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53:56

유연(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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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C283F><colcolor=#ece5b6>
한 초대 국왕
전조 초대 황제
유연 | 劉淵
파일:한왕유연.jpg
출생 249년 ~ 254년[1]
조위 병주 신흥군
(現 산시성 신저우시)
사망 310년 8월 27일 (향년 56~61세)
전조 평양 황궁 광극전
(現 산시성 린펀시)
능묘 영광릉(永光陵)
재위기간 초대 국왕
304년 ~ 308년 11월 2일
초대 황제
308년 11월 2일 ~ 310년 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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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C283F><colcolor=#ece5b6> 성씨 유(劉)
연(淵)
부모 부왕 남흉노좌현왕
모후 호연부인
배우자 호연황후, 소무태후, 광헌태후
자녀 7남
신장 199cm
원해(元海)
작호 한왕(漢王)
묘호 고조(高祖) → 태조(太祖)
시호 광문황제(光文皇帝)
연호 원희(元熙, 304년 ~ 308년)
영봉(永鳳, 308년 ~ 309년)
하서(河瑞, 309년 ~ 3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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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생애
2.1. 내력2.2. 출생과 초기2.3. 출세와 팔왕의 난의 발발2.4. 자립2.5. 칭제건원2.6. 최후
3. 평가4. 가족관계
4.1. 아내4.2. 자녀
5. 창작물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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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오호십육국시대를 개막한 인물이자 호한[2]의 창건자였다.

(字)는 원해(元海)였으며[3], 묘호는 태조(太祖)이고, 시호는 광문황제(光文皇帝)였다.

신흥(현재 산서성 흔주) 사람으로 일설에는 서하습성(현재 산서성 분양) 사람이라고도 한다. 흉노족 도각부(屠各部) 출신으로 남흉노의 제19대 선우였던 어부라[4]의 손자였으며, 좌현왕 유표[5]의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호연부인이었고, 공신이었던 대사공 호연익은 그의 장인어른이었다.

2. 생애

2.1. 내력

원래는 통일제국 서진의 혼란을 틈타 세운 한(漢)나라[6]였는데, 319년 유연의 족자인 유요가 조(趙)나라로 국호를 고쳤다.[7] 그런데 원래 유연과 유총의 장수였던 갈족의 수장 석륵이 동시대에 같은 이름의 조(趙)나라를 세웠으므로 먼저 세웠다는 의미에서 유요의 조를 전조(前趙), 석륵의 조나라를 후조(後趙)로 구별한다. 당나라 때 편찬된 《 진서》(晉書)에서는 진나라(晉)를 정통으로 봤기에 그 당시 할거 정권은 모두 <본기>가 아니라 <재기>로 기록했고, 유연의 이름은 당나라 고조 이연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에 피휘하기 위해서 이름 대신 자(字)를 이용해 <유원해 재기>로 기록했다.

2.2. 출생과 초기

위나라(魏) 제3대 전폐제 조방의 치세때인 가평(嘉平) 연간에 출생했으며[8], 어릴 때부터 비범했고 7살 때 모친상을 당하면서 통곡하자 이웃들이 이를 애처롭게 여겼다. 같은 종족과 부락에서 이를 탄복하고 칭찬했으며, 당시에 사공 왕창 등이 이를 듣고 가상히 여겨 조문했다.

유연은 공부를 좋아하여 밤에도 쉬지 않았고, 상당(上黨)의 학자 최유를 스승으로 섬기며 한학의 경전들을 공부하였는데, 《모시(毛詩)》, 《경씨역(京氏易)》, 《마씨상서(馬氏尚書)》에 특히 심취하였다. 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 손자병법》, 《 오자병법》은 통으로 외웠고, 《 사기》, 《 한서》와 같은 역사책까지도 안 읽은 책이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유연은 동문생인 주기(朱紀), 범륭 등을 돌아보며
"나는 《한서》의 전(傳)을 읽을 때마다 수하(隨河)와 육가에게는 무(武)가, 주발 관영에게는 문(文)이 없는 모습을 보고 항상 부끄러운 감정이 들었소. 도(道)란 사람이 넓혀나가는 것인데, 한 방면의 지식에 무지한 자가 된다면 이는 군자에게 수치와도 같소. 수하와 육가는 고조를 섬기면서 봉후(封侯)의 업적조차 세우지 못했고, 주발과 관영은 문제를 섬기면서 상서(庠序)의 아름다움을 흥하게 하지 못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라 말하고는 무학에도 힘쓰기 시작하면서 머지 않아 문무를 겸비하게 되었다. 이윽고 장성한 유연은 팔이 원숭이처럼 길어 활을 잘 쐈고, 힘은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났으며, 키는 8척 4촌[9]에 달하는 거구를 지녔다. 또, 수염은 3척 남짓 길렀고, 명치에는 3척 6촌 정도 길이의 붉은 털 세 가닥이 나있었다고 한다. 당시 관상을 잘보기로 소문난 둔류(屯留) 사람 최의지도 유연의 관상을 보고 그 비범함에 놀라기도 하였다. 그 이후로 최의지는 유연을 존경하여 그를 따랐고, 공사욱 등과 같은 자들도 유연과 교류하며 친분을 맺었다.

