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5:20:30

종교적 소수자

영어 Religious Minority

1. 개요2. 국제법상 지위/역사3. 현황
3.1. 중동3.2. 러시아3.3. 남아시아 및 중앙아시아3.4. 동남아시아3.5. 중국3.6. 대한민국3.7. 북한3.8. 서구권3.9.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3.10. 기타 사례
4. 과거의 종교적 소수자 사례5. 종교적 소수자를 무신론자로 매도하는 사례6. 둘러보기

1. 개요

종족적, 종교적 또는 언어적 소수민족[1]이 존재하는 국가에 있어서는 그러한 소수민족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그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그들 자신의 문화를 향유하고, 그들 자신의 종교를 표명하고 실행하거나 또는 그들 자신의 언어를 사용할 권리가 부인되지 아니한다.[출처1]

"인종, 종교 및 언어상의 소수자가 거주하고 있는 국가 내에서, 그러한 소수자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같은 특성을 지닌 소수자들과 공동으로 그들의 특유한 문화를 보전하고, 종교 활동을 하며, 공동의 언어를 사용할 권리를 부정당하지 않는다.[다른번역]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대한 국제인권규약(1966)[4] 제27조-

"In those States in which ethnic, religious or linguistic minorities exist, Persosn belonging to such minorities shall not be denied the right, in community with the other members of their grouops, to enjoy thier own culture, to profess and practise their own religion or to use their own language."

-Article 27, 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 (ICCPR)-

종교적으로 사회적 소수자의 위치에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 종교적 소수자에서 소수자(mimority)는 단순히 절대적/상대적 인구수에 의해 정의되기보다는 해당 소수 종교를 신봉함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소외당하거나 핍박받는 등 권리상의 불이익을 받고 있거나 소수종교 공동체의 사멸위기를 겪는[5] 개인 또는 집단을 가리킨다.

대한민국에서 기독교도가 30%( 개신교도들이 19%, 천주교도가 7%), 불교도가 대략 15% 정도 되지만 이들을 사회적 소수자라고 보지 않는다. 특히 개신교 신자들은 정치적으로도 좌우를 가리지 않고 분포해 있으며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소수 집단이라고 보기 힘들며 불교는 관련 국보 보물이 워낙 많을 뿐더러 어지간한 산에는 절이 적어도 한둘은 있는데 다른 종교의 열성 신자가 아닌 이상 등산 갔다가 산 속 절에 들르는 모습은 실제 불교 신자인지와는 별로 상관없이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정착된 것을 볼 때 한국 불교 한국 사회에 대한 영향력은 실제 신자 비율 대비 훨씬 강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반면 이스라엘 무슬림은 총 인구의 17%를 구성하고 있지만 엄연히 종교적, 민족적 이유로 차별받는 '종교적 소수자'로 분류된다.[6]

참고로 이 정의는 특정 종교 내에서 주류 교계와의 교류를 하지 않는 소수 종단이나 특정 종교에서 주류와는 다른 특정한 노선을 따르는 소수파를 지칭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2. 국제법상 지위/역사

소수민족과 종교적 소수자에 대한 박해는 예로부터 존재했다. 특히 양차대전을 거치면서 종교적 소수자를 비롯한 소수자에 대한 극단적인 인권침해가 이루어졌고 이에 대한 반성으로 소수자 인권 보호를 위한 국제조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지만 인종차별을 비롯한 다른 소수자 인권 문제에 관한 국제적인 보호 제도가 마련된 것과는 달리 종교적 소수자 자체를 다루는 보편적 규약은 실질적으로 부재하다.[7]

각 지역의 종교적 소수자 문제에 관하여 보면 유럽에서는 유럽평의회에서 채택된 소수민족보호 골격협약(FCNM) 등을 통해 인종, 언어 및 종교적 소수자에 대해 구체적인 보호 조약을 마련했지만 이는 유럽에만 국한되어 있다. 유럽 이외 지역,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는 종교적 소수자 보호제도가 매우 취약하다. 근데 거기는 다른 소수자 보호제도도 취약하지 않나?

국제법상 종교적 소수자 보호제도는 매우 취약한 상태라고 할 수 있으며 해당 지역의 관련 보호조약이나 UN의 인권 관련 조약에서 종교의 자유에 대한 규정을 확대 적용하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종교적 소수자에 관련된 대표적인 보편 인권조약으로는 인종차별철폐협약[ICERD]이 있다.

하지만 인종차별철폐협약은 종교, 언어적 소수자 보호 문제가 규약 범위 내에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 대표적으로 인종차별철폐협약에서는 종교적 소수자의 지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ICERD은 제1조 제1항에서 인종차별(racial discrimination)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이 협약에서 "인종차별"이라 함은 인종, 피부색, 가문 또는 민족이나 종족의 기원에 근거를 둔 어떠한 구별, 배척, 제한 또는 우선권을 말하며 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또는 기타 어떠한 공간생활의 분야에 있어서든 평등하게 인권과 기본적 자유의 인정, 향유 또는 행사를 무효화시키거나 침해하는 목적 또는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경우이다.[출처2]
"동 협약상 인종차별이란 용어는 인종, 피부색, 혈통, 민족적 또는 종족적 기원 등을 이유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및 공공 영역 등 모든 분야에서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향유하는 것을 무력하게 하거나 지장을 초래하는 일체의 구분, 배제, 제한, 선호를 의미한다."[다른번역2]

"In this Convention, the terms 'racial discrimination' shall mean any distinction, exclusion, restriction or preference based on race, colour, desent, or national or ethnic origin which has the purpose or effect of nullifying or impairing the recognition, enjoyment or exercise, on an equal footing of human rights and fundamental freedoms in the political, economic, social, cultural or any other field of publiclife."


-Article 1.1, International Convention on the Elimination of All Forms of Racial Discriminatnion.-
즉 위 다섯 개의 근거에 속하지 않은 종교, 언어상의 소수자/소수민족에 대한 문제는 협약 관할 사항이 아닌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이는 종교 문제와 인종 문제를 분리하여 다루었던 UN의 초기 관행에서 비롯되었다. 1962년 UN은 인권보호 차원에서 종교 문제와 인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각각의 조약을 준비하기로 결의했다. 주의할 부분은 인종차별 문제는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1964년에는 인종차별철폐협약의 초안이 작성되고 1967년에 발의됐지만 종교 문제는 20년 가까이 지난 1981년에야 규약도 아닌 법적 구속력 없는 선언 채택에 그쳤다는 점이다.[11]

인종 문제와 종교 문제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UN의 당사국들은 인종(피부색) 이외의 종교, 언어상 소수자 권리 보호에 대한 필요성과 문제 의식이 결여되어 있었으며 인종차별의 의미를 피부색과 같은 생물학적 개념[12]에 따른 좁은 의미로 이해하고 있었다 할 수 있다. 이는 인종차별철폐협약이 체결될 당시인 1960년대에 가장 이슈가 되었던 인종/소수자 차별 문제가 다름아닌 미국 남아공의 흑백차별철폐 운동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당시 냉전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 인종과 종교 문제가 분리됐다는 지적도 존재한다.[13]

다만인종차별철폐협약은 하위 항목에서 "사상과 양심 그리고 종교의 자유와 권리 향유"를 명시하고 있다.[14] 이를 근거로 규정을 확대적용함으로써 ICERD의 집행부서인 인종차별철폐위원회[CERD]는 여러 소수 종교 문제에 관여해 왔지만 달리 말하자면 소수 종교 문제가 인종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종교적 소수자 문제에 관여하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전략)...주의해야할 점은 종교적 불관용과 관련하여 ICERD의 제5조 이하 종교적 소수자에 대한 보호 의무는 좁게 해석될 수밖에 없으며 소수 종교 자유의 침해가 오로지 인종적 요소와 연계됐을 때만 ICERD가 적용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CERD는 소수종교를 믿는 사람들 그 자체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반드시 종교적 소수자가 '인종적 차원'으로 연계되어야만 ICERD가 적용된다는 말이다.[인용]

