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9:30:58

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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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시(善諡)
2.1. 극찬을 나타내는 경우2.2. 찬양을 나타내는 경우2.3. 좋았다가 격이 떨어진 경우
3. 동정을 나타내는 경우4. 악시(惡諡)
4.1. 영(靈)4.2. 양(煬)4.3. 려(厲)4.4. 추(醜)4.5. 유(幽)
5. 기타
5.1. 유교적 시법을 따르지 않은 경우5.2. 가칭: 소(少)·말(末)·폐(廢)·출(出)5.3. 시호가 없는 경우
6. 시호에 사용되는 문자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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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법()은 시호, 묘호, 존호 등을 붙이는 데 쓰는 법칙을 말한다. '시호법(諡號法)'이라고도 한다.

시호 묘호는 사후에 후손이나 신하들이 삶과 업적을 평가하여 올리는 것이며, 존호는 생전에 올리는 것이다.

묘호는 원칙적으로는 천자(天子), 즉 황제 전용이나 황제를 칭하지 않은 고려 조선 등에서도 사용하였으며, 존호는 국왕 및 왕비, 대비급에게 주로 붙이고 시호 신하들에게도 내려진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시호 묘호로 통칭되는 이는 한 나라의 군주이며, 오등작을 받은 신하 중에서도 공(公)이나 후(侯) 등의 시호가 붙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들은 확실하게 군주와는 다른 시호가 붙으므로 쉽게 구별이 가능하다. 또한 폐위된 황제, 나라를 잃은 황제, 요절한 황제 등은 폐제, 말제, 소제 등의 임시 시호나 묘호가 붙거나, 왕(王)이나 군(君), 공(公) 등 황제나 국왕이 되기 전에 사용했던 책봉호를 사용하는 등 확실하게 구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시법이라는 것이 언제부터 생긴 것인지는 불명확하나 상나라 때로 추정된다. 당시 성탕은 태조, 태강은 태종, 태무는 중종, 반경은 세조, 무정은 고종, 조갑은 세종, 늠신은 갑종, 경정은 강조, 무을은 무조로 추존되었다.

시법이 모든 시호의 뜻을 명확하게 정해주진 않았지만 상나라 이래 3000년간 유구히 쌓인 관습이 있기에 극찬을 나타기 위해 붙이는 시호, 비난의 의미를 띠는 시호 등 사실상의 작명법이 존재한다.

2. 선시(善諡)

사실 후대로 갈수록 아예 폐제나 군 취급으로 떨어진다면 모를까, 비록 실정을 저지른 임금일지라도 시호 묘호는 체면을 고려하여 그럭저럭 좋은 것을 붙여준다.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당연한 일이지만 당장 안 좋은 묘호를 받은 군주의 자식이 차기 군주가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는 안 봐도 비디오. 재수 없으면 몇 대는 그냥 넘어가다가 안 좋은 묘호를 받은 군주의 후손이 복위에 성공하는 상황도 있다. 그 때문에 시호가 그 임금의 자질을 가늠한다고 보기에는 어렵게 되었다.

2.1. 극찬을 나타내는 경우

태조, 태종, 세조, 세종, 고조, 고종에 쓰이는 태(太)와 세(世), 고(高)는 시법에는 특별히 의미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다만 으뜸이라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것이며 일반적인 묘호들보다 높은 의미가 있다.

조선 세종 이도 사후 묘호를 정하는 논란에서 '세종'은 창업의 군주나 중흥의 군주에게 바치는 것이니 호문의 군주임을 강조하여 '문종'이라 하자는 주장이 있었는데,[1] 이에 대해 4군 6진을 개척한 공이 있으니 '세종'이라 해도 좋을 것이라는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세종' 등 특별한 호칭은 창업 군주나 국가 중흥의 군주에게 바치는 칭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종(中宗)이라는 묘호도 있는데,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내고 사직을 보전한 실적이 있는 경우에 붙는다. 다만, 위기상황을 넘겼을 뿐이지 나라의 국력이 저하되었거나 영토를 크게 상실한 경우가 있으므로 태, 세, 고보다는 약간 낮은 대접을 받는다. 그래도 아래의 찬양을 나타내는 경우보다는 대접이 좋다. 예외로 당나라 중종은 실권도 없는 호구였지만, 그럼에도 무씨(무측천)로부터 당의 사직을 보전한 실적이 있다고 붙은 케이스.

