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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루 전쟁

영국-줄루 전쟁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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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 ~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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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0 ~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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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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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280px-Flag_of_Afghanistan_(1931–1973).png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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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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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줄루 전쟁
줄루 전쟁 | Anglo-Zulu War
기간
1879년 1월 11일 ~ 7월 4일
장소
남아프리카 일대
원인
대영제국 줄루 왕국의 국경 분쟁
교전국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파일:Conjectural_flag_of_Zululand_(1884-1897)_by_Roberto_Breschi_taken_from_The_South_African_Flag_Book_by_A.P.Burgers.png 줄루 왕국
지휘관
파일:영국 국기.svg 벤자민 디즈레일리
파일:영국 국기.svg 헨리 바틀 프레어
파일:영국 국기.svg 프레드릭 테시어
파일:영국 국기.svg 거넷 우즐리
파일:Conjectural_flag_of_Zululand_(1884-1897)_by_Roberto_Breschi_taken_from_The_South_African_Flag_Book_by_A.P.Burgers.png 케치와요 캄판데
파일:Conjectural_flag_of_Zululand_(1884-1897)_by_Roberto_Breschi_taken_from_The_South_African_Flag_Book_by_A.P.Burgers.png 은칭와요 코자
파일:Conjectural_flag_of_Zululand_(1884-1897)_by_Roberto_Breschi_taken_from_The_South_African_Flag_Book_by_A.P.Burgers.png 다불라만지 캄판데
병력
파일:영국 국기.svg 14,500~25,000명 이상 파일:Conjectural_flag_of_Zululand_(1884-1897)_by_Roberto_Breschi_taken_from_The_South_African_Flag_Book_by_A.P.Burgers.png 26,000~50,000명 이상
결과
대영제국의 승리
영향
줄루 왕국의 멸망
피해
• 최소 800~1,000명 사망 최소 7,900~10,000명 사망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이산들와나-로크스드리프트3.2. 영국군의 증원과 전쟁의 종결
4. 전후처리5. 여담6. 대중매체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1879년 1월 11일부터 7월 4일까지 벌어진 대영제국 줄루 왕국의 전쟁. 이 전쟁으로 줄루 왕국은 멸망했고 영국령 남아프리카 식민지에 흡수 병합되어 남아프리카 연방의 토대가 되었다.

영국군이 이산들와나 전투(Battle of Isandlwana)에서 패배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고 동시에 대대적인 증원과 준비를 갖추고 온 유럽 열강을 현지 세력이 이길 수 없음을 보여준 전쟁이기도 하다. 남아프리카를 비롯한 식민지 지역의 전쟁에 투입된 영국군의 규모 자체가 많으면 수만 명으로 절대 적은 수가 아니기도 했다.

2. 배경

1867년 캐나다 자치령이 성립되자 영국의 제국주의자 및 식민지 군인 및 관료들은 캐나다를 롤 모델로 삼아, 남아프리카 일대에도 거대한 하나의 연방으로 합쳐 통치를 용이하게 하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남아프리카 전체를 영국 식민지로 삼고자 했다.

이에 문제되는 세력은 크게 둘이었으니, 하나는 보어인이고 하나는 줄루인이었다. 네덜란드계 이주민의 후손인 보어인들은 이미 영국의 해안지방 장악을 피해 내륙으로 이동, 트란스발 공화국을 건국한 상황이었다.(1852년) 그러나 트란스발 공화국은 건국 이래 계속 줄루인들과 국경분쟁과 충돌을 겪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 와중에 군사력을 동원한 영국 식민지의 위협에 트란스발 공화국은 남아프리카 식민지에 합병되고 만다.

이로써 줄루와 보어의 국경분쟁은 졸지에 남아프리카의 현지 국가 줄루와, 대영제국과의 국경분쟁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그리고 영국은 계속 명분을 쌓아갔다. 줄루의 잦은 국경침범을 명분삼으며 계속 배상을 요구했고[1] 이런 분쟁이 늘어가던 도중 줄루족에 의한 영국 민간인 납치사건이 벌어졌다. 이것이 1878년 하반기의 일이었다.

영국측은 민간인의 즉각 석방과 납치범의 영국측 인도, 배상금 지불(소 600마리), 선교의 자유, 그리고 줄루군의 해산을 요구하는 통첩을 전달했다. 줄루 왕국 국왕 세테와요는 이의 답신을 하지 않으며 사실상 거부의사를 밝혔고, 이 사실을 보고받은 런던에서는 1879년 1월 11일, 개전을 승인한다.

