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7-18 15:58:06

창덕궁 경훈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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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창덕궁
<colbgcolor=#bf1400> 창덕궁 경훈각
昌德宮 景薰閣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와룡동 2-71)
건축시기 1461년 이전 (창건)
1608년 (중건)
1647년 (중건)
1835년 (중건)
1920년 (중건)
파일:창덕궁 경훈각.png
<colbgcolor=#bf1400> 경훈각
1. 개요2. 역사3. 구조
3.1. 조선시대 경훈각의 모습3.2. 1920년 이후 재건 된 경훈각의 모습
3.2.1. 경훈각 벽화
4. 여담

[clearfix]

1. 개요

창덕궁 건물이다. 왕과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의 부속 침소이다.

위치는 대조전의 서북쪽에 있다. 건물 정면 기준으로 동쪽 8번째 칸에 달린 복도로 대조전과 통한다.

현재는 1층이지만 원래는 2층 건물이었다. 여러 왕비들이 2층을 여름 더위를 피하고 한가롭게 쉬는 장소로 많이 사용했다.

2. 역사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1461년( 세조 7년) 12월에 1층을 광세전(光世殿), 2층을 징광루(澄光樓)[1]로 정했다는 기사를 보아 그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1, 2층의 이름을 따로 정한 것을 보아 처음부터 2층으로 지었던 듯 하다. 초창기에는 동별실 응복정(凝福亭)과 서별실 옥화당(玉華堂)까지 둔, 나름 규모가 있던 별당이었다. #

이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8년( 광해군 원년)에 복구하였으나, 인조반정 때 다시 화재를 입어 1647년( 인조 25년)에 인경궁 정전 홍정전(弘政殿)을 옮겨 재건하였다. 이 때 홍정전 본채 골격이 많이 변하였다.[2]

순조 때 불탔고 1835년( 헌종 1년)에 다시 지었으나 일제강점기였던 1917년 11월에 또 화재를 입어 1920년에 복구하였다. 참고로 1920년에 다시 지을 땐 경복궁 내전 일곽의 만경전 건물을 헐어왔는데 그 때문에 조선시대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3. 구조

3.1. 조선시대 경훈각의 모습


파일:동궐도 경훈각.png }}} ||<width=325>
파일:경훈각 의궤.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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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동궐도》에서 묘사한 경훈각 <colbgcolor=#bf1400> 《창덕궁영건도감의궤》에 실린 경훈각
동궐도》에 따르면, 정면 5칸, 측면 4칸의 1층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에 중층이었고 청기와를 올렸다.[3] 겹처마 양식으로 지었고, 장대석을 높게 쌓은 4단의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은 다음 그 위에 네모난 기둥을 세운 뒤, 쇠서[4] 2개에 이익공 공포를 놓고 공포 사이마다 장화반(長花盤)을 놓아 침전 건물 특유의 정갈하면서도 화려한 아름다움을 선보였다. 지붕의 합각마루와 추녀마루는 양성 바름을 하고 용두와 잡상으로 장식하였다. 5칸 중 가운데 칸은 건물을 드나들 수 있게끔 툇마루를 밖으로 돌출시켰다. 마당에는 우물이 있어 언제든 마실 수 있게 하였다. 서쪽에는 부속건물인 옥화당과 영휘당을 두었는데 둘은 별도의 건물이 아니며, 한 건물을 두고 위치와 용도에 따라 구분한 것이다.
  • 실내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는 게 많지 않다. 다만 《동궐도형》을 보면 온돌방 하나와 대청 둘이 각각 정면 1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있었고 남북으로 공간을 터서 넓게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대청의 가장자리를 툇간이 감싸는 형태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서쪽 측면에 정면 1칸, 측면 4칸의 마루를 두었으며 누마루의 남쪽엔 정면 1칸, 측면 1칸의 창고를 3개 씩 놓았다. 누마루의 서쪽이 바로 경훈각의 부속건물인 영휘당과 옥화당인데 이 둘은 같은 건물로, 동쪽 방이 영휘당, 서쪽 방이 옥화당이다. 둘을 합쳐 볼 때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제일 서쪽의 정면 4칸, 측면 2칸은 으로만 되어있고 툇간이 없으나 그 동쪽에 있는 정면 2칸의 마루와 정면 2칸의 온돌방 앞엔 툇간이 있었다.

