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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축구 선수 조재진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2. 클럽 경력
2.1. 수원 삼성 블루윙즈
고향 파주의 축구 명문 신산초등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한 조재진은 6학년 1학기에 서울로 전학가 1990년대 축구 명문인 숭신초-대신중-대신고를 차례로 거쳤다. 특히 1년 후배 조성환과 함께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중학교 3학년 시절 양쪽 어깨 골절로 인해 운동을 잠시 쉬었는데, 이 시기에 약 15cm가 자라기 시작해 2년 간 30cm가 자라자 최기봉 감독, 임근재 코치에 의해 고등학교 2학년부터 스트라이커로 포지션을 변경하게 된다.그렇게 단숨에 고교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거듭난 조재진은 대신고 졸업 후 2000년 K리그 드래프트에서 대신고와 연고 협약을 맺던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 지명을 받고 성인이 됨과 동시에 프로 선수가 된다.
당시 수원의 김호 감독이 팀의 10년 대계를 바라보고 육성한 이른바 김호의 아이들 중 한 명이었으나, 당시 리그 최고의 스트라이커진이 가득한 수원에선 2년 간 1군 8경기 출전에 그치는 등 거의 기회를 받지 못했다.
결국 김호 감독과 상의한 끝에 2002시즌을 앞두고 입대한 뒤 폭풍 성장을 거듭했다. 특히 2003시즌에는 팀이 광주 상무 불사조로 변모하며 프로 무대에 31경기에 나서고, U-23 대표팀 주전 스트라이커가 되는 등 입대 2년 만에 체급이 확 올라갔다.[1]
전역 후 2004시즌을 앞두고 수원으로 복귀했으나 차범근 신임 감독은 마르셀, 나드손 투톱 체제에 조재진을 윙어로 기용하기도 했으며, 신인 김동현의 존재까지 겹치자 조재진은 간접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게다가 당시 최대 라이벌 FC 서울과의 경기 종료 후 상대 수비수 김동진과 웃으면서 장난치는 모습이 당시 수원 서포터즈 그랑블루의 심기를 건드리며 많은 비난을 받게 됐다.
결국 2004시즌 종료 후 FA가 되는 조재진에 대한 이적료를 받고 싶던 수원과 해외 진출을 노리는 선수의 니즈가 맞아 아테네 올림픽 개막 전에 J1리그 시미즈로 이적시킨다. 이적료는 8억원.
조재진의 수원 시절 성적은 축구 팬들에게 두고두고 웃음거리 회자되며 안티들에게 까였는데 기록은 다음과 같다.
2000년 수원 5경기 출장 득점 없음
2001년 수원 3경기 출장 득점 없음
2003년 상무 31경기 출장 3골 3도움 슈팅당 득점률 0.052
2004년 수원 8경기 출장 1골
총 4시즌(수원 3시즌, 상무 1시즌) 47경기 4골(1PK) 3도움 슈팅당 득점률 0.05
물론 수원 시절엔 후보였기에 출장 횟수가 너무 적어 제대로 된 표본이라 하긴 힘들다. 하지만 광주 상무 시절 기록만 봐도 골을 잘 넣는 선수가 아니라는 건 대번에 알 수 있다.[2] 이런 처참한 득점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상무에서 중용된 것은 다른 공격수가 갖지 못한 그만의 장점 때문이었다.
수원, 그리고 상무 시절 조재진은 그야말로 헤더과 포스트 플레이에 특화한 선수였다. 강인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지치지 않는 스태미너와 몸싸움, 공간침투로 수비진을 교란시키고 장신을 활용한 공중볼 장악과 위협적인
2.2. 시미즈 S펄스
2004 아테네 올림픽 직전 J1리그의 시미즈 S펄스로 이적했다. 직전 시즌까지 시미즈에서 활약하던 안정환에 이어 시미즈 2호 한국 선수가 됐다.K리그보다 수비의 압박이 덜한 J리그에선 특유의 활동량과 포스트 플레이 능력에다가 단점이던 골 결정력을 보완한 플레이를 선보이며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
정규리그 101경기 45골, 통산 122경기 53골을 터뜨리는 고감도 득점력을 과시했다. 특히 2006년에는 16골로 브라질 선수들이 득세하는 득점랭킹에서 공동 7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2005시즌부터 3년 내내 팀내 최다 득점자 자리에 오르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2020년 4월 일본 축구전문 매체 '풋볼채널'은 조재진을 시미즈 역대 최고 외국인 선수 5인에 선정했다.
