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E40001><colcolor=#FED11E> 장성우 | |
출생 | 1932년 3월 13일 |
강원도 | |
사망 |
2009년
8월 24일 11시 20분 (향년 77세) |
학력 |
김일성군사종합대학교 만경대혁명학원 |
가족관계 |
동생
장성택 동생 장성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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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군인, 정치인.장성택의 맏형이다.
2. 생애
1933년 4월 7일에 강원도에서 태어난 것으로 파악되었으나 나중에 확인된 애국렬사릉 묘비에 따르면 1932년 3월 13일생이다. 아버지는 함경북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까지 지낸 장용환이다.장용환이 일제강점기에 공산주의 운동을 했기 때문에 좋은 성분이라서 만경대혁명학원을 거쳐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다녔고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1973년에 조직지도부 과장에 배치되었다고 한다. 1977년에 소장 계급을 받은 게 확인되었고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4월 김일성칠순 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84년 5월 중장 계급을 받았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1988년 인민무력부 정찰국장을 거쳐 1989년 1월, 사회안전부 제1부부장에 임명되었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대의원자격심사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상장으로 진급했다. 1991년 12월, 사회안전부 정치부장에 임명되었고 1992년 4월 23일, 최고사령관 명령 0024호에 따라 대장으로 진급했다. 1992년 4월, 사회안전부 대표단장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5월에 사회안전부 정치국장을 맡았으며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7년 2월, 최광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4년 10월, 평양을 방어하는 알짜배기 군단인 3군단장으로 부임하였다. 1995년 10월 호위총국장이 되었으며 당창건 50주년 열병식 제병지휘관도 맡았으며 1995년 10월 6일, 모범적 군인으로 선정되어 김정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1995년 11월, 사회안전부 정치국장에서 해임되었으나 1998년 9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2002년 4월 13일, 당중앙군사위원회 및 국방위원회 공동결정에 따라 조선인민군 차수 칭호를 받았다. 2003년 9월,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2004년에 동생 장성택이 숙청된 다음에는 명예직에 가까운 민방위부장으로 물러났다고 하지만 통일부는 이에 대해서 확인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사후 부고에 '민간무력 건설사상을 빛나게 구현' 운운한 부분이 있는 것을 봐선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2009년 7월 김일성 사망 15주기 추도식에 나타난 것을 마지막으로 2009년 8월 24일 11시 20분 77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당중앙위원회와 국방위원회는 부고를 발표했는데 "동지는 인민군대의 지휘성원으로 자라나 조국보위와 혁명무력의 강화발전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였다. 그는 미제의 무력침공을 반대하는 조국해방전쟁에 참가하여 용감히 싸웠으며 오랜 기간 인민군대의 중요직책에서 사업하면서 당의 자위적군사로선을 관철하는데 모든 지혜와 정력을 다 바쳤다. 동지는 우리 당의 선군혁명령도를 높이 받들고 인민군대를 정치군사적으로 강화하는데 공헌하였으며 주체적인 민간무력사상을 빛나게 구현하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였다."고 좋게 말해주었다.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먼저 간 동생 장성길 옆에 안장되었는데 2013년에 장성택이 처형되고 나서도 2015년에 부관참시당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1] #
하지만 그의 사위인 공훈배우 최웅철과 차남 장용철은 말레이시아 대사 재임 중 장성택의 숙청을 알아차리고 도주하려다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3. 참고문헌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2010 북한의 주요인물(서울: 통일부,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