인종차별철폐협약 외에도 종교적 소수자에 관한 보편적 보호제도가 있지만 이들 역시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개요 문단에서 상술한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대한 국제인권규약(B 규약)[ICCPR]이 있지만 ICCPR은 명칭 그대로 시민으로써의 권리와 정치적 자유를 다루고 있으며 이에 관한 내용은 매우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다. 반면 소수자, 특히 종교적 소수자에 관한 내용은 상술한 27조가 전부로써 내용 또한 추상적인 언급 수준이다.언급이라도 있는게 어디냐만은 즉, 해당 조문은 개별 국가에서 자의적 해석과 기만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에(...) 종교적 소수자를 효과적으로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인종/언어/종교 상의 소수자가 존재하는 국가에서는'인데 해당 국가에서 자국에 해당 소수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 규약의 해당 조문의 적용이 몹시 난항을 겪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로 이집트, 자메이카 등이 있다.

종교적 소수자 자체에 대해 다루고 있는 UN 차원의 결의문도 있으나 결의문은 아무런 법제적인 강제성이 없다.

특히 탈냉전 이후 종전의 이데올로기 갈등의 공백을 종교 갈등이 대체하면서 소수 종교 보호 문제에 관한 관심이 늘어가고 있지만 상술했다시피 종교적 소수자의 보호를 위한 보편적 규약은 실질적으로 전무하며 관련된 다른 규약을 확대적용하는 방식으로 종교적 소수자 문제에 관여하고 있으나 역시 상술하였듯이 맹점이 많다. 이에 따라 종교적 소수자를 위한 보편적 보호제도를 마련하거나 인종차별철폐규약의 적용범위를 종교적 소수자까지 포괄하는 방안 등이 제시되고 있다.

3. 현황

3.1. 중동

  • 만다야교도
    세례 요한, 아담, 노아 등을 비롯한 성경의 인물들을 믿지만, 예수와 모세 및 아브라함을 사실상 부정하는 고대 종교. 할례를 금기시하며 대신 세례 의식을 중요시 여겨 비교종교학자들의 관심을 사고 있다. 원래는 이라크 일대에 거주하던 사람들이었으나 18세기 말 이란의 침공과 약탈 과정에서 대거 학살당해 인구가 감소하고 오늘날에는 대다수가 이슬람 근본주의를 피해 스웨덴 등에 난민으로 정착했다.
  • 아랍계 기독교인
    그 중에서도 콥트 정교회가 제일 대표적인 핍박 대상이다. 이집트 제1의 이슬람주의 정당 무슬림 형제단은 비공식적으로 콥트 기독교 박멸을 강령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제2의 이슬람주의 정당 알누르당은 콥트교 박멸이 공식 강령이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팔레스타인 서안 지구의 베들레헴에는 전 세계적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오지만 베냐민 네타냐후 정권은 베들레헴의 아랍계 기독교인들에게 관광산업으로 얻는 수익이 잘 배분되지 못하도록 해서 국제 사회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고 있다.
  • 아시리아인
    네스토리우스파 전례를 계승한 기독교 교파를 믿는 중동 기독교인 일파. 아시리아인이라는 명칭은 이들이 아랍인이라는 정체성 대신 아람어를 계승, 사용하는 고대 아시리아 제국의 후예라는 정체성을 내세우면서 생겼다고 한다. 이들의 기원이 된 네스토리우스파부터가 이슬람이 중동 지역에서 지배적인 종교가 되기 전부터 동로마 제국이나 페르시아에서 탄압을 겪던 종교적 소수자 집단이었다. 고대부터 이라크에 거주하던 기독교인인 아시리아인들은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하자 자신들도 이집트의 콥트교 신자처럼 핍박받게 될 것을 우려하여 인구 대다수가 원래 거주하던 지역을 떠나 레바논[19], 미국, 독일, 스웨덴 등에 난민이 되어 정착했다.
  • 야지디
    쿠르드인의 일부가 고립된 산지에서 외부로부터 제한된 정보만 접하면서 살아 온 영향으로 생성된 종교로, 본래 쿠르드인들은 산악 오지의 가난한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도회지처럼 이슬람이나 기독교 신학이 발달하기 힘든 것도 있거니와 다른 유목민들과 다르게 통상과 교역에 소극적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이슬람 교리와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교리를 서로 혼동하거나 동시에 믿는 경우가 많았다.[20] 그 결과물 중 하나가 야지디교다. 미트라교, 메소포타미아 전통, 기독교, 이슬람, 조로아스터교 등의 종교 교리가 섞여서 만든 쿠르드족의 민족종교다. 본인들은 최초의 일신교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일신교들의 영향이 뒤섞여 만들어진 종교다. 21세기에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가 이들을 대상으로 추악하게 제노사이드를 시도하면서 이슬람 전체의 이미지에 제대로 먹칠했다.[21]
  • 이란 만다야교, 바하이 신앙, 조로아스터교 신자들과 아시리아인, 페르시아계 유대인,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개신교, 가톨릭
    이란에서는 고대부터 유래가 깊은 종교를 박해할 경우 받게 될 국제 사회의 비판이 두려워서 역사가 깊은 소수 종교 신자들은 보호하는 시늉이라도 하지만 바하이 신앙은 이런 걱정이 없기 때문에 대놓고 사형까지 시키면서 박해하며 반서방 감정 때문에 개신교,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살인과 린치를 방조하거나 조장하고 있다.
    • 조로아스터교는 이란의 전통 종교라서 겉으로는 간판으로 삼고 있지만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에게도 보수적인 이슬람 율법을 강요해 심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조로아스터교 계율은 술을 허용하고 담배를 절대 금지하지만 이슬람에서는 술을 금지하고 담배는 사실상 방치하는데 조로아스터교도들 입장에서 무슬림들한테 함부로 앞에서 담배 피우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기 무척 애매하다고 하며 조로아스터교는 개를 신성한 동물로 여기지만 시아파 무슬림들이 개를 워낙 싫어하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난다. 그리고... 율법 차이 문제를 떠나서 자기가 믿지도 않는 종교 때문에 문화 생활을 VPN 아니면 아예 못 하는 상황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 시리아와 레바논과 이스라엘의 드루즈
    수니파 무슬림들에게 억압받았던 과거 때문에 시리아의 드루즈교인들은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에 적극적으로 충성하고 이스라엘의 드루즈교인들은 이스라엘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아랍 무슬림들과 대립하는 입장이다. 시리아 정부와 이스라엘 정부가 사이가 나쁘고 국지전도 종종 발생하는데 드루즈인들은 이런 경우에 각자 자기가 귀속한 국가의 정권 편을 드는 편이라 한다. 반대로 레바논의 드루즈인들은 오스만 제국 시절 아랍계 기독교인들과 유혈 충돌을 자주 일으켜서 현지 기독교인들의 눈 밖에 났다.
  • 예멘의 자이드파
    예멘의 인구 비중만 놓고 보면(절반에 좀 못 미침) 소수자가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주변이 사우디아라비아를 위시로 수니파 이슬람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종교적 소수자에 속한다. 이와 반대되는 경우로 이라크의 수니파 아랍인은 이라크 인구의 20%에 불과하지만 주변 수니파 아랍 국가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라크 인구의 60%에 해당하는 시아파 아랍인들과 세력 균형을 맞출 수 있다. 여담으로 이 학파는 중세 전성기 이슬람 사변 철학 사조인 무타질라 학파의 영향력을 가장 많이 받았지만 오늘날 예멘의 상황이 막장인 관계[22]로 현대 무슬림 사회에 별다른 기여를 못 하고 있다.
    다만 자이드파가 주축이 된 후티 반군은 시아파 국가 이란의 지원을 받아서 군사적으로는 밀리지 않고 도리어 사우디 영내로 공격을 감행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기 때문에 완전히 소수자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
  • 알라위파
    박해 때문에 교리 상당수가 실전된 상태이며 소수자 입장에서 중세에는 십자군과 몽골 제국, 현대 시리아 독립 이전에는 프랑스 제국주의 정권, 오늘날에는 이란, 러시아 등 외세의 힘을 빌어 교세를 유지하는 상황이다.

