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8 00:06:30

바실리 블류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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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급시기 기준 세분, 2차 대전기는 전간기부터 1945년 8월까지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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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 공화국 제3대 전쟁장관
바실리 콘스탄티노비치 블류헤르
Васил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Блю́хер
Vasily Konstantinovich Blyukher
[1]
파일:바실리 블류헤르 원수.png
출생 1889년 12월 1일
러시아 제국 야로슬라블현 리빈스크구 바르신카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야로슬라블주 리빈스크군 바르신카)
사망 1938년 12월 9일 (향년 49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재임기간 극동 공화국 제3대 전쟁장관
1921년 6월 ~ 1922년 7월
서명 파일:바실리 블류헤르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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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부모 아버지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블류헤르
어머니 안나 바실리예브나 메드베데바
형재자매 남동생 파벨[2]
여동생 알렉산드라, 엘리자베타
배우자 갈리나 파블로브나 포크롭스카야
갈리나 알렉산드로브나 콜추지나[3]
글라피라 루키니치나 베즈베르코바[4]
자녀 아들 프세볼로트,[A] 바실리[6]
딸 조야,[7] 조야[A]
입양딸 카티아
3녀 바이라[9]
복무 러시아 제국 육군
1914년 ~ 1917년
노농적군
1918년 ~ 1921년
1922년 ~ 1938년
극동 공화국 인민혁명군
1921년 ~ 1922년
최종 계급 하사 (러시아 제국 육군)
원수 (소비에트 지상군)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봉소전쟁
하산 호 전투
주요 서훈 레닌훈장 (2회)
적기훈장 (4회)
적성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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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수훈 경력4. 관련 문서
4.1. 인물4.2.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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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군의 육군 장성.

세묜 부됸니,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미하일 투하쳅스키, 알렉산드르 예고로프와 함께 초기 5원수 중 한 명이었다. 중국국민당 고문과 극동군관구 사령관을 역임한 주요 인물이었지만 대숙청으로 사망했다.

2. 생애

바실리 블류헤르는 모스크바 북동쪽 야로슬라블현의 바르신카라는 마을에서 소작농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성씨만 보면 독일계 러시아인인 듯하지만 사실 원래 성은 구로프(Gurov)였고 19세기에 지주가 그의 가문에게 나폴레옹을 꺾은 프로이센 원수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의 성을 딴 별칭을 붙여 준 것에서 블류헤르라는 성이 유래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많은 소작농들이 그랬듯 도시로 와서 공장 노동자로 일했으며 1914년 입대하여 상병으로 복무하여 1차대전에 참전했지만, 1915년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의병 제대를 했다.

1916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당[10]에 입당하였고 곧 러시아 혁명 당시 사마라의 혁명에 가담하여 지도적 위치에 오른다.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집권하였으나 러시아 내전이 벌어지자 그는 적위대( 붉은 군대의 전신)에 가담했고 정치장교에 임명되었으며 적위대가 붉은 군대로 개편되자 그는 볼셰비키에 의해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광활한 러시아를 누비면서 여러 반혁명군(백군)을 진압했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소비에트 정권하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훈장인 적기훈장 수여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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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내전 말기인 1923년의 블류헤르

유럽지역 러시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그는 만주 접경의 극동 지역으로 파견되었고 그곳에서도 반혁명군을 진압하고 일본군의 개입을 무력화시켰다. 이때의 공적으로 그는 극동지역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고 "동방의 왕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후 쑨원-요페 회담에서 중국국민당 코민테른 간의 반제국주의 전선이 성사되자 1924년부터 1927년까지 "갈렌(Galen)"이라는 가명으로 장제스의 군사고문으로 활동하면서 황푸군관학교의 창설과 국민혁명군의 토대를 닦았고 블류헤르가 양성한 병력은 국민당의 1차 동정에서 우수한 전투력을 입증하였다. 장제스와 깊은 우정을 쌓아 국민당의 1차 북벌 와중에 고문뿐만 아니라 군사 지휘관으로 큰 활약을 했다. 이때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전문적인 군사 지식만을 보여 국민당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허나 장제스와 공산당의 사이가 악화됨에 따라 미하일 보로딘의 지시에 따라 장제스의 곁을 떠나 우한 국민정부에 합류했고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청당을 선포하고 우한 국민정부에서 떨어져 나가며 소련과의 관계를 단절하자 블류헤르는 마지막으로 난창 폭동의 계획을 입안한 후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이때 상하이를 들러 마지막으로 장제스와 만나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파일:Василий_Блюхер.jpg
1920년대 중후반의 블류헤르[11]

이어 우크라이나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하바롭스크에 사령부를 둔 극동군관구 사령관이 되었다. 이 군관구는 거의 블류헤르 개인의 왕국이나 다름 없었다. 이때 1929년 봉천군벌의 수장 장쉐량과 소련이 명목상 공동관리하던 중동로 철도의 이권을 둘러싸고 소련과 장쉐량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고, 장쉐량이 만주의 불안을 타개하기 위해 이를 일방적으로 압수하자 블류헤르는 소련군 4만명을 이끌고 만주를 침공했다. 이를 중동로 사건이라고 한다. 봉천군의 규모는 30만에 이르렀지만 숫자만 많았지 화력도 빈약하고 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으며 그나마 무장이 잘 된 봉천중앙군은 장쉐량이 투입하지 않아서 형편없는 지방군만으로 소련군과 싸워야 했다. 이렇다 보니 몇년 후 벌어진 만주사변 일본군에 당했던 것처럼 소련군에게 처참하게 격파당했고, 장쉐량은 뒤늦게 장제스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장제스는 2차 장계전쟁 2차 장풍전쟁, 장당전쟁 등 끊임없는 내부 반란과 더불어 마오쩌둥의 강서 소비에트에 대한 공세를 진행 중이라 오히려 장쉐량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판이었다. 결국 소련 측의 주장이 대폭 반영된 하바롭스크 의정서를 맺게 된다.
파일:external/ona.c.blog.so-net.ne.jp/Vasily20Konstantinovich20Blucher.jpg
옷깃의 계급장을 보면 원수로 진급한 1935년때인 듯하다.

