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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83e><colcolor=#00386a> 청 초대 황제
천명제 | 天命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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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59년 2월 21일 | ||
건주여진
허투아라 숙수후부 (現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 만족 자치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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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 1616년 2월 17일 | ||
건주여진
허투아라 숙수후부 (現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 만족 자치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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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26년 9월 30일 (향년 67세) | ||
후금
성경 복릉 융은문 (現 랴오닝성 선양시 위훙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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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 | 복릉(福陵) | ||
재위기간 | 청 초대 황제 | ||
1616년 2월 17일 ~ 1626년 9월 30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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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83e><colcolor=#00386a> 성씨 |
중국식 : 애신각라(愛新覺羅) 만주어 : 아이신기오로(ᠠᡳ᠌ᠰᡳᠨ ᡤᡳᡠ᠋ᡵᠣ) |
|
휘 |
중국식 : 누얼하치(努爾哈赤) 만주어 : 누르하치(ᠨᡠᡵᡤᠠᠴᡳ) 한국식 독음 : 노이합적 |
||
부모 |
부황
현조 선황제 모후 선황후 |
||
형제자매 | 5남 중 장남 | ||
배우자 |
정비 -
원비 퉁기야씨 계비 - 계비 푸차씨 정후 - 효열무황후 오랍나랍씨, 효자고황후 예허나라씨 |
||
후궁 | |||
자녀 | 16남 8녀 | ||
신장 | 170cm[1] | ||
한호 | 만주어 : 수러 겅옌 한(ᠰᡠᡵᡝ ᡤᡝᠩᡤᡳᠶᡝᠨ ᡥᠠᠨ) | ||
묘호 | 태조(太祖) | ||
시호 |
중국식 :
만주어 : 더르기 황디(ᡩᡝᡵᡤᡳ ᡥᡡᠸᠠᠩᡩᡳ) |
||
연호 |
1616년 ~
1626년 중국식 : 천명(天命) 만주어 : 압카이 푸링아(ᠠᠪᡴᠠᡳ ᡶᡠᠯᡳᠩᡤ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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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 후금)의 창업군주. 이성계, 왕건, 유방 등의 보통의 창업군주들이 흔히 그렇듯 일반적으로 청태조나 천명제보단 성명 및 휘인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나 그냥 간단하게 누르하치로 자주 불린다.1583년 건주 여진족 추장에 오른 뒤 건주여진을 통합하면서 강성해졌다. 그러자 상국 행세를 하던 명나라가 이를 견제하기 위해 경쟁 부족인 해서여진과만 무역을 하겠다며 건주여진에게 금수조치를 내렸다. 이에 명과 원한 관계도 있던 누르하치가 반기를 들며 만주를 통합하고 기세를 몰아 명나라까지 쳐들어갔으나, 명나라의 마지막 명장으로 평가받는 원숭환에게 영원성 전투에서 막혀 철수한 뒤 얼마 안가 사망했다.[2]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3]의 아이신(愛新)은 쇠을 뜻하고,[4] 기오로(覺羅)는 큰 여섯 부족을 말한다.[5] 즉, 아이신기오로는 쇠 부족이라는 뜻이다.[6] 누르하치(努爾哈赤)[7]의 뜻은 만주어로 멧돼지 가죽이라고 한다.
누르하치는 랴오닝성 출신으로 오도리 만호부(斡朶里 萬戶府)의 만호였던 먼터무(孟特穆)[8]의 6대손이었다. 아버지 탁시와 할아버지 기오창가는 여진족이었지만 고려 출신 귀화인의 후손인 명나라 요동 총병 이성량에게 복속해 있었다.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천명제/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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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기 제도 및
팔기군 확립
여진족 특유의 제도이자 경제와 사회 단위 겸 전쟁 당시 분대의 역할에 해당하는 팔기군을 편성했다. 19세기가 되면서 팔기군은 무용지물이 되긴 하지만, 적어도 청나라 초기에 대륙을 장악하는데는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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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문자 제정
만주어를 기록하기 위한 만주 문자를 확립했다. 누르하치는 여진족이 자신의 언어를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현상을 안타깝게 여겼다. 물론 이 당시에도 여진어를 표기하는 문자 체계인 여진 문자가 이미 있었지만, 글자수가 너무 많아 익히기가 너무 불편해서 쓰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주로 몽골 문자로 여진어- 만주어를 표기했지만 표기법이 공식적으로 확정된 건 아니라서 중구난방에 가까운 상태였다. 누르하치는 1599년 어르더니 박시와 가가이 자르쿼치로 하여금 몽골 문자를 기반으로 한 만주 문자를 개발시켰다. 이들은 몽골 문자에서 표기가 불가능한 만주어의 음을 표기할 수 있는 자모를 추가했다. 그리하여 만주어의 표기법을 공식적으로 확정지었고, 이 만주 문자는 이후 계속 쓰이지만, 19세기가 되면 만주족 대부분이 모어로 한어(= 중국어)를 사용함에 사용 빈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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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체제 정비
건주여진 시절부터 명나라의 관제를 모방하여 정부 기구를 구성하고, 조정과 6부를 두었다. 그래서 만주족이 북경을 점령한 후로도 명나라의 6부를 그대로 승계하여 대륙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
농업 장려
누르하치는 만주족이 미개 상태를 청산하고 문화 민족으로 발돋움하려면 농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반농반목ㆍ 수렵-채집 민족이었던 만주족을 농경 민족화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점령지에서 대규모 학살을 저지르던 몽골과는 달리 점령지의 한족들을 그대로 두어 생업에 종사시키고, 후금 시절에는 만주를 개간하기 위해 화북에 살던 수많은 한족 포로들을 만주로 이주시키고 그곳에서 농경을 하도록 했다. 반(半) 유목 민족이었던 만주족을 정주민족으로 만들기 위해서 지배층 만주족과 피지배층 한족을 함께 살게 했지만, 이는 민족 갈등을 부르는 부작용도 냈다.
