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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제2대 국방장관
게오르기 주코프 Георгий Жуков | Georgy Zhukov |
|||
본명 |
게오르기 콘스탄티노비치 주코프 Георг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Жуков Georgy Konstantinovich Zhukov |
||
출생 | 1896년 12월 1일 | ||
러시아 제국
칼루가현 말로야로슬라베츠구 스트렐콥카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칼루가주 주코프군 스트렐콥카) |
|||
사망 | 1974년 6월 18일 (향년 77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묘소 | 크렘린 벽 묘지 | ||
재임기간 | 제10대 노농적군 총참모장 | ||
1941년 2월 ~ 1941년 7월 29일 | |||
초대 지상군 총사령관 | |||
1946년 3월 ~ 1946년 6월 9일 | |||
제2대 국방장관 | |||
1955년 2월 9일 ~ 1957년 10월 26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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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부모 |
아버지 콘스탄틴 아르테미예비치 주코프 어머니 우스티냐 아르테미예브나 주코바 |
|
배우자 |
알렉산드라 디브나 주이코바 (1900-1967) 갈리나 알렉산드로브나 세묘노바 (1926-1973) |
||
자녀 | 딸 에라, 마가리타, 엘라, 마리아 | ||
학력 | 기병 지휘관 학교 (졸업)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무신론 | ||
신장 | 164cm | ||
소속 정당 |
[[소련 공산당|]] |
||
복무 | 러시아 제국 육군 | ||
1915년 ~ 1917년 | |||
노농적군 | |||
1917년 ~ 1946년 | |||
소비에트 연방 지상군 | |||
1946년 ~ 1957년 | |||
최종 계급 | 원수 (소비에트 연방 지상군) |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소련-일본 국경분쟁 제2차 세계 대전 ( 독소전쟁) 1956년 헝가리 혁명 |
||
주요 서훈 |
소비에트 연방 영웅 (4회) 10월 혁명 훈장 레닌훈장 (6회) 적기훈장 (3회) 전승훈장 (2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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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소전쟁에서 맹활약한 소련군의 육군 장성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 독소전쟁에 참전한 소련군 장성 중에서 가장 빛나는 공훈을 세우고 소련의 전쟁 승리에 크게 기여한 명장이다. 소련군 장성 중에서 가장 널리 이름을 알린 사람이기도 하다.2. 생애
2.1. 출생과 성장
1914년 5월경 입대 바로 직전의 모습 | 러시아 제국 육군 부사관 시절의 모습[1] |
1896년 12월 1일,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남서쪽 칼루가 주 스트렐코프스카[2]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회고록에 의하면 자기 마을 주민들의 성은 모두 주코프였다고 하고 있어서 집성촌 출신으로 보인다. 집안 사정으로 초등 교육만 받았다고 하며[3] 학교를 졸업한 후 모피장수였던 외삼촌의 밑으로 들어가 12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렸지만 사촌과 함께 야간학교를 다니며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일한 지 몇 년 뒤 외삼촌에게 독립해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는데 뛰어난 수완으로 꽤 많은 돈을 벌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1915년 그도 병사로 징집되었지만 신병 훈련소에서 성적이 탁월했기 때문에 바로 훈련소 수료 후 자대 배치 대신 추천을 받아 기병 부사관 학교에 들어갔다.
이후 동부전선에 기병으로 배치되었고 용맹을 발휘해 게오르기 십자 훈장 등 적잖은 무공 훈장을 받았다. 10월 혁명이 발발하자 러시아 제국군은 해체되었고 그는 전선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인 티푸스에 걸려 1년 간 요양해야 했고 회복된 후에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붉은 군대에 부사관으로 입대해 러시아 내전에 참전해 여러 전공을 올렸다.
그런데 이 시기에 자신과 똑같은 주코프라는 성을 가진 정치장교가 같은 이름을 가진 그를 주목했는데 근무 성적이나 출신 성분도 우수했기 때문에 사관학교에 시험보라고 권유했다. 그는 가방끈이 짧아서 별 기대 안 하고 봤는데 덜컥 합격하고 나서 1년간 교육을 받은 뒤 장교로 임관했다. 처음에는 소대장으로 일선에서 활약하며 각지의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기병 지휘관 학교 1924/25 기수 졸업 당시 촬영된 사진[4][5] |
1925년에는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이었던 독일과의 군사 협력의 일환으로 독일군 장교들과 교환 연수를 갔는데 이때 소련으로 맞교환 연수를 갔다 온 독일 장교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모든 장교와 참모진들에서 손에 꼽히는 천재였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었다.
27세의 주코프 | 34세의 주코프 |
이렇게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에 점점 승진했고 30대에 기병 여단장까지 승진했다.[6] 그리고 고급 장교 코스[7]에서 공부했다. 이 시기에 소련군 종심작전 이론의 창시자인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38년 군부에 불어닥친 대숙청의 피바람을 무사히 넘긴 후 야전 사령관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여단장~ 사단장급 장교들이 대대적으로 군단장급~군관구 사령관급으로 승진한 그 덕분에 그도 벨로루시 군관구 사령관이 되었다. 이때의 계급이 상장이었다.
주코프는 엄격한 훈련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여러 기동 훈련에서 우수한 지휘력을 보였기 때문에 곧 소련군 수뇌부에서도 주목하게 되었다.
주코프는 출신성분(농민-노동자)이나 과거경력(사병-부사관 출신), 민족(러시아인), 그리고 근무성적(동기생중 진급 최선두권)에서 의심을 받을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대숙청을 남일 구경하듯이 지나쳤다.[8]
2.2. 할힌골 전투에서 화려하게 데뷔하다
42세의 주코프 |
할힌골에서 촬영된 사진[11] |
할힌골 전투의 승리로 명성을 얻은 그는 스탈린의 주목을 받아 1940년에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키예프 군관구는 다가올 독소전쟁에서 최전방 지역인 만큼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이었고[13] 그는 알게 모르게 투하쳅스키의 종심 이론에 기초한 전차 부대, 기계화 부대의 대량 양성을 주장했다. 기동 비슷한 말을 꺼냈다가는 모가지가 가출하기 일쑤였던 당시의 소련군에서 이러한 행동은 매우 대담한 일이었다.
이후 독일의 위협이 다가오자 1940년 12월 당시 국방장관이던 세묜 티모셴코는 주코프를 불러들여 국방차관 겸 키릴 메레츠코프의 후임의 총참모장으로 임명했다. 주코프와 티모셴코는 독일의 침략 징후를 감지하고 방어 태세를 굳건히 하려고 했지만 스탈린은 독일의 의도에 말려들어간다고 생각해서 이를 금지시켰다. 결국 독일군의 공격 징후가 확실해진 1941년 6월 21일에 이르러서야 소련군 최고사령부에서는 전군에 비상 경계령을 발동했지만 그 전에 독일군 특공대가 소련군 전방 부대의 통신선을 절단해 버린 상태라 이 경계령은 전달되지 못했고 이미 독일군은 국경을 넘고 있었으며 일선 부대에는 명령이 전달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독소전쟁 직전인 1941년 2월 전연방공산당 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
2.3. 독소전쟁에서의 대활약
총참모장 시절의 주코프[14] |
2.3.1. 총참모장에서 물러나다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 비행기로 여러 전선을 누비며 전투를 지휘했다. 독일군의 공세는 거침이 없었고, 그는 일시적으로 공간을 내 주더라도 후퇴하여 병력과 장비를 보존하는 게 옳다고 스탈린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마라는 명령만 내렸고 결국 독일군의 대규모 포위전에서 수십 만의 병력을 날려먹었다.8월에는 드미트리 파블로프 대장이 지휘하던 60만의 전선군이 스몰렌스크에서 하인츠 구데리안 휘하 독일군에 포위당한 끝에 섬멸되어 파블로프는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패배의 책임을 떠안고 처형되었다. 9월에는 세묜 부됸니가 지휘하던 비슷한 규모의 전선군이 키예프에서 독일군에 포위당했다.
그는 이때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와 함께 독일군의 공격을 피해 후방에서 병력을 보존할 것을 건의했지만 스탈린은 현재 위치의 고수만을 주장하다가 키예프에서도 또 60만의 병력을 잃었다. 스탈린이 사사건건 자신의 의견을 무시하자 주코프는 "총사령관께서 제 말을 안 들으시겠다면, 저는 참모 역할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고 자진해서 물러나 야전 지휘관으로 가겠다고 청원했다. 스탈린은 이 청원을 받아들였고 후임 총참모장으로는 건강이 나빠 전쟁이 시작된 후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던 보리스 샤포시니코프 원수가 재임명되었다.
