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4 01:43:36

우츠미 테츠야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엠블럼.svg 요미우리 자이언츠
2024 시즌 코칭스태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000><colcolor=#fe5a1d> 감독 83 아베 신노스케
1군 76 니오카 토모히로 (헤드코치 겸 타격수석코치) · 74 무라타 요시노리 (종합코치) · 81 스기우치 토시야 (수석투수코치)
77 우츠미 테츠야 (투수코치) · 78 카와이 마사히로 (내야수비코치) · 79 카메이 요시유키 (외야수비·주루코치)
88 사네마츠 카즈나리 (배터리코치) · # 아나부키 이쿠오 (트레이닝코치)
2군 73 쿠와타 마스미 (2군 감독) · 75 안도 츠요시 (헤드코치) · 71 야마구치 테츠야 (수석투수코치) · 72 오타케 켄 (투수코치)
85 와키야 료타 (내야수비·주루코치) · 82 스즈키 타카히로 (외야수비·주루코치) · 87 하시모토 이타루 (타격코치) · 89 카토 켄 (배터리코치)
# 이시모리 타카시 (트레이닝코치)
3군 70 코마다 노리히로 (3군 감독) · 86 후루키 시게유키 (타격코치) · 100 미사와 코이치 (수석투수코치)
104 노가미 료마 (투수코치) · 105 요시카와 다이키 (내야수비코치) · 103 킨죠 타츠히코 (외야수비·주루코치)
102 이치카와 토모야 (배터리코치) · 108 박석민 (육성코치) · # 존 터니 (트레이닝코치)
순회 84 쿠보 야스오 (순회투수코치) · 110 젤러스 휠러 (순회타격코치)
코칭스태프 투수 포수 내야수 외야수 육성선수
틀: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돌아가기
다른 NPB 팀 명단 보기
}}}}}}}}} ||
우츠미 테츠야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bordercolor=#000019><tablebgcolor=#000019> 파일:오릭스 버팔로즈 엠블럼.svg 오릭스 버팔로즈
역대 1라운드 지명선수
}}} ||
{{{#!wiki style="margin: 0 -10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0 -10px -5px"
{{{#ec1c24 {{{#!folding [ 한큐 브레이브스 ]
{{{#555555,#aaaaaa
<tablewidth=100%>
1965년 ~ 1988년
1965년 1966년 1차 1966년 2차 1967년 1968년
나가이케 아츠시
(長池徳士)
미즈타니 타카시
(水谷孝)
히라바야시 지로
(平林二郎)
와타나베 카즈오
(渡辺一夫)
야마다 히사시
(山田久志)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미와타 카츠토시
(三輪田勝利)
코마츠 켄지
(小松健二)
와타나베 히로키
(渡辺弘基)
이시다 마코토
(石田真)
에가와 스구루 (6)[1]
(江川卓)
1974년 1975년 1976년 1977년 1978년
야마구치 타카시
(山口高志)
스미토모 카즈야 (6)
(住友一哉)
사토 요시노리
(佐藤義則)
마츠모토 쇼지
(松本正志)
세키구치 토모유키 (1)
(関口朋幸)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1983년
키노시타 토모히로 (1)
(木下智裕)
카와무라 카즈아키 (6)
(川村一明)
야마오키 유키히코 (1)
(山沖之彦)
에노키다 켄이치로 (1)
(榎田健一郎)
노나카 테츠히로 (1)
(野中徹博)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2]
시라이 타카유키
(白井孝幸)
이시이 히로시 (1)
(石井宏)
타카기 코지 (1)
(高木晃次)
이토 아츠노리 (2)
(伊藤敦規)
사카이 츠토무 (2)
(酒井勉)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c74b {{{#!folding [ 오릭스 브레이브스 - 블루웨이브 ]
{{{#555555,#aaaaaa
1989년 ~ 2004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사토 카즈히로 (1)
(佐藤和弘)
하세가와 시게토시
(長谷川滋利)
타구치 소 (2)
(田口壮)
코바야시 히로시 (1)
(小林宏)
히라이 마사후미
(平井正史)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카세 토시히로
(嘉㔟敏弘)
이마무라 후미아키 (1)
(今村文昭)
스기모토 유우 (3)
(杉本友)
카와구치 토모야 (2)
(川口知哉)
아라카키 나기사 (6)
(新垣渚)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야마구치 카즈오 (3)
(山口和男)
우츠미 테츠야 (6)
(内海哲也)
오가와 유스케 (3)
(小川裕介)
카토 다이스케 (3)
(加藤大輔)
카토 타츠오
(歌藤達夫)
히라노 케이이치 (3)
(平野恵一)
2004년
카네코 치히로 (3)
(金子千尋)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9e751f {{{#!folding [ 오릭스 버팔로즈 ]
{{{#555555,#aaaaaa
2005년 ~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T-오카다 (1) (4)
(T-岡田)
노부에 다이스케 (1) (4)
(延江大輔)
니와 마사야 (1) (4)
(丹羽将弥)
카이 타쿠야[3]
(甲斐拓哉)
후루카와 슈이치
(古川秀一)
히라노 요시히사 (3) (5)
(平野佳寿)
코마츠 사토시 (3) (5)
(小松聖)
코바야시 켄지 (1) (5)
(小林賢司)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고토 슌타 (1)[4]
(後藤駿太)
아다치 료이치 (1)
(安達了一)
마츠바 타카히로 (1)
(松葉貴大)
요시다 카즈마사
(吉田一将)
야마사키 사치야
(山﨑福也)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2019년
요시다 마사타카
(吉田正尚)
야마오카 타이스케
(山岡泰輔)
타지마 다이키 (2)
(田嶋大樹)
오타 료 (1)
(太田椋)
미야기 히로야 (1)
(宮城大弥)
2020년 2021년 2022년 2023년 2024년
야마시타 슌페이타 (1)
(山下舜平大)
무쿠노키 렌
(椋木蓮)
소타니 류헤이
(曽谷龍平)
요코야마 세이야
(横山聖哉)
}}}}}}}}}}}} ||
(1) 하즈레 1라운더: 첫 지명에서 중복 지명된 선수의 교섭권 획득에 실패했을 때 차순위로 선택한 선수.
(2) 중복 지명 당첨
(3) 역지명, 희망 입단 범위: 1993년부터 2006년까지 존재한 제도로, 선수를 확정적으로 획득할 수 있었다.
(4) 고교생 드래프트
(5) 대학생, 사회인 드래프트: 2005년~2007년의 3년간은 고교 선수와, 대학&사회인 야구에서 뛰었던 선수의 지명이 분리되어 있었다.
(6) 지명 후 미입단

