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제국원수/독일 제국군 육군 상급대장 오이겐 대공 Erzherzog Eugen von Österrei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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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Eugen Ferdinand Pius Bernhard Felix Maria 오이겐 페르디난트 피우스 베른하르트 펠릭스 마리아 |
출생 | 1863년 5월 21일 |
오스트리아 제국 보헤미아 왕관령 그로스젤로비츠[1] | |
사망 | 1954년 12월 30일 (향년 91세) |
헝가리 인민 공화국 머저로바르 | |
최종 계급 |
제국
육군
제국원수 (k.u.k. Feldmarschall)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합동 육군, 1916년)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아버지 | 오스트리아의 카를 페르디난트 대공 |
어머니 |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프란치스카 여대공 |
형제자매 | 프란츠 요제프, 프리드리히, 마리아 크리스티나[2], 카를 슈테판[3], 마리아 엘레오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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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 황족이자 제국원수[4]. 오이겐 대공은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페르디난트의 아들로[5]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활약으로 유명하다.2. 생애
오이겐 대공은 모라비아의 그로스 젤로비츠(Groß Seelowitz, 현 Židlochovice) 성에서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페르디난트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프란치스카 대공비(Erzherzogin Elisabeth Franziska von Österreich)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적부터 매우 엄격한 교육을 받았으며, 그로스 젤로비츠 성과 그문트(Gmünd)에서의 휴가 생활은 철저한 교육 과정과 번갈아 이루어졌다. 빈의 알브레히트 궁전(Albrechtspalais)에서는 군사 과목뿐만 아니라 언어, 음악, 예술사 등 폭넓은 교육을 받았다.[6]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에 따라 민간 직업도 배웠는데, 그는 목수 기술을 익혔다.3. 군사 경력의 시작
1877년 10월 27일, 14세의 나이에 티롤 황립 및 왕립 카이저경보병연대 (Tiroler Kaiserjäger) 연대에서 소위로 임관했다. 1881년 5월 1일 중위로 진급했고, 제2후사르연대로 전속되어 여러 기동훈련에 참가했다. 1882년, 삼촌인 알브레히트 대공(Erzherzog Albrecht)이 주관하는 시험 위원회에서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 입학 자격을 검증받았다. 1883년부터 1885년까지 빈 노이슈타트(Wiener Neustadt)의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는데,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정규 군사교육을 받은 유일한 대공이었다.4. 승진과 지휘관 경력
졸업 후 참모부에 배속되어 빠른 승진을 이어갔다. 1885년 대위, 1887년 기병대위로 진급했고, 제5후사르연대에서 복무했다. 1888년 소령 진급과 함께 제100보병연대 대대장이 되었고, 1889년 중령, 1890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1891년에는 제15 후사르연대장이 되었고, 1893년 소장 진급과 함께 올뮈츠의 제9보병여단장, 1896년 중장 진급과 함께 빈에 주둔한 제25보병사단장을 역임했다. 1900년 인스브루크의 제14군단장으로 임명되었고, 1901년 4월 27일 기병대장으로 진급했다. 이 직책으로 인해 그는 인스브루크 시 사령관과 티롤 방위사령관을 겸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자신의 오른팔로는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를 두었고, 3인자로는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 빅토어 단클 등이 있었는데, 이들 중에서 콘라트는 후에 참모총장이 되었고, 쾨베시가 훗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총사령관에 오르게 되었으며, 단클또한 후에 벌어질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제1군사령관이 되었다. 특히 쾨베시의 경우, 오이겐은 9년 동안 그를 관찰하면서 당시 티롤 요새감찰관이던 쾨베시를 군단장에 강력히 추천하여 출세의 발판을 마련해주기도 하였다.5. 튜튼 기사단과의 인연
1887년 1월 11일, 오이겐은 튜튼 기사단에 서약기사로 가입했다. 당시 단장이었던 삼촌 빌헬름 대공(Erzherzog Wilhelm)의 보좌관으로 선출되었고, 1894년 빌헬름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제58대 단장(Hoch- und Deutschmeister)이 되었다. 그는 자원봉사 간호 서비스(Marianer)를 조직하고, 새로운 병원을 설립하며, 간호사들의 교육을 개선하는 등 단장으로서 매우 효과적인 활동을 펼쳤다.6.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활약
1914년 12월, 세르비아 전선의 실패로 해임된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보병대장의 후임으로 발칸방면군(Balkanstreitkräfte)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참모장 알프레트 크라우스 중장과 함께 제5군을 재편성했다. 1915년 5월 2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최초로 상급대장에 진급했고, 이틀 후 이탈리아와의 전쟁이 시작되자 남서부전선 사령관이 되었다. 사령부를 볼차노, 마르부르크로 옮기고 스위스 국경에서 아드리아해까지 이어지는 전선을 지휘했다.제1차 이손초 전투에서는 전선을 직접 순시하며 병사들을 격려했고, 후방 지원체계도 효율적으로 관리했다. 1916년 봄의 남티롤 공세에서는 제11군과 제3군으로 구성된 오이겐 대공 군집단을 지휘했다. 비록 러시아의 브루실로프 공세로 인해 공세를 중단해야 했으나, 6월 중순 군대를 안전한 진지로 철수시키는데 성공했다.
