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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2003~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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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2003| 20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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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대 감독 움베르투 코엘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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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77aa,#556599><colcolor=white>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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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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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기간 |
2003년
2월 3일 ~
2004년
4월 19일[기존]
# (1년 2개월 / 442일) |
계약 종료 (성적 부진에 따른 자진 사퇴) | |
연봉 | 7억 원 (감독 / 추정치) # |
전술 스타일 |
점유율 축구 ┗ 점유율 및 창조적 패스 + 수비 중시 ┗ 3-4-3 또는 4-3-2-1 포메이션 |
성적 |
A매치 18전 9승 3무 6패 (승률 50%) 2003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본선 진출)[2] |
[clearfix]
1. 개요
|
움베르투 코엘류와 정몽준 전 KFA 회장과의 만남 |
전임자의 그늘이 너무 짙어 임기 내내 비교를 당했던 대표팀이다. 이관우, 김도훈, 우성용 등 K리그 탑급 선수들을 자주 활용하며 자신만의 패싱 축구를 만들려 했던 팀이지만 당시 대한민국은 월드컵 4강 달성 직후라 기대치가 엄청나게 높아져있었다. 결과적으로 리빌딩을 하며 부딪히는 성적 저하의 딜레마를 극복하지 못했고, 이후 갈 길을 잃은 채 오만 쇼크, 몰디브 쇼크를 연달아 얻어맞고 좌초되었다.
그러나 이후 대한축구협회가 히딩크호에 비하면 대단히 소극적인 지원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어느 정도 동정의 여론을 얻었다.
2. 선임 과정
UEFA 유로 2000 4강[3]의 업적을 세웠음에도 포르투갈 축구 연맹은 그와의 계약을 갱신하지 않았고, 코엘류는 모로코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잠시 맡았다가 팀이 세네갈의 이변의 희생양이 되며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본선 진출에 실패하자[4] 짤리면서 다시 백수 신세가 된다.그러다가 거스 히딩크의 후임자를 물색하던 대한축구협회의 제안을 받아들여 2003년 2월부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게 되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대한축구협회가 감독직 후보로 마지막까지 코엘류와 저울질하던 상대방이 세네갈 감독으로 코엘류에게 아픔을 안겨줬던 브루노 메추 전 감독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계약 기간은 1년 6개월, 즉 2004년 7월에 열리는 2004 AFC 아시안컵 중국까지였다.[5]
참고로 거스 히딩크가 추천한 감독이 코엘류였다는 설도 돌기도 했는데, 일부 내용은 명백한 사실이다. 당시 대표팀 기술위원회는 브루노 메추와 코엘류를 우선협상대상자로 놓고 코엘류와 먼저 협상할지 메추와 먼저 협상할지를 가리는 과정에서 대표팀 기술 고문이던 거스 히딩크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메추의 세네갈 축구 국가대표팀 시절 경기와 코엘류의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시절 경기를 감상한 거스 히딩크는 코엘류 쪽이 더 낫다는 평가를 내렸고, 기존에 구축되어 있던 대한민국 축구에 새로운 전술과 기술을 입혀줄 감독으로 코엘류를 추천했다고 한다.[6]
3. 활동
3.1. 2003년
자세한 내용은 코엘류호/2003년 문서 참고하십시오.3.2. 2004년
자세한 내용은 코엘류호/2004년 문서 참고하십시오.4. 평가
대표팀 부임 초기 코엘류는 홍명보가 은퇴한 수비 라인을 포백으로 변화를 꾀했고, 패스와 테크닉 위주의 전술을 표방했다. 당시 유행하던 일명 '크리스마스트리 전술'이라는 4-3-2-1 전술을 썼고 당시 한국으로는 파격적으로 맨 앞선의 1에 안정환을, 2에는 박지성, 이천수를 배치하기도 하는 등 한국이 그 동안 금과옥조처럼 지켜오던 ‘떡대되는 타겟 스트라이커’를 버리고 기술적인 공격진으로 청사진을 그리기도 했다.[7] 이관우가 중용된 것도 바로 코엘류 시절의 일이다.[8] 조재진, 조병국, 김두현, 김동진, 정경호,코엘류호 시절에는 전임 거스 히딩크 전 감독이 다져놓은 강력한 체력과 압박을 기본으로 패스와 테크닉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코엘류호 경기를 보면 유럽 팀처럼 패스를 구사하면서 남미축구 특유의 테크닉을 도입, 공격을 진행해 나아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때문에 이관우 같은 플레이메이커 선수들이 기회를 부여받기도 했다. 그리고 히딩크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스리백과 포백을 모두 테스트하면서 대한민국 축구에 포백을 이식하려는 시도도 잊지 않았다.[10] 어쩌면 제대로 된 물적, 시간적 지원을 코엘류 감독에게 해주었다면 또 다른 대한민국만의 축구 스타일이 생겼을 거라는 추측을 하면서 아쉬워하는 올드팬들도 있다.