[1]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아니면 입단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다른 팀의 지명을 모두 거부했다. 1973년에는 한큐에 지명되었으나 거부하고 대학에 진학하였으며, 1977년에는 크라운라이터(現 세이부)의 지명을 거부, 1978년에는 한신의 지명을 거부하고 이른바 '공백의 1일'사건을 일으켰으나 일본야구기구의 중재로 결국 코바야시 시게루와의 맞트레이드를 통하여 쿄진에 입단하게 된다. [2] 다이에와 마찬가지로 시즌은 한큐로 치렀으나, 시즌 직후 매각되어 드래프트는 오릭스로 참가했다. [3] 투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포수와는 음이 같지만 한자가 다르다. 그 쪽은 「甲斐拓也」 [4] 1라운드 복수 지명 추첨에서 무려 3번이나 떨어지고 나서 지명한 선수(...) 2022년까지 뛰다 2023년 주니치 드래곤즈로 트레이드되었다. 여담으로 이 해 오릭스가 1라운드에서 순차적으로 지명한 복수지명 선수는 오이시 타츠야(세이부)- 이시미네 쇼타(롯데)- 야마다 테츠토(야쿠르트).
킨테츠의 1라운드 지명선수는 틀: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1라운드 지명선수 참조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word-break: keep-all"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0>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엠블럼.svg 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rowcolor=#f49c00> 1936春夏~1937秋 1938春 1938秋 1939 1940~1941
사와무라 에이지 빅토르 스타루힌 마에카와 하치로 카와카미 테츠하루 빅토르 스타루힌
<rowcolor=#f49c00> 1942 1943 1944 1946 1947~1948
히로세 슈이치 빅토르 스타루힌 후지모토 히데오 곤도 사다오 카와사키 토쿠지
<rowcolor=#f49c00> 1949 1950 1951 1952 1953
타다 후쿠조 후지모토 히데오 벳쇼 다케히코 후지모토 히데오 벳쇼 다케히코
<rowcolor=#f49c00> 1954 1955~1956 1957 1958 1959~1960
오토모 타쿠미 벳쇼 다케히코 오토모 타쿠미 후지타 모토시 이토 요시아키
<rowcolor=#f49c00> 1961 1962 1963 1964 1965~1966
나카무라 미노루 조노우치 구니오 이토 요시아키 타카하시 아키라 카네다 마사이치
<rowcolor=#f49c00> 1967 1968~1969 1970 1971 1972~1973
조노우치 구니오 카네다 마사이치 타카하시 카즈미 와타나베 히데타케 호리우치 츠네오
<rowcolor=#f49c00> 1974 1975~1978 1979 1980 1981
타카하시 카즈미 호리우치 츠네오 니우라 히사오 에가와 스구루 니시모토 다카시
<rowcolor=#f49c00> 1982 1983 1984 1985 1986
에가와 스구루 니시모토 다카시 에가와 스구루 니시모토 다카시 에가와 스구루
<rowcolor=#f49c00> 1987 1988~1989 1990 1991~1992 1993~1997
니시모토 타카시 쿠와타 마스미 사이토 마사키 마키하라 히로미 사이토 마사키
<rowcolor=#f49c00> 1998 1999 2000~2006 2007 2008
쿠와타 마스미 발비노 갈베스 우에하라 고지 우츠미 테츠야 타카하시 히사노리
<rowcolor=#f49c00> 2009 2010 2011 2012 2013
세스 그레이싱어 우츠미 테츠야 도노 슌 우츠미 테츠야 미야구니 료스케
<rowcolor=#f49c00> 2014~2016 2017 2018~2022 2023 2024
스가노 도모유키 마일스 마이콜라스 스가노 도모유키 타일러 비디 토고 쇼세이
}}}}}}}}} ||

