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31 13:44:24

릴리앙 튀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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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앙 튀랑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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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파트리크 비에라
(2006~2008)
릴리앙 튀랑
(2008)
티에리 앙리
(2008~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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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앙 튀랑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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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FIFA 월드컵 브론즈볼
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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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99 · 20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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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월드컵 우승 멤버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멤버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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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앙 튀랑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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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센추리 클럽 가입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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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순서 선수 이름 출전 횟수 첫 경기 마지막 경기
1 위고 요리스 145회 2008.11.19 2022.12.18
2 릴리앙 튀랑 142회 1994.8.17 2008.6.13
3 올리비에 지루 131회 2011.11.11 2024.3.26
4 앙투안 그리즈만 127회 2014.3.5 2023.11.21
5 티에리 앙리 123회 1997.10.11 2010.6.22
6 마르셀 드사이 116회 1993.8.22 2004.6.17
7 지네딘 지단 108회 1994.8.17 2006.7.9
8 파트리크 비에라 107회 1997.2.26 2009.6.2
9 디디에 데샹 103회 1989.4.29 2000.9.2
}}}}}}}}}}}}}}} ||
프랑스의 前 축구 선수
파일:Lilian_Thuram_2021.png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이름 릴리앙 튀랑
Lilian Thuram
본명 뤼디 릴리앙 튀람윌리앵[1]
Ruddy Lilian Thuram-Ulien
출생 1972년 1월 1일 ([age(1972-01-01)]세)
프랑스 과들루프 푸앵타피트르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
[[틀:국기|]][[틀:국기|]][[과들루프|]])
신체 185cm / 체중 80kg
직업 축구 선수 ( 수비수[2] / 은퇴)
큐레이터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선수 AS 모나코 FC (1991~1996)
파르마 FC (1996~2001)
유벤투스 FC (2001~2006)
FC 바르셀로나 (2006~2008)
국가대표 142경기[3] 2골[4] ( 프랑스 / 1994~2008)
정보 더 보기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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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가족 장남 마르쿠스 튀랑
차남 케프랑 튀랑
}}}}}}}}}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
3. 사회참여적 행보4. 플레이 스타일5. 평가6. 기록
6.1. 대회 기록6.2. 개인 수상6.3. 수훈
7. 튀랑에 대한 헌사8. 기타

[clearfix]

1. 개요

프랑스의 前 축구 선수. 포지션은 수비수였다.

현역 시절 파르마 유벤투스에서 전성기를 보냈으며, 1998 프랑스 월드컵 유로 2000에서 프랑스의 우승에 큰 기여를 했다. 피지컬, 체력, 스피드, 태클, 수비 조율뿐만 아니라 점프력을 기반으로 한 공중 장악 능력이 뛰어났으며 기복도 없어서 '무결점의 짐승'으로 불렸던 선수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카리브해에 있는 프랑스의 속령 과들루프 섬에서 태어난 그는 성직자의 길을 걷는 대신 축구 선수가 되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정부로 일하는 어머니의 손에 자랐다. 니스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고 AS 모나코에서 축구를 시작한 그는 1부 리그 입성의 문턱까지 갔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고 축구 인생을 접어야 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중앙 수비수로 다시 뛰게 된 그를 감독 아르센 벵거는 신뢰해 모나코 관중들의 야유를 받는 그를 중용하였다. 그리고 그의 실력이 성장함에 따라 입지도 점점 탄탄해져 갔다.

1996년까지는 거의 후보로 지냈다. 그러나 1996년 AC 파르마로 이적한 그는 파비오 칸나바로를 팀 동료로 만나 칸나바로-튀랑 라인은 공격수들을 씹어먹으며 파르마를 리그 2위로 올려놓는다. 이후 몇 년간 7공주 시대에 파르마는 7공주의 멤버 중 하나로 유벤투스 FC, AC 밀란,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AS 로마, SS 라치오, ACF 피오렌티나와 어깨를 겨루게 되는데 이럴 수 있었던 배경엔 이 칸나바로-튀랑 라인과 최고의 골키퍼 잔루이지 부폰이 버틴 덕이 컸다.

2001년 유벤투스로 이적하면서 2,200만 파운드의 수비수 이적료 기록을 세운다.[5][6] 그리고 튀랑과 더불어 파벨 네드베드 등의 활약으로 유벤투스는 리그 우승을 하였고, 이것은 그의 첫 리그 우승이 됐다.

2002년에도 좋은 활약으로 유벤투스가 리그 2연패를 기록하는 데 공헌하였다.

