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5 07:54:17

네페리르카레 카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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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고왕국 제5왕조 3대 파라오
네페리르카레 카카이
Neferirkare Kakai
파일:Neferirkare_Kakai_2.png
사후레의 피라미드의 영안실 부조에 새겨져 있는 네페리르카레 카카이
원래는 라네페르 왕자로 묘사되었으나 후에 즉위명과 예복을 추가하였다.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네페리르카레 카카이
(Neferirkare Kakai)[1]
부왕 사후레
선대 사후레
후대 네페레프레 혹은 솁세스카레
묘지 네페리르카레의 피라미드
왕비 켄트카우스 2세(Khentkaus II)
자녀 네페레프레(Neferefre)♂
니우세르레 이니(Nyuserre Ini)♂
아이리엔레(Iryenre)♂
켄트카우스 3세(Khentkaus III)♀
재위 이집트 파라오
기원전 25세기 초반~중반, 재위기간 8년, 10년, 11년, 20년 미만 중 하나
1. 개요2. 기록3. 가족4. 통치5. 성격6. 건축 활동7.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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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 제5왕조의 세 번째 파라오인 네페리르카레 카카이(Neferirkare Kakai)는 사후레(Sahure)와 메레트네브티(Meretnebty)의 장남이다. 원래 라네페르 A(Ranefer A)로 알려졌던 그는 아버지가 죽은 다음 날 왕좌에 올랐으며 기원전 25세기 초에서 중반까지 8~11년 동안 통치했다.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장남 라네페르 B(Ranefer B)가 네페레프레가 되었고, 네페레프레의 짧은 통치와 솁세스카레의 짧은 통치 이후 또 다른 아들 니우세르레 이니가 뒤를 이었다.

네페리르카레는 자비, 행정과 신권 확장, 왕실 직함을 수정한 것으로 유명했다. 또한 그는 누비아 및 아마도 비블로스와 지속적으로 무역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아부시르(Abusir)에서 계단식 피라미드를 짓기 시작했고, 나중에 일반적인 피라미드로 개조되었지만, 그의 죽음 이후에도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는 또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세트이브레(Setibre)[2]라는 태양 사원을 건설했다.

그의 죽음 이후, 네페리르카레의 장례식 숭배는 그의 아들 니우세르레 이니에 의해 유지되었고 고왕국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이후 사장되었다가 12왕조때 제한적으로 다시 숭배되었다고 한다. 특히 12왕조때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웨스트카 파피루스(Westcar Papyrus)는 네페리르카레와 그의 전임자들을 의 아들들로 묘사했다.

2. 기록

네페리르카레 카카이는 그의 고관 워시프타(Washptah), 신하 라웨르(Rawer) 및 제사장 아케트헤테프(Akhethetep)의 무덤에 서술된 글들을 포함하여 그의 시대의 자료에 잘 문서화되어 있다. 그는 또한 5왕조 후반 또는 6왕조 초반의 메스제루(Mesdjerw)라는 고위 관리의 무덤에서 나온 기록판에도 등재되어 있다. 이 판은 서로 다른 왕조의 여섯 명의 파라오를 묶어서 목록화하였으며, 메스제루가 사후 세계에서 사용하도록 의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네페리르카레(Neferirkare)는 신왕국 시대의 두 고대 이집트 파라오 목록에 등장한다. 첫 번째는 세티 1세 시기에 작성된 아비도스 역대 파라오 목록(Abydos King List)으로, 여기서 네페리르카레의 노멘[3] "카카이(Kakai)"는 사후레(Sahure)와 네페레프레(Neferefre) 사이에 28번째로 기록되었다. 람세스 2세 시기에 작성된 사카라 목록(Saqqara Tablet)에서는 네페리르카레의 즉위명이 사후레의 후계자이자 솁세스카레(Shepseskare)의 전임자로서 27번째로 기록되었다.