함의 연간(264년 ~ 265년), 유연은 인질 신분으로 위나라의 수도 낙양에 들어왔으나, 당시 실권자였던 사마소가 그를 매우 후대하였다. 유연은 낙양에서 왕미, 왕혼과 그 아들 왕제 등을 비롯한 여러 명사들과 친분을 쌓았다.[10]

황시 연간(265년 ~ 275년) 왕혼이 무제 사마염에게 여러 차례 유연을 천거하자, 사마염은 마침내 유연을 불러 직접 대화를 나누었다. 이후 사마염은
"유연의 풍모는 설령 유여(由余), 일제(日磾)라 할지라도 그를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
라며 왕제에게 말했다. 이에 왕제가 대답하길
"유연의 풍모는 실로 폐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으나, 그 문무의 재간과 현명함은 유여나 김일제보다 심오합니다. 폐하께서 만약 그에게 동남(東南)의 업무를 맡기신다면 오회(吳會) 평정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사마염은 왕제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이려 했지만, 공순 양요가 동오를 평정한 유연이 강동을 들어 할거하면 제압할 길이 없다는 말을 듣고 그만두었다. 이후 독발수기능의 난이 일어났을 때도 이희가 유연을 투입해 진압하자는 말을 꺼냈지만, 이번에도 공순이 서량을 평정한 유연이 여러 이민족들을 끌어안으면 더 큰 문제로 번진다며 이희의 주장을 논파해 결국 기각되었다.

얼마 뒤, 왕미가 낙양을 떠나 다시 고향인 동래(東萊)로 돌아가게 되자, 유연은 구곡(九曲) 끝자락까지 그를 배웅하고 송별회를 열어 울면서 말했다.
"왕혼과 이희는 나와 동향 사람인지라 서로 잘 알고 있어 매번 조정에 나를 칭찬하고 천거해주고 있으나, 몇몇 이들이 참언을 퍼부으니, 이는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 해롭기 짝이 없소. 나는 벼슬에 욕심은 없고 단지 내 이름을 알릴 수 있다면 족할 뿐이오. 나는 아무래도 낙양에서 죽어 영원히 그대를 다시 만나지 못할 운명인가 보구려."
이후 강개한 감정이 격해져 술을 마음껏 들이키고 큰 소리로 울부짖으니, 같이 앉아있던 이들도 모두 눈물을 참지 못했다. 무제 사마염의 아우 제왕 사마유가 인질로 있었던 유연에게 영웅의 자질이 있어 훗날이 두렵다면서 제거할 것을 상소했는데, 사마염이 이를 따르려고 했다가 왕혼이 죄도 없는 사람을 의혹만으로 죽이는 게 도리냐고 주장해 결국 사마염은 유연을 죽이지 않았다.

함녕 5년(279년) 봄, 부친인 유표가 죽자, 아버지의 뒤를 계승해 흉노의 좌부수(左部帥)가 되어 다시 고향인 병주(幷州)로 돌아갔다.

2.3. 출세와 팔왕의 난의 발발

태강 10년(289년) 11월, 서진 조정은 남흉노 5부에 도위를 설치하면서 유연을 북부 도위로 삼았다. 유연은 형벌을 엄정하게 집행하여 간사한 자들을 벌하였고, 베풀기를 좋아하고 재물을 가벼이 여겨 5부의 호걸들과 유주 및 기주의 이름난 유생들이 빈객으로 모여들었다.

영희 원년(290년) 10월, 무제 사마염이 붕어하고 혜제 사마충이 황위를 계승하자, 무제의 장인인 양준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당시 유연은 정치를 잘해 남흉노 5부 전체로부터 인정을 받았기에, 양준은 유연을 5부 전체를 통괄하는 건위장군, 흉노5부대도독(匈奴五部大都督)에 임명하고 한광향후(漢光鄉侯)에 봉하였다.

