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신궁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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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04C4B> 조선신궁 [ruby(朝鮮神宮, ruby=ちょうせんじんぐ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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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colbgcolor=#FFF,#191919>
경기도
경성부
츄구 아사히초1초메 (京畿道京城府中區朝日町一丁目) (現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1가) |
제신(祭神) |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皇大神) 메이지 덴노(明治天皇) |
사격(社格) |
관폐대사(官幣大社) 칙제사(勅祭社) |
창건 | 1925년( 다이쇼 14년) 10월 15일 |
해체 | 1945년 8월 16일 |
예대제 | 10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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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KBS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역사저널 그날 영상한국사 제7편 "일본,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워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조선 왕궁을 훼손하다" |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조선 경기도 경성부 중구 아사히초1초메(現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1가 남산 중턱)에 세운 일본식 신사(神社). 조선신궁은 일본의 근대사격제도에서 관폐대사(官幣大社)이자 일본 본토 밖에 있던 유일한 칙제사(勅祭社)로, 제국주의 일본 전체의 신토시설 중에서도 최상급 대우를 받았다.
조선신궁의 궁사(신사 책임자)는 당시 일본의 관직체계에서 칙임관(勅任官)[1]이었고, 조선신궁의 직원들을 관리하는 별도의 법률이 있는 등, 다른 식민지의 총진수 신사( 삿포로 신사, 대만신궁)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았다. 이런 대우를 받는 신사시설은 일본 본토에도 거의 없어서 ( 이세 신궁을 제외하면) 동급은 있어도 그보다 더 높은 급은 없을 정도였다. 또한 조선신궁의 궁사는 칙임관이라 조선 총독의 아랫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사정책을 두고 총독부와 대립각을 세우기도 가능했다.
일제는 1919년에 '조선신사(朝鮮神社)'라는 이름으로 신사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1920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25년 신궁(神宮)으로 격상한 뒤 완공했으나, 1945년 광복이 되자 일본인들이 자진철거하였다. 남산에 있었기 때문에 '남산신사'라고도 불렀다.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을 제신(祭神)으로 봉안하여 모셨고, 메이지 천황이 생전에 패용했던 검을 하사받아 신궁의 보물로 간직했다. 예대제 날짜는 10월 17일이었다. 종교시설로서 기능하는 동안에는 식민지 조선의 총진수(總鎭守), 그러니까 조선 전체의 신사들을 대표하고 (일본제국 입장에서) 식민지 조선을 지키는 곳으로 통하였다.[2]
위치는 오늘날 남산의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일대이다. 남대문(숭례문) 옆 조선신궁 참배로로 조성된 소월로[3]와 소파로가 만나는 도동삼거리[4] 남산공원 입구에서부터 백범광장을 거쳐 길게 계단과 광장이 있었다. 그 위쪽으로 서울시 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한양도성유적전시관, 분수대, 조선신궁 배전 터 일대가 본격적인 신궁의 경내였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남산도서관 부지도 일부 포함했다.[5] 정식 참배로의 계단만 380여 단에 이르는 위용이 인상적이었다. 경복궁 자리에 앉은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정면(남쪽)을 바라보면 조선신궁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다만 조선신궁은 북서쪽으로 뻗은 남산의 산등성이 위에 터를 잡았기 때문에, 총독부는 신궁을 바라보지만 신궁은 비스듬히 선 모양새가 되어 서로 마주보지는 않았다.
정식 참배로 말고도 조선신궁으로 이어지는 길을 동서로 따로 냈는데, 오늘날 소파로와 소월로의 일부가 되었다.
2. 일러두기
- 고유명사 음역은 국립국어원의 일본어 표기법을 따랐다.
- 일본 신사 시설의 이름은 지명이나 신명(神名)에 해당하는 부분만 일본어를 음역하고, 그 외에는 한국식 한자음으로 표기하여 띄어쓰기했다.(예: 熱田神宮→ 아쓰타 신궁) 단, 한국식 한자음으로만 쓸 때 더욱 이해가 잘 된다면 한국식 한자음으로만 붙여 썼다.(예: 朝鮮神宮→조선신궁) 다만 신사(神社)와 신사(神祠)를 구분하고자, 후자는 예외적으로 일본식 발음을 음역하여 '신시'라 하고 붙여 썼다.[6]
3. 조선신궁의 모습
사진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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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神殿) 신령이 깃든 물건(미타마시로)을 모시는 곳. 신사 시설 안에서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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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神庫) 신령에게 바친 예물을 보관하는 창고. 안에 보관한 물품들은 흔히 신보(神宝)라고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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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소(神饌所) 매일 신령에게 올릴 음식(神饌: 제수)을 준비하는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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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사사(祝詞舍) 신쇼쿠(신토의 교직자)들이 신령에게 노리토(祝詞: 신토식 축문)를 특유의 운율로 낭송하는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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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전(拜殿) 신자들이 모여 기도하고 참배하는 곳. 일반인들은 보통은 이보다 안쪽으로 들어갈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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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고(祭器庫) 제례에 사용하는 기물들을 보관하는 창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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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수찰 수여소(神符守札 授與所) 부적, 또는 신찬에 사용했던 술 등 종교물품을 판매하는 곳. 실제로는 판매인데도 명칭을 수여소(授與所)라 한 것은 신령의 영험이 깃든 물건을 두고 돈 받고 판다는 뜻인 '판매'라고 표현함을 불경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현대 일본의 신사들에서도 마찬가지 이유로 이런 종교물품 판매소를 신자체로 수여소(授与所)라 쓰고, 안에서 판매하는 물품들 또한 수여품(授与品)이라 칭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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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사(手水舍) 신성한 곳에 들어가기 전에 재계(齋戒)한다는 뜻으로 깨끗한 물로 손과 입을 씻는 곳. 여기에 사용하는 물은 남산 아래에서 펌프로 끌어 충당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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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사전(勅使殿) 천황이 보낸 칙사가 머무는 곳. 조선신궁 또한 칙제사였기 때문에 이런 시설이 있었다. |
4. 조선신궁의 역사
4.1. 경술국치 이전 일본 신사
한반도에 처음 일본식 신사가 건립된 때는 17세기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혹시 그 이전에도 왜관에 일본인들이 거주했으니 그 일본인들을 위한 종교시설로서 왜관이나 그 주변에 신사가 있었을지 모르나, 이를 뒷받침할 기록이나 유물이 전무하므로 '그럴지도 모른다.' 하는 가설에 그칠 뿐이다. 임진왜란 이후 모든 왜관이 폐쇄되었으니,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을 것이다.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 31년(1598)에 끝났고, 당연히 왜관은 모두 사라졌다. 일본은 조선에게 과거처럼 다시 왜관을 설치해달라고 요청했다. 조선 조정은 일본 측 사자가 머물 장소가 필요하지만 구 왜관 터를 쓸 수 없다고 판단, 선조 40년(1607) 부산 두모포[7]에 새로이 왜관을 만들었다. 숙종 1년(1675)에 일본인들이 처음으로 두모포에 고토히라(金刀比羅)[8] 신사를 세웠다. 그런데 두모포왜관은 시설이 좋지 않고 좁아서 이미 숙종 1년부터 초량으로 옮길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이때의 고토히라 신사는 아마도 임시시설이었을 것이다. 숙종 4년(1678)에 초량왜관으로 옮겼는데, 오늘날 용두산공원과 복병산 일대이다.
1678년 왜관을 초량으로 옮길 때 쓰시마 번주 소 요시자네(宗義眞 1639-1702)가 용두산에 고토히라 신사를 새로이 짓도록 했다. 소 요시자네가 신사를 세운 것은 초량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 상당수가 쓰시마 사람이라서였고, 고토히라를 모심은 항해의 안전을 지켜주는 신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숙종 4년(1678)이 일본의 연호로는 엔포(延寳) 6년인데, 일본 측 기록에서는 엔포년간(1673-81)에 고토히라 신사를 비롯하여, 초량왜관의 용두산-용미산 근처에 신사들을 세웠다고 하였다. 고토히라 신사가 대표 격일 뿐 고토히라 신사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용미산에는 가토 기요마사를 모시는 신사도 있었다.
19세기 후반, 고종이 즉위한 후로 조선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고종 13년(1876)에 강화도 조약을 맺자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들의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대신 왜관이 해체되었다. 아무래도 부산이 일본에서 가깝고 과거에 왜관도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많았는데, 이런 와중에 고토히라 신사는 부산 일대 일본인들의 신사로 성격이 바뀌어 점차 일본인들에게 부산의 명소로 유명해졌다. 왜관 해체 직후에는 신사들이 버려져 폐사나 다름없었지만, 부산에 일본인 거류지가 생기자 다시금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러나 초량왜관 시절의 시설은 늘어난 일본인들을 감당하기에 너무나 낡고 협소했다. 고종 31년(1894)에 거류지신사(居留地神社)로 개칭하고, 이후에 일본인들이 돈을 모아 중창하여 광무 3년(1899)에 작업을 마치고 진구 황후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조선침략과 관계된 신을 합사했으며, 바로 그해에 용두산신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용두산신사는 광복 이전까지 한반도에 있었던 모든 신사들 중 가장 역사가 깊었다.