2005년 유벤투스는 파비오 칸나바로를 영입하여 칸나바로-튀랑의 센터백 라인에 골키퍼 부폰이라는 막강한 수비진을 구축해[7] 팀 실점이 절반으로 줄어들면서 리그를 또 한번 우승한다. 그리고 2006년 월드컵에서 프랑스의 준우승에 기여하며 제2의 전성기를 가진다.

이후 그 유명한 칼초폴리 사건으로 유벤투스가 2부 리그로 강등당하면서 튀랑은 유벤투스를 떠나 바르셀로나로 이적한다. 하지만 많은 나이로 인한 노쇠화와 더불어 점점 부진했고, 주로 백업 출장에만 머물렀으며 2008년 계약 만료로 방출되자 고국의 PSG로 이적했다.

그러나 메디컬 테스트 도중 심장 이상이 발견되어 계약이 전면 취소되어, 튀랑은 은퇴를 선언했다.[8]

2.2. 국가대표 경력

1994년 프랑스 국가대표로 데뷔하여 1996년까지는 동향 선배 조슬랭 앙글로마와 치열한 주전 경쟁을 펼쳤다.[9] 앙글로마가 대표팀에서 은퇴하고 튀랑이 파르마로 이적한 이후부터는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1997년 프랑스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는 등 국가대표 주전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대망의 1998년, 비셴테 리사라수 - 마르셀 드사이 - 로랑 블랑 - 릴리앙 튀랑의 일명 '철의 4백'의 수비라인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 라인은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프랑스를 사상 첫 우승으로 올려놓는다.

또한 이 월드컵에서 튀랑은 인생 경기를 펼친다. 바로 4강전 크로아티아와의 경기. 이 대회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공격수 다보르 슈케르[10]를 상대로 맞이한 튀랑은 수비에서 실책을 범했고[11],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슈케르는 바로 프랑스 골문을 뒤흔든다. 1-0으로 뒤지게 된 프랑스는 공격에 힘을 더 싣게 되는데, 선제골의 빌미를 제공한 튀랑이 오버래핑을 과감하게 하는가 싶더니, 상대편 페널티 박스 근처에서 공을 빼앗아 실점한지 1분만에 동점골을 넣는다. 이때까지 그는 국가대표로서 단 한 골도 넣어본 적이 없는 선수였다. 그런데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는 경기 종료 20분 전 상대 키퍼 라디치의 손이 닿을 수 없는 멋들어진 왼발 감아차기 슛으로 역전골까지 넣었다. 당연히 그는 프랑스의 영웅이 되었다.[12] 그리고 프랑스는 2-1로 승리하여 결승전에 진출하고, 결승전에서도 튀랑은 호나우두를 철저히 지워버리며 3대0 대승으로 월드컵 첫 우승을 차지한다. 여담으로 그의 국가대표 기록은 142경기 2골이다. 그야말로 국가대표로 뛰면서 득점을 기록한 유일한 경기. 심지어 해당 경기 실점에까지 관여한 문자 그대로 완벽한 원맨쇼.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브론즈볼을 수상했다.[13][14]

프랑스는 유로 2000에서도 결승에서 이탈리아를 꺾고 우승하였으나 이후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프랑스가 조별 리그에서 1골도 못 넣고 탈락하는 바람에 국가대표 경력에 오점을 남겼다.[15]

2003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는 결승전에서 티에리 앙리 골든골을 어시스트하며 우승에 기여했다.

이후 유로 2004에도 출전했지만 프랑스는 8강에서 그리스에게 패해 탈락하였고, 대회 종료 이후 튀랑은 지네딘 지단, 클로드 마켈렐레와 함께 국가대표 은퇴를 결정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월드컵 예선에서 어려움을 겪자 1년 만에 지네딘 지단, 클로드 마켈렐레와 함께 국가대표 복귀를 선언, 월드컵에 진출하게 된다.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베테랑들의 역량을 총동원해 프랑스를 준우승으로 이끌었다.[16]

월드컵 종료 후 지단은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튀랑은 도메네크 감독의 요청으로 국가대표 생활을 더 이어갔다. 유로 2008에도 출전, 주장 파트리크 비에라가 부상으로 빠지자 대신 주장 완장을 차고 뛰었지만 대회 최고의 공격력을 보여준 네덜란드의 기세에 맥없이 무너지면서 1-4 완패를 당해 조별 리그 탈락의 수모를 맛봤다. 튀랑은 대회 종료 후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하였다.

