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5:03:31

타카하시 요시히코

타카하시 요시히코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히로시마 도요 카프 엠블럼.sv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1979 1980 1984

파일:nipponseriesflag2000.png 1979년 일본시리즈 최고 수훈 선수(MVP)
오오스기 카츠오
( 야쿠르트 스왈로즈)
타카하시 요시히코
( 히로시마 도요 카프)
짐 라이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0년 센트럴 리그 최다 안타
오시마 야스노리
( 주니치 드래곤즈)
타카하시 요시히코
( 히로시마 도요 카프)
짐 라이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79-1980 센트럴 리그 최다 도루
시바타 이사오
( 요미우리 자이언츠)
타카하시 요시히코
( 히로시마 도요 카프)
아오키 미노루
( 야쿠르트 스왈로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5년 센트럴 리그 최다 도루
타카기 유타카
(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타카하시 요시히코
( 히로시마 도요 카프)
야시키 카나메
(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히라노 켄
( 주니치 드래곤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78-1980 센트럴 리그 유격수 부문 베스트나인
코노 카즈마사
( 요미우리 자이언츠)
타카하시 요시히코
( 히로시마 도요 카프)
야마시타 다이스케
( 타이요 훼일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3년 센트럴 리그 유격수 부문 베스트나인
우노 마사루
( 주니치 드래곤즈)
타카하시 요시히코
( 히로시마 도요 카프)
우노 마사루
( 주니치 드래곤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6년 센트럴 리그 유격수 부문 베스트나인
타카기 유타카
( 타이요 훼일즈)
타카하시 요시히코
( 히로시마 도요 카프)
우노 마사루
( 주니치 드래곤즈)

{{{#ffffff [[히로시마 도요 카프|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40번}}}
히가시야마 치카오
(1967-1974)
타카하시 요시히코
(1975-1977)
타츠카와 미츠오
(1978-1992)
{{{#ffffff [[히로시마 도요 카프|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2번}}}
소노다 토시히코
(1975-1977)
타카하시 요시히코
(1978-1989)
세토 테루노부
(1991-1995)
{{{#ffffff [[치바 롯데 마린즈|치바 롯데 마린즈]] 등번호 5번}}}
빌 매들록
(1988)
타카하시 요시히코
(1990)
호리 코이치
(1991-2010)
{{{#000000 [[한신 타이거스|한신 타이거스]] 등번호 2번}}}
오노 히사시
(1989-1990)
타카하시 요시히코
(1991-1992)
마츠나가 히로미
(1993)
}}} ||
파일:타카하시 요시히코.jpg
타카하시 요시히코
高橋慶彦 | Yoshihiko Takahashi
출생 1957년 3월 13일 ([age(1957-03-13)]세)
홋카이도 아시베츠시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죠사이대학부속 죠사이고등학교(城西大学附属城西高等学校)
신체 176cm, 79kg
투타 우투양타
포지션 유격수, 외야수
프로입단 1974년 드래프트 3위 ( 히로시마)
소속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5-1989)
롯데 오리온즈 (1990)
한신 타이거스 (1991-1992)
지도자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군 타격·주루코치 (1995-1996)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2군 수비·주루코치 (1997)
치바 롯데 마린즈 순회코치 (2004)
치바 롯데 마린즈 1군 수비·주루코치 (2005-2007)
치바 롯데 마린즈 1군 타격코치 (2008-2009)
치바 롯데 마린즈 2군 감독 (2010-2011)
치바 롯데 마린즈 1군 수석코치 (2012)
오릭스 버팔로즈 1군 타격코치 (2016)
플랫폼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프로 이전3. 선수 경력4. 은퇴 이후5. 플레이 스타일6. 기타7. 연도별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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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황금기를 이끈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및 코치, 해설가, 평론가. 현재는 일본프로야구 관련 유튜버로 활동 중이다.

