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14:30:24

호르티 미클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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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티 미클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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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191919>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쟁기(1918).svg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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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da9c5> 제국원수
k.u.k. Fieldmarschall / k.u.k. Großadmiral 독일어
cs. és kir. Tábornagy / cs. és kir. Főtengernagy 헝가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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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제국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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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상급대장
k.u.k. Generaloberst 독일어
cs. és kir. Vezérezredes 헝가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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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상급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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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l der Waffengattung / Admiral 독일어
Gyalogsági tábornok, Lovassági tábornok, Táborszernagy / Tengernagy 헝가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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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zérőrnagy / Ellentengernagy 헝가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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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소제독
-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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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 첨자 c : 참모총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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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헝가리 왕국 섭정
호르티 미클로시
Horthy Miklós[1]
파일:미클로시호르티.webp
이름 비테즈 너지바녀이 호르티 미클로시 ( 헝가리어)
Vitéz nagybányai[2] Horthy Miklós
니콜라우스 호르티 리터 폰 너지바녀 ( 독일어)
Nikolaus Horthy Ritter von Nagybánya
출생 1868년 6월 1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트란스라이타니아 헝가리 왕국 켄데레시
(現 헝가리 야스너지쿤솔노크주 커르처그구 켄데레시)
사망 1957년 2월 9일 (향년 88세)
포르투갈 리스보아 지방 이스토릴
재임기간 헝가리 왕국 섭정
1920년 3월 1일 ~ 1944년 10월 15일
서명
파일:호르티 미클로시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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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부모 아버지 호르티 이슈트반(Horthy István, 1830–1904)
어머니 헐러시 퍼울러(Halassy Paula, 1839–1895)
배우자 푸르글리 머그돌너(Purgly Magdolna, 1881–1959)[3]
자녀 머그돌너(Magdolna, 1902–1918)
퍼울레테(Paulette, 1903–1940)
이슈트반(István, 1904–1942)
미클로시(Miklós, 1907–1993)
종교 칼뱅파
신체 177cm
소속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군사 경력
임관 피우메 황립 및 왕립 해군사관학교(K.u.k. Marineakademie)
복무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해군
1894년 ~ 1918년
최종 계급 중장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
1. 개요2. 생애3. 기타4. 매체5. 둘러보기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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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 왕국 군인, 정치인, 독재자. 1, 2차 세계대전의 인물 중에도 매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인물로 1868년 6월 1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생의 귀족으로 오헝제국의 해군 장교가 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제국이 분할되자 독립한 공산주의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정부를 전복시켰다. 이후 왕정을 복고하나, 왕을 옹립치 않고 섭정이 되어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나치 독일을 편들어 참전했으나, 전황이 악화되자 소련과 단독 강화를 시도하다 독일에 의해 축출되었다. 전후 헝가리가 공산화되자 포르투갈로 추방되어 1957년 사망한다.

‘바다 없는 내륙국의 해군 제독’, ‘왕 없는 왕국의 섭정’이라는 해괴한 타이틀을 두 개나 달고 산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2. 생애

186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켄데레시(Kenderes) 지역의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인 이슈트반은 헝가리 왕국 귀족원 의원으로 1,500에이커의 토지를 가진 대지주였다.