대표팀에서 A매치를 142경기나 소화하며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출장 기록을 현지시간으로 2022년 12월 9일까지 보유했다.[17]

3. 사회참여적 행보

튀람은 현역 시절부터 프랑스 내의 사회 문제, 특히 소수자들의 차별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숨기지 않았다. 2005년 프랑스 폭동 당시 내무장관직을 수행 중이던 니콜라 사르코지가 이민자들을[18] '인간 쓰레기'라고 비난한 것을 강하게 비판하며, 이민자들의 사회 통합 문제와 그들이 받는 차별에 대해 화두를 던졌다. 또 2006년에는 극우주의 정치인 장마리 르펜이 "소수계층들로 구성된 프랑스 대표팀이 프랑스를 올바르게 대표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한 것에 대하여 '대통령 후보라는 사람이 프랑스의 역사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며 반박하기도 했다.

은퇴 이후 2011년에는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의 유색인종을 납치해 본국 박물관에 전시했던 인간 전시의 야만적 역사를 폭로하는 전시회를 파리에서 열었다. 이 전시회를 계기로 2011년 12월 KBS 역사스페셜 방영분에 짤막하게 출연하기도 했다.[19]
파일:튀랑 역사스페셜.jpg
KBS 역사스페셜에 출연한 튀랑


인종차별에 반대하고 동성결혼, 동성가족들의 자녀 입양에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입장이 평등권과 라이시떼(공적 영역에서의 종교적 중립성을 나타내는 이념으로, 프랑스 헌법에 명시되어 있음)에 바탕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4. 플레이 스타일



체격이 좋은 커맨더 + 파이터형 수비수였다. 괜히 레블뢰하면 가장 유명한 철의 4백의 일원이 아니다.

철저한 수비를 자랑하듯 압박 수비와 대인 수비가 일품이었고 태클 능력도 뛰어났다. 더불어 축구 지능이 좋아서 영리했으며, 점프력도 뛰어나 공중 장악 능력도 최상급이었다. 그야말로 무결점 수비수라는 명칭이 잘 어울리는 선수.

젊은 시절에는 속도도 엄청 빨라 라이트백으로 뛰면서 오른쪽 라인을 씹어먹었다. 포스가 엄청나서 당시 라이트백으로 뛸 때 비견되던 선수가 역대 최고의 라이트백을 꼽을 때 늘 언급되는 카푸였으며 역시 엄청난 실력자인 국대 후배 윌리 사뇰이 튀랑 때문에 2006년에야 국대 주전 라이트백을 소화할 수 있었다.

1998 프랑스 월드컵 우승 당시 브론즈볼을 수상했을 정도의 활약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라이트백으로 뇌리에 남았지만, 정작 본인은 센터백 포지션을 더 좋아했고 클럽에서는 센터백으로 상당히 많이 뛰었다. 대표팀에서 자신이 바라는 포지션에서 뛰지 못한다고 불만을 표시했을 정도였다. 단순히 불만만 표출한 것이 아니라 센터백으로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절륜한 실력을 보였다. 당장 튀랑이 유럽 전체에 명성을 얻게 된 계기가 파르마에서 파비오 칸나바로와 센터백을 이루며 파르마의 성공을 이끈 영향이 크다. 우측 풀백으로 뛴 것은 당시 프랑스 대표팀에서 튀랑말고도 중앙 수비수로 마르셀 드사이, 로랑 블랑이 있었는데 3명 중 프랑스 수비진의 약점인 우측[20]에서 뛸 수 있는 기동력과 체력을 가진 선수가 튀랑이라 레블뢰에서 라이트백으로 뛴 것. 그러면서도 당시 프랑스에 그를 능가하는 라이트백이 없었다. 그야말로 만능 수비수. 수비력 하나만을 놓고 봐도 역대급 임펙트를 보여준 선수이다.

거기에 엄청난 피지컬을 가진 괴물같은 무결점 센터백. 몸싸움은 말할 것도 없고 수비진 전역을 커버하는 미친 활동량, 거친 몸싸움과 반전되는 깔끔한 커팅과 태클, 그러면서도 마치 한 마리의 야수와도 같이 상대 공격수를 계속해서 압박하는 말 그대로 짐승같은 수비수였다. 게다가 엄청난 주력과 깔끔한 빌드업까지 겸비해 우측 풀백을 무리없이 소화해내는 수준을 넘어 우측 풀백이 주 포지션인지 헷갈릴 정도의 역대급 퍼포먼스를 보이며 활약한 괴물 수비수였다.