1935년 계급이 없었던 소련군에 전면적으로 계급이 도입되고, 5명의 원수가 임명되면서 블류헤르도 원수 계급을 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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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1월 11일 촬영한 초기 붉은 군대 5원수. 아래줄 왼쪽부터 미하일 투하쳅스키,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알렉산드르 예고로프, 윗줄 왼쪽부터 세묜 부됸니, 블류헤르이다.

이렇게 봉소전쟁에서 승리했지만 1931년 일본 제국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웠고, 결과적으로 봉천군벌보다는 비교도 안되게 소련의 안보에 위협이 되었다. 러일전쟁의 기억으로 소련군을 오합지졸이라 오판하고 있던[12] 일본군은 만주 각지에서 도발을 일으켰고 블류헤르 자신도 차차 이오시프 스탈린의 신뢰를 잃었다. 또한 위에 언급된 것처럼 극동에서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경계를 받게 된 까닭도 있었다.

대숙청이 한참 기승이던 1937년부터 1938년 초까지는 극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직접 재판에 참여해 투하쳅스키 처형에 일조하는 등 어찌어찌 잘 버티나 했지만 1938년 6월, 예조프가 4월에 실각한 이후 예조프 파벌이었던 NKVD 극동지부 지부장 겐리흐 류시코프[13]가 만주국으로 망명하며 운명이 다한다. 류시코프가 그냥 간 것도 아니고 극동군관부에 대한 각종 기밀을 바리바리 싸들고 간지라 극동 지역 책임자인 블류헤르 입장에서는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류시코프는 일본의 심문 중 블류헤르가 반스탈린파라고 증언했고 독일로 전달되던 심문 기록을 리하르트 조르게가 빼돌려 모스크바로 전달하며 상황은 블류헤르에게 더 불리하게 돌아갔다. 이미 이전에 잡혀서 심문받던 예고로프가 고문에 못이겨 블류헤르가 쿠데타 제안을 했다는 증언을 한 것도 있다.

8월 초, 하산 호 전투의 결과로 스탈린의 질책을 받았다. 1938년 9월 4일자 국방인민위원회 회의록에 의하면 8월 1일 이미 공격 명령을 받았음에도 좀 더 조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개입에 늑장을 부렸고 스탈린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도대체 일본과 싸울 생각이 있긴 하냐고 질책을 했다고 한다. 어찌되었건 전투는 승리했지만 많은 희생자가 나왔고[14] 안 그래도 궁지에 몰린 블류헤르의 입장에서 이는 최후의 일격이 되었다.

블류헤르는 반소비에트적 우파 조직 결성, 군사 쿠데타 음모, 업무지에서의 폭음, 군기 문란[15] 등의 죄목으로 잡혀와 자백을 강요받았지만 이를 거부해서 고문을 당했고[16] 견디다 못해 체포 후 18일 만에 사망한다. 사후에도 그의 사망은 한동안 공표되지 않았고[17] 1939년 기존의 혐의에 더불어 일본 간첩 혐의가 추가되어 원수 계급과 모든 훈장이 추탈되었다.

장제스는 이후 소련과 외교관계를 회복한 후에 줄기차게 블류헤르를 다시 중국에 파견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무시했고, 블류헤르가 사망한 후에야 짤막하게 그가 처형당했다는 통고를 보냈다. 이후 블류헤르는 흐루쇼프 집권기인 1956년 복권되었다.

3. 수훈 경력

  • 레닌훈장 2회 (1931, 1938)
  • 적기훈장 5회 (1918, 1921(2회), 1928(2회))
  • 적성훈장

4. 관련 문서

4.1. 인물

4.2. 사건



[1] Blucher, Blücher, Bliukher 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2] 파시스트 혐의로 사형, 사후 1956년 5월 9일부로 복권. [3] 반공 혐의로 사형 [4] 반공 혐의로 검거 후 석방 [A] 갈리나 소생. [6] 콜추지마 소생. [7] 갈리나 소생. 돌이 지나기 전 요절. [A] [9] 베즈베르코바 소생 [10] 소련 공산당의 전신. 레닌 볼셰비키는 이 당의 한 분파였다. [11] 1930년 9월 블류헤르는 적성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아직 적기훈장만 있는 걸로 봐선 1930년 이전에 찍힌 것으로 보인다. [12] 이들의 오판은 할힌골 전투 이후 완전히 깨지게 된다. [13] Генрих Люшков, NKVD 출신 망명자로는 최고위였다. [14] 이반 코네프는 그가 하산 호 전투에서 러시아 내전기의 교리에서 탈피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15] 블류헤르는 몽골에 파견되었을 때 그의 병사들을 거의 관리하지 않았다. 몽골의 불교 사찰에서 금박을 긁어내서 털어가는 일이라든가 라마승을 강간하고 부대 옆에 주도적으로 집창촌을 만든 일 등이 외교적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16] 일설에는 이때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였으며 최후에는 고문 담당자와 싸우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일단 공식적인 사인은 골반에서 발생한 혈전에 의한 폐동맥경색. [17] 그래서 비밀리에 가명을 쓰고 다시 중국에 파견되어 갔다는 설도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