3. 전개

3.1. 이산들와나-로크스드리프트

이 야심찬 전쟁은 개전 하자마자 영국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는 참사로 이어지고 만다.

영국군은 줄루족 영토 속으로 쾌속 진군하여 그대로 줄루족 지휘부를 깨트리려 하였는데, 이것은 부족 왕국 특성상 하위 족장들을 규합하고 있는 상층부가 붕괴할 경우 그대로 공중분해되는 특성을 이용하는 고전적 전략이었으며 이것 자체는 문제될 게 없었다. 하지만 줄루의 군세를 우습게 보던 지휘관들이 전쟁의 철칙을 전부 유기하는 추태를 부린 결과, 개전 후 첫 전투에서 부대가 깔끔하게 증발하는 참패를 겪게 된다.

줄루 전사들은 이미 영국군이 자신들의 왕을 노리고 달려올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며, 성급하게 배치된 영국군이 제대로 전투 준비를 마치지 못할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줄루 전사들은 영국군을 꺾으러면 허술하게 배치된 영국군을 다각적으로 우회 포위하여 각개 격파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줄루 전사들은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영국군의 소총 일제 사격을 버텨가며 힘싸움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각오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일제사격에 많은 이들이 죽어나가도 버텨가며 진격해낼 수준의 높은 사기와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다.

줄루 왕국의 대비는 이 이상 대비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준이었던 반면, 영국군의 대비 상태는 매우 부실하였다. 당장 최고 지휘관부터가 현지 지형에 대해 무지한 것은 물론 지형을 알아볼 생각 자체도 없었고, 허허벌판에서 장병들을 보호할 야전 축성물을 쌓을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되려 인종차별적인 안일함에 젖어 줄루군이 영국군의 화력에 당해낼리 없으니 안심이라는 태도로 전투에 임하였으며, 오죽하면 최전선에서 한참 뒤쪽에서 티타임이나 즐기고 있던 판이었다. 물론 고위 지휘관이 전쟁 중에 티타임을 즐기는 것 자체는 아주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적 한복판으로 진격한 상황에서마저 티타임을 즐길 지휘관은 없어야 정상이다. 부대 배치 상태 또한 줄루 전사들이 너무 가까이 근접해도 병력을 뒤로 재배치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보급 관리도 탄약을 제때 보급할 수 없었으며, 애초에 그 많은 줄루족을 상대할 총탄 자체가 없었다. 게다가 영국군은 너무 적은 수의 대포를 동원했기에 그 많은 줄루 전사들을 다 상대할 수 있는 화력을 뽑아낼 수 없었다.

게다가 줄루 인들이 아프리카 정복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많은 학살이 있다 보니 줄루 인들에게 이를 갈던 코피 인들을 비롯한 많은 흑인 민족들이 알아서 영국군에게 협조했음에도 영국은 같은 흑인이라며 이들을 믿지 않았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줄루 왕국에 지배당해 이를 갈던 만큼, 충분히 원한이 커서 영국군들에게 솔선수범으로 협조하고 정보를 제공함에도 영국군은 이들을 전혀 믿지 않았다. 이들이 총기를 빌려달라고 할 때도 전혀 믿지 않았으며 심지어 대기하라고 이들을 싸우지 못하게 만들었다. 본래 영국이 부족간 악감정을 부추겨 갈라치기로 내분을 내는 분할통치의 달인이지만, 유달리 이 때만큼은 같은 흑인이라고 총이나 무기를 주면 배신 때릴까봐 두려워했다.

EBS에서 2000년 초반에 다큐멘터리로 이 전투를 재현한 영상이 방영된 바 있었는데, 여기서도 흑인들 다른 민족들이 총을 달라고 해도 영국군이 거절하고 전투 배치도 안하여 이들이 구경만 하고 학살당하는 영국군을 멀리서 한심하게 바라보는 게 재현되기도 했다. 나레이션으로도 영국군은 이들 다른 민족을 믿지않아서 더 패배에 기여하고 말았다고 나올 정도. 결국, 나중에서야 이들에게 총기도 내주고 싸우게하니 무섭게 잘만 싸워서 영국군 상층부는 진작에 이들을 믿고 싸우게 해야했다고 후회했을 정도였다.

줄루 전사들은 베테랑들이 황소의 머리를 맡아서 적의 공세를 방어하고 체력이 좋은 신병, 젊은 병사들이 측후면에서 공격하는 전통 전술인 "황소의 뿔"을 정석적으로 사용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영국군의 사격을 버티면서 진격, 끝내 허술하게 배치된 각 영국군 부대들을 포위하여 각개격파함으로써 영국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다. 그 대가로 영국군의 배에 달하는 수천 명의 전사자를 내야 했지만, 원주민 세력이 유럽 군대를 상대로 고도의 일제 사격을 견뎌내고 기어코 근접 돌격을 성사시킨 것에서 엄청난 성과라 할 수 있다.