네페리르카레는 또한 람세스 2세 시기의 문서인 토리노 파피루스(Turin canon)에 기록되었는데, 3번째 열-19번째 줄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부분이 손실되어 그의 재위 기간이나 후계자를 알 수 없다. 이집트학자 미로슬라브 베르너(Miroslav Verner)는 이 부분에서 새로운 왕조가 시작된다고 제안하여 네페리르카레를 그 창시자로 본다. 이와 관련된 왕조 구분에 대한 논쟁이 있으며, 일부 이집트학자들은 왕조의 전환을 왕궁의 이전으로 보기도 한다.

네페리르카레는 마네토(Manetho)가 작성한 이집트 역사서 《아이깁티아카(Aegyptiaca)》에도 언급되었는데, 사후레 → 네페리르카레 → 셉세스카레 순으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이는 사카라 목록과 일치한다. 아프리카누스의 요약에 따르면 네페리르카레는 20년간 재위했다고 한다.

3. 가족

2005년까지 네페리르카레의 부모의 신원은 불확실했다. 일부 이집트학자들[4]은 그를 우세르카프와 켄트카우스 1세(Khentkaus I)의 아들이자 사후레의 형제로 보았다. 이는 웨스트카 파피루스(Westcar Papyrus)에 근거한 이론으로, 이 고대 이집트 이야기에서는 세 명의 형제가 다섯 번째 왕조를 시작한다고 예언했다.

2005년에 사후레의 피라미드로 이어지는 길에서 새로운 부조 조각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네페리르카레의 부모가 사후레와 그의 배우자 메레트네브티(Meretnebty)였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 부조들은 사후레와 메레트네브티가 두 아들 라네페르와 솁세스카레와 함께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두 아들은 모두 "왕의 맏아들"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라네페르는 "수석 낭독 사제"[5]라는 칭호를 추가로 받아 그의 우선순위를 나타냈다. 라네페르는 네페리르카레가 즉위하기 전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어, 그의 혈통에 대한 의문은 사라졌다.

네체리렌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그는 네페리르카레의 아들 네페레프레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에 왕위를 노렸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이 가설에 따르면 그는 짧은 기간동안 파라오였던 솁세스카레일 수 있다. 또한 같은 부조와 추가적인 부조에서는 사후레의 또 다른 네 아들[6]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의 어머니는 알려져 있지 않아 최소한 네페리르카레의 이복형제로 추정된다.

21세기 초까지 알려진 네페리르카레의 유일한 왕비는 켄트카우스 2세(Khentkaus II)이다. 그녀의 피라미드가 네페리르카레의 피라미드 옆에 위치하고 "왕의 아내"라는 칭호와 함께 여러 부조에서 두 사람이 함께 묘사된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네페리르카레에게 다른 배우자가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는 추정에 불과하다.

네페리르카레와 켄트카우스 2세에게는 왕자 라네페르 B, 즉 미래의 파라오 네페레프레의 부모로 여겨진다. 이는 아부시르 근처 마을의 집에서 발견된 석회암 판에 새겨진 부조에서 확인되었으며, 여기에는 "왕의 맏아들 라네페르"와 함께 네페리르카레와 그의 아내가 묘사되어 있다. 라네페르는 네페레프레가 왕위에 오르기 전의 이름이었다.

또한, 네페리르카레와 켄트카우스 2세는 미래의 파라오 니우세르레 이니의 부모이기도 하다. 켄트카우스 2세의 장제전에서 발견된 부조 조각에는 그녀가 니우세르레와 그의 가족과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니우세르레는 네페리르카레의 미완성 건축물을 재사용하였으며, 그의 피라미드가 네페리르카레의 피라미드 옆에 위치한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또 다른 아들로는 아이리엔레(Iryenre)가 제안되었으며, 그의 장례 의식이 켄트카우스 2세의 장제전에서 거행되었다는 사실로부터 그의 관계가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네페리르카레와 켄트카우스 2세는 2015년 아부시르에서 발견된 켄트카우스 3세(Khentkaus III)의 부모일 가능성도 있다. 그녀의 무덤 위치와 시기, 그리고 "파라오의 아내" 및 "파라오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바탕으로 켄트카우스 3세는 네페레프레의 배우자이자 멩카우호르 카이우 또는 솁세스카레의 어머니일 가능성이 높다.