흉노족 학산(郝散), 학도원(郝道元) 형제가 무리를 이끌고 유연에게서 이탈하여 원강 4년(294년)과 원강 6년(296년)에 연달아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조정에서 유연에게 책임을 묻고 면직시켰다. 학산의 난은 4개월도 안 지나 금방 진압되었으나, 그 동생인 학도원은 강족 계열의 이민족인 마란강(馬蘭羌)족, 노수호족과 연합해 북지(北地)태수 장손(張損)을 살해하는 등 서진에 입힌 피해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강 9년(299년) 정월, 성도왕 사마영이 업(鄴)에 주둔하면서 유연을 용병으로 고용해 녕삭장군, 감5부군사(監五部軍事)로 삼고, 용맹하기로 유명한 유연의 아들 유총을 적노장군으로 삼았다.

팔왕의 난이 일어나 전 대륙이 큰 혼란에 빠진 것을 본 우현왕 유선은 여러 흉노족 유력자들을 불러모아 유연을 중심으로 흉노족을 부흥시키자 주창하고, 유연을 대선우로 추대하기로 서로 모의한 뒤, 호연유(呼延攸)를 업으로 보내 알리게 하였다. 이 소식을 몰래 전해들은 유연은 장례식을 핑계로 떠나려고 했지만 거절당하자, 일단 호연유부터 돌려보내 먼저 가서 5부의 호(胡)족들을 소집해 기다리라 하고 본인은 일단 사마영 곁에 남았다.

영안 원년(304년) 3월, 성도왕 사마영이 황태제에 오르자, 유연은 둔기교위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7월에 동해왕 사마월이 사마영 토벌을 선포하고 혜제를 받들어 업으로 진격해오니, 사마영은 유연을 보국장군, 도독북성수사(都督北城守事)로 삼았다. 이후 탕음 전투에서 사마월을 격파한 사마영은 혜제를 포로로 잡아 돌아오고, 유연을 관군장군으로 다시 임명하고 노노백(盧奴伯)에 봉하였다. 그때 마침 유주(幽州)의 안북장군 왕준과 동영공 사마등이 선비족과 오환족 100,000 군사를 일으켜 남하하자, 유연은 병력이 절실히 필요해진 사마영에게 흉노족 5부의 군대를 일으키겠다 청하였다. 사마영은 일전에 부탁했을 때와 달리 크게 기뻐하며 유연을 북선우, 참승상군사로 삼고 병주로 돌아가는 것을 허하였다. 이때 파로장군 왕육도 감시 차원으로 유연을 따라갔다.

영안 원년(304년) 8월, 좌국성(左國城)에 도착한 유연이 유선 등의 추대를 받아 마침내 대선우에 오르니, 불과 20여 일만에 50,000명의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들었다.유연은 서하국(西河國)의 이석(離石)을 도읍으로 하고, 아들 유총을 녹려왕(鹿蠡王)에 봉한 다음, 사마영과의 약속을 이행키 위해 좌어육왕(左於陸王) 유굉(劉宏)에게 정예 기병 5,000여 기를 주어 사마영의 부하인 북중랑장 왕수(王粋)를 돕게 하였다. 그러나 유굉이 출발하기도 전에 왕수가 이미 사마등에게 격파당했다는 보고를 듣고 출병을 그만두었다. 이후 사마등이 선비족 탁발부로부터 군사를 빌려 서하국을 침공하자, 유연은 이에 맞섰으나 패배하였다. 유연을 격파한 사마등과 탁발부의 탁발의타는 더 나아가지 않고 분수(汾水) 동쪽에서 맹약을 맺고 돌아갔다.

한편, 유연이 떠난 사이 왕준과 사마등의 군대와 맞섰다가 여러 차례 격파당한 사마영은 낙양으로 도주하기로 결심하고 새벽에 출발하려 했다. 그러나 사마영의 모친인 태비 정씨가 업성을 사모해 떠나지 않으려 하자, 사마영은 감히 결정하지 못하고 시간을 지체했다. 그러다가 사마영은 수십 기병만 거느리고 노지와 함께 황제를 모시고 낙양을 향해 달아났고, 사마영에게 버림 받은 수만 명은 적에게 무참히 학살당했다. 유연은 사마영이 낙양으로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했다.
"내 말을 채용하지 않다가 거꾸로 스스로 도망하고 무너졌으니 정말로 못난이로다!"
그리고 우어육왕(右於陸王) 유경(劉景)과 좌독록왕(左獨鹿王) 유연년(劉延年) 등에게 보•기 20,000명을 주어 선비족과 오환족의 토벌을 명했으나, 유선 등이 대업을 위해서는 선비와 오환의 도움이 필수적이라며 굳게 간해 명령을 철회하였다.