첫 전투에서 부대 전체 인원 1,800명 중 1,300명이 사망하는 패배를 겪으면서 영국의 전쟁계획은 시작부터 깨졌고 전군의 사기도 추락했다. 패전 및 피해규모 사실을 보고받은 현지 총독부와 본국 정부는 해 지지 않는 제국이라고 자부하던 대영제국이 인종주의가 만연하던 당시의 시각으로는 '미개인들의 나라'에 불과했던 줄루 제국에게, 그것도 창과 활을 든 병사들에게[2] 총과 대포로 무장한 영국군이 대참패를 당했다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그대로 공황 상태에 빠져 전쟁 수행 의지가 박살나버렸다.

그런데, 이산들와나 전투에 미처 참여하지 못해 공을 세우지 못한 줄루군의 또다른 병력 수천여 명이 영국군 보급기지 겸 야전병원인 로크스드리프트(Rorke's Drift)를 습격했다가[3] 크게 패퇴하며 상황이 반전되게 된다.

1월 22일부터 23일까지 벌어진 로크스드리프트 전투에서, 부상병 30여 명이 포함된 영국군 1개 중대 130여 명이 수천여 줄루군을 상대로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수행, 줄루군에 300~1천에 달하는 피해를 입히고 승리하였다.[4][5] 영국군에서 처음부터 정상적인 지휘관이 지휘했더라면 이산들와나의 결과는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줌과 동시에 전쟁을 포기하려던 영국 정부의 분위기를 반전시켜 버렸다.

두 전투는 각각 의의가 있었다. 이산들와나 전투가 영국군의 초기 공세를 완벽히 돈좌시키고 전쟁 주도권을 줄루 쪽으로 넘겼다면, 로크스드리프트 전투는 공황 상태에 빠진 영국의 분위기를 반전시키기에 충분했다는 것이다. 로크스드리프트 참전자들에게 13개의 빅토리아 훈장을 포함하여 다수의 훈장이 수여되었고, 언론에서는 이들을 영웅으로 대접했다. 여론은 이산들와나의 복수를 외치며 들끓었으며, 여론의 압력을 받은 정부와 의회는 일각에서 제기된 전쟁포기론을 기각하고 대대적인 증원을 결의한다.

또한 두 전투 모두 전개 과정이 극과 극인데 이산들와나 전투에서는 분산된 영국군 병력들이 숫적 우세를 점한 줄루군에게 대항하다 탄약이 부족한 사태에 처했는데, 탄약을 보급받기 위해 전령을 보내 요청했지만 보급부대는 전장 상황은 상관없이 무조건 온 순서대로 탄약을 보급하려고 했고 그 결과 탄약이 고갈된 일선 병력들이 차례로 격파당했다. 여기에 더해 개틀링 기관총은 커녕 야포 같은 기본적인 중화기조차 제때 지원되지 않고 수량 자체도 너무 적었는데, 심지어 가지고 있는 소총도 총알이 없어 총검 달고 창 노릇이나 해야하는 상황이니 이러면 줄루군과 비교해 나을 게 없다. 도리어 창술을 전문적으로 수련한 줄루 전사들이 훨씬 유리한 상황이 된 것이다.

그에 비해 로크스드리프트 전투는 소수라도 병력이 한군데 모여 있었고 각종 물품을 이용해 엄폐물을 구축하고 보유한 탄약을 대량으로 불출해 압도적인 열세인 병력 차이를 화력으로 메꿨다. 줄루족도 전쟁 이전부터 도입한 총기가 있고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노획한 무기가 많았지만 사냥이나 개인간 싸움에서나 써봤지 대규모 병력이 운용하는 용도로 활용한 경험이 없어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즉, 제대로 준비한 유럽군의 화력이 (기관총 없이도) 냉병기 군대를 상대로 얼마나 위력적인지 보여준 사례.

3.2. 영국군의 증원과 전쟁의 종결

이산들와나 이후 줄루군은 승기를 탔으나 공세를 할 역량은 사라져버렸다. 이산들와나-로크스드리프트에서 입은 피해는 약 5천 내외. 승리하긴 했으나 냉병기 위주의 군대로 근대식 영국군 1개 연대를 격멸시키기 위해 어마어마한 수의 전사들을 대가로 바처야만 했던 것이다.