4. 통치

마네토의 《아이깁티아카(Aegyptiaca)》는 네페리르카레의 재위 기간을 20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이는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손상된 팔레르모 석에는 네페리르카레의 재위 중 5번째로 행해진 소 집계 연도가 보존되어 있다. 이 소 집계는 세금 부과를 위해 가축, 소, 작은 가축들을 집계하는 중요한 행사였으며, 고왕국 시대에는 2년에 한 번씩 이루어졌다. 따라서 네페리르카레는 최소 10년 동안 재위했을 것이다. 팔레르모 석의 형태로 보아, 이 기록은 그의 마지막 해 또는 그에 가까운 시기를 의미하며, 최대 11년 동안 재위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켄트카우스 2세와 네페리르카레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두 개의 필기체 비문도 네페리르카레의 재위 5번째 소 집계 연도와 일치하며, 이는 그의 재위 기간이 5번째 소 집계 연도인 것을 뒷받침한다. 마지막으로, 베르너는 네페리르카레의 피라미드가 미완성 상태인 점을 들어 20년 동안 재위했을 가능성이 낮다고 지적했다.

네페리르카레의 재위 기간 동안 피라미드와 태양 신전을 건설한 것 외에는 그의 활동에 대해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의 첫 해와 마지막 해의 일부 사건들이 팔레르모 석에 기록되어 있다. 팔레르모 석에 따르면, 네페리르카레는 사후레가 죽은 다음 날 왕위에 올랐다. 그의 첫 해에 네페리르카레는 엔네아드, 페와 네켄의 영혼들[7], 케라하(Keraha)의 신들을 섬기는 농장에 토지를 기부했다. 또한 라와 하토르에게 210개의 책상에 공양물을 가득 올려놓은 제물을 제공하고, 두 개의 저장실을 건설하며 새로운 종속인들을 고용하도록 명령했다.

네페리르카레는 또한 이히(Ihy)[8]신의 호박석 입상 제작과 스네프루의 메르트 차펠(mrt-chapel)으로의 운송을 명령했다. 재위 5번째 소 집계 연도에는 자신의 청동상을 세우고 태양 신전에 호루스를 위한 네 개의 태양의 배를 설치했으며, 그 중 두 개는 구리로 만들었다. 페와 네켄의 영혼들, 와제트에게는 호박금 장식을 제공했고, 프타에게는 토지를 기부했다.

팔레르모 석이 네페리르카레의 통치 시기에 끝나는 사실을 바탕으로, 일부 학자들은 이 기록들이 그의 재위 기간 동안 편찬되었을 가능성을 제안했다.

네페리르카레의 행정적 조치 중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1903년 아비도스에서 발굴되어 현재 보스턴 미술관에 있는 석회암 판에 새겨진 한 칙령은 켄티-아멘티우(Khenti-Amentiu) 신전의 종사자들을 강제 노동에서 면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칙령은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과세와 강제 노동이 부과되었음을 암시한다.

네페리르카레의 통치 기간 동안 이집트 행정과 제사장들이 더욱 성장하여 더 많은 권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파라오는 여전히 살아있는 신으로 여겨졌다. 특히, 재상과 원정 감독관과 같은 최고 직책들이 왕족 외의 사람들에게도 개방되었다. 이와 함께 고위 관리들의 마스타바(무덤)가 더 정교해지기 시작했으며, 예를 들어, 여러 방을 포함한 예배당, 넓은 입구 및 현관과 가족 무덤 단지가 등장했다. 또한 이 시기에 관리들이 자신의 자서전을 무덤 벽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네페리르카레 카카이의 통치 기간 동안 파라오의 칭호에 중요한 마지막 수정이 이루어졌다. 그는 "상하 이집트의 왕(nswt-bjtj)[9]"과 "라의 아들(Z3-Rˁ)[10]"이라는 칭호를 분리하여 각각 다른 독립된 이름인 프레노멘[11]과 노멘[12]에 연결한 최초의 파라오였다. 새 왕이 즉위할 때 사용하는 즉위명은 nswt-bjtj 기호 뒤에 카르투슈에 쓰였고, 노멘(출생명)도 "라의 아들"이라는 기호가 앞에 붙은 상태로 카르투슈에 쓰였다. 이 수정은 네페리르카레의 시대부터 체계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네페리르카레의 통치 기간 동안 군사 활동에 대한 증거는 거의 없다. 윌리엄 C. 헤이즈(William C. Hayes)는 그의 장제전[13]에서 발견된 무릎을 꿇고 묶인 전쟁 포로의 석회암 조각들이 리비아 시나이 가나안 지역에서의 보복 공격을 시사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예술 사학자 윌리엄 스티븐슨 스미스(William Stevenson Smith)는 이러한 조각들이 왕실 사원과 마스타바의 장식 요소로 관례적이었다고 언급하며, 실제 군사 활동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네페레프레, 제드카레 이세시, 우나스, 테티, 페피 1세, 페피 2세의 장제 단지와 재상 세네제미브 메히(Senedjemib Mehi)의 무덤에서도 유사한 조각상과 작은 나무 인형들이 발견되었다.