2.3.2. 레닌그라드 공방전
참모가 아니라 전선 사령관으로 나서기를 바란 그는 원하던 대로 무능한 보로실로프의 후임으로 레닌그라드 수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당시 레닌그라드는 독일군에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고 그를 태운 수송기도 루프트바페의 Bf109에게 격추될 뻔했는데 다행히 기체만 손상되고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당시 독일군은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려고도 하지 않고 포위만 단단히 해서 시민들을 모두 굶어죽게 하려고 했기 때문에 군인들과 시민들 모두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그는 사령관에 부임하자마자 휘하 장군들을 엄청나게 갈구고 전의를 상실한 장교들을 해임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 레닌그라드의 무너지던 군기를 잡았다. 주코프 휘하에서 연이어 터지는 위기 상황에도 냉철히 대처한 소련군은 1941년 11월에 레닌그라드 북동부의 티흐빈을 탈환하는 소규모 반격전을 성공시켰다. 레닌그라드는 871일이 지난 1944년에야 포위가 풀려 최종 해방되었다.
2.3.3. 모스크바 공방전
1941년 10월에 독일군은 태풍 작전을 실행하여 수도 모스크바를 함락시킬 기세로 진격하고 있었다. 레닌그라드에 있던 그는 스탈린의 지시로 모스크바 방위 사령관에 임명되어 건강이 나쁜 총참모장 샤포시니코프를 대신한 총참모장 대리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중장과 모스크바 방어전을 지휘하게 됐다.당시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 때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 때문에 모스크바를 곧장 공격하지 못했고 키예프로 갔다 레닌그라드로 갔다 하는 등 갈팡질팡하는 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남부집단군이 주코프가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시절 육성한 강력한 소련군 부대 덕분에 진격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중부집단군의 선두 부대였던 하인츠 구데리안과 헤르만 호트 휘하 기갑군을 각각 남부, 북부집단군으로 내려 보낸 탓이 컸다. 구데리안은 이 조치에 강력하게 항의했으나 히틀러는 남 말 안 듣는 걸로는 자기 숙명의 라이벌 뺨치는 수준의 인간이라 그냥 씹혔다. 다만 이로 인해 키예프에서는 50만명에 달하는 소련군이 포위되어 전멸했다.
현대에 들어, 독소전의 연구가 지속됨에 따라, 키예프 공략은 필수 였으며, 키예프에서 헛짓거리 하느라 모스크바를 못 먹은 것이 아니라 키예프를 먹었기 때문에 모스크바 공략을 시도할 수 있었음이 밝혀졌다. 키예프를 두고 모스크바로 닥돌했다면, 50만의 소련군이 독일군의 텅 빈 측면을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것이다. 히틀러 탓하던 당시 나치독일의 장군참모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비웃던, 오스트리아 상병 만도 못한 전략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셈. 덕분에 소련군은 모스크바 방어를 위한 충분한 시간을 얻었다. 주코프는 주어진 시간을 활용해 공병 부대들을 동원하여 모스크바 둘레에 종심이 깊고 튼튼한 거점 방어망들을 건설했고, 시베리아에서 후송된 추위에 단련된 병력들과 우랄 산맥 동쪽에서 보급된 군수 물자를 재빨리 배치시켰다.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크렘린이 망원경으로 보일 정도로 모스크바에 가깝게 접근했지만 결국 소련군의 방어망을 뚫지 못하고 후퇴하면서 독소전쟁이 장기전으로 가게 되는 계기를 만들고 말았다. 방어에 성공한 주코프는 개전 이래 처음으로 모스크바 근교의 클린에서 독일군에게 제한적인 반격을 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모스크바 방어 성공에 지나치게 기고만장해진 스탈린은 1942년 봄이 되자 전 전선에서 독일군을 공격한다는 무리한 작전인 '동계 공세'를 수립할 것을 명령했다. 주코프는 이 어이없는 계획에 당연히 반대했지만 스탈린은 그를 해임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결국 동계 공세의 일환으로 진행된 제1차 르제프 전투,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데미얀스크 포위전 등에서 소련군은 다시 연패했고 독일군은 소련 남부 공략을 더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정신없이 밀리던 전세를 겨우 반반으로 맞춰뒀더니 장대한 자폭으로 나치에게 1년을 거저 줘버린 공세였다.
스탈린은 자신이 야심적으로 짠 여러 작전이 모조리 실패하자 자신의 군사적 무지를 깨닫고 한켠에 물러서서 전쟁 지원에만 머물렀으며, 거듭 자신의 작전에 반대의견을 표명한 주코프를 최고 사령관 대리 겸 총군부사령관에 임명해 소련군의 전체적인 지휘권을 사실상 위임했다.
2.3.4. 스탈린그라드 전투: 천왕성 작전의 성공
1942년에 독일군은 캅카스 지방에 대한 하계 공세, 일명 ' 청색 작전'을 실행하여 캅카스 지방을 휩쓸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길어지고 있을 때 샤포시니코프의 후임으로 총참모장에 임명된 바실렙스키는 독일군의 우익이 약체인 루마니아군으로 방어되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렸고,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한 독일군을 100만의 병력과 수백 대의 전차로 '한 겹 더 포위'해서 그대로 궤멸시키는 '천왕성 작전'을 입안해 주코프에게 달려갔다.주코프는 바실렙스키와 머리를 맞대고 오랜 시간을 상의하면서 여러 부분을 수정하여 스탈린에게 천왕성 작전 실행을 주장했다. 스탈린은 못 미덥다는 얼굴로 작전 실행을 명령했고, 주코프는 이 작전을 독일군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완수하는 데 성공했다. 독일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으나 결국 포위는 성공했고 히틀러의 철수 불가 명령까지 겹쳐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휘하의 독일 제6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완전히 박살나고 말았다. 여기서 수십 만의 병력과 대규모의 장비를 손실한 독일군은 이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했고[15] 그 다음 해인 1943년까지 계속해서 후퇴를 거듭해야 했다. 이 공적으로 주코프는 바실렙스키와 더불어 소련 원수 계급장을 획득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제6군을 구원하기 위해 ' 겨울폭풍 작전'으로 돈 집단군을 이끌고 달려오자 주코프는 '소(小) 토성 작전'을 통해 만슈타인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2.3.5. 화성 작전 논란
미국의 저명한 독소전쟁 역사가인 데이비드 글랜츠는 소련 붕괴 후 발굴한 자료로 1999년 4월 28일 <Zhukov's Greatest Defeat: The Red Army's Epic Disaster in Operation Mars, 1942>이라는 저서를 펴냈다.데이비드 글랜츠에 의하면 모스크바 전투 이후, 15개월에 걸친 르제프 전투 중 1942년 11월 25일부터 3주간 진행된 소련군 동계 대공세는 실패로 끝났는데 이는 주코프가 단독으로 지휘했으며 소련군에 큰 피해를 남긴 전투라는 것이다. 소련은 불패의 명장이라는 칭송을 받는 주코프를 보호하기 위해 이 흑역사를 감추었으며 이 전투에 참가한 여러 장성들이 별도의 회고록을 남기지 않거나 일찍 전사했기 때문에 이 전투는 발굴되기 전까지 묻혀 있었다는 것이 글랜츠의 저서의 요지이다.
화성 작전은 천왕성 작전 실행과 동시에 르체프 돌출부의 독일 중부집단군도 포위 섬멸하려는 대규모 작전으로 천왕성 작전과 비슷한 규모의[16] 병력이 투입됐다. 하지만 1942년 1월부터 르제프 '고기분쇄기(Meatgrinder)' 전역에서 소련군을 끊임없이 패퇴시키고 돌출부 점령 지역을 확대, 완만한 전선을 구축해 가던 9군 사령관 발터 모델은 이미 참호를 2줄로 파 놓아 대비하고 있었고, 특히 서전을 장식한 소련군의 대규모 포격이 오히려 공격자인 소련군의 진격에 심각한 장애물이 될 만큼 지형을 파헤쳐 놓았을 뿐 아니라 가뜩이나 망가트려 놓은 지형에 투입된 전차 부대마저 보병과 뒤엉키게 됐다. 결국 독일 9군은 물량과 인원 면에서 압도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도 예비대의 정확한 투입으로 제파적 공세를 모조리 막아내며 역으로 소련군을 포위, 섬멸했다.[17]
이러한 데이비드 글랜츠의 견해에 의하면 모스크바 방어전 이후 '상승 장군'의 명성을 얻은 주코프로서는 감추고 싶은 역사가 되었고, 스탈린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소련군 승리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싶었기 때문에 주코프를 문책하지 않으면서 소련에서는 현대까지 잊혀진 작전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화성 작전이 소련군의 대패를 안겨 준 전투임은 분명해도 이 전투에 대한 중요성에 대한 관점은 미국의 전사학자인 데이비드 글랜츠가 제기한 일설이다. 글란츠가 그런 설을 제기한 배경은 첫째, 천왕성 작전 및 토성 작전 전반에 걸친 투입 전력과 사상자 및 전력 손실보다 화성 작전이 더 컸다는 점, 둘째, 스탈린이 지속적으로 모스크바에의 위협 문제를 제기해 왔기 때문에 르제프 돌출부가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리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 중 첫째 배경은 애초에 이 지역에 서로 더 많은 병력이 밀집돼 있었고 양쪽 모두 처음부터 주요 위협으로 상정해 왔기 때문에 글랜츠가 제기한 설과 달리 단순 조공으로서 가해진 작전이었다고 해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공산권의 작전 교리에 의하면 상황에 따라서 주공보다 조공에 더 많은 전력을 집중할 수도 있다.
