈에 거슬리는 사람은 전부 빨갱이로 무작정 찍어서 없애 버린다는 것이다. [17] 오죽하면 빨간색 넥타이를 꼈다고 공산주의 신봉자라며 비난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인데 그만큼 매카시가 공산주의자 딱지를 붙이기 위해 별짓거리 다 했다는 것이다. [18] 다만 오펜하이머에 악감정을 품고 청문회를 꾸민 장본인인 루이스 스트로스는 정작 매카시가 '치밀한 준비없이 무턱대고 공격부터 감행하다가 역풍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인물이라고 판단하여 그를 배제했다. [19] 위대한 독재자〉의 마지막 장면인 최후의 연설이 공산주의 색채를 띄었거나, 모던 타임즈가 산업주의를 까고 있어서 문제가 된 것이다. 극작가 아서 밀러는 매카시즘 때문에 화가 나서 크루서블을 썼다. [20] 정작 그 가방에는 위스키 1병과 건조안주만 있었다고 한다. [21] 단 어느 나라에나 광신도가 있기 마련이라 여론조사 33%가 머로는 공산주의자라고 답하기도 했다. [22] 이 영화에는 공산주의자들을 고발하는 매카시의 연설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에서 연기가 너무 과장되었다는 지적이 시사회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장면은 배우가 연기한 것이 아니라 실제 매카시의 연설을 찍은 필름을 삽입한 것이었다고 한다. [23] 미국이 문민통제가 잘 되는 국가이기도 하나 당시에는 2차 대전-냉전으로 군의 입김이 어느 정도 있었다. 다만 아이젠하워가 군복을 벗고서 권력을 탐하지 않았기에 이후 장성 출신 대통령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아이젠하워는 군에 잔뼈가 굵어 군부의 잔머리 예산을 칼같이 잡아 거부해도 군부는 아이젠하워에게 별다른 소리를 안 할 정도의 영향력도 있었다. [24] 그 유명한 마셜 플랜을 제창한 군인으로, 2차 대전 초기에 미 육군을 바닥부터 다시 쌓아올리고, 교육훈련과 병참 등을 비롯한 온갖 부분에서 활약하여 '승리의 설계자'라는 별칭을 얻고 아이젠하워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 사실상 1950~60년대의 마셜은 서독을 필두로 한 서유럽 자유진영에 있어서는 대들보 그 자체인 존재였는데 이런 거물을 까버린 것이었다. [25] 조지 마셜은 2차대전 당시 미 육군 참모총장이었고 아이젠하워는 조지 마셜 휘하의 대서양 방면 육군 총사령관이었다. [26] 당연한 게 아이젠하워를 영입할 때 검증을 제대로 못 했다는 비판을 공화당도 받게 되고 민주당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공격하면 또 정권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이다. [27] 이때 민주당에선 유일하게 존 F. 케네디가 기권했다. 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이유였지만 아일랜드계에 대한 후원 때문에 일부러 기권한 거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28] 미국 상원의원의 임기는 6년이라서 매카시의 임기는 1958년까지였다. [29] 이 음모론은 풍자영화 <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도 나오며 심지어 아직도 믿는 사람이 있다. [30] 매카시의 사망 이후 치러진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어 민주당 소속으로 1989년까지 무려 32년간 상원의원을 지낸 인물이다. [31] 1959년부터 2010년까지 웨스트버지니아를 대표해 51년간 상원의원을 지낸 인물. 젊은 시절 매카시즘과 극단적인 백인우월주의에 동조했으나 1980년대 이후 참회하고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32] 어느 사회에서나 문제는 일어나며 사회풍자적인 대중문화, 비판적 시민운동은 건전한 방향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다. 또 사회과학자는 문제 해결법을 연구한다. 하지만 모든 게 위축되면서 각종 문제는 속으로만 곪았고 결국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단번에 터지는 바람에 1960년대~ 1970년대의 사회적 혼란을 불렀다. [33] 미리 말해두는데 미국에도 공산당은 존재한다. 1960년대 대법원에서 합법으로 확정되면서 지금도 정식 정당으로 활약한다. 문제는 정당 자체가 너무 작다는 것이다. [34] 사료 및 타당성 조사, 과학적 검증이 바탕이 된 역사적 사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 나치 유대인을 대량학살하지 않았다.' 식의 주장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포함한 수많은 증거와 증언이 있음에도 저런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인사들이 간혹 존재한다. [35] 의역하자면 “매카시즘은 이제 매카시였즘이다.” [36] 1957년-1989년까지 위스콘신주 상원의원 역임 [37] 다만 미국 민주당이 이 인간이 한 만행을 근거로 공화당을 마냥 비난만 할 수 있냐면 그것도 전혀 아니다. 상술돼있듯 조지프 매카시는 민주당으로 정치를 시작했고 케네디 가문의 후원도 받은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38] 명색이 체제의 우월함을 강조한 자유주의 국가의 거두인 미국에서 이런 지저분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미국 입장에서는 영원히 치욕적인 망신거리다. [39] 소련 암호해독 문건이 기밀해제된 후 미국 내 스파이들이 다수 공식 확인되었다. [40] 이원복이 구성하고 박흥용이 그린 학습만화세계사에서는 매카시 선풍이란 용어를 썼다. 선풍(旋風=회오리바람)이 '어떤 일이나 현상이 돌발적으로 사회에 강한 영향을 끼치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표현'이니 이 용어를 쓴 것이 문제될 건 없지만, '선풍적인 인기'라는 관용구 때문에 '선풍'이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좋은 것일 수 없는 매카시즘을 '매카시 선풍'이라고 표현한 것은 잘못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매카시즘을 굳이 한자로 표현할 때 매카시 광풍이라고 적지 '매카시 선풍'이라고 쓰지 않는다. [41] 1953년 1월까지 재임했기 때문에 임기 전부를 6.25 전쟁에 관여한 인사다. [42] 1957.5.2 임기 중 사망 [43] 로버트, 존 케네디의 아버지. [44]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로버트 케네디는 상당한 반공주의적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고 당연히 베트남 전쟁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1968년 대선을 앞두고 월남전에 대한 지지율이 떨어지자 입장을 슬그머니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