성(聖)을 쓰는 성조(聖祖)라는 묘호가 있다. 이 묘호를 받은 인물로는 청나라의 성조 강희제가 있으며 강희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후에 추존된 인물이기 때문에 실제 재위한 군주들 중에 성조라는 묘호를 받은 인물은 강희제가 유일하다. '종' 자가 붙은 성종(聖宗)도 있는데, 역시 그 왕조에서 상당한 업적을 남긴 왕에게 붙으며, 때로는 왕조의 최전성기 시절의 군주에게 붙기도 한다. 요성종 같은 사례를 들 수 있고, 역시 베트남사를 제외하면 실제 재위한 군주 중에서 성종(聖宗)의 묘호를 받은 유일한 군주이다.[2]

어질 인(仁)자도 좋은 글자다. 유교에서 어짊을 으뜸 덕목으로 꼽으므로 인종도 좋은 묘호로 취급되었는데 한 예시로 성종 사후 성종의 묘호를 정할 때 원로급 대신들을 중심으로 성(成)과 대간, 판서급 대신들을 중심으로 인(仁)이 대립했는데 이 때 원로급 대신들은 중국에 이미 인종이 있어 같은 묘호를 쓰는건 곤란한 것 같다는 논리를 댔고 대간들은 성종 정도로는 대행왕의 업적을 다 표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을 지지했으며 판서급 대신들도 대간들의 주장에 동조하며 혹여나 대성(大成)이라고 한다면 또 모르겠습니다.라고 주장했다. 대(大)가 대제(大帝)대왕(大王)에 들어가는 글자임과 성(成)도 아래에 나오듯 찬양의 의미를 뜻하며 별달리 격이 떨어진 글자도 아님에도 성(成)조차 인(仁)에 비빌 수 없다고 한 것이다.[3]

2.2. 찬양을 나타내는 경우

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린 경우는 이라 한다. (經緯天地曰)
의로움을 펴고 굳건하게 행동한 경우는 이라 한다. (布義行剛曰)
위엄이 있고 굳세며 밝고 덕이 있는 것을 라고 한다. (威强叡德曰)
근본이 부드럽고 백성을 사랑한 경우를 라고 한다. (柔質慈民曰)
견문이 뛰어나고 두루 통한 경우를 라고 한다. (聖聞周達曰)
선하고 성스러우며 견문이 넓은 경우를 이라 한다. (聖善聞周曰)
의로움을 행하고 백성이 따른 경우를 이라 한다. (行義悅民曰)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정사를 확립한 것을 이라 한다. (安民立政曰)
기강을 세워 다스린 경우를 이라 한다. (布綱治紀曰)
군림하여 천하를 밝게 비춘 것을 이라 한다. (照臨四方曰)
국토를 개척하고 먼 곳을 복속시킨 것을 이라 한다. (辟土服遠曰)
총명하고 예지가 있는 경우를 이라 한다. (聰明叡智曰)
온유하고 풍류를 좋아한 경우를 이라 한다. (溫柔好樂曰)
덕을 펴고 의로움을 지킨 경우를 이라 한다. (布德執義曰)
행동이 안팎으로 돋보인 경우를 이라 한다. (行見中外曰)
선대의 위업을 능히 이어받은 경우를 이라 한다. (能紹前業曰)
백성을 편안하고 부드럽게 대한 경우를 이라 한다. (綏柔士民曰)
도덕을 한결같이 숭상한 경우를 라 한다. (道德純一曰)
굳센 덕으로 결단하고 극복함을 이라 한다. (剛德克就曰)
적을 이겨 난을 평정함을 이라 한다. (勝敵克亂曰)
'무(武)'를 받은 대표적인 인물은 주무왕, 한무제, 조조, 손견 등이 유명하고, 한국사에는 김춘추가 있다. 한무제는 그야말로 ' 진황한무'라고 칭송을 받았고, 양무제 역시 남조 양나라의 대표적 명군이다. 반면 명나라의 정덕제의 경우엔 암군에 가까우나 그나마 무치라도 좀 남겨서 무종으로 그친 경우.[4] 실은 정덕제 이외에도 정복사업의 뒷처리를 끝내지 못하고 일찍 사망한 주무왕이나 폭군스러운 면모도 적지 않은 한무제, 간웅으로 유명한 조조 등을 보면 군사적 업적은 부정할 수 없더라도 내치나 그 이외의 부분에서 하자가 있는 군주도 많아, 후대에 가서는 문치가 강화되면서 그 가치가 떨어져 무武는 그다지 좋은 시호가 아니게 되었다. 그래도 군사적 업적은 필수로 있어야 하고 군주가 아닌 신하에게 붙는 경우는 충무공 이순신 같은 사례도 있으므로 완전히 격이 떨어진 시호는 아니었다.

'환(桓)'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은 제나라의 환공. 손책의 시호인 장사환왕도 여기에서 왔다.

'성(成)'을 받은 군주로는 명나라의 성조 영락제, 고려 전기의 치세를 남긴 성종 왕치, 조선 전기의 마지막 성군 성종이 있다.

'문(文)'은 최고로 좋은 시호이기는 한데, 후대로 갈수록 다소 형식적이고 무난하게 여겨지는 시호가 되었다. 그래도 문(文)이 가치하락은 겪지 않은것이 세종대왕의 묘호를 정할 때 신하들이 제안한 시호가 문종(文宗)이었기 때문. 그러나 문종 4군 6진의 개척 등을 예로 들어 세종이라 정했다.

