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21:44:50

공화춘


1. 1983년에 폐업한 중국집
1.1. 원조 공화춘과 우희광1.2. 공화춘의 후손들1.3. 짜장면박물관
2. 2004년에 개업한 중국집
2.1. 후손들과의 법적 분쟁2.2. 후손들의 패소
3. 라면 브랜드

1. 1983년에 폐업한 중국집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유산
245호 246호 247호
창덕궁 경훈각 삼선관파도 인천 선린동 공화춘 대한민국 수준원점

파일:external/pds.joinsmsn.com/20101231.01300114000003.01L.jpg
폐허 시절의 공화춘
(2010년 12월 31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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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영업하던 시절의 공화춘
共和春, Gonghwachun
공화춘은 1908년부터 1983년까지 인천광역시 중구 차이나타운에 있었던 2층 건물의 중국음식점이다.

2006년에 국가등록문화유산 246호로 지정되었다. 매우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청나라 시대 건축 양식이라고 한다.

1.1. 원조 공화춘과 우희광

파일:external/www.icjgss.or.kr/%EA%B3%B5%ED%99%94%EC%B6%98%20%EC%84%A4%EB%A6%BD%EC%9E%90%20%EC%9A%B0%ED%9D%AC%EA%B4%91.jpg
설립자인 화교 우희광(于希光) (1886~1949). 슬하에 1남 5녀[1]를 두었다.

1908년 설립 당시에는 산동회관(山東會館)[2][3]이라는 이름이었는데, 당시에는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중국식 여관인 객잔(客棧)이었다. 1911년 신해혁명을 기념해서 '공화국의 봄'이라는 뜻의 '공화춘'으로 이름을 바꿨다. 초기에는 인천항에서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위와 같이 현재의 선린동 38-1번지의 새 건물로 옮겼는데, 자세한 이전일자는 기록이 없지만 1917년 해당 건물을 우희광 외 여러 화교들이 공동 매입한 기록, 1934년 7월 인천지역 화교 상인 명부에 중화요리점으로 기재된 점 등으로 보아 그 사이에도 영업을 한 정황이 있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된 이후 중국인들이 인천 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하고 조선과 청 사이의 무역이 성행하자 중국 요리를 파는 요릿집이 생기기 시작는데, 공화춘도 그 중 하나였다. 초기에는 중국인 무역업자들을 주 고객으로 삼았는데, 뒤에서도 설명하고 있지만 공화춘이 짜장면을 제일 처음 팔았던 가게는 아니었다고 한다.[4]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들어선 뒤에는 토착화된 중화요리가 조선인들에게도 인기를 얻으면서 식사 공간이 확장되었고, 결혼식 등 대규모 연회도 소화할 수 있는 연회장까지 갖춰 당시 기준으로는 고급 음식점으로 인기를 누렸다.[5]

그러나 1950년에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일시적으로 영업을 중단했고, 이후 1953년 우희광의 아들인 우홍장(于鴻章, 1917~1993)[6][7]이 매입해 가업을 이어가면서 1970년대까지 전성기를 누렸는데 결혼식장, 회갑잔치, 회식 등 지역의 격식있는 행사장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당시 외국인에 대한 부동산 및 재산권 행사에 제한이 생기면서[8] 많은 화상(華商)들이 경제적인 기반을 잃고 외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자 화교(華僑)시장은 급격히 얼어붙었고, 그들을 타겟으로 영업을 하던 청관거리의 고급 중국 요리집들은 눈물을 머금으며 폐업을 하게 되었다.[9]여기에 인근에 자리했던 인천시청[10]의 이전이 발표되자[11] 선린동 일대[12]의 화교 경제는 더 어려워졌다. 이러한 급격한 사회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3대째 이어져 오던 공화춘도 1983년 우희광의 손자 우심진[13] 대에서 막을 내리게 된다.

한국에서 최초로 짜장면이라는 상표를 달고 짜장면을 판매한 곳으로 짜장면의 원조로 알려져 있다. 다만 짜장면의 유래는 중국에서 춘장에 면을 비벼먹는 형태의 '작장면(炸醬麪)'(현대 한어 병음 표기로 'Zhajiangmian(자장몐)')이 1900년대 초반 선린동 일대 화교촌의 요릿집에서 자연스럽게 한국화된 것으로 보는 게 훨씬 타당하다. 즉 짜장면은 사실상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으며, 그래서 인천의 화교 1세대들은 공화춘이 짜장면의 원조라고 하는데 동의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이렇게 형성된 요리를 짜장면이란 이름을 내걸고 판 곳은 공화춘을 최초로 보기에 짜장면 역사에서 공화춘이 차지하는 위치는 중요하다.