파일:09giants.png 파일:12 giants.pn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2009 2012

파일: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로고.svg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c7bc69 우승반지}}}
2009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12 센트럴리그 투수 부문 베스트나인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11, 2012 센트럴 리그 다승왕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7 센트럴 리그 탈삼진왕

파일:NPB 로고.svg 2012년 일본 시리즈 MVP
고쿠보 히로키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우츠미 테츠야
( 요미우리 자이언츠)
미마 마나부
(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26번}}}
니시야마 가즈히로
(1999~2003)
우츠미 테츠야
(2004~2018)
타카하시 유키
(2019)
{{{#fff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등번호 27번}}}
스미타니 긴지로
(2012~2018)
우츠미 테츠야
(2019~2022)
스미타니 긴지로
(2024~)
{{{#fff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등번호 97번}}}
요시미 타이치
(2014~2017)
우츠미 테츠야
(2023)
결번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77번}}}
모토키 다이스케
(2019~2023)
우츠미 테츠야
(2024~)
현역
}}} ||
파일:2024우츠미코치.jpg
<colbgcolor=#000000><colcolor=#fd5a1e> 요미우리 자이언츠 No.77
우츠미 테츠야
内海 哲也 | Tetsuya Utsumi}
출생 1982년 4월 9일([age(1982-04-09)]세)
교토부 조요시
국적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학력 쓰루가케히고교
신체 175cm, 82kg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2004년 자유 계약
소속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4~2018)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019~2022)[1]
지도자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투수코치[2] (2022)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 (2023)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2024~)

1. 개요2. 플레이 스타일3. 프로 입단 전4. 프로 경력5. 국가대표6. 지도자 경력7. 여담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우츠미 테츠야(内海 哲也, 1982.04.19~)는 전 일본프로야구 선수이자 투수코치이다.

2. 플레이 스타일

파일:우츠미데뷔시즌.gif
2004년 데뷔 시즌 투구폼
파일:우츠미투구폼.gif
현역 시절 투구폼[3]
파일:우츠미포심.gif
137km/h 포심 패스트볼
파일:우츠미커브2.gif
119km/h 커브
파일:우츠미체인지업.gif
121km/h 체인지업

투구폼이 깔끔하고 디셉션이 좋은 스리쿼터 투수. 평균 139km/h, 최고 148km/h의 완급조절이 좋은 포심 패스트볼을 구사한다. 투심, 슬러브, 커브, 커터, 체인지업등 다양한 변화구를 던진다. 특히 커브[4]와 체인지업[5]을 주로 던진다. 주자견제가 상당히 좋아서 12년도에는 186이닝을 던지고 도루를 딱 1번 허용했다. 슬라이드 스텝도 상당히 빠르다.

