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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일본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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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일본시리즈 우승팀
2004년
세이부 라이온즈
2005년
치바 롯데 마린즈
2006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파일:5463456456.jpg
파일:치바 롯데 마린즈 우승 엠블럼 V3.svg
2005년 일본시리즈 우승팀
치바 롯데 마린즈
MVP 이마에 토시아키
2005년 일본시리즈 엠블럼
파일:2005 일본시리즈 엠블럼.png

1. 개요2. 배경3. 일정 및 결과
3.1. 1차전3.2. 2차전3.3. 3차전3.4. 4차전
4. 총평5. 우승반지6. 흑역사의 재발굴7. 기타8. 둘러보기9.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NPB NIPPON SERIES 2005
파일:한신 타이거스 실버 심볼.svg 파일:치바 롯데 마린즈 화이트 심볼.svg
한신 타이거스 치바 롯데 마린즈

2005년 일본시리즈는 센트럴리그 우승팀 한신 타이거스와 퍼시픽리그 우승팀 치바 롯데 마린즈 간의 대결로 10월 23일부터 10월 26일까지 진행되었다. 결과는 아래의 짤방에도 드러나있듯이 치바 롯데가 4:0이라는 시리즈 스코어로 한신을 떡실신시켰다.

일본에선 이 사건을 비꼬아 스코어인 33-4[1]나, 하얀 안개 사건(白い霧事件)이라고 부른다. 1970년대 일본프로야구에 충격을 몰고온 승부조작 사건인 검은 안개 사건의 오마주이며 이 시리즈를 하얀 안개 사건이라고 부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치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열린 1차전 경기가 구장에 짙게 깔린 하얀 바다 안개로 인해 더 이상 경기 진행이 불가능해진 관계로 7회 농무(濃霧, 짙은 안개) 콜드게임 처리가 되었기 때문. 안개 때문에 1승을 도둑맞았다고 생각한 한신 팬들에 의해서 이렇게 불리게 되었다[2].

2. 배경

2005년, 창단 70주년을 맞았던 한신 타이거스 승리의 방정식이라고 불리던 필승조 트리오, 제프 윌리엄스(「J」eff Wiliams), 후지카와 큐지(「F」ujikawa Kyuji), 쿠보타 토모유키(「K」ubota Tomoyuki), 일명 JFK를 거느리고 센트럴 리그를 정복했다. 여기에 도루왕 아카호시 노리히로가 밥상을 깔고, 리그 MVP 카네모토 토모아키 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역대 3위 기록인 147타점을 찍은 이마오카 마코토가 이끄는 중심타선을 갖춘 야수진 역시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3] 이 막강한 전력을 앞세운 2년만에 또 다시 일본시리즈에 진출, 2년 전에 실패한 일본시리즈 우승에 재차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에 오사카 지역의 스포츠 매체와 팬들은 승리의 방정식 JFK가 있는 한신 타이거스는 무적이라며 금방이라도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고[4], 그렇게 퍼시픽 리그 우승팀 치바 롯데 마린즈와의 최종 결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팀인 치바 롯데는 정규시즌에서 퍼시픽 리그 2위 팀으로 플레이오프를 거쳐[5] 우승한 팀이었고, 이때까지만 해도[6] 플레이오프 제도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일본 야구의 풍토상 롯데는 그저 제도의 맹점으로 운좋게 일본시리즈에 올라온, 리그 최강자라고는 할 수 없는 팀이었다.[7][8] 게다가 롯데의 포스트시즌 진출 자체가 1981년 이 후 24년만[9]이고 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은 1974년 이후[10] 31년 만이라서 사실상 포스트시즌 초짜나 다름 없는 팀이었다. 이에 반해 한신은 불과 2년 전 길고 긴 암흑기를 마감하고 18년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일본시리즈에서 12개 구단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아쉽게 졌던 2003년 당시 멤버들을 고스란히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시리즈 우승이라는 목표 달성에 가장 껄끄러운 걸림돌이며,[11] 여전히 12개구단 최강의 전력을 과시하던 소프트뱅크가 롯데와의 플레이오프에서 패하면서 탈락한 덕분[12]에 이번 시리즈는 한신의 입장에서는 경험이 없는 비교적 쉬운 팀과의 대결이었다.[13] 그래서 한신의 관계자와 팬들은 이번에야말로 20년 동안 쌓인 울분을 풀 수 있는 최적의 기회라고 모두들 확신하고 있었다.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8d831566.jpg
롯데가 소프트뱅크와의 플레이오프 5차전을 승리하고 파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었을 때의 사진.
물론 이런 일이 벌어질 때는 항상 따라오는 불안한 징조도 없지는 않았다. 보통은 개방형 구장을 쓰는 홈구장의 특성상 장마철과 여름을 거치면서 우천 취소된 경기들 때문에 10월 중에 열 경기 안팎으로 추가로 편성이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다만 이 해에는 유난히 비가 타이거즈를 비껴가면서 일정 소화가 차질없이 진행됐고, 예년보다 빠른 10월 초순에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시리즈 개최까지 약 2주 반 동안 스케줄이 비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경기감각 유지를 걱정하는 의견도 일부에서 나왔다. 실제로 메이저리그에서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를 4연승으로 돌파한 팀이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한 경우는 고작 12.5%(1/8)에 불과한데, 이에 대해선 '상대팀에 비해 경기감각이 떨어져서 월드 시리즈에선 패배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분석이 많다.

하지만 페넌트 레이스 우승 자체도 우승을 확정짓기까지 똥줄을 태웠던 2년 전[14]과는 달리 2005년에는 비교적 여유있게 경쟁팀들을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 때문에 한신팬과 오사카지역 미디어는 이것이 한신 선수들이 한단계 성장한 증거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따라서 앞서 제기된 스케줄 공백에 따른 경기감각의 저하라는 불안한 징조를 크게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15]

이 때까지는 한신 타이거스도, 타이거스 팬들도, 심지어는 상대팀인 치바 롯데 마린즈도 몰랐을 것이다. 이것이 한신 팬들에게 일본 야구사에 길이 남을 악몽의 서막이란 것을...[16][17]

3. 일정 및 결과

경기 날짜 경기장 원정팀 점수 홈팀 중계
1차전 10월 22일(토) 치바 마린 스타디움 한신 타이거스 1 10 치바 롯데 마린즈 파일:테레비 아사히 로고.svg
2차전 10월 23일(일) 한신 타이거스 0 10 치바 롯데 마린즈 파일:테레비 도쿄 로고(1998-2023).svg
3차전 10월 25일(화) 한신 고시엔 구장 치바 롯데 마린즈 10 1 한신 타이거스 파일:테레비 아사히 로고.svg
4차전 10월 26일(수) 치바 롯데 마린즈 3 2 한신 타이거스 파일:TBS 테레비 로고(1994~2020).svg
우승 : 치바 롯데 마린즈(통산 3회)

3.1. 1차전

10월 22일 치바 마린 스타디움
팀명 선발투수 1회 2회 3회 4회 5회 6회 7회 R H E
한신 이가와 게이 0 0 0 0 1 0 0 1 5 0
치바 롯데 시미즈 나오유키 1 0 0 0 3 1 5X 10 15 0

▲ 승리투수: 시미즈 나오유키
▲ 패전투수: 이가와 게이
▲ 홈런: 이마에 토시아키 1호(1회 1점) 이승엽 1호(6회 1점) 사토자키 토모야 1호(7회 3점) 베니 아그바야니 1호(7회 2점)

이날 경기는 바닷가에 있는 구장의 특성상 경기가 시작되는 6시 무렵부터 구장에 안개가 살살 끼기 시작했다. 경기를 시작할 무렵에는 그렇게 큰 지장을 줄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기에 그대로 경기를 진행했다.

파일:external/blog-imgs-46.fc2.com/2005_kiri.jpg

7회말 롯데 공격, 사토자키의 쓰리런 직후 맷 프랑코의 타석.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안개는 짙어지기만 할 뿐 도무지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6회 들어올 무렵부터는 경기 진행이 가능할지가 우려될 정도로 안개가 짙어지기 시작했고, 어떻게든 7회까지 경기를 진행시켰건만 상황은 더 악화되어 투수자리에서 포수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18].

