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8 15:01:06

충주 박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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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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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신라 국성{{{#!wiki style="margin: -15px -10px"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fbe673> 忠州 朴氏
충주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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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충청북도 충주시
시조 박영(朴英)
집성촌 충청남도 공주시, 논산시, 계룡시
대전광역시
전라북도 익산시
충청북도 영동군
광주광역시
경상북도 상주시, 김천시
인구 34,226명(2015년)
1. 개요2. 유명인3. 유명하진 않지만 나름 특이한 인물4. 가문 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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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주 박씨는 박씨들 중 8번째를 차지하는 집안으로, 경명왕의 8아들 중 5째 언창의 후손을 자처한다. 성종(조선) 때 만든 성화보 기록이 그렇다. 상주 박씨나 평택 박씨도 언창의 후손이라지만 서로 관련성은 부정하고 있다.

크게 충남북,전북을 아우르는 다수파와 전남 두가지 갈래로 볼 수 있다. 충주 박씨의 파시조들 9형제가 (정확히는 같은 항렬의 4촌들) 대전 근처에 모여 살고 있었는데, 그 중 박지흥이 늘그막에 새장가를 가면서 처가인 전남 광주(정확히는 송정리)에서 전남파의 파시조가 된다. 그의 아들 3형제가 동국 3박이란 별명을 가진 박정, 박상, 박우 3형제로 사림 운동 때 활약이 컸다. 박정은 요절했지만 박상은 장원급제(1526년 병술 중시)했고 박우는 대사성이었으며, 박우의 차남이 충박들의 자랑 영의정 겸 대제학 사암 박순이다. 박순도 장원급제자(1553년 계축 친시)로 삼촌과 조카가 장원급제자라는 기염을 토했다. 이들이 중종 때 반정 공신들과 마찰을 빚어가며 조금씩 사림 쪽으로 정치 물줄기를 틀었다. 충남 다수파에서도 이예당 박형문이 장원급제를 하는 등(1475년 을미 알성시) 쪼그만 집안에 대과 장원급제만 3명이다.(문과 급제자는 총 20명)

전남파인 명재상 박순은 붕당이 분열하기 직전 사림을 안 쪼개지게 살살 잘 데려가보려 했고, 이 점에서 새까만 후배인 율곡 이이 우계 성혼과 생각이 맞다보니 서인으로 몰려 탄핵됐다. 이후 충박에서 글읽는다 하는 선비들은 대부분 노론 기호학파다. 그래서 족보 발문에 우암 송시열이 글도 써주고 좋은 얘기 나쁜 얘기 이런 저런 말을 많이 해줬고, 박유동같이 송시열 문하생 출신도 눈에 띈다. 그러나 19세기 세도 정치로 들어서면서 충박도 중앙에서 멀어진다. 세도 정치 이후 대과 합격은 고종 때 전남파에서 1명(박용주,1888년 식년시 병과) 나온 정도이다.

충주 박씨는 2015년 조사에서 총 3만 4천여 명 정도 되는데 대부분 서울과 대전에 집중됐다. 영남권에는 대구 경북에 486명, 부산에 1700명, 울산에 500명으로, 다 합쳐도 충남이나 전북이 경상도의 2배 이상이다. 경상도는 경북 김천 근방의 임진왜란 때 의병장 박이룡 장군 후손들(소촌공파), 혹은 상주 근방의 분무공신 박동형 후손들(공주파) 정도로 그 수는 많지 않다.

현대 대표적 인물로는 박찬호, 박현주(미래에셋 회장)가 있다.

요즘은 가훈을 집집마다 만드는 게 보통이지만 충주 박씨는 예전부터 대대로 써오던 것이 있다. '가전충효 세수돈목(家傳忠孝 世守敦穆)'. 위아래로는 나라 사랑과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라 가르치고, 옆으로는 서로 배려하고 화목하라는 뜻이다.

