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602c, #009344 20%, #009344 80%, #00602c);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사보이아 왕조 |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 움베르토 1세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 움베르토 2세 | |
프랑크 ·
중프랑크 ·
신성 로마 나폴레옹 · 이탈리아 왕국 · 이탈리아 사보이아 백국 · 사보이아 공국 · 사르데냐 왕국 · 이탈리아 왕국 |
}}}}}}}}}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관련 틀 | ||||||||||||||||||||||||||||||||||||||||||||||||||||||
|
<colbgcolor=#009344><colcolor=#ffffff> 이탈리아 사보이아 왕조 초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Vittorio Emanuele II |
|||
|
|||
출생 | 1820년 3월 14일 | ||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토리노 카리냐노 궁전 | |||
사망 | 1878년 1월 9일 (향년 57세) | ||
이탈리아 왕국 로마 퀴리날레 궁전 | |||
재위기간 | 사르데냐-피에몬테 국왕 | ||
1849년 3월 23일 ~ 1861년 3월 17일 | |||
이탈리아 국왕 | |||
1861년 3월 17일 ~ 1878년 1월 9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9344><colcolor=#fff> 가문 | 사보이아 가문 | |
이름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마리아 알베르토 페르디난도 에우제니오 톰마소 디 사보이아카리냐노 (Vittorio Emanuele Maria Alberto Eugenio Ferdinando Tommaso di Savoia-Carignano) |
||
아버지 | 카를로 알베르토 | ||
어머니 | 토스카나의 마리아 테레사[1] | ||
형제자매 | 페르디난도, 마리아 크리스티나 | ||
배우자 | 오스트리아의 아델하이트 여대공 (1842년 결혼 / 1855년 사망) | ||
미라피오리 여백작 로사 베르첼라나 (1869년 결혼) | |||
자녀 | 마리아 클로틸데, 움베르토 1세, 아마데오 1세, 오도네, 마리아 피아, 카를로 알베르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 ||
종교 | 가톨릭 | ||
신체 | 158cm | }}}}}}}}} |
|
초상화 |
[clearfix]
1. 개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자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 이탈리아 건국 3걸인 주세페 마치니, 카밀로 카보우르, 주세페 가리발디에 비하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탈리아 통일에 큰 기여를 한 인물 중 하나로, 로마 판테온 묘지에 새겨진 국부(Padre della Patria)의 칭호가 이를 방증한다.[2]2. 생애
2.1. 왕세자 시절
1820년 3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수도 토리노의 카리냐노 궁전(Palazzo Carignano)[3]에서 카를로 펠리체의 후계자이자 13촌 조카 카를로 알베르토와 토스카나의 마리아 테레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왕실의 자제였지만 그가 태어난 1820년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불과 5년 뒤였으며,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중심지인 피에몬테와 사보이아는 프랑스 점령의 여파로 프랑스 혁명의 정신이 강하게 전파된 곳 중 하나여서 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편이었다. 아버지 카를로 알베르토도 프랑스 혁명의 영향[4]을 강하게 받았으나, 정작 아들에게는 자유주의적 사상보다는 사보이아 가문 특유의 보수적인 스파르타식 교육을 시켜 자유주의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1848년 혁명으로 전 유럽을 뒤흔든 혁명의 기운 속에 부왕 카를로 알베르토는 국내의 자유주의 좌파 세력의 강력한 요구에 부응하여, 이탈리아 반도에서 오스트리아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전쟁[5]에 돌입했다. 그러나 사르데냐-피에몬테군은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연전연패했고 당시 피에몬테 공[6]이었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도 지휘관으로 종군했으나 패전하는데 크게 일조하는 형편없는 지휘능력을 보여주었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퇴위하여 포르투갈 왕국으로 망명을 떠났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새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2.2. 재위 초반기: 와신상담의 시기
처참한 패전의 혼란 속에 즉위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였으나, 전후 수습은 상당히 빨랐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요제프 라데츠키 장군이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 제법 유리한 강화 조건을 내걸면서 오스트리아 제국과 강화를 맺었고, 강화조약의 일환[7]으로 부왕을 부추겨 무모한 대 오스트리아 전쟁을 주장한 자유주의 세력 및 공화주의 세력을 철저히 탄압하며 국왕 친정체제를 확립했다. 자유주의 세력은 이를 두고 배신이라며 이를 갈았지만,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이 강해진 상황에서 패전 직후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이처럼 좌파 및 반대파에 대한 탄압으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오스트리아에 전쟁배상금을 완납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였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오스트리아에 대한 복수의식과 이탈리아 통일의 의지를 더더욱 굳히고 있었다. 그리고 상공업을 진흥하는 등 국력을 야금야금 키워가면서 자신과 뜻을 같이 할 파트너로 후일 이탈리아 건국 3걸 중 하나로 불리는 명재상 카보우르를 전격적으로 기용했다.