뛰어난 정치로 비교적 약소국이었던 중국 주나라 상나라를 압도할 국력을 키웠으며 그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무왕(周武王)의 아버지의 시호가 주문왕(周文王)이다. 춘추오패(春秋五覇) 중의 한 사람인 진문공(晉文公)도 있다. 후대에 의미가 조금 변질된 예로는 조조의 아들인 중국 삼국시대 위(魏) 세조(世祖) 조비의 시호가 문제(文帝)이다. 고려에서는 최전성기에 문종 왕휘가 37년간 통치했으며, 조선에서는 문종 이향이 대표적이다.

2.3. 좋았다가 격이 떨어진 경우

대표적으로 헌(獻)과 혜(惠), 목(穆) 등이 있다. 사실 헌(獻), 혜(惠)는 시법상으로는 좋은 뜻이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좋은 시호로 취급되지 않는다.

'헌(獻)'은 글자 자체 뜻이 '바치다'인데, 이 때문에 양위하거나 선양한 군주에게 이 시호를 붙이는 경우가 생겨나 군주의 시호로는 격이 떨어진다고 여기게 되었다. 실제 이 시호를 받은 후한 헌제 고려 헌종의 인생을 봤을 때도 꼭 좋은 의미로 올렸다고 보기는 힘든 편으로 둘 다 실제 권력자에게 선양했다. 차이점이라면 헌제는 새 왕조인 조위에게 선양했고 헌종은 숙부 계림공(후에 숙종)에게 선양했다.[5]

' 혜(惠)'는 좋은 시호에 포함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안 좋은 시호다. 혜라는 시호가 붙은 왕들을 보면 좀 미묘한(…) 업적을 이룬 경우가 많다.

춘추전국시대까지만 해도 헌과 혜는 확실히 좋은 시호였다.[6] 그 예로 진나라(秦)의 24대 국군이었던 진헌공은 순장을 폐지하는 한편 위나라를 본격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한 군주였으며, 26대 군주 혜문왕 때 이르러서는 진나라가 확실하게 육국 모두를 압박하기에 이를 정도였다. 조나라의 조혜문왕도 진혜문왕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나라 전성기의 군주로서 진나라의 동진을 저지하던 임금이었다. 특히 인상여, 염파 같은 걸물들이 활약하던 시대가 바로 조혜문왕 시기,

하지만 이후로는 혜(惠)는 점점 폄하되어 가기 시작해서, 대체로 아무런 힘도 없다고 평할 수 있는 왕들에게 주어지는(…) 경향이 생겨났다. 여후에게 휘둘리다 요절한 전한 혜제를 시작으로, 서진 혜제, 백제 혜왕, 신라 혜공왕, 고려 혜종, 충혜왕[7] 등이 있다. '그냥 적당히 이거나 먹어라' 수준까지 전락한 셈.

'목(穆)' 또한 진목공, 명목종등 명군에게 붙여지기도 했지만 고려 목종 등과 같이 하자가 있는 군주에게 주어진 사례가 더 많다.

'단(端)'은 예를 지키고 의를 잡았다는 좋은 뜻을 가지고 있지만, 한자 뜻이 '끝'이다 보니 요절한 군주 전용 묘호 취급을 받았다. 송단종 조선 단종은 모두 스물을 넘기지 못한 왕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후대로 갈수록 악시가 거의 쓰이지 않으면서, 대신에 엉망진창인 임금들에게 이런 찬양의 시호를 붙이는 일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업적을 찬양하는 형식의 시호는 붙일 수가 없지만, 이니 애민이니 하는 감성적/도덕적 가치를 찬양하는 시호는 어차피 그런 기준이 있을 수가 없으므로 맘 편하게 붙일 수 있었다. 또 유교 사상에서는 임금으로서 덕이나 애민사상 등이 없는 군주는 역성혁명으로 쫓겨나야 하므로, 달리 말하면 군주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그 자체로 어느 정도는 덕성이 증명된다고 본 것도 있다. 때문에 왕이라면 누구든지 붙일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으므로 예의상 붙여주는 시호가 돼버린 것. 찬양의 시호가 가치하락을 겪게 된다.[8]

3. 동정을 나타내는 경우

  • 공손하고 어질었지만 재위 기간이 짧은 경우를 라고 한다(恭仁短折曰).
  • 나라의 우환을 만난 경우를 이라 한다(在國遭憂曰).
  • 자애롭고 어질었지만 재위 기간이 짧은 경우를 라고 한다(慈仁短折曰).
  • 옛 과실을 반성하고 고친 경우를 이라 한다. (追補前過曰)

붙이는 목적이 동정이었으므로 해당 황제는 대부분 무늬만 황제라 권력을 가지지 못한 경우가 많으며, 어릴 때 죽거나 반군이나 외부의 적에게 피살당하는 등 비참한 최후를 마친 경우가 많다. 가끔 여기에 상(傷)이 추가되기도 한다.