여담으로 한창 절정의 활약을 펼치며 펠레, 마라도나랑 비교된던 전성기의 호나우두를 가장 잘 막은 수비수가 바로 튀랑이었다. 많은 최고의 수비수들이 호나우두를 가리켜서 한 말들을 생각해보면, 그런 호나우두가 만날 때마다 애먹은 수비수이니 당시 튀랑의 대인 수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5. 평가

국가대표 커리어는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맹활약하여 조국의 우승과 동시에 튀랑 본인은 수비수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제대로 보여주면서 대회 올스타팀 선정 및 브론즈볼을 수상하였고, 2년 후 유로 2000에서도 맹활약하여 조국의 우승과 동시에 튀랑 본인도 올스타팀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전성기가 많이 지난 2006 독일 월드컵에서도 맹활약하여 조국의 준우승 및 대회 올스타팀 선정, 2006 FIFPro 월드 XI에 선정되기까지 하였다.

클럽 커리어는 국가대표 커리어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AC 파르마에서 파비오 칸나바로와 함께 센터백 듀오 그리고 후방의 잔루이지 부폰과 함께 엄청난 수비 라인을 형성하면서 리그 2위까지 올려놔, 파르마를 세리에 7공주까지 등극시키게 만들었다. 당시 2,200만 파운드의 수비수 이적료 기록을 경신하면서 유벤투스로 이적해서도, 주전으로 리그 2연패와 UEFA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을 기록하는데에 큰 공헌을 했다. 이후에도 꾸준히 주전 수비수로 활약했다.

무엇보다 튀랑의 장점은 피지컬, 체력, 스피드, 태클, 압박 수비 뿐만 아니라 점프력을 기반으로 한 공중 장악 능력도 뛰어나며 기복도 없어서 무결점의 짐승 수비수로 평가받았다는 점이다. 레 블뢰에서는 라이트백으로 맹활약하였지만, 빅리그 클럽에서는 센터백으로 맹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만능 수비수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윌리 사뇰 마르셀 드사이가 은퇴하고 윌리엄 갈라스가 센터백으로 정착[21] 2006년 월드컵부터 비로소 주전으로 출전할 수 있게 되었다.[22] 이때 사뇰의 나이는 29세. 그나마 사뇰은 캉델라보다는 나았다 또한 역대 최고의 라이트백이자 당시 양대 산맥이던 카푸의 브라질과의 맞대결에서도 메이저 대회 본선이든, 친선경기이든 대부분 이길 정도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튀랑은 라이트백과 센터백을 둘 다 잘한 것이 오히려 평가에 독이 되는 경우가 있다. 보통 역대 베스트 11을 뽑거나 시대를 초월해 축구 선수들의 순위를 매기게 되면 수비수나 골키퍼들은 공격수들에 비해 손해를 보게 되므로 포지션에 따라 선수들을 평가하게 되는데 튀랑은 센터백과 라이트백을 둘 다 잘해 한쪽에만 넣을 수 없기에 평가가 뭔가 애매해지는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럼에도 튀랑을 라이트백에 놓을 때 비견되는 선수들이 카푸, 알베스, , 포크츠 등 역대 최고의 라이트백들이고, 센터백으로 놓을 경우에는 동시대 최고의 센터백들인 칸나바로, 네스타와 대등한 반열로 평가받는 역대급의 수비수라고 평가할 수 있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6.3. 수훈