네페리르카레의 통치 기간 동안 확인된 무역 관계는 누비아와의 교류뿐이다. 이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로는 그의 이름이 새겨진 인장과 오스트라콘[14]이 나일강 제2 급류에 위치한 부헨(Buhen) 요새에서 발견된 것이다. 또한 레반트 해안의 비블로스와의 접촉 가능성도 제기되었으며, 그곳에서 그의 이름이 새겨진 단일 알라바스터[15] 그릇이 발견되었다.

5. 성격

네페리르카레의 통치는 동시대 기록에 비해서 그를 친절하고 온화한 통치자로 묘사하는 등 상당히 독특하게 묘사된다. 대표적인 일화로는 노년의 귀족 라워(Rawer)가 종교 의식 중 실수로 파라오의 발을 찼다고 한다. 당시에 파라오는 살아있는 신으로 모셔졌던 것으로 비출 때 이는 사형이나 추방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네페리르카레는 즉시 라워를 용서하고 아무런 해가 없도록 명령했다. 라워는 자신의 무덤에 파라오의 자비를 감사하는 글을 남겼다.

또한, 네페리르카레는 프타의 제사장 프타솁세스(Ptahshepses)에게 전례 없는 영예로 네페리르카레의 발에 입 맞추도록 허락했다.[16] 마지막으로, 재상 워시프타(Washptah)가 궁정에서 뇌졸중을 겪었을 때, 파라오는 즉시 궁전의 최고 수준의 의사들을 소환하여 치료를 명했고, 워시프타가 사망하자 깊은 슬픔에 잠겨 자신의 개인 방으로 물러났다. 왕은 워시프타의 시신을 정화하고, 그를 위해 특별한 의식과 함께 흑단 재질의 관을 준비하도록 명령했다. 이러한 왕의 행동은 워시프타의 무덤에 기록되어 네페리르카레가 신하들에게 얼마나 인간적으로 대했는지를 강조하고 있다.

6. 건축 활동

파일:Neferirkare.jpg
이름 바 네페리르카레(Ba Neferirkare)
네페리르카레의 영혼
높이 52m[계단식]
72.8m
경사 76°[계단식]
54°30'
네페리르카레 카카이의 피라미드는 "네페리르카레의 영혼" 또는 "카카이의 영혼"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부시르 왕실 묘지에 위치해 있다. 이 피라미드는 5왕조 시기에 지어진 가장 큰 피라미드로, 대략 멘카우레의 피라미드와 크기가 비슷하다. 피라미드와 그 주변 단지를 건설한 노동자와 장인들은 아부시르에 위치한 피라미드 마을에 거주했다.

피라미드 건설은 세 단계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현지에서 채취한 석회암으로 만든 6개의 계단형 구조로 시작되었으며, 3왕조 이후 약 120년 만에 다시 사용된 계단식 피라미드로 계획되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나중에 계단 사이를 채워 일반적인 피라미드 형태로 변형되었다. 이후 단계에서는 붉은 화강암으로 매끄러운 외장재를 추가하여 피라미드를 더 확장하려고 했지만, 이 작업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완성되었다면 피라미드는 높이 72m에 이르렀을 것이다. 현재는 석재가 대부분 도굴되어 폐허가 되었다.

