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독일의 3월 혁명에 대해 다룹니다. 러시아의 혁명에 대한 내용은 러시아 혁명 문서 참고하십시오.
1. 개요
3월 19일 베를린[1]을 점령하고 환호하는 민중들.
Märzrevolution
1848년 혁명의 일부로 독일 연방에서 일어난 혁명.
2. 배경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수립된 빈 체제에서 프로이센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이 위치한 독일어권 지역은 가장 격렬히 구체제와 자유주의, 내셔널리즘을 신봉하는 부르주아지 간의 충돌이 빚어졌다. 일찌감치 명예혁명과 산업혁명이 19세기 이전부터 진행된 영국의 경우 이미 부르주아의 사회적 지위를 구체제 특권층들이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또 대혁명의 출발점이었던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 역시 겉으로야 왕권신수설을 표방했지만 아랫것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그에 비하여 독일 지역은 반동 세력의 힘이 상대적으로 강한 곳이었다.[2]하지만 이미 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이 한 번 퍼져나가기 시작하자 그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1830년대 무렵부터는 독일 연방 내 각 국가들만 자유주의자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에서 발발한 2월 혁명이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3. 봉기
프랑스에서 새 공화국이 수립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 베를린에서는 군중들의 몰려들어서 자유주의 체제의 수립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패닉에 빠진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프로이센은 독일에 통합되었다'면서 황급히 표현의 자유와 의회 수립을 보장하는 자유주의적 헌법을 실시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귀족들의 엄청난 반발에 직면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황급히 자신의 말을 뒤집고 군대를 동원해 소요를 진압하고자 했다.하지만 야전 경험은 풍부해도 소요를 진압한 경험은 적었던 프로이센군은 군중들을 진압하는 데 실패했고 도리어 피를 본 군중들의 분노만 더 키우는 역효과를 불러왔다. 3월 18일이 되면 베를린 곳곳에 시민들이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역으로 진압군을 격퇴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궁지에 몰린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3]는 결국 다시 시민들에게 굴복하여 시민들의 무장을 허용하는 한편(!) 자유주의적 개혁을 다시 실시할 것을 약속하였다. 심지어 3월 21일에는 시민군 사망자들의 장례식에 국왕 본인이 혁명을 상징하는 모자 프리기아를 착용하고 참석하기도 했다.[4]
한편 오스트리아 제국의 빈에서도 3월 13일 자유주의 정치체제를 요구하는 노동자와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빈 체제의 상징과도 같았던 오스트리아의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와 황제 페르디난트 1세는 진압을 명령했지만 상황은 걷잡을 수 없었고 결국 메테르니히는 황제에 의해 재상 자리에서 해임[5]되어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마찬가지로 페르디난트 1세 역시 자유주의적 개혁을 시위대에게 약속해야만 했다.
하지만 프로이센과 달리 오스트리아의 소요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같은 해 8월 황제의 밍기적거리는 태도에 분노한 빈의 노동자들이 다시 시위를 일으켰고 헝가리에서도 코슈트 러요시를 지도자로 삼은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이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헝가리의 경우 진압군이 독립군에 연전연패하는 바람에 결국 러시아에게 부탁하여 러시아군이 진압하게 되었다. 결국 페르디난트 1세는 12월 2일 황제직에서 퇴위했다.
그 외에도 바이에른 왕국, 작센 왕국, 바덴 대공국 및 군소 연방국, 헝가리와 폴란드 같이 독일인들의 지배를 받던 지역 등 독일어권 거의 모든 곳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군주들은 성난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황급히 자유주의적 개혁을 약속해야만 했다.
4. 반동 세력의 역습
하지만 융커를 비롯한 반동 세력들이 주도권을 되찾아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비롯한 보수파들은 다시 군대를 규합하여 1848년이 지나가기 전에 다시 베를린을 탈환하였고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역시 가면을 집어던지고 다시 구체제로의 복귀를 선언했다. 자유주의 헌법과 의회는 명목상으로는 존속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유명무실해졌다.[6]5. 통일 시도
한편 당시 독일 사회에서 점차 목소리를 얻어가던 내셔널리즘에 입각한 통일 독일을 세우려는 시도 역시 3월 혁명과 맞물려 이루어졌는데 1848년 5월 18일에 프랑크푸르트 의회가 수립되면서 이러한 시도에는 박차가 가해졌다. 전반적으로 중도 우익 계열의 자유주의자들[7]이 다수를 차지한 프랑크푸르트 의회를 달군 가장 뜨거운 화두는 바로 통일의 범위 문제였다. 오스트리아 제국이 주축이 될 것을 주장하는 대독일주의와 프로이센 왕국이 주축이 될 것을 주장하는 소독일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한 것.[8]초기에 전반적으로 힘을 얻은 것은 대독일주의였지만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와 발칸반도를 포기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의회 내에서는 꿩 대신 닭이라는 심정으로 소독일주의가 점차 지지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프로이센 왕국 왕실 역시 통일 독일의 군주직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면서[9]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말 그대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분위기에 쐐기를 박은 것은 오스트리아의 대표자로 의회에 파견된 로베르트 블룸(Robert Blum)이 반 정부 소요에 참가했다는 명목으로 처형당한 사건이다.[10]
이런 상황에서도 1848년 12월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굴하지 않고 입헌군주제를 골자로 한 헌법안을 통과시켰으나 이미 반동 세력이 재집권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에서는 말 그대로 씹혔고 그렇게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유명무실화되었다.