'애'와 '민'은 어린 나이에 죽은 황제에게 붙이는 경우가 많다. 각 나라 말기에 자주 발견되는 애제 민제는 이런 사례. 후한 헌제 조비에게 양위할 당시 유비 헌제가 사망했다고 선전하며 효민황제라는 시호를 올린 바 있다. 한국사에선 신라 애장왕이나 민애왕, 경애왕이 있는데 셋 다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케이스. 고려 강조에게 폐위된 목종도 원래 민종이 었으며 공민왕 역시 내우외환의 왕이었으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도 민황제의 시호를 받았다(물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이 시호를 공인하지 않기 때문에 사시이다). 왕은 아니지만 종묘에 배향된 대한제국 최후의 황태자 영친왕의 사시 '의민'의 민도 愍이다.

그리고 회(懷)의 경우에도 반드시 재위기간이 짧을 경우에만 주는 건 아니다. 장의에게 속아 진나라로 간 뒤 생포되어 감금되었다가 죽은 후 시체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초회왕의 재위기간은 서적마다 차이는 있지만 보통 30년 정도로 보고 있다.

밀(密)의 경우는 군주의 사례는 아니지만 강희제의 2남인 폐태자 이밀친왕 윤잉이 받았고 또 청나라 말기 탐관인 경친왕 혁광에게 수여되었다. 과오가 있지만 순박했다고 해선 약간의 동정이 들어갔으므로 동정과 악시의 중간 취급 해서 여기에 기재한다.

4. 악시(惡諡)

후대로 갈수록 딱히 출중하지 못한 군주들에게도 선시를 붙여주는 관행이 생겼음을 감안한다면, 그 관행을 깨고 악시가 붙었다는 것은 무지막지한 폭군, 암군이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예외가 있는 것이,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후대의 왕이 전대 왕을 폄하하기 위한 프로파간다로 악시를 붙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악시의 경우에도 시호가 그 임금의 자질을 완벽하게 가늠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담으로 정말 드물게 스스로 악시를 받기를 희망한 왕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초공왕으로 죽기 전에 나는 미덕도 없고 전투에서 패해 나라를 수치스럽게 만들었으니[9] 일부러 악시를 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근데 생전에 그렇게 악독한 짓을 한 사람은 아닌지 대부들이 그래도 왕의 유언을 따르자고 왕이 명한대로 영이나 려 같은 시호를 주자고 했을 때 자낭이라는 자가 이 있는 분이니 이를 감안하여 을 주자고 하여 초공왕이 되었다.[10]

4.1. 영(靈)

어지럽히고 어지러움을 덜어내지 못한 것을 이라 한다. (亂而不損曰)
'영(靈)'은 어리석은 임금의 시호다. 춘추시기 진(晋)나라 영공(靈公), 후한(後漢)의 영제(靈帝)는 임금답지 못했기 때문에 '영(靈)'을 시호로 삼았다. 춘추전국시대에는 비참하게 죽은 임금에게 올리는 시호였다. 대표적으로 조무령왕. 그는 기병대를 창설해 조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었지만(武), 후계자 문제에 휘말려 궁에 연금된 후 비참하게 굶어죽어 영(靈)이란 시호를 동시에 받았다. 원래 영(靈)은 곱게 죽지 못한 임금의 영혼을 달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이런 임금들은 대부분 자신의 실정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 시해된 경우가 많다.

조금 예외가 있다면 초나라의 영왕(靈王)이다. 초영왕 자오의 반란 때문에 군위에서 쫓겨나 자결했고, 마찬가지로 자오를 쫓아내고 즉위한 초평왕이 자신의 군위계승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일부러 정통성을 낮추려고 영왕으로 시호를 내렸기 때문에 좀 억울한 경우다. 영왕이 장화궁을 짓고 사치향락을 누리긴 했고,[11] 결정적으로 형 강왕이 죽은 후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사람이라 악시가 붙은 것 아닌가 하겠지만, 그것은 선대의 성왕이나 목왕 또한 그랬고[12] 초나라의 성왕(成王), 목왕(穆王), 장왕(壯王)을 제외한다면 춘추시대에 영왕만큼 업적을 남긴 왕도 사실 드물다. 위에 적힌 대로, 원래 영이란 시호는 곱게 죽지 못한 임금에게 내리는 시호여서 이렇게 내린 것도 있다.

그래도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려나 양에 비하면 좀 나은 시호라 그런지 제안대군의 시호에 들어간 글자이기도 하다.[13]

4.2. 양(煬)

여자를 좋아하고 예를 멀리한 경우를 이라 한다(好內遠禮曰)
대놓고 막돼먹은 짓을 일삼은 망나니 군주에게 붙는 시호. 여기까지 왔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완곡한 표현도 포기하고 대놓고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우리 군주'라고 까는 거다. 煬의 뜻은 '녹이다', 또는 '불태우다'인데, 이거는 나라를 녹이고 태워버렸다는 의미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수양제[14]. 해릉양왕도 유명하다. 또 남진의 진숙보도 장성양공(長城煬公)이란 시호를 받았는데 그 시호를 준 자가 수양제다.

