徐寬熙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농업 테크노크라트.2. 생애
1923년 혹은 1926년 평안남도, 혹은 평양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있다. 김일성 시대 중반기 엘리트들이 그렇듯이 젊어서 이력에 대해서는 추적이 잘 되지 않는데, 1950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 유학을 간 것으로 알려져있다. 유학에서 돌아온 이후 1954년 평양시 인민위원회 농업부장에 임명되면서 농업 테크노크라트의 커리어를 밟기 시작했다. 1960년 8월, 평양시 인민위원회 농업관리국장, 1963년 7월 평양시 농촌경리위원장을 거쳐 1963년 9월, 강희원의 뒤를 이어 평양시 인민위원장까지 승진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로동신문 기사를 보면 일관적으로 강희원을 인민위원장으로 보도하고 있다. 통일부가 어디서 이런 자료를 얻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90년대 북한 인명사전들도 다 똑같이 적은 것을 봐서는 로동신문의 교열 실수이거나 그가 대행으로 잠시 인민위원장으로 나왔던 것일 가능성이 높다.1967년 2월, 농근맹 평양시 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67년 11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예산심의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73년 6월에 정무원 농업위원회 제1부위원장까지 승진하였다. 1973년 8월, 김만금의 뒤를 이어 신임 농업위원장에 임명되었고 이때 주체농법을 창안하는 등 적극 활약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6년 7월, 중앙위원회 위원에 보선되었으나 1978년 1월에 농업위원장에서는 해임되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80년에 정무원 부총리에 임명, 1981년 6월, 농업위원장을 겸하였다고 보도되었다. 1977년 1월, 이라크를, 1980년 12월 탄자니아, 1981년 1월, 인도, 1981년 11월 루마니아와 소련을 방문하였다. 1982년 2월에 부총리에서 해임되었다. 비서와 정무원 각료를 겸하지 않으므로 비서국 비서로 이동하기 위해서 해임된 것으로 보인다.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농업비서에 임명되었다.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1982년 10월과 11월, 각각 탄자니아, 남예멘을 방문하였다.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1984년 11월, 김만금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는 한편 12월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중국과 태국을 방문하였다. 1992년 4월,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또 받음으로 이중수훈자가 되었다.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1년 6월, 허정숙 장의위원,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김일성 사후에도 한동안 공개활동을 이어나갔으나 1996년 5월 민족과 운명 관람 이후에는 동정보도가 중단되더니 1997년 9월에 김기선, 피창린, 리봉원 등과 함께 공개총살을 당했다는 교도통신 보도가 남한에 전해졌다. 2005년 신동아 보도에 따르면, 당시 서관히는 비료 30톤을 장사를 목적으로 친인척들에게 빼돌린 혐의로 수감 중이었는데, 당시 고난의 행군의 책임을 뒤집어씌우기 위해 혈안이 됐던 김정일이 장성택을 시켜 그를 조지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김정일은 단순히 비리 사건으로 보고된 서관히 건을 두고 배짱이 부족하다면서 더 크게 일을 만들라고 주문했고, 이에 장성택, 채문덕 등이 그를 미국의 사주를 받고 농업을 일부러 사보타주한 간첩으로 몰아서 처형해버렸다고 한다. 서관히와 채문덕의 지시로 서관히를 음해한 지방 농촌경리위원장이 형장에 나타나자 기근으로 악에 받쳐 있던 평양 시민들이 흥분하여 이들을 때려죽였다고 한다. 채문덕이 역으로 숙청되면서 복권되었다는 말은 있는데 문성술, 서윤석 등과 달리 이를 뒷받침할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서관히란 말은 2008년에도 욕으로 쓰였다는 보도가 있다. 중앙일보 측에서 북한까지 가서 한 취재에 따르면, 간첩혐의는 벗었으나 농업정책에서 실수한 것은 여전히 인정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문성술, 피창린, 김기선과 달리 애국렬사릉에는 묻히지 못했다.
일부 썰에 따르면 나중에 원산농대 대학생들이 서관히 복권운동을 벌였다가 체포되었다나 뭐라나...
3. 참고문헌
- 통일부 정보분석국, 2003 북한의 주요인물(서울: 통일부, 2003).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