2. 프로 이전

1957년 홋카이도 아시베츠시 舊 미츠이광산의 탄광촌에서 태어났다. 그렇다고 광부집안이었던 것은 아니고, 아버지는 미야기현 출신으로 전일본 스키 선수권대회 입상 경력도 있는 크로스컨트리 스키 선수였다. 아버지가 시바우라공업대학 스키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도쿄도 키요세시로 이사가서 성장하였다.

죠사이 고교 3학년이던 1974년 여름, 팀의 에이스이자 4번타자로 여름 고시엔에 출장했지만 3차전에서 아쉽게 패퇴하고 말았다. 이 때의 인상적인 주루플레이를 보고 반한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키니와 사토시[1] 스카우터에게 낙점을 받고 동년 드래프트에서 카프에 3순위로 지명받아 프로에 데뷔했다.

3. 선수 경력

파일:타카하시 요시히코 현역.jpg
입단 당시에는 투수였지만, 입단 직후에 완전히 타자로 전향하였다. 그리고스위치 덕후 코바 타케시 감독의 명령[2]으로 야마모토 카즈요시 코치와 함께 맹특훈을 하였다. 야구선수로서 딱히 좋은 체격은 아니었으나 스카우터에게 주목받았던 매우 빠른 발이란 장점이 있었고, 작은 체격 역시 엄청난 연습량과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극복했다.

2년차인 1976년에 처음 1군에 데뷔했고, 1978년부터 개막 로스터에 1번 유격수로 출전하면서 주전으로 자리잡았다. 이해 첫 규정타석을 채우고 리그 13위의 타율 .302를 기록하면서 첫 베스트나인에 선정되었다.

이듬해인 1979년에는 33경기 연속 안타로 일본프로야구 신기록을 세우면서[3] 지난 해보다 조금 더 나아진 리그 9위의 타율 .304를 기록하였고, 적극적인 주루플레이를 강조하는 카프의 기동력 야구를 상징하는 타자로 성장하면서 시즌 55도루로 개인 첫 타이틀인 최다 도루를 수상했다. 타카하시의 선봉장으로써의 활약을 바탕으로 팀은 이 해 4년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기쁨을 누렸다. 킨테츠 버팔로즈와의 1979년 일본시리즈에서는 7차전 동안 27타수 12안타 타율 .444로 맹타를 휘두르며 팀의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고 일본시리즈 MVP에 선정되었다.

이러한 활약으로 일본야구 역대 최고의 대도였던 후쿠모토 유타카의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하였고, 비슷한 스타일의 같은 팀 후배 야마사키 류조 쇼다 코조에게도 영향을 미쳤다.[4]

이듬해에도 130경기 전경기 출장에 리그 7위의 .307, 38도루로 2년 연속 최다 도루 타이틀과 베스트나인 획득 및 리그 우승과 1980년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리핏에 성공하였다.

1983년에는 야마우치 카즈히로의 레벨스윙 타격폼을 도입하여 라인드라이브로 담장을 넘길 수 있는 시즌 20개 이상의 홈런을 칠 수 있는 타자로 각성했고, 대신 퓨어히터로서의 면모를 포기하며 자연스럽게 삼진도 증가했지만 타격폼을 바꾸고도 124경기 출장에 .305의 타율을 유지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본인은 이러한 인과관계를 부정했지만, 키누가사 사치오는 그대로 했더라면 3000안타도 쳤을 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했다.[5]

1984년에도 타율 .303으로 3할을 유지하였고, 71타점과 리그 1위의 97득점으로 또 한번의 리그 우승에 기여하였다. 1984년 일본시리즈에서도 비록 MVP는 .333 3홈런 10타점을 기록한 나가시마 키요유키가 가져갔지만, 타카하시 또한 30타수 15안타 .500의 타율과 1홈런 3도루 3타점을 기록하면서 활약했으며, 특히 마지막 7차전에서는 5타수 4안타 1타점으로 맹타를 휘둘렀다.