2.4. 자립

원희 원년(304년) 10월, 수도를 좌국성으로 옮겨 한왕(漢王)[11]을 칭하고 전한, 후한, 촉한 3대조의 황제들에게 제사를 올렸으며, 독자적인 연호를 개원하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이때 유연의 명성을 듣고 오랑캐 뿐만 아니라 한족까지 그에게 귀부해왔고, 일찍이 등용에 실패했던 진원달도 서신에 응해 유연의 밑으로 들어왔다. 유연은 우현왕 유선을 승상, 최유를 어사대부, 좌어육왕 유굉을 태위로 삼았으며, 동문생인 범륭과 주기도 불러 각각 대홍려, 태상에 임명하였다. 또, 친구 최의지를 황문랑으로 삼고, 조카 유요를 건무장군으로 삼았는데, 이들 중 유연의 스승이던 최유만은 관직을 굳게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원희 원년(304년) 12월, 사마등이 장수 섭현(聶玄)을 파견해 또다시 공격해오자, 유연은 대릉(大陵)으로 나아가 섭현을 무찔러 대승을 거두었다.(대릉 전투) 이후 건무장군 유요를 따로 태원(太原)으로 보내 중도(中都)를 점령하고, 유연은 계속 진격해 상당의 현지(泫氏), 둔류(屯留), 장자(長子)를 빼앗았으며, 관군장군 교희(喬晞)를 파견해 서하의 개휴(介休)를 빼앗았다. 다만, 교희가 개휴현령 가혼을 죽이고 그의 처 종씨마저 능욕하려다 죽이자, 이 사실을 보고받은 유연은 친히 개휴로 가 교희를 4계급 강등시키고 예를 갖추어 가혼의 장사를 지냈다.

원희 2년(305년) 초, 사마등이 장수 사마유(司馬瑜), 주랑(周良), 석선(石鮮) 등을 파견해 유연을 토벌케 하였다. 사마유 등이 이석의 분성(汾城)을 공격해 점령하자, 유연이 6군을 일으켜 무아장군 유흠(劉欽)을 보내 사마유 등을 치게 하니, 유흠은 적군과 4차례 교전하여 전부 승리하고 사마유 등은 패하여 돌아갔다.

원희 2년(305년) 6월, 이번에는 유연이 사마등을 공격하였다. 위기에 빠진 사마등이 황급히 탁발부의 탁발의타에게 구원을 청하자, 탁발의타는 수천 기병을 거느리고 달려와 한의 장수 기무돈(綦毋豚)을 참수하였다. 이때 하필 이석에 대기근이 들어, 유연은 군대를 여정(黎亭)으로 옮겨 주둔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군량을 수급할 수 있는 저각(邸閣)으로 가면서 태위 유굉을 이석에 남겨 지키게 하고, 대사농 복예(卜豫)에게 곡식을 운반해 공급하도록 하였다.

원희 3년(306년) 12월, 태재 사마월은 동영공 사마등을 내려보내 업을 지키게 하고, 유곤을 병주자사로 삼아 새로 부임하게 하였다. 이에 유연은 전장군 유경을 사지절, 정토대도독, 대장군으로 삼아 병주자사 유곤을 판교(板橋)에서 요격해 진양(晉陽)에 들어가는 것을 막게 하였다. 그러나 유경은 오히려 패하였고, 유곤은 무사히 진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에 시중 유은과 우광록대부 왕육[12]이 나아가 유연에게 간하였다.
"전하께서 거병하신지 어언 1년이 지났으나, 외진 곳만 지키고 계셔서 왕의 위세를 널리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사방으로 장병을 풀어 결전을 벌이시고 유곤을 효수해 하동(河東)을 평정하신 뒤에, 황제를 칭하시고 남쪽으로 나아가 장안(長安)을 국가의 도읍으로 삼으신 다음, 관중의 무리를 거느리고 낙양을 석권하실 수만 있다면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은 손바닥 뒤짚는 것보다 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조가 기반을 닦아 항우의 초나라를 멸망시킨 책략입니다."
유연은 기뻐하며 말했다.
"내 마음도 그러하오."