3.2. 러시아

  • 두호보르파
    러시아의 영지주의 소수파. 재세례파 여호와의 증인처럼 세속 정부와 기성 러시아 정교회의 권위 및 병역 의무를 거부하여 이단으로 판정받았으며 19세기 초 캅카스의 둔전 지대로 강제 이주당해 고초를 겪었고 러시아 정부의 박해를 피해 19세기 말에 캐나다 등으로 이주했는데 레프 톨스토이가 소설 '부활'의 인세를 두호보르파의 이주 비용으로 지원한 일과 정교회의 권위를 부정한 문제로 정교회에서 파문당했다.[23] 캐나다로 이주한 두호보르파 신자들은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에 정착했으나 캐나다에서도 세속 정부를 부정하며 나체 시위와 방화를 하고 다녔다.[24] 결국 캐나다 정부에서는 재사회화를 명분으로 두호보르파 자녀들을 강제로 기숙학교에 보내서 교육을 시켰다.( 출처) 오늘날 캐나다에는 재사회화된 두호보르파 후손이 2~4만 여명 살고 있으며 아직 두호보르파 신앙을 고수하는 인구는 2,290여명 정도로 추산된다. 자세한 내용은 러시아계 캐나다인 문서 참조. 현재 두호보르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은 전부 중장년층이나 노인밖에 없고 청소년이나 청년층의 참여는 극소수라 조만간 사멸될 수도 있다고 한다. # 캐나다에서 두호보르파 자녀들을 강제로 부모와 분리한 것이 종교의 자유 침해였는지, 아니면 적절한 인권 보호 정책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아직 논란이 있다.
  • 코미인
    곰과 관련한 토테미즘으로 유명한 소수 민족으로 러시아 북부의 극한 삼림지대에 거주한다. 러시아 정교회 내부 분열 이후 많은 고의식파들이 다른 러시아인들을 피해 코미인들이 사는 외딴 북부 삼림 지대로 피신해 오면서 혼혈된 덕분에 이들의 풍속은 핀 우골어족 토속 신앙과 러시아 정교회의 중세 전례의 많은 부분을 함께 보존하게 되었다. 코미인들은 러시아에서 차별받는 집단은 아니지만[25] 오늘날 코미 공화국의 지하 자원이 급속도로 개발되면서 발생하는 변화로 인해 토속 신앙을 지탱할 전통 촌락 공동체가 파토나고 있으며 전통 문화에 대한 코미인들의 관심이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인도의 파르시와 비슷한 경우다.
  • 러시아의 마리 엘 공화국 마리인
    정교회를 국교로 삼던 러시아 제국 무신론을 강요하던 [[소련]이 무너지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러시아 내에서 암암리에 토속 신앙을 믿는 자들이 자신들의 자치 공화국을 중심으로 토속 신앙을 부흥시키며 민족 내부의 단결을 다지고 있다.
  • 재침례파
    근대 역사에서 병역 거부 문제로 논란이 되었던 개신교 종파. 한때 러시아 제국에서 독일의 재세례파 신도들에게 병역 면제를 조건으로 이들의 이민을 장려해 놓고 나중에 약속을 어기고 이들에게도 병역을 부과하자 많은 갈등이 야기되었다.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 장교가 아닌 이상 징병된다는 것은 사실상 종신 병역이 될 가능성이 높았으며 병영에 재세례파 종교 시설이 따로 마련되어 있을 턱도 없었으니 그야말로 징집된 이들 보고 대놓고 가족하고 생이별+배교하라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26] 이러한 문제로 인해 이들은 러시아에서 다시 미국으로 이민 갔으나 미국에서도 1, 2차 대전 당시 병역 거부로 수감되었다.[27]
  • 캅카스 인구시인
    러시아의 인구시 공화국은 러시아에서 청년실업률이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로 많은 인구시인 청년들이 러시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지로 이주하였지만 하필 인구시인의 형제뻘 되는 민족인 체첸인들이 베슬란 학교 인질사건을 일으켰던 바람에 체첸인들과 함께 러시아 스킨헤드들의 표적이 되어 심지어 오늘날에도 심한 고초를 겪고 있다. 러시아 대도시의 인구시인 중 많은 사망자와 실종자가 나왔으며 요즘은 실종자는 줄었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체첸인, 인구시인을 비롯한 캅카스 무슬림에 대한 증오 범죄가 아직 근절되지 못했다. 인구시 공화국의 실업난과 러시아 본토의 차별로 이중고를 겪고 있는 셈이다.