1886년 피우메[4] 황립 및 왕립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894년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1896년 중위, 1900년 대위로 진급했으나, 소령 진급은 1909년에 이루어져 동기들보다 늦었다고 한다. 이후 중령( 1911년), 대령( 1914년)까지는 동기들보다 빨리 진급했다. 소령이었을 때는 당시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 전속부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2.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제독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합스부르크급 전함 SMS 합스부르크와 SMS 노바라의 함장으로 근무했다. 주요 상대는 영국 해군, 프랑스 해군, 이탈리아 왕립 해군이었다. 이탈리아는 해군력이 빈약하였고, 프랑스는 해군 강국이었으나 지중해에 전개시킨 전력은 미약했기에, 호르티는 두 나라의 해군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1917년 5월 아드리아해의 출입구에서 벌어진 오트란토 해협 해전은 호르티 대령의 명성이 동맹국은 물론 협상국에서도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함대사령관 안톤 하우스 원수의 방침에 따라 전함을 비롯한 주력함을 현존함대 전략으로 보존하는 대신 U보트를 통한 지중해에서의 통상파괴전에 주력하고 있었다. 연합군은 이에 맞서 저인망 어선과 함대를 배치하여 아드리아 해의 출구인 오트란토 해협을 봉쇄하였다. 호르티는 정찰 순양함[5] SMS 노바라를 비롯하여 장갑순양함 1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4척을 이끌고 출격하여 해협을 봉쇄 중인 어선들을 개박살냈고[6] 곧이어 출동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해군과 교전을 벌였다. 적절한 지휘로 호르티는 연합군의 구축함 2척과 지원함 2척, 어선 14척을 격침시켰고 반면 동맹군 측은 격침당한 함선없이 귀환하였다. 이 전투의 결과로 연합군은 해협봉쇄에 참여 중인 어선들이 무방비로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오트란토 해협 봉쇄를 제한적으로만 실시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보트에게 다시 지중해로 나가는 길이 열렸다.[7] 호르티는 전투 도중 중상을 입고 귀환하였지만,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전쟁 영웅으로 부상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와 함께 1918년 2월에는 카타로 항에서 벌어진 제국 해군의 반란까지 성공적으로 진압함으로서 소장(Rear Admiral)으로 진급했고, 제국이 해체되기 직전에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막시밀리안 녜고반 대장의 뒤를 이어 오헝 제국 해군 최후의 함대사령관으로 영전하였다.

2.2. 헝가리의 독재자

2.2.1. 바다 없는 나라 해군 제독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공산주의의 물결이 전 세계를 풍미한 가운데, 헝가리에서는 1919년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쿤 벨러가 공산정권인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을 수립했다. 호르티는 이에 반발해 헝가리 동남부의 세게드에서 옛 부하들을 모아 공산정권 타도를 내세우며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공산화를 우려한 루마니아 왕국의 도움으로 루마니아군과 함께 부다페스트로 진군해 쿤 벨러 공산정권을 무너뜨리고,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의 강력한 지지를 받아 1920년 3월 1일 헝가리 의회에서 헝가리 왕국의 섭정(kormányzó)으로 선출되며 정권을 잡게 된다.

헝가리는 1920년 협상국과의 강화조약인 트리아농 조약을 체결하면서 영토의 반 이상을 상실하고 내륙국으로 전락했다. 그래서 바다 없는 나라의 해군 제독이라는 괴상한 직책이 되어버렸다.

2.2.2. 왕 없는 왕국의 섭정

한편 카를 1세는 내전에서 왕당파가 승리하자 헝가리 왕위라도 건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1921년 몰래 헝가리에 입국해 두 차례 왕정복고를 시도했지만 협상국은 헝가리 측에 합스부르크 가문을 복고한다면 얻을 것은 하나도 없고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라는 강경한 메시지를 전해왔다. 특히 구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를 먹어치운 유고슬라비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등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복고로 영토 분쟁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복고가 이루어지면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겠다는 최후통첩까지 보냈다.

아직까지 헝가리의 전후 국제적 지위가 결정되지 않고 국내사정도 혼란스러운 가운데 복벽을 실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호르티 제독은 군대를 동원해 합스부르크 지지자들의 봉기를 진압하는 한편 카를 1세를 체포해 추방했다. 결국 헝가리 의회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복귀를 금지하기로 결의하여 헝가리 왕국은 공식적으로는 왕 없는 왕국이 되었다. 그래서 호르티 제독은 왕 없는 왕국의 섭정이라는 해괴한 직책으로 사실상 헝가리를 통치하게 된다. 바다 없는 나라의 해군 제독이 왕 없는 왕국의 섭정으로써 군림한 실로 어이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 때문에 헝가리의 국권 자체를 상징하는 성 이슈트반 왕관도 주인을 찾지 못해서 그냥 모처에 엄중하게 보관했다.