원희 4년(307년) 3월, 유연은 급군(汲郡)을 경략하고 도읍인 이석으로 돌아왔다. 이때 유곤이 이석에서 300리 떨어진 곳에 선비족 부락들을 촘촘히 배치하여 그 수가 10,000여 호에 달하니, 유연은 두려움을 느끼고 포자(蒲子)로 옮겨 주둔하였다. 그러자 하동과 평양(平陽)의 여러 속현과 보루들이 한나라에 투항하였고, 갈족 석륵, 상당의 호족 장배독(張㔨督), 풍막돌(馮莫突) 등 잇달아 귀부하자, 유연은 모두 받아들이고 관직을 수여하였다. 이때 장배독은 친한왕(親漢王), 풍막돌은 도독부대(都督部大), 석륵은 보한장군, 평진왕(平晋王)에 각각 임명되어 군사를 통솔하였다.

유연은 낙평(樂平)에서 2,000여 명의 군사를 보유하고 있는 오환족의 장복리도(張伏利度)에게 몇 번이나 서신을 보내 귀순할 것을 권유했지만, 장복리도는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이에 석륵이 장복리도에게 거짓 투항하여 그 휘하의 부하들을 설득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뒤, 기회를 봐서 장복리도를 사로잡고 그 부하들을 흡수해 유연의 아래로 다시 들어갔다. 유연은 석륵의 공을 치하하며 그에게 도독산동정토제군사(都督山東征討諸軍事)를 더하여 주고, 장복리도의 무리를 그대로 이끌게 하였다.

2.5. 칭제건원

원희 5년(308년) 정월, 무군장군 유총 등 10명의 장수를 파견해 태행산(太行山)을 점거하게 했고, 보한장군 석륵 등 10명의 장수에게는 동쪽으로 조, 위 지역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원희 5년(308년) 5월, 도적떼를 거느리며 악명을 떨치던 왕미는 자신감이 생겨 낙양성에 도전했다가 왕연에게 대패하고, 유령의 패잔병과 도중에 합류하여 유연에게 귀순하였다. 유연은 시중・어사대부를 보내 오랜 친구인 왕미를 영접하고, 그를 시중・사예교위・특진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그 사촌동생 왕상 역시 산기시랑으로 삼았다.

원희 5년(308년) 7월, 평양을 침략하여 평양태수 송추(宋抽)를 패주시키고, 하동태수 노술(路述)을 전사시켰다. 이윽고 유연이 포자로 천도하자, 상군(上郡)에서 4부의 선비족을 이끌던 추장 육축연(陸逐延), 저족 추장 선징(單徵)이 한나라에 투항해왔다.

영봉 원년(308년) 10월, 칭제하여 대사면령을 내리고 '영봉(永鳳)'으로 개원하였다. 아들 유화를 대장군, 유총을 거기대장군, 조카 유요를 용양대장군으로 삼았다.

영봉 원년(308년) 11월, 병주자사 유곤이 상당태수 유돈과 선비족 군대를 이끌고 호관을 공격해 진동장군 기무달(綦毋達)을 패주시켰다.

영봉 원년(308년) 12월, 대장군 유화를 대사마, 양왕(梁王), 상서령 유환락(劉歡樂)을 대사도, 진류왕(陳留王), 어사대부 호연익(呼延翼)을 안문군공(雁門郡公)으로 삼았다. 그리고 종실의 멀고 가까움으로 구분하여 군왕(郡王)과 현왕(縣王)으로 구분하여 봉하였고, 다른 성들도 공로에 따라 공(公), 후(侯)에 봉하였다.

영봉 2년(309년) 정월, 태사령 선우수지(宣于修之)가 평양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며 평양을 도읍을 하면 사마씨의 진나라를 멸할 수 있을 것이라 진언하자, 광문제 유연은 그 말을 듣고 평양으로 천도하였다.(평양 천도)

영봉 2년(309년) 3월, 진의 좌적노장군 주탄(朱誕)이 한나라에 귀순해 수도 낙양이 외롭게되어 약해졌다고 알리자, 주탄을 전봉도독으로 삼고, 멸진대장군 유경을 대도독으로 삼아 여양(黎陽)을 공격하도록 했다. 유경이 여양에서 이기고 거기장군 왕감을 연진(延津)에서 격파한 후 남녀 30,000여 명을 황하에 빠뜨렸다는 소식을 듣자, 유연은 노하여
"유경은 무슨 면목으로 짐을 다시 만나겠으며 또, 천도(天道)가 어찌 능히 이를 용납하겠는가! 내가 제거하려는 것은 사마씨 뿐이거늘 가난한 백성들에게 어찌 죄가 있겠느냐!"
라 하며 유경을 평로장군으로 내치고, 왕미를 정동대장군, 청주목으로 삼아 초왕(楚王) 유총과 함께 호관(壺闗)을 공략하도록 했다.

