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21:59:14

프톨레마이오스 4세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DB76B 0%, #DECD87 20%, #DECD87 80%, #BDB76B);"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A0522D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하이집트 <colbgcolor=#fff,#1f2023> 헤주호르 니호르 흐세큐 카유 티우 테시 네헵 와즈너 하트호르 니네이스 | 메크 더블팔콘 워시
상이집트 | 핑거 스네일 피시 엘리펀트 스톡 전갈왕 1세 크로커다일 아이리 호르 전갈왕 2세 나르메르 메네스
제1왕조 나르메르 메네스 호르아하 제르 제트 메르네이트 아네지브 세메르케트 카아 스네페르카 호루스 바
제2왕조 헤텝세켐위 네브라 니네체르 누브네페르 호루스 사 웨네그 와제네스 세네지 세트 페리브센 세케리브 페렌마아트 네페르카레 1세 네페르카소카르 후제파 카세켐위
제3왕조 조세르 세켐케트 사나크테 네브카 카바 세제스 카하제트 후니
제4왕조 스네프루 쿠푸 제데프레 카프레 비케리스 멘카우레 솁세스카프 탐프티스
제5왕조 우세르카프 사후레 네페리르카레 카카이 네페레프레 솁세스카레 니우세르레 멩카우호르 제드카레 우나스
제6왕조 테티 우세르카레 페피 1세 메렌레 1세 페피 2세 메렌레 2세 니토크리스 네체르카레 네페르카 네퍼
제7왕조 멩카레 네페르카레 2세 네페르카레 3세 제드카레 셰마이 네페르카레 4세 메렌호르 네페르카민 니카레 네페르카레 5세 네페르카호르
제8왕조 네페르카레 6세 네페르카민 아누 카카레 이비 네페르카우레 네페르카우호르 네페리르카레 와지카레 쿠이케르 쿠이 이체누
제9왕조 케티 1세 네페르카레 7세 네브카우레 케티 세투트 임호텝
제10왕조 메리하토르 네페르카레 8세 와카레 케티 메리카레
제11왕조 멘투호테프 1세 인테프 1세 인테프 2세 인테프 3세 멘투호테프 2세 멘투호테프 3세 멘투호테프 4세
누비아 왕조 세게르세니 카카레 이니 이이브켄트레
제12왕조 아메넴헤트 1세 세누스레트 1세 아메넴헤트 2세 세누스레트 2세 세누스레트 3세 아메넴헤트 3세 아메넴헤트 4세 소베크네페루
제13왕조 소베크호테프 1세 손베프 네리카레 세켐카레 아메니 케마우 호테피브레 이푸니 아메넴헤트 6세 세멘카레 네브누니 세헤테피브레 세와지카레 네제미브레 소베크호테프 2세 렌세네브 호르 세켐레쿠타위 카바우 제드케페레우 세브카이 세제파카레 웨가프 켄제르 이미레메샤우 세헤테프카레 인테프 세트 메리브레 소베크호테프 3세 네페르호테프 1세 시하토르 소베크호테프 4세 메르호테프레 소베크호테프 카호테프레 소베크호테프 와히브레 이비아우 메르네페르레 아이 이니 1세 상켄레 세와지투 메르세켐레 이네드 세와지카레 호리 소베크호테프 7세 이니 2세 세와헨레 세네브미우 메르케페레 메르카레 세와자레 멘투호테프 세헤켄레 산크프타히
제14왕조 야크빔 세카엔레 야아무 누부세르레 카레흐 아아호테프레 셰시 네헤시 카케레우레 네베파우레 세헤브레 메르제파레 세와지카레 3세 네브제파레 웨벤레 아위브레 2세 헤리브레 네브센레 셰케페렌레 제드케레우레 산키브레 2세 카케무레 네페리브레 카카레 아카레 아나티 제드카레 베브눔 아페피 누야 와자드 셰네흐 셴셰크 카무레 야카레브 야쿠브-하르
제15왕조 샤렉 셈켐 아페라나트 살리티스 사키르-하르 키얀 야나시 아페피 카무디
제16왕조 제후티 소베크호테프 8세 네페르호테프 3세 멘투호테피 네비리라우 1세 네비리라우 2세 세멘레 베비앙크 세켐레 셰드와스트 데두모세 1세 데두모세 2세 몬투엠사프 메란크흐레 멘투호테프 세누스레트 4세 페피 3세
아비도스 왕조 세네브카이 웨프와웨템사프 판트제니 스나아이브
제17왕조 라호테프 네브마아트레 소베켐사프 1세 소베켐사프 2세 인테프 5세 인테프 6세 인테프 7세 세나크텐레 아모세 세케넨레 타오 카모세
제18왕조 아흐모세 1세 아멘호테프 1세 투트모세 1세 투트모세 2세 하트셉수트 투트모세 3세 아멘호테프 2세 투트모세 4세 아멘호테프 3세 아케나톤 스멘크카레 네페르티티 투탕카멘 아이 호렘헤브
제19왕조 람세스 1세 세티 1세 람세스 2세 메르넵타 아멘메세스 세티 2세 십타 투스레트