2.2.1. 이적 사가
시미즈에 있는 동안 유럽 진출설도 상당히 많이 나왔다. 특히 2006 독일 월드컵 종료 직후 유럽 진출이 가장 유력한 선수로 꼽히며 독일의 중하위권, 벨기에, 네덜란드 클럽들로부터 관심을 받았으나 시미즈와의 계약 기간이 남아 이적료에 이견이 생기며 잔류했다. 특히 2007 AFC 아시안컵 직전에 에레디비시의 FC 위트레흐트가 조재진의 영입을 적극적으로 노렸고 2007년 6월 한국과 네덜란드 간 A매치에서 후크 보이 감독이 조재진을 보러 직접 내한할 정도로 관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역시 이적료 문제로 인해 시미즈에 잔류하고 말았다. #시미즈에서 활약을 바탕으로 2007시즌 종료 후 FA가 되자 다시 한 번 유럽 진출을 노렸다. 당시 EFL 챔피언십으로 간 김두현과 달리 FA라는 장점을 활용해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직접 진출을 노렸다.
특히 풀럼 FC와 가장 먼저 협상을 진행했으나 영입을 추진하던 로리 산체스 감독이 경질되며 미뤄졌고, 그 사이 뉴캐슬 유나이티드 FC의 샘 앨러다이스 감독이 강력히 원하며 협상이 빠르게 진행됐다. 그러나 10시간에 걸친 메디컬 테스트 과정에서 '선천적 고관절 이형성 문제'가 발생되어 계약이 취소되었다. 이 당시 이미 뉴캐슬의 홈구장인 세인트 제임스 파크도 밟아보고 자신의 이름이 적힌 유니폼도 미리 받는 등 입단이 유력했으나 무산되고 말았다.
뉴캐슬 입단이 무산된 뒤에 로이 호지슨 감독이 부임한 풀럼 FC나 해리 레드냅 감독의 포츠머스 FC에서 각각 입단테스트를 보기도 했으나 메디컬 테스트와 여러 문제가 겹쳤고 이외에도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와도 이적설이 있긴 했으나 결국 그대로 2008년 겨울 이적시장이 종료되며 EPL 입단이 최종 무산되고 만다.
유럽 진출이 좌절된 뒤 J1리그 여러 팀에서 조재진을 향한 오퍼가 있었고 조재진은 친정팀인 시미즈로 돌아오고 싶었으나 재정난으로 인해 조재진의 연봉을 감당할 수 없는 시미즈는 조재진 영입을 포기했고 그렇게 지지부진한 이적 시장을 보내고 있었다.
2.3. 전북 현대 모터스
그러던 2008년 2월 16일, 조재진이 전북 현대 모터스에 입단하며 K-리그에 복귀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 신인 시절 수원에서 코치와 선수로 인연이 있던 최강희 감독의 연락을 받고 전북 입단을 결정하게 된 것.그러나 EPL 입단을 목전에 두고 무산되자 당시 입단식에서 조재진의 씁쓸한 표정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 최강희 감독은 조재진 선수 전북현대 입단식에서 "조재진 선수는 오랫동안 제가 공을 들였고 잉글랜드로 계속 왔다갔다할 때도 속으로 잘 안 되기를 굉장히.. 본인은 좀 섭섭할 수도 있지만.." 농담을 날리기도 했다.
전북 시절의 조재진은 신인 때와는 스타일이 달랐다. 헤더 등 슈팅은 수원, 상무 시절보다 정교해졌지만, 그걸 제외한 다른 부분에선 오히려 예전보다 퇴보해서 왕성한 활동력은 많이 줄어 있었다. 압박과 몸싸움이 상대적으로 약한 J리그에 진출한 부작용으로 조재진만의 특화된 장점이 사라져 국대에서의 존재 의의는 점점 희미해졌다.