북부 헝가리, 버이더샤그, 에르데이, 카르파터이여 등을 상실하고 심지어 같은 패전국인 오스트리아에도 외르비데크가 넘어가는 등 헝가리는 트리아농 조약으로 인해 전통적인 국토의 대부분을 잃고 말았고, 이 때문에 헝가리 왕국 내에는 불만세력이 팽배하여 영토 회복을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다.[8]
베를린을 방문하여 독일군의 사열을 받는 호르티 제독.

세계 대공황으로 헝가리가 엄청난 타격을 입은 가운데 호르티 제독은 한창 떠오르던 아돌프 히틀러와 손을 잡는다. 이후 뮌헨 회담의 후일담 격인 제1차 빈 중재에 의해 슬로바키아 남부 헝가리인 거주 지역을 얻고, 독일의 체코 병합 직후에는 카르파티아 루테니아를, 제2차 빈 중재를 통해 루마니아에서 북부 에르데이를 얻었다. 유고슬라비아 침공 후에는 동부 버이더샤그 크로아티아 독립국 강역 내에 있던 트리아농 조약 당시 크로아티아 영토가 된 곳들을 추가로 얻었는데[9], 이들 지역은 전후 진주한 헝가리 육군의 전쟁범죄가 문제화되기도 했다.[10] 다만 독소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중립을 지키며 간을 보다 전쟁 발발 5일 후인 6월 27일에 참전한다.[11]

독일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파시스트라는 오해를 받곤 하지만 호르티 제독 본인은 확고한 귀족적 권위주의자로 국내에서 성장하는 파시즘 세력들을 가차없이 탄압하였고 파시스트들이 선거에서 얼마나 약진을 하든지 그에 걸맞은 대접을 일절 해 주지 않았다. 화살십자당을 불법화한 것이 그 예. 나치 독일도 기존 왕정이나 구체제의 엘리트 계층인 융커계급이 꽉 장악하고 있는 독일 군부와 서로 사이가 나빴다는 걸 생각하면[12] 구체제의 엘리트 출신인 호르티가 파시즘과 꽤 거리를 두었다는 것도 이해하기 쉽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이기도 했다. 호르티가 공산정권에 대항해 왕정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숱한 백색테러와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살인행위가 동반되었다.

2.3. 최후

독일의 패망이 굳어지자 1944년 10월 소련과 단독으로 강화 협상을 시도했지만, 이를 눈치챈 독일이 오토 스코르체니 SS 중령의 주도로 판처파우스트 작전을 개시하여 그의 아들 호르티 미클로시 2세를 유괴하여 인질로 삼고 파시즘 정당인 화살십자당 당수 살러시 페렌츠를 헝가리의 집권자로 세운다. 호르티 제독 본인은 독일로 끌려가 감금되었다가 종전 직전 미 육군에게 구출되었으며, 유괴된 아들은 종전 후에야 석방되었다. 살러시와 화살십자당 주요 간부들은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로 밀고 들어오자 독일로 도망갔으나, 종전 후 미 육군에게 체포되었다가 헝가리로 송환되어 인민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한다.

종전 후 미군에 의해 구금되었다가 1945년 말 석방되어 바이에른에 거처하였으며,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는 전범으로 분류되지 않아 증인으로만 출석한 뒤 석방되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신병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측에서 거절했다. 호르티 제독 치하 헝가리에서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없진 않았지만,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로 가기 시작하고 본격적인 홀로코스트가 실시된 시점은 호르티 제독이 실각하고 화살십자당이 정권을 잡은 1944년 이후의 일이었다. 당시 이송 책임자 중 한 명이 아돌프 아이히만이며, 이때 혜성같이 등장하여 유대인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라울 발렌베리, 조르조 페를라스카(호르헤 페를라스카)이다.

헝가리가 공산화되어 귀국길이 막히자[13] 1950년 포르투갈로 망명하였다. 이후 가족과 함께 포르투갈의 휴양지이자 전 루마니아 국왕 카롤 2세가 같이 망명해 있던 이스토릴(Estoril)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1957년에 세상을 떠났다. 말년에 회고록을 집필하기도 한 그는 헝가리의 반소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충격을 받아서 " 소련군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헝가리를 떠날 때까지" 자신의 유해를 헝가리에 옮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언에 따라 유해는 소련 붕괴 이후 헝가리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인 1993년에서야 헝가리로 돌아와 고향인 켄데레시에 묻혔다.