하서 원년(309년) 5월, 어떤 이가 분수(汾水)가에서 옥새를 발견하였는데, 그 크기가 1촌 2분이었고 사방면으로 "유신보지(有新保之)"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이는 폭군의 대명사인 왕망이 만든 옥새인지라, 발견한 자가 "연해광(淵海光)"이라는 글귀를 추가로 새겨서 유연에게 바치니, 이를 상서로운 징조라 여긴 유연은 경내의 죄수들을 사면하고 연호를 '하서(河瑞)'로 고쳤다. 이때 아들 유유(劉裕)를 제왕(齊王)에 봉하고, 유륭(劉隆)을 노왕(魯王)에 봉하였다..

하서 원년(309년) 8월, 초왕 유총 등에게 진격해 낙양을 공격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유총은 평북장군 조무를 격파했지만 의양(宜陽)에서 빠르게 승리한 것을 믿고 방비를 게을리 하다가 패배하였다.

하서 원년(309년) 10월, 유총, 왕미, 시안왕 유요, 여음왕 유경 등에게 정예 기병 50,000명을 인솔해 낙양을 다시 공격하게 했다. 정로장군 호연호가 진의 장수 북궁순이 이끄는 결사대의 공격으로 죽고, 호연익이 부하들의 반란으로 살해되자, 광문제 유연은 군사를 돌리게 했는데, 유총이 서진의 군사는 약하니 두 장수가 죽은 이유로 군사를 돌리면 안된다고 하면서 낙양을 공격하게 해달라고 청하자 이를 허락했다. 그러나 14일에 동해왕 사마월의 참군인 손순이 기습하여 관군장군 호연랑을 죽이고 평진장군인 안양애왕 유려를 익사시키자, 선우수지가 지금 서진의 기세는 왕성해 대군이 돌아가지 않으면 패배할 것이라면서 신미년(311년)에 낙양을 함락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자 유총 등을 불러 돌아오도록 했다.

하서 원년(309년) 12월, 도호대장군 곡양왕 유현을 파견해 정북대장군 유령, 안북장군 조고, 평북장군 왕상과 함께 동쪽으로 가서 내황에 주둔하도록 했으며, 왕미가 좌장사 조억으로 하여금 안동장군의 업무를 수행하게 해 동쪽으로 가 청주를 공략하게 하면서 그의 집안 사람들을 영접하겠다고 청하자 이를 허락했다. 또, 진류왕 유환락을 태부로 삼고, 초왕 유총을 대사도로, 강도왕 유연년(劉延年)을 대사공으로 임명하였다

2.6. 최후

하서 2년(310년) 정월, 저족 선징의 딸 선씨를 황후로 세우고, 양왕 유화를 황태자로 삼으면서 대사면령을 내렸다. 아들 유예(劉乂)를 북해왕(北海王)에 봉하고, 장락왕 유양(劉洋)을 대사마로 임명하였다.

하서 2년(310년) 7월, 초왕 유총, 시안왕 유요, 평동대장군 석륵, 안북대장군 조고가 하내태수 배정(裴整)을 회현(懐縣)에서 포위하였다. 진의 정로장군 송추가 회현을 구원하러 갔다가 석륵과 평북대장군 왕상에게 격파당하니, 하내 사람들은 배정을 잡아 항복하였다. 광문제 유연이 배정을 상서좌승으로 삼자, 하내독장 곽묵은 배정의 잔당을 거두어 스스로 오주(塢主)가 되었다.

동년 7월 9일, 광문제 유연이 갑자기 병들어 누웠다. 유연은 후사를 부탁하기 위해 진류왕 유환락을 태재, 장락왕 유양을 태부, 강도왕 유연년을 태보, 초왕 유총을 대사마•대선우로 삼고, 모두 나란히 녹상서사를 겸하게 하였다. 또, 10일에 평양 서쪽에 선우대(單于臺)를 설치한 뒤, 제왕 유유를 대사도, 노왕 유륭을 상서령, 북해왕 유예를 무군대장군영•영 사예교위, 시안왕 유요를 정토대도독•영 선우좌보(領單于左輔), 교위 교지명을 영 선우우보(領單于右輔), 좌광록대부 유은을 좌복야, 우광록대부 왕육을 우복야, 임의(任顗)를 이부상서, 주기를 중서감, 호군 마경(馬景)을 영 좌위장군(領左衛將軍), 영안왕 유안국(劉安國)을 영 우위장군(領右衛將軍), 안창왕 유성, 안읍왕 유흠(劉欽), 서양왕 유선(劉璇)을 나란히 영 무위장군(領武衛將軍)으로 각각 임명해 금군을 나누어 통솔케 하였다.