피라미드의 하부 구조로 가는 입구는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석회암 대들보로 만든 박공지붕이 있는 내리막 통로가 매장실로 이어진다. 그러나 파라오의 관은 발견되지 않았다.

네페리르카레의 피라미드는 그의 가까운 가족의 작은 피라미드와 무덤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 단지는 나일강에서 제방길과 계곡 신전을 통해 연결될 예정이었으나, 네페리르카레의 사망 시점에는 기초 공사만 되어 있었고, 나중에 니우세르레가 미완성 제방길을 자신의 피라미드로 돌렸다.

네페리르카레의 장제전은 그의 사망 당시 완성되지 않았으나, 그의 아들 네페레프레와 니우세르레 이니가 조악한 흙벽돌과 목재를 사용하여 완성시켰다. 1893년 도굴꾼들에 의해, 그리고 1903년 보르하르트(Borchardt)에 의해 발견된 아부시르 파피루스(Abusir papyri)는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1970년대 중반에도 프라하 대학 이집트학 연구소의 발굴에서 추가적인 파피루스가 발견되었다.

이 파피루스들은 네페리르카레와 그의 후계자 네페레프레가 피라미드 단지를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한 후, 니우세르레가 제방길을 자신의 피라미드로 돌리면서 네페리르카레와 네페레프레의 장제전이 아부시르 고원에 고립되었기 때문에 현재까지 남아있었다. 다른 사원들의 기록들은 사후레나 니우세르레의 피라미드 근처의 피라미드 마을에 보관되었지만, 현재는 지하수의 영향으로 사라졌다.

아부시르 파피루스에는 네페리르카레의 장제전에 관한 세부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중앙 예배당에는 파라오의 다섯 개의 조각상이 있었으며, 중앙에 있는 조각상은 오시리스로서의 왕을, 첫 번째와 마지막 조각상은 각각 상하 이집트의 파라오로서의 파라오를 나타냈다. 사원에는 많은 돌 그릇들이 보관된 저장실도 있었다. 또한, 장제전에는 네 개의 태양의 배가 있었고, 그 중 두 개는 피라미드의 북쪽과 남쪽에 매장되었으며, 하나는 베르너(Verner)에 의해 발굴되었다.

이집트 말기 왕조 시기 때 네페리르카레의 장제전은 다른 사람들의 묘지로 사용되었다. 보르하르트는 아람어로 "타파크눔(Tapakhnum)의 아들 네스네우(Nesneu)의 것"이라고 적힌 황색 방해석으로 만든 묘비를 발견했다. 또 다른 아람어 비문은 석회암 벽돌에서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세와(Sewa)의 아들 만누키나안(Mannukinaan)"이라고 적혀 있다.

네페리르카레는 태양신 를 위한 사원을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직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이 사원은 "세트이브레"(Setibre)라고 불리며, "라의 심장의 자리"라는 의미를 가진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이 사원은 5왕조가 존재했던 동안 지어진 가장 큰 사원이었으며, 진흙벽돌로 지어졌으나 추후 석재로 완공하려고 계획하였다. 다만 이 계획은 네페리르카레가 사망할 때까지 완성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사원이 빠르게 폐허가 되어 고고학자들이 찾기 어렵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집트학자 라이너 슈타델만(Rainer Stadelmann)은 세티브레가 사후레 우세르카프의 태양 사원과 동일한 건물일 가능성을 제기했으나, 2018년 팔레르모 석의 뒷면 분석을 통해 이 가설이 반박되었다.

또한 고대 기록에서 세트이브레에 대한 언급이 가장 많아 그 구조에 대한 일부 정보가 알려져 있다. 사원에는 큰 중앙의 오벨리스크, 제단, 저장실, 두 개의 태양의 배를 보관하는 봉인된 범선의 방, 그리고 "세드 축제를 위한 회관"이 있었다. 세트이브레에서는 "라의 밤"이라는 이름의 축제가 열렸다고 하며, 이는 태양신 라가 밤에 하는 여행과 재생 및 부활의 아이디어와 관련된 축제였다.