죽기 전에 회고록을 남겼는데, 호르티의 개인사 뿐만 아니라 당시 헝가리의 정세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3. 기타

  • 추축국 지도자들 중에서 전쟁에 제일 소극적이었던데다, 그가 밀려난 후 집권한 화살십자당이 하도 짧고 강렬한 막장이던 탓에 상대적으로 나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14] 하지만 1920년대에 전 세계를 휩쓸었던 대공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초인플레이션을 일으켰고, 이 초인플레이션 때문에 헝가리는 1927년부터 기존에 쓰던 크로네를 버리고 펭괴를 발행해야 했다.[15]
  • 가톨릭 다수 국가인 헝가리에서 이 비범하고 해괴하신 섭정 각하의 종교는 칼뱅파였다. 왕 없는 나라의 섭정이자 바다 없는 나라의 해군 제독이자 가톨릭 국가의 개신교도 국가지도자 헝가리 동부를 흐르는 티서강을 경계로 서쪽은 확실한 가톨릭 다수 지역이지만 티서강 동쪽의 헝가리 동부와 트란실바니아는 개신교인 개혁교회의 세가 상당히 강했다. 왜냐면 중부유럽에서 한창 종교 개혁이 유행할 당시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 아래에 든 서부지역과 오스만이 직접 지배한 중부지역, 그리고 오스만을 종주국으로 하여 헝가리인이 자치를 누리는 동부의 에르데이 공국으로 삼분할된 상태였는데, 개혁교회가 트린실바니아의 헝가리인들 중심으로 퍼진 것이다. 그 유명한 트란실바니아의 바토리 가문도 칼뱅교와 연관이 있어서 가톨릭으로부터 누명을 쓴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고 헝가리 제2의 도시인 데브레첸의 경우는 칼뱅교도들의 로마란 별명이 있을 정도며 루마니아 혁명의 도화선이라 할 수 있는 티미쇼아라(Timișoara)도 개신교세가 강한 지역이었다. 지금도 헝가리 전체인구의 13% 정도가 개신교 신자이며, 그보다 더 동쪽인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인들의 경우 개신교 신자 비율은 47%까지 올라간다. 헝가리가 흔히 가톨릭 국가라는 인식이 강해 의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으나 개혁교회의 영향력도 꽤나 유서 깊기 때문에 헝가리인이면서 개신교인이라는 정체성이 딱히 유별나거나 특이한 것은 아니다. 가령 오르반 빅토르 현 헝가리 총리도 개혁교회 신자이다. 여담으로 헝가리 개혁교회는 칼뱅주의를 표방하는 교단치고는 상당히 특이하게 감독를 실시하는 거의 유일한 칼뱅주의 교회이다.
  • 동시기의 스페인과는 달리 섭정 체제가 도중에 붕괴해버렸기 때문에, 그가 죽거나 헝가리인들에게 실각당할 때까지 섭정 체제가 계속되었을 경우의 상황은 상상의 영역에 맡길 수밖에 없다. 공화정, 혹은 헝가리 의회가 새 섭정을 뽑든가, 아니면 1921년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프란시스코 프랑코 사후 보르본 왕조를 복위시킨 스페인처럼 오토 폰 합스부르크 옹립시켜 합스부르크 왕조를 왕정복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는 왕정 복고를 하되 헝가리의 적당한 귀족 중의 하나를 왕으로 옹립시키거나, 아예 곤도르 마차시 1세처럼 스스로 왕위에 올라 호르티 왕조 개창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호르티 제독 본인은 1942년 장남 호르티 이슈트반(István)을 부섭정으로 세웠으나, 그 해 8월 이슈트반이 탄 헝가리 공군기가 추락해 사망한 뒤에는 다음 부섭정을 임명하지 않았다.

