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휴스턴 처치 John Huston Chur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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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2년 6월 28일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글렌아이언 | |
사망 | 1953년 11월 3일 (향년 61세) |
미국 워싱턴 D.C.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미국 육군 소장 |
복무 기간 | 1917~1952 |
학력 | 뉴욕 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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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뉴욕 대학교를 다니다가 1917년 미국이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자원 입대해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서부전선에서 두 군데 부상입었음에도 캉티니 전투에서 병력을 진두지휘해 승리를 거두며 수훈십자장, 은성훈장을 수여받았다.전후에도 군생활을 이어나가며 1920년 대위로 진급했고 주방위군 교관으로 복무했다. 1933~36년까지 필리핀에 있었으며 1936년 소령으로 진급했다. 애리조나 주방위군 교관으로 있다가 1940년 제45보병사단 작전참모로 근무했다.
태평양 전쟁 발발시 45사단 참모장이였고 1943년 부사단장이 되었다. 이후 시칠리아 전역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전선에서 활동했으며 남프랑스에서 전투를 치렀다. 1944년 9월 준장으로 진급했고 네덜란드에 진주하다가 종전을 맞이했다.
전후 보충학교사령부 사령관이 되었고 이후 제5보병사단장으로 복무했으며 맥아더 수뇌부의 일원으로 일본에서 복무했다.
6.25 전쟁 발발 후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왔고 수원에서 한국군 장성들에게 지시했다. 제24보병사단 1대대 대대장 찰스 B. 스미스가 이끄는 스미스 특수임무대대을 지원해줬으며 24사단이 대전 전투에서 와해되자 포로가 된 윌리엄 F. 딘소장을 대신해 24사단을 대리 지휘해 부대원을 규합하고 후방으로 철수시켰다. 이후 재편성을 거쳐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과 전투를 치렀다.
소장으로 진급하고 해병여단을 도와 북한군 사단을 격퇴한 공을 세워 은성훈장을 수여받았다. 하지만 관절염, 골절로 건강상태에 문제가 있었고 특히 중공군의 기습남침, 8군사령관 월튼 워커의 사망으로 후임 매튜 리지웨이는 처치를 배려하기 위해 블랙시어 브라이언 준장으로 교체해줬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 공으로 육군공로훈장을 수여받았다.
포트 베닝에서 육군보병학교장으로 있다가 1952년 퇴역했으며 1년 뒤 사망했다. 유해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