결국 안개가 걷히려면 2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는 일기예보에 더해 7회말 롯데의 대량득점으로 더 이상 한신이 경기를 뒤집기 힘든 점도 고려되어 7회말 1사 후 짙은 안개에 의한 콜드게임이 선언되었다. 안개 때문에 일본시리즈 경기가 콜드게임이 선언된 것은 사상 최초[19].

저 위의 사진이 뽀샵 처리된 게 아니냐고 의심할 사람들을 위해서 그날 경기의 하이라이트 동영상도 붙여둔다[20]. 동영상을 보면 저 사진이 뽀샵 처리된 게 아니라 진짜로 안개가 저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사람의 형체가 없어진다

3.2. 2차전

10월 23일 치바 마린 스타디움
팀명 선발투수 1회 2회 3회 4회 5회 6회 7회 8회 9회 R H E
한신 안도 유야 0 0 0 0 0 0 0 0 0 0 4 0
치바 롯데 와타나베 슌스케 1 1 0 0 0 5 0 3 X 10 12 0

▲ 승리투수: 와타나베 슌스케
▲ 패전투수: 안도 유야
▲ 홈런: 오오무라 사부로 1호(6회 2점), 맷 프랑코 1호(6회 1점), 이승엽 2호(6회 2점)

그 뒤 한신팬들은 1차전 콜드게임을 불러온 안개가 롯데 측이 일부러 피운 연막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21] 1차전의 석연치 않은 경기종료에 불만을 표시했고 안개 같은 자연의 장난만 없었더라면 한신이 저렇게까지 대패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한신 팬들은 2차전은 뭔가 다르겠지라고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안개가 완전히 걷힌 2차전도 1, 2회말에 각각 1점을 내주며 슬슬 벌어지기 시작하더니 6회말에 5점, 8회말에 3점을 내주면서 떡실신. 반면 한신의 물방망이는 경기 시작부터 종료까지 롯데 선발 투수 와타나베 한 명에게 철저히 농락당하면서 결국 0-10으로 완봉을 헌납했다.

여기까지만 와도 상대팀의 강함을 인정하는 게 정상이겠건만, 한신팬들은 여전히 생소한 상대팀 구장 탓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성지 한신 고시엔 구장에만 돌아오면 구장을 가득 메운 5만 열성팬들의 압도적인 응원이 있을 것이고, 이와 같은 압도적인 응원을 경험하지 못한 비인기팀 롯데 따위는 오금이 저려서 알아서 무릎을 꿇을 거라고, 그러면서 이 흐름이 바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22]

3.3. 3차전

10월 25일 한신 고시엔 구장
팀명 선발투수 1회 2회 3회 4회 5회 6회 7회 8회 9회 R H E
치바 롯데 고바야시 히로유키 0 1 0 2 0 0 7 0 0 10 10 0
한신 시모야나기 쓰요시 0 1 0 0 0 0 0 0 0 1 6 0

▲ 승리투수: 고바야시 히로유키
▲ 패전투수: 시모야나기 쓰요시
▲ 홈런: 후쿠우라 카즈야 1호(7회 4점)

그들의 믿음대로 홈인 고시엔에만 오면 5만 명이 들어찬 관중석을 본 적도 없을 비인기팀 롯데 정도는 홈팬들의 열성적인 응원을 등에 업고 가볍게 제압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마지막 희망을 걸은 성지 고시엔에서의 대결이라고 뭐가 달라진 것은 없었다. 4회에 2점을 내주며 리드를 내준 한신은 결국 7회초에 후쿠우라에게 만루홈런을 맞고 시리즈 3번째 빅이닝을 내주며 7실점을 허용하는 등, 또 다시 10실점을 하며 1차전과 똑같은 1-10으로 떡실신당했다.

결국 이러한 사태의 원인은 선수들이 보여준 한심한 퍼포먼스가 날씨 탓도 아니고 구장 탓도 아닌, 감독 및 코치진의 경직된 용병술과 수세에 몰린 상황을 타개할 능력이 없는 선수들의 기량이 문제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선수도 팬도 모두 멘붕 모드로 돌입했고, 5만 명이 들어찬 고시엔에는 왼쪽 외야석 구석에 자리잡은 검은 유니폼을 입은 롯데 원정 응원단의 응원가 소리만 울려퍼지고 있었다.

3.4. 4차전

10월 26일 한신 고시엔 구장
<rowcolor=#000> 팀명 선발투수 1회 2회 3회 4회 5회 6회 7회 8회 9회 <colbgcolor=#dcdcdc><colcolor=#000> R H E
치바 롯데 댄 세라피니 0 2 0 1 0 0 0 0 0 3 7 1
한신 스기야마 나오히사 0 0 0 0 0 2 0 0 0 2 7 0
▲ 승리투수: 댄 세라피니
▲ 패전투수: 스기야마 나오히사
▲ 세이브투수: 고바야시 마사히데
▲ 홈런: 이승엽 3호(2회 2점)

▲ 일본시리즈 MVP: 이마에 토시아키(치바 롯데)
▲ 우수 선수상: 와타나베 슌스케, 이승엽, 오오무라 사부로(이상 치바 롯데)
▲ 감투 선수상[23]: 야노 아키히로(한신)

엘리미네이션 게임에 몰린 한신은 4차전에선 앞선 경기들과 달리 10실점으로 털리지 않고 그나마 롯데 타선을 잘 막으며 이길 가능성이 있는 경기를 했지만, 결국 이승엽 하나를 못 막아서 멸망했다. 이 날 이승엽은 4타수 4안타 맹타로 마지막까지 한신을 괴롭혔다. 안타1, 홈런1, 2루타 2개(3루에서 주루사)인데 3루까지 뛰다가 죽은게 세이프였다면 사이클링 히트가 될 뻔했다. 참고로, 4회초 적시타를 맞은 투수는 노우미 아츠시인데, 이 선수는 8년 후의 국제대회에서 메이저리거한테 거나하게 한 방 맞아주신다.

비록 실점을 최소화해 그나마 4경기 중 가장 경기다운 경기를 펼쳤지만 매경기 홈런을 맞고 선취점을 내주면서 끌려가는 전개는 마지막 경기까지 끝끝내 바뀌지 않았고, 막강 불펜을 보유하고 있던 건 한신만이 아니었다. 후지타 소이치-야부타 야스히코-고바야시 마사히데로 이어지는 롯데의 필승조는[24] 한신에게 더 이상의 추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 뒤 롯데는 시리즈 전적 4승 무패로 압도적인 경기력의 차이를 과시하면서[25]31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치바 연고로써는 첫 번째 우승을 적지 고시엔에서 확정지었다. 고시엔의 마운드에는 적장 바비 발렌타인이 일본시리즈를 우승한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라는 영예와 동시에 헹가래를 받았다.[26]

4. 총평

파일:attachment/33-4.jpg
한 짤 요약.

일본 팬들 모두가 두고두고 한신 타이거스를 놀려먹는데 사용하는 일본시리즈 역사상 최악의 관광패로 한신 타이거스는 3번이나 콜드게임급의 스코어를 먹고 장렬하게 침몰해버렸다. 3경기 연속 10실점에다가 그 중 한 경기는 머시 룰(Mercy Rule)이 아닌 기상악화가 원인이긴 했지만 진짜로 콜드게임이 발동되었다. 사실 경기가 1~2점 차라면 아무리 날씨가 좋지 않아도 어떻게든 계속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을 것이고, 정 안되면 서스펜디드 게임을 진행하는 쪽으로 합의를 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27] 하지만 10-1이라는 참혹한 스코어 앞에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야기다. 기상악화 뿐만 아니라 한신의 처참한 스코어까지 고려된 콜드게임인 셈.

물론 2위팀이 플레이오프를 통해 일본시리즈에 올라가서 우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바로 전년도인 2004년에 퍼시픽 리그 2위팀인 세이부 라이온즈가 당해 처음 실시된 플레이오프에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꺾고 파리그 우승해서 일본 시리즈에서 센트럴 리그우승 팀 주니치 드래곤즈를 꺾고 일본 시리즈를 우승했는데, 적어도 주니치는 7차전까지 끌고 가면서 대등한 승부를 펼쳤고 한신처럼 맥없이 털리지는 않았다.

