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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관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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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colbgcolor=#bf1400> 창덕궁 관물헌
昌德宮 觀物軒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와룡동 2-71번지)
건축시기 1783년 이전 (창건 추정)
파일:창덕궁_집희(관물헌).jpg
<colbgcolor=#bf1400> 관물헌[1]
1. 개요2. 이름과 현판3. 역사4. 구조

[clearfix]

1. 개요

창덕궁 성정각 동북쪽에 있는 건물이다.

2. 이름과 현판

'관물' 뜻은 '만물(物)을 보고(觀) 그 이치를 깊이 연구한다'로, 중국 북송의 사상가 소옹(邵雍)의 〈관물편〉에서 인용했다. 《 동궐도》에는 '유여청헌(有餘淸軒)'이란 이름으로 나와 있으며 이는 '넉넉하고 맑은 마루'란 뜻이다. #

그런데 정작 현판 글씨는 '관물헌(觀物軒)'도, '유여청헌(有餘淸軒)'도 아닌 '집희(緝熙)'이다. 1864년(고종 1년) 1월에 13살[2]이었던 고종이 직접 쓴 것이다. '계속하여(緝) 밝게 빛난다(熙)'는 의미로,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소년 이 앞으로 국가를 잘 이끌어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듯 하다. 어릴 때 쓴 글씨라서 그런지 현판 글씨 치고는 서툴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성인들도 저 정도 못 쓰는 사람 많다. 참고로 경희궁 동궁 중 아예 정식 이름이 집희당 건물이 있다.
파일:집희.jpg
<colbgcolor=#bf1400> 고종이 직접 쓴 '집희(緝熙)' 현판[3]

3. 역사

파일:동궐도 관물헌.png
<colbgcolor=#bf1400> 《동궐도》에서 묘사한 관물헌 일대
건립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정조 때에는 존재했던 듯 하다. # 정조는 이곳에서 신하들을 자주 만나고 문신들을 시험보게 했다.
이후 효명세자 경전 역사 공부하는 곳으로 활용했고 #, 헌종은 몸이 불편할 때 여기서 진료를 받기도 했다. # 고종도 즉위 초 많이 사용했으며, 섭정이던 흥선대원군에 들어올 때 주로 이용했다. 1874년(고종 11년) 3월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여기서 태어났다.

1884년(고종 21년) 갑신정변 때는 급진개화파가 본거지로 사용했으며 고종 명성황후를 데려다 잠시 머물게 하기도 했다. 개화파가 이 곳을 고른 이유는, 창덕궁 내에서도 꽤 높은 곳에 있고, 또한 좁아서 청나라 군대가 와도 방어하기 쉬울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결과는...

덕혜옹주가 1919년 고종의 승하 이후 1925년 일본 유학 전까지 어머니와 함께 이곳에서 살았다.

4. 구조


파일:관물헌 내부.png }}} ||
<colbgcolor=#bf1400> 관물헌 동쪽 방 내부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동, 서에 이 각각 2칸 씩 있고 가운데에 대청이 2칸이며, 툇간이 남, 북면 가장자리에 있는 구조이다.

파일:관물헌 다락.png }}} ||<width=215>
파일:관물헌 동칸 뒤편1.png
||
<colbgcolor=#bf1400> 관물헌 다락 <colbgcolor=#bf1400> 관물헌 동쪽 퇴간 뒤면
동쪽 칸 끝에 반 칸을 뒤로 물려 퇴간을 달았고, 서쪽 칸 끝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반 칸을 물려 다락을 달았다. 단 동쪽 퇴간는 다르게 전면을 나무 판으로 막았다. 동쪽 퇴간 뒤면은 창과 머름 아래에 벽이 있는 형태이다.
  •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로, 공포는 초익공계의 몰익공 양식이며 기둥은 네모나게 깎아 세웠다. 단청은 모로단청[A]으로 하여 절제된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용마루와 추녀마루, 내림마루는 기와를 쌓은 뒤 그 위에 취두만 올리고 용두 잡상은 놓지 않았다.

파일:관물헌 굴뚝.png }}} ||
<colbgcolor=#bf1400> 관물헌 굴뚝
건물 뒤편에 붉은 벽돌로 쌓은 서양식 굴뚝이 있다.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 만 11세. [3] 사진 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청 《궁궐의 현판과 주련 - 창덕궁》: 〈성정각 권역〉. [A] 부재(部材)의 두 끝 부분에만 칠한 단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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