파일:조선 말기 창덕궁 경훈각.jpg }}} ||<width=500>
파일:1907 ~ 1917년 이전 창덕궁 경훈각과 징광루.png
||
<colbgcolor=#bf1400> 조선 말기 촬영한 경훈각과 징광루 <colbgcolor=#bf1400> 일제강점기 순종이 살던 당시 경훈각과 징광루
조선시대 경훈각의 형태를 볼 수 있는 사진이 현재 두 장 남아있다. 왼쪽의 사진은 주변이 순종 창덕궁으로 이어[5]하기 전에 찍은 것이나 정확한 촬영일자는 불명이며, 오른쪽은 1912년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것이다. 두 사진이 얼핏 보기엔 비슷해 보이나 오른쪽 사진의 경훈각 내부를 보면, 창문 유리를 달았고, 내부에는 커튼까지 설치하였다.

3.2. 1920년 이후 재건 된 경훈각의 모습

  • 위에 언급했지만, 경복궁 만경전을 옮겨 지으면서 원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우선 2층에서 1층으로 변했고, 정면이 5칸에서 9칸으로 늘어났다. 즉 층은 줄어들었으나 면적 자체는 늘어난 셈이다. 공포는 이익공 양식에서 초익공으로, 그 중에서도 외부가 둥글게 처리 된 물익공 양식으로 변형되었고, 겹처마 팔작지붕인 것은 그대로이나 기와의 색이 푸른 색에서 일반적인 회색 빛으로 바뀌었다. 또한 대청과 연결되는 출입문의 툇마루가 돌출하였던 것을 실내로 들였는데 이는 만경전 본 모습과도 많이 다르다. 기단은 장대석을 3단 쌓았고, 계단은 소맷돌 없이 그냥 돌을 4단 쌓았는데 맨 아랫단만 다른 단보다 높이가 낮다.

파일:경훈각 화장실1.png }}} ||
<colbgcolor=#bf1400> 경훈각 화장실
뒤편 서쪽 4칸에 가퇴를 설치하여 공간을 최대한 넓게 활용할 수 있게 함과 동시에 바깥 바람을 좀 더 확실하게 막는 효과를 주었고 가퇴의 끝 부분엔 화장실을 설치하였다. 정확히는 매화틀을 받아내는 곳.

파일:경훈각 대청.png }}} ||
파일:경훈각 온돌방.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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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경훈각 대청[6] <colbgcolor=#bf1400> 경훈각 온돌방[7]
중앙의 정면 3칸, 측면 2칸을 대청으로, 그리고 대청을 중심으로 좌, 우에 각각 정면 2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놓았은 뒤 대청을 거실로 삼았고 거실과 온돌의 바깥에 툇간을 달았다. 온돌방은 내부를 구분하지 않고 한 칸으로 터 보다 넓게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벽지 문양이 그려진 능화지로 발랐고 천장엔 전등 조명을 달았다. 거실과 침실 사이에는 8짝의 불발기문[8]을 달아 공간을 구분하였다.
이 밖에도 더 자세하게 보고 싶다면 이 포스팅을 참조.

3.2.1. 경훈각 벽화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243호 244호 245호
창덕궁 대조전 백학도 창덕궁 경훈각 조일선관도 창덕궁 경훈각 삼선관파도
244호 245호 246호
창덕궁 경훈각 조일선관도 창덕궁 경훈각 삼선관파도 인천 선린동 공화춘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244호
창덕궁 경훈각 조일선관도
昌德宮 景薰閣 朝日仙觀圖
Joil seongwando (Rising Sun) in Gyeonghungak Hall of Changdeokgung Palace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와룡동, 창덕궁)
분류 등록문화재 / 기타 / 동산(미술품)
수량 / 면적 1점
지정연도 2006년 3월 2일
시대 1920년 경)
소유자
(소유단체)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덕궁관리소
관리자
(관리단체)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덕궁관리소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245호
창덕궁 희정당 금강산만물초승경도
昌德宮 熙政堂 金剛山萬物肖勝景圖
Geumgangsan manmul choseunggyeongdo (Picturesque Landscape of the Myriad Things on Geumgangsan Mountain) in Huijeongdang Hall of Changdeokgung Palace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와룡동, 창덕궁)
분류 등록문화재 / 기타 / 동산(미술품)
수량 / 면적 1점
지정연도 2006년 3월 2일
시대 1920년 경)
소유자
(소유단체)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덕궁관리소
관리자
(관리단체)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덕궁관리소
파일:창덕궁 경훈각 조일선관도.jpg
파일:창덕궁 경훈각 삼선관파도.jpg
<colbgcolor=#bf1400> 위는 《조일선관도(朝日仙觀圖)》, 아래는 《삼선관파도(三仙觀波圖)》이다.
[clearfix]
경훈각을 완공한 그 해 가을 순종 거실 쪽 불발기문과 천장 사이 벽에 그림을 그리라고 명을 내렸다. 그래서 동편엔 《조일선관도(朝日仙觀圖)》가, 서편엔 《삼선관파도(三仙觀波圖)》가 각각 그려졌다. 둘 다 폭 5.26m, 높이 1.84m 크기로, 《조일선관도》는 노수현(盧壽鉉, 1899 ~ 1978)이, 그리고 《삼선관파도》는 이상범(李象範, 1897 ~ 1972)이 그렸다.[9] 2006년 3월에 문화재청에서 《조일선관도》를 등록문화재 244호, 《삼선관파도》를 245호로 각각 지정했다.