그는 카보우르와 작은 부분에서 의견 충돌이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일에서는 전적으로 그를 믿고 따랐으며, 카보우르의 의견을 따라 크림 전쟁에 참전하여 훗날의 통일 수행에 있어 강대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결국 이러한 외교 전략은 성공을 거두어 나폴레옹 3세로부터 이탈리아 통일에 지원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후 기회를 엿보며 군사력을 키우는 등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쟁 준비에 나섰다.
2.3. 재위 중반기: 미완의 통일
마침내 1859년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이 발발,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으며 대 오스트리아 전쟁에 나섰다. 피에몬테-프랑스 연합군은 오스트리아군을 완파하고 전면적 승리를 거두기 일보 직전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솔페리노 전투[8]의 피해에 경악한 나폴레옹 3세는 빌라프란카[9] 강화 조약을 맺어 전쟁터에서 일제히 발을 빼는 배신을 하는 동시에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게 이쯤에서 만족하고 전쟁을 멈출 것을 권고하였다.프랑스의 배신에 격분한 카보우르는 단독으로라도 대 오스트리아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지금까지 얻은 성과조차 모두 날리고 프랑스까지 적대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나폴레옹 3세의 권유를 받아들여 전쟁을 멈추고 롬바르디아에서 오스트리아 세력을 축출하고 할양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여전히 베네토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피렌체, 로마 등 중부 이탈리아는 병합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1년 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토스카나 대공국, 파르마 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 교황령의 볼로냐 일대 등 중앙이탈리아 연합주를 병합하는 조건으로 니차(Nizza)와 사보이아를 프랑스에 내주는 토리노 조약을 체결했다. 왕실의 발원지인 사보이아까지 넘길 정도로 이탈리아의 통일을 간절하게 원했던 것이다.[10]
이후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끄는 붉은 셔츠단이 양시칠리아 왕국을 무너뜨리고 남이탈리아를 석권한 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 헌납하여, 568년 랑고바르드족의 침략을 시작으로 분열되었던 이탈리아반도가 마침내 통일되었고 1861년 3월 토리노에서 열린 통일 이탈리아의 첫 의회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이탈리아 국왕(Re d'Italia)의 칭호를 수여했고, 이를 받아들여 초대 이탈리아 왕국 국왕으로 즉위했다.[11]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지배하고 있던 베네치아 외에도 교황이 거주하고 있던 로마는 프랑스군이 지키고 있어서 접수할 수 없었던, 미완의 통일이었다.
2.4. 재위 말기: 통일의 완수
격무에 시달리던 파트너 카보우르는 1861년 6월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했고, 완전한 이탈리아 통일의 책무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혼자서 부담하게 되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프로이센 왕국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비밀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 참전, 오스트리아의 후방을 공격하여 8년 전 획득하지 못한 베네토를 양도받는 데 성공하고 북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 세력을 완전히 축출했다.뒤이어 1871년에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로마를 지키고 있던 프랑스군이 본국으로 철수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로마를 점령하여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로 선언했다. 이 과정에서 교황령과 로마의 지배자이기도 했던 교황 비오 9세와 충돌하여, 비오 9세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파문했으며 이 둘은 살아생전에 서로 대면조차 하지 않았다.
|
VITTORIO·EMANVELE·II / PADRE·DELLA·PATRIA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 국가의 아버지) |
3.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Vittorio Emanuele II) |
카를로 알베르토 (Carlo Alberto) |
카리냐노 공 카를로 에마누엘레 (Charles Emmanuel, Prince of Carignano) |
|
카리냐노 공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Victor Amadeus II, Prince of Carignano) |
|||
로렌의 조제핀 (Joséphine of Lorraine) |
|||
작센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Maria Christina of Saxony) |
|||
쿠를란트 공작 카를 (Charles, Duke of Courland) |
|||
프란치슈카 크라신스카 (Franciszka Krasińska) |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a of Austria) |
|||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3세 (Ferdinand III, Grand Duke of Tuscany) |
|||
레오폴트 2세 (Leopold II) |
|||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Maria Louisa of Spain) |
|||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루이사 (Luisa of Naples and Sicily) |
|||
페르디난도 1세 (Ferdinando I) |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 (Maria Carolina of Austria) |
4. 가족 관계
4.1. 아내
|
오스트리아의 아델하이트 여대공 |
아내 오스트리아의 아델하이트 여대공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손녀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는 고종사촌 겸 당이모가 된다.[13] 이탈리아 왕국이 출범되기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남편과 함께 초대 이탈리아의 왕비가 되지는 못했다.
