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17:44:11

이집트-튀르키예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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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아랍 공화국 튀르키예 공화국
1. 개요2. 역사적 관계
2.1. 고대2.2. 중세2.3. 근세2.4. 19세기2.5. 20세기2.6. 21세기
3. 여담4. 관련 문서

1. 개요

이집트 튀르키예의 관계.

오스만 제국이 1517년부터 1914년까지 약 400년간 이집트를 지배한 적이 있어서 양국 국민간의 사이가 좋지 못하며, 종교적인 면에서도 차이가 많다. 모두 수니파 이슬람을 믿지만, 이집트는 전통적으로 샤피이파가 우세했고, 현대에는 살라프파가 유행하고 있으며, 튀르키예는 전통적으로 하나피파가 주류다. 두 국가 모두 건국 초에 세속주의 정책을 시행했다. 오늘날 이집트와 튀르키예는 많은 교류를 가지며, 양국은 이슬람 협력기구의 회원국들이다.

2. 역사적 관계

2.1. 고대

이집트의 역사가 워낙 유구한 관계로 고대 이집트와 아나톨리아 지역 사이의 교류사 차원에서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자면, 청동기 시대 히타이트 왕국과 이집트 사이의 전쟁, 고대 이오니아의 그리스 폴리스들과 이집트와의 교류, 이집트에 기반한 헬레니즘 제국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여타 헬레니즘 제국들 사이의 교류 등으로 한도 끝도 없이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다만 오늘날 튀르키예의 정체성은 중세에서 근세에 이르는 동안 튀르크 무슬림들이 새로 정착하면서 새로 성립된 개념이고, 이렇게 양국 사이의 관계 관련하여 고대 시대 관계를 소급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 튀르키예와 이집트는 국민 대다수가 이슬람을 믿는 국가이지만, 종파 및 국민들의 이슬람 관련한 견해 차이로 크게 갈등하는 상황인데, 과거 이집트와 아나톨리아가 모두 기독교권이었던 동로마 제국 속주 시절에는 기독교 종파 차이로 상당히 갈등하던 차였다고 한다. 이게 어느정도였냐면 알렉산드리아가 무슬림들에게 함락당하자 이집트 속주 주민들은 아랍인들을 환영하고 아나톨리의 그리스인들은 이단들이 영토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환호하고 좋아했을 정도였다.

2.2. 중세

이집트는 서기 7세기 아랍인들의 정복을 계기로 이슬람화되었고, 아나톨리아 반도 내륙 지방은 서기 11세기까지 동로마 제국 영토로 존속하였다. 이집트의 경우 원래 아프리카아시아어족에 속하는 고대 이집트어가 사용되던 지역이었으나 아랍인들이 유입되고 행정과 학술에서 아랍어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콥트어는 급속히 사장되고 주민들이 급속히 아랍화되기 시작하였다. 아나톨리아 지역의 경우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여러 언어들[1]이 주로 사용되고 있었으나,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오우즈 튀르크인들이 대거 정착하면서, 주민들 상당수가 튀르크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튀르크인들이 아나톨리아에 정착하기 이전에는 오늘날 오스만 제국의 전신으로 평가할 수도 있는 셀주크 제국과 이집트에 기반한 파티마 왕조가 서로 대립하는 관계였다. 압바스 칼리프조 하룬 알 라시드 알 마문 같은 명군들의 치세가 끝난 이후 지방 군벌들이 영토 이곳저곳에서 군벌 왕조를 세우며 독립하고, 중앙의 칼리파를 무시하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아파 이스마일파 세력인 파티마 왕조가 튀니지 일대에서 동진하여, 압바스 칼리프조의 주요 세입원이자 곡창지대였던 이집트를 정복한다. 심지어 바그다드와 사마라 등에 체류하던 칼리파들 역시 시아파 계열인 부와이흐 군벌 세력에게 조종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호라산 일대의 셀주크 튀르크 제국은 칼리파를 시아파들로부터 구한다는 명분 하에 바그다드 방향으로 진출하여 부와이흐 군벌들을 몰아내고, 압바스 칼리파를 등에 업고 중동의 패권을 장악하는데 이를 셀주크 제국이라고 부른다.

셀주크 제국의 번영을 이끈 명재상 니잠 알 물크는 파티마 왕조를 라이벌로 여기고 무척 신경쓰던 상황이었다. 파티마 왕조는 시아파를 대표하는 상황이었고, 셀주크 제국 입장에서는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서 "시아파로부터 순니파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파티마 왕조는 따로 종파 싸움에 관심이 없었지만, 셀주크 제국 입장에서는 파티마 왕조에 기반한 이스마일파 세력이 자국 영토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아야 할 필요를 느겼다. 니잠 알 물크는 제국 영토 각지에 이른바 "니자미야"라고 불리는 샤피이파 계열 마드라사들을 건설했으며, 당대 최고의 신학자로 평가받는 알가잘리를 후원하여 이스마일파와 무타질라파 등등 이슬람 사변철학파들을 비판하는 신학서 "철학자들의 부조리"를 출간하도록 후원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니잠 알 물크가 후원하였던 근본주의 성향의 샤피이파는 파티마 왕조의 멸망 이후 오늘날 이집트의 주요 이슬람 법학파로 자리매김한다. 파티마 왕조는 십자군 전쟁 와중에 살라딘 아이유브 왕조에 의해 멸망당하는데, 아이유브 왕조는 순니파 왕조였다. 살라딘은 이스마일파를 탄압하고 이스마일파 신학교였던 알 아즈하르 대학을 순니파 마드라사로 변경하였다. 이렇게 오늘날 이집트 최고의 명문 대학으로 평가받는 알 아즈하르 대학은 아이유브 왕조 시대 들어서 샤피이파 마드라사가 되었다.