이 참혹하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한 결과에 한신 구단과 팬들이 어떤 심정이었을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연고지에서 한신 타이거스의 인기, 그리고 1985년에 첫 일본시리즈를 우승했었을 때 오사카를 뒤집어 놓았던 열기를 생각해보면 폭동이 안난 게 신기할 정도로 떡실신을 당했으니 말이다. 정확하게는 폭동을 일으킬 기력조차 사라질 정도로 한신팬들의 넋이 나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만큼 시리즈가 시작하기 전에 한신팬들의 기대치가 높았고, 시리즈 중에 롯데와 한신이 보여준 경기력의 차이만큼 팬들에게 충격과 정신적 낙차가 컸던 시리즈였다. 실제로 한신은 이 시리즈에서 일본시리즈 사상 최악의 기록을 여러개 세웠다. 시리즈 팀 최소 득점(4점),[28] 최악의 팀 평균자책점(8.63), 최소 팀 홈런(0개)[29] 등등 한신이 보여준 경기력은 일본시리즈 역사상 최악의 경기력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이 시즌의 롯데는 비록 퍼시픽 리그에서 2위를 했지만 승률이 0.632였고 오히려 센트럴 리그 우승팀인 한신 보다 승률이 훨씬 더 높았다.[30] 그럼에도 한신이 롯데를 꺾고 우승 할거라는 말이 나온 것은 당시 퍼시픽 리그에서는 2004 시즌부터 시행된 A클래스 팀만 참가하는 플레이오프가 있었는데, 이 제도는 정규 시즌1~3위 팀이 토너먼트를 벌여 2~3위팀이 제 1스테이지를 치르고 제 1스테이지 승자와 정규 시즌 1위 팀이 제 2스테이지를 치뤄서 플레이오프 승자 팀을 퍼시픽 리그 우승 팀으로 만들고 일본 시리즈에 보내는 제도였다. 롯데는 당시 퍼시픽 리그 2위 팀이 였지만 세이부와 소프트뱅크를 차례대로 꺾고 퍼시픽 리그 우승 팀이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전력과 체력을 많이 소비하였다.[31]

그래서 얼핏보면 롯데가 소프트뱅크와 플레이오프 혈전으로 많이 지친 상태인 상태로 한신과 일본시리즈를 가진것 같지만 실상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우선 당시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는 제1스테이지가 10월 8일부터 10일까지(실제로는 치바롯데가 세이부를 2-0으로 스윕하여 9일에 종료), 제2스테이지가 10월 12일부터 10월 17일까지 진행이 되었고 일본시리즈는 10월 22일에 시작했다. 즉 플레이오프의 제 2스테이지가 5차전까지 갔어도 최소 4일 동안 휴식시간이 있었고, 롯데는 이 기간동안 전력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신은 정규리그 최종전을 퍼시픽리그 제1스테이지가 시작하기도 전인 10월 5일에 치렀고, 최종전 이후 일본시리즈 이전까지 무려 16일 동안 휴식기간을 두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지나치게 길게 쉬다 보니 한신은 경기감각을 잃어버리고 만다.[32][33] 물론 NPB도 아주 생각이 없는 건 아니라서 센트럴리그 개막일(4월 1일)을 퍼시픽 리그(3월 26일)보다 1주일 늦게 하고, 센트럴 리그의 경기수(146경기)를 퍼시픽 리그(136경기)보다 10경기 더 배정했지만,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자체가 퍼시픽 리그가 종료되고 한참 이후에 치러지는 바람에[34] 이 사단이 나게 된 것. 즉 애초에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자체가 센트럴 리그의 우승팀에게 불리한 제도였고[35], 4일 동안 쉬고 온 롯데가 한신을 이렇게 털었는데 만일 롯데가 소프트뱅크를 스윕하고 8일 동안 쉬고 한신을 상대했으면 어떻게 됐을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스코어보드를 보면 알겠지만 경기 중반까지는 비교적 팽팽하게 진행되다가 6회 이후 빅이닝을 내주면서 단숨에 무너지는 패턴이 세 경기 연속으로 벌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세 경기의 전개가 어떻게 흘러갔냐면, 1차전은 에이스 이가와가 5회까지 이미 4실점하며 털려버렸는데도 6회에 또 올려 기어이 5실점 채우고, 7회에 신인 추격조 투수 하시모토가 올라왔는데 0.1이닝 동안 홈런 2방에 5실점을 하는 끝에 농무 콜드게임을 당한다. 2차전은 선발 안도가 5회까지 2실점으로 그럭저럭 막고 있었는데, 6회에도 올려서 아웃카운트 하나 잡는 동안 홈런 두 방 맞고 3실점을 추가로 해서 5실점 채우고 강판, 추격조 투수 에구사가 올라와 2.2이닝 동안 또 5실점을 했다. 3차전은 선발 시모야나기가 5회까지 3실점을 하고 6회에 후지카와가 올라와서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는데, 후지카와를 7회에도 올렸다가 아웃카운트 하나도 못 잡은 채 4실점을 당하고 강판, 이후 올라온 추격조 사지키하라도 아웃카운트 하나도 못 잡고 후쿠우라에게 만루홈런을 맞으며 3실점(1점은 후지카와 승계주자)을 당해 그대로 셧아웃. 한신 팬들이 우주최강이라고 자부하던 필승조 트리오인 JFK를 보유한 팀의 경기 패턴이라고는 믿기 힘든 전개이다. 사실, 이 3경기에서 JFK가 무너진 것은 3차전 딱 한 번이 전부다. 그나마도 F( 후지카와 큐지)만 출전해서 털렸고(1이닝 4실점 3자책), 나머지 둘은 1-3차전 내내 등판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 이유는 당시 한신 감독인 오카다 아키노부가 'JFK는 필승조'라는 명분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 중반 이후 리드를 잡으면 6~7회부터 JFK를 투입해 확실하게 경기를 매조진다는 것이 오카다 감독의 기본 전략이었는데, 문제는 그 세 경기 동안 한신이 한번도 중반 이후 리드를 잡지 못했다는 점이다. 테이블 세터든 클린업 트리오든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삼진과 범타, 병살타를 양산하기 시작하면서 리드는 꿈도 꿀 수 없었고, 도리어 5회까지 롯데에게 근소하게 리드를 허용하는 예상 외의 전개에 JFK의 투입시점을 결정하지 못해서 선발을 조금 더 길게 가져가려다 그 선발이 털려 점수차가 감당 안 될 정도로 벌어지자 경기를 포기한 듯 추격조를 올리는 패턴이 반복된 것. 단기전에서는 선발이 털릴 조짐이 보이면 필승조라도 주저없이 꺼내서 실점 위기를 차단하고, 3차전처럼 필승조 중 하나가 털릴것 같다 싶으면 다른 필승조를 바로 꺼내는 과감함을 보여야 하는데, JFK는 승리조라는 명분에 지나치게 빠져 JFK의 투입시기를 놓친 것이 이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한신 대참패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36][37]

1, 2차전 마린 스타디움에서 콜드게임급의 대패를 당하자 한신의 코칭스태프는 부랴부랴 투수 운용 계획을 변경했고 상황에 상관없이 필요하면 JFK를 경기 중반에 조기에 투입하기로 방침을 변경했다. 그러나, 3차전은 1-3으로 지고 있는 6회에 JFK의 F인 후지카와 큐지를 올려 1이닝을 막는데 성공하지만, 하필 7회까지 추가로 맡겼는데 후지카와가 아웃카운트를 하나도 못 잡고 4실점을 하며 빅 이닝을 내주고 말아 1, 2차전과 똑같은 전개를 맞고 만다. 한신이 자랑하는 JFK 중 하나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F가 4실점이나 하는 통에 3경기 연속으로 콜드게임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 한신 선수단은 멘붕 상태에 빠진다. 이미 대세는 치바 롯데에게 넘어가 있었고, 그나마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4차전은 최소 실점으로 버텼으나 플래툰 취급 받던 이승엽에게 결승 홈런을 얻어맞으면서 한신은 멸망했다. 그야말로 단기전에서의 지휘관의 임기응변과 유연한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극명하게 드러낸 한판이었다.

