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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드 왕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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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c35><colcolor=#fff> 사우드 왕조
آل سعود |
||
왕실 깃발 | ||
가문 깃발 | 문장 | |
창립일 | 1720년 | |
창립자 | 사우드 빈 무함마드 알 무크린 | |
現 수장 |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 |
국가 |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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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조.2. 작위
- 디리야 토후국의 아미르 및 이맘 (1744~1818)
- 네지드 토후국의 아미르 및 이맘 (1824~1891)
- 리야드 토후국의 아미르 (1902~1913)
- 네지드 하사 토후국의 아미르 (1913~1921)
- 네지드 술탄국의 술탄 (1921~1926)
- 헤자즈 네지드 왕국의 국왕 (1926~1932)
-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국왕[1] (1932~현재)
3. 역사
1744년에 종교학자 압둘 와하브와 토후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가 동맹전선을 결성하고 디리야[2]에 국가를 건설한 것이 왕조로서의 사우드 가문의 시작이다. 오스만 제국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고 실제로 약 40년 동안 사우드의 영토는 디리야 근처의 아주 조그만 땅에 불과했지만 사우드는 그동안 칼을 갈면서 병사들을 양성했고 1780년대부터는 빠른 속도로 아라비아반도를 정복하여 1805년에는 이슬람의 최대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까지 정복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 속주의 군대를 보내 1811년 와하브파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1818년 사우드 군은 패배하여 저항 역량이 뿌리채 뽑히면서 독립국가를 세우겠다는 꿈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그러나 사우드 가문은 독립국가를 세우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1824년 투르키 이븐 압둘라가 다시 독립국가를 선포하고 아라비아 재정복을 시도하였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오스만 제국은 맛이 가기 시작했고 이 틈을 타 웬만한 넓이의 영토를 거느릴 수 있었다지만 사우드 가문의 역사 깊은 라이벌 가문인 라시드 가문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1891년에 망했다. 아라비아의 판도는 오스만의 지원을 받은 라시드 가문의 자발 샴마르 토후국에 넘어갔다. 사우드 가문은 오스만령 이라크와 쿠웨이트로 도망가 후일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
1902년 사우드 가문의 압둘 아지즈가 자발 샴마르 토후국으로부터 리야드 지방을 탈환해 세 번째 독립국가를 건설했다. 압둘 아지즈는 1913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알 하사 지역과 카티프를 빼앗아 영역을 확대했고 한참 티격태격하던 자발 샴마르 토후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패전한[3] 틈을 타서 공격하여 1921년에 완전히 병합했다. 이후 자신감에 부푼 압둘 아지즈는 술탄을 자칭하며 국명을 리야드 토후국에서 네지드 술탄국으로 바꿨다.
4. 부정부패
왕실이 부패한 것은 모두가 아는 비밀이다. 왕실이 국가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나라답게 부정부패의 규모도 상상을 초월한다."사우디 행정 부패는 세입의 8,000억 달러(한화 약 1,113조 8,800억원)의 손실을 가져왔다."
"Saudi administrative corruption has resulted in $800 billion in lost revenue for the country."
리야드 상공회의소 변호사회 회장 마제드 가룹(Majed Garoub)이라는 사람이 2007년 2월 23일에 했던 발언인데
압둘라 국왕이 반부패운동을 진행하던 가운데 나온 말이니 반부패운동 전에는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Saudi administrative corruption has resulted in $800 billion in lost revenue for the country."
제5대 국왕 파흐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는 1985년에 왕자의 낭비벽이 심하다는 말이 많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당시 15살이었던) 어린 아주지가 돈을 너무 많이 쓴다고들 하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알라께서는 우리에게 부를 가져다 주셨고, 우리는 기꺼이 그 부를 우리 아들과 나눌 것이다. 나는 쓰고 싶은 데 쓸 수 있도록 그 아이의 개인통장에 방금 3억 달러[4]를 입금해 준 참이다."
알-야마마 거래라는 유명한 비리가 있는데 이는 현재도 유로파이터의 판매를 통해 지속되고 있다. 매일 600,000 배럴의 석유를 받는 거래에 그 대금의 최대 45%의 커미션(즉 뇌물)을 받는다고 예상되는 사업이다. 1배럴을 50 ~ 110달러[5]로 잡고 커미션을 20 ~ 45%로 잡으면 커미션은 매일 600만~2970만 달러가 되고 1달러를 1,100원으로 보면 66 ~ 327억 원이다. 매일 이 사업만 가지고 최대 327억, 매년 약 10조 원의 뇌물이 그냥 들어온다. 게다가 사우디정부가 재정긴축에 들어갔는데도 왕족들은 호화로운 사치를 벌이면서 국민들의 불만이 커졌다. # 이렇게 부정축재할 돈의 절반만이라도 국고로 온전히 환수시켜 국가예산에 제대로 반영해 썼더라면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제순위는 몇 계단 뛰어 올랐을지도 모른다.