-
상업 장려
만주족 경제는 물물교환으로 돌아갔지만, 누르하치는 화폐도 도입했다. 물론 당시 만주의 경제가 그다지 발달되지 않았던 데다가, 화폐를 주조할 기술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는 별로 효과가 없었고 화폐 경제가 발달한 명나라를 점령한 후에야 만주족은 화폐를 널리 사용했다.
-
대(對) 몽골 정책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몽골의 흥기를 막지 못해 망해버렸다. 누르하치는 이를 교훈 삼아 몽골족을 포섭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후금이나 청나라 황제는 스스로 몽골의 대칸을 자칭했다. 자신들에게 순응하는 몽골 부족들을 후금 체제로 끌어들여 팔기에 소속시켰다. 이들은 대대로 청나라 황실과의 결혼을 통해 청나라의 귀족으로 자리매김했고[9], 몽골 기병들은 만주병들이 맛이 간 19세기까지도 청나라의 온전한 전투력으로 남았다. 이렇게 만주족 조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내몽골 여러 부족들은 스스로를 중국의 일부라고 간주했고, 결국 20세기가 들어서면서 외몽골 부족들이 몽골 공화국으로 중국에서 독립할 때도 중국에 남았다. 이 또한 넓게 보면 몽골을 포섭하려던 누르하치의 정책과도 관련이 있다.
4. 여담
- 《만주실록》 삽화에 그려진 23~63세 누르하치의 모습. 고궁박물관의 누르하치 화상은 실제 《만주실록》 삽화에 그려진 모습과 상당이 다른데, 홍타이지의 화상과 비슷하게 그리다 보니 실제의 모습과 많이 다르게 묘사된 것으로 보인다. 고궁 박물관의 화상은 누가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만주실록》, 신충일의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 등 각종 사서 및 기록에 따르면 공통적으로 체구는 크지 않지만[10] 다부진 편이었으며, 턱수염은 없고, 봉황의 눈[11]과 큰 귀를 지녔고, 얼굴이 길고 야무지며, 코가 크고 곧은 편이었다고 한다.
- 야사에 따르면 아버지가 수달(...)이었다고 한다. 수달이 누르하치의 어머니를 사모해서 밤에 찾아와 누르하치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덕분에 누르하치는 수영을 매우 잘했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들은 한 도인이 찾아와 천자가 될 명당 자리를 알고 있는데, 물속 깊은 곳이라 자신이 들어갈 수가 없으니 누르하치에게 묻어달라고 부탁하고 부탁을 들어주면 누르하치에겐 왕이 될 명당 자리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천자의 자리에 자기 조상의 유골을 묻어 결국 누르하치가 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하지만 이런 전설은 왕조의 시조를 신격화하기 위해 만들어지곤 하니 진지하게 받아들일 건 아니다. 수영을 잘 해서 별명이 수달이었다면 현실성이 있지만...
- 누르하치는 유비의 오호대장군이나, 칭기즈 칸의 사준사구와 비슷하게 후금 개국오대신(后金 開国五大臣)이 있었다.[12] 이들은 누르하치와 의형제 사이였으며, 특히 누르하치 사후 후계구도에서 이들이 중심을 잡아주었기 때문에, 후금판 왕자의 난이 발발하지 않고 제8왕자인 홍타이지가 안정적으로 칸위를 계승할수 있었다고 한다. 이하는 목록.
- 피옹돈(費英東, Fiongdon): 구왈기야 씨족의 족장 가문인 구왈갸 하라(瓜爾佳氏) 출신. 누르하치의 맏손녀사위이기도 하다. 진만인적(眞萬人敵)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 어이두(額亦都, Eidu): 니오후루 하라(鈕祜祿氏) 출신.
- 후르한(扈爾漢, Hūrhan): 퉁기야 하라(佟佳氏) 출신. 누르하치의 양자이기도 하다.
- 호호리(何和理, Hohori): 동고 하라(董鄂氏) 출신.
- 안피양구(安費揚古, Anfiyanggū)[13] : 기오르차 가문 출신으로 누르하치의 호위병이기도 했다. 숑코로 바투루(송골매의 용사)라는 칭호가 있었다고 한다.
- 개인의 전투력도 대단했다. 승마와 활쏘기는 당시 여진족 가운데에서도 최고라고 일컬어졌다. 전투에서도 항상 진두에 섰으며, 완안부의 전투에서는 선두에서 달려드는 적병 100여 명을 쓰러뜨리고 적진에 돌진했다고 한다. 저천부와의 대결에서는 누르하치와 부하 두 명이 800여 명에 포위되었으나, 순식간에 20명을 쓰러뜨리고 포위에서 빠져나왔다.
- 약초상 노릇을 할 때, 여진족 기준 홍삼을 개발했다고 알려져 있다. 명나라 상인들이 조선 인삼의 값을 떨어뜨리려고 인삼이 썩을 때까지 사주지 않자, 이를 쪄서 말려 가공하는 방법을 개발, 명나라 상인들의 얄팍한 수를 무너뜨렸다고 한다.[14]
- 적에게 홀로 쫓길 때, 자신이 키우던 개가 적의 군마의 다리를 물어 쓰러뜨렸고, 이 때를 틈타 달아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만주족이 개고기를 먹는 것을 금했다고 하여 만주족은 개를 먹지 않는 풍습이 있다.
- 삼국지연의, 수호전 덕후였다. 여러 유목민족 출신 정복왕조 개창자와는 달리 누르하치는 문맹이 아니었고, 어렸을 때 한문을 배워 중국고전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삼국지에서 유비의 고사를 읽고 금나라를 부흥시키려는 포부를 가졌다고 한다. #
- 명나라에 대해서는 굉장히 강경했지만 조선에 대해서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조선은 여진족이 통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전처럼 여진족을 무시했고, 누르하치가 국서를 보냈어도 조선은 이전처럼 상당히 무례한 답신을 보냈다. 이미 건주여진을 통일한 후부터 조선에 우호관계를 맺자고 졸랐으나, 조선은 여진을 역사적으로 얕잡아 보았기 때문에 대등한 관계를 맺자는 이야기에 호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전에는 조선과 특별한 마찰은 벌어지지 않았다.