7. 튀랑에 대한 헌사

튀랑과 네스타 모두 대단한 수비수들이다. 그러나 일단 튀랑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그는 마치 외계에서 온 수비수처럼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는 선수이기 때문이다.
파비오 칸나바로
나는 튀랑과 같은 해 여름 유벤투스에 합류했다. 그는 플레이에 힘과 투쟁심이 넘쳤다. 그러면서 또한 우아하기까지 했다.
잔루이지 부폰
그는 제가 상대한 수비수 중 가장 까다로운 수비수였으며 무쇠처럼 단단해서 부딪히게 되면 아픈건 저뿐이었습니다.
클라렌스 세이도르프
파르마와의 경기는 항상 긴장된다. 세계 최고의 수비수들을 상대하는 경기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검은 흑인 선수가 제일 무섭다. 그는 마치 사나운 날짐승 같다.
호나우두
짐승이 파르마에 온 이후로 나는 그 팀과 상대하는 것이 매우 즐겁다. 저번 홈경기에서 나의 완벽한 헤더를 그가 시저스 킥으로 걷어내는 것을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것 같다.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유벤투스가 튀랑을 내준다면 나는 튀랑을 얻기 위해 긱스를 내줄 수도 있다.
알렉스 퍼거슨
다시 말하지만, 아주 강한 선수. 튀랑은 우리가 챔피언스 리그에서 유벤투스를 상대할 때 항상 유나이티드를 힘들게 했다. 뒤쪽에서 공을 옮길 때는 정말 날카로웠고 운동능력도 아주 뛰어나 헤더와 몸싸움을 많이 따냈다. 그는 게임을 정말 잘 읽었다.
라이언 긱스
제가 수비수 중에 제일 힘들었던 선수가 튀랑 선수였거든요. 워낙 지능도 좋고 빠르고 영리한 선수였기 때문에 제가 상대했을 때 제일 어려운 선수가 튀랑이었던 것 같아요.
안정환
거인은 아니지만, 대리석보다 단단하다. 그는 모든 훈련을 월드컵 결승처럼 뛴다. 훈련을 마칠 때 내 몸이 멍투성이가 되어 있고는 했다. 튀랑을 뚫는 것 자체가 기록이었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튀랑은 어린 후배들을 끊임 없이 자극하고 격려하는 훌륭한 팀 동료다. 덕분에 우리는 편안하게 경기할 수 있다. 프랑스 대표팀처럼 큰 팀에서는 그게 정말 중요하다. 축구에 관해서는 정말 최고의 수비수이고 우리 수비진의 핵심 선수다.
프랑크 리베리

8. 기타

  • 음치이다. 경기 시작전 라 마르세예즈를 제창할때 자세히 들어 보면 박자도 안맞고 음도 안맞는다. 그럼에도 노래는 크게 불러 알아채기 쉽다. 영상 53초경부터 등장하는 굵고 튀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튀랑이다. 여담이지만 당시 저 경기는 2006 독일 월드컵 조별 리그 3차전인 토고전인데 동갑내기 지네딘 지단은 경고 누적으로 결장하여 대신 파트리크 비에라가 주장으로 출전하였다.
  • 미셸 플라티니는 "그는 정말로 공부를 좋아하는 축구 선수다"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인권에 관심이 많다. 책도 몇 권 냈는데, 인권과 관련한 책[23][24]도 썼다. 평소 생활할 때는 안경을 쓰는데 안경을 쓴 튀랑은 상당히 지적인 이미지를 풍긴다.
  • 아들이 두 명 있는데, 두 명 모두 축구 선수다. 장남 마르퀴스 튀랑[25]은 잠재성이 충만하다고 평가받으며, 차남 케프랑 튀랑[26] 역시 마르퀴스 만큼은 아니지만 릴리앙의 아들로서 주목을 받는다. 마르퀴스는 2022 카타르 월드컵 대표팀에 승선하여 주전은 아니지만 교체로 자주 투입되었으며 승부차기 끝에 준우승을 기록했다.[27] 현재는 케프랑의 에이전트 역할을 릴리앙이 직접 담당하고 있다.


