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리 키스 Geoffrey Key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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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8년 10월 30일 |
미국 뉴멕시코 준주 포트 바야드 | |
사망 | 1967년 9월 17일 (향년 78세) |
미국 워싱턴 D.C. 월터리드 군인병원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중장 |
복무 기간 | 1913 ~ 1950 |
학력 | 미국육군사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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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뉴멕시코 준주 군사기지인 포트 바야드에서 육군 대위 알렉산더 S. B. 키스의 아들로 1913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기병 소위로 임관했다.[1] 텍사스에 있는 제6기병연대에 배치되었고 1916년 판초 비야를 생포하기 위한 베라크루스 원정대에 참가했다. 1917년 육군사관학교에 배치되어 프랑스어 교관, 미식축구 코치로 부임하며 서부전선에 참가하지 못했다.전후 파나마에서 작전부참모로 복무했고 지휘참모학교, 육군전쟁대학을 수료했다.[2] 유럽에서 제2차 대전이 발발하자 1940년 제2기갑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고 기갑에 대해 연구했다. 이에 조지 S. 패튼이 그의 태도에 대해 칭찬했다.[3]
1941년 미국이 세계 대전에 참전하며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제3기갑사단 부사단장으로 임명되었고 6개월만에 소장으로 진급해 이전 제9기갑사단장인 존 W. 레너드가 제1기갑군단장으로 영전하며 제9기갑사단장으로 부임했다. 제7군소속으로 시칠리아 전역에 투입되었다.
허스키 작전당시 패튼은 야전군을 2개로 나눴고 키스는 그 반을 지휘했다.[4] 많은 희생이 있었으나 5일간 125마일을 진군했고 팔레르모를 점령하고 53,000명의 추축군을 생포했다. 이 공으로 육군수훈장을 수여받았다.
1943년 존 P. 루카스의 후임으로 제2군단장에 임명되어 프레드 L. 워커가 이끄는 제36보병사단을 산피에트로 전투에 보냈고 라피도강 전투, 몬테카시노 전투등 이탈리아 전역의 치열했던 전투에 참가했다. 1945년 토스카나주 인근의 고딕선에서 독일군과 전투를 치렀으며 4월 중장으로 진급했다. 1달 뒤 독일군이 항복하며 이탈리아 전역은 막을 내렸다.
전후 제7군, 제3군을 지휘했고 1950년 퇴역했다. 퇴역후 병기부서의 자문으로 일했고 1967년 사망했다.
[1]
당시 동기로
윌리스 D. 크리텐버거,
폴 뉴가든,
찰스 H. 콜렛,
루이스 A. 크레이그,
알렉산더 패치, 로버트 L. 스프레인스, 윌리엄 R. 슈미트, 런스퍼드 E. 올리버, 헨리 볼딩 루이스, 카를로스 브루어 등이 있다.
[2]
당시 전쟁대학 동기는
매튜 B. 리지웨이,
마크 클라크,
에드워드 H. 브룩스,
월터 베델 스미스등이 있었다.
[3]
이후 패튼과 절친이 되었다.
[4]
제2기갑사단, 제3보병사단, 제82공수사단, 2개 레인저 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