그 외의 패인이라면 초반에 리드를 잡거나 리드를 내줬을 때 점수를 내지 못해서 JFK의 투입시기를 잡지 못하게 만든 물방망이도 들 수 있다. 한신의 물방망이가 얼마나 심각했냐면, 4번타자 카네모토 토모아키4차전이 되어서야 첫 안타를 쳐내고, 카네모토의 2005년 일본시리즈 타율은 1할이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4차전에서 한신은 9회말 번트 실패를 비롯한 병살을 4개씩이나 치는 막장 타선을 보여준다.

요약하자면 센트럴 리그의 불합리적인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제도와 한신의 고집된 운영 및 임기응변 부족이 불러온 참사라 말할 수 있겠다.

또한, 여담으로 한신 오카다 감독이 본격적으로 이승엽에게 눈을 들이기 시작한 계기가 이때의 일본시리즈였다. 홈런 3방은 물론, 4차전은 이승엽 혼자 캐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의 대활약을 펼쳤고, 그 다음해인 2006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해서 41홈런을 쳤고 이 때도 특히 한신을 상대로 엄청나게 강했다. 이승엽의 일본 생활 말년 극도의 부진으로 요미우리에서 방출당했을 때도 오릭스 버팔로즈 감독으로 자리를 옮긴 오카다의 적극적인 요청으로 이승엽은 오릭스의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고, 이승엽의 일본 마지막 해인 2011 시즌, 낮은 타율에도 오카다는 이승엽은 홈런타자라 충분히 위압감이 있다며 끝까지 감쌌다. 심지어 2011년 시즌 후 이승엽이 한국프로야구 복귀 의사를 밝히자 한국에 돌아가지 말고 오릭스와 재계약을 하자고 했을 정도였다. 물론 이승엽이 2012년부터 외국인 쿼터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이점(일본에서는 외국인 선수가 8시즌을 채우면 그 뒤로는 팀 외국인 쿼터에 들어가지 않고 내국인과 동일한 취급을 받으며 그만큼 외국인 선수를 하나 더 쓸수 있다) 때문이 크긴 했지만, 일본 야구계에서는 실제 수치상 성적에 비해 이승엽을 높이 평가하는 야구인들이 상상외로 굉장히 많다.[38]

5. 우승반지

파일:ph_70thGoods02.jpg
https://youtu.be/BsgwzyvKwgM

6. 흑역사의 재발굴

시간이 흘러 2010년 일본시리즈에서 주니치 드래곤즈 치바 롯데 마린즈가 대결하게 되었다. 그맘때쯤이면 늘 일본시리즈를 치르니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이 경기를 중계하는 NHK는 광고를 내보내지 않으므로 공수 교대시간같이 남는 시간을 각 팀의 옛 일본시리즈 대결모습을 리피트 하는걸로 대신했는데, 치바 롯데 마린즈의 경기를 돌아본다면서 하필이면 2005년의 33-4의 참사를 한신 팬들의 잊고 싶은 과거를 자꾸 리마인드시켜 고통받게 하려는 건 아닌지 착각할 정도로 계속해서 재생했다.[39]

사실 이게 또 어쩔 수가 없는 게, 롯데가 구단을 인수한 뒤 우승은 이 해를 제외하면 1974년밖에 없었기 때문에 롯데의 옛 일본시리즈 모습이라고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우승이 아니라 일본시리즈 진출만으로 따져도 그 외에는 1970년이 유일했고[40], 전신까지 합쳐봐야 일본시리즈 진출은 1950년 마이니치 오리온스, 1960년 다이마이 오리온스로서 진출한 게 전부다. 물른 저 시기의 방송자료가 남아있었다면 틀어줬겠지만 없었기 때문에 결국 2005년 일본시리즈 자료화면을 반복적으로 트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상대팀인 주니치는 불과 3년 전에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했었고, 일본시리즈 진출도 1980년대 이후로만 따져도 1982, 1988, 1999, 2004, 2006, 2007년, 무려 6회 진출의 풍부한 기록 덕분에 활용할 수 있는 자료화면이 풍부한 상태였다. KBO 리그로 비유하자면, KIA와 두산이 맞붙은 2017년 한국시리즈 기간에 2009년 SK를 상대로 7차전 끝내기 홈런을 날리는 KIA 나지완의 모습을 계속 틀어줘서 SK 와이번스 팬들이 고통받은 사건과 비슷하다.[41]

어쨌거나 결국 이 때문에 인터넷 등지에서 2005년 일본시리즈가 재조명 받게 되었고, 2ch에서도 이 이야기로 스레가 대량 양산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를 보다 못한 한신팬이 트라우마를 버틸 수 없었는지 이렇게 글을 남겼다.
なんでや![ruby(阪神, ruby=はんしん)][ruby(関係, ruby=かんけい)]ないやろ!
와 이라노! 한신은 아무 상관 읎따 아이가![42]

