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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헨리크 요한 입센 Henrik Johan Ibsen |
출생 | 1828년 3월 20일 |
시엔 | |
사망 | 1906년 5월 23일 (향년 78세) |
국적 | 노르웨이 |
직업 | 극작가, 시인 |
신체 | 157cm |
배우자 | 수잔나 입센 |
자녀 | 시구르 입센[1], 한스 야코브 헨릭센[2] |
서명 |
[clearfix]
1. 개요
노르웨이의 극작가, 시인이다. 안톤 체호프와 더불어 현대 연극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작가다.2. 생애
1828년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 노르웨이의 항구 도시 시엔(Skien)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집이 부유해 유복한 삶을 살았지만 7살 되던 해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 집안이 몰락하면서 15살 때 그림스터라는 조그마한 읍의 약제사 조수가 되어 생계를 근근히 유지했다. 그리고 이 시기 동안인 18세에 약국 하인이었던 엘제 소피 옌스다터 비르케달렌(Else Sophie Jensdatter Birkedalen)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두기도 했다. 이 아이가 14살이 될 때까지 입센이 양육비를 지원했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은 없다고 한다그러나 그 와중에도 작문에 흥미가 있어 신문의 문예란에 몇 편의 시를 발표했다. 22세에 데뷔작인 희곡 <카틸리나>를 발표했다. 그 후 1막극 <전사의 무덤>이 수도 크리스티아니아[3]에서 상연되자 대학 진학의 꿈을 버리고 전업작가로 전향한다. 30세에 베르겐 시의 목사 한스 콘라드 토레센의 딸인 수잔나 토레센(Suzannah Daae Thoresen)[4]과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35세에 사극 <왕위를 노리는 자>를 썼으나 인정받지 못하자 외유에 나서기로 한다. 36세에 로마로 떠났고 그 후 28년 동안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유랑생활을 한다. 39세에 극시 페르 귄트(Peer Gynt)를 발표했다. 당시에 문단은 난해함에 대해서 비판했으나 입센은 노르웨이 시의 한 기준이 될 것이라고 반박했고 그것은 그대로 되었다. 페르 귄트는 이후 역시 노르웨이 출신인 음악가 그리그가 동명의 모음곡으로 작곡했으며, 지금은 이쪽이 더 유명하다.
1879년 51세 때 인형의 집(Et dukkehjem)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여성에 대한 해방적인 메시지와 더불어 사실주의 연극의 초기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그 후에도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다가 1891년 28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그의 나이 63세였다. 1906년 동맥 경화증으로 인해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노르웨이 정부는 국장의 예로 작가의 공로에 보답하였다.
3. 작품
- 카틸리나
- 헤다 가블러
- 인형의 집
- 민중의 적
- 바다에서 온 여인
- 들오리
- 유령
- 페르 귄트
-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
- 로스메르스홀름
- 건축가 솔네스
-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 아기 에욜프
- 성 요한의 전야
- 올라프 실예크란스
- 헬겔란트의 바이킹
- 브랜드
- 황제와 갈릴레이
4. 기타
- 현대 희곡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로 대학 연극과에서도 안톤 체호프와 함께 자주 언급되는 극작가이다.
-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작가이나 노르웨이어가 아닌 덴마크어로 작품을 집필했다. 그가 태어날 무렵 노르웨이는 덴마크의 오랜 지배 때문에 정체성을 거의 잃어 노르웨이어도 거의 덴마크어화 되었기 때문이다[5]. 실제로 오늘날의 표준 노르웨이어는 보크몰(Bokmål)과 뉘노르스크(Nynorsk)로 나뉘는데 보크몰은 노르웨이어가 덴마크어화된 릭스몰(riksmål)에서 유래했다.
- 북유럽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노벨문학상을 끝내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초창기 노벨문학상은 '낙천적인 작품'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사회 문제를 다루는 작품을 쓰던 입센이 제외되었다. 마찬가지로 사회 문제를 다룬 소설을 쓴 에밀 졸라도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다.
- 근현대 희곡과 세계 문학에 끼친 영향이 큰 작가인만큼 세계 여러 언어로 책이 번역되었다. 그러나 국내의 경우, 노르웨이어를 할 수 있는 번역가가 적은 탓에 시중에파는 입센의 희곡 대부분은 독일어나 프랑스어에서 중역한 것이다. 그래도 읽는데 크게 지장이 가는 정도는 아니다. 유일한 노르웨이어 원전 번역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8번의 <인형의 집>이다. 소설가 안정효의 딸인 안미란 교수의 번역으로, 안 교수는 드물게 북유럽 언어를 모두 통달한 번역가이다. 그러나 인형의 집 단 한 편만 수록되어 있다.
- 2022년 6월, 한국어판 헨리크 입센 전집이 출간되었다. 번역자는 한국연극학회 회장을 지낸 김미혜 한양대학교 명예교수로, 노르웨이어를 직접 공부하여 번역했다고 한다.
[1]
노르웨이 왕정 수립에 공헌했다.
[2]
결혼 전에 낳은 아이이다.
[3]
지금의
오슬로.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를 기념하여 20세기까지 크리스티아니아로 불렸다.
[4]
수잔나는 적극적인 페미니스트였으며 토레센 가의 가정교사였다가 새어머니가 된 안나 막달렌 토레센(Anna Magdalene Thoresen, 결혼 전 성은 Kragh) 또한 작가인 동시에 여러 배우, 문학가들과 교류하여 영향을 끼치는 등으로 당대 기준 매우 진보적인 여성이었다고 한다. 입센의 아내와 장모는 그의 작품의 여성 인물들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5]
다만, 이 말은 다소 어폐가 있는데, 애초에
노르웨이어와
덴마크어는 모두
인도유럽어족
게르만어파의
북게르만어군에 속하여서 뿌리도 같을 뿐더러, 양쪽 언어가
방언연속체를 이룰 만큼
비교언어학적으로 매우 가까운 사이라서, 애초에 두 언어가 서로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비슷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