코엘류가 처했던 문제는 거스 히딩크 직후의 시기였다는 것이다. 선수부터 국민까지 모두 말도 안되는 환상에 취해 있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한국으로는 거스 히딩크처럼 직설적으로 그 환상을 깨부수는 힘과 카리스마가 필요했다. 그러나 거스 히딩크와 달리 코엘류는 덕장에 가까웠다. 성격이 불같고 다혈질적인데다 필요하다면 강압적이기도 했었던 거스 히딩크는 여론의 질타와 한국 축구인의 무조건이고 무지성적인 비하에도 강하게 대처하며 선수단을 하나로 만들었다. 반면 코엘류는 히딩크에 비하면 부드럽고 신사적인 성격의 소유자라 조금 흔들릴 때마다 한국 축구인들과 언론들이 만만하게 보고 계속해서 찔러댔다.
또한 월드컵 개최라는 초유의 이벤트를 위해 K리그를 포함한 한국 축구 전체가 국가대표팀를 위해 희생했던 히딩크호 때와는 달리, 월드컵 이후에는 K리그 구단들도 무조건적인 희생을 감수하지 않았고, FIFA의 차출 규정을 준수할 것을 축구협회에 요구하기도 했다. 코엘류가 한국을 떠나면서 남긴 14개월 동안 실제 훈련장에서 훈련한 시간이 72시간에 불과하다는 말이 이러한 국가대표팀과 K리그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박성화, 최강희 전 코치들도 도움은 커녕 감독의 말을 듣지 않는 등, 온갖 월권을 행사하면서 간섭하였는데, 그 전말은 SBS 그것이 알고싶다 프로그램에서 조셉 아우구스토 피지컬 트레이너가 증언하기도 하였다.[11]
|
상황이 안 좋긴 했다. 오만 쇼크 당시 기술위원이 아무도 국가대표팀에 동행하지 않는 등, 대한축구협회의 지원도 히딩크 때에 비하면 부족했고, 올림픽 축구의 중요성만을 유럽에 비해 높게 보는 아시아의 풍토도 코엘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축협은 한국 문화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신임 감독을 잘 지켜주지 않았다. 2002년 이후 기대가 너무 높아진 국민들은 평가전 경기에서도 무조건 닥치고 승리, 그것도 압도적 승리만을 원했다. 게다가 감독이 원하는 축구가 한국이 기존에 해오던 축구도 아니라서 국민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점도 있다.
물론 감독직은 주위에서 뭐라 하든 결국 결과로 평가받는 자리이기에 성적만 좋았다면 경질까진 가지 않았을 것이다. 오만 쇼크나 베트남에 패한 건 넘어가더라도[13] 적어도 몰디브에 0:0 무승부로 승점 1점을 내준 것은 감독으로서 책임을 묻지 않을 수가 없는 게 현실이다. 즉 당시 대한민국 축구의 환경이 코엘류에게 다소 가혹하긴 했지만 코엘류 본인이 성적을 못 낸 것도 사실이기에 무어라 할 말이 없는 것. 물론 이 부분도 14개월 동안 72시간 겨우 훈련했고 그나마도 코치들이 월권을 해댔는데 뭘 어쩌란 말이냐 할 수 있지만, 어느 팀이나 이런 상황에서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것은 감독일 수밖에 없다.
사실 코엘류가 선수 시절 스펙으로만 따지면 위르겐 클린스만, 울리 슈틸리케와 차범근 다음으로 화려할 만큼 뛰어난 스타 플레이어였기는 했으나, 은퇴 후에는 주로 축구 행정가로 커리어를 보냈지 감독 경력은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을 UEFA 유로 2000 4강에 진출시킨 것 말고는 일천한 수준이었다. 분명 선진 축구를 한국에 이식하려 했고 다양한 선수들을 선발한 것은 긍정적인 부분이었으나 마무리를 좋게 끝맺지 못했던 데에는 본인의 능력 부족도 있었다. 그러나 전술적인 능력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인상적이었다는 사람들이 많다.[14] 나름대로 선진적인 매니지먼트 스킬과 비전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이뤄내지 못했던 케이스라 할 수 있다.
