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4 23:13:08

풍홍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48 0%, #32127a 20%, #32127a 80%, #000048); color: #ece5b6;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초대 제2대 말대
혜의제 문성제 소성제
추존
원제 · 선제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37 0%, #233067 20%, #233067 80%, #000037); color: #ece5b6;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모용부 慕容部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막호발 모용목연 모용섭귀 무선제 문명제
전연 前燕
초대 제2대 제3대
문명제 경소제 헌무제
서연 西燕 후연 後燕
초대 제2대 초대 제2대
열문제 위제 성무제 혜민제
임시 제3대 임시 제3대
단수 모용의 창려왕 소무제
제4대 제5대 제4대
민제 모용충 소문제
제6대
하동왕
남연 南燕 북연 北燕
초대 제2대 초대 제2대 제3대
헌무제 말주 혜의제 문성제 소성제
토욕혼 吐谷渾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토욕혼 토연 쇄해 엽연 시연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시비 오흘제 수락간 아시 모괴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모리연 섭인 도이후 부연수 과여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세부 부윤 낙갈발
}}}}}}}}}

<colbgcolor=#32127a><colcolor=#ece5b6>
북연 말대 천왕
소성제 | 昭成帝
출생 연대 미상
후연 장락군 신도현
(現 허베이성 헝수이시)
사망 438년
고구려
능묘 미상
재위기간 제3대 천왕
430년 9월 ~ 436년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32127a><colcolor=#ece5b6> 성씨 풍(馮)
홍(弘)
부황 선황제
배우자 왕후 모용씨, 부인 왕씨
자녀 5남 1녀
문통(文通)
작호 중산군공(中山郡公) → 용성왕(龍城王)
시호 소성황제(昭成皇帝)
연호 태흥(太興, 430년 ~ 436년)
}}}}}}}}} ||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북연(北燕)의 제3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자는 문통(文通). 풍발의 동생.

북위의 공격에 나라를 빼앗기고 고구려로 망명했으나 오만한 성격으로 인해 고구려에서 미움을 받았고 고구려를 배신하고 다시 남조인 유송으로 도망치려 했다가 장수왕에게 살해당한다.

2. 생애

407년에 풍발이 용성에서 모반을 일으켜 모용희를 제거한 후 고운을 추대해 북연을 세우자 정동대장이 되었으며, 급군공의 작위를 지내다가 409년에 풍발이 즉위하자 우복야가 되었다. 410년에 풍만니, 풍유진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흥과 함께 이들을 진압했으며, 표기대장군에 임명되고 중산공에 봉해졌다.

430년에 풍발이 병으로 눕자 군사를 거느려 풍익과 황위 다툼을 벌여 승리하면서 사자를 보내 풍익의 목숨을 빼앗았으며, 풍발의 100여 명의 아들을 모두 몰살한 뒤 황제로 즉위했다.

436년에는 북위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수도 화룡성이 위기에 놓이자 고구려에 망명을 요청했으며, 고구려에서 갈로 맹광에게 군사를 보내 구해주면서 요동에 도착했다. 그리고 북연은 북위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한편 438년에 장수왕이 풍홍을 '용성왕 풍군(龍城王 馮君)'이라고 하대한다. 용성은 북연의 수도 화룡성을 가리키고, 풍씨는 북연의 왕성이다. 엄연한 황제국의 군주였음에도 연왕[1]도 아니고 용성왕이라 부른 것은 국왕도 아니고 군왕(郡王)급으로 낮춰 부른 것이다. 풍홍 입장에서는 모멸적으로 들릴 수 밖에 없는 호칭이었던 것. 물론 장수왕대의 고구려는 말 그대로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는데 비해 풍홍은 나라 없는 군주였기에 군왕 대우라도 받으면 다행인 상황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는 아예 제후급으로 강등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 현대로 치면 자신의 회사랑은 비교도 안 될 만큼 작긴 해도 엄연히 재벌그룹의 전 회장이었던 사람에게 사장도 아니고 '어이~ 풍 지점장 요즘 먹고살기 힘들지?'라 한 정도의 느낌이다.

장수왕은 그러면서 '들판에서 묵게 되어 병사들과 말이 노고가 많다'고 위로하자 풍홍은 도리어 부끄럽고 화가 나서 무례함을 따졌다. 이에 고구려에서는 풍홍을 평곽에 거처하게 했다가 북풍으로 옮겨서 북풍을 다스리는 책임자로 임명했다. 하지만 풍홍은 고구려를 업신여겨 정치를 하고 형벌을 주면서 포상하는 일을 북연의 황제로 있을 때와 같이 하자 분노한 고구려 측에서 시중드는 사람들을 빼앗고 태자 풍왕인(馮王仁)을 인질로 삼으며 처신을 제대로 하라고 경고했다.

이러한 고구려의 대응에 풍홍은 겁먹기는 커녕 오히려 원망의 마음을 품고는 남조인 유송에 자신을 받아달라고 하면서 사신을 보냈는데, 이를 받아들여 풍홍을 구출하기로 마음먹은 문제(유송) 유의륭은 사신 왕백구(王白驅) 등을 보내 자신들에게 풍홍을 넘겨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진노한 장수왕은 그것을 거부하는 한편 풍홍을 죽이라는 명을 내려 풍홍은 손수 고구가 이끄는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자손 10여 명과 함께 목숨을 잃는 실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러자 열받은 왕백구는 북연군의 잔당과 함께 손수와 고구를 기습해 고구는 전사하고 손수는 사로잡혔으나 곧바로 장수왕이 군대를 몰고오자 역관광 당하고 붙잡혔다. 장수왕은 왕백구를 죽이려했지만 신하들이 만류하였기에 왕백구는 유송에 압송당하고 만다.

참고로 이때는 막장 유송이 3대 황제 유의륭의 치세로 나름 잘 돌아가던 시기였다.

이렇게 풍홍이 죽자 시호를 소성황제(昭成皇帝)라 했다.

풍홍의 아들 풍랑의 딸은 후에 북위 문성제의 황후가 되는 문성문명황후 풍씨다.

3. 대중매체

천년의 신화라는 게임에서 고구려 미션 7장 이름이 '북연왕의 탈출'인데, 그 북연왕이 바로 이 사람이다. 헌데, 게임 개발사 사정으로 이미지 재탕으로 사용된 비주얼은 광개토대왕이다.[2]


[1] 사실 이것도 낮춰 부른 거긴 하다. 나라 없는 군주인 만큼 이 정도도 감지덕지해야겠지만... [2] 이는 신라 미션에서 계백 근구수왕 이미지를 차용한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