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미국 전략사무국장 제23대 주태국대사 윌리엄 J. 도너번 William J. Donov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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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윌리엄 조셉 도너번 William Joseph Donovan |
출생 | 1883년 1월 1일 |
미국 뉴욕주 버팔로 | |
사망 | 1959년 2월 8일 (향년 76세) |
미국 워싱턴 D.C. | |
복무 |
뉴욕 주방위군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미국 육군 소장 |
복무 기간 |
1912~1917(주방위군) 1917~1919(현역) 1919~1941(예비역) 1941~1945(현역) |
학력 |
나이아가라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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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뉴욕주 버팔로에서 아일랜드계 집안에서 태어났다. 나이아가라 대학교 법학과를 다녔으나 컬럼비아 대학교에 편입해 미식축구팀과 병행했으며 1905년 졸업했다. 이후 로스쿨에 진학해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친해지게 되었다.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으나 싫증을 느끼고 1912년 뉴욕 주방위군에 입대해 기병중대장이 되어 1914년 판초 비야를 잡기 위한 베라크루스 원정에 참가했다. 원정이 끝난 후 정식 육군소속이 되었다.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원정군예하 제42보병사단[1] 165연대 1대대장이었다. 당시 동료는 더글러스 맥아더,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이자 시인인 조이스 킬머였다. 1918년 10월 14일~15일 프랑스 랑드르에생조르주 인근의 전투로 공을 세워 명예 훈장을 받았다.
전후 러시아 내전에도 참가했고 군을 전역해 1922년부터 1924년 뉴욕시 서부지검 검사장으로 근무했다. 당시 금주령을 위반한 인물들을 검거하는데 애썼다. 살인 협박을 많이 받았음에도 법집행을 계속해 언론에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 후 법조계에서 계속일하다가 1922, 1932년 공화당 공천으로 뉴욕주지사에 2번 후보로 나왔으나 낙선했다. 법무장관의 보좌관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절친인 루스벨트의 선거를 돕기도 했다.
1941년 7월 11일 정보조정관으로 임명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기 이전 정보조정관을 만들어 당시 육군, 해군, FBI, 국무부 등의 해외정보가 각각 따로 관리되고 있어서 이를 통합 조정하는 인물이 필요했다. 당시 루스벨트는 절친인 도노반을 기용했고 막강한 권력을 지닌 FBI 국장인 존 에드거 후버를 견제했다.
1941년 10월 정보조정관의 뉴욕 본부를 록펠러 센터 3603호에 만들고 앨런 덜레스에게 본부장을 맡겼다. 덜레스의 사무실은 MI6 사무실의 바로 위층이었다.
1942년 군으로 대령계급으로 복귀해 정보조정관 사무실이 미국합동참모본부 산하의 미국 전략사무국(OSS)으로 개명되었다. 전 세계에서 2만 4000명의 각지의 언어에 능통한 정보원[2]들을 투입해 첩보, 공작활동을 전개했으며 추축군에게 혼란을 연합군에게 정보를 바탕으로 전략을 계획, 수정하는데 도움을 줬다. 1943년 3월 육군 준장으로, 1944년 11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특히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상륙예상지, V-2로켓의 기밀을 빼왔고 호찌민을 구출하는데 공을 세웠다. 하지만 맥아더의 주전장인 남태평양 일대는 맥아더의 견제를 받아 활동하지 못했고 존 에드거 후버의 반발에 중남미쪽도 활동하지 못했다. 거기에 든든한 후원자였던 루스벨트가 서거했고 후임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은 전후 OSS 해체를 명령했다. 해체와 동시에 군에서 퇴역했다.
그래도 공작기관이 필요하다는 도노반의 설득으로 국가안보법과 미국 중앙정보국이 만들어졌다. 태국주재대사로 근무하다가 1959년 뇌혈관질환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