-
임진왜란 때 지원군 지원을 두 차례나 제안하기도 했다. 1592년 8월에 '조상의 나라[15]'인 조선에 원병을 보내겠다고 제안했다. 당시 명나라에서 원군 지원에 대해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던지라 조선에게는 가뭄의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지만 명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거절했다. 이어 임진왜란이 거의 종료될 시점인 1598년 1월에도 원병을 제안해서 조선 내부에서도 전투보다는 화친에 주력했던 명나라의 모습에 분개해 "원군 받아서 왜놈들 때려잡읍시다!"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결국은 거절했다.
이때 누르하치가 원군을 자청한건, 아무래도 통합 과정에서 주변국인 명이나 조선의 인정을 받으면 다른 부족에 비해 여진족 내에서 정치적 우위를 점유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누르하치가 이때만 해도 진짜 순수하게 친조선파라서 조선을 도우려 했을지도 모르지만, 만주족(여진족)과 한민족은 이미 고려 시대부터 지속적으로 전쟁을 여러번 치러왔는데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여진족과 한민족이 서로 감정적으로 특별한 우호적 관계라고 보긴 어려웠다. 당장 누르하치 때도 후술되어있듯 자신을 홀대하는 조선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한 적이 있고, 사후 그의 아들인 홍타이지 시절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침략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던 것을 보면 이 당시 여진족이 부족 전반적으로 조선에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님을 충분히 알 수 있다.[16] 이런걸 보면 누르하치도 실리적인 측면을 가지고, 조선을 도운 대가로 조선과 교역할 권리를 얻어내어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거나 임진왜란으로 조선이 전쟁 중인 틈을 타 원군이란 명목으로 조선 영토에 영향력을 확대할 의도를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17]
다만 최소한 첫 번째 원정 제안은 실제로 도우려 했을 가능성이 있는 게, 전쟁 초반에는 가토 기요마사의 군이 만주까지 넘어와서 누르하치의 거점과 매우 가까운 성을 잠시 점령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당시 일본군이 전력으로 만주를 공격했다면 누르하치도 말려들게 될 것이었고, 당시 힘을 기르고 있었던 누르하치의 입장에서는 만주에 쳐들어오기 전 조선에서 미리 일본군을 제압하는 것이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 여진족을 통합해 후금을 세운 다음에도,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대해서는 7대 원한을 운운하며 강경하게 선전포고했지만 조선은 먼저 건드리진 않았다. 누르하치는 사르후 전투에서 명나라를 물리치고 요동을 장악했는데, 조선이 명나라와 연합해 후금을 치려다가 참패한 사르후 전투 이후에 강홍립이 투항하자 이를 받아들이고 강홍립을 억류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강홍립이 누르하치 앞에서 삼배구고두를 거부하자 불같이 화를 내고 조선 포로를 모두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강홍립과 조선군의 항복을 협상한 둘째 아들 아이신기오로 다이샨이 "포로를 살려주기로 약속했다."고 말리자 조선군 포로를 학살하려던 계획을 단념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군 포로가 탈출하여 그중 일부가 여진 부락을 습격하고 강간 사건을 저질렀고, 이 와중에 다수의 포로가 처형되었다. 어쨌든 여기에 연루되지 않은 포로는 살아서 조선에 돌아올 수 있었지만, 파병군 1만 3천 명 중 3천 명 미만만 돌아올 수 있었다. 강홍립은 누르하치에게 "우리 조선은 명나라의 의리 때문에 귀국과 별 원한이 없지만 어쩔 수 없이 참전하였습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했고, 누르하치는 이를 받아들여 강홍립 및 조선 장수 포로들을 비교적 후대했다.[18] 누르하치는 건국 이후 조선 조정에 계속 국서를 보냈고, 광해군은 이에 답서를 보내려고 했으나 광해군의 집권 기반인 대북파는 다른 당파보다도 오히려 더욱 극렬히 누르하치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해 몇년간 광해군 명의의 답서는 누르하치에게 가지 못하고 다만 평안도 감사의 명의로 누르하치에게 조선 조정의 뜻이 전달되게 된다.
- 당시 조선에서는 칸에 오른 누르하치를 금국한(金國汗) 대신 건주위마법(建州衛馬法)으로 칭했다. 광해군 또한 누르하치에게 서찰을 보낼 때 건주위마법족하(建州衛馬法足下)라고 써놔서 누르하치가 노발대발했다고 하는데, 이유는 위 칭호를 쓴다는 건 동등한 군주의 위치로 보는 게 아니라 일개 장수 및 지방관으로 하대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르하치는 이렇게 자신을 무시하는 조선에 상당한 불쾌감을 가졌지만 주적이 명나라이며, 조선과의 마찰은 명나라에 어부지리를 안겨줄 것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대응을 자제했다.
- 누르하치가 사후에 안장된 복릉(福陵)은 청나라가 중원을 얻기 전에 조성되어서 아들 홍타이지의 소릉과 함께 선양시에 소재해 있는 단 둘뿐인 청나라 황제릉이다.
- 사르후 전투 이후 명나라의 장수인 모문룡은 요동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다가 조선으로 도망쳤는데, 이를 추격하던 후금군[19]은 압록강을 건너[20] 모문룡군을 추격했다. 모문룡은 후금의 기병대에 참패하고, 이후 바다에 약한 후금군을 피하려 철산 가도에 주둔하게 된다.[21] 광해군 시기에는 누르하치가 이렇게 조선과는 충돌을 피했고, 광해군도 명나라 - 후금 사이에서 일종의 이중 외교를 해서 조선과 후금 간의 충돌은 없었다. 다만 이후 인조 정권이 노골적인 반청(反淸) 정책을 시행하면서 양국의 사이는 악화된다.