광무 2년(1898)에는 서울 남산 왜성대공원(현 숭의여대 일대)에 모여 살던 일본인 거류민들이 아마테라스를 주된 제신(祭神)으로 모시고[9]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이란 이름으로 신사를 창건했는데, 1916년에 경성신사로 개칭했다.[10] 조선신궁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경성신사에 총독부 관리들이 참배하기도 하였다.[11] 경성신사가 처음에는 현 리라아트고 자리에 있었는데, 1929년에 서쪽으로 약 50 m, 현 숭의여대의 운동장 쪽으로 이전했다.[12] 경성신사 터는 남산의 북면 아래턱, 일본인 거류지의 가운데로 통감관저나 남산총독관저와 매우 가까웠다. 경성신사는 조선신궁이 완공되기 이전까지는 행사에 총독이 참석하는 등, 조선의 신사들을 대표하는 역할도 했다.
그 뒤로도 1910년까지, 주로 일본인 거주지역을 중심으로 신시(神祠)[13]가 꾸준히 생겼다. 본디 일본의 신사/신시들은 소재지와 관계가 깊은 신을 모시지만, 조선에 그런 신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주로 아마테라스를 제신으로 삼았는데, 여기저기 출신이 섞인 일본인들이 공동의 조상신으로 인정할 만한 유일한 신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신시들은 행정상 명칭이 '신메이신시(神明神祠)'인 경우가 매우 흔한데, 여기서 신메이(神明)는 아마테라스를 주된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신시들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이다.[14] 또한 고토히라나 이나리 등 항해안전의 신이나 상업의 신을 모신 경우도 나름대로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각 도(道)마다 국폐소사를 한 곳씩 계획이었으나, 국폐소사로 지정되려면 모시는 제신 중에 국혼신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패망할 때까지 이루지 못했다.
1936년에 경성신사와 용두산신사가 국폐소사로 지정되었다.
4.2. 경술국치 이후 조선신궁 창건까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의 일개 식민지로 격하되어 다시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병합당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같은 해 9월, 일본 전국신직회(全國神職會)[15] 회원들이 모여 식민지 조선에서 어떻게 신토를 정착시키고 민중들을 동화시킬지 논하였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일본 민속의 중심인 신사(神社)제도를 조선에도 실행하여 빨리 동화시키고 싶지만, 쉽지 않을 테니 먼저 당국이 (조선의) 신사제도를 조사할 것을 희망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었다.그뿐 아니라 신토가[16]들은 조선 전체를 대표할 신사에 어떤 신을 모셔야 마땅할지도 함께 논하였다. 후보로 오른 신격들은 매우 다양했으나, 국혼신(國魂神)[17]· 오쿠니누시(大國主)[18]· 스쿠나히코나(少名毘古那)[19]를 모셔야 한다는 주장과 아마테라스· 스사노오를 모셔야 한다는 주장이 유력했다. 그러나 신토가들끼리도 서로 의견이 극명하게 대립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오쿠니누시와 스쿠나히코나는 일본 신화에서 한 쌍으로 등장하여 '나라 만들기의 신(国造りの神)'으로 통한다. 일본 각지의 산과 들을 만들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해당 지역의 기존 신령을 총칭하는 국혼신과 함께 '나라 만들기의 신'을 조선신사에 봉안하자는 주장은 '이제 조선도 일본 영토의 연장선이 되었다.' 외치는 종교적 선언이다. 또한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기록된 신화에서 오쿠니누시는 아마테라스·다카미무스히 신이 사자를 보내어 나라를 바치라고 하자, "저를 위해 큰 궁전(신사)을 지어주신다면 이 땅을 바치겠습니다."라고 선언하고는 통치권을 포기했다고 한다. 이 내용을 국토이양 신화라고 하는데, 신토가들은
한국강제병합에서 이를 연상했을 것이다. 게다가 '국혼신·오쿠니누시·스쿠나히코나'를 새 영토를 대표하는 신사에 봉안함은 이미 전례가 있었다. 1869년 일본이 (과거에는 아이누들의 땅으로 여겼던) 홋카이도를 정식으로 일본 영토로 편입하고 삿포로 신사를 세우기로 결정, 1871년에 낙성했다.[20] 삿포로 신사 역시 관폐대사로, 일본이 홋카이도를 지배한다는 종교적 선언이었다. 여기에 모신 신이 국혼신·오쿠니누시·스쿠나히코나 3위였는데, '개척(開拓)3신'이라고 부르며 하나의 신령으로 간주했다. 1901년에 세운 대만신궁 역시 개척3신을 모셨다가 폐쇄되었다. 개척3신은 일본이 해외 식민지를 넓힐 때마다 해당지역을 대표하는 신궁에 모시는 대표적인 신격이었다. 이 주장을 지지한 신토가들은 조선신궁에 모실 신도 기존의 전례를 따르자고 한 것이다. 한편, 아마테라스와 스사노오를 모시자는 주장은 조선도 이제 천황의 신민이 되었다는 표명이다. 아마테라스야 그렇다 쳐도 스사노오를 모시자고 주장한 신토가들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 일본서기≫ 권1 제8단 일서 제4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스사노오가 누이 아마테라스에게 허락받아 천계 다카마가하라(高天原)에 거주하다가 죄를 지어 쫓겨나자, 아들 이타케루(五十猛) 신[21]과 함께 신라의 소시모리(曾尸茂梨)란 곳[22]에 내려왔다. 하지만 "여기는 내가 있고 싶은 곳이 아니다!" 라고 외치더니 진흙으로 배를 만들어 타고 동쪽으로 몰아 일본의 이즈모 상류 도리카 봉(鳥上峯)에 도착했다고 한다. 규슈 일보 사장이기도 했던 후쿠모토 니치난(福本 日南 1857-1921)은 ≪ 일본서기≫ 일서의 소시모리 전승을 근거로, 스사노오와 그 아들 이타케루가 바로 단군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경술국치 이전인 1906년에 아쓰타 신궁의 궁사(주지) 쓰노다 다다유키(角田 忠行 1834-1918)는 '장래 조선에 세울 신사에는 스사노오를 모셔야 한다'고 김칫국부터 마시는 글을 쓰기도 했을 정도였다. 천황가의 조상신 아마테라스의 동생(스사노오)이 단군이라면, 일본인과 조선민족은 일체라고 주장해도 말이 되고 두 신령을 함께 모심으로써 내선일체를 표방하기에도 좋았다. 당시 논쟁에 참여한 신토가들의 관점이 비슷하면서도 서로 초점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
아무튼 일본의 신토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려면 조선인들에게 신토를 어서 포교해야 하고, 그 일환으로 먼저 총독부가 조선신사를 건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신사를 먼저 세우고 그 뒤 각 도(道)마다 신사 하나씩 세워, 마침내는 마을마다 신사가 하나씩은 들어서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런 와중에도 천리교나 금광교 같은 교파신토, 일련종 등 불교 종파들은 열광적인 신자들이 개인적으로 조선으로 건너와 포교를 시도했다. 대부분은 일본인을 대상으로 했지만 조선인 포교를 시도한 경우도 없지 않았고, 특히나 천리교는 일본계 종교 중에서는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교파신토가 아닌 국가신토의 관련자들은 국가의 정책을 무시하고 개인적으로 활동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조선총독부를 다그쳐야 했지만, 종교가가 아닌 총독부 관리들은 별로 급하지 않았다. 1912년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신사를 지을 땅과 비용을 계산했지만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미루었다. 1917년에는 돈을 모았는데 의회가 해산하는 바람에 건설허가를 받질 못했다. 하지만 1913년에 일본 각지의 여러 주요 신사들의 구조를 살피고 건설부지를 검토하는 등, 예산확보와 별개로 작업을 진행하였다.
조선 전체를 대표할 '조선신사'는 마땅히 경성(서울)에 있어야 했다. 경성 이외의 선택지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경성 안에서도 구체적으로 어디에 만들어야 할지는 논의가 따로 필요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에서 메이지 신궁 등을 건축한 바 있는 유명한 건축가 이토 주타(伊東 忠太 1867-1954)를 초빙하여 조선신궁 터를 잡고 건축하도록 했다.
이때 논의된 후보지는 다음과 같다.
- 북악산 남쪽(현 청와대 부지): 만약 이 자리가 선택되었다면 구 조선의 왕궁에 종교적 지배를 상징하는 조선신궁, 그 앞에 물리적 지배를 상징하는 조선총독부가 들어서서 조선 식민지화의 이중적 상징이 완성되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신궁을 조성한다고 경복궁 일대를 대거 공사했을 테니, 문화재 보호 측면에서도 큰 손실이 되었을 것이다.