이 사원은 매일 파라오의 장제전으로 음식 제물을 분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는 세트이브레가 네페리르카레의 피라미드와 인접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 과정은 태양신 라와 죽은 파라오에 대한 제물을 강조하며, 파라오가 라에게 의존적인 위치에 있음을 나타낸다.

이집트학자 베르너 카이저(Werner Kaiser)는 네페리르카레가 우세르카프의 태양 사원 네켄레(Nekhenre)를 그의 재위 5번째 소 집계 시점에 완성했다고 제안했다. 이 의견은 오그든 고엘렛(Ogden Goelet), 마크 레너(Mark Lehner), 허버트 리케(Herbert Ricke)와 같은 이집트학자 및 고고학자들도 동의했다. 이 가설에 따르면, 네페리르카레는 네켄레에 석회암과 붉은 화강암으로 만든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건설했을 것이다.

그러나 베르너(Verner)와 이집트학자 폴 포제너-크리에거(Paule Posener-Kriéger)는 이 가설에 두 가지 어려움이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로는 이는 우세르카프 사원의 완공과 재건축 사이에 약 25년의 긴 간격이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네페리르카레의 피라미드와 태양 사원이 그의 사망 시점에 미완성 상태였다는 점에서, 왜 파라오가 자신의 건축물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세르카프의 기념물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는지 의문이 든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베르너는 사후레가 네켄레를 완성했을 가능성을 제안했다.

7. 사후

5왕조의 다른 파라오들처럼, 네페리르카레는 사후 장례 의식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장례 의식을 섬기는 사제와 여사제들의 원통형 인장이 그의 존재를 증명하며, 예를 들어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있는 검은 스테아타이트 인장에는 " 하토르의 신자이자 신들의 사랑을 받는 선한 신 네페리르카레의 여사제"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일부 관리들은 여러 왕과 그들의 태양 신전에서 역할을 수행했다. 네페리르카레의 장제 의식을 위한 제물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설립된 전용 농장에서 제공되었다. 알려진 농장으로는 "카카이의 농장", "카카이의 힘이 강하다", "카카이의 농장", "네크벳이 카카이의 생명을 원한다", "네페리르카레는 엔네아드의 사랑을 받는다", "네페리르카레의 영혼의 저택" 등이 있다.

네페리르카레의 장례 의식이 고왕국 이후에도 지속된 흔적은 드물다. 기자의 세켐호테프(Sekhemhotep) 소유의 두 개의 조각상 중 하나는 "상하 이집트의 왕, 진실된 목소리의 네페리르카레의 신전"이라는 고대 이집트에서 흔히 쓰이는 제물을 바칠 때 쓰이던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조각상들은 중왕국 초기 12왕조에 속하며, 당시 아부시르 주변에서 네페리르카레의 장례 의식이 매우 제한된 형태로 여전히 존재했거나 부활했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고고학적 증거이다.


[1] "라의 영혼은 아름답다." 라는 뜻이며, 뒤의 카카이는 출생 이름이다, [2] 의 심장의 장소라는 뜻 [3] 출생명이라고도 한다. [4] 니콜라스 그리말, 윌리엄 C. 헤이즈, 하트비히 알텐뮐러, 에이단 도드슨, 다이안 힐튼 등 [5] chief lector-priest. 신전에서 행해지는 의식에서 주문과 찬송가를 암송하는 역할을 하였다. [6] 카카레, 호렘사프, 라엠사프, 네반크레 [7] 고대 이집트 파라오들의 조상을 뜻한다 [8] 시스트럼이라고 하는 악기의 신. 이히라는 이름도 음악을 들을 때 여신 하토르가 노래를 듣다가 쓴 추임새에서 나왔다. [9] 네슈트 비티 [10] 사라 [11] 즉위명 [12] 출생명 [13] 장례 사원이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장제전은 하트셉수트의 장제전이 있다. [14] 깨진 도자기 혹은 꽃병 조각 [15] 석고 또는 방해석을 실용적으로 사용할 때 부르는 용어 [16] 지금의 기준으로는 상당히 치욕을 주는 행위이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파라오가 살아있는 신으로 여겨져 엄청난 영예였다. [계단식] [계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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