1985년에는 무려 73도루로 본인의 시즌 신기록을 달성함과 동시에 세 번째 최다 도루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86년에도 3할을 깨졌지만 침체가 없는 타격으로 리그 우승을 이끌었지만, 1986년 일본시리즈에서 1무 3승 후 4연패를 당하며 네 번째 우승에는 실패하였다.

1987년에 개막 2일 전 주고쿠 방송에서 매년마다 진행하던 카프의 팬 이벤트 방송 '카프 격려의 저녁(カープ激励の夕べ)' 참가를 "(개막 이틀 전이니깐) 시기가 나쁘다"며 생까버리는 바람에 구단 수뇌진과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이 일로 개막일로부터 12경기 출전 정지라는 구단 자체 처분을 받게 되면서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이 깨졌다. 이 해엔 타율 .281/OPS .745 11홈런 53타점 28도루를 기록했고, 도루성공률이 약간 올랐지만 상술한 출전 정지가 겹치며 6년 연속 30도루 달성에 실패했다.

1988년에는 팀 선배 야마모토 코지가 감독으로 취임한 첫 시즌이었지만, 본인은 유래없는 부진으로 풀시즌에 가까운 127경기에 출장했으나 타율이 .238로 폭락하였다. 1989년 시즌이 끝난 뒤, 후배 유격수 노무라 켄지로의 부상으로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시라타케 요시히사, 스기모토 마사시와 함께 타카자와 히데아키 및 미즈카미 요시오를 받는 대형 트레이드로 롯데 오리온즈로 이적했다.[6]

카네다 마사이치 감독은 외야수로서 기용을 원했지만, 캠프 중에 부상을 당한 것도 있어 타카하시의 의향으로 지명타자와 유격수를 왔다갔다 했다. 하지만, 전성기도 지난 데다 부상으로 인해 재기하지 못한 채 1년만에 한신 타이거스로 다시 트레이드되었다. 하지만, 한신에서도 부활에 실패하면서 1992년을 끝으로 은퇴하였다.[7]

4. 은퇴 이후

은퇴 직후인 1993년과 1994년은 해설 및 평론가로 활동하였는데, 1993년은 TV 오사카, 1994년은 TV 도쿄에서 활동했다. 이외에도 TBS 테레비 계열의 '슈퍼 와이드'라는 프로그램에서도 코멘테이터로 출연하였다.

1995년에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타격 및 주루 코치에 취임하며 현장에 돌아왔지만, 카프 시절 팀메이트였던 타츠카와 미츠오 배터리 코치와 선수 기용을 두고 싸우다가 선수들 앞에서 서로 주먹질까지 하는 사태로까지 치닫으며 타츠카와가 1년만에 퇴임하는 소동으로 물의를 일으켰다.[8] 다만, 이후에 타츠카와가 싸운 것이 사임 이유는 아니라고 부정했으며, 본인에게 싸움의 책임을 돌리면서 화해 무브를 탔다. 오 사다하루 역시 중재에 나서며, 타카하시 역시 화해에 응해서 해프닝으로 끝났다. 타카하시 역시 1997년을 끝으로 다이에에서 퇴단했지만, 무라마츠 아리히토나 하마나 치히로 등을 육성하는 등의 작은 업적을 남겼다. 퇴단 이후에는 큐슈 아사히에서의 해설과 스포츠 닛폰 후쿠오카판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지냈고, 후지 테레비 계열의 프로그램에서 가나에 야구를 보급하는 등의 활동을 하기도 했다.

2004년, 다이에 시절 구단 대표였던 세토야마 류조의 요청으로 롯데 순회코치에 취임하면서 7년만에 현장에 복귀하였다. 2005년에 1군 주루코치로 보직 변경되어 팀을 일궈냈고, 특히나 같은 스위치 히터인 니시오카 츠요시를 주전으로 육성시키는 등의 업적으로 2005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보탬했다. 한편 타격 침체에 빠져있던 이승엽 역시 손봐주며 일본시리즈에서 활약하는 데 크게 도움을 주었으며, 이승엽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이후에도 타카하시에게 개인적인 지도를 부탁했을 정도로 효과가 있었던 모양.