이때 정예 병력이 너무 많이 죽었기 때문에 이후 전투에서는 줄루군의 전투력이 급감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영국군이 증원되기 시작하자 전황이 바로 뒤집히고 만다.

영국군은 병력을 집결시키면서 시간을 벌기 위해 전초기지를 착실히 설치하여 줄루군의 진격을 방해했는데, 줄루군은 3-4월에 걸쳐 전초기지들 공략하려 했으나 이산들와나와 로크스드리프트의 전훈에 크게 증강된 영국군의 방어를 돌파할 수 없어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3월 초까지는 영국군의 축성이 미처 준비되지 않아 어느정도 성과가 있었으나,[6] 3월 중순에 이르러서는 야전 축성이 어느 정도 끝나 더 이상 돌파가 불가능했고, 3월 하순에 이르면 영국군의 장비와 병력이 증원됨에 따라 로크스드리프트의 재림이 되어 줄루군은 다시 네 자리수의 인명피해를 내고 퇴각해야만 했다.

하지만 영국군의 전투 준비 상태는 여전히 매우 불량했기 때문에 부대를 재편성해야만 했고, 따라서 줄루군의 진격이 지체된 사이를 틈타 일제히 국경지대로 퇴각하였다. 이들은 6월 본국 증원부대 7개 연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린 후, 증원부대와 합류하여 전면공세에 돌입했다.

줄루군은 냉병기 군대의 이점을 살리기 위해 기습과 매복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나 정신 차리고 침착하게 줄루군을 상대하기 시작한 영국군을 흔들기엔 중과부적이었다. 끝내 수도 울룬디에서 숫적 우위를 바탕으로 결전을 시도했으나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가고만다.

줄루군은 여전히 영국군에 최소 2배에서 3배의 숫적 우세를 지니고 있었으나, 정예병들을 대부분 전쟁 초기에 잃어 전투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영국군이 뒤늦게 제대로 동원한 개틀링 기관포와 야포, 로켓포들의 화력은 구식군대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7]

그럼에도 줄루군은 포병과 보병의 사격을 뚫고 영구군에 꽤 접근하는데 성공했으나, 영국군의 야포들이 퍼붓는 포도탄과 개틀링의 기관포 화력을 도저히 직접 받아낼 수 없어 전열이 붕괴되었고, 결국 후열이 영국 창기병대의 돌격을 받아내지 못해 대패하고 만다.[8]

4. 전후처리

패전이 확실해지자 줄루족 내 소부족장들이 항복을 청해왔고, 줄루 국왕 세테와요도 저항의지를 잃고 포로로 잡혔다. 영국 원정군은 세테와요의 폐위를 선언하고 본국의 지침에 따라 줄루 왕국을 총 13개 소부족왕국으로 나누어 간접 통치를 실시했다.

그러나 영국이 전쟁 초기 노렸던 남아프리카 연방의 확대는 이뤄지지 못했다. 1년 뒤 제1차 보어 전쟁에서 영국은 이산들와나 저리가라 할 대참패를 겪고 연방 확대를 포기해야 했으며 줄루전쟁 직전 강제병합했던 트란스발 공화국을 불과 2년만에 독립시켜야 했다.

5. 여담

  • 당시 영국에 망명해 있던 나폴레옹 3세의 유일한 아들이자 황태자였던 나폴레옹 외젠 루이 장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이 전쟁에서 전사했다. 루이는 일가의 망명을 받아준 영국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영국군에 자원 입대하였고 이산들와나 전투 후 파병된 증원군의 일원이 되었으나 울룬디 전투 이전의 진격 과정에서 정찰 작전을 수행 중 줄루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했다. 문제는 그를 평범한 영국군 장교로 알았던 줄루족들이 시신을 창으로 여럿 찔러 훼손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적의가 있어서 그랬다기보다는 이승에 미련을 갖지 말고 저승으로 편하게 가라는, 줄루족 나름대로의 고인에 대한 예우였는데, 그런 문화 자체가 없는 전 유럽의 분노를 사버렸고 이걸 영국이 명분으로 써먹는다(...).
  • 폐위된 줄루 국왕 세테와요는 케이프타운을 거쳐 런던까지 끌려간다. 의외로 그는 한 나라의 군주로서 나름 좋은 대접을 받아[9] 빅토리아 여왕을 대면하기도 했으며, 자신이 남아프리카로 돌아가 분열된 정치상황을 바로 잡아 통일된 줄루 왕국을 다시 이룩해야 한다는 본인의 주장은 몇몇 영국 젠트리의 지지와 호응을 받기도 했다. 이후 줄루 영내가 소란스러워지고 소부족들간 충돌이 심해지자 이를 해결할 목적으로 복위되어 줄루에 돌아온다. 그러나 복위 후에도 내전에서 패해 영국령 남아프리카로 피해야 했고, 결국 암살자의 피습을 받아 생긴 자상으로 몸져누워 사망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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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어쳐 게임으로 오래전부터 나폴레옹 전쟁과 더불어 자주 다뤄졌다. 비슷한 급의 아미끼리의 전투가 아닌 다수의 호드 아미 VS 소수의 정예 아미 구도는 이때 정립된 것.