3.3. 남아시아 및 중앙아시아

  • 시크교
    인도, 파키스탄 뿐 아니라 캐나다와 영국에서도 인지도 높은 종교적 소수자 집단이다.
  • 북인도에서의 "비힌두 종교 대다수"
    힌두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배타적 사회보수주의가 뿌리깊은 와중에 보수우파 정당인 인도 인민당이 이것을 더 부추기고 있어 기독교인이건 무슬림이건 시크교도이건 불교도이건 비힌두인들은 기본적으로 차별의 대상이다. 특히 북인도의 힌두교도들을 자주 침략하거나 정복했던 무슬림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강하다. 반면 남인도에서는 무슬림이 침략자라기보다는 교역 파트너였으며 비교적 세속주의 성향이 강하다 보니 비힌두 종교에 대한 차별이 훨씬 덜하다.
  • 파르시
    인도 구자라트 지방을 중심으로 해상 무역에 종사하던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의 직계 후손. 이란의 조로아스터교도처럼 차별받는 건 아니지만[28] “부모 양쪽 모두 파르시인 경우에만 파르시로 인정받는” 율법 때문에 사멸 위기에 놓여 있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 지배를 시작할 때 영어를 제일 빨리 배운 민족으로, 대영제국 시절에 많은 특혜를 누렸으나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서구인과 통혼하는 경우가 급증해 민족종교 공동체는 사멸 위기에 처했다. 중국의 파르시들도 해상 무역으로 번영을 누렸으나[29] 한족, 후이족과 동화되면서 명나라 때 사멸했다.
  • 무슬림 카슈미르인
  • 자이나교
    계율이 너무 엄격해서 한 국가의 지배 이념이 되기 힘들고[30] 종교적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 이스마일파
    어쌔신으로 유명한 시아파 극단주의 교파. 물론 이 교파 신도들이 다 어쌔신처럼 암살만 하고 사는 건 아니고 이븐 시나처럼 역사적으로 유명한 학자가 된 경우도 있다. 이븐 시나는 학자로서의 명성도 유명하고 정권의 후원도 받았음에도 종교적 소수자였기 때문에 여러 차례 살해 위협을 받는 등 삶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오늘날에는 과거와 같은 극단주의 교리를 버리고 아가 칸 4세[31]를 중심으로 이슬람의 현대화, 양성평등 등의 개혁 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이스마일파 중에서도 니자리파의 상당수는 소련의 지배를 받은 영향으로 이미 상당히 세속화되어 아가 칸 4세의 개혁 운동을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있으나 니자리파 신도들이 대개 그렇게 돈이 많지 못한 관계로 이슬람권 주류에 특별한 영향력이나 위협을 가하지는 못하고 있다.
  •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및 예멘 일대의 보흐라파
    예멘에서 인도 구자라트에 정착한 시아파 신도들의 후손으로, 남아시아 및 중앙아시아에서 극히 드문 여성할례 악습을 시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32]
  • 스리랑카 힌두교
    스리랑카의 주요 민족인 싱할라인은 남인도의 타밀계 힌두 왕조들이 계속 남하해 오는 바람에 2천년 넘게 전쟁을 벌여야 했는데 타밀족이 싱할라인에 비해 인구가 월등히 많았기 때문에 과거에는 싱할라족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형편이었다. 이 와중에 스리랑카 북부의 승단이 파괴되고 싱할라인에 대한 힌두교 개종도 강요되었으며 한술 더 떠서 영국 식민 지배 시절 동안 백만 명 이상의 타밀족의 스리랑카로 새로 유입되면서 싱할라인들과 타밀인들과의 갈등과 상호 불신이 악화되었다. 영국에 의한 타밀족 대량 이주는 타밀족 사회 내 내부분열도 일으켰는데 고대와 중세에 스리랑카에 정착한 타밀족들은 대부분 브라흐민이나 크샤트리아 같은 상위 카스트로 족보 조작이 완료[33]되었던 반면 영국 식민지배 시절 스리랑카에 이민 온 타밀족들은 대부분 수드라나 불가촉천민이었기 때문이다.[34] 현대에는 LTTE의 자폭 테러로 인해 불교 사적들이 파괴되면서 힌두 소수자에 대한 종교적 반감이 더 심해졌다.[35] 자세한 내용은 스리랑카 내전 문서 참조.
  • 스리랑카의 기독교, 이슬람교
    스리랑카의 불교는 포르투갈과 영국의 식민 지배 당시 기독교계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던 역사가 있었는데 그 반작용으로 오늘날의 스리랑카에서 기독교의 입지는 매우 취약한 편이다. 이미 영국 식민지배 시절에도 기독교 선교사들과 불교 승려들 사이에서 벌어진 파나두라 대논쟁[36]에서 기독교 선교사측이 공개적으로 패배하면서[37] 기독교의 입지가 크게 위협받았다. 유럽인과 스리랑카인의 혼혈인 버거(Burgher)인들도 스리랑카 전통 상좌부 불교로 개종하는 일이 늘고 있다. 스리랑카 연쇄 폭탄 테러 이후에는 무슬림 소수자에 대한 증오와 편견이 증가하고 있다.[38] 스리랑카의 이슬람교은원래 서부 해안지방에서 다수였으나 16세기 포르투갈인들의 침략과 강제 개종 정책으로 쓸려나갔다.

3.4. 동남아시아

  • 태국의 말레이계 무슬림
    불교 민족주의 국가인 태국에서는 불교 교육이 무슬림 소수집단에도 강제되는 것에 반발하여 유혈 충돌이 일어나고 승병들이 유혈 사태를 진압하면서 갈등이 더 커지기도 했다. 태국의 많은 말레이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이 경제적으로 태국보다 더 윤택한 말레이시아에 편입되기를 바라지만 푸켓 등 유명 관광지가 있는 이 지역을 순순히 말레이시아에 양도할 태국이 아니다.
  • 미얀마의 힌두교도와 무슬림
    영국의 식민 지배 당시 마니푸르 아삼 지방의 브라흐민들과 벵골 지방의 무슬림 농부들이 대거 이 지역에 정착했는데 브라만들은 버마인들이 인도의 불가촉천민들과 외모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무시하면서 버마인들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여기에 더불어 미얀마에 정착한 인도계 무슬림들이 미얀마 현지 여성들을 으로 삼는 걸 보고[39] 버마 민족주의자들은 모욕감과 위기의식을 느꼈다. 영국 식민지배 시절 재산을 축적한 부유한 힌두교인들과 무슬림 상인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대부분 현지 첩들을 내버려두고 인도로 돌아간 반면 영국령 버마에서 재산을 축적하지 못하고 자급자족하는 농민으로 살아가면서 계속 남아 있던 인도계 이민자들의 후손들은 오늘날 미얀마에서 동네북으로 전락했다. 특히 미얀마 땅에서 농사를 지은 로힝야족에 대한 박해가 극심한데 이들이 미얀마의 다른 무슬림 소수자 집단과 다르게 현지인들과 전혀 통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갈등이 더욱 심각한 편이다.
  • 인도네시아에서 이슬람, 개신교, 천주교, 힌두교, 불교, 유교 외의 종교를 가진 이들
    인도네시아는 법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무신론자 = 공산주의자라는 논리로 종교를 가지지 않는 것이 불법이다. 게다가 위 목록에 언급된 종교들만을 인정하여 그 외의 소수 종교나 신흥종교를 믿는 경우 무신론자로 간주되어 차별받기도 한다. 본래 이슬람을 국교로 하려고 했으나 경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도계와 화교들의 반발을 고려하여 이슬람 외의 몇 개 종교도 인정하기로 하면서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객관식 단답형 종교의 자유가 탄생했다.

3.5. 중국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에서는 더 이상 무신론을 강요하지 않고 종교 탄압이 대부분 사라졌으나 중국에서는 국가 무신론을 강요하며 종교 탄압의 강도도 더 심하다. 기독교 문화권인 러시아와 달리 동양에서는 유교에서 ‘군자는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 있어 고대부터 중국 지식인의 상당수가 내세에서 구원을 찾는 종교에 회의적이었으며 전근대에 종교 결사가 일으킨 대규모 반란[40]을 겪은 것도 있어서 중국에서는 중국공산당의 허가와 통제를 받는 종교 시설만 허용되며 다른 경로를 통한 종교활동은 불법으로 규정한다.
  • 티베트 자치구, 칭하이성, 쓰촨성 티베트인
  •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소수민족들[41]
    중국에서 홀로코스트와 비견될 만한 재교육 캠프를 만들어 이들을 고문하고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올 법한 감시 체제를 구축하며 시진핑 개인 숭배 및 중화주의 이데올로기를 강요한다. 위구르인 강제 수용소에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집단 강간과 신체 훼손을 비롯한 악랄한 성고문이 행해지고 있다. 국가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같은 테러단체의 야지디교도 성노예화와 다를 바 없는 극악한 범죄를 직접 저지르는 수준이다. 심지어 가톨릭 교황조차 중국에게 위구르인 인권 탄압을 중지하라고 요청하는데 중국에서 근거 없는 얘기라고 일축하는 황당한 사례마저 나타났다.
  • 후이족
    중국의 전통적인 무슬림 소수자 집단이다. 비교종교학적으로 봤을 때 상당히 특이한 케이스인데 무슬림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식의 기독교식 정교분리 관념이 매우 철저하기 때문이다. 한족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경우와 중국에 정착한 무슬림이 중국인과 통혼하여 무슬림 자녀를 낳은 경우 모두 “당나라 때부터 시작된 유구한 역사를 지닌” 후이족이라는 정체성을 얻으며 심지어 이슬람을 배교한 상태에도 후이족 정체성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 중국의 기독교인
  • 뵌교

3.6. 대한민국

  • 이슬람
    한국의 무슬림 인구는 이주 노동자 및 자발적 개종자, 이주민 2세대 등을 합쳐서 14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한국의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으로 인해 국교나 특별한 다수종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종교적 소수자 취급을 받고 있다. #, #

3.7. 북한

  • 주체사상 외의 모든 종교
    북한은 대외적으로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이름만 사상이지 사실상 김씨 일가 숭배 종교로 작동하는 주체사상 외의 모든 종교를 철저하게 탄압한다.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눈속임을 위해 봉수교회, 칠골교회 등의 종교시설을 운영하거나 조선불교도련맹,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천도교청우당 같은 어용 종교 단체들을 만들어 뒀으나 철저하게 북한 정권의 조종을 받고 있으며 신자들도 대부분 가짜라는 의견이 중론이다. 지하에서는 해방 전부터 종교를 믿던 이들의 후손, 외부를 통해 종교를 접하고 귀의한 신자들 등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발각될 경우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 자세한 것은 북한 문서의 종교 문단으로.