사우디아라비아 외교관의 10대 아들이 절도죄를 저지르고도 면책특권으로 석방됐다. # 이건 사실 약과다.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더 많다. 사우디인들의 지지도가 높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협박을 받고 쉬쉬하는 분위기도 있다고 한다. 이건 동영상이 찍혀 외국에서도 비난이 쏟아졌기 때문에 사우디 왕이 조치를 취한다고 했으나 과연…
다만 저렇게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다가 정말 덮어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사건을 일으킨 경우에는 사형에 처하기도 한다. #
5. 국왕
자세한 내용은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문서 참고하십시오.6. 왕족
왕가와 먼 친척이라도[6] 왕자, 공주로 칭해지는지라 미국과 영국의 명문대에는 사우디 왕자, 공주가 널려 있다. 서구권만큼은 아니더라도 유망있는 대학에 진학시키기 때문에 한국에도 있는데 사우디라는 나라 자체가 고위층들의 유학을 장려하기 때문이다. 물론 불하된 재산이 많기 때문에 다 부자다.[7] 보통 중고등학교 때부터 유학을 시킨다.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도 미국에서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왔고 아랍어는 아예 과외교사를 따로 두고 외국어처럼 공부했다. 그러다 보니 말이 사우디인이지 심리/문화적으로는 오히려 미국인에 가깝다는 말이 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국가에서 불하받은 막대한 자산으로 분수 같은 건 잊은 채로 해외에서 자가용 비행기나 각종 별장까지 두고 도박과 명품 쇼핑을 비롯한 각종 주색잡기 등 온갖 호화와 사치 생활을 누리다 보니 국민들의 불만이 많으며 2010년대 후반에 규제가 완화되기 전까지는 자국민들에게는 근본주의적 질서를 강조하면서 왕족들은 전술한 특권을 누리니 내로남불이라는 말까지 나왔을 지경이었다.
공식적으로 Prince 칭호[8]를 가지고 있는 사람만 7,000명이 넘는다. 이들은 사우디 정부에서 생활비를 지원받고 해외여행이라도 하고 싶으면 비즈니스 클래스 항공권을 무료로 제공받는다.
곽백수가 그렸던 트라우마에 돈 많은 남자를 찾던 여자에게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 왕의 6번째 아내로 결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4명까지만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 이슬람이지만 실제 사우디 국왕들은 이탈리아의 유명 기자 오리아나 팔라치가 비아냥거렸듯이[9] 아내를 10명에서 많으면 20명 이상까지 둔다고 한다. 4명을 넘으면 이전의 아내와는 이혼하지만 여전히 같이 사는 식으로 꼼수를 써서 4명 넘게 둘 수 있다고 한다.
7. 관련 문서
[1]
성스러운 두 모스크의 관리인(خادم الحرمين الشريفين / The Custodian of two holy mosques)으로 칭하기도 한다.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살라딘이 최초로 사용한 칭호로, 성스러운 두 모스크는
메카에 위치한 알 하람 모스크와
메디나에 위치한
예언자의 모스크를 뜻한다.
[2]
아라비아 정중앙에 있는 마을이다.
[3]
자발 샴마르 토후국은 1차 대전에
동맹국으로 참전하였다.
[4]
2023년 환율로는 8억 4800만 달러로, 한화로 환산하면 대략 1조 원이 된다. 심지어 그 엄청난 거액은 왕자의 총 재산도 아니고
통장에 든 돈(그것도 15세 소년의)만 따진 것이다!
[5]
실제 두바이유는 2013년 11월~12월 사이 배럴당 100 ~ 110 달러에 거래되었으나 이 거래 이후 전 기간 동안 이 유가가 유지된 것도 아니니 이렇게 서술해 두었다. 다만 이는 2013년 기준이므로 지금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6]
아랍 유목민들은 혈연집단의 소속감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쨌건 사우디아라비아가 생기기 전부터 사우드 가문의 근성있는 호족집단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반대로 사우디아라비아가 생기고 왕이 생겨도 다 같은 가족으로 인정해 준다.
[7]
유튜브에서 'Rich Arab'이라고 검색하면 한 사우디 왕자가 술집 접대부랑 댄서에게 돈을 뿌리고 끼얹는 영상을 볼 수 있는데 옆과 뒤에 비서들이 들고 있는 지폐의 양이 어마어마하다. 저 왕자들의 가족과 가까운 친척들의 재산을 합하면
조 단위로 찍힌다. 심지어 해당 영상 속 왕자들은 왕위 계승 순위가 굉장히 낮은 말단 왕족들인데 돈이 이 정도다. 그러니 국왕과 고위 왕족들의 재산은 한화로 환산하면 수십조 정도일 것이다.
[8]
prince는 한국에선 단순히
왕자라는 뜻으로만 생각하지만 좀 더 넓게는
왕족 남자를 지칭하기도 한다.
[9]
팔라치는 당시
요르단 국왕
후세인 1세와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을 방문했는데 후세인 1세는 멋진 군주라고 평가한 반면 사우디 국왕과 왕실은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