[1] 본인이 이름을 (li.ljɑ̃ ty.ʁam)이라고 발음하기에 '튀랑'보다는 '튀람'이 더 정확한 이름이다. 프랑스어는 음절말의 철자가 모음+m일 경우 'm'을 비모음 'ɑ̃'으로 발음하지만 외국어에서 유래한 인명이나 지명은 'm'을 /m/으로 발음한다. [2] 센터백, 라이트백 [3]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출장 2위. [4] 모두 1998 프랑스 월드컵 4강 크로아티아전에서 기록했다. [5] 종전 기록은 1,800만 파운드의 리오 퍼디난드. 재밌게도 튀랑의 이적료 기록을 다시 경신한 선수 역시 리오 퍼디난드다. [6] 이때 파르마의 팀 동료 잔루이지 부폰도 함께 유벤투스로 왔으며 라치오의 파벨 네드베드도 유벤투스로 왔다. 지네딘 지단의 레알 마드리드 이적료로 이 세 명을 산 것. [7]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칸나바로-튀랑 / 부폰 라인은 앞서 파르마에서 구축된 적이 있다. 물론 그때도 이들은 막강한 활약을 했다. 파르마와 유벤투스의 나머지 팀 동료들의 실력차를 생각해보면 파르마 때 활약이 더 대단하다고 볼 수도 있다. 참고로 이들 셋은 파르마에서 활약한 시기도 거의 비슷하고(대략 1995-1996 ~ 2001-2002 정도) 부폰, 튀랑은 파르마에서 곧바로 유벤투스로 왔으며 칸나바로는 인터 밀란을 거쳐 유벤투스로 왔다. 2011-12 시즌 에이스 지오빈코(물론 유벤투스가 원래 고향팀이긴 했지만)도 유벤투스에게 내줬으니 파르마 팬들은 유벤투스에 대한 감정이 복잡미묘할 듯. [8] 튀랑의 가족들도 심장 이상으로 사망한 가족력이 있다. 그나마 말년에 발견한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9] 유로 1996에서는 튀랑이 주전 경쟁에서 조금 더 앞서긴 했다. [10] 여담이지만 튀랑과 슈케르는 둘다 1월 1일생으로 생일이 같다. [11] 실책이라기보단 오프사이드 트랩 구축에 실패한 것. 공을 뺏겼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근데 사실 튀랑이 아니었어도 어차피 온사이드였다. [12] 만약 이 경기 직후 대통령 선거를 했다면 튀랑이 대통령으로 뽑혔을 것이란 이야기도 있었다. [13] 튀랑이 매 경기 큰 기복없이 좋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징계로 2경기나 빠진 에이스 지단에게 상을 주기 애매한 것도 튀랑의 수상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당시에는 월드컵 MVP 투표를 결승전 이전에 했기 때문에 4강전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호나우두, 슈케르, 튀랑을 제치고 지단이 상을 타기는 더욱 어려웠다. [14] 이 대회에서 보여준 튀랑의 압도적인 퍼포먼스는 1930 우루과이 월드컵 호세 나사치, 1966 잉글랜드 월드컵 바비 무어, 1974 서독 월드컵 프란츠 베켄바워, 그리고 2006 독일 월드컵 파비오 칸나바로와 함께 월드컵 역대 최고의 수비수 퍼포먼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15] 이때부터 센터백과 풀백을 번갈아 가며 뛰었고 이 대회 이후부터는 오로지 센터백으로만 뛰었다. [16] 결승전에서는 이탈리아의 골키퍼이자 유벤투스 동료 잔루이지 부폰의 엄청난 활약 때문에 우승이 좌절되었다. [17] 이 기록은 위고 요리스가 현지시간으로 2022년 12월 10일에 열린 자신의 143번째 A매치 경기인 카타르 월드컵 8강 잉글랜드전을 소화하면서 요리스에게 넘어갔다. [18] 폭동은 당시 파리 외곽에 거주 중이던 무슬림 청소년 2명이 검문을 피해 도주하다가 전기 철조망에 걸려 감전사한 사건을 시작으로 촉발되었다. [19] 파리서 '인간 동물원' 반성 전시회 뉴스 릴리앙의 1998 프랑스 월드컵 대표팀 동료이자 FC 낭트, UC 삼프도리아, 레알 마드리드에서 선수 생활을 한 크리스티앙 카랑뵈의 조상도 누벨칼레도니에서 프랑스로 납치되어 인간 전시된 적이 있는데, 이러한 이유로 카랑뵈는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라 마르세예즈를 제창하지 않았다. [20] 좌측에는 프랑스 올타임 레프트백이자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을 대표한 비셴테 리사라수가 있었다. [21] 유로 2004 때는 정작 갈라스도 실베스트르에 밀려 라이트백으로 출전했다. [22] 오해하면 안되는 것이 대표팀에서나 기라성같은 선배들 덕에 기회를 못 받았을 뿐이지 사뇰 역시 분데스의 거함인 바이에른 뮌헨의 주전 라이트 백으로, 유럽 정상급의 실력자로 정평이 나있었다. 특히 킥 능력은 선배 튀랑보다 한 수 위였다. [23] Pour L'Egalite(For the Equality, 우리말로는 '평등에 대하여') 이외에도 몇 권 있다. 다만 번역본은 없는 듯. [24] 아동용 도서 Tous Superheros- 우리는 슈퍼 히어로즈, 차별 없는 세상의 주인공(8세 이상)은 2017년 7월 20일에 번역본이 정발했다. [25] 포지션은 공격수. [26] 포지션은 미드필더. [27] 참고로 마르퀴스는 EA 갱강 시절 유벤투스 FC를 떠나 리그 1 파리 생제르맹 FC에 둥지를 튼 잔루이지 부폰과 경기 종료 직후 유니폼을 교환했다. 아버지가 유베에서 뛰던 갓난아기 시절부터 부폰과 자주 보던 사이였는데 어느새 프로 선수가 되어 아빠 친구와 유니폼을 교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