3.8. 서구권

  • 동유럽 동방 가톨릭의 일파인 "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과 "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42]
    러시아에서는 가톨릭 세력의 앞잡이라고 공격받으나 폴란드나 헝가리에서도 제대로 된 가톨릭이 아니라며 심각한 차별을 당한다.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교회는 한 때는 예수회와 함께 벨라루스 르네상스를 주도할 정도로 세력이 컸으나 오늘날에는 신도가 7천여 명만 남을 정도로 철저히 몰락했다.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은 유럽에서는 몰락했지만 미국의 루신인 이민자 사회에서 나름 부흥에 성공하여 현재 40~60만명 정도의 신도를 자랑한다.
  • 북유럽과 동유럽 및 그리스의 신이교
  • 영국의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계 무슬림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아대륙에서 이주해 온 이민자 및 그 후손들으로 주로 요식업 계통에서 종사하며 의료계에 종사하는 경우도 많다. 런던 시장인 사디크 칸도 파키스탄계 무슬림이지만 이슬람 근본주의로 의심받을 것을 우려해 세간의 시선을 의식해서 예배에는 참석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민자 2, 3세대부터는 평균보다 높은 교육 수준을 보여주는 등 어떻게 보면 나름 성공한 소수민족 집단처럼 보이지만 영국 백인들 사이에서 이들에 대한 이미지는 별로 좋지 않다.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기존의 영국인들과 다르게 혈연, 지연을 중시하기 때문인데 이게 좋게 말하면 정이 많은 거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부정부패에 둔감한 것이다. 로더럼 아동 성착취 사건도 대가족 중심의 파키스탄인 사회에서 가해자들이 지인의 아들이나 친척이라는 이유로 목격자들이 신고하지 않은 바람에 장기간 지속되었는데[43] 이는 결국 브렉시트의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아랍/이마지겐 무슬림
    프랑스의 대규모 무슬림 인구 유입은 알제리 전쟁 이후 프랑스 편에 가담했던 아르키(Harki)들이 알제리 독립운동 세력의 보복을 피해 프랑스로 대거 망명한 것이 그 시초다. 프랑스는 알제리와 모로코, 튀니지를 식민지배할 때 식민지인 교육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문제는 알제리 전쟁 이후 프랑스 본토로 도망온 아르키 대부분이 글을 읽고 쓸 줄 몰라서 상당수가 구걸이나 절도로 먹고 살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 불가리아와 그리스의 포마크인
    이슬람으로 개종한 슬라브계 불가리아인의 후손이다. 참고로 불가리아를 포함해 발칸 반도의 기독교 국가들은 자신들이 서유럽보다 못사는 이유가 전부 오스만 제국 탓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오스만 지배 시기 이슬람으로 개종한 무슬림 소수자들에게 거리낌 없이 잔인한 박해를 가하기도 한다.
  •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보슈냐크인
    오스만 제국 시대에 보고밀파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남슬라브인의 후손이다.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보스니아인 모두 같은 세르보크로아트어를 사용하는 데다 오히려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남슬라브인 무슬림과 기독교인들이 서로 우호적이었지만 19세기 말 민족주의 부흥 이후 보슈냐크인들이 자신들을 별개의 민족으로 여기고 이에 세르비아인들이 이들을 자신들의 땅을 대신 차지한 강탈자로 간주하기 시작하면서 상호 갈등이 심화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보스니아 내전 문서 참조
  • 유럽, 아메리카에서의 불교
    신자 수가 꽤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소수자 집계에 누락되는 경우가 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마따나 여러 가지 논란이 되고 있는 무슬림 이민자들에 비해서 차별과 편견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부분도 있다.
  • 미국의 히스패닉 밀집 거주 지역의 시크교 신도와 무슬림
    미국 흑인들이 이슬람에 우호적인 것과 반대급부로 히스패닉들은 미국에서 무슬림에 대한 집단괴롭힘에 제일 먼저 앞장서는 편이다. [44] 그러나 미국 언론에서 정치적인 이유로[45] 히스패닉과 무슬림의 사이가 얼마나 나쁜지를 보도하지 않기 때문에 미국 외에서는 일한 오마르[46] 같은 경우만 보고 히스패닉과 무슬림들을 상호 우호적인 관계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이로 인해 집값이 싸다고 히스패닉 밀집 지역에 정착한 무슬림 이민자들이 헬게이트를 경험하는 사례가 속출하기도 했다.
  • 사탄교
    미국의 사탄교는 실제로 사탄을 숭배한다기보다는 공개적으로 무신론을 강조한다는 개념에 가까우며 북유럽의 사탄교는 신이교주의와 연계되어 있다. 진지하게 믿는 사람도 있는 모양인지(...) 한 번은 칠레에서 한 Deicide 팬이 공개적으로 가톨릭 신부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져 큰 논란이 되었다.
  • 폴란드, 핀란드 정교회 신도
    과거에는 외세 압제를 상징하는 종교로 해당 국가들에서 이미지가 매우 좋지 않았으나 오늘날에는 이미지 개선이 이루어져 제2의 종교 위치에 있다. 다만 러시아와 국경이 직접 닿아 있는 상태에서 러시아인 인구가 상당 비율 거주하는 발트 3국의 발트인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인식이 매우 부정적이다.
  • 립카 타타르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귀순한 킵차크 칸국 출신 무슬림 타타르인들의 후손이다. 폴란드 리투아니아, 벨라루스에 걸쳐 거주하며 600여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현지화되어 립카 타타르인 후손의 상당수가 가톨릭을 믿고 그냥 조상 중에 타타르인이 있었다고 아는 수준이다. 물론 무슬림인 폴란드/리투아니아 타타르인도 엄연히 존재하지만 모어로 폴란드어 등 현지어를 사용하며 외양도 그냥 현지인과 다르지 않다. 이들의 성씨는 ~스키로 대표적인 폴란드어 성씨들이다. 여담으로 미국 최초의 모스크는 1927년 립카 타타르인 이민자들이 뉴욕시 브루클린에 건설한 모스크라고 한다. 해당 모스크는 립카 타타르 출신 이민자 상당수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가거나 더 이상 이슬람을 믿지 않으면서 현재는 종교 시설보다는 역사 유산으로 관리되고 있다.
  • 체코 후스파
    종교개혁 시기 보헤미아 일대에서 얀 후스의 가르침을 추종하던 개신교인들로, 30년 전쟁 과정에서 보헤미아 지역이 초토화되고 인구가 격감하는 과정에서 오스트리아의 탄압까지 받아 교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개신교를 믿던 체코인들은 낮에는 가톨릭 미사를 보고 밤에 몰래 개신교 예배를 방식으로 신앙을 유지하다가 결국 상당수가 개신교를 포기하고 명목상이나마 가톨릭을 믿게 되었는데 이는 오늘날 체코인들이 유럽 기준으로도 세속주의 성향이 강해지는 배경이 되었다. 18세기에 들어서야 후스파에 대한 박해가 멈추었지만 이미 신도 대부분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거나 배교하고 체코에는 소수만 남은 상황이었다. 여담으로 19세기 이후 체코 민족주의가 부흥하면서 얀 후스와 얀 지슈카는 종교를 떠나 민족주의적으로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 퀘이커 교도
    영국에서 이단시되던 개신교 종파였으며 신도 상당수가 미국으로 이주하여 펜실베이니아 주를 개척했다. 오늘날에는 신도가 수십만여 명 정도 남아 있으며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신도가 영국, 미국의 신도보다 약간 더 많다고 한다.