2008년부터는 타격코치로 보직이 다시 변경되었지만, 2009년에 팀 타격이 리그 최하위로 추락하며 비판을 받았다. 2010년에는 2군 감독으로 취임했는데, 군대나 다름없는 철권통치로 2군을 이끌면서 선수들이 눈치보기 바빴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도, 팀을 4년만의 통산 8번째 이스턴리그 우승과 팜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었고, 1군 역시 2010년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겹경사를 이뤘다. 2012년에는 1군 수석코치로 1군에 복귀했지만 1년 만에 퇴단 통보를 받으며 9년간의 롯데 코치 생활을 마무리했다. 퇴단 이후에는 후쿠시마현 고리야마시의 건축회사에 입사하며 야구계를 떠났다.

2013년에는 ' 다이아몬드'라는 영화에도 야쿠자 역할을 맡아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으나[9], 심각한 발연기(...)를 펼쳤다.

2014년부터는 테레비 신히로시마와 주고쿠 방송 등에서 야구해설가로 활동을 재개했다. 그리고, 2016년 오릭스 버팔로즈 1군 타격코치로 현장에 복귀했지만, 팀 타선이 타율, 득점 모두 리그 최하위에 그치는 빈타에 빠지면서 1년만에 해임되었다.

환갑이 되는 2017년 3월 13일, 본인의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였고, 후쿠오카시에 있는 무역·통판회사인 'A홀딩스'라는 회사의 고문으로 취임하였다. 2019년부터는 회사 내에 스튜디오를 차려서 본격적으로 유튜버 활동을 시작하였다.

5. 플레이 스타일

스위치 히터로서 3할 타율 5회 및 20홈런 4회와 일본프로야구 기록인 33경기 연속 안타 등의 화려한 기록을 쌓았고, 스위치 히터로 성공하면서 일본프로야구계에도 스위치 히터의 유효성을 알렸다. 이후, 팀 후배인 야마사키 류조 쇼다 코우조는 물론, 마츠이 카즈오 등 일본프로야구계에 끼친 영향이 크다. 더군다나, 작은 체격으로 현대적인 운동기구도 없던 시절에 오로지 밤낮으로 배트만 휘두르면서 강인한 육체를 손에 넣었다.

준족으로 일본 통산 5위에 해당하는 477도루를 기록했지만, 적극적인 도루를 강조하는 카프의 팀컬러 때문에 도루자 역시 많아서 플레이스타일이 비슷했던 한큐 브레이브스 후쿠모토 유타카299개에 이은 역대 2위인 206도루자를 기록했으며, 롯데 시절 1년을 제외한 카프와 한신 시절의 202개는 센트럴 리그 최다 기록이기도 하다. 1983년의 70도루 28도루자를 기록했는데, 한 시즌 28도루자 역시 센트럴 리그 기록이다.[10]

또한, 현역 때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의 대명사로 알려져있었다. 최근에는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이 부상만 안겨다줄 뿐이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한다는 추세가 되어가고 있지만, 타카하시는 '평소에 하지 않다가 하면 다칠 뿐이지, 헤드퍼스트 슬라이딩 자체의 위험성은 없다. 평소에 전력 질주하는 습관 들이면 주루에서의 부상을 방지할 수 있다'고 피력했다.

