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소장 에두아르트 피셔 Eduard Fisch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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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2년 1월 18일 |
부코비나 공국 카라프치우 | |
사망 | 1935년 6월 21일 (향년 73세) |
오스트리아 연방국 빈 |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 |
1888년 ~ 1918년 | |
최종 계급 | 소장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동부전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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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이자 소장. 부코비나 공국과 갈리치아에서 오스트리아 헌병대를 지휘했으며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 기사작위를 받은 인물이다. 그는 또한 저명한 작가이기도 했다.2. 생애
에두아르트 피셔는 1862년 1월 18일 오스트리아 제국 부코비나 공국의 카라프치우 페 체레무시(Carapciu pe Ceremuș)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카라프치우 출신의 유대계 소작농이었다. 피셔는 어릴 적부터 군인이 되는 것을 꿈꿨는데, 6학년을 마친 후 그는 1879년 자원입대하여 고향을 연고로 하는 제41부코비나보병연대에 배속되었고, 크라쿠프 인근 워주프(Łozów)에 있는 사관학교로 보내졌다. 피셔는 1885년 이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1888년 소위로 임관했다.1891년 피셔는 황립 헌병대로 전속되었다. 1898년 중위로 진급하여 체르노비츠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1901년에는 대위로 진급하여 체르노비츠 제1헌병사단의 지휘관 및 부코비나 헌병대 부지휘관이 되었다. 1906년 황립 및 왕립 전쟁성에서는 피셔를 헝가리, 독일, 벨기에, 스위스의 헌병 조직을 연구하는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그의 우수한 활동 덕분에 1907년 프란츠 요제프 훈장 기사작위를 수여받았다. 이후 1912년 5월 1일 피셔는 소령으로 진급하고 제13부코비나 공국 헌병대장에 임명되었으며 3등 오스트리아 황실 무공훈장을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피셔는 1914년 8월 1일 중령으로 진급했다. 그 달 말 러시아 제국군이 부코비나를 침공하여 부코비나 북부와 수도 체르노비츠를 점령했다. 피셔는 불과 며칠 만에 부코비나에서 무장 민병대를 조직하여 지휘했는데, 여기에는 부코비나 헌병대뿐 아니라 다양한 민족과 직업의 수많은 자원병들도 포함되었다. 저항의 주요 거점은 구라 후모룰루이(Gura Humorului)와 킴풀룽 몰도베네스크(Câmpulung Moldovenesc)였다. 피셔의 부대는 적군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체르노비츠까지 일시 탈환했으나, 1914년 11월 20일 러시아군 사령관 안드레이 셀리바노프(Андрей Селиванов) 장군의 지휘 하에 다시 체르노비츠를 점령당했다.
피셔는 1만 명이 채 되지 않고 장비도 부족한 병력으로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니콜라이 루스키(Николай Русский), 니콜라이 이바노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 알렉산드르 에브레이노프(Александр Евреинов) 장군의 정예부대를 수개월간 저지하는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 시레트(Siret) 강 남쪽에서는 1915년 6월까지 저항이 계속되었다.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1]는 피셔의 생포에 10만 루블의 현상금을 걸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로 피셔는 1914년 9월 전쟁훈장이 수여된 철관 훈장 3등급을, 이듬해 대령으로 특진했다. 1915년 3월 카를 1세와의 알현에서 황제의 찬사를 받았고, 전쟁훈장이 수여된 3등 레오폴트 훈장을 받았다. 또한 체르노비츠 시민들로부터 명예의 검을 하사받기도 했다. 피셔의 활약은 적과 아군 모두에게 명성을 떨쳤다. 전쟁 중 부코비나를 방문한 탐험가 스벤 헤딘은 그를 "동방의 안드레아스 호퍼"[2]라고 칭송했다. 1918년 2월 1일 피셔는 소장으로 진급했고, 3월 20일 카를 1세는 그를 갈리치아와 부코비나의 헌병대장에 임명했다. 1918년 3월부터 11월까지 그는 빈으로의 보급품 수송을 조직하고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19년 1월 1일 피셔는 퇴역했다.
피셔는 역사지리학 분야의 저술로도 학계에서 명성을 얻었다. 부코비나와 몰도바에 관한 그의 저서는 특히 루마니아에서 상당한 관심을 모았다. 체르노비츠 대학교는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피셔의 마지막 저서는 자신의 회고록 "군대 없는 전쟁, 러시아에 맞선 나의 부코비나 방어"(Krieg ohne Heer, meine Verteidigung der Bukowina gegen die Russen)였다. 1916년부터 피셔는 루마니아의 전쟁 상대로 간주되었는데, 1919년 초 루마니아 당국은 피셔 부부를 이아시 근처의 수용소에 억류했다. 거기서 두 사람은 독감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고, 부인은 그 감염으로 사망했다. 피셔는 1920년 석방되어 오스트리아로 추방되었다. 1927년 10월 25일 제193차 승급에서 피셔는 1914년 중령 때 부코비나에서의 반란 조직과 지휘 공로로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 기사작위를 추서 받았다. 훈장을 받기 직전 피셔는 뇌졸중으로 반신불수가 되었다. 일생의 어느 시점에 피셔는 가톨릭으로 개종했는데 정확한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히칭 묘지의 명예 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