2ch에선 이 발언을 얼씨구나 하고 네타화시켰고, 이후 인터넷 상에서 널리 츳코미의 필수요소로 쓰기 시작했다. 용례는 뭔가 334랑 연관되는[43] 글이나 절망적인 상황, 뭔가 허탈한 상황에선 전부 33-4, 33[ruby(対, ruby=たい)]4(33 대 4), [ruby(阪神算, ruby=はんしんざん)](한신산, 33-4=?), ち~ん(笑)(칭~(웃음)[44]), なんでや!阪神関係ないやろ!(와 이라노! 한신은 아무 상관 읎따 아이가!), な阪関無(와한상읎) 등등으로 대답하는 것. 이로서 한신팬들은 일본 인터넷 상에서 끊임없이 고통받게 되었다. 그나마 2014년, 9년만에 일본시리즈에 진출하여 이런 조롱을 만회할 기회를 얻었으나, 니시오카 츠요시의 거대한 삽질로 인해 조롱의 수명이 연장되는 것으로도 모자라 끝내기 수비 방해 시리즈 패배라는 오명이 추가되었다. 추가로 그 끝을 장식한 니시오카는 2005년 롯데의 중심 선수였으며, 2014년 일본시리즈 마지막 경기인 5차전의 경기시간이 우연히 3시간 34분이었다는 점을 들어 새로운 네타거리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참고로 구글에서 '33-4 意味'라고 검색어를 검색하면 '이것을 찾으셨나요?'에 자동으로 한신 타이거스가 검색되었으며 2015년 3월 이후로는 나오지 않았지만, 2016년부터 다시 검색어에 등재되었었다. 2022년 기준으로는 저 검색어를 입력하면 한신 타이거스가 나오는게 아니라 그냥 33-4가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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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23년 일본시리즈에 다시 한신이 진출하자, 암표상들이 리셀 사이트에 일본시리즈 티켓을 팔기 시작했는데 가격을 33400엔으로 책정해 한신팬들을 놀리고 있다. 하필 퍼시픽 리그 파이널 스테이지에 롯데가 아등바등 버티고 있어서[45] 2005년의 재림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롯데는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46] 대신 일본시리즈 역사상 2번째 간사이 더비가 열리게 되었고 여기에선 한신이 7차전 접전 끝에 꿈에도 그린 최종 우승을 달성하면서 이 밈은 요미우리의 26-4로 옮겨가긴 했는데, 아무래도 33-4의 임팩트가 너무나 큰 탓에 33-4만큼의 화제는 되지 못하고 있다.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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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키☆스타에 나타난, 30년간 우승 못한 팀의 비애가 드러난 짤로 이 때가 한 해 전인 2004년이었다.[48] 이게 나온지 1년만에 우승함으로써 짤방의 유통기한은 1년으로 끝났다.[49] 이는 11년 뒤 바다 건너 어느 구단 유통기한 4년짜리 영상을 생각하면 된다. 2005년 우승 이후 러키스타 만화에서 롯데 팬인 쿠로이 나나코(위 짤방의 선생님)가 롯데 우승에 대해 언급하며 기뻐하는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 2005년은 한신 타이거스의 모기업 한신 전기철도의 경영 문제[50]가 발생한 해이기도 하다. 결국 무라카미 펀드의 대표가 구속되면서 한신 전기철도(+ 한신 타이거스)가 한큐에 인수되었다.
* 이 해에는 공교롭게도 한, 미, 일, 대만 4개국의 프로야구의 최종시리즈가 모두 4연승 스윕으로 끝났다. 그리고 1990년 이후 15년 만에 KBO 한국시리즈, 월드시리즈, 일본시리즈가 모두 4연승 스윕으로 끝났다.[51]
* 2005년 한국시리즈 - 삼성 라이온즈 4:0 두산 베어스
* 2005년 월드 시리즈 - 시카고 화이트삭스 4:0 휴스턴 애스트로스
* 2005년 일본시리즈 - 치바 롯데 마린즈 4:0 한신 타이거스
* 2005년 대만시리즈 - 싱농 불스 4:0 청타이 코브라스
* 이 시즌 끝나고 퍼시픽 리그의 플레이오프 제도를 손봤는데 2005년 당시에는 1위 팀과 2위팀이 5게임 이상 벌어져야 1승 어드밴티지를 주는 규칙이 있었다. 문제는 소프트뱅크 호크스(2004년에는 다이에 호크스)가 2004년과 2005년에 정규시즌 1위를 먹었는데 두 시즌 모두 2위와 4.5게임차로 마쳐서 어드밴티지를 못 받고 플레이오프에서 모두 최종전까지 가서 2승 3패로 떨어지자 2006년에 게임차와 상관없이 무조건 1위팀에게 1승 어드밴티지를 넣는 걸로 바꾸었다.[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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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담으로 이 해 개막 2번째 경기에서 롯데는 신생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경기에서 26:0이라는 기록적인 점수차로 승리를 거뒀다. 그 해 롯데는 라쿠텐과 개막전을 치르게 되었는데, 이와쿠마 히사시를 앞세운 라쿠텐이 개막전에서 3:1로 승리를 거두자 신생팀에게 개막전부터 첫 승을 헌납한 게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했는지 그 다음 경기에서 와타나베 슌스케의 완봉과 타자들의 불꽃놀이로 라쿠텐을 씹어먹었다. 경기 후 발렌타인 감독이 사진처럼 팬들을 위하여 준영구결번으로 지정해 놓고 덕아웃에 걸어 놓았던 26번 유니폼[54]을 들고 나와서 라쿠텐을 조롱하기도 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롯데가 일본시리즈까지 우승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이 기록적인 대승을 계기로 선수들이 각성하여 분위기를 타고 승승장구한 결과 결국 31년 만의 일본시리즈 진출에 이어 일본시리즈 우승까지 달성했다.
* 이승엽은 이 시리즈에서 4차전 결승 홈런 포함 시리즈 최다인 3홈런을 때려내고 11타수 6안타 타율 .545에 시리즈 최다인 6타점을 기록하는 등 여느 시리즈였다면 충분히 MVP를 노릴법한 성적이었으나 1~2차전 전타석 안타인 8연타석 안타 포함 타율 .667(15타수 10안타) 1홈런 4타점 OPS 1.667을 기록한 이마에 토시아키의 포스가 너무 막강해서 MVP는 타지 못하고 우수선수상만 수상했다.[55] 이마에는 2010년 일본시리즈에서도 .444의 타율에 6타점을 얻는 활약을 보이며 롯데의 극적인 우승을 이끌었고 또 한 번 MVP를 탔다. 이마에의 활약을 요약한 영상. 덤으로 이 시리즈로부터 10년 뒤인 2015년 일본시리즈에서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이대호가 시리즈 MVP를 차지하며 최초의 한국인 일본시리즈 MVP가 탄생했다.
* 특이한 기록으로, 이승엽은 시리즈 내내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모든 포지션으로 출장한 기록이 있다. 불과 4시합동안 1루수, 지명타자, 좌익수, 대타로 전 시합을 다른 포지션으로 출장하였다. 순서대로 1차전 지명타자, 2차전 1루수, 3차전 대타(후 좌익수), 4차전 좌익수 순.
* 이 시리즈로부터 9년 후, 한신은 자신의 최대 라이벌에게 이 시리즈에서 겪은 수모를 그대로 겪게 해줬지만, 그 후에 벌어진 일본시리즈에선...
* 2015 WBSC 프리미어 12 일본 대표팀과의 대결에서 대한민국이 3:0으로 지고 있던 9회초 이대호의 역전 적시타로 4:3으로 역전승하게 되자 한 일본인이 트위터 33:4으로 스코어를 합성한 사진을 올렸다. 이 패러디를 눈치챈 일본 야빠들의 리트윗은 なんでや! 로 홍수. 하얀 안개에 대해 잘 모르는 한국인은 져놓고 정신승리한다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실제로는 자기네들끼리 한신을 놀리면서 웃고 노는 수준이다. 이는 9회초 무사에서 6연타석 출루로 역전당하는 희대의 졸전 속에서 현실을 잠시 잊고 웃음을 찾으려는 모습으로 보면 된다. 한국에서는 카림 가르시아의 홈런짤에서 비롯된 8점 홈런을 생각하면 그 의도가 비슷한데 경기는 졌지만 웃음거리라도 찾는 반쯤 자조적인 유머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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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모 팀 4월 14일- 15일 단 이틀만에 35-4라는 이보다 더 충격적인 스코어를 냈다. 물론 두 경기의 상대가 각각 다르긴 했지만. 참고로 그 당시 35실점을 한 팀의 감독은 2005년 치바 롯데 소속으로 30홈런을 친 외국인 선수의 개인 인스트럭터를 맡았었다.
* 2016년 한국시리즈에선 이것보다 더 막장인 '20-2'가 나왔으며 단순히 2배 곱하면 40-4가 된다.
* 나무위키에서 가장 처음 작성된 일본시리즈 연도별 문서인 동시에 야외구장에서만 개최된 최근의 일본시리즈다.[56]
*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뛰었던 선수 중 한국과 연관 있는 선수로는 당연히 이승엽이 있기에 잘 알지만, 한신 타이거스 선수 중에도 한국과 인연이 있는 선수가 있다. 바로 2016년부터 2019년까지 키움 히어로즈 2군 감독이었던 셰인 스펜서. 3차전에 대타로, 4차전에 6번 타자 우익수로 선발출장했다.[57]
* 이 시리즈에서 롯데가 31년 만에 우승을 거두면서 2006년 일본시리즈 닛폰햄이 44년만에 우승, 2007년 일본시리즈에선 주니치가 53년만에 우승을 거두면서 2005-2007 3년의 시리즈에서 우승팀의 이전 우승 텀이 각각 30, 40, 50년이라는 진풍경을 보여줬다.
* 한신 타이거스는 2015년 교류전에서 오릭스[58] 상대로 3경기에서 스윕 패배+2-26이라는 스코어를 기록하면서 33-4의 교류전 버전이라는 말을 들었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2.26 사건이 있다 보니 이 일화도 2.26 사건으로 종종 불린다. 근데 오릭스도 2016년에 소프트뱅크 상대로 22-6 패배를 당해서 이 날도 2.26 사건으로 불린다. 2-26 vs 22-6
* 이 시리즈에 출전한 양팀 선수들 중 마지막까지 현역으로 뛴 선수는 당시 한신의 주전 유격수였던 토리타니 타카시. 공교롭게도 2010년 한신에서 롯데로 이적하며 두 팀을 모두 경험하게 됐다.
파일:334왜곡.jpg
* 말도 안 되는 스코어의 한신의 우승으로 왜곡한 짤방도 있다(...).
* 니코니코 동화 5ch(舊 2ch) 등지에서는 허무한 곳에서 33-4를 쓰는데, 이를 변형해서 66-8, 99-12, 심지어는 297-36 등 배수를 쓰기도 한다. 가끔 1089-16 등 제곱 형태도 보인다.
* 33-4만큼의 임팩트는 아니지만, 17년 뒤 바다 건너 롯데 역시 23-0이라는 비슷한 흑역사를 기록하게 되었다. 참고로 그 참사의 가해자는 옆동네 타이거즈다.
* 당시 한신의 감독이던 오카다 아키노부는 이후 한신에 재부임한 뒤 18년 뒤인 2023년 일본시리즈에서 오릭스 버팔로즈를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4승 3패로 꺾고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이 당시의 아픔을 털어내는 데에 성공하게 된다. 당시 현역 선수 중에서는 안도 유야, 쿠보타 토모유키, 이마오카 마코토, 후쿠하라 시노부가 코치로 우승을 함께했다.