학계의 연구자가 아닌 밀덕들이 범하는 실수 중의 하나는 학계의 정설과 학자의 일설을 구분하지 못하는 점인데 바로 일부 밀덕들이 글랜츠의 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동안 존재조차 몰랐던) 르제프 전투나 화성 작전에 관한 글랜츠의 저서가 한국 밀덕계에서 널리 알려졌다. 심하게 과장해서 주코프를 세묜 티모셴코류의 2류 지휘관으로 평가하는 밀덕들도 있다. 하지만 다시 말하면 르제프 전투나 화성 작전에 관한 설은 글랜츠가 제기한 설이다. 글랜츠가 독소전쟁사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학자이고 그가 처음으로 화성 작전의 명칭을 밝혀내며 문제 제기를 한 것은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하지만 르제프 전투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현재진행형이며 더욱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글랜츠에 반대하는 영미권 재야사학자로는 앤소니 비버[18]가 있는데 그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르제프 전투, 특히 화성 작전이 스탈린그라드보다 중요했는가에 대하여 다양한 의견을 내놓고 있고, 특히 러시아 군사학자들은 대놓고 글랜츠의 의견에 반대했다. 르제프 돌출부의 9군은 1943년 3월, 들소 작전으로 소련군을 화려하게 물먹이고[19] 스몰렌스크 방면으로 퇴각하였고 결과적으로 소련군은 전투에는 줄기차게 패했을 망정 르제프 돌출부를 잘라내고 남부의 독일군을 일소하는 목표는 달성했기 때문이다. 독일은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이끌었지만 60여만의 피해를 보고 수세적인 입장에서 방어전만 펼쳤기에 소련군의 정확한 피해 규모를 파악할 수 없었다. 즉, 겉으로 드러난 내용만으로는 승리한 것이 아니었기에 자신들의 전과를 굳이 알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 소련은 130여 만의 인명 피해를 입었을 만큼 전술적으로 엄청난 패배를 당했고 자력으로 르제프 돌출부를 탈환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 전투가 자랑거리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글랜츠가 가설을 제기하여 열띤 토론이 벌어지게 된 후인 2006년에 <Zhukov's Greatest Defeat>가 러시아에서 번역판으로 출간되면서 기존 영문판과 달리 다량의 군사 문서가 함께 수록되었고 이는 주코프,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이반 코네프의 회고록보다 더욱 신빙성 있는 자료가 되어 주었다.[20]
게다가 전투기록을 은폐하고 외면하다가 겨우 2007년이 되어서야 러시아에서 르제프를 '군사 명예의 도시'로 지정하며 르제프에서 위대한 방어를 펼친 공로를 인정한다는 당국에 르제프 주민들과 전투 생존자, 그 후손들이 크게 반발하게 되었고 전사학자들과 방송인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르제프 전투 관련 다큐멘터리가 꾸준히 방영되면서 러시아에서도 르제프 전투에 대한 반성적인 시각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와 군 관계자들은 영미권 전사학자들의 서고 출입을 제한하고 문서 공개를 금지하는 등 더욱 폐쇄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네이버캐스트의 르제프 전투도 참조.
2.3.6. 쿠르스크 전투
이반 코네프 상장(우)과 지형을 조사 중인 주코프 원수(중) |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성공으로 또 기고만장해진 스탈린은 하르코프를 무리해서 탈환할 것을 명령했지만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기동 방어에 걸려 56개의 사단을 날려버리고 말았다(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참조). 이 하르코프 공세에 대해 주코프는 의외로 제동을 걸지 않았는데,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소련군 내부에 만연해 있던 지나친 낙관주의는 그도 예외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수십만이 갈려나갈 때 수백만을 뽑아내던 게 소련의 위엄이었으니까.
어쨌든 만슈타인의 승리로 쿠르스크 지방이 돌출됐고, 주코프는 바실렙스키와 치밀한 돌출부 방위 계획을 수립해 튼튼한 종심 방어망을 만들어 쿠르스크 돌출부를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마찬가지로 바실렙스키와 함께 입안해 둔 쿠투조프, 류먄체프, 수보로프 작전을 실행해 쿠르스크 축선에서 독일군에 대한 반격에 성공했다.
2.3.7. 우크라이나 탈환
주코프는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계속되는 공세에서 전선군들의 작전을 통합 지휘하고 조율하며 하르코프 탈환과 키예프 탈환, 키로보그라드 공세 등 우크라이나 우안의 독일군 축출 작전들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1943년 11월, 탈환한 키예프에서 연설하는 주코프 |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의 주코프 (앉아있는 인물)[21] |
2.3.8. 바그라티온 작전
우크라이나를 되찾는 대성공을 거둔 주코프는 바실렙스키와 함께 독일 중부집단군을 일거에 섬멸할 바그라티온 작전을 입안해 스탈린의 재가를 받아낸다. 오랜 전투로 단련되고 후방 군수 공업 지대가 피해를 보지 않아 무장까지 갈수록 좋아지는 소련군은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말도 안되게 두들겨 맞던 때와도 비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말 그대로 정예군으로 거듭나고 있었고 이제는 독일군에게 정면 공세를 가해도 무리 없는 수준으로 성장한 상태였다.주코프는 독일 중부집단군의 남익과 북익에서 공세를 가하려는 모습을 보이도록 연출하라고 극비리에 지시했는데 독일군은 결국 이 술책에 넘어가 주요 병력을 전선 남부와 북부로 보내는 중대한 실책을 범했다. 소련군은 이 틈을 타 전선 정면을 맹공했고 독일 중부집단군을 섬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독일군의 이 패배는 일명 '베를린 레이스'로 불리는 독일군의 연이은 패퇴 중에 가장 치명적인 것이었다.
2.3.9. 베를린 공방전
이어 주코프는 바실렙스키와 더불어 발트 3국과 폴란드, 동프로이센 공세를 주도했고 제1벨로루시전선군을 직접 지휘해 마침내 베를린에서 100km도 떨어지지 않은 오데르 강 동안에 도착했다. 주코프의 전선군은 베를린 정면으로 치고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그 앞에서 젤로 고지가 진격을 가로막고 있었다.젤로 고지 전투를 지휘하는 주코프[22] |
하지만 주코프는 이 아수라장 속에서 제1근위전차군을 섣불리 투입했고 보병과 전차가 좁은 길과 진창에서 뒤엉켜 결국 안 입어도 되는 피해만 잔뜩 입게 됐다. 이 소식을 들은 스탈린은 주코프를 힐난했고, 남쪽에서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지휘하던 주코프의 라이벌 이반 코네프에게 "주코프 동지가 베를린을 점령하지 못하면 동지가 점령해도 괜찮겠소."라고 제안했다. 스탈린은 덤으로 작전 초기 코네프와 주코프의 전선군 사이에 할당되었던 전투 지경선을 없애버리기까지 하면서 둘의 경쟁 심리에 불을 붙여 베를린을 빨리 점령하고자 하였다. 주코프는 이에 '질 수 없뜸!!'을 외치며 안 봐도 되는 피해까지 감수하며 물량 공세로 젤로 고지 돌파에 성공했고, 코네프보다 먼저 베를린 라이히스탁으로 진군하는데 성공해 의사당 옥상에 붉은 깃발을 꽂았다.
개선식에서 백마를 탄 주코프와 흑마를 탄 로코솝스키 |
2.4. 전후의 활동
2.4.1. 중앙에서 쫓겨나다
1945년 6월 5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승전 축하 집회에 참가한 연합군 수뇌부[23] |
1945년 7월 12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버나드 로 몽고메리와 대화 중인 모습[24] |
주코프의 이러한 자화자찬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을 위해 독일에 파견된 대숙청 당시 수석 검사였던 안드레이 비신스키의 귀에 들어갔고 비신스키는 이를 스탈린에게 일러바쳤다. 스탈린은 주코프의 자만에 분노해 NKVD의 수장 라브렌티 베리야에게 그의 비리 혐의에 대해 수사하도록 했고 NKVD는 주코프의 아파트를 샅샅히 뒤졌다. 결국 주코프는 베를린에서 온갖 귀금속을 약탈해서 빼돌렸다는 매우 불명예스러운 혐의로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베리야는 스탈린의 총애를 받는 주코프의 혐의를 매우 과장하여 보고했고[25] 공군 사령관 알렉산드르 노비코프를 고문해 주코프가 반역을 꾀했다는 자백을 추가했다. 위기의 순간에서 주코프는 스탈린 앞에서 변명 대신 자아비판을 하고 참회하는 척했다.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명장을 굴라크에 보내는 대신 좌천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1947년 2월 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 자리도 도로 빼앗겼다.