그러나 전북의 최강희 감독은 조재진에게 활동량과 활동폭 대신에 문전 앞에서의 골사냥만을 요구하며 팀의 공격 전술을 조재진에게 맞추었다. 정규리그 24경기 8골의 성적은 언뜻 보기에는 주전 스트라이커로서는 저조한 성적이지만 전북의 득점은 2008년 24경기에서 총 39득점으로 전체 득점 4위라는 우수한 기록이었으며 조재진은 그 39골을 넣은 전북의 선수 중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였다. 게다가 전북은 이 해에 2000년 이후 팀 사상 두번째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전북이 2008 시즌을 준비하면서 조재진, 강민수 등 좋은 선수를 영입했으면서도 시즌 초반 최악의 부진을 겪다가 정규리그 6위에 그친 것은 조재진을 비롯한 공격진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전반기 내내 호흡이 맞지 않았던 수비라인의 탓이 크다.
즉, 아주 못한 것은 아닌데 2008년 10월 25일 인천 유나이티드전에서 최태욱이 주워먹으라고 골대 1M 앞으로 찔러준 패스를 홈런으로 연결시키는 희대의 개발슛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저평가 받는 경향도 있다. 주요 감상 포인트는 들어간 줄 알고 골을 연호했다가 머쓱해하는 중계진과 패스를 찔러준 팀 동료 최태욱이 머리를 감싸쥐고 아쉬워 하는 장면. 넷상의 축구팬들은 이 슛을 리바이스 대반품 슛이라고 칭했다.
1년 간 준수한 기량을 보이며 팀의 6강행에 기여했고, 당시 지방 구단의 이미지가 강한 전북에게 전국구 스타였던 조재진의 입단은 전북의 체급을 확 끌어올려주는 역할을 했다. 게다가 전북을 떠나면서 J리그 감바 오사카로 이적할 때 이적료로 15억 원이라는 거금을 전북에 안겨 주었고, 전북은 이 돈을 잘 활용해 2009년 겨울 이적시장에서 이동국, 김상식, 진경선, 에닝요를 영입한다. 그리고 이 선수들은 2009년 전북의 K리그 우승을 견인하면서 전북 왕조를 열었다. 이런 이유로 전북에서 조재진은 1년 만 뛰었음에도 상당히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게다가 2011년 은퇴식까지 치뤄줄 정도였으니..
2.4. 감바 오사카
2008년 K리그 복귀를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마친 뒤 다음해 전북에 15억원이라는 거금의 이적료를 안겨주며 J1리그 감바 오사카로 이적했다.2009~2010 일본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3] 국내 복귀를 시도 중인데 에이전트에서 오퍼금액으로 최소 10억 이상이 돼야한다고 떠벌려서 구단과 축구팬을 어이상실하게 만들었다. 사실상 국내 최고 대우를 해달라는 뜻인데... 무슨 이동국처럼 한 시즌 20골을 넣어줄 골잡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몰리나처럼 경기 흐름을 뒤엎어버리는 능력을 보여주지 않는 이상 그런 거액을 선뜻 내줄 팀은 없었다. 정 안되면 미국이나 다른 곳도 알아본다고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K리그와 J리그의 수준 차이도 있다.
결국 K리그보다 수비가 널널한 일본에서 말아먹었으면 국내에서도 통할 리 만무하고 K리그에서 연봉 10억원급을 내 줄만한 구단인 FC 서울, 수원 삼성 블루윙즈같은 구단은 조재진을 필요로 할 분위기도 아니기에 쉽게 K리그 팀에 안착하기 힘들다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2.5. 현역 은퇴