단점은 컨디션에 따른 기복이 꽤 심한 편이였다. 포심 구속이 130km/h중반으로 떨어질때가 있었으며 제구력 난조도 있어 폭투, 볼넷을 남발하는 경우가 잦은 편이였다.

투수치곤 타격은 06년에 .214를 기록할 정도로 타격능력이 괜찮다. 다만 번트를 못대는 편이다.

3. 프로 입단 전

후쿠이현 쓰루가시에 위치한 쓰루가케히고등학교의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다. 2000년 봄 고시엔(센바츠) 대회 본선 출전을 확정지었으나 팀 동료가 무면허 운전+음주운전을 저질러 학교에서는 고시엔 본선 출전을 스스로 포기하였다. 2000년 여름 고시엔 출전을 눈 앞에 둔 후쿠이 현 대회 결승전에서 연장10회까지 가는 접전끝에 후쿠이 상업 고교한테 2대3으로 패하며 고시엔 구장을 밟아보지 못했다.

조부가 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 출신이라 요미우리가 아니면 프로무대에 가지 않을 것이라 선포했음에도 오릭스 블루웨이브가 1순위로 지명했다. 오기 아키라 감독의 설득으로 오릭스 입단을 진지하게 생각했으나 고등학교 시절 배터리를 짰던 리 게이이치(이경일)가 8순위로 요미우리에 지명되면서[6] 오릭스 입단 대신 사회인야구팀인 도쿄가스의 유니폼을 입기로 결정했다.

도쿄가스에서 3년간 뛰고 역지명제도를 통해 꿈에 그리던 요미우리에 입단했다.[7]

4. 프로 경력

4.1.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2004년 요미우리에 입단하여 2018년까지 요미우리에서 뛰었으나 FA 스미타니 긴지로[8]의 보상선수로 2019시즌을 앞두고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로 이적하였다.[9] 그러나 부상으로 인해 2019 시즌을 통으로 쉬고 말았다.

2007년에는 탈삼진왕(180개), 2011년과 2012년에는 다승왕(18승과 15승)을 차지했고[10] 2012년에는 베스트나인으로도 뽑혔다.

2005년에는 고시엔 구장에서 한신 타이거즈 센트럴 리그 우승 확정을 허용하는 치욕을 당했으나 그 다음해인 2006년 홈구장인 도쿄 돔에서 이가와 게이와 맞대결 때 본인의 첫 완봉을 찍으면서 설욕했다. 그때 2-0으로 이겼는데 이승엽이 혼자서 점수냈다. 그리고 이가와 게이는 한 달 뒤 한일통산 400, 401호를 허용하게 된다. 하지만 우츠미는 삿포로돔 닛폰햄전에서 털린거 빼곤[11] 윤석민처럼 잘 던지고도 다패왕을 먹었다. 이후 꾸준히 거인 선발진의 한 축으로 활약했고, 07년엔 탈삼진왕을 가져갔으며 09년엔 WBC에서 다르빗슈, 이와쿠마와 삼각편대를 이뤄 금메달을 따기도 했고, 11,12년 2년연속 규정이닝 1점대 방어율에 다승왕으로 스가노 도모유키 이전 단연 교진의 에이스였다. 12년이 커리어하이로 이해 다승왕(전해에 이어 2년연속), 승률 1위, 최우수투수상, 베스트나인, 교류전 MVP, 팀은 일본시리즈에서 우승을 하며 일본시리즈 MVP까지 온갖 상을 다 휩쓸었고 이 성적을 바탕으로 교진과 4년 16억엔의 다년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4년계약 첫 해 13승을 거뒀지만 160이닝 3점대로 조금 삐그덕거리기 시작해 이듬해부터는 143이닝 3점대, 23이닝, 104이닝 3점대 후반으로 그야말로 그림에 그린 듯한 먹튀의 정석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그래도 2017년 연봉은 딱 절반인 2억엔. 성적을 보면 스기우치 토시야마냥 더 후려쳐도 할 말이 없지만 그동안 팀에 많이 공헌한 선수이다 보니 자존심은 세워 준 금액. 그러나 2017년에도 1군에서 모습을 보기 힘들었고 57이닝 5점대로 부진하였다. 2018년 연봉은 또 반 잘라낸 1억. 비슷한 시기 FA로 와서 우쓰미와 교진의 원투펀치를 이루다 또 비슷한 시기에 추락한 스기우치 도시야가 무려 90% 삭감이었음을 생각하면, 확실히 과거의 공헌을 고려해서 덜 깎은 금액이다. 암흑기부터 요미우리의 선발진을 꾸준하게 지켜왔던 선수라서 우에하라 고지이후 오랜만에 배출한 투수 성골 프랜차이즈 스타가 되지 않을까라는 예상이 있었는데…