3.9.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 우간다, 탄자니아, 케냐의 인도인 힌두교도
    영국 식민 시절 유입된 인도인 노동자들의 후손으로 동남아의 화교 비슷하게 동아프리카의 상권을 장악하기도 했지만 해당 국가들의 식민지 독립 이후 독재 정권들이 이들을 탄압하면서 오늘날에는 상당수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이주했다.[47]

3.10. 기타 사례


  • 여호와의 증인
    물론 이들이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학술적인 개념으로써는 소수자에 속한다. 병역 거부 외에도 폐쇄성 짙은 종교 공동체 문화 등 여러 가지 논란으로 인하여 프랑스에서는 이들이 종교 단체로서의 혜택을 누릴 수 없도록 종교 단체가 아닌 영리 단체로 분류해 놓았다. 나치 독일 정권 치하에서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탄압받은 일 때문에 이들을 높이 평가하는 경우도 있으나 나치 독일과 직접 피흘려 싸운 프랑스나 소련의 후신인 오늘날의 러시아[48] 입장에서는 이들의 평화 기여가 대단치 않게 여겨질 수 밖에 없다.

  • 상당수의 " 신흥종교"[49]
    신흥종교는 안정적인 성금이나 기부금 확보가 어렵기 때문에 신도들을 착취하거나 성직자들이 일탈 행동을 벌여 사이비 종교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국교가 되거나 국가 권력의 지원을 받기 전까지는 잠재적인 경쟁자가 될 수 있는 기성종교에 의해 차별받고 핍박받게 된다.
  • 이스라엘 외의 지역에서의 " 유대교"
    나이 든 유대인들이나 보수적인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시오니즘의 탄생 이유이기도 하다. 유대인은 다 돈이 많을 거라는 세간의 인식과 다르게 미국의 동유럽계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는 끼니 걱정 문제로 정기적으로 시나고그에 지원을 요청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등 극빈층 인구도 꽤 많다.
  •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 일본의 기독교인
    현대 일본은 종교의 자유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으며 노골적인 기독교공포증도 드물지만 기독교 인구가 극히 적고 지역사회가 대부분 불교 신토 중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이들과 교리가 상극인 기독교인은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인다.
  • 멕시코 산타 무에르테 신앙
    멕시코 사회의 소수자들이 기존 멕시코의 가톨릭과 다른 밀교 형태의 신앙을 추구하는 문화 현상이다. 여담으로 기독교나 유대교처럼 체계적인 교리나 교단을 갖춘 것이 아닌 일종의 컬트에 가깝다 보니[50] 해외로 이민한 멕시코인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유행하지는 않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쿠바 등지의 아프리카 토속 신앙과 가톨릭이 결합한 형태의 산테리아교도 라틴아메리카의 전통적인 흑인 거주지 이외 지역에서는 교세가 미미하고 아이티의 부두교도 미국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스[51]에서는 종교라기보다는 그냥 재미로 특이한 문화를 체험한다는 식의 컬트화가 되어 있는 상태다.

4. 과거의 종교적 소수자 사례

박해를 받아 전멸한 경우 & 다수파가 되거나 민족국가를 이루거나 차별이 사실상 근절된 경우도 모두 포함한다.
  • 로마 제국 밀라노 칙령 이전 기독교
  • 이란의 시아파
    수니파들과 섞여 살았으나 사파비 왕조의 성립 이후 쉬아파들이 사파비 왕조 영내로 이동하고 사파비 왕조 영내의 수니파 무슬림들은 박해받고 수아파로 개종하거나 오스만 제국, 부하라 칸국 등으로 이주하면서 이란 기준으로는 다수파가 되었다.
  • 신플라톤주의
    로마 제국 말기에 기독교의 대체 신앙으로 지식인들 사이에서 각광받았다.
  • 마니교
    위구르 제국 고창회골에서 국교로 삼있던 역사 외에는 항상 종교적 소수파 입장이었고 중세가 끝날 무렵 소멸해서 흔적만 남았다.
  •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의 주요 교파. 오스트리아 제국 시절에는 제대로 된 가톨릭이 아니라고 괴롭힘을 받았고 소련 시절에는 폴란드 스파이라는 의심을 사서 극심한 박해를 당했으나 소련 붕괴와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에는 르비우주를 중심으로 한 우크라이나 서부의 주요 종파가 되었다.
  • 조지아 정교회
    사파비 왕조 시절 인구 대다수가 시아파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가 러시아 제국의 정복 이후 다시 정교회로 개종했다. 조지아 정교회 성당의 상당수가 한 때 모스크로 개조되었다가 정교회 성당으로 재개조된 경우가 많은데 트빌리시의 여러 정교회 성당들에 모스크 건축 양식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 러시아 정교회 고의식파
    17세기 중반의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 니콘의 전례 변경에 반발한 보수파 정교인들과 그 후손들. 이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개선되면서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결국 1971년부로 고의식파에 대한 파면을 모두 철회하고 이들을 복권시켰다.
  • 러시아의 무슬림 타타르인과 바시키르인
    기독교 국가 러시아의 종교적 소수자로 살아온 지 400~500년이 넘어서인지 타타르인 이리나 샤크[52] 토플리스 화보도 잘만 찍는다던가 샤를리 엡도 총격 테러 당시 비무슬림 러시아인들의 상당수가 설문조사에서 다른 기독교 유럽 국가들과 달리 테러범의 입장이 이해가 간다고 응답( 출처)하는 등 러시아 주류 사회와 상당한 수준의 상호 동화가 이루어졌다. 다만 이들과 이웃사촌 지간이었던 추바시인은 빈곤과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정교회로 개종했다. 소련 시절 타타르스탄 대기근으로 1921년 50만 명에서 200만 명 정도의 무슬림과 독일계 러시아인이 목숨을 잃은 적이 있는데 타타르인들은 이 대기근을 볼가 강 유역의 무슬림 민족과 정교회 대신 다른 종파를 믿는 독일계 기독교인들에 대한 조직적 학살로 간주하고 보상과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 숩보트닉(이른바 "안식파")
    러시아 정교회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슬라브계 집단으로 러시아 제국 시절 이단 취급을 받았고 소련에서도 국가 무신론 정책 하에 탄압을 받아 동유럽에서는 거의 사멸하였으나 이스라엘로 이민한 사람들은 주로 노동시오니즘 키부츠의 도움으로 주류 사회에 편입되는데 성공하였다. 일부는 미국 LA로 이민하였으나 다른 미국 유대인들에게 비유대인으로 취급받았던 데다 경제적으로 극도로 빈곤한 경우가 많아 결혼 상대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오늘날에는 사실상 소멸한 집단이다.
  • 보고밀파
    보스니아 교회 보고밀파 신도들은 무슬림처럼 하루에 다섯 번 예배드리는 습관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보고밀파에 영향을 준 바오로파 신도들이 중세 초에 잠시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슬람 교리와 전례 일부를 흡수했기 때문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보스니아 정복 이후 보고밀파 신도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했으며 무슬림 보스니아인 보슈냐크인의 기원이 되었다.
  • 모사라베
    중세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왕국의 지배를 받던 기독교도 신민으로, 절대다수는 농촌에 거주하던 농노들이었으며 이슬람과 기독교를 동시에 믿는 이중 신앙 문화를 지녔다.[53] 무슬림 통치자들의 성향에 따라 모사라베에 대한 차별이 완화될 때도 있었고 박해가 더 심해질 때도 있었다. 기독교 탄압이 심해질 때마다 많은 모사라베들이 북부 기독교 국가로 이주하여 중세 이슬람 선진 문물을 전해주면서 스페인 기독교도 왕국의 영토 회복 운동( 레콩키스타)을 가속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 무데하르
    중세 이베리아 반도에서 벌어진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기독교 국가에 거주하던 무슬림 신민. 이들은 세파르딤 유대인들보다는 처지가 나은 편이었는데 레콩키스타 와중에 항복 과정에서 협상을 통해 안전을 보장받는 경우도 있었고[54] 상인이 많았던 유대인들과 다르게 이베리아 무슬림의 상당수가 농민으로 재산을 약탈하고 추방을 해봤자 오히려 기독교 왕국 측에 손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콩키스타가 완료되면서 이들에게도 기독교로 강제 개종이 이루어졌고 기독교로 개종된 이후에도 모리스코(작은 무어인)이라는 멸칭으로 불리며 이등시민 취급을 받았다 한다.
  • 모리스코
  • 카타리파
  • 바오로파
  • 도나투스파
  •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 백련교
  • 남수단의 기독교와 토속신앙을 믿는 여러 부족들
  •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

