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제21왕조 제3대 파라오
프수센네스 1세 Psusennes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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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수센네스 1세의 황금 마스크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프수센네스 1세(Psusennes I) | |
출생 | 미상 | |
사망 | 기원전 1001년 | |
재위 기간 |
기원전 1047년 ~ 기원전 1001년 (약 4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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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자 | 아메넴니수 | |
후임자 | 아메네모페 | |
부모 |
아버지 : 피네젬 1세[1] 어머니 : 헤누타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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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무트노지메트, 위아이 | |
자녀 | 아메네모페 | |
무덤 | 타니스 왕실묘지-3 (NRT-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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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 제3중간기 제21왕조의 제3대 파라오. 재구한 고대 이집트어 이름은 파세바카엔누트(Pasebakhaenniet, 도시에서 뜨는 별이라는 뜻으로 상이집트의 중심지 테베를 의미한다)이며 프수센네스는 그리스어 표기이다. 46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통치했지만 특기할만 업적이 없으며, 그의 재위기간 동안 이집트는 쇠락했다.프수센네스의 은제 관 |
한가지 특이한 점으로 그의 무덤은 파라오들 중 유일하게 무덤이 도굴당하지 않았다.[2] 무덤 내부에서 발견된 그의 관이 순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은의 파라오라고 불리기도 한다. 당시 고대 이집트에서는 은을 저멀리 시나이 반도나 외부에서 수입해와야 했기에 은의 가치가 굉장히 높았다. 따라서 비싼 은으로 관을 만들 여력이 있었다는 것은 프수센네스 1세의 왕권이 다른 혼란기의 파라오들에 비해서 안정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통치
한때 고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황금기를 이끌었던 이집트 신왕국은 람세스 2세 사후 점차 쇠락해갔고, 제20왕조 들어서는 이상기후로 발생한 기근, 사회 불안정, 리비아인들과 누비아인들의 침입,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 등 여러 문제가 연이어 닥쳤다. 이로 인해 파라오의 권위와 권력은 날이 갈수록 줄어든 반면, 상이집트의 테베를 중심으로 한 아문 대신관의 권력은 반대급부로 강해졌다. 람세스 4세 재위 초에 아문 대신관 자리에 오른 람세스낙트는 람세스 9세 재위 초까지 아문 대신관을 맡으며 재정감사권과 징수권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유력 귀족 가문들과 혼인하여 그 권위를 굳혔다. 그 결과 신왕국의 마지막 파라오 람세스 11세 시기에는 파라오가 거하던 하이집트마저도 아문 대신관의 아들로 추정되는, 제21왕조의 개창자이자 초대 파라오 자리에 오른 스멘데스의 손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람세스 11세가 30년간의 재위기를 마치고 사망하자 그의 장례를 집전한 스멘데스가 파라오에 즉위하니 제21왕조와 제3중간기의 시작이었다.하지만 스멘데스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은 람세스 11세 생전에 그의 영역이었던 하이집트에 한정되었으며, 중부와 상이집트는 테베의 아문 대신관이 실질적으로 자치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집트의 파라오와 상이집트의 테베 아문 대신관은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3]였기 때문에 국가 분열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스멘데스 1세가 죽자 아메넴니수가 뒤를 이어 잠깐 동안 재위했고, 다시 왕위는 프수센네스 1세에게 넘어갔다. 프수센네스 1세는 테베의 아문 대신관이었던 피네젬 1세와 람세스 11세의 친딸인 헤누타위 사이의 아들로, 46년간 재위했으나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나마 그의 재위기에 타니스 주변에 거대한 성벽을 둘러 요새화시키면서 이집트의 수도가 완전히 멤피스에서 타니스로 옮겨졌으며 테베의 카르나크 신전을 모방해 타니스에 아문 신전을 세우고 타니스의 아문 대신관을 맡았다는 것 정도다. 프수센네스 1세의 아버지가 테베 아문 대신관인 피네젬 1세였고 그의 무덤에 묻힌 여러 부장품을 당시 아문 대신관이었던 스멘데스 2세(피네젬 1세의 아들인 멘케페레의 아들 중 한 명으로 프수센네스 1세에겐 조카가 된다)가 기부했다는 기록이 있어 상이집트 지역에서도 권위를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3. 무덤
자세한 내용은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 문서 참고하십시오.황금 마스크 |
이렇다할 업적을 남기지 못한 프수센네스 1세가 그나마 알려진 이유는 파라오들 중 유일하게 단 한번도 도굴당하지 않은 무덤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슷하게 무덤의 발견으로 유명해진 투탕카멘과 달리 프수센네스 1세는 거의 아는 사람이 없다.
하필 무덤이 최초로 발견된 시기가 1940년 2월이었는데, 제2차 세계 대전발발 직전이라 대중의 관심이 그 쪽으로 쏠려있었던데다가, 무덤의 위치가 나일강 삼각주의 타니스여서 끊임없이 물이 무덤에 들이찼다가 빠지기를 반복하면서 무덤의 벽화나 썩기 쉬운 재질인 목재로 된 유물들이 다 소실되었다. 여기에 하도 무덤의 환경이 좋지 않아서 전실에 안치되었던 시아문과 프수센네스 2세의 미라는 관까지 완전히 소실되어 샤브티만이 이곳으로 이장했다는 증거로 남았고, 본실에 안치된 프수센네스 1세나 아메네모페의 미라, 은제 관을 썼던 셰숑크 2세는 뼈와 부장품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1940년에 카이로 대학교의 당시 해부학장인 더글라스 데리 박사가 미라를 검시했는데, 치아가 심하게 마모되어 있고 충치가 많았으며 입천장에 구멍을 남긴 종양이 있었고, 관절염을 심하게 앓고 있어서 죽을 당시 노년이었으며 스스로 거동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