- 신무문(북문) 밖
- 사직단: 종묘사직 할 때의 그 사직. "사직을 보존하시옵소서!" 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면, 이 곳을 후보지로 올린 이유도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 삼청동
- 효창동: 문효세자의 무덤인 효창원과 의빈 성씨의 사당인 대빈묘가 이 곳에 있었다. 조선신궁 후보지에서 제외된 뒤에도 일제는 이 곳을 불순한 의도로 일부러 훼손했고 왕가의 무덤들은 모두 서오릉으로 이장해서 빈 터로 만들어버렸다. 이후 광복이 되고 이 자리엔 김구 선생· 윤봉길 의사의 묘 등이 조성되었는데, 이번엔 이승만이 이 곳에 효창운동장을 만들었다.
- 왜성대(현 남산골한옥마을): 현 숭의여자대학교 자리인데, 이토 주타는 현 남산골한옥마을 근처를 후보지로 점찍으면서 '왜성대'라고 표현했다. 아마 왜성대 일본인 거류지와 가까워서 그렇게 한 듯하다. 한옥마을 자리는 당시에는 조선헌병대사령부가 있었으며 이후 중앙정보부가 사용했다.
- 한양공원 (현 백범공원 일대)
이토 주타는 조선신궁 자리를 잡으면서 아래와 같은 조건에서 평가했다.
a. 제신과 관계가 있는 곳, 조금이라도 불상불결(不祥不潔)[26]하지 않은 곳.
b. 공간이 광활하여 군중이 모이기에 충분할 것.
c. 울창한 수림(樹林)을 가진 곳, 특히 배경으로 숲이 우거진 곳.
d. 약간 고지대에 위치할 것.
e. 되도록 남향으로 할 것.
f. 되도록 맑은 물이 흐르는 곳.
g. 시가지의 번잡한 거리와는 격리된 곳.
h. 시가로부터의 교통이 가능한 곳, 특히 넓은 참배로가 있는 곳.
i. 주위에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을 것.
j. 시가로부터 화재의 우려가 있는 풍향을 피할 것.
k. ‘외관(Prospect)’이 좋을 것.
l. ‘조망(Aspect)’이 좋을 것(경내로부터 사방의 조망).
박진한 등 6명(2013) 209쪽에서 인용함.
최종적으로 조선신궁을 한양공원 자리에 짓기로 결정했다. 이토 주타의 위 평가기준과 비교하면, 한양공원/왜성대 자리는
남산의 북쪽 면이기 때문에 감점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산 문제가 있었다. 남산의 남쪽 면이나 다른 지역은 사유지가 많아서 보상비를 따져보니 예산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국유지가 많아 보상비 걱정이 없는 곳을 찾으니 한양공원 자리가 낙점된 것. 또한
경술국치 이전부터 일본인들이 남산 일대에 많이 살았고, 조선인들이 남산을 영험하게 여겼음[27]도 남산 자락 한양공원 자리를 낙점한 이유인 듯하다.b. 공간이 광활하여 군중이 모이기에 충분할 것.
c. 울창한 수림(樹林)을 가진 곳, 특히 배경으로 숲이 우거진 곳.
d. 약간 고지대에 위치할 것.
e. 되도록 남향으로 할 것.
f. 되도록 맑은 물이 흐르는 곳.
g. 시가지의 번잡한 거리와는 격리된 곳.
h. 시가로부터의 교통이 가능한 곳, 특히 넓은 참배로가 있는 곳.
i. 주위에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을 것.
j. 시가로부터 화재의 우려가 있는 풍향을 피할 것.
k. ‘외관(Prospect)’이 좋을 것.
l. ‘조망(Aspect)’이 좋을 것(경내로부터 사방의 조망).
박진한 등 6명(2013) 209쪽에서 인용함.
1916년 4월 7일자 매일신보 2면에 실린 '조선신사신조영계획(朝鮮神社新造營計劃)'이라는 기사에서는 또다른 후보지였던 북악산 남쪽이 선택되지 않은 이유를 두고 이렇게 설명하였다. 만약 그 자리에 조선신사가 들어선다면, 장차 총독부도 경복궁 자리로 옮길 터인데, 그러면 경성 일대에 일본인들이 많이 자리 잡은 혼마치(本町, 현 충무로2가 일대)가 경성의 중심과 멀어져 쇠퇴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한양공원 자리는 보상비가 덜 들어 좋긴 한데 방향이 문제였다. 일본의 신사들 또한 여타의 건물들처럼 남향이 기본인데 한양공원 터는 북서향이었기 때문이다. 한양공원이 남산에서 북서쪽으로 뻗은 산줄기의 등성이 위에 있었으니, 그 자리를 부지로 선정한 이상 도저히 북서향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예산이라는 현실적인 벽을 넘어 남산의 다른 산줄기를 선택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위에서 언급한 '조선신사신조영계획' 기사에서는 이렇게 변명했다. 일본의 유서 깊은 신사들 중에도 하코자키 하치만 궁(箱崎八幡宮)이나 이쓰쿠시마 신사처럼 남향하지 않은 곳들이 있고, 장차 일본 민족이 북서쪽으로도 발전할 것이며, 왜성대 일대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으니 북서쪽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예산 문제로 북서쪽으로 지을 수밖에 없으니 그래도 괜찮다고 억지로 이유를 갖다 붙였다. 조선신궁 건물은 이세 신궁과 마찬가지로 신메이즈쿠리(神明造) 양식을 따랐는데, 이 또한 '제일 돈이 덜 들기' 때문(…)이었다.
당시 서울 남산에는 국사당(國師堂)이 있어 무당들이 기도처로 여겼는데, 일제는 국사당이 조선신궁을 짓기로 한 자리보다 높이 있다는 이유로 트집을 잡았다. 결국 국사당은 인왕산으로 이전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현재 남산 국사당이 있던 자리에는 팔각정이 들어섰다.
한편, 매일신보의 '조선신사신조영계획' 기사에는 다른 흥미로운 내용도 있다. 원래 조선신사에 진구 황후 외 11위 신령을 모시자는 논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궁내성이나 내무성 등 관계기관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는데[28], (1912년에) 메이지 천황이 죽자 그를 신격으로 모시기로 했다고 매일신보에서 설명했으므로, 1912-16년 사이 어느 시점에 총독부는 내부방침으로 메이지 천황을 모신다고 결정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후로도 시간을 끌다가 1918년이 되어서야 조선총독부는 조선신사에 모실 신을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으로 하겠다고 내각에 보고하여 허가를 구했다.
1917년에는 조선총독부령 제21호로 <神祠에 관한 件>이라는 규정을 발표했다. 당시 일본어에서도 신시(神祠)란 단어는 '신령을 제사 지내는 건물'이란 뜻인 보통명사였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신사(神社)보다는 간소하고 격이 떨어지는 신토적 간이종교시설을 '신시'란 이름으로 허가를 받도록 정했는데, 일본 본토에는 없는 제도였다. 이는 총독부가 일본 본토에서 신사들을 관할하는 신사국(神社局)과 별개로,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종교시설들을 직접 장악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조선총독부가 더 이상 느긋하게 있지 못하게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그제서야 조선인들을 좀 더 강하게 동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는 조선신사 건설을 서둘렀다. 결국 일본 정부는 그해 7월 18일자 내각고시 제12호로 남산 아래에 조선신사(朝鮮神社)란 이름으로 신사를 지을 것이고 사격은 관폐대사이며 제신은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이라고 확정하였다.
한편 전국신직회는 조선에서 천도교와 개신교가 활발히 활동함에 불안감을 느꼈다. 전국신직회는 총독부가 얼른 신토로써 조선 민중을 동화시키라고 요구하는 한편, 내부의 반대의견을 묵살하였다. 이민족을 동화시키기란 불가능하다고 보거나, 또는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신사 건설이 진행되는 와중에서 꽤 재미난 논의도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신사의 제신(祭神)은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이라고 정했지만, 신토가들 중에는 조선인들의 시조인 단군이나 조선왕조의 건국자 이성계도 함께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종교적으로 내선일체를 이루자면 일본 신격만 일방적으로 모시지 말고, 조선인들도 인정하는 대표자 격인 신격을 함께 봉안해야 한다고 의식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건물 자체에 대해서도 순 일본식 신사 양식으로 짓지 말고, 조선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을 혼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런 주장들은 모두 조선신사를 통해 내선일체의 이념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29]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주장을 모조리 무시했다.
조선총독부가 결정한 신격은 신토가들의 주장과 상당히 다르다. 신토가들이 신격 후보로 내세운 의견들은 모두 내선일체를 나름대로 의식했지만, 조선총독부가 결정한 신격들은 그런 의사가 전혀 없다.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을 모심으로써, 조선이 이제 일본의 '지배' 아래 들어왔으니 복종하라는 표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
하지만 신토계는 모시는 신격이 신격인 만큼 신사가 아니라 ' 신궁(神宮)'으로 격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1] 이건 당시 일본 정부도 납득해서 1925년 6월 27일자 내각고시 제6호로 명칭을 '조선신궁'으로 바꾸었다.
신토학자 오가사와라 쇼조(小笠原 省三 1892-1970)는 조선총독부의 조선신사 건립 방침에 반대하였다. 오가사와라는 '적화방지단'이라는 반공단체의 회원이기도 했는데, 그 때문에라도 조선의 사상적 동향에 관심이 많았다. 오가사와라는 자신이 창간한 잡지 ≪신토평론(神道評論)≫에 글을 실었다.