옛 공화춘 건물은 약 100m 가량 떨어진 골목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을씨년스러운 폐가 상태였고 붕괴 위험이 있으니 건물 가까이 주차하지 말고 행인들도 조심하라는 경고문이 붙어있는 등 관리가 이루어지지 못했었다. 이런 상황은 관계 기관 및 자치 단체에서 보수 공사를 시작하고 짜장면박물관으로 건물을 탈바꿈하면서 달라졌다.

1.2. 공화춘의 후손들

공화춘이 폐업하기 3년 전인 1980년, 우희광의 막내 사위 왕입영[14] 씨는 공화춘 인근에 신승반점을 개업하였다. 그는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현재는 딸 왕애주 씨가 운영중이다. 현재의 공화춘과 2004년부터 법적 분쟁이 있었으나 2020년에 패소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공화춘의 후손으로 유명한 신승반점 외에도 공화춘의 역사를 일부 공유하는 가게가 있다. 1918년 화교 뇌문조(賴文藻)가 설립한 시작한 중화루이다[15]. 1983년 경영난으로 공화춘이 폐업하고 2년 뒤인 1985년에 당시 13대(1976~1981) 인천화교협회 회장을 역임했던 양감민(楊鑑珉) 씨[16]의 주도로 전 공화춘 대표였던 우심진, 그리고 다른 한국인 한 명이 3인 동업체제로 중화루[17]를 매입했다. 그러다 우심진 씨가 2003년 사망하면서 동업자 한국인과 양감민씨를 거쳐 자금성과 태화원의 사장 손덕준 씨[18]에게 소유권이 넘어가게 되었는데, 손덕준씨의 외할아버지는 중화루의 지배인이었고, 아버지는 중화루에서 보조를 거쳐 공화춘에서 주방장으로 일했고 자신의 아들에게 요리기술을 전수 해 주었다. 즉, 지금의 중화루는 중화루 창업자의 외손자이자 공화춘의 주방장의 아들이 운영하고 있으며, 한 때 공화춘 사장이 운영하기도 했던 후계이기도 하다.

1.3. 짜장면박물관

짜장면박물관
파일:짜장면박물관 로고.svg
파일:external/tong.visitkorea.or.kr/1936535_image2_1.jpg
<colbgcolor=#653c41><colcolor=#ffffff> 시설 정보
명칭 짜장면박물관
개관 2012년 4월 28일
분야 짜장면
관리 파일:인천중구시설관리공단 로고.svg
주소 인천광역시 중구 차이나타운로 56-14(선린동 38-1,2)
연락처 032-773-9812
공식 웹사이트

등록문화유산 지정 건물이라 그런지, 2010년 후반 들어 인천광역시 중구청에서 건물과 대지를 매입한 뒤 보수 공사를 시작해 2012년 4월 28일에 짜장면박물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입장료는 무료였지만 2013년부터 성인 기준 1,000원씩 받는다.

어째선지 몰라도 기획전시실에 쌍절곤이 박힌 클로 건틀렛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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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04년에 개업한 중국집

2004년 2월 현재의 공화춘의 이름으로 개업한 중국집. 차이나타운 입구에서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언덕 위에 4층 건물[19]로 세워진 이 가게는 앞서 설명한 1908년에 개업하여 1983년에 폐업한 1번 항목의 공화춘과는 무관한 중국집이다. 1983년 원조 공화춘이 화교 배제 정책의 영향으로 문을 닫은 후, 1998년부터 "공화춘 재건 프로젝트"를 주도한 이현대라는 인물이 설립했다. 공화춘의 재건이라는 점을 내세우기 위해 원조 공화춘에서 일하던 주방장 하(賀)모씨를 영입했으며, 이 뉴 공화춘은 2024년 현재 2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공화춘을 재영업할 공화춘의 재건을 내세웠고, 주방장 또한, 그때 그 주방장 까지 영입 하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해 원조 공화춘과는 무관한 식당이다.