스탈린의 의심과 베리야의 농간 때문에 주코프뿐만 아니라 독소전쟁에 큰 공을 세웠던 공군 원수 노비코프와 해군 원수 니콜라이 쿠즈네초프도 반역 및 근무 불성실 혐의로 기소되었다. 노비코프는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뒤 스탈린 사후 석방되었으며 쿠즈네초프는 감옥은 가지 않았지만 중장으로 강등되었다. 그리고리 쿨리크를 이러한 전후 공신 숙청에 추가하는 사람도 있으나 쿨리크는 독소전쟁에서 기관단총, 지뢰, T-34를 쓸모없다고 여겨 생산에 제동을 거는 등 사고만 저지른 데다 전화로 스탈린을 뒷담하다가 걸렸기 때문에 비록 죄목 자체는 터무니없긴 해도 소련에서는 얄짤없는 사형감이었다. 사실 쿨리크를 제외하면 이러한 전후 군인 숙청에서 처형된 "네임드 인사"는 없다.
2.4.2. 귀환과 국방장관 시절
노년기의 모습 |
후방 군관구 사령관으로 찬밥 신세가 되었던 주코프는 스탈린 사망 직전인 1952년 10월, 전연방공산당 19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복귀하였으며 스탈린 사후인 1953년 3월 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 다시 국방차관으로서 복권되었고 니키타 흐루쇼프, 키릴 모스칼렌코와 힘을 합쳐 베리야를 제거하는 데 한몫 했다. 주코프는 항상 군의 일에 멋대로 간섭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던 베리야와 사이가 좋을 수 없었고, 자신의 좌천이 스탈린의 의도라기보다는 베리야가 중간에서 농간을 부린 것으로 생각하여 베리야 숙청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교차검증이 안 되긴 하지만 흐루쇼프의 회고록에 의하면 베리야를 직접 체포한 인물이 바로 주코프라고 한다.[26] 야사에 의하면 주코프가 직접 베리야의 머리에 권총을 쏴 사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이후 주코프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를 중심으로 한 반(反) 흐루쇼프파 숙청에도 협력해 정치국원 자리까지 획득할 수 있었다. 1955년 국방장관 자리에 오른 주코프는 핵무기의 등장이 소련의 군사학과 작전술, 전략에 큰 변화를 미칠 것을 예견했고 이에 따라 소련 지상군의 구조를 핵전쟁 시대에 걸맞게 개편하기 시작했다.
주코프의 개편 목적은 전군에 더 큰 기동성과 핵전쟁 상황 중의 부대 유지와 생존력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주코프는 편제에 기동성을 부여하기 위해 포병 군단이나 공병 군단 같은 특수 목적 편제를 제외한 모든 군단급 편제들의 해체를 명령했고 야전군을 기존의 3개 군단이 아닌 5~6개 사단으로 구성하게 했다. 기계화군과 기계화 군단은 핵전쟁에서 살아남기에 너무 둔중하고 거추장스러워 핵공격의 목표가 되기 쉽다고 여겨져 해체되었고 대신 이들 부대는 더 유연한 전차군으로 개편되었다. 더불어 주코프는 전군에 핵전쟁 상황에서 생존성을 부여하기 위해 전 소총병의 차량화를 천명했다. 기계화 사단, 소총병 사단, 경(輕) 소총병 사단 등 다양한 보병 사단 편제들은 전부 기동성을 갖춘 차량화 소총병 사단으로 통일되었다. 이렇게 해서 소련군 편제의 모든 보병은 기계화보병 혹은 차량화보병으로 편성되어 알보병이 전무하게 되었다. 독소전쟁 시기 빨치산의 전훈을 참고해 최초의 공식 편제 특수 부대를 창설한 것도 주코프였다.
주코프가 만든 이런 식의 소련군 편제는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1956년 12월에는 이러한 군 편제 개편에 대한 공로로 4번째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이는 소련 역사상 주코프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두 사람만 누린 영예인데 브레즈네프는 별 공적도 없는데 직접 달고 다닌 것이었고 주코프는 굵직한 공적을 인정받아 남이 달아준 것이니 가치는 비교가 안 된다.
2.4.3. 퇴출과 말년
흐루쇼프는 1957년에 핵 만능주의를 주창하며 전략 로켓군을 창설하고 전략 로켓군이 기존의 지상군을 제치고 소련군의 주류가 되도록 만들려고 했는데 경제력이 앞서는 미국과 군비 경쟁을 하다가는 경제 규모가 반밖에 안 되는 소련이[27] 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정작 아이젠하워 때부터 미국이 소련의 자원 동원력을 두려워하여 재래 병력보다 비교적 값싼 핵전력을 강화한 것은 아이러니하다.[28]주코프는 전략 로켓군이 지상군을 대체할 수 없다며 흐루쇼프에게 강경하게 반대했지만, 흐루쇼프는 군비증강은 경제에 부담을 준다며 군비를 축소하는 한편 핵무기 위주의 전력감축을 밀어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7년 6월 주코프는 흐루쇼프를 강력히 지지하여 흐루쇼프가 불가닌을 제치고 소련 장관회의 의장이 되는 것에 큰 힘을 보탰고 흐루쇼프가 대권을 장각하는데 큰 공을 세운 공신이기 때문에 앞날이 탄탄해 보였다.
하지만 노회한 정치인인 흐루쇼프는 소련 인민들이 존경하는 "구국의 영웅" 주코프의 존재를 매우 부담스럽게 여겨 토사구팽에 들어갔다. 특히 미국에서 2차 대전 당시 서방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된 사실은 흐루쇼프에게 타산지석이 되었다. 주코프가 실제 권력투쟁에 나선다면 당연히 소련인민과 군부의 지지를 받아 흐루쇼프를 실각시키고 최고지도자로 등극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주코프는 특유의 다혈질 성격 때문에 군부내에도 따르는 부하 못지 않게 적이 많았고 흐루쇼프는 필리프 골리코프나 이반 세로프와 같은 정보계통의 장성들과 짜고 주코프 제거계획을 뒤로 은밀히 꾸몄다.
그리하여 주코프는 흐루쇼프의 집권을 도운지 겨우 4개월만인 1957년 10월 제거된다. 흐루쇼프는 주코프가 해임 소식을 들으면 자신에 충성하는 부대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킬까 봐 주코프가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시점에서 해임을 발표했는데 주코프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모처로 끌려갔다가 흐루쇼프의 심복인 로디온 말리놉스키 원수가 국방장관직을 인수하고 국방부를 장악한 시점에서 석방되었다. 주코프는 흐루쇼프에게 전화를 걸어서 "동지는 지금 최고의 친구를 잃고 계시는 겁니다."라고 흐루쇼프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흐루쇼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대외발표로는 '모험적인 군사 전략을 지향했다' 등의 이유로 국방장관 해임을 발표했다.
주코프는 강제 예편되어 강요된 은퇴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에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흐루쇼프에게 일선부대가 아닌 사관학교 교수직과 같은 교직이라도 괜찮으니 현역으로 계속 일하고 싶다고 계속 청원을 내지만 거절되어 매일을 낚시로 소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주코프를 정치무대에서 완전히 퇴장시킬 생각은 아니었다. 1960년대가 되자 흐루쇼프는 간부회 회의에서 갑자기 "주코프는 공이 크니까 그를 십자가에 매달 필요는 없다"고 주코프를 띄워주는 발언을 하더니 숙청 직전에는 주코프의 거취에 대해서 논의해봐야 한다는 떡밥을 던졌다. 하지만 그가 뭔가 해보기도 전에 1964년 10월에 실각하면서 주코프는 영영 중앙무대에 돌아올 기회를 잃고 말았다. 이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에 의해 복권되어 1965년, 대조국전쟁 승전 퍼레이드 당시 브레즈네프 바로 옆에서 퍼레이드를 참관하긴 했지만 공직에 복귀하지는 않았고 회고록 집필 등으로 조용히 지냈다.
사실 주코프는 야인이 된 60대 중반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고 심장마비, 뇌졸중 등으로 계속 심각한 병치레를 하였다. 특히 아내가 먼저 떠난 후에는 우울증까지 겪어서 공개석상에 나오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1974년에 사망해 화장되어 붉은 광장의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건강이 매우 악화되자 젊었을 때 잃었던 신앙심을 되찾아 본인은 러시아 정교회식으로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매장되길 바란다는 의사를 여러 번 밝혔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주코프의 장례식 |
모스크바 붉은 광장 국립 역사 박물관 앞의 주코프 동상 |
3. 평가
3.1. 군인으로서의 평가
뛰어난 지도력을 갖춘 사령관으로, 판단력이 냉철했으며 그 어떤 장애물도 주코프의 군사적 목표 달성 의지를 꺾지 못했다.