2. 유명인

3. 유명하진 않지만 나름 특이한 인물

  • 소와당 박동형: 이인좌의 난 때 삼등공신(분무공신->양무공신). 충박의 유일한 정공신이다.[5] 1695년 생으로 종4품 찰방이었던 큰아버지 박세화에게 어렸을 때 입양된다. 영조가 즉위하고 얼마되지 않았을 즈음 이인좌가 난을 일으킨다. 이인좌는 소론으로 같은 당 인사들과 함께 영조 즉위 직후 축출됐는데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수괴 박필현을 고변한 공으로 양무공신 3등에 오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특이한 인물란에 쓰는 이유는 박동형이 야사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야사에는 별볼일 없는 집안에 태어나 박필현의 빈객으로 총애를 받던 그가 태인 현감 자리를 약속받고 돈을 맡았다가, 박필현이 무신란에 실패해 상주에 숨은 걸 뒷통수를 쳤다는 내용이다. 심지어 그 내용으로 칼럼을 쓰는 자도 생겼다. 하지만 정사인 영조실록 16권(영조 4년 내용)에는 박동형이 상주의 무관인 파총으로 박필현 부자의 갓장식을 보고 고변했다고 나와있다. 박동형은 게다가 숙종 때 예조정랑 박세화에게 입양된 상태였고 어렵게 살면서 남의 집 빈객을 할 신세는 아니었다. 반면 역적 박필현은 서울 토박이였으며, 상주에서 활동한 건 이인좌가 상주에 잠시 살았던 때였을 뿐이다. 만약 박동형이 이인좌와 같은 패거리였다면 공신이 된 후에도 반드시 대간의 탄핵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박동형은 그런 사실이 없다. 야사는 어디까지나 야사일 뿐이다. 공신들은 얼굴을 그려 충훈부에 걸리는 영예를 누렸는데, 이 때 그려진 그의 전신좌상은 대한민국 보물 제 1927호로 지정돼 있다. 수염 터럭까지 해상도가 말그대로 예술이다. 충원박씨보라는 족보도 따로 만든 것으로 보아 박동형의 공을 기려 충박에서 분적을 시도했던 듯 한데 충원 박씨가 현대에 알려져 있지는 않다. 박동형의 행적에 대해 충주박씨 홈페이지나 다른 위키에 도암 이재의 문인이라는 둥, 난리 당시 용인에 있었다는 둥 충박 집안 기록이나 충원군을 설명하는 다른 기록에 남아있던데 이는 잘못된 기록이다. 특히 '월호산으로 피난갔다'는 잘못된 정보로, 가족들이 피난을 간 곳은 상주 너머 월악산(문경)이었다.
  • 연파처사 박개: 이름이 이상한데, 어쨌든 그는 성균관 대사성 박우의 장남으로 영의정 박순의 친형이다. 처사라는 호는 자연에 묻혀 바람같이 살다간 사람들을 일컫는다. 어쨌든 어렸을 때부터 수재 소리를 들은 모양으로, 부모가 자식 자랑이 지나치면 눈쌀이 찌뿌려지는 법인데 그의 부친 대사성 박우가 자식 자랑이 그리 심했다고. 웃긴게 워낙 똑똑하고 말잘하는 걸 다들 인정해서 박우의 팔불출짓을 뭐라는 사람이 없었단다. 그의 집안도 사림 집안으로 대대로 글을 읽고 관직을 지냈고, 당시 중종이 워낙 훈구 공신한테 질려서 사림 쪽에 러브콜을 보내다 보니 박개의 소년 등과를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18세 때 치러간 과거 시험장에서 사람하나가 죽는 걸 눈 앞에서 보게 된다. 과장 문에 사람이 갑자기 몰린 모양으로, 누군가 밀려 넘어진 위에 사람들이 몰려 압사를 당했다. 그걸 보고 그는 '이게 사람이 할 짓이냐?'싶어 바로 과거를 때려치고 고향에서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동생 박순도 그랬지만 가풍이 뭔가 하나에만 매달리는 스타일은 아니었던지 선비로서는 위험하게도 도교 서적을 탐독하며 마침내 도사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유유자적 살다가 나이도 이제 50이 넘자 그 풍모가 신선을 방불케 했다는데, 나주 영산강을 배로 오르내리며 곧잘 노래를 불러 사람들이 좋아했다고 한다. 당시 아직 젊은 시절의 선조 임금도 흥미를 느꼈던 모양이다. 당시 정승 박순의 친형이면서도 사뭇 다른 인생 역정에 대해 '옛날 중국 재상 사안(동진)이 인기 좋았다는데 닮은 데가 있구나'라며 관심을 보였다. 그는 박순에게 졸라 형을 데려오라고 시켰는데, 그는 왕이 사람을 보내는 족족 되돌려 보냈다. 서울 동생까지 조르자 별 수 없이 임금도 만나 벼슬을 받았다. 그래도 도사가 괜히 도사랴. 태업을 일관하던 그는 얼마안가 다 때려치우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 재밌는게 이 사람이 풍류를 즐기던 강변 정자가 있었는데, 죽던 날 여기서 생전 장례식 비슷한 것을 했다고 한다. 마지막 문병을 온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주며 '장례식에 온 걸 환영한다'고 문상 접대를 본인이 직접 했다고 한다. 시 한 편을 읊으며 사람들의 환송 속에 멋지게 눈을 감았다.