2.1. 후손들과의 법적 분쟁

우희광의 증손자인 우신후(于信厚)[20]씨와 후손들의 증언에 따르면, 주방장 하 씨는 원조 공화춘이 문을 닫을 때 까지 주방장으로 일했던 사람으로, 후손들이 삼촌이라고 부를 정도로 각별한 사이었다고 한다. 우희광의 후손들이 2000년대 초반 공화춘의 영업을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하(賀) 모씨를 영입해 둔 상태였는데, 하 모씨가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변절했다고 한다.

뉴 공화춘과 신승반점은 공화춘의 상표를 둘러싸고 뉴 공화춘의 건물이 들어설 때 부터 대립하여 왔다. 원조 공화춘을 폐업 한 우심진의 딸 우례후가 공화춘의 재건 프로젝트를 운영하며 뉴 공화춘을 새로 개장한 이현대 대표를 상대로 상표권 소송을 진행 하였으나 2004년 6월 특허 심판원이 우례후가 해당 상표에 대한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이해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려 공화춘 상표의 소유권을 이현대 대표에게 부여하였다.

이후 이현대 대표는 자신이 100년 전통의 공화춘을 되살린 재건 프로젝트 진행자로 홍보를 하였고 2019년 8월에는 프랜차이즈 사업까지 국내 프랜차이즈 업체중 코스닥 시장에 상장되어 있는 주식회사 디딤과 프랜차이즈 사업을 진행하는 것에 대한 합의서를 체결하여 본격적으로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영업 행위에 반감을 느낀 신승반점의 계승자 왕애주(왕아이추)가 2019년 9월 뉴 공화춘을 상대로 원조인 척 영업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신승반점 측에서 요구하는 배상액은 1,000원으로, 본 소송이 금전적 이득을 위한 것이 아니라 뉴 공화춘이 마치 100년 전부터 영업해온 것처럼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을 바로잡기 위함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라 주장 하였다. 당시 신승반점측의 주장을 담은 2019년 10월 24일 KBS2 제보자들을 통해 방영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뉴 공화춘과 디딤의 프랜차이즈 전개 사업에 많은 영향이 있었다.



왕애주의 고소장에서 뉴 공화춘이 원조인 척 영업하고 있다고 지적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가. 국내 1호 자장면집 공화춘.
* 나. 대한민국 최초 자장면집 공화춘.
* 다. 국내 짜장면의 원조 식당으로 함께한 공화춘.
* 라.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공화춘.
* 마. 100년을 지켜온 자부심.

2.2. 후손들의 패소

하지만 왕애주와 신승 반점에서 제기한 형사 고발은 2020년 2월 19일 인천지방검찰청에서 증거 불충분에 의한 무혐의 처분이 내려졌고, 제기된 민사 소송과 관련해서도 2020년 9월 18일 인천지방법원 민사부에 의거하여 신승반점과 신승반점의 대표 왕아이추의 소송에 대해 원고 패소 판결을 함으로써 공화춘을 둘러싼 상표 소송과 가짜 공화춘 논란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여기에 해당 재판부는 이현대 대표가 공화춘을 재건하는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공화춘 상표를 인수한 것이라는 취지로 홍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 하였고, 이와 같은 법원의 판단에 대해 신승반점측과 왕아이추 대표가 상고를 포기 함으로써 최종적으로 확정되게 되었다.

특히 재판부는 뉴 공화춘에서 "국내 1호 자장면집 공화춘", "대한민국 최초 자장면집 공화춘", "국내 짜장면의 원조 식당으로 알려진 공화춘,"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공화춘", "100년을 지켜온 자부심"과 같은 광고 문구가 소비자를 기만하거나 소비자로 하여금 이를 잘못 알게 할 우려가 있는 광고 표시 행위를 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여 공화춘 원조 논란에 대해서도 확실한 판단을 내렸다. (출처 판결문: 인천지방법원 제 13 민사부 2018가합62290 손해배상 기)

그러나 대부분의 일반 대중들은 이현대의 뉴 공화춘이 100년 전 그 공화춘과 같은 가게라고 알고 있으며, "공화춘을 재건하는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공화춘 상표를 인수" 같은 문구는 홈페이지의 연혁에나 들어가야 알 수 있기에 현실과는 다소 괴리가 있다.[21]

3. 라면 브랜드

2006년에 출시된 GS25 PB상품으로, 제조사는 팔도이다.