예외가 있다면 북주 무제의 동생으로 제왕(齊王)에 봉해진 우문헌(宇文憲). 형 밑에서 장수로 활약하여 북제와의 전쟁에서 앞장섰고 결국 화북을 통일하는 데 큰 공을 세우지만 무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선제 우문윤의 시기를 받아 우문신거(宇文神擧)·우문효백(宇文孝伯) 등 다른 명망있는 종실 공신들에 앞서 먼저 주살되며 억울하게도 제(齊)양왕이라는 악시를 받아버렸다.[15]

4.3. 려(厲)

죄 없는 사람들을 살육한 경우를 라고 한다. (殺戮無辜曰)
'려(厲)'를 받은 대표적인 인물로는 주나라의 려왕이 있다. 참고로 이쪽은 여왕(女王)과 구별하기 위해 두음법칙을 무시하고 '려왕'이라 표기하는 사례 역시 많다.

려왕은 중국 주(周)의 제10대 왕으로 국인폭동(國人暴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주(周)의 쇠락(衰落)을 가져왔다. 이후 제후들이 힘을 합쳐 나라를 다스리다가 려왕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니 그가 선왕이다. 어쨌든 이것이 지금의 공화정의 어원이 되는 공화(共和)이다. 이 공화 방식이 기록마다 다른데 사기에서는 제후들이 함께(共) 화합해서(和) 나랏일을 했다고 하고 죽서기년에서는 공(共)나라 백작 '화(和)'가 나랏일을 봤다고 한다. 죽서기년의 기록을 염두에 두고 보면 공나라 백작 화가 잠시 찬탈을 했다고도 해석할 수도 있다. 단, 사료로서 신뢰도에 대하여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

이외에도 춘추시대 진나라(晉)의 여공, 조위 조방, 전진의 부생이 있으며 좀 억울한 경우는 우금이 있다. 자세한 것은 우금 항목을 참조.

4.4. 추(醜)

품행이 방탕한 인물에게 내리는 시호로 알려져 있으며 조위의 오질이 처음에 이 시호를 받았다가 아들 오응의 반발로 위(威)로 변경되었고 서진 진수(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아니며 진랑의 아들)는 하증에 대해서 이 시호를 받아야 한다고 혹평하기도 했으며, 이 시호를 받은 사람으로는 왕개, 당나라 때의 백민중이 있다. 남송 진회는 충헌이라는 시호를 받았다가 1206년 4월에 악비가 복권되면서 한때 유추(謬醜)라는 시호로 바뀌었다가, 이 시호로 바꾸자고 주장한 한탁주 개희북벌 실패의 여파로 실각, 살해된 후인 1208년 3월에 사미원의 주청으로 원래 시호로 되돌아왔다.

4.5. 유(幽)

일찍 죽어 왕위에서 떨어짐을 라고 한다(蚤孤隕位曰)
막혀서 통하지 않는 것을 라고 한다(壅遏不通曰)
움직임과 가만히 있음이 어지러워 떳떳하지 못함을 라고 한다(動靜亂常曰)
이 설명만 보면 애도나 평범하게 나쁜 시호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나쁜 시호 취급을 받는다. 서주를 말아먹은 유왕의 시호며, 정영공도 시해되었을 당시에는 이 시호를 받았으며 영공 시해범을 처벌한 후에 그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겠다고 바꾼 시호가 또 다른 악시인 영이다. 즉 영보다도 더 나쁜 시호가 이 유인 것.[16]

5. 기타

5.1. 유교적 시법을 따르지 않은 경우

신라 법흥왕, 백제 법왕의 법(法)은 불교 용어에서 따온 것으로 두 왕 모두 불교를 중흥한 왕이다. 마찬지로 신라의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진덕여왕의 진(眞)은 불교의 진리를 뜻한다. 이것은 사실 유교적 시법이 아니기 때문에 위의 시법은 적용되지 않는다.

손권의 시호는 대제(大帝)인데, 당시의 시법에 주요한 참고가 되는 《일주서》 시법해에는 대(大)가 없다. 그것 때문에 삼국지집해에서 신나게 까였다. 원래 대제란 말이 특정한 황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황제를 지칭하는 보통명사이기도 하고. 다만 청 건륭제 때 정리한 시법에는 하늘을 본받고 요를 법으로 삼는 것을 라 한다(則天法堯曰大)는 기록이 있기는 하다.

고구려는 특이하게, 중후반기에 중국식 시법을 도입한 백제 신라와는 달리 고유의 시법을 사용했는데, 왕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고, 왕의 시신을 매장한 장지(葬地)를 시호로 정하는 독특한 시법을 적용하기도 했다. 고구려의 19대임금인 광개토대왕의 정식시호는 國罡(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인데, 여기서 國罡上(국강상)은 현재 역사학계의 정론으로는 매장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된다.[17] 시호라고 정리를 하기는 하지만 능호(陵號)와 시호가 결합된 걸로 봐도 무방해 보인다. 다만 이렇게 능호를 시호처럼 쓰거나 제왕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쓰는 풍습은 고구려만의 풍습은 아니었다. 조선의 세종대왕의 경우 묻힌 곳인 영릉의 이름을 따서 그를 영릉이라고 표현하거나 그 재위기를 '영묘조(英廟朝)'라고 일컫는 식.