제20왕조 세트나크테 람세스 3세 람세스 4세 람세스 5세 람세스 6세 람세스 7세 람세스 8세 람세스 9세 람세스 10세 람세스 11세
제21왕조 스멘데스 1세 아메넴니수 프수센네스 1세 아메네모페 대 오소르콘 시아문 프수센네스 2세
제22왕조 셰숑크 1세 오소르콘 1세 셰숑크 2세 타켈로트 1세 오소르콘 2세 셰숑크 3세 셰숑크 4세 파미 셰숑크 5세 오소르콘 4세
제23왕조 하르시에세 A 타켈로트 2세 페디바스테트 1세 셰숑크 6세 오소르콘 3세 타켈로트 3세 루다멘 이니
제24왕조 테프나크트 바켄레네프
제25왕조 피이 셰비쿠 샤바카 타하르카 타누타멘
제26왕조 네코 1세 프삼티크 1세 네코 2세 프삼티크 2세 와히브레 아흐모세 2세 프삼티크 3세
제27왕조
( 아케메네스 왕조)
캄비세스 2세 바르디야 다리우스 1세 크세르크세스 1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크세르크세스 2세 소그디아누스 다리우스 2세
제28왕조 아미르타이오스
제29왕조 네파루드 1세 하코르 프삼무테스 네파루드 2세
제30왕조 넥타네보 1세 테오스 넥타네보 2세
제31왕조
( 아케메네스 왕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아르세스 카바쉬 | 다리우스 3세
아르게아스 왕조 알렉산드로스 3세 필리포스 3세 알렉산드로스 4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제32 왕조)
프톨레마이오스 1세 프톨레마이오스 2세 · 아르시노에 2세 프톨레마이오스 3세 · 베레니케 2세 프톨레마이오스 4세 · 아르시노에 3세 프톨레마이오스 5세 · 클레오파트라 1세 프톨레마이오스 6세 · 클레오파트라 1세 · 클레오파트라 2세 · 프톨레마이오스 8세 프톨레마이오스 8세 프톨레마이오스 6세 (복위) · 클레오파트라 2세 (복위) · 프톨레마이오스 7세 프톨레마이오스 8세 · 클레오파트라 2세 · 클레오파트라 3세 클레오파트라 2세 프톨레마이오스 8세 (복위) · 클레오파트라 2세 · 클레오파트라 3세 (복위) 프톨레마이오스 9세 · 클레오파트라 3세 · 클레오파트라 4세 프톨레마이오스 10세 · 클레오파트라 3세 · 베레니케 3세 프톨레마이오스 9세 (복위) 베레니케 3세 · 프톨레마이오스 11세 프톨레마이오스 12세 · 클레오파트라 5세 베레니케 4세 · 클레오파트라 6세 프톨레마이오스 12세 (복위) 프톨레마이오스 13세 · 클레오파트라 7세 · 아르시노에 4세 프톨레마이오스 14세 · 클레오파트라 7세 프톨레마이오스 15세 · 클레오파트라 7세
세소스트리스 · 아이깁투스 · 사산 · 정통 칼리파
우마이야 · 아바스 · 파티마 · 아이유브
맘루크 · 오스만 · 무함마드 알리 · 대통령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제4대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4세
Ptolemy IV Philopator
파일:프톨레마이오스 4세.jpg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프톨레마이오스 4세
Πτολεμαῖος | Ptolemy
출생 기원전 244년 5월/6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사망 기원전 204년 (향년 40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재위 기간 이집트 파라오
기원전 221년 ~ 기원전 204년
(약 17년)
전임자 프톨레마이오스 3세
후임자 프톨레마이오스 5세
부모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3세
어머니: 베레니케 2세
배우자 아르시노에 3세
자녀 프톨레마이오스 5세
종교 이집트 다신교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4대 파라오. 라피아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으나, 정치를 소시비오스와 아가토클레스에게 위임하고 궁정 의식에만 몰두해 왕조의 쇠퇴를 초래하였다.