4. 매체

  • 2013년 12월에 개봉된, SS 장교로 변장하고 유대인들을 풀어주던 레지스탕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Walking with the enemy>에서 배우 벤 킹슬리가 연기한 호르티 제독을 볼 수 있다.
    파일:external/4.bp.blogspot.com/Miklos+Horthy+Ben+Kingsley+Walking+with+the+enemy.jpg
  • 파일:호르티 미클로시(Hearts of Iron IV).jpg
    Hearts of Iron IV에서 헝가리의 국가원수로 등장한다.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편을 든 걸 고증한 것인지 뜬금없이 파시스트 옹호자로 나와 화살십자당의 지도자가 되기도 하는데 그가 파시즘을 탄압한 역사적 사실과는 괴리가 있다. 헝가리를 친독 추축국으로 만들기 위해 고증을 포기한 것으로, 2024년 추가 DLC를 통해 대폭 개편되어 역사적 루트에서는 파시즘을 탄압하고 비동맹으로 남게 된다. 대신 줄러 곰보스[16]가 호르티를 전복하고 스스로 섭정의 자리에 오른 후 파시가 쿠데타를 벌이는 파시 섭정 루트가 추가된다.
    선택지에 따라 오토 폰 합스부르크 복위를 선택하게 되면 국가원수에서 퇴임하여 해군 지휘관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바다가 없는걸[17] 또는 아예 자기가 왕위에 오르고 새 왕조를 열어버릴 수도 있다.
  •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는 추축국 개념을 처음 만든 반공주의자다운 모습과 헝가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민족주의자로서 등장한다. 특히 트리아농 조약으로 루마니아에게 뺏긴 트란실바니아를 탈환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고, 이에 디트리히는 루마니아와 헝가리를 저울질한 결과 헝가리에 힘을 실어주면서, 결국 고토였던 트란실바니아를 되찾는 데 성공한다. 이때 제4제국과 맺은 밀약[18]이 이후에 밝혀지면서 루마니아에서 디트리히의 이미지가 굉장히 나빠지게 된다.
  • 동방의 라스푸틴에서는 해군 지휘관으로서의 모습이 나온다. 트리에스테에서 일어난 공산주의 반란을 재빠른 대처로 제압하긴 했지만 자신의 윗선들이 다 날아가버린데다 때마침 일본 해군이 접근해온다는 소식에 수병들에게 이번 사건은 묻을테니 함께 침략자들을 물리치자는 연설로 수병들을 휘어잡아 제독으로 추대되어 일본 해군과 맞서게 되고 만전의 상태는 아니었지만 우월한 화력을 기반으로 일본 해군을 박살내는데 성공한다.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분리후 헝가리 왕국의 총리가 되어 조피 여왕을 보좌하고 있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후신국가 도나우 연방의 해군 제독으로 반란을 일으킨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을 진압하러 가지만 원래 역사에서 호르티를 도와준 루마니아[19]가 지원을 중단하면서 헝가리에서 패퇴하고 오스트리아 해군 제독으로 남는다. 그래도 크로아티아가 존재해서 원래 역사처럼 해군 없는 나라의 해군 제독 신세는 면하나 싶었지만 얼마 못 가 크로아티아가 독립하면서 해군 없는 나라의 해군 제독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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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 유럽권 국가들과 달리 '성-이름' 방식을 사용하는 헝가리어식 이름이기 때문에 '호르티(Horthy)'가 성이고 '미클로시(Miklós)'가 이름이다. [2] 'Vitéz'는 기사를 뜻하는데, 1920년 창설된 비테즈 훈장의 수훈자에게 붙는 칭호이다. 호르티가 훈장의 초대 주군이었으니 일종의 자가 수여인 셈이다. 1944년 이후로 비테즈 훈장은 폐지되었고 합스부르크 왕조의 가문훈장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한편 'nagybányai'는 지명인 너지바녀(Nagybánya)를 의미하며 호르티의 조상이 받은 영지의 명칭이다. 트란실바니아에 있는 지역으로 현 루마니아 마라무레슈주 바이아마레(Baia Mare)에 해당한다. [3] 1901년 혼인. [4] Fiume, 오늘날 크로아티아 서부의 항구도시인 리예카(Rijeka). 