베트남 전 레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레롱딘은 와조제(臥朝帝)라는 어처구니 없는 시호를 받았는데, 치질을 앓아 매일 누워서 정사를 돌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포악하고 잔인한 폭군으로 취급돼 시호가 붙어 있는 것만으로 다행. 다만 오늘날 그가 치질을 앓았고 폭정을 행했다는 기록은 신빙성을 의심 받고 있다. 레롱딘 문서 참고.

5.2. 가칭: 소(少)·말(末)·폐(廢)·출(出)

일반적인 시법에서 정한 시호 묘호 외에 가칭의 시호나 묘호가 있다. 당연하게도 이런 시호를 받으면 실질적으로는 황제 대접을 받지 못하고 태묘에 배향되는 등의 대접도 받지 못한다.
  • 소제(少帝): 어린 나이에 즉위해 뭐 해보지도 못하고 금방 죽은 경우[18]
  • 말제(末帝): 해당 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경우. 다음 왕조나 정권에게 시호를 부여받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아이신기오로 푸이도 공종 묘호와 민황제 시호는 사시라는 이유로 인정되지 않아서 중국 정부는 손제와 말제 칭호만 인정하고 있다.
  • 폐제(廢帝): 재위 중에 쿠데타 등이 일어나서 강제로 폐위된 경우
  • 출제(出帝): 나라를 버리고 도망간 황제를 칭하는 멸칭이다. 이 경우에는 북위의 마지막 황제 효무제가 있다. 정식시호는 효무제이나 북제에서 편찬한 역사서 위서에는 그가 북위의 실권자이자 북제의 시조인 고환의 간섭을 받기 싫어 도망쳤다는 이유로 출황제(出皇帝)라고 칭한다.

5.3. 시호가 없는 경우

아예 시호나 묘호가 붙지 않는 경우도 있다. 폐위를 넘어서 군주 자리에 있었다는 것 자체를 부인한다는 뜻이다. 영왕이나 해릉양왕, 상음공, 정안공처럼 왕(王)·공(公)·군(君) 등 제후의 시호가 붙은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앞서 설명한 가칭의 시호나 묘호는 재위 기록이 아쉬울 뿐 군주였음은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의외로 역사상에 사례가 많다. 이를테면 황태자가 빨리 국왕이 되고 싶은 마음에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해 죽었다면, 그냥 황태자가 난을 일으켰다 식으로만 기록하고 끝난다. 설령 쿠데타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수도를 점거하고 즉위식을 올렸거나, 1년 이상 장기전을 벌이면서 버티는 경우에도 결국 망했다면 같은 대접을 받는다. 반란을 일으키는 순간 차기 군주가 아닌 반역자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15년간 황제였으나 현대에서도 흑역사 취급하는 왕망이나, 명청교체기의 틈에서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진 이자성 등이 있다.

고려에서는 충정왕, 우왕, 창왕에게 시호가 없었다. 충정왕은 원에서 내린 시호는 있으나 고려가 올린 시호는 없다. 공양왕은 고려가 망하고 교살된 직후에는 바로 시호가 올라가지 않아 유배지의 이름을 따서 간성왕이라는 별칭으로만 불렸으나 시간이 좀 흐르고 조선이 안정되자 태종이 공양왕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조선에서 우왕과 창왕은 고려의 임금임을 부정당하는 정도를 넘어 '왕씨' 가문의 일원임조차 부정당하고 신돈의 아들과 손자 취급을 당했다.[19]

조선에서는 노산군[20]· 연산군· 광해군의 사례가 있다. 특이한 경우로 공정왕이 있는데, (당대에) 묘호가 붙지는 않았으나 재위 기록이 공정왕실록이고 능호도 후이며[21] 종묘에도 버젓이 올라가는 등 엄연히 왕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이런 유형도 보이지 않게 급이 있다. 단순히 황위에 오르기 전 제후왕 시절의 칭호를 부르는 경우( 위소왕)는 양반이고, 이보다 낮은 작위를 내리는 경우( 혼덕공, 중혼후)는 군주 취급도 안 해주는 것이고 아예 황족이라는 신분을 박탈하고 폐서인해버리는 경우( 해릉서인)도 있다.

위와는 다른 이유로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의 시황제는 시호를 올리는 관행을 폐지했는데, 그에게 있어 (죽은) 황제에게 시호를 올리는 건 (그 다음 황제가 된)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논하고, 신하가 (죽은) 황제에 대해 논하여 적당한 글자를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호를 올리는 관행을 아랫것이 윗사람을 멋대로 평가하는 매우 건방진 행동으로 보았다. 이 때문에 시황제, 이세황제는 시호를 짓지 말라는 것을 인정하여 지금도 이렇게 불린다.