2. 생애

기원전 244년 5월 또는 6월 프톨레마이오스 3세 베레니케 2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누나 아르시노에 3세, 남동생 리시마코스, 알렉산드로스, 마가스를 두었다. 기원전 222년 11월 또는 12월,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사망한 뒤 파라오에 즉위했다. 당시 22세의 성인이었으나 정부 아가토클레아에 푹 빠져 있을 뿐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아가토클레아의 형제 아가토클레스, 프톨레마이오스 3세 시절부터 활약한 장군 소시비오스에게 모든 걸 위임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소시비오스는 기원전 221년 초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베레니케 2세를 독살했고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삼촌 리시마코스를 죽였으며, 남동생 3명 역시 숙청되었다고 한다. 특히 베레니케 2세가 파라오로 삼으려 했다는 의심을 받은 마가스는 화형에 처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이 일에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딱히 제지했다는 기록이 없는 걸 볼 때 방관 내지 방조했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누나 아르시노에 3세는 기원전 220년 프톨레마이오스 4세와 결혼하여 공동 파라오가 되었다.

기원전 221년, 셀레우코스 왕조 안티오코스 3세가 제3차 시리아 전쟁 때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자 코엘레-시리아의 프톨레마이스를 침공했다. 하지만 총독 테오도토스의 강력한 저항으로 고전하다가 메디아의 사트라프 몰론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대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219년 봄 모든 반란을 제압한 그는 재차 공세를 개시했다. 당시 소시비오스에게 숙청될 위기에 몰려 있었던 테오도토스는 셀레우코스군에 귀순하였고, 코엘레-시리아와 프톨레마이스 함대 상당수를 넘겼다. 안티오코스 3세는 안티오키아의 항구도시 셀레우키아 피에리아를 공략하고 뒤이어 티레우스와 프톨레마이스를 공략한 뒤 시리아 해안 도시들을 잇따라 공격했다. 그러나 시돈과 도라에서 오랜 공성전을 치러야 했고, 공세는 지지부진해졌다. 이때 소시비오스가 휴전을 제의하자, 안티오코스는 4개월간 휴전을 맺기로 하였다.

한편, 알렉산드리아에서 스파르타의 전 국왕 클레오메네스 3세가 3,000명의 용병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왕위를 되찾게 해주겠다는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약속을 믿고 이집트에 왔으나,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곧 죽었고 뒤를 이은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그에게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급기야 소시비오스는 그를 경계하여 가택 연금했다. 기원전 219년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카노포스에 떠나 있는 사이, 클레오메네스는 탈출한 뒤 소시비오스에 대항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의 호응을 받지 못했고 요새 공략도 실패했다. 이후 토벌대가 압박해오자, 추종자들과 함께 자살했다.