6. 기타

  • 지금처럼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한신 타이거스 등 소수의 팀만 주목받는 경우가 강했는데, 히로시마 도요 카프 선수로서는 전국구의 인지도를 가진 몇 안되는 선수였다. 무라카미 류가 타카하시를 모델로 쓴 '달려라 타카하시(走れ!タカハシ)'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타카하시가 낸 음반은 무려 5만장이나 팔렸다고...
  • 성격도 좋아서 인간관계도 대체로 좋고 발이 넓었다고 한다. 또한 주당에다 밤놀이로도 유명했다고. 술집 여급에게 받았다고 소문난 빨간 포르쉐 911을 자랑스럽게 몰고 다녔고, 밤놀이 상대로는 연예인도 있었다는 소문이 많았다. 교제하던 한 무명 여배우는 성인 비디오에도 출연했다고 한다. 당시 카프의 독신 기숙사의 통금시간은 밤 10시였지만, 전국구 스타였던 타카하시와 키타벳푸 마나부 두 명만큼은 통금시간이 없었다고. 또한, 기숙사 내에서 음주도 금지였지만 이 둘만큼은 예외였기 때문에, 다른 동료들도 이들 방에 몰려와서 마셨다고 한다. 다만, 상술한 타츠카와 말고도 키타벳푸와도 사이는 좋지 않았다고 하는데, 타카하시가 포르쉐 911을 타고 다니면서 자랑하니깐 키타벳푸는 링컨 컨티넨탈을 타고 다녔다고 한다.
  • 전화도 엄청나게 많이 썼다고 하는데, 10엔짜리 동전을 주머니에 항상 대량으로 넣고 다녀서 주머니가 자주 구멍났다고 한다. 반도 에이지의 저서에 따르면, 1978년 히로시마의 코치로 역임했던 돈 블레이신게임 코치의 딸에게 전화공세를 펼치는가 하면, 화와이 캠프에서는 전화비로만 당시 돈으로 200만엔을 썼다고 하는데, 이 사실은 타카하시 본인이 부인했다.[11] 또한, 카프의 기숙사는 신인은 3분 이상 통화를 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는데, 자기 앞의 카와구치 카즈히사가 오랫동안 통화하자 신인들을 싹 다 집합시켜서 교육(?)을 쫌 했다고 한다.
  • 이러한 일화에도 불구하고, 야구 앞에서는 한없이 진지한 노력가였다고 전해진다. 발 부상에도 의자에 앉아 프리배팅을 하는가 하면, 심지어 여자 집에 놀러갈 때도 배트를 챙겨가서 밤중에 연습했다고 한다.
  • 상술했지만, 팀 동료 키타벳푸 마나부 타츠카와 미츠오와는 사이가 험악했다고 알려져있는데, 타츠카와와는 상술한 대로 화해했고 키타벳푸와도 2019년 JA히로시마 이벤트에 동석하고 키타벳푸 자신의 블로그에도 "야수 측과 투수 측의 의견 차이로 인한 건설적인 말다툼이었으며, 동료로서의 경의는 계속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등 감정적인 요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 2008년 12월 6일, 히로시마 시민구장 폐장을 앞두고 카프OB 올스타 게임에서 오랜만에 빨간 유니폼을 입고 1번 유격수로 출전했다. 이 경기에서 3안타 1도루로 경기 MVP에 선정되었고, 인터뷰에선 "나는 은퇴 경기를 치르지 않았는데 팬들덕분에 나에게 있어서 진정한 은퇴 경기를 펼칠 수 있었다"고 밝혔다. 타석에서는 현역 땐 사이가 좋지 않았던 타츠카와 미츠오 포수와도 담소할 정도로나이 먹어서 그런지관계는 회복된 것처럼 보인다.
  • 고라쿠엔 구장에서 뛸 때는 전광판에 '高橋慶'가 아닌 '高橋ょ'로 표기되었는데, 당시 고라쿠엔 구장의 전광판은 도트도 획수도 많은 '慶'자를 표기할 수가 없어서라고 한다.