5. 종교적 소수자를 무신론자로 매도하는 사례

해당 사례들이 일어난 지역들은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진짜 무신론자들의 탄압했었다.
  • 오만 제국의 아랍인들이 토속 신앙을 믿는 흑인들을 짐승만도 못한 무신론자라며 노예로 납치해 수출한 경우. 오만 제국의 아랍인들은 참고로 현지 흑인들을 부족명으로 부르기도 귀찮아해서 대게 "쿱파르"[55]라는 멸칭으로만 불렀다. 참고로 “카피르”, "쿱파르"라는 멸칭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보어인들에게도 전파되어 오늘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흑인들을 비하할 때 쓰는 멸칭인 "꺄프르"의 어원이 되었다.[56]
  • 기독교 근본주의 선교 단체나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들은 불교 전체를 싸잡아 무신론이라고 억지 주장하며 공격하는 경우가 많다. 불교를 현대적 의미의 무신론으로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종교적 소수자 사례 관련해서 살펴보자면
    • 기성 종교를 탄압하고 무신론을 장려하던 소련에서는 칼미키야의 티베트 불교를 믿는 몽골계 칼미크인들이 이러한 편견을 역이용하여 티베트 불교는 무신론이지 종교가 아니라는 주장을 했지만 소련에서는 불교는 무신론이 아니라고 답하며 오히려 기독교나 이슬람보다도 몽골계 민족들이 믿던 불교를 더 가혹하게 탄압했다. 이는 물론 소련에서 불교가 무신론인지 아닌지 세심하게 분석하고 내린 결정은 아니고 과거 러시아가 몽골 제국의 침략을 받고 나서 이른바 몽골-타타르의 멍에라는 예속 상태에 있었던 데 대한 복수심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보인다.[57] 종교적 소수자의 종교를 다수자들이 편의상 마음대로 판단하고 공격하는 셈이다.
    • 인도의 불가촉천민 권리 신장에 헌신했던 암베드카르 박사는 인도의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이 불가촉천민 인권에 대게 무관심했던 것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현대 서구의 무신론 과학적 회의주의 개념을 받아들인 형태의 인도 현대 불교를 부흥시켰다. 암베드카르 박사의 불교 관련 저서에서는 불교와 다른 종교와의 공통점을 부정하고 과학적 회의주의의 관점에서 불교를 해석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고대 로마 제국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유대교는 다른 종교의 신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미신이라고 주장했으며 로마의 일반 대중들은 다신교 교리를 거부하는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을 “불경한 무신론자"라고 비난했다.
  • 같은 맥락에서 이슬람 계시 초기에 아랍 전통 다신교를 숭배하던 메카의 쿠라이시 사람들은 유일신 신앙을 믿는 무슬림들을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앗 사비이운(الصابئون‎)"이라고 불렀다.[58] 참고로 꾸란에는 기독교인과 유대인, 그리고 상술한 사비이운 중에서 하나님과 심판의 날을 믿으며 선행을 실천한 자들은 천국으로 보상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 있다.[59]
  •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 원자론은 당대 다른 그리스인들에게 무신론이라는 비난을 당하고 적극 배척받았는데 이 덕분의 그의 방대한 저작들이 필사되지 못하고 실전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에 대해 아는 것은 그를 비판한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서 얻은 제한적인 정보이다.
  • 영어 위키백과의 Atheism 항목에 서술된 중세 아랍, 페르시아인 무신론자들은 사실 오늘날과 같은 개념의 무신론자가 아닌 마니교 신자였다. 이들은 마니교의 신학적 관점에서 이슬람 신학을 비판했는데 마니교 신학은 실전되고 이들이 이슬람 신학을 비판한 내용만 남아 이들이 무신론자였다는 오해가 생겼다.. 실제로 아랍어나 페르시아어로 마니교 신자를 칭하는 멸칭인 진디끄(Zindiq, زنديق)[60]는 오늘날 무신론자와 동의어로 쓰인다.