훗날 같은 포르투갈 감독인 파울루 벤투랑 스타일이 비슷한 점도 있었다. 코엘류가 추구하였던 유럽팀같이 패스하면서 공격하면서 주도하는 축구를 똑같이 추구하며, 플레이메이커 포지션도 황인범을 시작으로 벤투호 때 대표팀에 본격적으로 중용되기 시작하였다. 벤투호는 자기 사단을 전부 데리고 와서 한국인 코치진간의 잡음이 나올 이유도 없었고, 4년을 완주하는 데 성공해서 기존 한국축구에 조직적인 패스로 탈압박하며 주도하는 현대축구에 통하는 새로운 한국축구 스타일을 정립하는 데 성공했다. 어쩌면 코엘류가 원했던 축구가 벤투호의 팀 스타일이었을지도...
5. 경기 결과
경기 수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승률[15] |
<rowcolor=#ffffff> 18 | 9 | 3 | 6 | 39 | 9 | 50% |
일시 / 장소 | 상대팀 | 결과 | 대회 | 득점 | 비고 |
2003년 | |||||
2003년
3월 29일 ( 부산) |
콜롬비아 |
0 : 0 무 |
친선 경기 | ||
2003년
4월 16일 ( 서울) |
일본 |
0 : 1 패 |
|||
2003년
5월 31일 (일본, 도쿄) |
1 : 0 승 |
안정환 | |||
2003년
6월 8일 ( 서울) |
우루과이 |
0 : 2 패 |
|||
2003년
6월 11일 ( 서울) |
아르헨티나 |
0 : 1 패 |
|||
2003년
9월 25일 ( 인천) |
베트남 |
5 : 0 승 |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2차 예선 |
이기형, 조재진 김도훈, 김대의 우성용 |
|
2003년
9월 27일 ( 인천) |
오만 |
1 : 0 승 |
최성국 | ||
2003년
9월 29일 ( 인천) |
네팔 |
16 : 0 승 |
박진섭(5골) 김대의(2골) 우성용(3골) 김도훈(3골) 정경호, 이관우 이을용 |
||
2003년
10월 19일 (오만, 무스카트) |
베트남 |
0 : 1 패 |
[16] | ||
2003년
10월 21일 (오만, 무스카트) |
오만 |
1 : 3 패 |
정경호 | [17] | |
2003년
10월 24일 (오만, 무스카트) |
네팔 |
7 : 0 승 |
조재진, 정경호 이기형(2골) 김도훈(3골) |
||
2003년
11월 18일 ( 서울) |
불가리아 |
0 : 1 패 |
친선 경기 | ||
2003년
12월 4일 (일본, 도쿄) |
홍콩 |
3 : 1 승 |
2003년 동아시아연맹컵 |
김두현, 김도훈 안정환 |
|
2003년
12월 7일 (일본, 사이타마) |
중국 |
1 : 0 승 |
유상철 | ||
2003년
12월 10일 (일본, 요코하마) |
일본 |
0 : 0 무 |
[18] | ||
2004년 | |||||
2004년
2월 14일 ( 울산) |
오만 |
5 : 0 승 |
친선 경기 |
설기현 안정환(2골) 알 누비(OG) 라베아(OG) |
|
2004년
2월 18일 ( 수원) |
레바논 |
2 : 0 승 |
2006 FIFA 월드컵 독일 아시아지역 2차예선 | 차두리, 조병국 | |
2004년
3월 31일 ( 몰디브, 말레) |
몰디브 |
0 : 0 무 |
[19] |
[기존]
당초 계약 기간은
2004 AFC 아시안컵 중국까지 2년 동안이었다.
기사(한국경제)
기사(문화일보)
[2]
당시 16개국 본선 아시안컵이었다.
[3]
4위로,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은
UEFA 유로 1984부터
3위 결정전이 폐지되어서 최종 결과는 4강이다.
[4]
마지막 한 경기를 남겨놓고 7경기 무패로 잘 나갔는데, 최종전에서 세네갈에 0:1로 뜬금패를 당하며 승점은 동률이었지만 골득실에서 뒤지며 세네갈에 밀려
물먹었다.
[5]
하지만 코엘류 본인은 나중에 나는 한국이 좋고 더 머무르고 싶다라면서
2006 FIFA 월드컵 독일까지 지휘봉을 잡겠다는 속마음을 드러냈다.
[6]
거스 히딩크 전 감독이 입혀놓은 강력한 체력을 바탕으로 한 압박 축구에 기술과 그외 여러가지 부분들을 해결해줄 감독으로 추천했었다.