동년 7월 16일, 광문제 유연은 병세가 점점 위중해지자 태재 유환락 등을 불러 유조(遺詔)를 내리고 재위 7년만에 광극전(光極殿)에서 붕어하였다. 유연은 결국 꿈에 그리던 낙양 공략을 이루지 못한 채 병사했으며, 그의 뒤는 태자 유화가 이었다.

광흥 원년(310년) 9월 11일, 유화를 제거하고 황위에 오른 소무제 유총이 영광릉(永光陵)에서 광문제 유연의 장사를 지냈고, 시호를 '광문(光文)', 묘호를 '고조(高祖)'라고 했다.

3. 평가

역사상 최초로 중원에 이민족의 독립 왕조를 세운 인물이자 오호십육국시대를 개막한 인물이었다. 그 이전에도 북방의 이민족들이 여러 차례 중원에 진출하여 전쟁과 약탈을 벌이기도 했지만 독자적인 나라를 세운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따라서 5호 16국시대라는 헬게이트를 연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오히려 유연이 더 오래 살았더라면 팔왕의 난으로 혼란스러운 중국을 통일하고 내전이 더 일찍 종식되었을 것이란 평가도 있다. 애초에 유연은 분명 성도왕 사마영을 군사적으로 도우려고 했었고, 사마영의 판단미스 등으로 일이 여의치 않은 상황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제대로 독립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혼란의 시대를 연 건 서진 사마씨 황족들의 다툼으로 나라가 안에서부터 무너져버린 사건 때문이지, 유연이 헬게이트를 열었다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이민족 군주로서 최초로 유학을 나라의 근본 이념으로 삼았으며, 나라 이름도 한고조 유방 한나라를 본떠 '한'이라 칭했다. 그는
"흉노는 한의 동생이다."
라는 논지하에 서한- 동한- 촉한의 삼조오종(三祖五宗)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즉 유연은 한나라의 정통성을 촉한이 이었다고 본 것이다.

이때 유연은 소열황제 유비에게 '열조'(烈祖)라는 묘호를 바쳤으며, 후주(後主) 유선에게는 '효회황제'(孝懷皇帝)라는 시호를 바쳤다. 묘호는 촉한에서 바친 것이 아니었지만 유비의 정식 묘호로 인정을 받았으며 《 조선왕조실록》에도 유비의 묘호가 열조로 나온다. 반면 나중에 유연이 붕어하고 시간이 지나 제위에 오른 그의 조카 유요는 나라 이름을 로 바꾸고 흉노의 핏줄을 강조했으며, 한나라의 3조 5종 제사도 자연스럽게 없앴다.

하지만 유연은 평양성 이외의 지역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되려 석륵 등의 이탈을 막지 못하는 정치적 한계를 보여줬다. 점령지의 한족들을 자신의 국가로 감싸 안지 못하고 도주토록 만들었으며 후한의 옛 제도와 흉노의 제도를 적절히 융화시키지 못해 호한분치가 지속하여 결국 왕국의 생명을 단축하는 배경을 만들고야 말았다. 이외의 오만가지 실책으로 갈족의 후조에 의해 나라가 멸망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유연이 임종시에 조카이자 태제였던 유환락과 태부 유양, 태보 유연년을 불러들여 자신의 3남이자 대사마, 대선우, 녹상서사였던 초왕 유총과 힘을 합쳐 유화를 보필하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한다.

태조 광문제 유연은 큰 뜻을 품고, 관용이 풍부했던 영걸로 알려져 있다.[14]

4. 가족관계

4.1. 아내

  • 황후 호연씨(呼延氏) - 유연의 첫번째 황후. 대사공 안문군공 호연익의 딸.
  • 소무태후 선씨(單氏) - 유연의 두번째 황후. 저족 추장 선징의 딸. 호연씨 사후 황후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 광헌태후 장씨(張氏) - 유연의 첩. 소무제 유총의 생모로 유총이 즉위했을 때 황태후로 추존되었다.