8.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0000><tablebgcolor=#000000> 파일:치바 롯데 마린즈 로고.svg 치바 롯데 마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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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문서
<colbgcolor=#cccccc,#323232><colcolor=#20272c,#d3dade> 모기업 정보 파일:롯데(일본) 로고.svg 롯데홀딩스
일본시리즈 우승
★★★★
1950 · 1974 · 2005 · 2010
리그 우승
(5회)
1950 · 1960 · 1970 · 1974 · 2005
퍼시픽리그 전·후기 우승
(4회)
1974후기 · 1977후기 · 1980전기 · 1981전기
클라이맥스 시리즈 2007 · 2010 · 2013 · 2015 · 2016 · 2020 · 2021 · 2023
시즌별 요약 2018 · 2019 ·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현역 선수 경력 이시카와 아유무/선수 경력 · 사사키 로키/선수 경력 · 사와무라 히로카즈/선수 경력 · 마스다 나오야/선수경력
핵심 인물 구단주 신동빈구단주 대행 카와이 카츠미| 감독 요시이 마사토2군 감독 사부로
선수회장 나카무라 쇼고 | 주장 나카무라 쇼고
경기장 1군 ZOZO 마린 스타디움2군 롯데 우라와 구장
홈 중계 채널 파일:닛테레뉴스24 로고.jpg
구단 상세 역사 선수단 및 등번호 역대 선수 | 유니폼 | 응원가 | 집시 롯데 | 10.19 | 칠석의 비극
틀 문서
코칭스태프 투수 포수 내야수 외야수 | 역대 감독 | 역대 1라운드 지명선수 | 역대 개막전 선발 선수 | 롯데그룹 산하 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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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차전까지만 따지면 30-2다! 이때 치바 롯데는 꼬박 10점씩 냈다. [2] 아래 유튜브의 당시 상황을 녹화한 동영상이 올려져 있어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지만 이미 치바 롯데가 다득점한 상태에서 절묘하게 안개가 짙어졌는데 그게 치바 롯데의 7회말 공격때였다. [3] 여담으로 이마오카의 저 147타점이 정말 변태스탯인 것이, 타율 0.279/출루율 0.346/장타율 0.488, OPS 0.834, 29홈런의, 홈런을 제외하면 정말로 평범한 비율스탯으로 찍은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역대 타점 기록자들은 타출장 3/4/5~6할에, OPS 1.0을 넘기는 MVP, 트리플 크라운급 비율스탯을 기록했다. 예를 들면 퍼시픽 리그 역대 기록인 146타점을 기록한 1985년 오치아이 히로미츠의 성적은 .367/.481/.763 52홈런 OPS 1.244였고 센트럴 리그 역대 2위인 153타점을 기록한 1999년 로버트 로즈의 성적이 369/.439/.655 37홈런 OPS 1.094였다. 이마오카는 이 해 득점권 타율 0.371을 기록했고, 특히 만루 상황에서는 타율 0.600, 만루홈런 4방을 때려내 49타점을 버는 경이적인 클러치 능력을 보였다. 하지만 이 역대급 시즌 이후에는 온갖 잔부상에 시달리며 급격하게 기량이 떨어져 주전 자리를 잃게 되었고, 2009년 전력 외 통고를 받은 후 트라이아웃을 거쳐 2010년에 치바 롯데 마린즈에 입단한 뒤 2012년에 은퇴했다. 공교롭게도 이마오카는 2010년 백업 겸 대타 요원으로서 롯데의 극적인 일본시리즈 우승에 함께했다. 2018년 현재 이마오카는 치바 롯데 마린즈의 2군 감독으로 있다. [4] 그도 그럴게 한신은 센트럴리그의 압도적 강자로 기세를 탔었고 치바롯데는 퍼시픽 리그 1위가 아니었다. 퍼시픽 최강자는 소프트뱅크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치바롯데가 업셋으로 올라오게 되자 한신팬들은 내심 잘됬다며 기대를 한껏 부풀렸었던 상황, 전문가들의 예측도 전반적으로 한신의 우세를 점치는 경향이 짙었다. [5] 1라운드 vs 세이부 라이온즈, 2라운드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당시엔 플레이오프 우승팀이 퍼시픽리그 우승팀이 되는 제도였다. [6] 지금도 플레이오프 제도에서 이어진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도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일본 야구인들과 야구팬들은 여전히 많은데, 주로 강팀 팬덤들쪽에서 이런 성향. 오릭스, 요코하마 등 하위권 팀의 팬덤에선 정반대의 성향이다. [7] 반면에 대한해협 건너에 있는 대한민국의 야구는 포스트시즌의 비중이 높아서(다만 그 포스트시즌 역시 정규시즌 성적이 안 좋으면 얄짤 없다), 그 곳에서 죽쑤면 정규시즌 우승은 그냥 묻혀버린다. 예를 들면 이 때의 삼성 라이온즈와 이 때의 두산 베어스. [8] 그래도 지바 롯데의 정규시즌 성적은 84승 49패 3무로 승패마진 +35에 승률이 무려 0.632였고 오히려 87승 54패를 한 한신보다 승률이 더 높았다. 단지 소프트뱅크가 너무 사기적인 승률(89승 45패 2무 승률 0.664)을 올려 1위를 못했을뿐... 사실 이 성적 인플레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창단 후 첫 시즌이라 라쿠텐이 38승 97패 1무 0.281의 승률을 기록하면서 나머지 5팀에게 승수를 마구 퍼준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만, 그래도 이해 3위 세이부가 67승 69패 승률 .493으로 5할에도 다다르지 못한 것도 생각해보면, 이 두 팀의 포텐이 거의 과다하게시피 터진 해라고도 볼 수 있다. 다만 이 해 피타고리안 승률은 퍼시픽리그 최다인 713득점을 기록한 롯데가 소프트뱅크보다 7리나 앞설 정도로 득점/실점 차는 '마린건 타선'을 앞세운 롯데가 더 유리했다. 이 해 롯데 타선은 소프트뱅크와 비슷한 OPS에도 불구하고 100점 이상을 더 내며 NPB 역대급의 효율로 점수를 뽑아낸 타선으로, 그저 호크스가 의외로 잘 나가는 바람에 다소 운 없게 2위를 기록했던 것.. [9] 당시 전후기리그 체제로 진행된 퍼시픽리그 페넌트 레이스에서 전기리그를 우승하였으나 플레이오프에서 닛폰햄 파이터즈에게 패해서 리그 우승에 실패, 시리즈 진출이 좌절되었다. [10] 이때도 후기리그 우승 후 플레이오프에서 전기리그 우승팀 한큐 브레이브스를 꺾고 리그 우승. 이후 일본시리즈에서 교진군의 V10을 저지한 주니치 드래곤즈를 꺾고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1] 이 해의 소프트뱅크는 36게임 체제로 진행된 교류전에서 유일하게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한신을 상대로 3연전을 스윕한 팀이었다. 그리고 이 기록은 퍼시픽리그 유일의 코시엔 3연전 스윕기록이기도 하다. 한신 코시엔 구장에만 오면 퍼시픽리그 팀들이 알아서 오금이 저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한신 팬들은 한수 위의 기량으로 한신을 유린하는 소프트뱅크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으며, 그래서 소프트뱅크는 일본시리즈에서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악몽과도 같은 상대였다. [12] 그리고 소뱅에게 찾아온 것은 가을야구 잔혹사였다. 