포르투갈 출신 감독들이 주목을 받는 시기가 있었고, 비록 코엘류 전 감독은 오래 못 가고 중도에 경질 당했지만, 몇년이 지난 뒤 같은 포르투갈 국적의
파울루 벤투 감독이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에서 성공적으로 오랫동안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다.
[7]
결과적으론 결국
최용수,
설기현,
조재진 등 타겟 스트라이커로 회귀하긴 했다.
[8]
불운하게도 이관우는 오만 쇼크와 몰디브 참사에 모두 출장했다(...).
[9]
참고로 이 당시 기회를 얻었던 젊은 선수들 중 상당수가 이후
2000년대 중후반 국가대표팀에서 중심 역할을 담당하는 선수가 되었다. 다만 이 선수들이 2002년 월드컵
선배들을 뛰어넘지 못해 그대로 묻힌 것이 다소 아쉬운 부분. 축구계에서는 소위 골짜기 세대라고 부른다고 카더라...
[10]
이후 포백은
핌 베어벡 전 감독 시절에 그 뿌리와 기초가 완성이 되며 대한민국 축구 수비의 스탠다드로 안착하게 되었다.
[11]
201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 축구계 지도자들은 입으로만 한국 축구 선진화만 지껄였지 한국 축구의 변화를 위해 자신부터 변하고자 노력하는 이는 전혀 없었다. 이들은 구시대적 발상에만 의존해서 진짜 축구의 기원이자 총본산인 유럽 출신 지도자들을 폄하하는 비정상적인 기행을 저질렀으며 언론조차도 그따위 망발에 힘을 실어줬었다. 당시 대한민국 축구엔 예외적인 인물이 둘 있었는데 바로 차범근과 김학범이다. 물론 그들도 지도자로서 약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외국인 감독을 대책없이 물어뜯지는 않았다. 특정 선수만을 편애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차범근도 지도자 말년에 가까워서야 선수단 전체를 아우르고자 했고(이런 성향도 차범근 개인의 인격 문제라기보단 주전 베스트 11에 대한 믿음이 강한 스타일이라 그런 면이 크다.), 전술가로서 선진 축구를 적극적으로 배우고자 했던 지도자는 김학범이 유일하다시피 했다.(김학범 전 감독은 체력 훈련의 과도함과 선수단 체력관리에 종종 어려움을 겪는 약점이 있다.) 되려 이들 밑에서 선수 생활을 했거나 유럽 진출 경험이 있었던 당시 선수출신 감독들이 2010년대 말부터 2020년대에 들어 감독이 되면서 대한민국 축구, K리그의 기술적, 전술적 선진화를 이끌고 있다.
[12]
특히 이 당시에는 대한민국 국가대표는 당연히
한민족의 피가 흐르는 한국인이 이끌어야 한다는
순혈주의가 지금보다도 훨씬 심했다. 2020년대 이후 시점에서는 민족 운운하는 것 자체가 인종차별 논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민감한 사안이지만 그 당시에는 애국심의 발로라며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만만찮게 강했다. 그
거스 히딩크마저도 월드컵 4강 신화 이전까지는 한국 축구의 현실을 모른다며 언론과 국내 축구계로부터 수도 없는 견제를 받았었다.
[13]
사실 이 때부터도 벌써 여론이 안 좋았다. 이미 한일전 패배, 남미 국가들과의 친선 경기 무승으로 불만 스택이 쌓여가던 상황에, 당연히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아시아 국가들에게마저 패배를 당하면서 여론이 폭발하게 됐다. 한일 월드컵을 치른 지 단 1년만에 한국 축구의 몰락을 논하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14]
전술이 유럽팀같이 패스하면서 공격해 나아가는 축구를 도입하고 포지션도 포백으로 실험해가며 나름대로 새로운 스타일을 구축하고 있었기에 많은 축구팬들이 기대감을 가지기도 했다. 이당시 지원만이라도 잘 해주었다면 이관우 선수같은 플레이메이커 축구를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15]
축구는
야구와 달리 무승부를 분모에 산입 계산해서, 무승부는 승리로 취급되지 않는다. 자세한 내용은
승률 문서 참조 바람.
[16]
베트남 쇼크
[17]
오만 쇼크
[18]
2승 1무, 대회 우승
[19]
몰디브 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