- 세르게이 시테멘코 대장
- 세르게이 시테멘코 대장
어떤 기준으로 봐도 그에겐 군사적 천재성이 있었다.
- 리처드 오버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 리처드 오버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주코프의 군사적 업적을 놓고 보았을 때 두말할 나위 없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대표적인 명장들 중 하나지만 극소수는 운좋은 범장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가령 주코프가 이기든 지든 독소전쟁의 대규모 전투에서 바그라티온 작전, 베를린 공방전을 빼면 항상 적군보다 수 배의 출혈을 냈던 점이 그러한데 예를 들어 쿠르스크 전투의 결과는 주코프의 승리이긴 하나 독일군이 5만의 병력을 잃은 반면 소련군은 무려 20만에 달하는 병력을 잃어버리는 등의 데이터를 보고 있으면 주코프의 이러한 업적에 대해 쉽게 폄하하게 된다는 요지다. 뿐만 아니라 최근 들어 논란이 되는 화성 작전의 실패와 베를린 공세 초반 젤로 고지 전투에서의 삽질을 들어 일각에서는 주코프가 공세에 서툴렀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의 소련군의 상황을 무시한 데서 기인한 사항이다. 당시 소련군은 교리, 장비, 규모는 세계 정상급이었지만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실지 운용은 상당히 뒤떨어진 형편이었다. 거기다 당시 독일 국방군은 2년 간의 실전 경험을 쌓아 세계 최강 수준의 군대였는데 이런 강군에게 엉망인 소련군이 맞서 싸운다는 것은 아무리 수가 많다고 한들 계란 10판으로 바위를 쳐봤자 끄떡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2차 대전 발발 후에는 비록 독일군과의 전투를 통해 전투력이 상승되고 있던 시기였기는 하지만 아직 전술적 차원, 그리고 각 병사의 전투력 차원에서 독일을 따라잡기에는 힘에 부치는 시기였으며 심지어 대전 말기까지에도 그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간기까지는 소련군도 정신을 차리고 미하일 투하쳅스키 등이 주축이 된 세련되고 강한 육군 보유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스탈린의 대숙청 및 이후 불어닥친 조직 개편 때문에 손발이 안 맞게 되었다. 이렇게 소련의 고급 지휘관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동안 독일군은 대조적으로 베르사유 조약 체계를 폐기하고 전쟁 준비에 온힘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은 독일군에 비해 조직력이나 작전 능력이 뒤쳐지게 되었다.
독소전쟁 초반 소련군의 대참패는 무기의 성능이 아니라 조직력이 매우 약화되었던 최악의 시기의 소련군을 2년 간의 실전으로 작전 능력이 극대화된 최상의 시기의 독일군이 찔렀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러시아군은 소수정예군이라고 부를 만한 전통이 없지만 국가 규모에서 나오는 거대한 병력 동원력은 인정받는 국가였다. 하지만 이는 귀족들이 막대한 징집병을 가혹하게 굴리면서 갈아넣던 지휘치계를 의미했는데 이게 소련 육군으로 재편된 후 귀족들이 사라지고 계급을 삭제한다거나 이런 저런 편제실험을 거치면서 원래부터 그다지 정예군이라고 볼 수 없었던 러시아군의 조직력과 작전수행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러시아 내전을 거치면서 어느정도 군대다운 군대를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스탈린 집권 후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이자 국방장관이던 트로츠키의 영향력 하에 있던 소련 육군의 신생 장교단에 대해서도 가혹한 대숙청을 감행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에 따라 내전 중 형성된 소련 육군 장교단까지 대거 숙청되자 군의 전투력이 참혹한 수준으로까지 추락하였다. 그래서 겨울전쟁 같은 졸전을 펼치게 된 것이다.
반면 다년간의 실전경험을 집중적으로 거치고 원래부터 상호 협조 체계와 조직이 소련군보다 우수했던 독일군은 소련군이 예상치 못한 시점에 바르바로사작전이라는 완벽한 기습을 성공시켰다. 소련군은 지나치게 산개된 탓에 무자비하게 각개격파당했고 뒤늦은 대응도 제대로 하지 못해 초기에 수십 만의 군대가 한순간에 증발한 데다 갑자기 군을 확장하면서 야전의 허리가 되는 하급 장교와 부사관이 모자라는 바람에 바르바로사 작전 시기에는 아예 대졸이면 무조건 장교, 고졸이면 무조건 부사관으로 징집하여 별다른 교육 없이 바로 실전에 투입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 조직이 실전에서 제대로 싸울 리가 없다.[29] 그러나 이런 난감한 상태에 있던 소련군도 실전 경험을 충분히 쌓아본 1943년 정도 되면 어느 정도 정리되어 독일군과 맞먹는 수준의 작전 능력을 보유하게 된다.
때문에 조직력이나 지휘관의 교육 상태가 부족해 작전 능력이 열등한 소련이 믿을 구석은 사실상 수적 우위 이외에는 없었으므로 이러한 우위를 통해서나마 확실히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지휘관이 현실적으로 소련이 바라는 최고의 지휘관이었는데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령관이 엄청난 병력을 낭비만 할 뿐 승리는 하지 못했을 정도로 막장이던 시기에 비록 많은 수의 병력을 희생하긴 하지만 적에게 연전연승을 거뒀던 것이 바로 주코프였던 것이다. 아군을 희생시키고도 지는 사람들 속에서 아군을 희생시키지만 이기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이는 거대한 병력동원력을 자랑하는 소비에트에서 가장 필요한 인재상이었다. 이렇듯 주코프는 비록 단기간 내에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소련군의 한계를 안고서 그 한계 안에서 이룰 수 있는 최대의 업적을 이루고서 대전에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당당히 2차 세계대전 최고의 지휘관 중 하나로 우뚝 서게 되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한편 작전 수립 때는 주코프 자신이 말솜씨가 없고 직선적인 면이 자주 표출되어 스탈린과 충돌할 때 번번히 스탈린의 속을 상하게 해 후일 좌천당하는 계기가 된다. 작전 입안과 실행에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의 영향력이 상당히 컸던 탓에 일각에서는 바실렙스키 없으면 시체 소리까지 하는 사람이 있으나 바실렙스키가 없었던 할힌골 전투나 단독으로 지휘한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도 주코프가 대단한 활약을 한 것을 보면 그냥 주코프가 야전 지휘관으로 훌륭하지 않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명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을 쓴 영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는 "어떤 잣대로 보더라도 주코프에겐 군사적 천재성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냉혹하고 고집이 세며 거칠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이라서 스탈린과도 여러 번 충돌이 있었지만 군사적인 문제에서 스탈린을 설득하는 데는 주코프만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계속 싸우면서 정이 들었는지 실제로 스탈린은 개인적으로 그를 매우 좋아했다고 하며 결국 주코프를 숙청하기는 했지만 이마저도 좌천시키는 정도로 끝냈다. 스탈린이 전쟁 영웅들을 경계하며 주시하던 시점에 주코프가 "스탈린은 2차 대전에서 별로 한 게 없고 전부 내 공이다."라는 식의 치명적인 말실수를 한 것에 비하면 비교적 가벼운 처분이었다.
성격이 오만했고 정치적 야심을 의심받았기 때문에 항상 정치권으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이 점에서는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와 매우 비슷하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주코프가 쿠데타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고 비난했는데 성격을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독소전쟁에서 어떤 전투가 전세의 전환점이 되었냐는 질문에 예상과는 달리 1941년 12월의 모스크바 공방전을 들었다. 대체로 다른 역사가들이나 장군들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나 쿠르스크 전투를 드는 것과 대조된다. 모스크바 전투는 그가 독소전쟁에서 처음으로 지휘한 공세이자 그동안 유럽에서 무적이었던 독일 육군을 소련군이 처음으로 패퇴시킨 전투이기도 했다.
3.2. 인격적 측면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자는 그 누구도 모욕할 자격이 없다. 불행히도 주코프는 그런 생각이 부족한 모양이다.