6. 대중매체

  • 1964년에 마이클 케인이 주연을 맡은 영화 '줄루'가 줄루 전쟁 중에 벌어진 로크스 드리프트 전투를 다루었는데, 아직까지 줄루 전쟁을 묘사한 대중 매체 작품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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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즘도 그렇지만 부족 단위가 중심인 아프리카다. 설령 국가가 있더라도 부족국가 개념이어서 명확한 국경이 확실하지 않았던 게 당시 상황이다. [2] 사실 일반적인 이미지와 달리 줄루군에도 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은 있었다. 줄루 측 또한 총기의 유용성을 잘 인지하고 있으며 약탈로 획득하거나 기타 전쟁에서 유입된 총기를 활용하던 줄루군 병사들은 분명 존재했다. 다만 충분한 수의 총기가 없다보니 줄루 전사들의 총기 활용은 경보병 부대를 조직해 저격병으로 쓰는 수준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3] 당시 줄루 사회는 전사들의 영향력이 강했기에 이렇게 참전했다가 공도 못 세우고 철수하게 되면 불만이 커졌다. [4] 영국군은 17명이 사망했으나 줄루족은 351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게다가 영국군 병력 중에는 환자나 부상병이 30명이나 있었다. [5] 총기 시대에서 야전 축성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수 많은 사례중 하나다. 근접병기들은 상대가 내 무기의 사정권 안에만 존재한다면 지속적으로 적들을 공격할 수 있다. 그에 반해 원거리 병기(특히 총기)들은 분명 그 화력은 강력하지만 전투 중 장전 등 불연속성이 존재하며 그것을 막아주는 것이 야전 축성물이다. 축성물의 존재로 인해 원거리 병기들의 끊어짐을 보강해주고, 동시에 축성물로 인해 근접병기들과의 거리를 충분히 유지할 수 있게 됨으로서 원거리 병기들의 화력을 온전히 끌어낼 수 있게 되는것이다. 물론 야전축성물은 내가 진격할 경로를 막는 장애물이 되기도 하므로 막무가내로 놓는다고 장떙이 아니다. 하지만 이산들와나 전투에서는 축성물로 농성하면 승산이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러지 않았고, 그 대가를 목숨으로 치르게 되었다. [6] 3월 12일에는 하워드 소위 휘하의 보급부대 하나가 보초를 게을리했다가 야습당해 104명 중 60명이 죽고 탄약 9만 발을 포함한 물자들을 잃기도 했다. [7] 이때 지휘관인 켈름스포드는 과거 이산들와나에서 바리케이드를 안 설치해서 호되게 당했다는 비난을 무마하려는 듯, 줄루와의 최후의 설욕전에서 별도의 장애물을 설치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 물론, 야전 축성물은 되려 내가 진격할 길을 막을 수도 있으니 무리한 시도는 결코 아니었으며, 혹시 모를 우회기동을 막기 위해 포병 배치를 신중히 결정하고 보병 방진도 미리 구성했다. [8] 전쟁 초기에 영국군이 포병 장비를 거의 동원하지 않은 것이 참패의 원인이 되었지만 이게 역설적으로 줄루군이 노획할 장비가 전무한 상황을 만들었다. 줄루 군이 구식 야포라도 좀 넉넉히 노획하거나 어디서 밀수라도 할 수 있었다면 역으로 축성물 쌓고 틀어박혀 전쟁을 끌며 평화협상을 시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구식 군대들 중 이것에 성공한 군대는 거의 없고, 그게 가능했다 하더라도 이런 현대적인 군사 운용법을 숙지하여 활용할 경험과 지식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9]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문서에도 나와 있듯이 아무리 제국주의 시대였다지만 그래도 계급>인종이라는 인식이 더 강했다. 애시당초 계급주의는 인종주의보다 수백 년은 먼저 자리 잡은 사상이다. 거기에 이때부터는 제국주의의 모순을 비판하며 인종차별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을 지닌 지식인도 서서히 늘어나던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