6. 시호에 사용되는 문자의 목록

한국어 위키백과
중국어 위키백과
반남 박씨 홈페이지 - 시호에 사용되는 한자
세계백과

위키백과 풀이가 가장 자세하다. 위키백과에 없는 한자는 반남 박씨 홈페이지에 올라온 자료를 훑어 찾을 수 있고, 반남 박씨 홈페이지 자료 중 한자가 누락된 것은 세계백과 諡號항목 10-16페이지를 검색하거나 구글링하여 찾아낼 수 있다.

未家短折, 短折不成, 有知而夭의 '상'은 傷 #
愛民任刑의 '극'은 剋 #
殺戮無辜, 暴虐無親의 '려'는 厲 #
華言無實의 '과'는 誇 #
喪國心懈의 '난'은 赧 #

반남 박씨 홈페이지에 올라온 자료 중 내용 가운데 '*'로 표시된 부분은 증보문헌비고 직관고에 '동국견행시법(東國見行諡法)'이라고 해서 증보문헌비고 편찬 시점인 1908년(융희 2년) 당시에 시행하고 있던 시호법 내용 #으로 추정된다.

[1] 이 묘호는 세종의 바로 다음 임금이 받았다. 단종은 아버지가 문치에서 큰 공을 세운 점을 높이 평가해 아버지에게 문종이라는 묘호를 올렸다. 그렇다고 해서 문종이 문치주의자이기만 했던 건 아니고, 군사적 업적도 많이 세운 사람이었다. [2] 고려와의 3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맨날 져서 그렇지 사실 요나라의 전성기는 요성종 때이다. 전연의 맹이 요성종 때 맺어진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3] 참고로 결국 성종은 연산군의 주장대로 성종이 되었고 이후 성종의 손자인 인종과 5대손인 인조가 각각 차지한다. [4] 그러나 정덕제는 실제로는 암군이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 적어도 후대의 막장 군주인 가정제, 만력제와는 달리 부캐놀이를 하거나 미소년을 양자로 삼고 가출하는 괴짜 행각도 보이고 엽색 행각과 간신을 총애하는 나쁜 면도 보였지만 그래도 심하게 굴지는 않았고 반대로 주위의 신하들의 많은 조언을 '좀 놀지 말라'는 것 빼고는 다 들어주는 편이었고 자기에게 쓴소리 하거나 반대한다고 쫓아내거나 죽이지는 않았고 일도 꼬박꼬박 했다. 간신을 총애하긴 했지만 선을 넘은 유근을 능지형에 처해서 본보기를 보여주기도 했고 무종이라는 묘호가 붙을 만큼 무(武)에서의 관심도 많았다. 또한 특이하게도 유목민족에 대한 관심도 많아서 유목민의 옷을 입고 유목민의 텐트를 치고 살거나 유목민이 많이 믿던 티베트 불교에 관심을 보이고 몽골어나 산스크리트어에 능했으며 포르투갈, 서역과의 교류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를 좋게 말하면 국제적인 감각이 있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적어도 정덕제는 잘못도 하고 잘 한 것도 있어서 후대의 가정제, 만력제 시절의 명나라보다는 상황이 좋았다. 이런 점을 보면 암군이라기엔 억울하고 명군이라기엔 애매한 평범한 군주. [5] 반면 조선 헌종은 법 헌자를 써서 무난한 편으로 격이 떨어지는 이름은 아니다. [6] 물론 예외가 없는 건 아니다. [7] 충혜왕은 원나라에 의해서 폐위된 폭군이었지 힘이 없는 군주는 아니었다. 상국인 원나라의 공주까지 강간한 충혜왕의 행적을 보면 어째서 양(煬)이 아니라 혜가 붙은 건지 신기할 뿐. [8] 애초에 왕호, 제호, 시호, 묘호 자체부터가 인플레이션을 겪는데 춘추전국시대까지만 해도 왕은 주나라 왕 뿐이고 이 때문에 초나라, 월나라, 오나라는 자체적으론 칭왕했어도 한동안 타국에는 자작으로 칭해야 했지만 전국시대에 들어 너도나도 칭왕하면서 왕이라는 가치가 하락하자 진나라 소양왕은 제나라 민왕에게 흔해빠진 왕 말고 제를 만들어서 서제, 동제 쓰자고 제의하기도 했고 결국 진소양왕의 후손인 진시황이 왕보다 높은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며 그 황제라는 칭호도 위진남북조 시대에 힘있다 싶으면 너도나도 쓰는 지경에 이른다. 또 시호와 묘호도 본래는 시호가 단순했다. 한글자 아니면 두글자로 수나라때만 해도 수문제도 그냥 고조 문황제일 뿐이었으나 당 초기에 6글자로 늘어나고 당 말기에는 12글자로 늘어나며 남송때는 16글자로 늘어난다(물론 침투왕조 시기에는 묘호가 짧아지거나 없어지기도 했다.) 