5. 평가
조부와 부친의 원수를 갚고 분열된 부족을 통일해서 중화제국을 공격하고 새로운 제국을 세웠다는 점에서는 칭기즈 칸과 비슷한 점이 많다. 또한 요나라의 창업자인 야율아보기나 옛 선조 금나라의 창업자인 완안아골타와도 비슷한 점이 있다.다만 누르하치가 이전 정복왕조의 창업군주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적극적인 포용력이었다. 누르하치는 만주족이 대륙을 경영하기에는 아무래도 실력이 모자라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고, 자신들보다 선진적인 한족의 인재나 문화를 적극적으로 흡수하거나 포용하여 270여 년 사직의 기틀을 이루었다. 이 뿐만 아니라 만주족만으로는 명나라와 대결하기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명나라의 이이제이 계책 및 금나라를 멸망시킨 역사적 악연으로 여진족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몽골족을 적극적으로 우대해 포섭하였고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시절 아이신기오로씨에 충성을 맹세한 내몽골 부족들은 청나라가 신해혁명으로 망할 때까지도 청나라에 충성하여 청나라의 정복전쟁의 선봉에 섰다.
이런 방침은 누르하치를 이은 후손들도 그대로 계승하여, 한족 등을 적극 포섭해 이자성군에게 멸망한 명나라를 이어받아 빠르게 중원 대륙을 장악했다. 이후 청나라는 통일왕조로서 100년 이상 번영을 누리는데, 이런 전성기는 다른 한족 왕조의 전성기보다[22] 훨씬 더 길며 다른 유목제국의 왕조보다도 훨씬 더 큰 영향력을 중국 역사에 남겼다.[23][24]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만한 면이 많은 창업자지만, 현대 중국에서는 한족의 흑역사라고 볼 수 있는 만주족 지배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언급이 잘 안되는 듯하다. 물론 살아생전 중원엔 결국 입성하지 못한 누르하치라, 이후 중원을 차지하고[25] 위세를 떨친 후대 황제들인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등에 누르하치가 묻히는 측면도 있다.
6. 가족
6.1. 조상
- 원조부: 범차(范嗏)
- 태조부: 동휘호(童揮護)
- 열조부 - 시호: 조조 원황제(肇祖 原皇帝), 이름: 아이신기오로 먼터무(애신각라 맹특목, 愛新覺羅 孟特穆)
- 현조부 - 이름: 아이신기오로 충샨(애신각라 충선/동산, 愛新覺羅 充善/董山)
- 고조부 - 이름: 아이신기오로 시버오치피양구(애신각라 석보제편고, 愛新覺羅 錫寶齊篇古)
- 증조부 - 시호: 흥조 직황제(興祖), 이름 - 아이신기오로 푸만(애신각라 복만, 愛新覺羅 福滿)
- 조부 - 시호: 경조 익황제(景祖 翼皇帝) 이름: 아이신기오로 기오창가(애신각라 각창안, 愛新覺羅 覺昌安)
- 부황 - 시호: 현조 선황제(顯祖 宣皇帝), 이름: 아이신기오로 탁시(애신각라 탑극세, 愛新覺羅 塔克世)
6.2. 형제자매
누르하치의 아버지인 탁시는 여러 처첩으로부터 5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이들 중 누르하치는 탁시의 장남이었고, 네 형제는 차례로 무르하치(이복형제), 슈르하치, 야르하치, 바라야(이복형제)이고, 두 자매는 차례로 장녀(시호, 이름 미상), 점하고 가 있다. 이 형제들은 장남인 형을 도와 후금의 개국에 공헌을 했고, 슈르하치는 그 중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으나, 대명 온건파였기 때문에[26] 점점 형이랑 사이가 벌어졌다. 특히 1607년, 해서여진 우라부와의 대결에서 누르하치는 공세를 명령했으나, 슈르하치는 자신의 부대를 빼내 구경만 하여 이 갈등은 극에 달했다. 누르하치는 이후 슈르하치의 역모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며, 슈르하치의 부하들과 아들 일부를 참하고[27] 슈르하치를 옥에 가두었다. 슈르하치는 1611년 48세 나이로 옥에서 사망했다.6.3. 비 및 후궁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는 만주족의 풍습에서 부인과 첩은 엄격한 구분이 없었으며, 태어난 아들에 대한 적서 차별은 없었다. 다만 여러 부인들 사이의 서열은 있었다. 서열은 복진, 소복진, 서(庶)복진 등으로 구분된다. 이외에도 아무 직함을 받지 않았지만 잠자리 시중을 드는 여자 노비도 많아서, 사서에 기록된 것만 28명의 여인이 있었고 이후에 후금이 청으로 바뀌면서 황제국이 된 이후 "효자고황후"로 추존된 여인은 1586년 결혼한 셋째부인 예허나라씨였다. 이 사람이 홍타이지(황8자)의 생모였다.천명제가 두었던 비와 후궁의 목록은 아래와 같다.