1916년 11월 23일 콘라트와 함께 원수로 진급했고, 1917년 3월 다시 남서부전선 사령관이 되었다. 카포레토 전투에서는 독일 제국군 제14군과 보로예비치 집단군을 지휘하며 동맹국측의 마지막 기회라고 판단, 전력을 다해 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나 1917년 12월 18일, 카를 1세가 자신의 직접적인 지휘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했는데, 오이겐 대공같은 강력한 야전 지휘관의 존재는 이를 방해할 수 있었다. 실제로 카포레토 전투에서의 성공으로 오이겐 대공의 명성은 더욱 높아진 상태였다. 그래서 아르츠 참모총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이겐 대공은 해임이 강행되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이 동부전선에서 이탈하고, 루마니아 왕국이 점령되었으며, 이손초, 카린티아, 돌로미티 등 여러 전선이 크게 단축되었기 때문에 이는 순수한 군사적 판단이라기보다는 카를 1세의 권력 집중화 시도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7. 전후 생활과 말년
전쟁 후 스위스의 루체른과 바젤로 망명했다. 1923년 튜튼 기사단의 존속을 위해 단장직을 사임했다. 1934년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빈 근교 굼폴츠키르헨(Gumpoldskirchen)의 기사단 수도원에 정착했다. 군주제 지지 집회와 참전용사 모임에 참석했으나, 1938년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에는 정치활동을 중단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히칭(Hietzing)에서 지냈고, 전후에는 이글스(Igls)의 작은 별장에서 여생을 보냈다. 1953년 90세 생일에는 인스브루크 시민들의 축하를 받았으며, 1954년 12월 30일 메라노(Merano)에서 사망했다. 1955년 1월 6일 인스브루크의 성 야코프 성당(St. Jakobskirche)에 안장되었다.8. 평가
오이겐 대공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군사학에서 가장 성공적인 지휘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정규 군사교육을 받은 유일한 대공이라는 점은 그의 전문성을 잘 보여준다. 특히 그의 지휘 스타일은 매우 실용적이었는데, 이는 그가 젊은 시절부터 일선에서 실전 경험을 쌓았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보여준 그의 지휘력은 탁월했다. 특히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인 방어전을 펼쳤으며, 전선 시찰을 통한 병사들과의 직접적인 소통으로 높은 신뢰를 얻었다. 그러나 군사적 능력에 비해 정치적 감각은 부족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페르디난트 대공과의 불화로 1911년에 일시적으로 은퇴해야 했고, 전쟁 말기에는 카를 1세와의 관계 설정에 실패하며 해임되었다. 이는 그가 순수한 군인이었을 뿐, 당시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읽고 대처하는 능력은 부족했음을 보여준다. 90년이 넘는 그의 생애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광과 몰락을 모두 담고 있다. 마지막 튜튼 기사단장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대공들 중 한 명으로서, 그는 구시대의 영광스러운 마지막을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진다. 특히 그가 보여준 군인으로서의 전문성과 충실성, 그리고 말년까지 이어진 품위 있는 삶의 자세는 오늘날까지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1]
現
체코 지들로초비체
[2]
알폰소 12세의 왕비이자
알폰소 13세의 모후.
[3]
카를 알브레히트 대공,
레오 카를 대공,그리고
빌헬름 프란츠 대공의 아버지.
[4]
일반적으로 알려진
제국원수와는 좀 다른 개념의 계급이다. 자세한 사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국원수 항목 참조.
[5]
어머니는
레오폴트 2세의 7남 요제프 대공의 3녀 엘리자베트 프란치스카 여대공으로, 카를 페르디난트 대공과는 친사촌간이었다. 당초 모데나 공작 프란체스코 4세의 아들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과 결혼해 딸 하나를 두었으나 결혼 3년 만에 고작 18세의 나이로 사별하고, 사촌오빠인 카를 페르디난트와 재혼해 4남 2녀를 두었다.
[6]
레오폴트 폰 하우어가 그의 개인교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