오가사와라는 아마테라스가 일본 민족의 주신이기 때문에 이세 신궁 외에서는 모시면 안 되고, 그 대신 조선의 시조신 단군을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뿐 아니라 건축양식도 순일본식이 아니라 조선 전통을 섞어야 하고, 제례 때 쓸 음악도 조선의 것을 어느 정도 사용해야 한다고 썼다. 오가사와라의 주장에 다른 일본의 재야 지식인들도 동조했는데, 조선의 시조신인 단군을 무시함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단군을 모셔야만 일본과 조선, 양 민족이 화합할 수 있다(!)고도 했다.
오가사와라의 주장에 반대하는 신토가들도 조선의 시조를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 자체를 배격하지는 못했다. (조선신궁의 초대 궁사[주지]가 된) 다카마쓰 시로(高松 四郎)는 '조선의 시조신을 모셔야 한다는 데에는 동감하나, 그 시조신이 꼭 단군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래서 한반도 국가들의 역대 건국자들을 합쳐 '국혼신'이란 이름으로 봉안하자는 의견을 내각에 제출했다.
당시 일본의 조선통치 관계자들에게 조선신사의 신으로 누굴 모실지는 첨예하고 중요한 정치적 문제로 부각되었다. 조선총독부는 '경성일보로 오가사와라의 주장이 알려졌지만, 조선인들은 이 문제에 관심이 없다. 오가사와라가 현지를 모르고 탁상공론을 했을 뿐'이라고 판단했다. 조선총독부는 내부 문서에서 조선인에게는 신과 신사의 관념이 없다고 설명하며[32] 조선에는 마땅히 합사할 만한 신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특히 단군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존재 자체가 의심스럽다.'고 주장하며 강하게 부정했다. 어이없는 점은 아마테라스에 대해서는 '존재하는 분이 틀림없다.'고 했다는 것. 아마테라스는 실존하는 존재로 인정하되, 단군은 비실재의 허구라고 몬 것이다. 그야말로 총독부가 이중잣대를 들이댔지만, 아마테라스도 허구의 존재라거나 단지 신화일 뿐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단군이 반일의 상징이 되었다고 보아 억지로 부정하려 했다고 보는 시선도 있다.
결국, 단군은 고사하고 국혼신마저도 봉안되지 못했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이 문제에 관해서 일본 본토 신토가들의 주장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신토가들이 신토를 명백히 '종교'로 인식하는 반면, 총독부는 '국가신토 비종교론'에 합세하여 조선신궁 등은 종교시설이 아니라 황국신민의 문화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신사참배 강요로도 이어졌다. 결국 일본 내에서도 '신토' 관련 전반 개념에 대한 철학이 종교 대 문화로서 크게 달랐던 듯.
조선신궁을 건설하느라 당시 남산에 있던 한양도성 일부가 크게 훼손되었다. 또한 터를 닦는 와중에 바위를 깨트리고자 폭약을 썼는데, 당시 경성에 살던 조선인들이 이 소리에 크게 놀랐다고 한다. 발파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랬던 듯. 또한 일본인 인부들이 임금을 올려달라며 태업하는 일도 있었다. 이해(1925) 7월부터 9월까지 한반도 전역에 을축년 대홍수가 덮치는 재해가 일어났지만, 조선신궁은 별 영향을 받지 않고 작업을 진행했다. 일본 정부는 9월 24일자 내각고시 제9호로 조선신궁의 진좌제는 같은해 10월 15일이고, 예대제 날짜는 매년 10월 17일이라고 결정했다.
조선신궁으로 개칭한 지 3개월이 지나 1925년 10월, 소노이케 사네야스(園池 実康) 장전차장(掌典次長)[33]이 칙사로서 이세 신궁으로부터 미타마시로(御靈代)[34]로 거울을, 황실로부터 메이지 천황이 패용하던 검을 받고 조선으로 건너와 13일에 경성에 도착했다. 그리고 내각이 정한 날짜에 맞추어 그달 15일, 조선신궁에서 진좌제(鎭座祭)를 거행했다.
진좌제란 신령이 내려와 미타마시로(신체)에 깃들게 하는 제사이다. 일본 신토에서는 신령의 본체가 다른 세상에 따로 있으되, 신령의 영위 일부가 우리 세상의 어떤 사물에 깃들 수 있다고 여긴다. 이렇게 신령의 일부가 깃든 사물을 신체, 또는 미타마시로라고 부르는데, 신체가 되면 인간들에게 숭앙받는 종교행위의 대상이 된다. 보통은 거울을 신체로 삼지만 다른 물건인 경우도 많고, 아예 산이나 폭포, 바위 같은 자연물이 신체인 경우도 있다. 신사 건물이 다 지어졌다고 해도 그 안에 신체가 없다면 그 건물은 알맹이 없는 빈 껍질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진좌제를 거행해서 신체에 신령이 깃들도록 해야 비로소 건물이 신령을 제사 지내는 시설, 즉 '신사(神社)'가 되는 것이다.
미타마시로를 신설되는 신사로 옮길 때에는 조용히 함이 통례인데, 조선신궁으로 미타마시로를 모셔올 때에는 거창하게 격식을 갖추었다. 자발적인 행위인지 아니면 압력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신문을 보면 '조선신궁에 봉축하는 뜻을 표하고자' 시장들이 하루 영업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는 기사가 있다.
조선총독부는 미타마시로나 메이지의 검을 불령선인들이 빼앗거나 파괴할까 봐 매우 걱정했다. ≪시대일보≫는 1925년 9월 25일자 기사로 임시정부가 조선신궁 낙성을 기회로 폭탄특공대를 들여보냈다는 내용을 실었다가 해당 일자 기사를 내보내지 못했다. 경기도 경찰부는 10월 초부터 각 경찰서장들을 모아 경계구역을 할당하고 사복경찰을 매복시켰다. 미타마시로를 모신 칙사가 경성역에 도착하는 10월 13일, 진좌제를 거행하는 15일에는 경성의 경철관 전원을 총출동시켜 경계하고, 조금만 수상해 보이는 자가 있다면 모조리 잡아들였다. 그뿐 아니라 칙사가 행렬하는 와중에 호위대를 붙였는데, 당시 행렬의 선두에 섰던 일본인은 폭탄이 날아오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조선인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조선신궁 건립에 반대하는 시위를 계획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진좌제 당일에는 군대와 학생들을 동원하여 옷을 갖춰 입고 거창하게 소노이케 일행을 맞도록 하였다. 의친왕 또한 이왕가의 대리 자격으로 행사에 참석했고, 조선 전체 관공서 및 학교는 특별휴일을 받았다.
조선신궁 제신 논란을 주도한 오가사와라 쇼조도 진좌제에 참석하여 1시간 넘게 조선인들의 반응을 관찰했다고 한다. 오가사와라는 저서 『海外の神社』(神道評論社, 1933)에서 이때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일본인도 조선인도 속속 돌계단을 오른다. 그러나 배전(拜殿)의 앞까지 가자, 일본인은 탈모(脫帽)하고 절을 하고, 조선인은 획 발길을 돌려 돌아간다. 나는 1시간 이상 배전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의 조선인도 '참배'하는 자는 없었다. 우리들의 상식으로 하면 '참배'라는 것을 예배하고 기원하는 일이다. 조선인은 '참배'하지 않고 '참관'하고 있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이것은 무슨 원인이 있는 것일까. 조선신궁은 결국 일본인만의 신궁으로 끝나는 것인가?
번역문은 참고자료 중 윤선자(2011)의 129쪽에서 2차 인용하되, 한자에 한글을 병기함.
예대제 날짜는 매년 10월 17일이었다. 그 외에도 기년제(풍년기원제)는 3월 15일, 신상제(추수감사제)는 11월 23일로 정하여 정규 대제일로 삼았다. 또한,
메이지 천황이 생전에 패용했던 검을 하사받아 보물로 간직했다.번역문은 참고자료 중 윤선자(2011)의 129쪽에서 2차 인용하되, 한자에 한글을 병기함.
조선신궁은 완공 이래 광복되는 때까지, 조선에서 실제 종교시설로 기능하는 유일한 관폐대사였다.
4.3. 창건 이후
조선신궁의 초대 궁사(宮司)[35]로는 다카마쓰 시로(高松四郎 1875-1955)가 취임했다. 그러나 총독부 관리들과 조선신궁의 신관들은 상당히 거리를 두었다. 신토를 '통치의 수단'으로 보는 관리들과 종교로 보는 신관들의 시각 차이 때문인 듯하다. 총독부 관료들 사이에선 신토비종교론[36]이 기본적인 상식이었다.다카마쓰 궁사는 재임기간 동안 신사 정책을 두고 조선총독부의 내무국장 이쿠타 기요사부로(生田淸三郞 1884-1953)와 격렬하게 대립했다.[37] 이쿠타 내무국장은 1925년 조선신궁에서 신전결혼(神前結婚)[38]을 피해야 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신토비종교론에 입각하여 조선신궁에서 종교색이 짙은 행위를 금하고 경성신사 같은 민간시설에 넘기려는 의도가 있다고 분석하는 일본 학자 또한 있다.[39] 다카마쓰 궁사는 이 정책을 극렬하게 반대하였는데, 그가 썼던 글에서 이쿠타와 당시 조선총독부 관료들이 조선신궁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한 가지 증언이 있다.