이 이후에는 포스트시즌에서 계속 패퇴하다가(거기다 왕정치 감독 마지막 해인 2008년엔 후반기까지 3위하다가 막판 연패로 순식간에 꼴찌로 추락해버렸다.) 2011년에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는데, 그 때마저 마무리가 안 좋았다. [13] 그 전 상대였던 다이에 호크스는 18년만에 처음으로 가을야구를 하는 한신과는 반대로 직전 5년동안 리그 우승 3번, 일본시리즈 우승 1번, 2위 2번을 기록한 강팀이었다. 20자리 비밀번호를 찍던 시절의 지리멸렬한 모습은 완전히 청산하고 강팀의 지위를 확고하게 굳혀가는 팀이었다. 즉, 2003년과 2005년의 한신은 입장이 완전히 반대였던 셈. [14] 막판에 연패를 좀 해서 그렇지 9월 15일에 우승을 확정지을 정도로 여유롭게 우승하긴 했다. 하지만 18년만의 우승도전이라 매직넘버가 켜진 이후로 간사이 지역의 팬들과 미디어의 조급증이 극에 달해서 한경기 한경기 결과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오죽하면 우승을 확정짓고 우승감독 인터뷰에서 철권으로 유명한 그 호시노 감독이 대놓고 힘들다고 할 정도에 시즌 종료 후 스트레스로 인한 건강문제로 사임할 정도니.. 그 중압감은 상상을 초월한 수준이었다. [15] 다른리그 이야기지만 매년 강팀이 오랜기간 휴식하며 하위라운드에서 올라오는 팀을 상대하는 KBO 한국시리즈의 경우 2001년 부터 2020년까지 정규리그 1위팀이 한국시리즈 우승에 실패한게 20번 중 고작 3번에 불과하다. 정규리그 1위팀이 애초에 전력이 강하기 때문에 업셋이 힘들지만 당시 한신과 지바롯데 역시 상술하였듯 전력차가 있다고 평가받았다. [16] 해당 문서를 참조해 보면 알겠지만 둘 다 설레발 친게 문제다. [17] 다만 위에서도 이미 언급했거니와 한신 팬들의 입장에서, 이때의 한신은 센트럴 리그 패왕으로 활약하고 있었고 치바 롯데는 플레이오프란 ‘꿀혜택’을 받고 올라온 팀이니 비교대상 자체가 될 수 없었으며 소프트뱅크였다면 몰라도 치바 롯데 ‘따위’가 한신을 이긴다는건 꿈도 못꿀 일이었다. 당장 이 일본시리즈 전까지 치바 롯데가 우승한것이 1974년이었다. [18] 아래 당시 상황의 동영상에 나와있지만 실제로 6회까지는 경기가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승엽이 6회말 이가와로부터 1점 홈런을 뽑아내는 순간에 약간 안개가 낄 낌세가 보이긴 했지만서도 그다지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조금 짙어진것 같은데?’란 느낌이 든 것은 7회초 한신의 공격때였으나(동영상에서도 경기 중계진들이 안개가 약간 짙어진것 같다는 내용의 코멘트가 포함되있다)이때도 여전히 경기에 지장을 줄 상황은 아니어서 정상적인 경기 진행이 이뤄졌다. 그랬던것이 7회말 치바 롯데 이마에의 타석에서부터 심상찮게 전개된 것이다. [19] 안개, 우천 등의 자연현상은 1953년 교진 vs 난카이의 일본시리즈 3차전에도 우천으로 인한 콜드게임이 있었지만 이때는 2:2라서 무승부였다. [20] 안개가 드리우기 시작한것이 3분 30께다. [21] 위의 동영상에도 나오지만 안개가 짙어진게 7회말 치바 롯데 공격때였다(정확히는 이마에 토시아키 타석때). 게다가 사람을 식별할 수 조차 힘들어지게 짙어진 상황이 사토자키가 쓰리런을 치고 난 때였고 결정적으로 이때는 아직 원아웃이었다! 당연히 한신 팬들은 ‘7회말 홈팀 공격->치바 롯데 다득점 중->아직까지 원아웃->안개가 갈수록 짙어짐->경기 진행 불가능->주심의 콜드게임 선언->치바 롯데 승리‘란 논리를 내놓은 것이다. [22] 참고로 한신팬들의 반응은 당시 한신 타이거스 공식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의 분위기다. 지금은 자유게시판이 없어졌지만, 당시 한신 공홈 게시판에는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롯데는 구단주 자이니치라서 비열하게 구장에 연막을 피우고도 남을 팀"라는 헛소리를 하는 인간들도 있었다. 물론 그러다가 제정신인 팬들로부터 ' 우리팀 4번타자하고 프랜차이즈도 자이니치인데?'하고 역풍을 맞았다. 여담으로 가네모토 도모아키는 2005년까지, 히야마 신지로는 2016년까지는 대한민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23] 敢闘選手賞. 일본시리즈 패배팀 중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선수에게 주는 상의 이름이다. [24] 한신의 JFK(한신)에 대응해 YFK라 불렸다. 이 조합은 2010년 다시 등장하는데 이때는 후지타 소이치, 고바야시 마사히데가 요미우리 소속인 상황이라서 후루야 다쿠야-야부타 야스히코-고바야시 히로유키 조합으로 바뀌었다. [25] 이 4차전이 이번 시리즈의 유일한 근소 점수차 경기였다. [26] 국적으로 따지자면 대만 국적으로 1999년 일본시리즈를 제패한 다이에 오 사다하루( 왕전즈)가 먼저이긴 하지만, 오 사다하루는 출신지도 일본에 학교도 일본에서 이수한 덕택에 NPB 분류상 외국인이 아닌 내국인으로 분류되어 공식적으로는 바비 발렌타인이 최초의 외국인 일본시리즈 우승 감독으로 기록되었다. 오 사다하루는 과거 요미우리 감독을 맡기도 했는데 이 또한 최초의 외국인 감독은 아니고 이팔룡에 이어 두 번째로, 요미우리의 역대 감독들 중에 외국 국적으로 감독직을 수행한 것은 이 둘 뿐이다. 다만 이팔룡은 6.25 전쟁 이후 일본으로 귀화했다. 1974년 롯데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끈 가네다 마사이치가 최초 아니냐고 할 수도 있는데, 가네다는 그 당시 이미 일본으로 귀화한 상태였다. 다만 1974년 일본시리즈 때 롯데가 아니라 롯데의 상대팀 주니치 드래곤즈가 우승했다면 정말로 최초의 외국인 일본시리즈 우승 감독이 훨씬 더 일찍 나올 수 수 있었다. 당시 주니치 감독이었던 요나미네 카나메 일본계 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인들은 대부분 요나미네도 '외국인'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27] 이에 부합하는 예가 2008년 월드 시리즈 5차전이었다. 해당 경기 참조. 5회까지 마친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비로 경기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는데, 월드 시리즈는 MLB 커미셔너가 주관하는 경기인지라 경기 중단이나 속개의 권한 역시 커미셔너에게 있었다. 결국 이틀 후에 속개하여 시리즈가 마무리됐다. [28] 참고로 한미 기록이자 세계기록은 NC 다이노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2점. 참고로 두 팀은 2020년에 나란히 한국시리즈 우승과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머쥐었다. [29] 일본시리즈 팀 무홈런은 사상 최초. 참고로 한신은 이 기록을 9년 후에 한번 더 세운다. [30] 다만 이 해의 퍼시픽리그는 100패 3보직전까지 간 신생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덕분에 라쿠텐을 제외한 모든 팀들에게 승률 인플레이션이 있었던 것은 고려해야 한다. [31] 특히 소프트뱅크와의 2스테이지에서 롯데는 전력상 열세라는 예상을 뒤엎고 1, 2차전을 낙승한데 이어 3차전마저 9회초까지 4:0으로 앞서 3연승으로 가볍게 일본시리즈에 진출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9회말에 올라온 팀의 마무리 투수 고바야시 마사히데가 믿을 수 없게도 거대한 불을 지르며 4실점으로 4:4 동점을 허용하였고 결국 연장전에서 롯데가 패했다. 