셀주크 제국은 호라즘 제국에 밀려 12세기 말 멸망하였다. 전광석화같이 중동과 중앙아시아를 장악했던 호라즘 제국 역시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하고, 압바스 칼리파가 시해당한 이후 맘루크 왕조가 후대 압바스 칼리파들을 대신 보호하기 시작하였다. 맘루크 왕조는 동쪽으로는 몽골 제국의 서진을 저지하고 북쪽으로는 십자군 국가들을 정복하여 순니파 이슬람 세계에서 입지를 다졌다.

2.3. 근세

오우즈 튀르크인들은 아나톨리아에 정착한 이후 여러 군벌 왕조들을 세우며 서로 전쟁을 벌였다. 중세 아나톨리아에서 난립한 튀르크계 군벌 왕국들은 과거 로마 영토에 있던 술탄국들이라는 뜻에서, 이른바 룸 술탄국이라고 불렸다. 룸 술탄국 중 하나에서 기원한 오스만 술탄국은 유럽으로부터 화포 기술을 수입하여 군사력을 다졌으며, 이를 바탕으로 1453년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지중해 일대의 강자로 거듭났다.

1517년 오스만 제국이 이집트와 시리아 일대에 기반한 맘루크 왕조를 격파하고 시리아와 이집트 일대를 장악한다. 맘루크들은 중세 기준 최강의 전투력을 가진 집단이었으나, 화포 관련한 전술 등에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오스만 제국의 포병들의 공격에 맘루크 기병들이 타는 말들이 패닉에 빠지면서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맘루크 왕조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된 이후에 이집트 일대의 주권은 유지하였으나, 오스만 제국 치하 시리아의 경우 현지 아랍인들을 중심으로 자치가 이루어졌다. 오스만 제국이 맘루크 제국을 예속화한 것을 계기로 기존에 맘루크 왕조에서 보호하던 압바스 칼리파위는 폐지되고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공식적으로 칼리파를 겸임하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의 기존 사회구조에 크게 손을 대지 않았다. 맘루크 왕조는 오스만 제국의 번국이 되어 이집트 내정에 필요한 비용을 제한 나머지 세금을 이스탄불로 보냈다. 물론 오스만 제국이 맘루크 왕조를 무조건 수탈만 한 것은 아니고, 당대 맘루크 왕조의 골치를 썩이던 포르투갈 세력을 견제하는데 힘을 보태주었다. 1517년 12월 오스만군은 메카의 관문이자 홍해 무역의 중심지인 제다에 주둔한 맘루크군을 도와 제다를 침공한 포르투갈군을 격퇴한다. 오스만 제국-맘루크 연합 해군이 포르투갈 군에게 패배할 때도 많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오스만 제국군은 에티오피아 방면에서 맘루크 왕조의 목줄을 죄던 포르투갈 세력을 완전히 격퇴하였고, 맘루크 왕조는 주 세입원 중 하나인 홍해 무역 관련 이권을 포르투갈에게 완전히 빼앗기지 않고 유지할 수 있었다.

2.4. 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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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군대가 이집트에 상륙하여 피라미드 전투에서 맘루크 군대를 대파하였다. 그동안 유럽인들을 마냥 야만인으로 생각하던 이집트의 지식인들은 유럽인들의 앞선 과학기술을 직접 목격하고 큰 충격에 빠지게 되었으며, 당대 이슬람권이 낙후된 이유는 바로 순나를 존중하는 아랍인들 대신 야만스런 튀르크인들 때문이라는 반튀르크-아랍우월주의 민족주의에 경도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역사 해석은 오늘날에도 이어지는데, 이집트인들은 오스만 제국이 이집트를 지배했던 시대를 마치 그리스인들의 오스만 제국 강점기를 해석하는 것처럼 아니 그것보다 더 심한 흑역사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하다.

19세기 초 메흐메드 알리 시절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실질적으로 독립하게 되었으며, 19세기 말에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명목상의 예속 상태에서도 벗어난다. 19세기 중반 이집트는 목화 재배 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였고,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미국에서 목화를 수출하지 못해 목화 가격이 폭등한 상황에서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으나, 남북전쟁이 끝나면서 목화 수출 산업이 큰 타격을 받고 영국에 완전히 예속되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이집트는 영국령 이집트라 하여 영국의 식민 지배를 겪게 되었다.