6. 둘러보기



[1] 국가법령정보센터의 조약 전문에는 소수민족이라고 기재됐지만 학술자료 등에서는 해당 부분을 소수자라고 칭하기도 한다. [출처1] 국가법령정보센터 [다른번역] 박정원.소수자보호의 국제법(외국법제동향) [4] 권고로서의 효력밖에 없는 세계 인권 선언을 각국에 법률적 강제력이 있도록 한 것으로 사회권 규약(A규약)과 더불어 자유권 규약(B규약)이라고도 불린다. [5] 이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소수종교가 인도의 파르시( 조로아스터교)로 이들은 인도에서 상당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만 급격한 인구 감소로 인해 공동체 사멸 위기에 놓여 있으며 엄연히 종교적 소수자로 간주된다. [6] 이스라엘 무슬림의 절대다수는 이스라엘 아랍인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전히 이중적 식민지배(double colonization)에 노출되어 있는 서발턴에 속한다고 보고 있다. [7] 일반적인 (보편)인권조약인 B규약이나 인종차별철폐규약 등에서 종교상의 자유나 종교적 소수자에 관한 부분을 다루고 있기는하지만 기본적으로 종교적 소수자를 주제로 하는 규약들이 아니다. [ICERD] International Convention on the Elimination of All Forms of Racial Discrimination, (1965) [출처2] #국가인권위원회 [다른번역2] 박정원. 소수자보호를 위한 보편조약으로서의 인종차별철폐협약(Dankook Law Review Vol.43 No.2, 2019, pp11) [11] United Nations Declaration on the Elimination of All Forms of Intolerance and of Discrimination Based on Religion or Belief [12] 외적 유전형질의 발현 [13] Friesel, O. "Race versus Religion in the Making of the International Convention Against Racial Discrimination 1965"(Law and History Review, Vol. 32, 2014, pp 351-383) [14] 제5조(d)(vii) [CERD] [인용] 박정원. 소수자보호를 위한 보편조약으로서의 인종차별철폐협약(Dankook Law Review Vol.43 No.2, 2019, pp22) [ICCPR] [18] 해당 가설을 주장했던 사람이 논란이 너무 커지자 자살했을 정도다... [19] 인구의 다수가 아랍계 기독교인이다. [20] 비슷한 사례로 오스만 제국 시대의 발칸반도의 산악 시골 지방에는 이슬람과 기독교를 동시에 다 믿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주변에 성경도 꾸란도 없고 글도 읽을 일이 없고 외부인하고 접촉할 일도 없는 사람들에게 '이단', '우상숭배' 같은 말은 그저 먼 나라 얘기일 뿐이었다. [21] 심지어 서구 사회에 난민으로 정착한 야지디인이 새로 이민간 장소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에게 위협을 당했으나 제대로 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던 경우도 있었다. [22] 통계에 따라 다르지만 80%에 달하는 문맹률을 자랑한다... [23] 톨스토이는 두호보르파 신자가 아니었지만 톨스토이가 주장했던 비폭력주의와 정교회의 권위에 대한 거부감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24] 다만 관련 사진(...)과 기록을 찾아보면 다행히 이들은 추잡하게 민폐 끼치는 형태의 폭력 시위는 지양한 듯 하다. [25] 오히려 모피 무역으로 전통적으로 부유했던 집단에 속한다. [26] 러시아 제국에서 반유대주의가 횡행할 때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30년의 병역을 부과한 적도 있었다. [27] 사족으로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종교적 병역 거부자들을 “국가권력에 배신당한 순진한 사람들” 정도로 생각한다. [28] 이들은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사회 집단 중 하나다. [29] 당나라 때는 “의사가 병에 걸리고 페르시아인이 궁핍하다.”는 속담마저 있었다 한다. [30] 자이나교 교리는 살생을 철저히 금지하는데 이 때문에 자이나교 신자는 해충을 죽여야 하는 농업이나 가축의 수를 조절해야 하는 축산업 종사가 불가능하다. [31] 영국인과 페르시아인의 혼혈이다. [32] 거의 유일하다고 보면 된다. 심지어 탈레반조차 여성할례는 야만적 악습이라며 거부할 정도였다... [33] 북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인도아리아인 드라비다인, 문다인의 계급을 구분하기 위한 인종차별적 성격이 강했다면 드라비다인 일색인 남인도에서는 카스트 제도가 중국이나 한국의 신분제도처럼 다소 느슨했고 재산을 축적한 하위 카스트들이 족보를 구입하고 위조하는 행각도 사실상 용인되었다. 불가촉천민, 유색인종 문서 참조 [34] 스리랑카 내전 당시 타밀족들이 인도 타밀나두 지방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의 타밀족 동포들로부터 그렇게 많은 지원을 받았음에도 패배한 이유 중 하나로 타밀족 내 상위 카스트와 하위 카스트간의 상호 불신이 지적된다. [35] 참고로 자살 폭탄 테러는 스리랑카의 LTTE가 원조로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에서 저렴한 비용의 효과적인 테러 방법이라며 이를 벤치마킹(...)하면서 전 세계로 전염되었다. [36] Panadura Debate. 1873.8.23~28일에 스리랑카 남부의 도시 파나두라에서 있었던 불교와 기독교의 논쟁. [37] 다만 파나두라 대논쟁 이전에 기독교 선교사들이 불교에 대해 자행한 차별이나 편향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마냥 피해자는 아니다. [38] 아이러니하게도 스리랑카 연쇄 폭탄 테러 이후 그동안 스리랑카에서 천덕꾸러기 대우를 받던 기독교인의 이미지가 크게 개선되고 있다고 한다. [39] 미얀마의 로힝야 탄압 운동을 주도한 승려 아신 위라투도 어린 시절 자기 어머니가 부유한 로힝야족 상인과 불륜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모욕감을 느껴 로힝야에 대한 맹렬한 증오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40] 황건적의 난, 홍건적의 난, 백련교도의 난 등. [41] 위구르인, 카자흐인, 키르기스인, 우즈베크인, 타타르인, 투르크멘인, 사리콜인, 와키인, 후이족 [42]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에 거주하는 우크라이나계 루신인들이 믿던 소수 종파 [43] 극우 커뮤니티에서 이 사건을 두고 파키스탄인 전체를 싸잡아서 증오 발언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 당시 지역 비하 논란과 비슷한 오류다. 장기간에 걸친 집단 성폭행은 닫힌 사회에서 흔히 발생하는 문제이며 증오 발언으로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44] 어떻게 보면 중세 이베리어반도에서의 이슬람과 기독교도간의 전쟁의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다. [45] 차별 문제를 민감하게 다루는 미국 민주당이 히스패닉의 든든한 우군인 관계로 미국의 진보 언론에서 히스패닉의 소수자 차별 문제를 다루면 팀킬이 된다. [46] 참고로 성소수자의 인권 보장을 주장하고 사형제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는 사람이라 해외의 주류 이슬람계로부터 많은 반발을 받았던 한마디로 예외적인 경우다. [47] 사족으로 우간다의 이디 아민은 인도인들을 “구두약을 피부에 칠한 백인 악마”라고 말하며 무슬림 인도인도 핍박했다. [48] 하단에 서술된 재세례파와 두호보르파의 병역 거부는 인정하지만 여호와의 증인의 병역거부는 인정하지 않는 추세다. [49] 다만 사이비 종교가 아닌 경우에 한정된다. [50] 신흥 사이비 종교들이 기독교를 벤치마킹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기독교의 체계화된 시스템을 베껴야 교단 유지와 교주의 수익 추구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51] 한 때 루이지애나와 생도맹그(아이티)가 모두 프랑스 식민지였던 이유로 아이티 혁명 이후 아이티인 난민들이 상당수 유입되었던 바 있다. 현대에도 아이티 난민들의 주 목적지 중 하나다. [52] 원래 성은 셰이쿨이슬라모바(Shaikh Al-Islam + 러시아어 여성 성 접미사 ova)로 이슬람 원로 학자 가문이라는 뜻이다. 다만 Irina라는 이름은 평화라는 뜻의 정교회식 이름이다. [53]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4세가 톨레도를 함락시킬 때 도시에 기독교인들이 없었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도회지에 거주하던 이베리아 원주민들은 무슬림으로 완전히 동화되었던 듯 하다. [54] 물론 이 과정에서 이등시민 입장이었던 유대인들의 처우 논의는 배제되었다. [55] 현대 아랍어로 불신자라는 뜻의 Kafir(كافر)의 복수형 Kuffar(كفار) [56] Kafir라는 단어는 “진리를 몰래 파묻는 자”라는 뜻의 아랍어 종교 용어지만 Kaffir라고 f자 하나를 더 붙이면 이는 남아공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용어 “꺄프르”가 된다. 활용에 주의할 것. [57] 1921년에는 소련 전역에서 식량이 부족해지자 소련 공산당에서 일단 타타르스탄부터 식량 공급을 끊어서 타타르인 수십만명이 기아로 사망한 적이 있으며, 1932년부터 1933년에는 카자흐스탄 대기근으로 소련 내 카자흐인 전체 인구의 38~42%가 아사한 적도 있었다. [58] 출처는 이븐 카시르의 꾸란 주해서 [59] 꾸란의 제 2장 62절과 제 5장 69절 [60] 원래는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이 마니교 신자들을 낮춰 부르는 멸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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