4.2.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2018년 전격적으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포수 스미타니 긴지로의 FA 보상선수로 지명됐다. 초노 히사요시의 히로시마 이적만큼이나 팬들에게 큰 충격을 준 지명. 그래서 성골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 이대로 은퇴할 수 있다는 예측도 나왔지만, 순순히 세이부 이적을 수락했다. 사실 선수생활 후반부가 초라해서 다카하시나 아베, 사카모토 등 미래의 경쟁자들에 비하면 일단 한 수 밀리는지라 이후 코치로 평이 어지간히 좋지 않은 이상 감독 가능성은 어차피 낮은 편인데, 세이부로 이적하면 2~3년은 선수생활을 연장할 수 있고 지금 받는 금액과 하락폭을 고려할 때 앞으로 2억엔 정도는 더 땡길 수 있다. 2억엔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니기에 가능성이 희박한 수십년 후의 교진 감독 자리에 모험을 거느니 20억원을 선택한 것. 2억엔이면 로또 1등보다 더 큰 돈인데다 교진에만 목 안매면 오히려 타팀 감독 자리가 문이 넓기도 하고. 교진 감독은 1자리뿐이지만 타 팀 감독은 총합 11자리니깐.

쵸노도 그렇지만, 이쪽도 이름빼고 성적만 보면 갈만하긴 했다. 100이닝도 못 던진 방어율 5점씩 되는 30대 후반의 노장이 연봉은 1억 엔이었으니. 한국으로 치면, KIA가 FA가 끝난 후의 윤석민을 보호명단에서 푼 것과 비슷하다. 성적 자체는 명단에서 풀려도 할 말이 없긴 했다. 세이부도 한창 윈나우인 팀이라 언제 써먹을 수 있을지 모르는 유망주보다는 한계는 보여도 당장 쓸 수 있는 베테랑을 데려오는 게 맞고, 아무리 성적이 예전 같지 않더라도 왼손투수라 공만 던질 수 있으면 좌완 원포인트로라도 1군에서 어쨌든 써먹을 수는 있으니까 나름 합리적인 선택이었다.[12]

2019년 세이부 소속으로 시즌을 준비했지만 심각한 왼팔 부상으로 1군 출장 기록 없이 2군에서만 몇경기 나오고 재활에만 매달렸다. 본인은 현역 연장을 선언하고 2020년을 맞았지만 코로나19로 시즌 개막이 지연되면서 스타트가 늦어졌고, 리그가 재개된 뒤 나온 2군 경기들에서도 5점대 후반의 ERA를 기록하는 등 좋지 않다. 2020년 8월 22일 1군에 콜업되어 오릭스 버팔로즈와의 경기에 선발 등판해 이적 후 1년만에 세이부에서의 1군 데뷔전을 치렀고, 6이닝 4K 3자책점으로 QS에는 성공하였지만 패전투수가 되었다. 2022시즌부터는 플레잉코치를 하게 되면서 슬슬 지도자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그러고 5월 7일 스미다 치히로를 대신해서 닛폰햄전에서 선발로 나왔는데 5이닝 1실점을 기록하여 생각보다 호투를 했다. 덤으로 이 경기로 인해 2000이닝 달성을 했다. 만약 이 경기에서 승리투수가 되었다면 구단 역사상 1985년의 타카하시 나오키 이후로 37년만에 40대 선발승이라는 진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지만, 6회초 히라이 카츠노리의 방화[13]로 인해 팀이 패배하면서 기록 달성에 실패했다. 2022 시즌 끝나고 현역은퇴 선언을 했다.

5. 국가대표

2009,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로 참가하였다.[14]

6. 지도자 경력

전술했듯이 2022년에는 세이부에서 플레잉코치로 지도자경력을 쌓기 시작하면서 2023시즌에는 세이부 2군 투수코치로 취임했다. 2군투수코치기간동안 평가는 긍정적이었는데 1군 선발투수중 컨디션이 불량해서 말소된 투수들 특히 스미다 치히로, 마츠모토 와타루의 밸런스를 재조정시켜준데다[15] 특히 유망주 하다 신노스케의 성장의 기여를 해줬다. 시즌후 친정팀 교진에서 신인감독 아베 신노스케의 부름을 받고 5년만에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7. 여담

187cm, 93kg로 동양인치고 상당한 장신이며, 일본 프로야구계에서도 거인으로 통한다.