- 정후
- 정실
- 봉호: 원비(元妃), 이름: 퉁기야 하하나자칭(동가 합합납찰청, 佟佳 哈哈納扎靑) - 후금이 건국되기 전에 사망하였다. 슬하 자녀: 황장녀, 황장자, 2황자
- 봉호: 계비(繼妃)[28], 이름: 푸차 군다이(부찰 곤대, 富察 袞代). 슬하 자녀: 5황자, 3황녀, 10황자
- 황후(추존)
- 시호: 효자고황후(孝慈高皇后), 봉호: 대비(大妃), 이름: 예허나라 멍고저저(엽혁나랍 맹고저저, 葉赫那拉 孟固姐姐) - 후금이 건국되기 전에 사망하였다. 슬하 자녀: 8황자
- 시호: 효열무황후(孝烈武皇后), 봉호: 대비(大妃), 이름: 울라나라 아바하이(오랍나랍 아파해, 烏喇那拉 阿巴亥) - 천명제의 정실이지만, 천명제의 사망 이후 순장을 강요받아 순장되었다. 슬하 자녀: 12황자, 14황자, 15황자
- 측실( 후궁)
- 측복진(側福晉)/측비(側妃)
- 시호: 수강태비(壽康太妃), 봉호: 태비(太妃), 성씨: 보르지기트(보르지긴) 씨(박이제길특 씨 ,博尔濟吉特氏)
- 시호: 측비 이르건기오르씨(측비 이이근각라씨, 側妃 伊爾根覺羅氏), 봉호: 측비(側妃), 성씨: 이르건기오로 씨(이이근각라 씨, 伊爾根覺羅氏). 슬하 자녀: 2황녀, 7황자
- 시호: 측비 예허나라씨(측비 엽혁납라씨, 側妃 葉赫納喇氏), 봉호: 측비(側妃), 이름: 예허나라 나나쿤(엽혁납라 납납곤, 葉赫納喇 納納昆) - 효자고황후의 동생이다. 슬하 자녀: 8황녀
- 시호: 측비 보르지기트씨(측비 박이제길특씨, 側妃 博尔濟吉特氏), 봉호: 측비(側妃), 성씨: 보르지기트(보르지긴) 씨(박이제길특 씨 ,博尔濟吉特氏)
- 시호: 측비 합달납라씨(측비 합달납라씨, 側妃 哈達納喇氏), 봉호: 측비(側妃), 이름: 하다나라 아민저저(합달납라 아민철철, 哈達納喇 阿敏哲哲)
- 서복진(庶福晉)/서비(庶妃)
- 시호: 서비 주기야씨(서비 조가씨, 庶妃 兆佳氏), 봉호: 서비(庶妃), 성씨: 주기야 씨(조가 씨,兆佳氏). 슬하 자녀: 3황자
- 시호: 서비 니오후루씨(서비 뉴호록씨, 庶妃 紐祜祿氏), 봉호: 서비(庶妃), 성씨: 니오후루 씨(뉴호록 씨, 紐祜祿氏). 슬하 자녀: 4황자, 6황자
- 시호: 서비 기야무후트기오로씨(서비 가목호각라씨, 庶妃 嘉穆瑚覺羅氏), 봉호: 서비(庶妃), 이름: 기야무후트기오로 증허(가목호각라 진가, 嘉穆瑚覺羅 眞哥). 슬하 자녀: 9황자, 황4녀, 11황자, 5황녀, 6황녀
- 시호: 서비 시린기오로씨(서비 서림각라씨 庶妃 西林覺羅氏), 봉호: 서비(庶妃), 성씨: 시린기오로 씨(서림각라 씨, 西林覺羅氏). 슬하 자녀: 13황자
- 시호: 서비 이르건기오로씨(서비 이이근각라씨, 庶妃 伊爾根覺羅氏), 봉호: 서비(庶妃), 성씨: 이르건기오로 씨(이이근각라 씨, 伊爾根覺羅氏). 슬하 자녀: 7황녀
- 시호: 서비 아제근(서비 아지건, 庶妃阿濟根), 봉호: 서비(庶妃), 성씨: 아제근(아지건, 阿濟根), 천명제 사망 이후 순장되었다.
- 시호: 낙비 이씨(樂妃 李氏), 봉호: 낙비(樂妃), 이름: 이혜하(李惠霞), 화족 출신이다.
- 시호: 서비 더인저(서비 덕인택, 庶妃 德因澤), 봉호: 서비(庶妃), 이름: 더인저(덕인택, 德因澤), 천명제의 사망 이후 순장되었다. 슬하 자녀: 16황자
6.4. 자녀
사서에 기록된 것만 16남 8녀를 낳았는데, 적장자인 추연은 후계자로 지정되어 여러 중책을 맡았고, 여러 군공을 쌓았으나, 다른 형제와 아버지의 부하들과 사이가 나빴다. 그리하여 권력을 잃었는데, 자신이 보위를 계승하기 위해 무속으로 아버지를 저주한 것이 발각되어 2년간 유폐되었다가 1615년 처형되었다.둘째아들 다이샨은 추연과 동복형제로 역시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군공을 세웠다. 추연이 몰락한 후, 유력한 후계자가 될 뻔 했으나, 아버지의 부인과 간통을 했다는 의심을 받았고 역시 아버지의 신임을 잃었다.[29] 그리하여 후계자가 되는 데는 실패했지만, 친형처럼 처형되지는 않고, 이후 홍타이지의 후계 등극을 도와 지위를 잃지 않는다.
8황자는 홍타이지, 14황자는 도르곤이다. 두 명은 청조의 수립에 큰 역할을 했다.
천명제의 자녀 목록은 아래와 같다.
- 황자
- 황장자 - 시호: 다라광략패륵(多羅廣略貝勒), 이름: 아이신기오로 추연(애신각라 저영, 愛新覺羅 褚英) - 초봉은 태자였지만, 후에 패륵으로 강등되었다. 형제와 개국오대신 등과의 마찰로 실각한 뒤, 부황 누르하치를 저주한 것이 발각되어, 1615년 처형됐다.
- 2황자 - 시호: 화석예열친왕(和碩禮烈親王), 이름: 아이신기오로 다이샨(애신각라 대선, 愛新覺羅 代善)
- 3황자 - 시호: 진국근민공(鎭國勤敏公), 이름: 아이신기오로 아바이(애신각라 아배, 愛新覺羅 阿拜)
- 4황자 - 시호: 삼등진국극결장군(三等鎭國克潔將軍), 이름: 아이신기오로 탕구다이(애신각라 탕고대, 愛新覺羅 湯古代) - 역모죄를 지어 종실에서 축출되었으나, 사후에 복윈되었다.