4.2. 자녀

  • 태자 유화(劉和) - 호연씨 소생의 적장자. 광문제 유연의 뒤를 이어 제2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 유공(劉恭) - 광헌태후 장씨 소생의 차남. 황위를 찬탈한 친동생 유총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다.
  • 초왕(楚王) 유총(劉聰) - 광헌태후 장씨 소생의 4남. 황제 유화로부터 황위를 찬탈하였다.
  • 제왕(齊王) 유유(劉裕) - 5남. 생모는 불명. 황제 유화가 호연유(呼延攸)를 보내 기습하였고 이내 살해당했다.
  • 노왕(魯王) 유륭(劉隆) - 6남. 생모는 불명. 황제 유화가 유승(劉承)을 보내 기습하였고 이내 살해당했다.
  • 북해왕(北海王) 유예(劉乂) - 7남. 생모는 불명. 소무제 유총의 황태제가 되었으나, 유총의 아들인 유찬의 계략으로 폐위당하고 근준에게 암살당했다.

5. 창작물

삼국지평화에서는 유선의 외생질로 나와 촉한을 부흥시키는 것으로 나오며, 《 삼국지연의》 이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후삼국지》에서 촉한의 후주 유선의 7남인 유거(劉據 또는 劉璩)가 개명한 인물로 나오지만 실제 역사와는 상관없다. 4세기 흉노족과 티베트계 저족 등이 중국 본토에 나라를 세우면서 한족 성씨를 사용했을 뿐이었다.

삼국지톡 완결편에 잠시 등장한다. 파괴된 서진의 비석을 바라보며, 우리 선조들 고생한 얘기라며 조부 어부라의 이야기를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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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덕 모용초 ,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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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위 가평(嘉平, 249년 ~ 254년) 연간에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가평이란 연호가 249년 4월부터 254년 10월까지 썼던 연호라는 걸 감안하고 역산한 출생연도이다. [2] 漢, 훗날의 전조(前趙) [3] 휘가 당고조와 같기 때문에 당나라 때 작성된 진서에서는 피휘를 위해 자인 원해로 서술했다. [4] 그의 숙부는 철불부의 시조였던 거비로, 5호 16국시대 말기에 북하를 세운 영웅 혁련발발은 거비의 자손이었다. [5] 채옹의 딸로 유명한 채염 보쌈한 그 흉노족이다. 채염은 정실은 아니고 아마 첩실이었을 것이, 유표의 두 아들을 낳았지만 조조가 돈을 줘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6] 유연의 조상은 남 흉노족의 선우였는데, 한고조 유방이 종실녀를 묵돌 선우에게 시집보냈기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에서 대대로 유씨라고 자칭했다. 유연은 그래서 한나라의 후손이라는 의미에서 나라 이름을 (漢)이라고 정했던 것이다. [7] 이 때문에 유요의 조나라를 조한(趙漢)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8] 《진서》의 기록에 따르면 어머니 호연부인이 아들 낳기를 빌다가 상서로운 기운을 받고 온 때가 가평 연간이었다고 한다. 그 이후 13개월 후에 유연을 낳았다고 했으니, '가평'이란 연호가 249년 4월부터 254년 10월까지 썼던 연호라는 걸 감안하면, 빨라도 249년생, 늦어도 254년생이 된다. [9] 당시 척인 23.7cm로 계산하면 199cm가 나온다. [10] 200년쯤 뒤 등장한 유라시아 반대편의 동고트 왕국의 명군 테오도리크 대왕을 생각하면 되겠다. [11] 유연의 선조인 묵특 선우가 한고조 유방과 화의를 맺을 때 형제가 된 기념으로 유씨를 칭했다. 그래서 유연은 자기는 유씨이기 때문에 멸망한 한( 전한 후한)의 뒤를 잇고, 병주를 얻어 한족을 통치한다는 이유로 한나라라고 칭했다. 이것은 나중에 유요가 조나라(전조)로 이름을 바꿀 때까지 계속되었다. [12] 사마영의 지시를 받고 감시차 따라갔다가 유연이 한왕을 칭할 때 항복하였다. [13] 본명은 유양(劉陽)이었지만 황태자가 된 뒤 유장(劉莊)으로 개명했다. [14] 양민 학살을 이유로 유경을 문책한 사실만 보아도 난세의 여타 군벌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한나라의 부활을 칭하고 3조 5종을 제사지낸 것도 어쩌면 탁월한 정치행위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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