건조면과 파우치에 담겨있는 레토르트 짜장 소스가 들어있다. 짜파게티같은 스프 라면은 물이 적으면 분말스프가 뭉치거나 제대로 스프가 면에 잘 묻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으나, 공화춘은 소스를 부어 비비는 형식이라 그런 면에서 자유롭다. 가격대에 비해 내용물이 매우 충실하고 진짜 짜장에 가까운 맛을 낸다. 출시 초기에는 감자가 많이 들어있었으나 점점 줄어들었다.

기본 조리법은 컵라면은 용기에 물을 붓고 뚜껑을 덮은 뒤 그 위에 짜장 소스를 얹어서 열기로 데우는 형식이지만 잘 데워지지 않는다. 잘 데웠다 해도 미적지근한 상태. 어차피 면이 매우 뜨거우므로, 소스가 별도로 뜨거울 필요가 크지는 않다.

봉지라면의 경우 건조면은 라면처럼 끓이고, 그릇에는 짜장소스와 풍미유를 먼저 투입해 섞어 주고, 그 위에 면을 넣고 비비면 된다. 면 위에 소스와 풍미유를 부으면 잘 안 섞인다. 컵라면은 일반적인 컵라면과 동일하지만, 봉지라면은 짜장면처럼 짜장소스부터 넣고 면을 넣는 방식으로 해야 된다.

군대 PX에서도 공화춘 짜장과 짬뽕 컵, 공화춘 짜장을 판매했으며 인기가 좋은 편이다. 참치나 스팸을 넣어 어레인지 버전을 맛볼 수도 있다. 일부 부대에서는 공화춘 컵+ 간짬뽕 뽀글이를 섞어서 만든 간화춘(공간, 간공, 공화뽕, 공간춘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이라는 것을 먹기도 한다. 짜장의 느끼함과 간짬뽕의 매운맛이 적절히 사라진다. 불닭볶음면과 공화춘을 섞은 불화춘[22]도 가능하다. 간짬뽕보다 더 매운맛이 강해서인 듯.

공화춘 짬뽕은 분말스프, 블럭 건더기, 향미유로 구성되어 있지만, 건더기가 심히 부족하다. 맛짬뽕보다도 부족하다. 오징어가 전혀 없으며 전부 야채 밖에 없다. 봉지라면은 1,100원이지만 컵라면과는 다르게 유성스프가 없다.

후속작으로 공화춘 짜장곱빼기 컵과 아주매운짬뽕 컵이 출시되었는데 짜장곱빼기 컵은 기존 공화춘 짜장 컵에서 용량이 증가되어 230g 중량에 700kcal의 열량을 자랑한다. 아주 매운 짬뽕은 기존 공화춘 짬뽕보다도 맵다. 공화춘 짬뽕 + 틈새라면 수준. 그리고 나트륨양도 상상을 초월한다. 처음엔 한 개에 나트륨 2,220mg가 들어있어 일일영양소 대비 111%였으나 이후 낮아져 1,730mg에 일일영양소 대비 87%가 되었다. 나트륨 함량이 높은 편이나, 대부분의 라면에는(국물 포함) 일일영양소 대비 60~70%, 혹은 그 이상의 나트륨이 들어간다. 다른 국물라면처럼 국물은 남기고 면만 먹는다면 나트륨 섭취량을 대폭 줄일 수 있다.[23] 2019년 리뉴얼을 하였는데 맛이 떨어졌다는 평이 많다. 면발이 전자레인지 용기로 바뀌면서 가늘어젔고 나트륨이 심히 줄어서 싱거워졌다.(3분에 2수준) 물을 적게 넣는 것이 좋다. 향미유에도 불맛이 줄어들었다.

공화춘 짜장의 소비자 반응이 괜찮은지 제조사인 팔도에서 일품 짜장면이란 이름으로 판매를 한다. 일품 짜장면과는 비슷하지만 소스의 맛이 미묘하게 다른데, 예로 일품 짜장면에는 콩고기가 들어있지만 공화춘에는 콩고기가 없고 진짜 돼지고기 건더기가 들어있다.

2021년에 판매량 부진으로 인해 단종되고 리뉴얼되어서 맛이 달라졌다. 무게도 200g에서 160g으로 줄었다. 레토르트 소스의 건더기가 줄어들고 향미유가 추가되었는데, 이 향미유가 꽤 많은 편이라 다 넣으면 좀 느끼한 데다가 넣지 않아도 맛의 차이가 별로 없어서 취향에 맞게 적당히 넣어 먹는 것이 좋다.

