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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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王桑(? ~ 312)
전조의 인물. 자는 불명. 청주 동래군 출신. 왕미의 사촌동생.
2. 생애
영흥 3년(306년) 3월, 현(惤) 현령 유백근(劉柏根)이 반란을 일으켜 현공(惤公)이라 자칭하자, 왕미를 따라서 유백근의 밑으로 들어가 중랑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안북장군 왕준이 장수를 파견해 유백근을 참수하니, 왕미와 함께 유백근의 잔당을 이끌고 해안가로 도망쳤다가 연주자사 구희의 동생인 구순(茍純)에게 패해, 장광산(長廣山)으로 들어가 도적떼가 되었다.영가 2년(308년) 5월, 낙양 공략에 실패한 왕미는 좌위장군 왕병(王秉)의 추격에서 겨우 벗어나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한(漢)을 세운 유연에게로 귀순하였다. 이때 왕상도 유연에 의해 산기상시에 임명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평북장군으로 승진하였다.
하서 원년(309년) 12월, 광문제 유연의 명령을 받고 도호대장군•곡양왕 유현(劉賢), 정북대장군 유령, 안북장군 조고와 함께 내황(內黃)에 주둔하였다.
하서 2년(310년) 7월, 초왕 유총의 지휘 아래 시안왕 유요, 진동대장군 석륵, 안북대장군 조고과 더불어 서진의 하내(河內)태수 배정(裴整)이 지키는 회현(懷縣)을 포위하였다. 서진 조정에서는 하내를 구원하기 위해 정로장군 송추(宋抽)와 관군장군 양거(梁巨)를 보냈는데, 왕상과 석륵이 장릉(長陵)에서 이를 요격하여 대파하였고 적장 송추를 전사시켰다. 이에 하내 사람들은 배정을 붙잡아 한군에 투항하였다.
광흥 2년(311년) 4월, 안북대장군 조고와 함께 서주를 공략하기 위해 팽성(彭城)을 향하였다. 당시 서주는 서주자사 배순(裴盾)과 배순의 장사 사마오(司馬奧)의 가혹한 통치에 고통받고 있었기에, 조고와 왕상이 하비(下邳)에 이르자 배순의 부하들은 싸우기도 전에 모두 흩어져 달아났고, 배순과 사마오도 저항을 포기한 채 회음(淮陰)으로 도망쳤으나 이내 조고에게 사로잡혀 살해당했다.
가평 2년(312년) 4월, 하남(河南)을 진수하던 왕상과 조고는 석륵이 왕미를 죽이고 북쪽으로 치고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 수도 평양(平陽)으로 귀환하려 하였다. 그러나 군영에 식량이 다하여 병사들끼리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기에,왕상과 조고는 교요진(䂭磽津)에서 일단 황하를 건넌 후, 하북의 여러 지역들을 돌아다니면서 군사를 풀어 약탈해 식량을 보충하였다. 그때 서진의 병주(并州)자사 유곤이 유연(劉演)을 위군(魏郡)태수로 삼고 업(鄴)으로 보내 진수시키니, 왕상과 조고는 유연에게 공격당할 것이 두려워 장사 임심(臨深)을 진양(晉陽)으로 보내 인질이 되게 함으로써 유곤에게 투항하였다. 유곤은 이들의 투항을 받아주고, 왕상을 예주(豫州)자사에 임명하였다.
가평 2년(312년) 6월, 다시 한나라로 돌아가고 싶었던 왕상과 조고는 회현에서 한나라군을 영접하고자 하였다. 이에 한나라 조정에서도 진원장군 양복자(梁伏疵)를 파견해 영접하였는데, 왕상의 장사 임심과 모목(牟穆)이 배반해 무리 10,000여 명을 거느리고 위군태수 유연에게로 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황한 왕상이 한나라로 귀순하려던 것을 멈추고 자신의 무리만을 인솔해 고향인 청주(靑州)로 달아나려 하니, 양복자를 따라가던 조고는 별동대를 보내 왕상을 추격하였다. 왕상은 곡양(曲梁)에서 따라잡혀 이내 살해당했고, 왕상의 장수 장봉(張鳳)이 그 잔당을 수습해 유연에게 귀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