-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원수
인격적인 평가는 매우 나쁘다. 다른 동맹국의 명장들 중에도
조지 S. 패튼[30]이나
버나드 로 몽고메리처럼 인품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은 있지만 주코프는 이들보다도 인격적으로 훨씬 나쁜 일화가 많다. -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원수
아랫사람에게는 욕을 입에 달고 살았으며 하급자에 대한 구타도 서슴치 않았다.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자기 임무를 다하지 못한 한 대령은 주코프가 날린 주먹에 이가 부러졌다고 한다. 더불어 전술했듯 성격이 오만하고 자만심이 강해서 쓸데없이 적을 많이 만드는 성격이었다. 주코프와 매우 사이가 나빴던 소련군 장성으로는 이반 코네프와 바실리 추이코프가 있으며 국방장관 시절 육군 중심의 군정을 이끌어 해군을 확장하려던 해군 사령관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원수와도 매우 사이가 나빴다. 심지어 자기 신임을 잃은 장교들을 정치적으로 고립시켜 제거한다던가 하기도 했고 자기에게 밉보인 장교를 형벌부대로 보내서 독일군의 총알받이가 되게 한 적도 있었다.
졸렬하게도 사이가 나쁜 부하는 전혀 회고록에 언급하지 않거나 매우 간략히 언급했다. 대표적으로 자신과 사이가 나빴던 부하인 바실리 추이코프를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베를린 공방전에서 단 한 번, 그것도 마지못해 언급했다. 추이코프를 디스하기 위해서였는지 추이코프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겁쟁이로 매도한 전임 제64군 사령관 안톤 로파틴에 대해서는 반대로 매우 칭찬했고, 스탈린그라드 수비가 로파틴의 덕이라고 했다.
레닌그라드 수비사령관을 맡았을 때는 투항자 가족의 투옥을 명령한 스탈린의 220호 명령, 그리고 허가 없는 후퇴자를 처형하라는 227호 명령에 훨씬 앞서서 주코프는 투항자의 가족을 색출해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31] 주코프가 수만 명의 인명 피해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무자비함과 냉혈함을 보여 주는 일화는 상당히 많다. 이것도 서방과는 달리 러시아군이 전통적으로 인명 피해에 둔감했다지만[32] 투항자 가족을 색출해서 처형한다는 발상은 파시즘 국가였던 나치 독일이나 일본 제국에서조차 하지 않았던 행동이다.
이렇듯 승리를 위한 병력의 희생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지로 몰아넣는 등의 행위로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 심지어 '인간 백정' 스탈린조차 그를 냉혹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오만하고 자존심이 너무 강해 베를린 공방전 때는 하마터면 베를린 함락의 주연이 될 뻔한 이반 코네프의 군대를 공격하려 하는 등 지나친 면이 없지도 않다. 주코프와 사이가 안 좋았던 인물들은 뒷담화를 깔 때 주코프라는 성의 어원인 '주크'(жук, 딱정벌레)라는 멸칭으로 불렀다.
4. 여담
-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과 마네쉬나야 광장 사이에 위치한 국립 역사 박물관 앞에 주코프의 기마상이 서 있다.
-
주코프의 회고록 〈추억과 묵상〉은
제2차 세계 대전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그의 회고 중에는 스탈린과의 대화를 못으로 돌을 찍는 것과 같았다고 묘사한 부분이 있다. 이렇게 쓰긴 했지만 주코프는 스탈린의 정치, 경제, 외교적 수완과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전쟁에서 승리한 공을 스탈린에게 적지 않게 돌리고 있다. 스탈린의 쓸데없는 간섭이나 터무니없는 작전 계획 같은 것도 써놓긴 했다. 그에게도 스탈린은
애증의 관계였을 것이다. 주코프는 회고록에서 1930년대 소련은 국방에 투자를 많이 했기 때문에 독일군을 무찌를 수 있었다고 했고, 그런 의미에서 스탈린의
중공업 우선주의를 옹호했다.
소련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는 대숙청도 한 번 언급되는데 짤막하게 군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숙청에서 숙청되었던 미하일 투하쳅스키나 이오나 야키르 같은 붉은 군대의 선구자들에 대해서 매우 높이 평가함으로써 우회적으로 대숙청을 비판하고 있다. 이 회고록 집필에 약간에 흑역사가 있었는데 당시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회고록에 자신이 독소전에 참전하여 영웅적으로 싸우다 부상을 입었다는 내용을 집어넣으라고 압력을 넣은 적이 있었다. 주코프는 반발했지만 압력을 못 이기고 결국 그 부분을 회고록에 넣고 말았다. 결국 이 대목은 소련이 붕괴되고 회고록 10판이 발간됐을 때에 가서야 삭제됐다. 초판이 나왔을 때 워낙 검열과 간섭이 잦아서 "이 책은 내가 쓴 책이 아니야"라고 했다나…….
이 회고록은 출판 당시 소련에서 초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소련 특유의 물자난까지 겹쳐서 20배의 웃돈이 붙어서 거래되었다고 한다. 냉전이 한창이었던 데다 반공을 국시로 삼았던 당시 한국에서도 이 현상이 보도될 정도였다. 1969년 7월 1일자 중앙일보 주코프는 회고록 출판 후 수만통의 팬레터를 독자들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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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장군이 사랑했던 투명한 코카콜라
MBC의 프로그램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주코프가 콜라를 굉장히 좋아했다는 일화가 나왔는데 사실이다. 당시 미군 총사령관이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소개로 한 번 마셔 봤는데 어지간히도 맘에 들었는지 그 뒤로 스탈린 몰래 콜라를 거의 입에 달고 다녔다. 그런데 콜라는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이 적대하는 국가인 자본주의 국가 미국의 상품이기 때문에 주코프는 자칫 자신이 미국의 스파이로 몰려 스탈린에게 숙청당할 것을 두려워했다고 한다.[33]
스탈린은 코카콜라를 마시고 맛이 뛰어나단 점은 인정했지만 그런 훌륭한 음료가 자본주의 미국에서 제조된다니까 샘이 났는지 코카콜라에 맞설 만한 배 음료를 개발하라고 지시하고 콜라에 금수조치를 내렸기 때문이다. 즉, 콜라를 마시는 것은 밀수를 한다는 얘기였으므로 그는 비밀리에 ' 와인이나 보드카처럼 보이도록 위장한 콜라[34]를 보드카 병에 담아 보내라'는 말을 미국 정부에 보냈다고 한다. 미국에선 이를 전해 받자 '별 황당한 요구를 다 보겠네' 했지만 못해줄 것도 없으니[35] 그렇게 해주었다. 관련 자료는 없지만 나중에 밝혀진 사실을 기록한 기사는 남아있다. 참고로 펩시는 1974년에 판매권을 따내며 꽤 금방 소련에 진출했지만[36] 코카콜라는 소련이 무너질 때쯤 되어서야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콜라를 좋아하던 주코프는 펩시가 진출했을 1974년 당시에는 주코프는 병상에 있었고 그 해 사망했다.
어딜 가든 이 치열하고, 지독한 전투에서 식량·의료품·장비·탄약과 같은 지원 보급품들은 매우 중요한 기본이며, 이것들의 재고가 얼마만큼 있느냐에 따라, 전투의 승패가 갈린다.
그러나 여기서 제일 중요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바로 보드카다. 전쟁에서 보드카는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다! 아무리 가혹한 동장군이 찾아와도, 보드카 한 병을 전우들과 돌려 마시면, 곧바로 온몸이 화끈하게 데워져서 마치 다 같이 바냐(ба́ня)[37]에 들어온 느낌이다. 큰 부상을 당했을 때에도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마셔도 좋고, 상처나 수술을 마친 수술 부위에 뿌려도 좋으며, 의료용 수술도구를 담가 놓으면 깨끗하게 소독도 할 수 있고, 피난민이나 그 지역 사람들이 독일군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면 그들에게 포상으로 보드카 한 병을 줘도 좋다. 이럴 때 보드카는 전쟁으로 인해 불쏘시개 만한 가치도 없어진 종이쪼가리보다 좋은 화폐 역할이 된다.
또한 T-34와 T-44 같은 전차들, I-16, LaGG-3 같은 전투기들과 폭격기들, 심지어 내가 몰고 다니는 지휘차량에도 보드카는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연료와 섞어도 되고, 아예 그냥 전차와 전투기 연료통에 보드카만 넣어도 얼마든지 기동이 된다.[38] 탱크 데산트로 올라간 보병들에게 전차장이 해치를 열고, 연료부족 신호를 주면, 전차 뒤에 놓여 있는 보드카 상자나, 각각 보병들의 품속에 있는 걸 꺼내기도 하고, 방금 입에 대고 마시고 있던 걸 곧바로 엔진에 번갈아 가면서 넣으면, 수 천 킬로미터 동안을 멈추지도 쉬지 않고도, 엔진을 기동시킬 수 있다. 덕분에 발트에서 바르샤바까지의 진격은 문제가 없을 듯 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겨울에는 반드시 연료와 보드카를 같이 섞어 쓰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해야 연료가 얼지도 않고, 터지지도 않는다. 그에 비해 꽁꽁 얼어서 동사된 저 독일놈들과 그들의 전차와 전투기들은 하나같이 얼음사탕(아이스 캔디)처럼 꽁꽁 얼어붙어 있다.