2023년 GS25의 이벤트 오류로 공화춘 대란이 일어났다.

2023년에 불짜장맛이 나왔다. 이름처럼 매운맛은 아니고 단맛이 줄어들어 맛의 밸런스가 좋은 버전이다.

GS25에서 점보라면으로 공간춘이 나왔다. 팔도 도시락 항목 참조.
[1] 뒤에서 설명할 신승반점은 막내딸 우란영 씨의 딸 왕애주씨가 운영하고 있다. 즉, 우희광의 외손녀이다. [2] 우희광이 산둥성 출신이다. 설립 당시 우희광의 나이는 만 22세였다. [3] 중국인들은 작은 회사나 가게를 설립할 때 여러 명의 투자를 받아 설립하는 경우가 많은데, 공화춘의 경우도 설립자는 우희광이었지만 10여 명의 출자로 설립되었고, 이것이 우희광의 개인소유가 된 것은 6.25 전쟁 이후이다. [4] 이 때문에 1904년 '공화춘'이 '최초'로 '짜장면'을 팔았다는 인천광역시의 홍보에 시간적으로도, 사실관계로도 오류가 생겼다. [5] 본 문서 사진의 '共和春(공화춘)' 현판 좌우에 쓰인 '色瓣會席(색판회석, 여성 접대부가 서비스하는 모임 장소)', '특등요리(特等料理)'를 보면 알 수 있듯, 당시로서는 고급 요정(料亭)에 가까운 곳이었다. # [6] 1956년부터 1970년까지 인천화교협회 회장이었다. [7] 이홍장과 한자가 같다. [8] 이전에도 1950년 창고봉쇄령과 화폐개혁, 그리고 1962년의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 등으로 인해 화농(華農)이 몰락하고 화상(華商)들도 헐값에 땅을 팔고 있는 상황이었다. [9] 여기에 대불호텔 건물을 인수해서 요릿집으로 운영하고 있던 중화루도 문을 닫게 된다. [10] 현재는 인천 중구청으로 사용중이다. [11] 1985년 12월에 구월동으로 이전하였다. [12] 현 차이나타운 일대 [13] 于心辰 (1940~2003) [14] 우란영(1946년 생) 씨의 남편 [15] 자리는 이전했지만 2022년 현재도 신포동에서 영업중이다. [16] 이후 17대 (1996~2000)회장도 역임한다. [17] 중화루도 공화춘 못지 않게 오래된 노포였는데, 1918년에 대불호텔 건물(현 대불호텔 전시관)을 인수하여 그 자리에 가게를 열었을 정도로 큰 가게였다. 당시 중화루도 공화춘처럼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40여 명의 화교들이 주주로 참여하여 설립되었던 중화루는 소유권 분쟁으로 1958년부터 법정 소송 12년간 법정소송에 시달리게 된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박정희 정부의 혼분식 장려운동과 화교 탄압이 있었다. 혼분식 장려운동으로 인해 중국집에서 밥을 파는 것이 금지되어 타격을 입은 중국집은 외국인토입매입금지와 화교 부동산 압수 등으로 인해 한국에 살던 화교들이 대만이나 일본, 미국 등지로 떠나기 시작하자 중국음식점들도 속속 문을 닫거나 한국인에게 싼 값에 처분할 수 밖에 없었다. [18] 20대(2016~2022년) 인천화교협회 회장 역임 [19] 인천역에서 차이나타운 입구를 들어서면 가장 꼭대기에 있는 큰 건물이다. 거리로는 첫번째 골목 안에 있는 신승반점이 더 가깝지만 골목 안 두번째 건물이기 때문에 초행길에서는 인식하기 어렵다. [20] 공화춘 2대 사장 우홍장의 3남 우심강(于心强)의 장남 [21] 실제로도 방문 평점에서 짜장면의 원조집으로 잘못 알고 방문했다가 실망했다는 방문기가 현재도 줄을 잇는다. [22] 부대에 따라 불공춘, 공불이라고도 한다 [23] 한국 음식의 나트륨 함량이 유달리 높은 이유도 바로 국물 음식이 많기 때문인데, 이걸로 끝이 아니라 맵고 뜨겁게 먹다 보니 체감 간이 낮아져 나트륨 함량을 더 높이다 보니 도무지 나트륨을 낮추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