국장(이쿠타)은 신사로 사상을 선도(善導)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이고 조선신궁 창건 역시 시대착오이나, 이에 이르렀으므로 그만둘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한다. (중략) 이러한 사상은 내무국장에서 그치지 않고 고관(高官)들 대부분의 의견이다.[40] 뻘짓인 줄은 진작에 알았는데 들인 돈이 있어 못 그만뒀다.
다카마쓰 궁사는 조선총독부의 관료들에게는 신을 숭경하는 마음이 없다고 비난하였고, 신전결혼 문제에서 자기 의견을 관철하고자 직접
사이토 총독과 담판을 벌이기도 했다. 이듬해(1926)에는 조선인 아이들을 대상으로 수신서(修身書)를 제작하여 무료로 배포했다. 유료로 판매해야 하지만 손해를 감수하고 무료로 나누어주었는데, 이는 조선신궁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에서와 달리 조선신궁은 조선에선 이질적인 외래의 시설이다. 게다가 건물의 위엄을 강조하느라 산 중턱에 세웠기 때문에, 편안하게 참배하기 불편하여 조선인들은 조선신궁에 잘 오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신궁에 사람들, 특히 조선인들이 찾아오게 하려면 총독부가 도와주어야 했지만 총독부는 신궁에 무관심했다. 따라서 책을 무료로 받기 위해서라도 조선인 학생들이 신궁에 찾아오게 하려는 고육지책을 선택했다.
조선신궁의 예대제에도 총독부의 통감 등이 제대로 찾아오지 않았으므로 궁사가 항의하고 나서야 비로소 겨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1930년대 들어서는 일제가 조선인들에게도 의무적으로 신사에 참배하라는 훈령을 공포함에 따라 참배객 수가 늘어났다.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일제는 조선인들도 개인 또는 단체로 신사에 참배하라고 강요했다. 조선의 유일한 관폐대사인 조선신궁으로 당연히 그러한 인파들이 물 밀 듯 찾아왔다.
조선신궁은 남산 중턱에 기다란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등 위치나 건물이 매우 위압적이었다. 심지어 당시 경성에 사는 일본인들 중에도 조선신궁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였다.
아래는 당시 조선신궁에 참배했던 일본인의 말이다.
여학교 3학년이 되면, 매월 한 번씩, 아마 초하루였지. 학교에서 조선신궁에 참배하도록 되어 있었어. …… 높은 곳에서 위압적으로 사람을 지배하는 느낌이 들어 어쩐지 싫었어. 형식만 중요시된 것 같아 정말로 좋아지지 않았어. 하여튼 매월 가야 하는 참배는 우울했고,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갈 때마다 생각했어. 신사 경내에 들어가서는 친구들과 수다만 떨었지. 학교 성적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야. …… 참배하는 의미나 의의 같은 것은 정말로 관심이 없었어. 학교부터 나란히 줄지어 조선신궁에 가는 중에도 친구들과 이야기만 했어.
위 내용은 박진한 등 6명(2013) 220-221쪽에서 2차 인용함. 원문은 ≪母の「京城」·私のソウル≫, 澤井理惠, (草風館, 1996)[41]
물론 어떤 일본인들은 조선신궁 건축의 위압적인 면을 성(聖)과 속(俗)을 가르는 상징으로 보아 매우 좋게 여겼다. 일본인들도 개개인마다 조선신궁을 서로 다르게 받아들였다.위 내용은 박진한 등 6명(2013) 220-221쪽에서 2차 인용함. 원문은 ≪母の「京城」·私のソウル≫, 澤井理惠, (草風館, 1996)[41]
정규 제일(祭日) 이외에도 무운장구(武運長久) 기원제나 요배식, 국민대회 등 동원행사를 열곤 했다. 야스쿠니 신사에서 전사자들을 합사시키는 임시대제를 여는 날에 맞추어 조선신궁은 일본 요배식을 실시하였다. 그 외에도 조선 총독이 바뀌는 등 정치적 변동사항이 있을 때마다 봉고제(奉告祭)[42]를 열었다. 무운장구 기원제는 이름대로 일본군의 승리를 기원하는 의례지만, 정치적으로는 조선인과 일본인들에게 국가에 충성하라고 강요하는 의미가 있었다. 패전의 기색이 짙어질수록 사람들이 동요하기 쉬우므로 무운장구 기원제 또한 더욱 잦아졌다. 무운장구 기원제는 일본 신사들이라면 다 하던 것이지만, 조선신궁은 조선의 신사 전체를 대표하므로, 조선신궁에서 행하는 의례는 고위층이 참여하는 등 관제 동원행사적인 면이 더욱 강했다.
조선신궁을 포함하여 광복 직전 조선에는 신사/신시가 얼마나 있었는지는 자료마다 조금씩 말이 다르다. 그러나 < 신사본청교학연구소기요(神社本廳教學研究所紀要)> 제3호(1998년 2월)에 실린 사토 고키(佐藤弘毅)의 "資料紹介 戦前の海外神社一覧(2)朝鮮・関東州・満州国・中華民国"에 따르면 조선에 신사는 ( 부여신궁을 포함하여) 82군데, 신시 967군데, 총 1049군데가 있었다.[43] 신사들 중 아무런 격을 받지 못한 무격사는 37군데였다.
1937년에는 조선신궁 진좌제 10주년을 기념하여 조선신궁봉찬회(朝鮮神宮奉贊會編) 명의로 ≪은뢰(恩賴)≫라는 사진집을 발간하였다. 조선신궁 진좌제 10주년이 되는 해는 1935년이지만 1-2년 차이는 적당히 넘긴 듯. '은뢰(恩賴)'라는 단어는 중국 고서에서 '은뢰(恩賚)'라고 써서 '임금이 내린 은혜, 또는 그렇게 은혜로이 하사한 물품'을 가리켰다. 일본어에서는 줄 뢰(賚) 자와 의뢰할 뢰(賴) 자를 혼용하여 恩賚, 또는 恩賴라고 쓰고 온라이(おんらい), 혹은 미타마노후유(みたまのふゆ)라고 읽어서 '천황이나 신령이 베푸는 은덕'이란 의미로 사용한다.
사진집 ≪은뢰≫는 조선신궁의 모습과 변화한 경성의 모습을 찍어 책자로 만들었다. '은뢰'라는 제목은 메이지 이래의 천황과 신령들이 조선에 '은혜'를 베푼 모습을 기록했다는 의도를 드러낸다. 2015년에는 전통문화연구소에서 소명출판을 통해 전문가 해제를 덧붙인 복각판 200부를 ≪은뢰(恩賴): 조선신궁(朝鮮神宮)에서 바라본 식민지 조선의 풍경≫이란 제목으로 발행하였다. 조선일보 기사
4.4. 광복 이후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을 투하하고 소련이 선전포고하자 일본 정부는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발표, 한반도 또한 일본 제국으로부터 사실상 광복을 맞이하였다.광복 다음날 16일, 당시 조선신궁의 궁사 누카가 히로나오는 권궁사[44] 다케시마 요시오(竹島榮雄), 경성신사의 궁사와 함께 총독부 지방과장 혼다 다케오(本多武夫)와 협의하여 한반도의 각 신사·신궁들은 저마다 신령을 돌려보내는 '승신식(昇神式)[45]을 거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또한 신령을 돌려보내고 남은 신체(미타마시로)는 일본으로 가지고 가서 반납하거나 깨끗한 곳에 묻거나, 또는 바다에 던져 한국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처분하라고 일일이 전화를 걸어 지침을 알렸다. 각 신사의 신체와 거기 깃든 신령이 한국인의 보복 대상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실제로 평양신사는 해방 직후인 8월 15일 밤에 평양 사람들이 태워버렸다. 그러니 차라리 신령을 일본인들의 손으로 경건하게 돌려보내고 처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나마 총독부의 행정력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서울의 조선신궁을 제외하고, 전국의 신사들 중에서 이런 지시를 잘 전파받고 시행한 시설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조선신궁의 지시에 따라 경성신사·인천신사· 대구신사 등 경성과 지방 주요도시의 신사 일부는 저마다 승신식을 거행했지만, 당시 한반도에 있는 모든 신사들 중 승신식을 거행할 여유가 있던 곳이 얼마나 되는지, 만약 거행했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승신식 절차를 진행했는지는 기록으로 남은 바가 거의 없다. 서울을 제외한 한반도 각지의 신사들은 아주 신속하게 부서지고 없어졌다. 특히 총독부의 행정력이 크게 약화되거나 아예 소멸한 농촌 지역 일부와 38선 이북 전체 신사들은 승신식을 하거나 자진해체를 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부여에서 한창 공사 중이던 부여신궁은 진좌식을 하지 않았으므로 승신식 없이 바로 해체되었다. 현 부산 용두산공원 자리에 있던 용두산신사는 광복 후 일본인들이 조선신궁으로부터 연락을 받고는 재빨리 승신식을 거행하고 신체를 바다 속에 던졌으며 본전 건물을 해체했으나, 남은 건물들은 광복 후 일본으로 귀환하려는 조선 잔류 일본인들의 거점 역할을 하면서 예외적으로 몇 달 더 존속했다. 그러나 11월 17일, 일제강점기 시절 신사참배 강요에 앙심을 품은 장로회 신학생이자 집사인 민영석(閔泳石, 1909~2011)이 방화하여[46] 결국 전소되었다.[47] 관련 링크
그나마 서울에서는 아직 행정력이 유지되었으므로 누카가 궁사는 자신이 뜻한 대로 조선신궁 해체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승신식 결정을 내린 당일(1945년 8월 16일) 먼저 승신식을 거행하고, (신궁이 보물로 간직했던) 하사품 '메이지 천황의 검'은 육군대위 센고쿠 마사후미(仙石正文)에게 맡겨서 밤에 비행기로 일본으로 돌려보내 황실에 반납했다. 24일에는 조선신궁에서 경배의 대상이었던 미타마시로를 비행기에 실어 궁내성(宮内省)으로 반납했다. 다른 보물, 제문(祭文), 도구 등은 19일 밤부터 25일 밤 사이에 모두 불태웠고 9월 7일부터는 일본인들 손으로 건물을 해체했다.