기원전 218년 초, 안티오코스 3세는 다시 공세를 개시해 베리투스에 주둔한 적군을 섬멸하고 팔레스타인, 페니키아를 공략했다. 그러나 다마스코스, 시돈 공략엔 실패했다. 소시비오스는 이집트 병사 3만 명을 모집하고 용병대를 최대한 긁어모은 뒤 파라오를 설득해 군대를 직접 인솔하여 적을 상대하게 하였다. 기원전 217년 여름,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아르시노에 3세와 함께 8만 대군을 이끌고 이집트 국경 바로 너머에 있는 팔레스타인 라피아에서 안티오코스 3세의 셀레우코스군 7만 명과 격돌했다.( 라피아 전투) 코끼리 간의 서전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인도 코끼리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아프리카 코끼리에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셀레우코스군이 맹공을 가하여 대열이 무너지는 듯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의외로 두려운 기색 없이 이집트 장병들 뒤에 서서 격려하자, 이집트 장병들이 용기를 내어 마케도니아 정예 보병대를 상대로 대단히 선전했다. 여기에 안티오코스 3세가 패주하는 좌익을 무리하게 추격하다가 대열을 완전히 이탈하는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고, 왕이 부재한 상황에서 고전하던 셀레우코스군의 팔랑크스가 무너지자 다른 부대도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뒤늦게 복귀하여 전열을 재정비하려 했지만 실패하자 전장을 이탈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뒤,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코엘레-시리아에 수개월간 머무르면서 통제력을 회복하는 한편, 소시비오스를 안티오코스 3세에게 보내 협상하도록 하였다. 안티오코스 3세는 군대가 무너진 상황에서 전쟁을 이어가는 건 무익하다고 판단하고, 막대한 양의 금을 헌납하고 셀레우키아 피에리아를 제외한 모든 점령지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기원전 217년 10월 12일 이집트로 돌아온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멤피스에서 '라피아 칙령'을 발표하여 승리를 선언했다. 하지만 고대 역사가들은 전쟁을 더 이어갔으면 셀레우키아 피에리아를 탈환하고 시리아 전역을 확고히 장악할 수 있었는데 이집트로 얼른 돌아가서 사치를 즐기고 싶은 생각에 그만뒀다며 파라오를 비난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라피아 전투 7년 후 이집트가 은화를 표준 통화로 사용하는 걸 완전히 포기한 걸 볼 때, 은 부족 현상이 심각해져서 용병을 추가로 고용하기 어려워졌기에 전쟁을 더 이어갈 여력이 안 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이후 마케도니아와 아이톨리아 동맹이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평화 협상을 할 때 중재 역할을 하였으며, 그리스 도시들에게 많은 재정 지원을 해 환심을 사고자 하였고, 제2차 포에니 전쟁이 한창일 때 로마 공화국 고대 카르타고 중 어느쪽도 손잡지 않고 중립을 유지했다. 한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덤과 프톨레마이오스 파라오들의 무덤을 허물고, 알렉산드리아의 궁전 구역 내에 알렉산드로스와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시신을 함께 수용한 새로운 피라미드 건축물을 축성했다. 동시에 왕조의 창시자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왕비 베레니케 1세의 숭배를 알렉산드리아의 사제가 감독하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숭배에 포함시켰다. 기원전 211년 어머니 베레니케 2세를 위한 또다른 숭배 의식을 벌이고자 알렉산드리아 해안가에 베레니케 신전을 세웠다.
파일:271531436_5148898618478017_1425366506829475448_n.jpg
현대에 추정한 '테사라콘테레스'(40단선)
그는 예술을 무척 사랑했다. <아도니스>라는 제목의 비극을 직접 쓰고 주역을 맡았으며, 호메로스를 기리는 성지인 호메리온을 세웠는데, 그 안에는 호메로스의 출생지라고 추정되는 도시들의 의인화된 동물들에게 둘러싸인 호메로스의 동상이 있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와 보이오티아의 뮤즈 계곡에서 뮤즈 축제를 위한 자금을 지원했다. 한편, 테사라콘테레스(tessarakonteres)라는 이름의 거대한 배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배의 길이는 128m였고 4,000명의 노잡이가 필요했다고 한다. 파라오는 이 배를 타고 나일강을 유람하면서 호화스러운 연회를 자주 벌였다고 한다. 뱃머리와 뱃꼬리가 각각 2개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 배는 쌍동선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07년, 이집트 토착민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이 일어난 원인은 분명하지 않으나, 현대 학자들은 라피아 전투에서 대활약한 토착민들이 자신들에게 참정권을 달라고 요구했으나 무시당하자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205년 10월 또는 11월, 반란군은 테베를 점령한 뒤 호르베네페르(Horwennefer)라는 인물을 파라오로 선출했다. 호르베네페르는 이후 20년간 남부 이집트에서 통치를 행사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대항했다. 누비아는 이집트가 양분된 틈을 타 지난날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침략으로 빼앗겼던 도데카스코에누스(Dodecaschoenus) 일대를 탈환하고 그곳에 지어진 많은 사원의 비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이름을 지우고 자신들의 왕 아르카마니의 이름을 새겼다.

기원전 204년 7월 또는 8월,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붕어했다. 안티오키아의 요한에 따르면, 그는 궁전에서 화재가 일어난 지 얼마 안가서 숨을 거뒀다고 한다. 공동 파라오 아르시노에 3세 역시 이때 죽었다.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죽기 직전에 정부 아가토클레아의 권유에 따라 그녀와 이혼한 뒤 곧 죽였다고 한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그녀는 소시비오스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죽음은 며칠간 비밀에 붙여졌다가 6살된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공식적으로 소시비오스와 아가토클레아의 형제 아가토클레스를 섭정으로 하여 파라오로 즉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