2.5. 20세기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동맹국 편에 참전했다가 패전한 이후 중동과 유럽 각지에 여러 영토들을 잃고 무너졌다. 아나톨리아 본토까지 분할될 뻔한 상황에서 터키 독립 전쟁이 일어나고 터키 혁명을 걸쳐 20세기 초 케말 아타튀르크를 국부로 하는 신생 터키 공화국이 탄생한다. 터키 공화국은 세속주의를 기치로 삼고 이슬람 근본주의를 억눌렀으며, 그동안 오스만 제국에서 사용되던 아랍 문자를 금지하고 대신 로마자로 터키어를 표기하도록 법을 제정하였다.

다른 한편 이집트에서는 20세기 초반 세속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 사이의 타협인 이른바 이슬람 모더니즘 사조가 유행하였다. 20세기 중반을 지나며 이슬람 모더니즘은 무슬림 형제단의 창건자 하산 알 반나 레닌주의의 반제국주의 이론에 영향을 받은 바를 바탕으로 이슬람주의 이론으로 거듭났다. 이집트 왕국은 엄연히 세속주의를 추구하였으나, 터키의 경우처럼 국민 정체성을 교육하고 창조하는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2] 특히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과 뒤이은 중동전쟁에서 충격을 받은 이집트인들은 세속 군부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되었으며, 기득권에서 소외된 이집트 일반 서민들 사이에서 이슬람 근본주의가 만연하기 시작하였다.

1991년 10월에 유세프 왈리 부총리가 중국, 튀르키예로부터 새로운 나무품종을 수입해 10년간 2,500만 그루를 심는다고 밝혔다. #

2.6. 21세기

2003년 1월 이집트와 튀르키예는 이라크 위기 평화해결 방안을 논의했다. #

이슬람주의 성향의 무르시 정권 당시에는 비슷한 이슬람주의 성향의 에르도안 대통령 및 정의개발당과 성향이 맞아 사이가 가까워졌지만, 무르시 정권이 쿠데타에 의해 무너지자 양국관계는 악화되었다. 2013년 11월 23일에 이집트 정부는 튀르키예 대사를 추방시키고 튀르키예와 외교 관계를 부대사급으로 격하하겠다고 밝혔다. # 2020년 1월 14일에 이집트의 튀르키예 방송국 직원이 체포되자 튀르키예 정부는 항의했다. #

최근 들어와서 이집트 내에서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대통령이 아야 소피아를 박물관에서 모스크로 다시 전환한 것과 이집트와 국경을 맞댄 리비아 내전에 튀르키예가 개입하려는 것에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물론 이집트에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들이 기승을 부렸던 만큼 기독교나 유대교에 대해 교회 방화, 테러가 종종 일어나곤 했지만 어쨌든 세속국가인 정부 차원에서는 교회나 시나고그를 지키고 개· 보수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2020년 7월 17일 이집트 최고 이슬람 성직자(그랜드 무프티)인 샤우키 알람은 "무슬림은 선지자 무함마드로부터 교회를 보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전쟁 중에도 사원을 파괴하거나 수도자들을 죽이지 말라고 했다"며 아야 소피아의 모스크 전환을 거세게 비판했다. #[3] 또한, 이집트내에서 반튀르키예 감정이 불고 있다. #

이와 더불어 리비아 내전에 튀르키예가 개입하는 것 또한 양국간의 관계에 긴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무아마르 카다피 사후 리비아는 명목상으로 수도 트리폴리와 서부 인근을 장악한 이슬람 원리주의 성향의 통합정부(GNA)와 동부 유전지대를 장악한 세속 군벌 리비아 국민군(LNA)가 대립하고 있다. 튀르키예는 GNA와 군사안보협정을 맺고, 현지에서 천연가스 탐사 및 시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집트 역시 튀르키예의 리비아 영향력 확장을 막기 위해 LNA를 지원하는 한편 2020년 7월 20일 군대를 파병하는 안건을 의회에서 승인했다. 직후 훌루시 아키르 튀르키예 국방장관은 "리비아의 평화와 안정을 깨뜨리는 동부 반군에 대한 지원을 그만두라"며 반발했다.

2021년 3월에 8년 만에 외교 접촉 하였다. # 2022년 11월 20일. 양 국간의 정상회담을 가졌다. #

3. 여담

이슬람주의자들의 외압으로 이집트 영화 및 드라마가 몰락하자 튀르키예 드라마가 빈틈을 노리고 중동 드라마 시장을 장악하기도 했다.

4. 관련 문서


[1] 오늘날 사멸한 아나톨리아어군 언어들은 물론 갈라티아 지역의 켈트어 계열 언어, 그리고 서부 해안 지방에서는 그리스어, 북부 해안 지방에서는 조지아어 계열 언어들 [2] 케말 아타튀르크 시절 터키는 자국 내 문맹을 사실상 완전히 퇴치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이집트는 21세기 들어선 오늘날에도 인구 20% 이상이 문맹이다. [3] 이를 두고 이슬람계에서는 에르도안 집권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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