해체 도중에 미 군정이 작업중지를 명령했지만, 군정장관을 설득하여 동의를 얻고는 작업을 진행하여 10월 6일에 신사의 시설들을 철거하고 7일엔 남은 시설을 소각함으로써 끝을 맺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모든 시설을 남김없이 철거하진 않아서 1952년에 찍은 사진에 아직도 건물 상당수가 남아있다. 아마도 일본인들은 신전과 배전 등 신령과 직접 관련이 있는 건물만 없애고 나머지 부속시설들은 그냥 내버려둔 듯하다.
1948년 1월 조선신궁 참배로 계단에 눈을 깔아 스키장으로 사용한 장면을 찍은 사진. | 1952년 조선신궁 터. 이때까지만 해도 상당수 건물이 남아있었다. 우측 멀리 서울역이 보인다.[48] |
이후로 구 조선신궁 터에 거창하게 들어선 이승만 동상 또한 철거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경향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서울시는 당시 내무부의 지시를 받아[49] 8월 20일부터 준비작업에 들어가서 22일부터 본격적으로 철거를 시작하여 30일에 완료하였다.
1960년 8월 17일부터 31일까지 경향신문과 조선일보의 보도를 따라가면서 철거 작업의 구체적인 일정을 확인하기가 힘들다. 내무부와 서울시가 철거 여부와 구체적인 방법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언론에 보도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혼란이 있었던 모양이다. 언제는 8월 18일(또는 17일)에 철거한다고 하다가 하루를 연기하고 또 연기하였다. 동상 철거작업용 비계를 설치하기 시작한 것과 실제 철거 시작을 따로 보도한 듯한데, 아마도 20일부터 비계를 설치하고 22일부터 동상 철거를 시작했을 것이다. 철거를 시작한 직후의 보도에서는 25일까지 작업을 완료한다고 했지만, 예상보다 어려웠는지 30일에 최종완료가 되었다고 한다.
언론보도에서는 내무부가 지시했다고 했지만, 당시 허정 과도정부가 결정하고 장면 내각이 재확인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60년 8월 19일에 허정 과도정부가 끝나고 장면 내각이 출범했는데, 이 때문에 내무부와 서울시는 새 정권이 들어서면 그때 경무대( 청와대)의 뜻을 확인하고자 이승만 동상 철거 시작을 하루 또 하루 연기하며 간을 보았던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장면 내각이 출범하고 그 이튿날(8월 20일)부터 비로소 제대로 철거작업을 시작하였다. 이승만 동상이 철거되자 그 자리에 단군상 또는 4.19 의거 기념탑을 세우자 하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이런 역사적 격동과 논란으로 국회의사당 건축도 혼란에 빠진 차에 1961년 5·16 군사정변 때문에 완전히 중지되었다. 오늘날 이 자리의 지형이 조선신궁 시절과 크게 달라진 이유가 국회의사당을 짓는다고 땅을 다지는 과정에서 산 자락을 많이 잘라서이다.
1968년에는 조선신궁의 본전 터에 남산식물원을 열었다. 1970년에는 남는 본전 터에 남산 어린이회관,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차례로 개관했다. 어린이회관이 이용자에 비해 너무 비좁았는지 1974년에 해당 건물을 국립중앙도서관이 사용하기로 하고 어린이회관은 현 위치로 이전했다. 1988년에는 국립중앙도서관 역시 서초동으로 이전하고 건물에는 서울시 교육연구정보원이 들어와 지금까지 사용한다.
이 건물 양옆에는 꽤 낡아 보이는 계단들이 있는데, 조선신궁의 정식 참배 계단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 중 하나가 2005년 MBC 수목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 나와서 유명해졌기에 '삼순이 계단'이란 별명이 붙었다. 이곳은 조선신궁의 높은 옹벽과 신궁의 상광장으로만 출입이 가능한 부속건물이 있던 터라 오르락내리락할 수 없던 곳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이승만 정권 시절 국회의사당을 짓는다고 지반을 닦고자 신궁의 잔재들을 허물고 깎는 대공사를 했는데, 이 와중에 철거한 정식 참배로의 계단 자재를 재활용해서 이승만, 윤보선 혹은 박정희 정권 때에 만든 계단인 듯하다. 계단 자재가 매우 낡은 석판이라 오래전 조선신궁의 계단으로 착각할 만하다.
일제가 남산 전체를 공원으로 삼으려고 하면서, 광복 이전부터 흔히 남산 일대를 '남산공원'이라 부른 듯하다.[50] 한양공원과 왜성대공원을 포함하여 남산공원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2014년에는 한양도성 발굴작업 중에 조선신궁의 배전 터와 이승만 동상이 있던 자리가 발견되었다.( #)
2013년부터 시작한 분수대 근처의 한양도성유적 발굴작업을 완료하여 2020년 11월에는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을 개관하였다. 발굴하던 와중에 옛 조선신궁 시절 신전 터의 뒤쪽 옹벽에서 1941년 일제가 전쟁에 대비하는 일환으로 만들었던 방공호를 발견했으므로, 한양도성 유적과 함께 방공호 입구를 구경할 수 있게 하였다. 안전문제로 방공호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철창을 설치했다. 조선신궁 배전 자리의 콘크리트 기초도 볼 수 있게 했는데, 기둥들이 있던 흔적이 뚜렷하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아래쪽에는 백범광장이 조성되어 자연적 지형을 제외하면, 당시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의 분수대에서 안중근 의사 기념관, 주차장, 교육연구정보원으로 내려오는 길, 혹은 반대로 올라갈 경우 오르막길 우측에 있는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입구 부근 축대가 조선신궁에 쓰였던 것이라고 한다.
한때 국내 사이트에 '조선신궁에서 삼종신기를 전시했다가 패전 이후 일본으로 되돌려 보냈다'는 주장이 퍼졌지만 사실이 아니다. 위에서 설명했듯 조선신궁은 메이지 천황이 패용하던 검을 하사받아 보물로 간직했다가 패전 이후 황실에 반납했는데 이것이 와전된 듯하다. 조선신궁이 메이지 천황을 '신'으로 모시니 메이지 천황의 검을 '신기'라고 불렀을지도 모르지만, 삼종신기는 결코 아니다. 미타마시로로 쓰던 거울도 나중에 따로 반납했기 때문에 '삼종신기'라고 더 쉽게 왜곡되었을 수 있다.
신토에서 참배자들의 경배대상이 되는 신체(미타마시로)는 본전을 수리하거나 마쓰리를 여는 등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옮기지 않고, 설령 조그만 동네 신사의 신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가린다. 동네 신사의 신체도 옮기거나 사람이 보지 못하게 하는 마당에 천황가의 상징인 삼종신기를 식민지 조선으로 보낼 리가 없거니와 대중에게 전시할 리는 더더욱 만무하다. '전시'란 결국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삼는 것이므로 해당 사물의 신성성을 부정하는 행위이다.[51] 정말로 삼종신기를 조선으로 보내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사회적 논란이 되기에 충분한데, 심지어 '전시'까지 한다?
여기서 참고할 수 있는 사건이 하나 있다.