6. 혁명의 붕괴
여전히 남부 독일 지역에서는 혁명가들의 세력이 강성했고 그들은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열심히 지지했지만 이들의 세력은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와 비교해서 너무나도 미약했다. 게다가 의회의 다수 구성원을 차지하던 온건 중도 세력들은 급진 민주주의자[11] 및 사회주의자들의 등장에 공포에 질려서 구체제 특권층들과 결탁해 버렸다(...). 이탈리아와 헝가리의 독립 봉기가 진압되어 가면서 오스트리아는 다시 독일 내 문제에 전념할 수 있게 됐는데 결국 1849년 5월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해산되었고 독일 3월 혁명은 최종적으로 수포로 돌아갔다.7. 여담
- 3월 혁명의 실패에 실망한 많은 독일인들이 풍요와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떠났는데, 이들이 바로 오늘날 독일계 미국인들의 선조 중 상당수를 차지한다. 이들을 부르는 명칭은 48년 세대(Fourty-Eighters). 미국 이외에도 유럽과 세계 곳곳으로 독일 출신 망명객들이 퍼졌는데 개중에는 청년 시절의 카를 마르크스도 있었다.
- 미국에 정착한 이들 독일 출신 이민자들은 남북 전쟁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자신들의 고향과 재산권을 지킨다."는 자부심으로 사기가 높았던 남부측(=연합군) 병사들에 비해 북부측(=연방군) 병사들의 상당수는 " 노예의 해방과 인간의 자유라는 숭고한 목표를 위해 싸운다."는 자부심으로 그 못지 않게 높은 사기를 가졌던 것. 그리고 북부측에 자원 입대한 병사들의 비중을 보면 (고향에서 영국에게 압제당한 기억이 있는) 아일랜드인 다음으로 독일인의 비중이 높았다. 예를 들어 3월 혁명 당시 가장 유명한 연설가 중 하나로 손꼽히는 프리드리히 해커 같은 인물도 북군측 대령으로 참전했을 정도다.
- 비스마르크는 3월 혁명의 실패를 회상하면서 "우리 독일인들이 콩가루인 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저 때만큼 그게 극명히 드러났던 시절도 없었지."라고 냉소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 민족주의자가 아니었으며 구(舊) 체제적인 정치 질서를 유지하는 대신에 대중과 부르주아들의 불만을 달랠 겸 프로이센 왕국의 위상을 신장하고자 독일 통일을 추구한 것뿐이었다. 독일 통일에 집착하지 않았기에 프로이센의 위상을 축소하려 들 게 뻔한 오스트리아를 통일 독일에 추가하려 하지도 않았던 것.
-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이 사건을 매우 비판했고 폭동을 진압하는 군인들에게 망원경도 빌려주고 유언장에 폭동 진압하다가 희생된 프로이센 군인 유가족에게 자신의 유산을 나눠주라고 했다.
[1]
연기에 가려서 잘 안보이지만 그림 중앙 부분을 자세히 보면 베를린 왕궁(Berliner Stadtschlos)이 보인다.
[2]
물론 구체제가 가장 철옹성 같은 곳은
러시아 제국이었지만 이쪽은 애초에 아직도
농노제가 유지되던 곳이라서 부르주아라고 부를 만한 세력조차 없었다. 멘셰비키가 일단 부르주아를 만들어서 러시아를 선진화시킨 후 사회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 괜한 것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몇몇 사학자들은 19세기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의 공업화 정책 실시 이전까지의 러시아를 '유럽의 특급 후진국'이라고 비하할 정도(...). 1차대전기 러시아를 보면 소총도 수입하고 대포도 수입하고 철도랑 기관차도 수입하고 하는 걸 보면...
[3]
사실 인근의
포츠담으로 도망쳐서 전열을 정비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성격이 원체 우유부단한 데다 꼴에 '내가 이 나라의 국왕인데 어떻게 수도에서 도망치냐'고 탈출을 거부하기도 했다.
[4]
물론 반강제로 끌려간 것이었지만 어쨌든 덕분에 국왕은 귀족들에게 미친듯이 까였다.
[5]
다만 황제가 능동적으로 해임한 것은 아니고 오스트리아 제국의회(Diet)와 시위대가 강경하게 요구해서 마지못해 해임한 것이다.
[6]
헌법에는
왕권신수설을 박아 버려서 국왕과 총리가 의회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게 되었으며 의회의 경우 악명 높은 납세액에 따른 3등급 투표권(Dreiklassenwahlrecht) 제도를 도입해서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이 전체 의석 수의 불과 30%만을 선출할 수 있게 해 버렸다. 애초에 의회가 어떤 권한이 있던 것도 아니고...
[7]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입헌군주제의 지지자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들의 대부분이 대학교 교수였기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백면서생끼리 모아서 뭘 하겠냐는 식으로 빈정대면서 이 의회를 교수님들의 의회(Professorenparlament)라고 불렀다.
[8]
심지어 대독일주의 중에서도 독일어권 지역이 아닌 발칸반도나 헝가리 일대를 통일 독일에 포함시켜야 하느냐, 마느냐의 여부를 놓고도 서로 의견이 엇갈렸다.
[9]
왕권신수설을 신봉했던 이들 입장에서는 의회 '따위'가 신성한 왕위를 누구에게 줄 것인지 결정하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다.
[10]
명목상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면책특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11]
대충
공화주의자라고 뭉뚱그려볼 수도 있다. 이들이 급진적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당시 기준으로 급진적이라는 것이지 21세기의 정치 스펙트럼으로 보자면 우파 세력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