- 5황자 - 시호: 이혁패륵(已革貝勒), 이름: 아이신기오로 망구르타이(애신각라 망고이태, 愛新覺羅 莽古爾泰)
- 6황자 - 시호: 보국각후공(輔國愨厚公), 이름: 아이신기오로 타바이(애신각라 탑배, 愛新覺羅 塔拜)
- 7황자 - 시호: 화석요여민친왕(和碩饒餘敏親王), 이름: 아이신기오로 아바타이(애신각라 아파태, 愛新覺羅 阿巴泰)
- 8황자 - 시호: 태종 숭덕제(太宗 崇德帝), 이름: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애신각라 황태극, 愛新覺羅 皇太極)
- 9황자 - 시호: 진국각희공(鎭國恪僖公), 이름: 아이신기오로 바부타이(애신각라 파포태, 愛新覺羅 巴布泰)
- 10황자 - 시호: 이혁패륵(已革貝勒), 이름: 아이신기오로 더거러이(애신각라 덕격류, 愛新覺羅 德格類)
- 11황자 - 시호: 이혁진국장군(已革鎭國將軍), 이름: 아이신기오로 바부하이(애신각라 파포해, 愛新覺羅 巴布海)
- 12황자 - 시호: 이혁영친왕(已革英親王), 이름: 아이신기오로 아지거(애신각라 아제격, 愛新覺羅 阿濟格)
- 13황자 - 시호: 보국개직공(輔國介直公), 이름: 아이신기오로 라이무부(애신각라 뇌모포, 愛新覺羅 賴慕布)
- 14황자 - 시호: 화석예충친왕(和碩睿忠親王), 이름: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애신각라 다이곤, 愛新覺羅 多尔衮) - 숭덕제 사후에 순치제의 섭정왕이 되며, 사후 황제로 추존되었으나 그를 미워한 순치제로 인해 직위가 추탈되었다. 후에 예친왕으로 복원되었다.
- 15황자 - 시호: 화석예통친왕(和碩豫通親王), 이름: 아이신기오로 도도(애신각라 다탁, 愛新覺羅 多鐸)
- 16황자 - 시호: 홍대자(紅帶子), 이름: 아이신기오로 피양구(애신각라 비양과, 愛新覺羅 費揚果)
- 황녀
- 황장녀 - 봉호: 단장고륜공주(端莊固倫公主), 이름: 아이신기오로 눈철(애신각라 눈철, 愛新覺羅 嫩哲)
- 2황녀 - 봉호: 화석공주(和碩公主), 이름: 아이신기오로 안철(애신각라 안철, 愛新覺羅 顔哲)
- 3황녀 - 봉호: 공주(公主), 이름: 아이신기오로 망고제(애신각라 망고제, 愛新覺羅 莽古濟)
- 4황녀 - 봉호: 화석공주(和碩公主), 이름: 아이신기오로 목고십(애신각라 목고십, 愛新覺羅 穆庫什)
- 5황녀 - 봉호: 화석공주(和碩公主), 이름 미상
- 6황녀 - 봉호: 화석공주(和碩公主), 이름 미상
- 7황녀 - 봉호: 향군품급(鄕君品級), 이름 미상
- 8황녀 - 봉호: 화석공주(和碩公主), 이름: 아이신기오로 송고도(애신각라 송고도, 愛新覺羅 松古圖)
7. 《청태조실록》
원제는 《大淸太祖高皇帝實錄》(대청태조고황제실록).원문은 여기서 볼 수 있다.
이미지는 여기서 볼 수 있다.
8. 대중매체
- 1986년 중국 드라마 《누르하치》에서는 삼국연의(1994)에서 조운역을 맡았던 후영생[30]이 누르하치 역을 맡았다. 이 드라마에서 누르하치는 여진족을 탄압하는 명나라의 압제에 분노해 궐기하는 것으로 나온다.
- 2004년 중국 드라마 《태조비사》에서는 대만배우 마경도가 누르하치역을 맡았다. 이 드라마는 이성량군에서 복무하고 있던 누르하치가 명나라 군에게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각성하는 것으로 나온다.
나는
명에 의해
조부와
부친을 잃었다.
그 이후, 젊은 날의 나는 오직 복수를 위해 절치부심할 뿐이었다.
허나 난 복수를 위해 명의 도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힘으로 적 들 을 제압하고 부족을 통합하였다.
결국 나를 두려워한 명의 10만 대군을 궤멸시키고 요동을 석권했지.
이제 곧 산해관을 넘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나의 복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허나 그때가 되면 내게 복수란 무엇일까?
산해관을 넘으면..... 그때도 나의 전부일까?
나는 그 너머로 가려한다.
곁에서 그것을 지켜보아라.
나의 칼이 되어서!
네이버 웹툰 《 칼부림》 중
그 이후, 젊은 날의 나는 오직 복수를 위해 절치부심할 뿐이었다.
허나 난 복수를 위해 명의 도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힘으로 적 들 을 제압하고 부족을 통합하였다.
결국 나를 두려워한 명의 10만 대군을 궤멸시키고 요동을 석권했지.
이제 곧 산해관을 넘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나의 복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허나 그때가 되면 내게 복수란 무엇일까?
산해관을 넘으면..... 그때도 나의 전부일까?
나는 그 너머로 가려한다.
곁에서 그것을 지켜보아라.
나의 칼이 되어서!
네이버 웹툰 《 칼부림》 중
후금의 통치자로 등장.
사르후 전투 후
요동을 석권하고
심양으로 천도한 이후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후금에 저항하는 요동 주민들과 여전히 견고한 명의 세력을 마주하며 조급해하기도 한다. 후금으로 망명한 주인공 함을 친위대로 기용하며 극의 주요 인물로 올라섰다. 작중 한창 국운을 떨치는 자신의 후금과 수비에 급급한 조선, 명을 비교하며 우월감에 도취된 모습을 보인다.[31] 산해관을 넘어 중원을 손에 넣기를 꿈꾸었지만 영원성의 벽을 넘지 못했고, 4부 63화에서 원숭환이 쏜
홍이포에 맞아 경상을 입고 결국 후퇴하면서 그의 꿈은 좌절된다. 이후 할하 5부를 정벌하는 등 건재함을 과시하는 듯 했지만 사실은 시름시름 앓고 있었고, 결국 마음의 상처로 등창이 악화되며 평정심마저 잃다가, 4부 82화에서 4패륵들과
슈무루 양구리, 후처 아바하이,
도르곤이 보는 앞에서 회한 어린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뇨허..