훗날 헝가리 인민 공화국의 서기장이 되는 카다르 야노시도 리예카 출신이다. [5] 경순양함의 일종 [6] 작전 목표 자체가 적 해군력 파괴가 아니라 (유보트를 위한) 해협봉쇄 돌파였으니, 봉쇄에 참가 중이던 저인망 어선들에 상당한 타격을 가한 시점에서 이미 작전은 성공이었다. [7] 저인망 어선의 해협 봉쇄는 낮 시간 동안에만 진행해야 했고 15시 무렵에는 봉쇄를 풀어야 했다. [8] 어찌나 원한이 컸는지 당시 헝가리 극장에서 방영되던 헝가리 국제뉴스(Magyar Világhíradó)에서는 오프닝 씬에 트리아농 조약 이전 헝가리 영토를 꼬박꼬박 띄우며 고토회복을 강조했다. [9] 우스타샤가 아직 해외 테러조직 수준이던 시절 헝가리 내부에 우스타샤 캠프를 제공해 주는 등 여러모로 지원해 준 것을 빌미삼아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성립된 후 메지무례, 프레크무례, 바라냐를 뜯어갔다. [10] 대표적으로 페케테헐미가 일으킨 노비사드 학살이 있다. [11] 헝가리가 독소전쟁에 참전하게 된 데는 1941년 6월 26일에 있었던 커셔(현 슬로바키아 코시체) 폭격이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엔 폭격에 사용된 폭탄이 소련제라는 이유로 헝가리 정부는 폭격의 주체가 소련 공군이라고 결론지었으나. 이 폭격의 배후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아서 여러 이견이 있다. 소련의 의도적인 폭격이라는 주장부터, 소련 공군이 슬로바키아를 폭격하려다 실수로 헝가리에 폭격을 했다는 주장, 아니면 독일이 헝가리를 참전시키려고 한 자작극이라는 주장, 또는 헝가리 정부의 자폭이라는 주장과 루마니아 왕국의 공격이라는 주장, 아니면 식민지 시절 때문에 헝가리에 원한이 컸던 독일의 괴뢰국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의 독단적인 공격이라는 주장도 있다. [12] 관련 항목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지만 독일 군부, 특히 육군과 나치당은 서로 견제하는 대상에 가까웠다. 공군 빼고 군부는 히틀러의 재무장계획이 필요하기 때문에 협조하고 있었지만 나치당을 벼락출세한 뜨내기들로 은근히 무시하고 있었고 나치당 역시 자신들이 세울 천년제국에 '실패한 체제'인 프로이센과 독일 제국의 유산이자 융커 계급이 주도하는 군부는 걸맞지 않다고 공공연히 여기곤 했다. 히틀러 또한 군부를 견제하기 위해 소장파인 에르빈 롬멜, 하인츠 구데리안 등을 중용하기도 하고 이 때문에 이들은 적어도 전쟁 초중반엔 히틀러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했다. 이 밖에도 병과별로 충성경쟁을 유도하거나 전쟁 중반에는 아예 무장친위대를 육군을 견제할 만한 수단으로 확대시키기도 했다. [13] 특히 공산화 이후 헝가리의 지도자가 된 라코시 마차시 쿤 벨러 휘하의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에 가담했던 호르티의 정적이었다. [14] 1년도 되지 않는 화살십자당 집권 기간 동안 15000여명의 유대인이 나치 독일의 손에 넘겨져 강제수용소로 보내지거나 화살십자당원들의 손에 사살당하는 등 방식으로 헝가리에서 사라졌다. [15] 헝가리는 패전 직전인 1945년에도 또 한번 초인플레이션을 겪어 펭괴를 폐지하고 포린트로 전환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6] 1936년 시작 시점에서 헝가리의 총리. [17]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복원하다 보면 유고슬라비아를 공격해서 땅을 되찾아오게 된다. 되찾아온 후 해안가에 조선소를 깔고 해군을 양성하면 제독으로 호르티를 쓸 수 있다. [18] 헝가리가 독일에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대신, 루마니아가 연합국에 가입하는 것을 고의적으로 방기해 헝가리와 다른 나라들이 루마니아에게 뺏긴 땅을 되찾도록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19] 다뉴브연방이 존재하는 역사의 변화로 트란실바니아를 절반밖에 가지지 못해 대놓고 침략하려다가 헝가리를 공격하면 베사라비아를 공격하겠다는 소련의 압박을 받고 공세를 포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