묘호 역시도 원래는 왕들 중에서 킹왕짱 왕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기에 하은주 삼대의 경우 은나라에서 30명 중에 9명이 있으며 그나마도 주나라 이전에는 시호도 제대로 없었다. 그러나 당나라 때부터 아무나 묘호가 붙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중국 외에서도 이를 따라한다. [9] 언릉 전투에서 대패하였고 이 때 본인은 애꾸가 되었다. 초장왕으로 인해 패권을 누리던 초나라의 성장세가 꺾인건 덤. [10] 그리고 다른 의미로 자기 시법을 자기가 정한 왕이 있는데 바로 조선 예종으로 예종이 죽고 난 뒤 대비가 자신의 시호를 예로 하라 했다고 말해서 예종이 되었다. 물론 예종은 악시는 아니니 악시를 받은건 아니지만. 하여튼 이런 이유로 만일 사실이라면 예종은 유일하게 자기가 원한 시호를 받은 왕이다. [11] 영왕은 허리가 가는 여자를 좋아해서 궁녀들이 허리를 가늘게 하려고 무리한 다이어트를 하다가 많이 죽었다 카더라. [12] 성왕은 자기 형을 죽이고 왕이 되었고 자신의 조카들이었던 정나라(鄭) 목공의 두 딸을 취했다. 목왕도 자기 아버지인 성왕을 자살로 내몰고 왕이 되었다. 사실 성왕도 처음에는 목왕이 아버지의 시호를 영왕으로 내리려 했으나, 시신이 눈을 감지 않자 시호를 성왕으로 내렸고 , 그제서야 시신의 눈이 감겼다고 한다. [13] 제안대군의 시호는 영효인데 앞서 말했듯 어리석다는 의미로 영을 효자라는 의미로 효를 주었다. 제안대군이 당대나 후대나 멍청한 사람으로 기억될 생적을 많이 남겼지만 적어도 악행은 안 한 편이라는 점을 보면 너무 멍청하니까 영을 줄 수 밖에 없었거나 아니면 영이 나쁜 시호기는 해도 려나 양만큼은 아니라서 주는데 별 거리낌이 없었다고 보면 될 듯하다. 애초에 시호라는게 그래도 망자를 기리기 위해 붙이는 것이라서 나름대로 좋은 것을 주려고 한다. [14] 당나라에서 준 시호. 수나라에서의 시호는 명제(明帝)였다. 허나 워낙 수양제의 병크가 커서 그런지 수명제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15] 혼자서 아버지의 사업을 다 말아먹은 우문윤에 비하면 마찬가지로 종실 명장 고장공을 견제하여 사사시켰으면서도 난릉(蘭陵)무(武)왕이라는 시호로 대우해 준 북제 후주가 그나마 낫다 하겠다. [16] 영은 그냥 어리석다라는 뜻일 뿐이기에 그나마 나은 거다. 려나 양만 돼도 저건 악행을 저질렀다는 수준이므로 격이 다르다. 그럼에도 려나 양은 나름대로 많이 보이는 시호인데 유는 정말 드물다. 군주들을 뒤져서 이게 붙은 군주는 주 유왕, 모용위 정도밖에 없다. [17] 추가로, 廣開土境(광개토경)은 왕의 업적인 영토를 확장을 표기한 것이고, 平安(평안)은 때때로 누락되어서 표기되기도 하기에 업적내지는 존칭으로 생각되지만 중국사서에서 왕의 이름을 安이라고 표기되어있는 것도 있기에 이름일 수도 있다. 好太王은 太王과 유의어로 생각되기에 고구려왕을 지칭하는 칭호로 보인다. 어쩌면 좋을 호(好)가 붙은 것으로 보아 태왕보다 더 높인 칭호일 수도 있다. 기타 ‘미/동천왕’ ‘고국원/양왕’ 등이 있다. [18] 다만 예외적으로 후진의 소제 석중귀는 59세에 사망하여 당대로서는 꽤 오래 살긴 했는데, 재위기간은 4년밖에 되지 않고, 요에 포로로 잡혀간 후에 거기서 28년을 더 살았던 거라 이런 시호가 붙었다. [19] 여기서 나온 게 '가짜' 왕씨인 우왕과 창왕을 폐하고 진짜 왕씨인 공양왕을 세운다는 폐가입진(廢假立眞)이었다. 우왕과 창왕은 신돈의 핏줄로 몰려서 죽었기 때문에 조선 초에 편찬된 고려사에서도 신우, 신창으로 기재돼 반역 열전에 수록되었다. [20] 사후 단종으로 추숭 [21] 능묘가 수도에서 10리~100리 사이에 있어야 한다는 규칙에서 벗어난 개성 땅에 있지만, 이 사람은 형제들끼리 죽고 죽이던 한양을 싫어해서 개성으로 환도한 사람이기에 어떤 의미로는 수도 근교가 맞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