2006년부터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함께 활약한 이승엽의 영향으로 한국인 사이에서도 꽤 인기를 끌었으며, 실제 2007년 1월 6일에 같은 소속팀 꽃미남 선수인 하야시 마사노리과 함께 한국에서 팬미팅을 개최한 바 있다.

2007년 일반인과 결혼해서 슬하에 3남 1녀가 있다. 상당히 가정적인 성격이라 글러브에 와이프와 자식들의 이름을 새겨놓았고 2003년 요미우리에 드래프트된 이후 친정집에 2층, 50평짜리 집을 구매했다.

2008년부터 탈삼진을 잡은 수대로 란도셀을 기부하고 있었다.

8. 관련 문서



[1] 2022 시즌 끝나고 현역 은퇴선언. # [2] 선수 겸임 [3] 이날 우츠미는 데뷔 첫 완봉승을 기록하였다. 물론 이해에 윤석민상 수상자답게 득점지원은 팀타선을 혼자서 멱살잡던 이승엽이 유일했다. [4] 고교시절 한신 타이거즈 스카우터에게 "고교레벨로 칠 수 없다."는 평을 들었다. [5] 선수 본인은 스크류볼이라 부른다. [6] 재일교포 선수로 고등학교 시절 타력이 좋아 스카우트들에게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향간에는 이경일의 지명은 우츠미를 거인으로 데려오기 위한 사전포석이라는 말이 있었다. 실제로 이경일은 1군 기록 없이 우츠미가 쿄진에 입단하고 1년이 지난 2004년 연말에 전력외 통고를 받고 요미우리의 불펜 포수로 전향했다. 이후 불펜 포수도 1년만에 그만두고 중학생 야구팀의 감독으로 전향. 이때 제자 중 한 명이 바로 요시다 마사타카이다. [7] 과거 일본프로야구에서는 자신을 원하는 팀의 지명을 거부하고 사회인야구에서 3시즌을 뛰거나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뒤 희망구단으로 갈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1993년 도입, 2007년 폐지. 본래 의도는 드래프트 제도가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의견 때문에 생긴 제도였으나, 요미우리 같은 인기팀이나 돈 많은 팀들이 유망주들에게 뒷돈을 뿌리면서 딴 팀 지명 거절하고 우리팀 오라는 식으로 유망주를 쓸어가는 용도로 워낙 잘 써먹는 바람에 폐지된 제도. 사실 직업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댓가로 주는 것이 계약금임을 감안하면 애초에 있을 필요가 없었던 제도였다. [8] 2006년 세이부에 입단했으며 1군 개막전에서 같은 10대였던 와쿠이 히데아키와 배터리를 짠 것으로 화제를 모았다. [9] 이때 우츠미처럼 요미우리가 아니면 프로에 가지 않겠다고 요미우리에서 뼈를 묻겠다고 선언했던 쵸노 히사요시 마루 요시히로의 FA 보상선수로 지목되어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떠났다. [10] 1점대 방어율은 기록한 유이한 해다. 2011년에는 1.70, 2012년에는 1.98 [11] 이때 닛폰햄 선발이 다르빗슈 유. 고쿠보 히로키와 이승엽에게 홈런을 맞고도 완투승했다. [12] 그리고 이 선택은 요미우리에게 최악의 선택이 되어버렸다. 그럴만한게 우츠미가 이적하게된 원인인 FA를 선언한 스미타니 긴지로가 3년후 현금트레이드로 라쿠텐으로 이적해버렸으니 요미우리한테는 그저 최악의 선택이 되어버리고 말았고 전력외통보 받은뒤에 세이부로 복귀하는바람에 사실상 최악의 판단이 되어버렸다. [13] 루키 나카야마와 코가의 합작 가관실책으로인해 안줘도될 실점을 죄다퍼주었다. 실제로 히라이는 이날 2실점을기록하여패전이됐지만, 자책은 0점으로 기록됐다. [14] 2009년 WBC에서 이용규에게 헤드샷을 던진적이 있다. [15] 우츠미한테 밸런스 재조정받은 스미다는 이후 정상급 좌완투수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