원래 조선총독부 이왕직에서는 작업을 담당할 화가 일본인을 투입하려고 했지만, 순종내전[10]의 그림만큼은 무조건 조선인 화가에게 맡기겠다며 반대했다. 그래서 1911년에 창설된 서화미술회[11]와 서화연구회 소속 조선인 화가들이 각각 대조전과 경훈각의 벽화 4폭, 희정당 벽화 2폭을 맡아 그렸다. 그런데 희정당 벽화 2폭을 맡은 서화연구회 소속 화가 김규진이 윤필료[12]를 챙길 속셈으로 희정당 벽화 작업을 독차지했다는 의심을 샀고, 김은호는 "윤필료를 500원밖에 받지 못했다"며 제작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후에 어찌어찌 사태가 수습돼서 서화미술회에서 중진화가 강필주와 고희동 대신 강습소 출신의 당시로써는 신진 화가였던 이상범과 김은호, 노수현, 이용우, 오일영 등 5명 그리고 해강 김규진까지 총 6명에게 벽화를 맡기기로 결론이 났다.

4. 여담

  • 효종 부마인 정재륜[13]이 저술한 《공사견문록》에 나온 이야기이다. 1659년( 효종 10년) 4월, 당시 세자였던 현종 학질(말라리아)에 걸렸는데 아무리 을 많이 써 봐도 낫질 않았다. 이에 깜짝 놀라게 하면 학질을 뗄 수 있다는 속설을 따라 세자를 경훈각 마당에 세우고, 2층 징광루에 올라가 질기와를 내던져 깨뜨린 뒤, " 궁녀 아무개가 누각에서 낙사했다."고 일제히 외치게 하였다. 그러자 궁중에 난리가 났으며, 이를 본 늙은 궁녀 김씨가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나는 4대 조정[14]을 받들었다. 궁중에 일이 있더라도 마땅히 조용히 진정시킬 것인데 이제 일도 없이 일부러 일이 일어난 것처럼 하였으니, 상서롭지 못한 징조다.“
그런데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이로부터 한 달 뒤인 5월에 효종 세상을 떠난 것이다.
  • 숙종은 《영경훈각시(詠景薰閣詩)》라는 를 지어 경훈각을 노래했다. 징광루 아래서 더위를 피하니 부채질도 필요없고 편안히 좋은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하였다.

[1] 보통 한옥의 경우 1층보단 단층(單層), 2층보단 중층(重層)이라 표현한다. [2] 원래 보통 이렇게 전각을 옮긴 후엔 원래 용도와 비슷하게 사용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창덕궁엔 이미 인정전이 있었기 때문에 같은 용도로 사용할 수 없어 건물의 골격을 바꾼 뒤 다른 용도로 사용한 듯 하다. [3] 앞서 말했듯이 원래 인경궁 정전이었기 때문. [4] 모양의 부재. [5] 移御. 임금이 거처를 옮기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이사가는 것이다. [6] 사진 출처. [7] 사진 출처. [8] 창호문의 위 아래를 벽지로 바르고, 그 한가운데에 교자창이나 완자창을 낸 . [9] 둘 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미술 교육 기관인 경성서화미술원(京城書畵美術院) 출신이다. [10]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 경훈각. [11] 형식상이라지만 회장은 이완용이었다. 총무는 소호 김응원. [12] 제작비. 화가 한 사람당 1,500원 정도였다고 한다. 소설 상록수 레디메이드 인생을 보면 당시 조선인을 평균 월급이 30~50원 수준이니 결코 적은 돈이 아니긴 하다. [13] 숙정공주의 남편. 영의정 정태화의 5남으로 작은 아버지인 정치화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14] 선조 때부터 궁중 생활을 했을 것이다.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은 물론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 같은 국가의 대사건도 경험하고(직접 겪지 못했어도 주변에 당사자가 많았을 것이다) 궁중에서도 이런 저런 일을 많이 겪은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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