4. 가문 야사

충박은 쪼그만 규모의 일족이나 야사가 몇 가지 있어 소개하면 크게 3가지다.
  • 중종 때 눌재 박상의 '고양이 에피소드'이다. 박상은 연산군 때 과거에 붙어 임관한 직후라 서울에 있던 시점이었다. 그런데 고향 나주(지금은 광주됨)에서 연산군 애첩의 아비 백정 우부리가 양민들의 땅을 뺏고 매관매직을 하는 등 전라도 관찰사까지 꼼짝을 못하는 지경이라는 거였다. 그는 도사[6]를 자원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여장을 풀자마자 그는 우부리 집에 통지문을 띄웠다. '야. 빨리 도청으로 튀어와'. 우부리가 코웃음을 치자 관청 아전들을 죄다 끌고 쳐들어가 몽땅 때려부수고는 그 집 남자들을 관아 마당에 꿇려놓고 때려죽였다. 다들 사색이 됐고 우부리 측에서는 시체 치울 생각도 않고 당장 서울로 급전을 보냈다. 장인이 맞아죽은 격이라 연산군 금부도사에게 사약을 들려 나주로 보냈다. 박상은 이런 생각을 한다. '기왕 죽을 거 서울가서 죽자.' 입은 옷 그대로 상경을 시작한 지 얼마 안돼 전남북 경계인 장성 입암산 근처 삼거리(현 호남 고속도로 내장산 IC 근처)에 당도했을 때였다. 터덜터덜 걷는 도중 어디서 새끼 고양이가 야옹야옹 바짓가랭이를 물고 장난을 치는데, 꽤 귀여웠던지 길가에 쭈그리고 데리고 노는 와중에 금부도사가 그 옆으로 지나쳐 갔다. 그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서울가던 길을 틀어 금강산에 숨는다. 평생 죄인의 몸으로 신분을 속이고 살아야 될 마당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쫓겨난다. 그는 그길로 하산했고 곧 중종이 불러 정5품 사간원 헌납이란 요직을 맡게 된다. 그의 일족은 고양이 덕에 눌재가 목숨을 건졌으므로 후손 대대로 고양이를 예뻐했다는 전설이다. 실제로 눌재는 도피 시절 신세를 졌던 금강산 정양사에 사재를 일부 떼어 공양 전용 전답을 마련했다고 한다. '묘답(猫畓)'이라는 대단히 직관적인 이름의 전답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소유권이 모호하다며 총독부령으로 강탈당했다고 한다.
  • 인조 때 익산에 살던 박금은 45세란 당시로는 노년에 과거에 붙었다. 원래 44세 때 붙었었는데 시험출제자가 정치 보복을 당했는지 숙청되고 합격 자체가 취소돼 재시험까지 쳐야 했다. 이제 효도도 좀 하고 번드르르하게 사나 싶은 찰나, 아버지 박대술이 노환으로 쓰러진다. 아들이 붙을 때까지 많이 밀어주신 아버지를 잃을지 모르는 슬픔에 벼슬을 당장 때려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런 약 저런 약에도 아버지가 정신을 못 가누자 다급한 그는 자기 허벅지를 칼로 조금 도려내 아버지 입에 넣었다고 한다. 물론 차도는 없는 게 당연했지만 소문을 보고받은 인조는 정려를 내리고 대대적으로 칭찬하는 한편, 사방 10리(4㎢ 정도, 여의도(3㎢)보다 넓다)의 영지를 내렸다고 한다. 효자 정려가 익산시 용안군에 남아있다.
  • 효자 박응훈은 임진왜란 의병장 학촌 박이룡의 배다른 형제로 충북 영동 사람이다. 늦둥이로서 집안에서 귀염둥이로 활동하던 그는 미처 어른이 되기 전 부모님을 여의게 됐다. 당시는 부모님 상을 3년 지키는게 당연했는데 박응훈도 산소 옆에 초막을 짓고 떠나신 분들을 밤낮으로 추모하던 중이었다. 어느 밤 이상한 기분이 들어 초막 밖을 나가보니 뭔가 엄청난 것이 고양이처럼 그릉거리며 초막을 내려보는 게 아닌가. 순간 얼어붙었지만 엄청 큰 고양이같은 것은 호랑이 별 공격을 하지 않았고 그도 마음을 수습하고 초막 안으로 숨었다. 호랑이는 매일매일 찾아왔고 목숨이 대단히 위험한 지경에도 그가 자리를 계속 지키자 마침내 그들은 아름다운 우정을 쌓았다는...얘기. 라이프 오브 시루떡이냐 1585년 선조 34년 때 효자 정려가 내려졌다. 그리고 7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현재는 그 자리에 '호총(虎塚)'이라는 사적지[7]가 남아있다.

[1] 이름 중 ‘찬’이 들어가 반남 박씨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2] 부친 성명 '박우철' [3] 조선의 문신이다. [4] 박재릉: 1937년 강릉 출생, 연대 국문학과 출신. 1961년 '자유 문학'으로 등단했다. 현대문학상, 한국현대시인상, 한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5] 명예직이나 다름없는 원종공신은 몇 명 된다. [6] 도사: 중앙에서 지방에 보내는 일종의 감찰직. 하위직이긴 하나 형집행이 가능했다 [7] 충북 영동군 황간면 소계리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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