7. 연도별 성적

통산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소속 경기 타석 타점 득점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colbgcolor=#dcdcdc> 1976 広島 5 0 0 0 0 0 0 0 0 0 0 - - - -
1977 58 141 6 23 38 6 2 0 14 7 33 .292 .338 .369 .707
1978 110 472 47 72 129 19 10 7 15 32 46 .302 .365 .443 .808
1979 120 535 33 86 149 22 7 5 55 32 56 .304 .360 .408 .768
1980 130 590 33 68 169 24 11 5 38 28 51 .307 .349 .418 .767
1981 111 490 31 72 133 23 4 5 14 19 38 .289 .324 .389 .714
1982 130 589 27 75 147 20 5 6 43 29 66 .269 .314 .357 .672
1983 124 531 58 91 142 23 3 24 70 54 64 .305 .379 .523 .902
1984 126 556 71 97 150 23 4 23 30 44 79 .303 .361 .505 .866
1985 130 601 68 96 147 10 2 24 73 54 89 .276 .343 .437 .781
1986 130 583 55 88 157 33 2 21 39 20 91 .284 .314 .466 .779
1987 118 521 53 65 130 21 2 11 28 40 61 .281 .338 .407 .745
1988 127 546 43 58 119 24 3 11 32 33 54 .238 .285 .365 .650
1989 127 540 47 63 131 21 0 12 13 37 59 .267 .321 .383 .704
1990 ロッテ 100 294 28 33 54 6 2 9 7 23 41 .207 .269 .349 .618
1991 阪神 57 139 2 14 26 4 0 0 6 10 17 .206 .265 .238 .503
1992 19 27 2 2 5 1 0 0 0 3 4 .217 .296 .261 .557
NPB 통산
(17시즌)
1722 7155 604 1003 1826 280 57 163 477 465 849 .280 .333 .416 .749
  • 볼드체는 리그 1위.


[1] 타카하시 외에도 야마모토 코지, 오노 유타카, 카와구치 카즈히사 등 카프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유명 선수들을 발굴해낸 스카우터로써, 카프 외에도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오릭스 블루웨이브,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스카우터로 활약하며 야구계에서 스카우터의 신이라 불렸던 인물이다. 2008년 폐암으로 향년 82세에 별세. [2] 타카하시뿐만 아니라, 발이 좀 빠르다 싶은 타자들( 야마사키 류조, 쇼다 코조 등)을 스위치 히터로 개조시키는 것이 취미(...)였다. [3] 이전 기록은 한큐 브레이브스 나가이케 토쿠지가 기록한 32시합 연속 안타가 최고 기록이었다. [4] 야마사키가 가세한 이후에는 1번 타카하시·2번 야마사키, 80년대 중반에 쇼다가 가세한 이후에는 1번 쇼다·2번 야마사키·3번 타카하시의 스위치 히터 트리오를 형성하기도 했다. 셋 중 장타력이 제일 좋았던 덕분에 3번 타순에서 쇼다와 야마사키를 불러들이는 역할로 타점을 먹었다. [5] 결과적으로, 타카하시는 2000안타에도 약간 못미치면서 명구회 입성에도 실패하였다. [6] 이적 후에도 응원가는 가사만 일부 수정해서 카프 시절부터 썼던 것을 그대로 유용했고, 전주 역시 그대로 사용되었다. [7] 한신에서 쓰던 응원가는 이후 가사 마지막 부분만 바꾼 채(타카하시 요시히코 → 우리들의 OO) 마츠나가 히로미-히라츠카 카츠히로-히라시타 코지 등에게 계승되다가 2004년 저작권 문제로 폐지되었다. 참고로 해당 링크는 히라츠카가 뛸 당시 발매된 CD 음원으로, 타카하시가 뛸 땐 해당 응원가의 CD음원이 미발매되었다. [8] 둘은 현역 시절에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9] 해당 영화엔 타카하시 외에도 마츠나가 히로미, 모토키 다이스케 등 전직 야구선수들이 여럿 출연했다. [10] 여담으로, 70도루를 기록했던 이 시즌에는 76도루를 기록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마츠모토 타다시(松本匡史)에 밀려 최다 도루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했다. 최다 도루 타이틀 획득하지 못한 선수로서는 최다 도루 기록이다. [11] 카프가 하와이에서 캠프를 차린 적도 없었고, 교육 캠프가 있었던 플로리다주에서 일본인 여자에게 걸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