4.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녀 |
나폴레옹 공비 마리아 클로틸데 (Maria Clotilde, Princess Napoléon) |
1843년 3월 2일 | 1911년 6월 25일 |
나폴레옹 조제프 보나파르트[14] 슬하 2남 1녀[15] |
1남 |
움베르토 1세 (Umberto I) |
1844년 3월 14일 | 1900년 7월 29일 |
사보이아의 마르게리타 슬하 1남[16] |
2남 |
아마데오 1세 (Amedeo I) |
1845년 5월 30일 | 1890년 1월 18일 |
마리아 비토리아 달 포조 슬하 3남[17] |
마리아 레티치아 보나파르트[18] 슬하 1남 |
||||
3남 |
몬페라토 공작 오도네[19] (Oddone, Duke of Montferrat) |
1846년 7월 11일 | 1866년 1월 22일 | |
2녀 |
포르투갈의 왕비 마리아 피아 (Maria Pia, Queen of Portugal) |
1847년 10월 16일 | 1911년 7월 5일 |
루이스 1세 슬하 2남[20] |
4남 |
키아블레세[21] 공작 카를로 알베르토 (Carlo Alberto, Duke of Chablais) |
1851년 6월 2일 | 1854년 6월 22일 | |
5남 |
사보이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Vittorio Emanuele of Savoy) |
1852년 7월 6일 | 1852년 7월 6일 | |
6남 |
제네바 백작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Vittorio Emanuele, Count of Geneva) |
1855년 1월 8일 | 1855년 5월 17일 |
[1]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3세의 삼녀.
[2]
사보이아 가문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후
손
들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본인의 업적은
이탈리아인에게 인정받고 있다.
[3]
사보이아-카리냐노 분가에서 사용해오던 궁전으로 현재는
이탈리아 통일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4]
이탈리아 왕국 헌정 체제의 근간이 되었던 알베르토 헌법(Statuto Albertino)이 아버지
카를로 알베르토 시절 통과되었다.
[5]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6]
Principe di Piemonte.
사보이아 가문의
계승자에게 부여되는 칭호로,
영국의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유사한 성격이었다.
[7]
조건에 자유주의 세력 탄압이 있었다.
[8]
솔페리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거의 4,000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했고 부상자는 8,530명으로 집계되었다. 이때의 참혹한 피해를 지켜본 사람이
앙리 뒤낭이었고 그는
적십자 창립에 기여해 훗날
노벨평화상 초대 수상자로 추천받았다.
[9]
현재
프랑스
알프마리팀
빌프랑슈쉬르메르.
[10]
빌라프란카 강화 조약으로 프랑스가 배신을 때렸어도 그나마 다행이었던게 강화 조약에는 사보이아와 니차의 언급이 없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프랑스와의 관계 강화를 위해 자신의 장녀인 마리아 클로틸데를 나폴레옹 3세의 사촌동생에게 시집보내기도 했다. 이는 집안 사람들이 통치가문과 혼인하기를 원했던 나폴레옹 3세의 의향과도 관련이 있었다.
[11]
다만, 넘버링은 사르데냐 왕국의 것을 이었기에 새롭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가 아닌 2세를 그대로 썼다.
[12]
생전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조상들이 묻혔던 토리노의
수페르가 성당에 안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맏아들 움베르토 1세가 부왕의 업적을 기리겠다고 판테온 안장을 강행했다.
[13]
고모 사보이아의 엘리사베타의 딸이자 어머니 토스카나의 마리아 테레사의 친사촌이다. 또한 친할머니 작센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아우구스트 3세의 친손녀)와 아델하이트의 친할머니
스페인의 인판타 마리아 루이사(아우구스트 3세의 외손녀)가 사촌이어서 아우구스트 3세를 기준으로 8촌이기도 하다.
[14]
제롬 보나파르트의 삼남.
[15]
장남 빅토르 보나파르트가
벨기에의 클레망틴 공주와 결혼하여 낳은 후손들이 현재
보나파르트 가문의 수장 지위를 잇고 있다.
[16]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17]
아오스타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등
[18]
상술한 마리아 클로틸데의 딸로 아마데오 본인의 조카다.
[19]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자녀들 중 가장 똑똑했으나 부모의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질환이 있어
왜소증을 앓았고 그 여파로 일찍 죽었다. 건강 때문에
제노바에서 살았는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제노바의 그리스 로마 유적에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했으며 제노바 지역 학자들도 그의 학식에 감탄했다고 한다.
[20]
카를루스 1세 등
[21]
Chiablese.
에비앙레뱅 일대를 일컫는 지역이다.
프랑스어로는 샤블레(Chabla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