녀석.. 에게 그랬지. 자책은 하되.. 후회는.. 없다고..
그런.. 데.. 그런데 왜... 꼭.. 지금이냐..? 어찌하여..
이리.. 떠나면.. 이리.. 가면.. 후회.. 스러울 것.. 같은데..
다시.. 다... 시...
다... 시... 그... 너머... 로...
녀석.. 에게 그랬지. 자책은 하되.. 후회는.. 없다고..
그런.. 데.. 그런데 왜... 꼭.. 지금이냐..? 어찌하여..
이리.. 떠나면.. 이리.. 가면.. 후회.. 스러울 것.. 같은데..
다시.. 다... 시...
다... 시... 그... 너머... 로...
- 2015년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이름이 언급된다. 히데요시와 마에다의 대화에서 그가 이끄는 여진족의 군사력이 강하다고 언급이 되며, 누르하치가 선조에게 조상의 나라 운운하며 파병 의사를 밝히는 서신을 보내자, 맘 급한 선조가 이에 응하려다가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 알고 함부로 군사를 들이려 하냐며 신하들이 반대하자 파병이 이뤄지지 않는 것으로 나온다.
- 《 인디아나 존스와 마궁의 사원》의 초반부에서 인디아나 존스가 중국 상해의 한 호화식당에서 누르하치의 유골을 커다란 다이아몬드(공작의 눈)와 교환하는 장면이 나온다.
- 시리즈 퓨전 무협 소설《 시한부 천재가 살아남는 법》의 등장인물 남제(南帝)의 정체가 천명제 누르하치이다.
- 일본 만화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 27화 마지막에 등장. 굉장히 카리스마 있고 나름 잘생긴 외모로 그려진다. 만주 일대에서 밤하늘에 별똥별이 떨어지는 광경을 보고는 "일본이 조선을 지배했다고... 이것은 계시인가."라고 말한다. 후의 청나라 초대 황제로 표기되는데, 사실 누르하치 치세기에는 국토가 금나라에서 따온 후금(金)이었다. 독자들은 누르하치의 계시라는 말이 누르하치의 인생에 비교하면 정말로 적절하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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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내선 · 심증식 473권 「장훈등전(張勳等傳)」 474권 「오삼계등전(吳三桂等傳)」 475권 「홍수전전(洪秀全傳)」 장훈 · 강유위 오삼계 · 경정충 · 상지신 · 손연령 홍수전 476·477·478·479권 「순리전(循吏傳)」 백등명 , 탕가상 임진단 우종요, · 송필달 · 육재신 · 장목 , 장훈(張塤), · 진여함 · 목수 , 진시림, · 요문섭 , 황정린, · 낙종린 , 최종태 조진조, · 조길사 · 장근 · 강고 , 장극억 가박, · 소사요 , 위입정 고음작 근양, · 최화 · 주중횡 · 유계 · 도원순 · 요기형 · 동국롱 · 육사 · 공감 · 진덕영 · 예복전 · 장림 · 염요희 · 남정원 · 엽신 · 시초정 · 진경문 · 주인룡 · 동화 · 이위 · 사중훈 · 이대본 · 우운진 · 장견도 · 소대업 · 주극개 , 정기 강기연 언여사 주제화, · 왕휘조 , 여돈화 주휴도, · 유대신 · 오환채 · 기대규 · 소희증 · 장길안 , 이육창, · 공경한 · 개방필 · 사소등 · 이갱예 · 이병수 · 적상경 · 장돈인 · 정돈윤 · 이문경 · 유체중 , 유후, · 장기 , 석가소, · 유형 , 서동, · 요간지 · 오균 · 왕조겸 · 조근 · 계초만 · 장작남 · 운무기 · 서대영 · 우수매 · 하왈유 · 오응연 · 유병림 , 진숭지 하자령 소세본, · 이병도 , 유주 주근인 추종준 왕무훈, · 괴덕모 · 임달천 · 방대제 · 진호 · 양영서 · 임계 · 왕인복 · 주광제 · 냉정형 · 손보전 · 가소경 · 도관준 · 진문불 · 이소 · 장해 · 왕인감 480·481·482·483권 「유림전(儒林傳)」 손봉기 · 황종희 · 왕부지 · 이옹 · 심국모 · 사문존 · 고유 · 탕지기 · 육세의 · 심윤 · 응휘겸 · 주학령 · 심호정 · 백환채 · 호승락 · 조본영 · 유원록 · 안원 · 이공 · 조포 · 이내장 · 이광파 · 장형양 · 왕무굉 · 이몽기 · 호방 · 노사 · 고동고 · 맹초연 · 왕불 · 요학상 · 당감 · 오가빈 · 유희재 · 주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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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자들의 연구결과에서 나온 키이다. 아래에 나온 누르하치의 외모에 대한 기록처럼 키가 생각보다는 크지는 않다. 그렇지만 당대 만주인이나 중국인 평균키보다는 크며, 현재도 마찬가지다.
[2]
참고로 청이 중원 대륙을 차지하는건 누르하치의 손자
순치제 시절이다.
[3]
애신각라
[4]
또는
금을 뜻한다. 실제로도 생여진 완안부가 세운
금나라를 암바 아이신 구룬이라고 표기했다. 이때문에 지금도 청나라 황족의 후손들은 한족식 성씨를 김씨(진씨)로 쓰고 있다.
[5]
국조 6조(六祖: 닝우타 버이러)의 부족들은 홍색 직물로 짠 허리띠를 맬 수 있었는데, 이를 교로(覺羅, 각라, 기오로)라고 불렀다.