서부전선의 연합군들도 전차와 수송차량, 전투기들이 추운 겨울 날씨 때문에 진격 속도가 많이 더디어졌다고 하길래, 보드카와 그에 맞는 사용 설명서를 좀 보내주었다. 그런데 고맙다는 말은커녕 배은망덕한 전보를 보냈다. 요약하자면 아마 이런 내용이 었을 것이다. "장난치지 마라!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알고나 있는 거냐? 술 마시고 전투 수송기에 술이나 실어 보내줄 시간 여유가 있으면, 지상 폭격기에다가 폭탄이나 더 실어서 기동시켜라!"[39] 였다. 이런 천하의 바보천치들!
- 게오르기 주코프 소련군 원수의 일기장에서
다른 러시아인들과 마찬가지로 보드카를 열렬히 사랑했는데 단순히 주당이 아니라 야전에서의 놀라운 범용성을 극찬했다.[40] 이를 높이 사 소련군에서는 병사들에게 정식 보급품으로 지급되었고, 특히 독소전쟁 당시에는 최전선에서 싸우는 부대원들에게 하루에 100ml씩 의무적으로 지급하라고 스탈린이 승인까지 내렸다. 다만 러시아인이 아닌 다른 연합군은 술주정 부리는 줄 알고 황당해했지만.[41] - 핵무기를 개발한 후 원자폭탄이 시험 투하된 곳에서 기동 훈련을 하는 바람에(!) 후에 그 부대원 대부분이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1950년대까지만 해도 방사능 후유증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고 미군도 하던 짓이었으니[42] 개인적인 문제로 보기는 곤란하다.[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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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에서 조지 S. 패튼과 만나 담소하는 주코프
패튼 대전차 군단의 문제의 장면 모델의 소련 측 당사자이기도 하다. 당장 독일이 항복한 후 베를린에서 벌어진 연합군 퍼레이드에 참석했을 때 소련군 총사령관 대리인 주코프가 패튼하고 신형 중전차인 IS-3을 보고 대화를 했는데…….
주코프: 저희 전차를 보시오, 이 얼마나 강력해 보이는 물건입니까? 실제로도 엄청 강해서 멀리서 적을 안전히 조질 수 있답니다!!
패튼: 우리 부하들이 저따위로 겁보 새끼처럼 싸운다면 내가 직접 내 부하들을 조졌을 거요.
…라고 답해 주코프를 당황하게 했으며 통역에게 패튼의 발언을 제대로 번역했는지 다시 되물었다는 후문이 있다.[44]
- 그의 이름을 딴 소련군 행진곡도 있는데 소련에서 1985년에 제작된 모스크바 공방전에 나온 OST기도 하다. 제목은 주코프 원수(Маршал Жуков).
- 낚시가 취미였는데 단순히 낚시만 즐긴 것이 아니라 수중생물에 대한 이해도가 꽤 빠삭한 아쿠아리스트의 면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젠하워 장군이 주코프에게 직접 낚시도구를 선물해주기도 했고 주코프는 이를 애지중지 사용했다.
- 딸이 바실렙스키의 아들과 결혼했다. 즉, 두 사람은 사돈지간이다.
5. 매체에서
5.1.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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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코미디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에서
제이슨 아이작스가 분했다. 처음 등장할 때부터 코트를 벗으며 주렁주렁 달린 훈장을 뽐내는 게 일품.[45]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영웅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만큼 영화 제작진 측에서도 대놓고 비난하기는 뭐했는지 대부분의 소련 인사들이 우스꽝스럽게 연출되는 해당 작품에서 거의 유일하게 패기 넘치는 모습을 보여준다.[46] 흐루쇼프와 함께 베리야 숙청을 주도한다. 스탈린의 아들 바실리나 베리야를 때려눕히는 장면에서 상당한 완력을 자랑하고, 베리야 숙청 때는 몸소 AK 소총을 들고 앞장선다.
다만 실존 인물에 비해 배우가 너무 잘생긴지라(...) 유튜브에서 영화의 주코프 등장신에 대해 러시아나 구 소련 출신 사람들은 댓글로 '저건 주코프라 보기엔 너무 말랐다.', '주코프가 아니라 콘스탄틴 로코솝스키[47]같다.'고 지적했다. 다만 저 방탄복 같은 주렁주렁 훈장에 대해서는 실제 소련 장군을 풍자한 것 같다며 호평받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실제 주코프는 영화에서 나온것 보다 더 많은 훈장을 달고 다녔다는 점인데 어찌나 많았는지 배우 제이슨 아이작스의 가슴에 다 달 수 없을 정도였다.
5.2. 소설
- 해리 터틀도브의 단편 마지막 신조에서는 인도 주둔 사령관 발터 모델 장군의 회상을 통해서 모스크바 함락 때 잡혀서 모델과 짤막하게 이야기 나눈 다음에 총살되었다는 언급이 나온다.
-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히틀러가 퍼트린 역정보에 의해 독일의 스파이일 가능성을 의심받지만 본인이 아니라 친척에게 독일 스파이가 접촉했다는 내용이었던 점, 그리고 유능함이 증명된 인재라는 점들 덕분에 친족들만 잡혀가고 본인은 감시만 받는 선에서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언제라도 친족들과 자신이 숙청당할 수 있는 상황이기에 예스맨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권한 내에서 최대한 노력하며 독소전쟁의 방향을 바꿔 보려고 노력하지만 스탈린의 트롤링과 소련군 자체의 한계로 인해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에는 모스크바에 남겨져 직접 총을 들고 싸우며 모스크바를 지키다 요아힘 파이퍼의 총에 미간을 맞고 전사한다.
5.3. 게임
- 큐라레: 마법 도서관에서도 4성짜리 금서로 등장한다. 게임 특성상 맨 위의 저 사진과 거리가 먼 금발 미청년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은근히 고증에 신경을 써서 '최고사령관의 포효'라는 스킬도 있고, 방탄훈장복도 입고 있으며 카드 플레이버 텍스트에서 '보드카 병에 콜라를 담아 마시고 있다'는 언급이 등장한다. 성능은 89식 중전차 '치로'의 상위호환. 더 많은 스크린샷과 압박적인 대사를 보고 싶으면 이곳으로.
-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 소련군 레벨 5 장성진으로 등장한다. 인게임에선 대부분의 명장들도 레벨이 3~4이기 때문에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 위 게임의 나치가 승리한 대체 역사모드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선 알렉산드르 예고로프[48]가 사망한 뒤 후계자로 나온다. 군사보단 민생을 생각하기 때문에 군국주의를 추구하는 투하쳅스키보단 희망적이며 사회민주주의로 개혁이 가능하다
- 도미네이션즈에서 영웅으로 등장한다.
- 워 썬더에서 배틀패스 72레벨에 도달하면 게오르기 콘스탄티노비치 주코프 장군의 초상화를 받는다.
6. 수훈 경력
- 소비에트 연방 영웅 4회 (1939, 1944, 1945, 1956)
- 전승훈장 2회 (1944, 1945)
- 레닌훈장 6회 (1936, 1939, 1945, 1956, 1966, 1971)
- 적기훈장 3회 (1922, 1944, 1949)
- 10월 혁명 훈장 (1968)
- 수보로프훈장 1급 2회 (1943 2회)
- 몽골 영웅 (1969)
- 몽골 수흐바토르훈장 3회 (1968, 1969, 1971)
- 몽골 적기훈장 2회 (1939, 1942)
- 체코슬로바키아 백사자훈장 1급 (1945)
- 폴란드 그룬발트훈장 1급 (1945)
- 폴란드 비르투티 밀리타리 훈장 금십자장 (1945)
- 폴란드 부흥훈장 3급 (1968, 1973 2급으로 승격)
- 미국 훈공장(Legion of Merit) (1945)
- 영국 바스훈장 명예기사십자장 (1945)
-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크루아(1급) (1945)
- 유고슬라비아 자유훈장 (1956)
- 이집트 군공훈장 1급 (1956)
7. 진급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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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코프의 첫째 딸 에라, 넷째 딸 마리야의 사진을 보면 이 모습을 쏙 빼닮았음을 알 수 있다.
[2]
후에 주코프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이 주코프가 된다.
[3]
그래도 부모의 열성 덕분에 또래 아이들은 기껏해야 2년 정도 배우고 중단했지만 주코프는 3년 과정 전체를 모두 이수했다.
[4]
2번째 줄 왼쪽에서 2번째가 주코프, 5번째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1번째 줄 오른쪽에서 1번째가
이반 바그라먄, 3번째가
안드레이 예료멘코인데 이 4명은 모두 원수까지 진급했다.
[5]
사진을 보면 매우 어색한데 아마도 촬영 당시 불참해서 나중에 합성한 듯하다. 원래 주코프의 키는 저렇게 크지 않다.