2011년 3월 18일, 갑작스럽게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그동안 밝히지 않았지만 20살 때부터 선천성 고관절 이형성 문제로 뼛조각이 돌아다니면서 고통을 주는 상태였고, 선수 생활 내내 병행한 약물 치료도 한계에 부딪혀 병원에서도 더는 뛸 수 없다고 진단했다고. 은퇴 기사앞서 뉴캐슬 유나이티드 FC와 계약이 불발로 끝난 이유도 사실은 고관절 문제 때문에 메디컬 테스트에서 떨어져서였다. 당시 이적 보도를 냈던 최원창 기자[4]는 거짓보도를 냈다거나 쓸데없이 설레발로 기사를 내서 이적이 취소되었다는 이유로 네티즌들에게 엄청 까였었는데, 조재진이 은퇴를 하며 뉴캐슬 이적이 불발된 진짜 이유를 밝히고 또 고관절 부상 사실도 덮어주었는데, 그동안 뭣도 모르고 까서 미안하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또한 지속적인 하지정맥류 또한 이른 은퇴를 결심하게 된 계기 중 하나로 작용했다. 이런 부상들 때문에 점프 한 번만 해도 착지하고 나서 엄청난 통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2011년 4월 16일, K리그 6라운드 전북 vs 광주의 경기에서 전북 현대 모터스 구단은 한 시즌밖에 안뛴 조재진의 은퇴식을 치러주며 훈훈함을 남겼다. [5]
3. 국가대표 경력
3.1.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대신고 3학년시절 고교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거듭난 조재진은 조영증 체제의 U-20 대표팀에 소집돼 방가반두컵, 2000 AFC 청소년 선수권대회 등에 참가했으나 프로 무대에서 적응하지 못하자 이후 소집되지 못했다.3.2.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프로 무대인 광주 상무 불사조에서 두각을 보이자 2003년 2월 남아공 4개국 올림픽대표 친선대회를 시작으로 김호곤 감독이 이끄는 U-23 대표팀 주전 스트라이커로 거듭난다.3.2.1. 2004 아테네 올림픽
아테네 올림픽 조별리그 3차전 말리전에서 헤더로 2골[6]을 기록해 3:3 무승부[7]로 대한민국의 8강 진출을 견인하며 국대 간판 스트라이커였던 이동국의 백업 요원으로 떠올랐다.[8]3.3.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3.3.1. 코엘류호
상무 및 올림픽 대표팀에서의 모습을 바탕으로 2003년 코엘류 감독 시절 국가대표팀에 첫 발탁되어 A매치에 데뷔했다.3.3.2. 본프레레호
2004년 12월 한국이 독일을 3:1로 이긴 레전드급 경기에서 3번째 골을 넣었다. 참고로 차두리가3.3.3. 아드보카트호
3.3.3.1. 2006 FIFA 월드컵 독일
1
이운재 C · 2
김영철 · 3
김동진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김진규 · 7
박지성 · 8
김두현9 안정환 · 10 박주영 · 11 설기현 · 12 이영표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백지훈 · 16 정경호 17 이호 · 18 김상식 · 19 조재진 · 20 김용대 · 21 김영광 · 22 송종국 · 23 조원희 |
딕 아드보카트 핌 베어벡 스태프
압신 고트비 ·
홍명보 ·
정기동
|
그리고 2006 FIFA 월드컵 독일을 앞두고 4-3-3 시스템에서 원톱을 맡던 이동국이 갑작스런 십자인대 부상으로 하차하면서 조재진의 축구 인생은 엄청난 변화를 맞는다. 평가전에서는 안정환이 주전으로 나왔으나, 결과가 그리 좋지 못했고, 최전방에는 장신의 타겟형 스트라이커가 서는 것이 맞다는 아드보카트 감독의 판단 하에 조재진이 본선에서 주전 스트라이커로 나오게 된다.[9]
한국은 독일 월드컵에서 준수한 성적을 내고도 조별 예선에서 탈락했지만, 조재진은 3경기 모두 선발로 나서 유럽, 아프리카의 장신 수비수들과의 치열한 경합을 벌이며 많은 공중볼을 따내 외신들의 호평을 받았다.[10] 그러나, 국내 팬들에겐 골을 못 넣는다고 욕을 먹었지만(최전방 공격수인데 유효슈팅 0개...) 그나마 프랑스전에서 분데스리가 최고의 라이트백 윌리 사뇰, 프랑스 국대 레전드 수비수 릴리앙 튀랑과의 공중볼 경합에서 이기며 박지성의 동점 골을 어시스트해서 체면치레는 하였다.
이때 저위의 리듬타기나 골을 못 넣는 공격수로 까이긴 했지만 프랑스, 스위스의 국대 수비수들을 상대로도 적어도 조재진이 헤더는 따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외신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았고 이 평가가 월드컵 이후 해외팀들의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스위스전 패배이후 눈물이 그렁그렁하며 울음을 삼키는 모습이 화제가 되어 CF를 찍기도 했다.