[6]
하필이면 이
여진어 발음을 음차할 때 쓰인 한자 愛新覺羅 때문에, 한때 국내에서는 《
퇴마록》과
환빠의 영향으로
여진족 신라인설이 심도있게 논의된 적도 있었다. 당연히 여진어 발음 음차에 한자를 끌어다 쓴 것일뿐, 후금/청의 역사가 신라의 역사의 연장선인 것은 아니다. 물론 여진족/만주족에 신라인이나 고구려인이 개별적으로 참가했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곧 만주족의 역사가 한민족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노르만족이었던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해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고 해서 잉글랜드 역사를 프랑스 역사에 귀속시킬 수 없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7]
노이합적
[8]
흔히 몽골식 이름인 몽케테무르 혹은 《
조선왕조실록》에 실려있는 한국식 독음인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로 알려져 있다. 먼터무는 원래
조선 왕조의 영역인
함흥 주변에서부터 북쪽으로는
무단장과
송화강 유역까지 부족을 이끌고 다닌
여진족의 추장으로 결국 대륙의 동북부 지방 남부에 정착했다. 훗날
청나라에 의해
조조(肇祖)
원황제(原皇帝)로 추존되었다.
[9]
제1민족 바로 밑의 제2민족으로서, 청나라에서 만주족과 함께 최상위 지배층을 이루었다.
원나라에서의
색목인,
고대 로마에서
이탈리아가 확실히 본국으로 자리매김하던
공화정 말기에서
군인황제시대까지의
그리스인과 비슷하다. 청나라 조정은 대외적으로는 만한(몽) 일체를 주장하면서 관리의 수도 만족+몽고족 대 한족의 동수로 맞추었지만, 한족과 만주족+몽고족 인구비는 거의 1:100에 가깝기 때문에 실제는 엄청난 차별이었다.
[10]
《만주실록》 삽화에 그려진 모습과 활과 화살의 길이에서 키가 크지 않음을 알 수가 있다. 게다가 머리도 크고 하체 또한 짧다. 물론 당시 만주족 평균 신장인 165 cm보단 큰 170 cm 정도로, 주변 장수들이 거구인 거지 단신은 아니었다.
[11]
가늘고 길며 눈초리가 위로 째진 눈.
[12]
만주어로는 순자암반(ᠰᡠᠨᡷᠠ ᠠᠮᠪᠠᠨ)이라고 불렸다.
[13]
본래 이름은 피양구이지만, 암바 알춘 구룬(대금국)에서도 알 수 있는 암바(대-, 크다)라는 접두어가 붙어 암피양구 > 안피양구가 되었다고 한다.
[14]
다만 서긍의
고려도경에 따르면
고려 중기에 이미 고려는
홍삼을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르하치가 개발했다고 보긴 어렵다. 조선에 있던 홍삼 기술을 참고해서 자기 지역에서 가공했을 가능성도 있다.
[15]
실제로 여진족은 고구려 시절부터 엮이던 민족인만큼 한민족과도 친분이 있긴 하다. 물론 동민족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자체적인 국가 역사가 짧은 여진족은 이후 청나라 시절 편찬된 《
만주원류고》에서도
숙신계 나라뿐만 아니라 옆동네격인 백제와 신라 등
삼한도 만주의 원류 중 하나로 기록하기도 했고(웃긴건 정작 고구려와 고조선은 빼놨다),
금나라의 역사를 편찬한 《
금사》에서도 완안씨 황실의
조상이 고려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16]
이 관점에서 보면 조상의 나라 드립도 어찌보면 병합을 위한 밑밥깔기용이었을 수도 있다.
[17]
실제로
몽골 제국이 이와 비슷하게
원군을 빌미로
고려와 접촉하고 영향력을 확대한 후 침략하여 굴복시켰던 예가 있다.
[18]
나중에 강홍립은 누르하치 앞에서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
아이신기오로 아민 지휘
[20]
광해군 13년(1621) 12월 21일
[21]
중국의 사료에는 조선 조정의 허가를 받고 모문룡을 추격했다고 했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후금이 무단으로 넘어왔고 후금군은 용천 관아를 털어갔으나 조선의 인명은 살상하지 않고 명군만 공격했다고 한다. 이때 명군 및 유민 500여 명이 후금군에게 피살되었다. 《
조선왕조실록》에는 그다지 상세하게 나와았지 않으나, 후금측의 사료를 감안한다면 광해군이 조선군에게 대응하지 말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조선과 후금의 교전은 없었던 듯하다.
[22]
명만 해도 전성기가 채 50여년을 못갔다. 물론 그럼에도 시스템 자체가 갖춰져있다보니 꽤 오래 유지되긴 했다.
[23]
애초에
요나라와
금나라는 중원을 통일하지도 못했고,
원나라는 3~40년 정도로 전성기가 짧았던데다 통치구조도 한계가 있어 전체 기간도 97년 정도로 다른 왕조 대비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물론 다른 칸국까지 포함한 몽골 제국으로 넓히면 좀 다른 문제긴 하지만 중원으로 한정지어보면 그렇다.
[24]
다만 문명화되지 못한 유목제국의 몇몇 악습이 그대로 있던 시기기도 한데,
순장이 대표적이다. 변발도 오늘날 사극에선 시각적 문제가 많다. 강희제가 금지시키고 나서야 청나라에서 순장 풍습이 없어진다.
[25]
손자인 3대
순치제때 중원을 차지하는데, 누르하치의 아들인 섭정왕
도르곤이 실권을 쥐고 있던 시기긴 하다.
[26]
이성량의 아들에 딸을 시집보내서 사돈이 되었다.
[27]
하지만
아민 같은 생존자도 있었다.
[28]
대복진이었으나 폐위당했다.
[29]
이 간통의 대상이 도르곤의 생모인 울라나라씨라는 이야기가 있다. 울라나라씨는 그 후 복진의 지위를 잃어버린다.
[30]
조운역은 계속 바뀐다.
[31]
하지만 어떤 나라든 흥망성쇠를 겪고 훗날 자신이 창건한 나라가
어
떤
일
을
당할 지
아는 독자들의 입장에선 그저 허망하기 그지없는 모습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