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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프랑스공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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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프랑스공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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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프랑스 국장(1905~1953).svg
국기[1] 문장
위치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22
상급기관 프랑스 제3공화국 외무부
설치 1889년
폐쇄 1905년
파일:프랑스공사관.png
<colbgcolor=#002395> 프랑스공사관[2]

1. 개요2. 역사3. 역대 공사 / 총영사 (1887 ~ 1906)4. 건물5. 여담
5.1. 고종의 불관파천(佛館播遷) 시도
6.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창덕여자중학교 자리에 있었던 프랑스 제3공화국의 옛 공사관이다.

2. 역사

1886년( 고종 23년) 6월에 조불수호통상조약[3]을 체결하면서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은 프랑스 정부는 1888년(고종 25년) 6월 한성 외교공관을 개설했다.
파일:건립 중인 프랑스공사관.png
파일:프랑스공사관 모형.png
<colbgcolor=#002395> 건립 공사 중인 프랑스공사관[4] <colbgcolor=#002395> 프랑스공사관 모형[5]
처음에는 공관 수표교 근처, 지금의 종로구 관수동 126번지에 두었으나 1889년(고종 26년) 10월에 서양인들이 밀집한 정동으로 옮겼다. 관수동에 있을 때나 정동으로 처음 옮겼을 때는 공관 건물이 한옥이었다. 서양식으로 건물을 지은 것은 1896년( 건양 원년)이었다. 새 건물은 한양도성 성벽 바로 안쪽에 있었으며, 높은 곳에 위치해 러시아공사관과 더불어 한성에서 눈에 띄는 외교공관 중 하나였다. 설계자가 누군지는 자세히 모르나, 당시 조선 정부의 궁중 건축 일을 맡았던 프랑스 건축가 조제프 오귀스트 살라벨(Joseph Auguste Salebelle)로 추측하는 의견이 있다.[6]
파일:프랑스공사관과 한양도성.png
<colbgcolor=#002395> 프랑스공사관과 한양도성
대한제국 수립 후 1905년( 광무 9년) 11월에 일제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여 한국과 프랑스 국교는 끊겼다. 프랑스공사관은 국가 대 국가로 주요 외교업무를 상대하는 공사관이 아닌, 정치성이 없는 업무를 담당하는 영사관이 되었다.

1910년( 융희 4년) 8월에 경술국치 대한제국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겼고, 그해 10월에 프랑스영사관은 청사를 지금의 서대문구 서소문로 43-12[7]에 있는 민영환 옛 집터로 옮겼다. 참고로 프랑스영사관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주한프랑스대사관으로 이어져 지금까지 그 자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매입한 옛 공사관 영역을 매입했고, 1914년 서대문소학교가 들어서면서 건물은 운동장 한복판에 놓이게 되었다. 다만, 건물 자체는 서대문소학교가 아니라 조선교육회, 구매조합, 수양단 조선지부, 동민회 등 여러 일제 관변 단체에서 사용했다. 그러다 노후화 및 학교 확장 등의 이유로 1935년에 헐렸다. #

서대문소학교는 8.15 광복 이후 서울서대문국민학교로 바뀌었다가 1973년에 문을 닫았고 그해 2월에 종로구 재동에 있던 창덕여자중학교가 이곳으로 이전해와 현재까지 있다. #

3. 역대 공사 / 총영사 (1887 ~ 1906)

이름 임기 시작일 임기 종료일 지위 비고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
(Victor Collin De Plancy)
1887년 11월 9일 1890년 7월 12일 공사 초대 주한 프랑스 공사
이폴리트 프랑댕
(Hippolyte Frandin)
1890년 7월 12일 1895년 12월 23일 공사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
(Victor Collin De Plancy)
1895년 12월 23일 1906년 1월 공사 겸 총영사 마지막 주한 프랑스 공사

4. 건물

5. 여담

  • 2010년 10월에 창덕여자중학교에서 학교 신축하려 교내 운동장을 조사하던 중에 옛 프랑스공사관의 자하실 유구와 한양도성 성벽의 기단부를 발견했다. 발굴 조사를 진행한 고려문화재연구원 측은 이밖에도 포도주병, 양식 그릇 조각, 타일 조각 등 유물들도 나왔다고 밝혔다. #

5.1. 고종의 불관파천(佛館播遷) 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러일전쟁 발발 직전인 1904년( 광무 8년) 1월에 고종은 프랑스공사관으로 파천할 계획을 세웠었다. 1934년 1월 19일 자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고종은 러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대한제국이 휘말릴 것을 우려해 독일 조계지였던 칭다오 러시아 영토인 블라디보스토크[8]에 저택을 장만하려는 등 파천 준비를 꾀했지만 외국으로 나가기가 곤란해 최종적으로 (고종이 머물렀던 경운궁과 가까이 있는) 프랑스공사관으로 가기로 결정했고, 시종 조남익[9]을 통해 은밀하게 프랑스 공사 플랑시[10]와 교섭했으나 사전에 발각당해 실패했다고 한다.

6. 같이보기


[1] 파일:프랑스 국기.svg 현재 프랑스 국기보다 조금 더 색이 어둡다. [2] 사진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3] '불(佛)'은 프랑스 한자로 쓴 '불란서(佛蘭西)'의 앞글자이다. 즉 조선과 프랑스가 맺은 조약이란 뜻이다. 수교 과정과 이 이전 역사에 대해서는 한국-프랑스 관계 문서 참조. [4] 사진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5] 사진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6] 사진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7] 지번주소: 합동 30번지. [8] 기사 원문에는 한역(漢譯)한 이름 해삼위(海蔘威)로 적혀있다. [9] 조남승의 동생. 흥선대원군의 외손자이자 고종의 외조카이다. [10] 기사 원문에는 한역(漢譯)한 이름 갈림덕(葛林德)으로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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