3.3.4. 베어벡호
3.3.4.1. 2007 AFC 아시안컵 아세안
1
이운재 C · 2
송종국 · 3
김진규 · 4
김동진 · 6
이호 · 10 이천수 · 11 이근호 · 12 이동국 · 13 김치곤 · 14 김상식 · 15 김치우 · 16 오범석 · 17 김정우 18 우성용 · 19 염기훈 · 20 손대호 · 21 김용대 · 22 강민수 · 23 정성룡 · 27 오장은 |
핌 베어벡 코치
압신 고트비 ·
홍명보 ·
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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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월드컵 전후로 대표팀 주전으로 자리매김했지만,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골 결정력 부재는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2007년 아시안컵에도 주전 공격수로 나왔으나 역대급 빈공에 시달리던 당시 대표팀의 모습에 따라가먼서 대회 무득점으로 마감했다. 정작 승부차기에서는 이란, 이라크, 일본을 맞아 4번, 3번, 1번 키커로 나서서 세 번 다 힘차게 흔들었지만...
3.4. 기록
조재진의 국가대표팀 득점 기록 | ||||
일시 | 장소 | 상대 | 경기 결과 | 대회명 |
2003년 9월 25일 | 인천 | 베트남 | 5-0 | 2004 AFC 아시안 컵 예선 |
2003년 10월 24일 | 무스카트 | 네팔 | 7-0 | 2004 AFC 아시안 컵 예선 |
2004년 12월 19일 | 부산 | 독일 | 3-1 | 친선 경기 |
2006년 2월 1일 | 홍콩 | 덴마크 | 1-3 | 2006 칼스버그 컵 |
2006년 5월 26일 | 서울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2-0 | 친선 경기 |
2006년 9월 6일 | 수원 | 대만 | 8-0 | 2007 AFC 아시안컵 예선 |
2006년 10월 11일 | 서울 | 시리아 | 2-1 | 2007 AFC 아시안컵 예선 |
2007년 7월 5일 | 서울 | 우즈베키스탄 | 2-1 | 친선 경기 |
[1]
이후에도 상무에서
조규성처럼 폭풍 성장하는 사례가 많아지곤 했는데, 그 원조가 바로 조재진이다.
[2]
상무 시절 동료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동국 27경기 11골(5PK) 6도움 슈팅당 득점률 0.123,
이광재 17경기 5골 1도움 슈팅당 득점률 0.192,
손정탁 34경기 4골 1도움 슈팅당 득점률 0.111.
[3]
감바 오사카에서 주전경쟁에서 밀려나버렸다. 부상이 점점 악화되어 정상적인 폼 유지가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4]
전 일간스포츠 소속 기자로 박지성의 PSV, 맨유 시절 전담 기자로 오랫동안 취재하였다. 현재는 수원 삼성의 운영팀장으로 근무 중이다.
[5]
이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은 K리그를 넘어서 아시아에서도 내로라하는 전북이지만 조재진이 입단한 2008년에는 06년 아챔 깜짝 우승이 다인 언더독 지방구단 이었다. 모기업의 적극적 투자가 이뤄지기도 전이라 아챔 우승하고도 주전들 내보내야 했던 팀이었다.(대표적으로
염기훈) 여기에 조재진이라는 스타가 온 것은 맨체스터 시티에 호비뉴가 온것과 동일한 수준의 충격이었다. 거기에 한 시즌 뛰고 감바오사카로 가면서 이적료로 15억이나 남겨줬다.(이는
디종으로 이적한
권창훈의 이적료와 맞먹는다.) 또한 가장 잘 나가는 스타임에도 불구하고 봉사활동이나 팬서비스에 솔선수범하여 팀 전체에 귀감이 되었다.
[6]
그리고
18년 후, 다른 아프리카팀과의 경기에서
또다른 曺씨가 이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7]
0:3으로 뒤지고 있던걸 조재진의 연속골과 말리 수비수의 자책골로 동점을 만들었다.
[8]
사실 국대 입성 초반엔
이동국을 밀어낸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자주 출전했다. 득점력 때문에 곧바로 이동국에 밀리기는 했지만(...) 즉 처음엔
이동국의 경쟁자였다.
이동국은 이미 주전이고 조재진이 엄청 분발해서 백업자리를 차지한 것은 아니라는 것.
[9]
프랑스전에서 월드 클래스 수비수들을 제치고 헤더는 다 따냈다. 다만 그 결과가 좋지 않았을 뿐
[10]
그래서, 조재진은 "동국이 형만 있었어도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라고 아쉬워했었다.
[11]
사실 프랑스전에서는 최전방에서 고립된 상태였다. 미드필더 싸움에서 일방적으로 대한민국이 밀리는 바람에...그래도 조재진은 미드필더 라인까지 내려와서 수비가담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