[6]
당시 붉은 군대는 계급이 없이 그저 직책만 있었다.
[7]
후에
프룬제 군사대학이 된다.
[8]
훗날 원수로 오르는 로코솝스키, 바그라먄이 대숙청 당시 체포 혹은 조사를 받았으나, 이는 그들이 소수민족(폴란드, 아르메니아)이었기 때문에 NKVD의 의심을 받은 것이다. 이외에도 내전시절 국방장관
트로츠키의 직할부대에서 복무했거나, 불온민족(독일계 러시아인 혹은 유대인) 귀족출신이거나 제국군 장교출신이면 어김없이 의심을 받았고, 대숙청의 희생양이 된 경우가 많았다.
[9]
러시아 제국 시절에 만주로 진출하려던 일본에게 패배했고
러시아 내전 당시에도 일본군이 개입했기 때문에 소련은 그들의 야욕을 경계하고 있었다. 전임자 페클렌코가
연대급으로 맞붙은 제1차 전투에서 잘 수비했기 때문에 사안을 중요하게 보지 않았으면 그보다 높은 지위의 군관구 사령관이었던 주코프를 불렀을 리 없다.
[10]
이는 2차대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할힌골 전투의 결과로 소일중립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일본이 진주만 기습을 단행하고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11]
왼쪽부터
그리고리 시테른 극동군
참모장,
허를러깅 처이발상
몽골 인민공화국
대통령, 주코프
[12]
바로 아래 목 칼라에 별 5개의
계급장을 붙인 사진이 그때의 사진이다.
[13]
이때 그가 양성한 부대들이 나중에
독소전쟁에서 독일 남부집단군의 진격을 상당히 늦췄다.
[14]
칼라 위 별은 5개지만 원수가 아닌 대장이다. 원수는 당시에도 왕별 하나였다.
[15]
특히 독일 제6군은 정예 부대로 평가받는 부대였기 때문에 전투력 공백이 컸다고 한다.
[16]
천왕성 작전: 70만+40만, 화성작전 68만+41.5만
[17]
2014년 3월 1일 미국에서 발매된
<Fighting Patton: George S. Patton Jr. Through the Eyes of His Enemies>에서는 이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최대 규모의 방어전 승리라고 높이 평가했다.
[18]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 대전의 작가이다. 다만 훈련된 전문 역사학자는 아니라서 이런저런 오류를 좀 보이긴 한다. 비버는 화성 작전에 주어진 소련 정부의 지원이 천왕성 작전에 비해 얼마나 적었는지를 지적하며 조공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19]
Operation Buffel: 퇴각 작전의 클래식이라고 극찬받으며 지금도 각국
사관학교에서 강의되는 작전으로 소련군은 독일군 9군의 퇴각 자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에 책임을 지고
이반 코네프가 일시적으로 해임됐다.
[20]
독일군 장성들의 회고록도 군사 기밀 문서들이 해제되면서 상당수가 그 설득력을 잃으며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21]
이때는 소련군이 공세를 펼칠 때라서 쾌속 기동을 하게 되었으므로 소련군 장교들도
독일 국방군 장교들처럼 방진 고글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22]
전황이 잘 안 풀려서인지 주코프와 부하 및 참모들도 표정이 매우 굳어있다.
[23]
밝은 옷을 입고 정면을 보는 게 주코프, 주코프 기준 오른쪽으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버나드 로 몽고메리
[24]
몽고메리 기준 우측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뒤에 메달을 목에 건 사람은
미하일 말리닌
[25]
다만 과장되었을 뿐이지, 주코프가 베를린에서 귀금속을 약탈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주코프의 진정한 흑역사다.
[26]
베리야를 체포하면서 주코프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소비에트 인민의 이름으로 널 체포한다. 이 개자식아!"
[27]
그나마 소련이니까 미국의 반 정도였던 거고 당시 동구권과 서구권 전체의 경제비율은 1:4였다.
[28]
전체주의 사회의 총자원 동원력은 민주주의를 능가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어느 정도 맞는 생각이었다. 당장 2차대전 때 소련이 전사자 800만명을 합해 총 3200만이라는 초월적인 동원력을 자랑했으며 독일을 패퇴시킬 수 있었던 것이 이 어마어마한 동원력으로 피해를 입은 부대를 빨리 충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9]
사실
독일 국방군도 히틀러 집권 초기의 확장기엔 소련군과 별로 다를 바 없었고 오스트리아 병합을 위한
빈에 진공하던 부대는 명장인
페도르 폰 보크가 지휘하고 있었음에도
이탈리아군 무관의 비웃음을 받았을 정도였다.
[30]
패튼의 막말에 격분해서 주먹다짐을 할 뻔한 적도 있었다.
[31]
이 명령은 소련 붕괴 후에야 공개되었다. 그리고 스탈린은 투옥만 명령했지 처형은 명령하지 않았다.
[32]
톨스토이는 직접 참전했던 캅카스 전쟁을 다룬 여러 수기들을 썼는데 거기서도 러시아군의
우라돌격이나 무모한 자살적 돌격은 자주 나온다.
[33]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는 전쟁 때 협력해서 작전 뛰었던 영국 해군 장교가 전후 선물을 보냈다는 이유로 굴라크에 잡혀온 해군 중령이 나오는데 실제로 솔제니친의
굴라크 동기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스탈린 시절에는 콜라를 좋아하는 것, 미국이나 유럽에서 택배를 받는 것만으로도 굴라크에 끌려갈 수 있었다.
[34]
색소를 뺀 일명 화이트 코크(
White Coke)였다. 아이젠하워가 마시던 게 바로 이거였다.
[35]
혹 이를 빌미로 주코프에게서 뭐 하나 챙길 수 있을지도 모르는 거 아니겠는가?
[36]
대신 펩시는 소련 정부로부터
스톨리치나야라는 보드카의 해외 판매권을 얻어 냈다.
[37]
러시아와 핀란드의 전통
사우나.
대한민국의
찜질방을 생각해보자.
[38]
다만 당시 소련의 주력기 엔진은 연료 민감성이 낮은 플린저 타입
디젤 엔진이었으니 첨가물이 사실상 없어 순수한 편인 보드카 정도로는 고장나지 않으므로 부동액 개념으로 연료에 보드카를 섞었다. 물론 현재 자주 사용되는
CRDi 디젤 엔진에 보드카를 넣으면 큰일난다.
[39]
미국은 당시 세계 최고의 석유화학 기술을 보유했고
무기대여법의 일환으로 소련에 엄청난 양의 유류를 보내주었으므로 굳이 물이 섞인 에탄올을 연료에 넣을 필요가 없었다.
[40]
에탄올 농도가 40%이고 다른 첨가물이 거의 없으므로 다른 술보다 에탄올 본연의 목적으로 사용하기 좋으며, 이 정도 농도면 급할 때 소독약으로도 쓸 수 있다.
[41]
참고로 독일은 퍼버틴 이라는 이름을 붙인 히로뽕을 각성제로 사용했다.(...)
[42]
미군도
몰락 작전 당시 교두보에 핵을 떨구고 진격하는 계획을 세웠을 정도다.
[43]
당시에는 핵무기를 핵폭발의 강력한 위력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고 핵무기로 인한 방사능의 추가 위험은 50년대 말 정도는 되어야 히로시마 등의 방사능 오염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알 수 있게 되었다. 훗날 1963년에 미, 영, 소가 부분핵실험 금지조약을 맺게 된다.
[44]
실제로 이로인해 말싸움까지 났으며, 주먹다짐까지 날 뻔했다. 말싸움으로 끝나서 다행이지, 외교적 분란이 생길 정도로 싸움이 커졌으면 패튼은 엄청난 외교 문제를 촉발했다는 명목으로 청문회나 군사법정행은 확정일 것이다. 패튼은 기껏해야 야전군 사령관 직위의 대장이지만 주코프는 최고 사령관대리 겸 총군부사령관 직위의 원수로 사실상 스탈린을 대신해서 총지휘를 맡고 소련군부의 대표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45]
게다가 위의 패튼과 찍은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훈장이 실제로는 더 많은데 너무 만화적 연출로 보일까봐 줄인 거라고 한다.
[46]
단, 상대적으로 그런 거지 이 양반도 나사 빠지는 모습이 나오지 않는 건 아니다.
[47]
폴란드 출신 소련 장군인데, 실제 주코프 담당배우인 제이슨 아이작스와 외모가 닮았다. 한편 배우의 실제 신장이 180cm인데 주코프(164cm)라 보기에는 너무 크고 로코솝스키(195cm)로 보기에는 너무 작다. 물론 고증을 했다면 멋이 없었을 테니 영화적 허용으로 봐야할 것이다. 배우와 유사한 덩치의 장군들은
이반 코네프나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정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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