여세를 몰아 소프트뱅크가 4차전까지 가져가 시리즈 스코어는 2승 2패로 타이가 되었으며, 분위기를 탄 이상 최종 5차전도 가져갈 것으로 보였으나 롯데가 천신만고 끝에 1점차 역전승을 거두고 일본시리즈에 진출하였다. [32] 이러한 제도는 클라이맥스 시리즈가 도입된 이후에도 적용이 되었다. [33] 실제로 KBO 리그에서 1987년 한국시리즈 삼성 라이온즈 해태 타이거즈랑 상대할때 이런 일정문제 때문에 당했다. 여기도 OB와 해태가 플레이오프 5차전까지 가는 혈전을 벌였지만, 전국체전 일정과 겹치는 바람에 플레이오프 종료 이후 한국시리즈까지 8일이라는 휴식 기간이 주어졌고, 한국시리즈에 직행한 삼성은 10월 5일 해태와의 정규리그 최종전 이후 10월 21일 한국시리즈를 하기 전까지 15일을 쉬어버려 경기감각을 다 잃어버린 것. 휴식일정이 되려 상위팀에게 독이 된 셈이다. [34] 이 해 퍼시픽 리그는 9월 28일에 정규리그 최종전을 진행하였다. [35] 상기한대로 당장 작년 주니치 드래곤즈가 당했다. 이후 주니치는 2006년 일본시리즈에서도 닛폰햄에게 무릎을 꿇었다. [36] 허구연 감독 역시 일본야구의 맹점이 이러한 경직성이라고 지적했을 정도다. 즉, 임기응변에 약하다는 것. 교과서적인 정석 플레이를 고집한다는 점인데 이게 한국과의 경기에서도 이런 방식의 경기운영을 보이는 경직성을 보였다. 이것은 비단 야구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일본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약점이다. 일본 사회, 특히 일본의 공무원들은 메뉴얼에만 목을 매달아서 메뉴얼에 1mm만 벗어나도 움직이질 않는다. [37] 그러나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이 시절의 이야기이다. 일본은 2010년대 들어 구속 혁명을 이뤄내고 MLB 못지 않은 수비시프트를 쓰기 시작했으며, WBC등 국제대회에서 보직파괴와 빠른 투수교체등 틀에 박히지 않은 야구를 추구하며 우승을 가져갔다. 일본의 통상사회도 경직되어 있는 전통의 대기업과 달리 IT기업들은 한국기업에 비해서도 훨씬 자유롭고 빠른 의사결정을 하는 경우도 많다. [38] 대표적인 인물이 주니치 명포수 출신 다니시게 모토노부로 방송에서 이승엽이 안 나온 날이 심리적으로 제일 편한 날이라고 했을 정도. 오죽하면 이승엽이 4타수 4삼진을 당해도 타석에 서있는 것만으로 공포 그 자체라고 했다. 이는 이승엽이 WBC와 올림픽 등 국제대회에서 일본을 상대로 결정적인 활약을 보였기 때문이다. [39] 참고로 이와 비슷한 게 2회 WBC 결승에서 이치로가 임창용에게 역전 결승타를 치던 모습이었는데 아예 TV광고로 그 모습을 수도 없이 틀었다. 당시 야쿠르트에서 뛰던 임창용으로써는 PTSD가 올 수준으로 자주 나왔는데 재밌는건 처음에는 그냥 그 모습 그대로 나왔다가 조금 지나고나서 유니폼의 임창용 이름을 모자이크 처리했다. 아마 소속팀 야쿠르트 입장에서 팀 마무리로 중요한 임창용 보호를 위해 항의를 해서 수정하게 한게 아닌가 추정된다. [40] 이것도 네이밍 스폰서만 하던 시절이었으며 1970년 시즌 종료 후 롯데는 정식으로 구단을 매입했다. [41] 심지어 3차전에 9회초 대타로 나지완이 나오자 방송국에서 타석에 들어설 때 2009년 7차전 끝내기 홈런 장면을 틀어줬는데 진짜로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코스로 홈런을 날리는 바람에 SK 팬들은 의문의 1패를 당해야만 했다. 물론 치바 롯데와는 달리, KIA는 해태 타이거즈 시절엔 우승을 많이 했던 원조 왕조였다는 차이가 있긴 하다. 그리고 2019년 한국시리즈 때는 10주년 기념으로 이 홈런이 SK 와이번스 갤러리 개념글로 갔다. [42] 표준 일본어가 아닌 간사이벤. [43] 그냥 3, 3, 4가 순서대로 있으면 무조건 なんでや가 달리는 수준이다. 저 갤러리가 털리는 이유들 못지않은 수준이다. [44] 일본 장례식이나 불단에서 울리는 종소리의 의성어로 무언가가 뒈짓하는 상황에(...) 사용하는 드립이다. [45] 한신의 일본시리즈 진출 시점에서 정규리그 1위 오릭스 버팔로즈를 상대로 부전패 포함 1대 3 열세, 사실 저 1도 막판에 역전승한 거다. [46] 올라간 것도 기적이긴 했다. [47] 칠판의 글은 오른쪽부터 "날 쏴라, 그게 자네 일 아닌가?", "20세기 가장 완벽한 인간",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다. [48] 여담으로, 코나타는 저 발언 이전에 다이에 호크스가 없어져서 이제 세일은 물 건너갔다는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실제로는 세일만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다이에라는 기업 자체가 없어졌지만. [49] 대신 동생 구단이 있는 나라에 수출됐고, 2022년 들어서는 진짜 현실이 되었다. 게다가 수출 이후 생명력 자체는 더 길어졌다. 2023년 시즌이 종료된 현재도 효력 소멸 여부에 대해서는 감감무소식이다. [50] 무라카미 펀드가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인 사건. [51] 참고로 이듬해인 2006년에는 한국시리즈, 월드시리즈, 일본시리즈가 모두 5차전에 끝날 뻔했지만 한국시리즈가 6차전까지 갔었다. [52] 여기서 또 웃긴 점이 하나 있는데, 정작 2006년의 소프트뱅크는 2위로 정규리그를 마친 탓에 이 일괄적인 1위 팀 어드밴티지 부여의 첫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53] 센트럴 리그는 2007년에 처음으로 플레이오프가 도입되었는데, 이때 리그 우승팀이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2위인 주니치 드래곤즈에게 3연패로 광탈해버려 흥행도 참패한 탓에 이듬해부터 1승 어드밴티지가 도입되었다. 여담으로, 주니치는 해당 년도의 일본시리즈도 제패했다. [54] 롯데는 1군의 25인 로스터에 1을 더한 26을 서포터즈 번호로 두고 거의 영구결번처럼 쓰고 있다. [55] 이승엽은 이후 요미우리에서도 한신 킬러 노릇을 톡톡히 했으나, 본인이 잘 할 때는 팀이 막장이었고 팀이 잘 나가니까 본인의 폼이 떨어지며 먹튀 테크를 타 일본시리즈나 가을야구 무대에서는 큰 활약이 없었다. [56] 센트럴은 요코하마 디엔에이, 히로시마, 도쿄 야쿠르트, 한신 중 하나가 올라오면 되고, 퍼시픽은 치바 롯데나 도호쿠 라쿠텐이 올라오면 된다. [57] 스펜서는 시즌 중에는 좌투수 플래툰 위주로 나오던 선수였다. 플래툰으로 괜찮은 모습을 보였기에 재계약에 성공했으나 다음 해에 먹튀가 되어 방출당해 은퇴했다.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사실 스펜서는 음주운전으로 체포된 전적도 있고 폭행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나는 등의 사생활 문제로 MLB 팀에 찍혀 2004년 이후로는 MLB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서 2005년부터 2년간 한신에서 뛰게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 때 배운 것이 없었는지 2019년 한국에서의 감독직 경력을 음주운전으로 끝내버렸다. [58] 당시 오릭스는 퍼시픽리그에서 압도적인 꼴등이었다. 또한 한신-오릭스 경기는 오사카 더비인데 팬은 한신이 오릭스의 10배에 가까울 정도로 많기 때문에 어디서 하든 한신 팬들이 구장을 점령하는 상황이다. [59] 2005년에 치뤄진 한미일 최종 시리즈 중에서도 그나마 패배팀도 잘 싸웠다고 할 수 있는 시리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