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5 16:33:40

헨리크 입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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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enrik-Ibsen-1901.jpg
본명 헨리크 요한 입센
Henrik Johan Ibsen
출생 1828년 3월 20일
시엔
사망 1906년 5월 23일 (향년 78세)
국적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노르웨이
직업 극작가, 시인
신체 157cm
배우자 수잔나 입센
자녀 시구르 입센[1], 한스 야코브 헨릭센[2]
서명 파일:Henrik_Ibsen_signature.png

1. 개요2. 생애3. 작품4. 기타

[clearfix]

1. 개요

노르웨이 극작가, 시인이다. 안톤 체호프와 더불어 현대 연극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작가다.

2. 생애

1828년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 노르웨이의 항구 도시 시엔(Skien)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집이 부유해 유복한 삶을 살았지만 7살 되던 해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 집안이 몰락하면서 15살 때 그림스터라는 조그마한 읍의 약제사 조수가 되어 생계를 근근히 유지했다. 그리고 이 시기 동안인 18세에 약국 하인이었던 엘제 소피 옌스다터 비르케달렌(Else Sophie Jensdatter Birkedalen)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두기도 했다. 이 아이가 14살이 될 때까지 입센이 양육비를 지원했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작문에 흥미가 있어 신문의 문예란에 몇 편의 시를 발표했다. 22세에 데뷔작인 희곡 <카틸리나>를 발표했다. 그 후 1막극 <전사의 무덤>이 수도 크리스티아니아[3]에서 상연되자 대학 진학의 꿈을 버리고 전업작가로 전향한다. 30세에 베르겐 시의 목사 한스 콘라드 토레센의 딸인 수잔나 토레센(Suzannah Daae Thoresen)[4]과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35세에 사극 <왕위를 노리는 자>를 썼으나 인정받지 못하자 외유에 나서기로 한다. 36세에 로마로 떠났고 그 후 28년 동안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유랑생활을 한다. 39세에 극시 페르 귄트(Peer Gynt)를 발표했다. 당시에 문단은 난해함에 대해서 비판했으나 입센은 노르웨이 시의 한 기준이 될 것이라고 반박했고 그것은 그대로 되었다. 페르 귄트는 이후 역시 노르웨이 출신인 음악가 그리그 동명의 모음곡으로 작곡했으며, 지금은 이쪽이 더 유명하다.

1879년 51세 때 인형의 집(Et dukkehjem)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여성에 대한 해방적인 메시지와 더불어 사실주의 연극의 초기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그 후에도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다가 1891년 28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그의 나이 63세였다. 1906년 동맥 경화증으로 인해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노르웨이 정부는 국장의 예로 작가의 공로에 보답하였다.

3. 작품

  • 카틸리나
  • 헤다 가블러
  • 인형의 집
  • 민중의 적
  • 바다에서 온 여인
  • 들오리
  • 유령
  • 페르 귄트
  •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
  • 로스메르스홀름
  • 건축가 솔네스
  •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 아기 에욜프
  • 성 요한의 전야
  • 올라프 실예크란스
  • 헬겔란트의 바이킹
  • 브랜드
  • 황제와 갈릴레이

4. 기타

  • 현대 희곡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로 대학 연극과에서도 안톤 체호프와 함께 자주 언급되는 극작가이다.
  •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작가이나 노르웨이어가 아닌 덴마크어로 작품을 집필했다. 그가 태어날 무렵 노르웨이는 덴마크 오랜 지배 때문에 정체성을 거의 잃어 노르웨이어도 거의 덴마크어화 되었기 때문이다[5]. 실제로 오늘날의 표준 노르웨이어는 보크몰(Bokmål)과 뉘노르스크(Nynorsk)로 나뉘는데 보크몰은 노르웨이어가 덴마크어화된 릭스몰(riksmål)에서 유래했다.
  • 북유럽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노벨문학상을 끝내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초창기 노벨문학상은 '낙천적인 작품'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사회 문제를 다루는 작품을 쓰던 입센이 제외되었다. 마찬가지로 사회 문제를 다룬 소설을 쓴 에밀 졸라도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다.
  • 근현대 희곡과 세계 문학에 끼친 영향이 큰 작가인만큼 세계 여러 언어로 책이 번역되었다. 그러나 국내의 경우, 노르웨이어를 할 수 있는 번역가가 적은 탓에 시중에파는 입센의 희곡 대부분은 독일어 프랑스어에서 중역한 것이다. 그래도 읽는데 크게 지장이 가는 정도는 아니다. 유일한 노르웨이어 원전 번역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8번의 <인형의 집>이다. 소설가 안정효의 딸인 안미란 교수의 번역으로, 안 교수는 드물게 북유럽 언어를 모두 통달한 번역가이다. 그러나 인형의 집 단 한 편만 수록되어 있다.
  • 2022년 6월, 한국어판 헨리크 입센 전집이 출간되었다. 번역자는 한국연극학회 회장을 지낸 김미혜 한양대학교 명예교수로, 노르웨이어를 직접 공부하여 번역했다고 한다.


[1] 노르웨이 왕정 수립에 공헌했다. [2] 결혼 전에 낳은 아이이다. [3] 지금의 오슬로.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를 기념하여 20세기까지 크리스티아니아로 불렸다. [4] 수잔나는 적극적인 페미니스트였으며 토레센 가의 가정교사였다가 새어머니가 된 안나 막달렌 토레센(Anna Magdalene Thoresen, 결혼 전 성은 Kragh) 또한 작가인 동시에 여러 배우, 문학가들과 교류하여 영향을 끼치는 등으로 당대 기준 매우 진보적인 여성이었다고 한다. 입센의 아내와 장모는 그의 작품의 여성 인물들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5] 다만, 이 말은 다소 어폐가 있는데, 애초에 노르웨이어 덴마크어는 모두 인도유럽어족 게르만어파 북게르만어군에 속하여서 뿌리도 같을 뿐더러, 양쪽 언어가 방언연속체를 이룰 만큼 비교언어학적으로 매우 가까운 사이라서, 애초에 두 언어가 서로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비슷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