일본의 초대 문부대신 모리 아리노리(森 有礼, 1847-1889)는 급진적인 개화론자로 신토계와 갈등을 빚다가 한 가지 음해를 당했다. 그는 1887년 신토의 예법을 지키며 이세 신궁의 외궁을 참배했는데, 신문에는 이세 신궁의 내궁을 참배한 아무개 대신이 신발을 신은 채로 배전에 올라가 안에 드리운 발을 지팡이로 젖혀서 안을 들여다 보는 무례를 저질렀노라 보도되었다. 신문에서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당시 신문을 읽던 일본의 독자들은 다들 모리라 생각했고, 이 일로 우익들에게 찍혔다. 그는 1889년 2월 대일본제국 헌법 반포식에 문부대신 자격으로 참석하러 관저를 나섰다가 극우청년에게 칼을 맞아 이튿날 사망했다.
생각해보자. 초대 문부대신이 신발을 신고 배전에 올라가 안을 엿보았다는 음해 때문에 칼에 찔려 죽었다. 그런데 삼종신기를 조선으로 옮겨 대중에게 전시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삼종신기를 조선신궁에서 전시 운운은 일본의 종교적 관습과 관념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지어낸 소리이다.
일본인 관광객들이 한국의 남산공원에 올 경우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순수하게 해외여행을 하는 차원에서 남산공원 구경을 하지만,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신토 성지순례 차원에서 조선신궁 터를 둘러보기 위해 오기도 한다. 이는 신사 터가 있는 일본 본토 밖의 구 일본 제국령 지역들의 관광지가 모두 해당하는 일이다. 한국인들의 경우 대만일치시기에 별 감정이 없는 대만 사람과 달리, 일본인들의 답사가 일제강점기를 추억하는 행위로 비칠 수도 있으므로 평범한 양식 있는 일본인 관광객들은 방문할 때도 가이드에게 설명을 들어서 행동을 조심하는 편이다.[52] 사실 신사 건물이 남은 것도 아니고, 신사 터라는 사실조차 역사의 격동을 거치며 많이 풍화되었으므로 아주 대놓고 티를 내지 않는 한 뭐라 할 한국인도 없다.
4.5. 역대 조선신궁 궁사
대수 | 이름/생몰년 | 재임기간 | 행적 |
초대 |
다카마쓰 시로 高松四郎 1875-1958 |
1925-1931 | 1875년 현재의 후쿠시마현 시라카와시에서 사무라이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신궁 궁사에서 물러나 진무 천황을 모시는 가시하라 신궁(橿原神宮)의 궁사로 취임하였고 이후 신사본청 창설에도 참여했다. 삿포로 신사(현 홋카이도 신궁) 궁사, 오사카 스미요시 대사(住吉大社)의 명예 궁사 등을 역임하다가 1958년 향년 82세로 사망함. |
제2대 |
야치와 야스히코 阿知和安彦 1873?-?[53] |
1931-1940 | 닛코 도쇼 궁(日光東照宮)[54] 궁사, 황전강구소(皇典講究所)[55] 소장 등을 역임했다. 조선신궁 궁사 시절에는 '조선인교화사업'을 진행했다. |
제3대 |
누카가 히로나오 額賀大直 1877-1961 |
1940-1945 | '신사神社의 3필'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뛰어난 서예가이기도 했다. 조선신궁 승신식과 해체를 진행한 뒤 일본으로 돌아갔고, 신사본청에 참여하여 원로가 되었다. |
5. 주요 참고 자료
- 제목을 〈〉로 묶은 것은 논문, 《》로 묶은 것은 단행본임.
- 〈'조선신궁' 설립을 둘러싼 논쟁의 검토〉, 김철수,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제27집(2010), 155-191쪽
- 〈스사노오 신화해석의 문제: 한반도와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박규태, 종교와 문화 19호(2010), 29-64쪽
- 〈일제의 神社 설립과 조선인의 神社 인식〉, 윤선자, 역사학연구 42권 42호(2011), 107-140쪽
-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근대도시 형성》, 박진한 등 6명, 인천대학교 일본문화연구소, (심산출판사 2013)
- 〈일제의 식민지 지배전략과 神社〉, 박경수, 일본어문학 제72호(2016) 501-522쪽
- 〈日帝下 서울 南山 地域의 日本 神道・佛敎 施設 運營과 儀禮 硏究〉, 비온티노 유리안(BIONTINO Juljan), 서울대학교 교육학박사학위논문(2016)
- 〈식민지 조선의 국폐소사(國幣小社)에 관한 일고찰- 국폐소사의 운영 및 제의 양상을 중심으로〉, 문혜진, 로컬리티 인문학 15(2016), 159-193쪽
- 《國體神祇辞典》, 小倉鏗爾, (錦正社 1940)
- 〈敗戦直後の海外神社 ─朝鮮の神社を例に─〉 山口公一, アジア学科年報 巻8(2014), 43-51쪽
[1]
천황에게 칙명을 받아 임명하는 관직. 군대에서는 장군이 되어야 칙임관이었다. 이보다 더 높은 친임관(親任官: 천황이 친히 임명하는 관직)은 총리나 각 성(省)의 대신(大臣), 군 장성 중에서도 대장(大將)은 되어야 했다.
[2]
원래 일본 신토에서 진수(鎮守)는 어떤 지역을 개발하거나 복속하며 그 지역의 기존 신령을 제압하고자 외부에서 힘 있는 다른 신령을 모셔온다는 개념이었다. 토착신령이 훼방을 놓거나 재앙을 내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중에는 이런 개념이 흐려져 단순히 해당 지역의 수호신과 비슷하게 되었다.
[3]
지난 세월 많이 공사하여 일제강점기의 지형에서 바뀐 부분이 많은 지역이지만, 도동삼거리로 올라가는 초입부에 조선신궁 참배로로 조성한 오리지널 일본 신사식 난간이 극히 일부가 남았다. 6.25 때 생겼는지 여부는 모르나 총탄의 흔적이 많다.
[4]
도동삼거리가 '관폐대사 조선신궁'이라고 새긴 표지석이 있던 하광장이었다.
[5]
이 지역이 전부
남산공원의 일부이기 때문에, 조선신궁의 위치를 현 남산공원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6]
일본에서 신사는 전통적으로 진쟈(神社, じんじゃ)라고 읽기 때문.
[7]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 일대
[8]
본래는 꿈비라(Kumbhīra)라고 하는데,
인도의 라즈기르(왕사성) 외곽 웨뿔라(Vepula)산에 사는
야차로 휘하에 야차 10만을 거느리며,
갠지스의 여신 강가(Ganga)의 탈것 노릇을 한다고 한다. 본디 갠지스 강에 사는 악어를 신격화한 것이다. 한문 불경에서 음역하여 금비라(金毘羅)·금비로(金鞞盧)·궁비라(宮毘羅) 등으로 번역했다. 일본에선
가가와현에 있는 고토히라산(琴平山) 숭배와 습합되어 고토히라산을 곤피라산(金毘羅山)이라고도 부르고, 반대로 신 역시 고토히라, 혹은 곤피라(金毘羅)라고 불렀다. 에도시대까지는
부동명왕이나
비사문천 등이 고토히라 신의 형상으로 나타났다고 믿었고, 상인들이나 조운업자들은 (꿈비라가 강가 여신의 탈것이란 점에서) 고토히라·곤피라를 항해의 안전을 지켜주는 신으로 숭앙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신불분리가 되자 또다른 산신 오모노누시(大物主)와 동일시했다.
[9]
나중에는 개척3신을 합사했다. 개척3신에 대해서는 아래 항목 참조.
[10]
在조선 일본인들은 '대신궁' 같은 거창한 이름으로 신사나 신시를 세웠다가, 나중에 조선총독부로부터 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평이한(또는 분수에 맞는) 명칭으로 바꾸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개칭한 해가 1913년이라고 설명한 우리말 자료도 있지만, 일본 자료와 비교하면 1916년이 정확한 듯하다.
[11]
경성신사가
아마테라스를 모시거니와
통감관저에서 엎어지면 코 닿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2]
지금은 그 자리에 경성신사가 있던 곳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13]
제대로 신사를 유지할 만한 여건이 안 되는 곳에 설치한 간이시설을 말한다. 조선총독부는 신시를 설치하려면 신자가 될 사람 10명이 이름을 제출하여 허가를 받도록 했다.
[14]
이세 신궁식 신사건축양식을 신메이즈쿠리(神明造)라고 부를 정도. 오늘날 일본에서 '신메이 신사(神明神社)'라는 단어는 아마테라스를 모시는 신사들을 통칭하는 의미로도 쓰인다.
[15]
1898년에 조직되어 일본의 관국폐사(官國幣社) 신관 1만 5천여 명이 소속되었던 단체이다. 형식상 민간조직이었으나 사실상 국영이었다. 1941년 대일본신기회(大日本神祇會)로 개칭했지만, 일본이 패전한 후 1946년에 해체되어
신사본청으로 흡수되었다.
[16]
神道家. 신토의 신관들이나 사상가 등을 통틀어 부르는 말로 씀.
[17]
일본 신토에서 각 지역의 기존 신격들을 통칭해 부르는 호칭이다. 신토의 교학(?)에 따르면, 천손의 자손(천황)이 새로운 지역을 통치하면 그 지역의 신이 나와 지역을 천황에게 바치고 자기는 제사를 받는다고 한다.
고사기·
일본서기에 나온 국토이양 신화에서 나온 개념이다.
[18]
이나바의 흰토끼 항목에 나온, 흰토끼를 낫게 해준 바로 그 신이다.
[19]
일본신화에 등장하는, 몸집이 손가락만 하다는 신. 곡식의 신이기도 하다.
[20]
오늘날
홋카이도
삿포로시
주오구에 있다. 1964년에
메이지 천황을 합사하며 이름을 삿포로 신사에서
홋카이도 신궁(北海道神宮)으로 바꾸었다.
[21]
'이소타케루'라고 읽기도 한다. 임업(林業), 조선(造船), 항해를 수호하고 역병을 물리쳐주는 신령이라고 한다.
고사기에 등장하는 오야비코(大屋毘古) 신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22]
보통은 소시모리를
서라벌과 연관지어
경주로 이해한다. 하지만 소시모리를 '소(牛)의 머리'란 뜻으로 생각하여 우두봉(牛頭峯)이란 산에 내려왔다고 보는 설도 있다. 특히 강원도
춘천의 우두봉이 바로 소시모리란 소리가 있어, 일본인들이 춘천 우두봉 근처에 있는
강원신사에 스사노오를 합사했다.
[23]
물론 이에 반발한 한국 불교 인사들도 있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대표적이다.
[24]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8대 교구장
[25]
무단통치기에
제암리 학살사건의 참상을 알린 주역 중에 장로교 선교사
스코필드가 있었다.
[26]
상서롭지 못하고 더럽다는 뜻.
[27]
상기한 바와 같이 전통적인 무속 신앙에서 남산은 꽤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북한산/북악산은 산신령이 나라의 국운을 지키는 역할을 맡기 때문에 실제 백성들의 삶은 남산의 산신령이 지킨다고 여겼다. 그래서 북한산에 의외로 잡귀가 많다고 한다. 산신령이 자잘한 것에 신경을 안 쓰니까 후술하는 바와 같이 남산에는 국사당이 있어 무속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28]
당시 일본에서는 일본이 조선을 '문명화한다.'고 주장했다. 무력으로 한반도를 정벌했다는
진구 황후 등을 제신으로 모심은 이런 프로파간다에 맞지 않는다고 여겨 꺼렸을 가능성이 크다.
[29]
한국인 입장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전향적인 발상이지만 그렇게 특이한 사례까지는 아니다.
국가신토보다 조선에 일찍 들어온
천주교·
개신교도
한복을 입은 동양인
예수나
성경 번역 같이 (교리와 정면충돌하지 않는다면) 꽤 적극적으로 현지화를 했다.
[30]
당시 남산의 한양공원, 현재의 백범광장 일대였다.
[31]
아마테라스와 천황을 제사지내는 신사는
신궁이라고 칭한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32]
조선의 민간신앙과 사당들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조선에 신과 신사의 관념이 없다.'는 주장은 이상하다 못해 해괴하게 들린다. 당시 조선에 온 서양인
선교사들은
유교는
종교가 아닌
철학이고,
불교는
숭유억불로 약해졌으며, 민간신앙은 종교도 못 되는 것이라고 보아 '조선에는 종교가 없다.'고 주장했다. 어쩌면 조선총독부도 똑같이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하술하겠지만 총독부는 일본 본토의 신토가들과 달리 신토를 종교로서 생각한 게 아니라 단순히 일본 고유의 문화라고 보았기에 나온 반응일 가능성도 있겠다.
[33]
장전(掌典)을 일본어론 쇼텐(しょうてん)이라 읽는데, 천황가의 제사 관련 직무를 맡는 궁내부의 부서명이다. 원래 '장전'이란 한자어는 '맡아서 관리한다, 주관한다.'는 뜻이다. 일본에선 이 단어를 '(제례를) 관리한다.'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다.
[34]
일본 신토에서 신령이 깃드는 물건을 가리킨다. 여기에 신령이 깃들어야 비로소 신사에 봉안되어 사람에게 경배받을 수 있다. 신타이(神體, 신체)라고도 부른다. 거울은 미타마시로로 일본 신사에서 가장 널리 사용하는 물품이다.
[35]
일본어로는 '구지'라고 읽는데 각 신사의 최고 책임자이다. 절이라면 주지 스님 격.
[36]
신토는 일본의 문화일 뿐 종교가 아니라는 입장. 일제강점기 일본 정부의 기본적인 시각이었고, 현대 일본인들의 신토관에도 짙게 영향을 주었다.
[37]
식민지 조선에서 신사 등 종교를 관할하던 곳이
조선총독부의 내무국이었다. 이쿠타는 1925년부터 29년까지 내무국장으로 재임한 뒤 퇴직했다.
[38]
신사에서 올리는 결혼식. 신전결혼은 서구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신과 교회의 이름으로 결혼하는 모습을 보고 일본에서 따라한 것으로, 신전결혼을 올린 첫 번째 사람이
다이쇼 천황이었다.
[39]
〈朝鮮神宮と学校 : 勧学祭を中心に〉, 樋浦郷子, 日本の教育史学 49巻(2006), 112쪽
[40]
이 부분의 원 출처는 오가사와라 쇼조(小笠原省三)가 편찬한 『海外神社史・上巻』(海外神社史編纂会, 1953)에 실린 「高松朝鮮神宮々司が某氏に寄せたる書翰」(다카마쓰 조선신궁 궁사가 모씨에게 보낸 서한)이란 부분이다.
[41]
한국에는 ≪엄마의 게이죠, 나의 서울≫이란 이름으로 2000년에 신서원에서 번역, 출판했다.
[42]
신령에게 어떤 일을 알리는 제사. 한국의 유교예법에선 신령에게 알리는 제사를 고유제(告由祭)라고 불렀다. 봉고제는 주로 일본에서 쓰이는 표현이다.
[43]
신시의 숫자를 다르게 설명하는 자료도 있다. 신사에 비하면 신시는 잘 관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료에 따라 신시의 숫자가 다른 듯하다.
[44]
権宮司. 일본어로는 '곤구지'라고 읽는다. 일부 큰 신사나 신궁에만 있는 직책으로, 해당 신사의 2인자로서 궁사를 보조한다.
[45]
신령을 하늘로 올려보내는 의식이란 뜻이다. 앞서 말했듯 일본 신토에서는 신령의 본체가 따로 있고, 각 신사에서 모시는 신체나 부적 등에 진좌제를 통해 그 영위의 일부가 강림한다고 여긴다. 승신식은 여러 이유로 폐쇄하게 된 신사가 모신 신체에 강림한 영위를 본체로 돌려보내는 의례이다.
[46]
방화범이 누구인지는 오랫동안 오리무중이었지만, 민영석이 목사가 되고도 수십 년이 지나 2006년 부산경남교회사연구회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47]
이때 마침 바닷바람이 불어 불길이 크게 일어났는데, 당시 부산 사람들이 그 불길을 보고는 '조선 사람들의 억지 절까지 받아먹더니 참 잘도 타는구나.' 생각했다는 일화가 있다.
[48]
미8군 철도수송단에서 근무한 듀이 맥린 박사가 찍은 조선신궁의 모습을 컬러복원.
[49]
경향신문 1960년 8월 19일자 제3판 3면의 기사 "지난 13일
내무부로부터 철거에 관한 지시를 받은 이후 만 1주일 만에 철거작업에 철수하는 것이데" (맞춤법 수정), 경향신문 같은 달 21일자 제3판 4면 기사 "...동상은 없애기로 한
내무부에서는 서울시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하여 이미 20일부터 그 일에 손대기 시작했다." (맞춤법 수정)
[50]
예를 들어 1936년 5월 26일자 동아일보에 남산공원에서 청년 두 명이 자살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또한 1940년 3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남산공원 왜성대정'이란 표현이 나온다. 남산공원이 왜성대보다 더 넓은 개념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51]
비슷한 이유로 한국에서도 불상이나 조선 말기의 천주교 성상을 종교적 유물로 박물관에 전시하는 행위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52]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만주족 관광객들이
삼전도비 답사나
남한산성 답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해당 장소들에서 처신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병자호란 당시를 추억하는 행위로 비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화민국 국적 만주족은 머나먼 타이완섬에서
한족에게 진작에 동화되었기 때문에 병자호란에 관심이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삼전도비는 말할 것도 없고.
[53]
몇몇 일본 인터넷에서 1873년생이라고 설명하기는 하는데 믿을 만한 자료가 없다.
[54]
1617년 창건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신으로 모신 신사. 도쿠가와의 무덤도 신사 경내에 있다.
[55]
1882년 일본이 설립한 국립신토학교(?)쯤 되는 기관. 정식 신쇼쿠(신토의 성직자)가 되려면 여기서 교육과정을 이수해야 했다. 일본어에서는 강구(講究)란 단어를 우리말과는 달리 '연구'란 뜻으로 사용하므로 '황전강구소'란 명칭은 '황전연구소'라고 생각하면 적절하다. 황전강구소는 패전 이후 해체되어
신사본청에 흡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