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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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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초창기(1872~1930)3. 비공식 챔피언(1930~1939)4.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공백기)5. 유럽 최강팀(1945~1950)6. 잔혹사(1950~1966)
6.1.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6.2. 1950 월드컵 이후~1954 월드컵 이전6.3.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6.4. 1954 월드컵 이후~1958 월드컵 이전6.5.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6.6. 1958 월드컵 이후~1962 월드컵 이전6.7. 1962 FIFA 월드컵 칠레6.8. 1962년 월드컵 이후~1966년 월드컵 이전
7. 최전성기(1966~1970)
7.1.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7.2. 1966 월드컵 이후~유로 1968 이전7.3. UEFA 유로 19687.4. 유로 1968 이후~1970 월드컵 이전7.5.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
8. 잃어버린 시대(1970~1980)9. 부흥기와 암흑기(1980~1996)10. 이름값 못하는 세대(1996~2016)11. 재도약(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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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 문서이다.

잉글랜드 축구 역사, 국가대표팀의 매 경기 기록, 그리고 선수들의 스탯까지 쉽게 볼 수 있는 사이트(www.englandstats.com)

2. 초창기(1872~1930)

1872년 11월 30일, 스코틀랜드 파틱에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경기가 열렸다. 이 경기에서 양 팀은 0-0 무승부를 거두었으며, 이 경기는 세계 최초의 A매치라는 기념비적인 의미를 갖는 경기이다.

1884년부터는 영국 4개국 내에서 최강의 국가대표팀을 가리는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을 개최하였고, 초대 대회에서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 이은 2위를 기록했다.

1908년 4월 94번째 A매치까지는 영국 내에서만, 즉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 국가대표팀과의 경기만 진행했다.

그러다가 1908년 6월부터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이 유럽 투어를 다니기 시작했다. 잉글랜드와 맞붙은 첫 대륙 국가대표팀은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었다.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는 1-6으로 손쉬운 승리를 따냈다. 대륙과 영국의 실력 차가 굉장히 컸던 시절이라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이 시기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주축 선수로는 비비안 우드워드와 밥 크롬튼 등이 있다. 잉글랜드 대표팀은 헝가리 보헤미아에 가서도 경기를 진행했고, 당연히 모든 경기에서 압승했다.

비슷한 시기, 남미에도 축구가 전파되었고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를 중심으로 남미 내에서 국가 간 친선 경기를 갖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영연방 팀들과는 경기하지 못했다.

이 시기 잉글랜드는 대륙 팀 상대로는 천하무적의 강팀이었으나 영국 내에서는 꽤나 고전했다. 스코틀랜드가 워낙 막강했기 때문이다. 초창기 홈챔피언십 결과를 보면 스코틀랜드의 성적이 굉장히 좋은데, 그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10년대까지는 서로 용호상박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1920년대에는 스코틀랜드가 우위를 점하게 된다. 휴이 갤러처와 앨런 모튼이라는 특급 스타플레이어를 앞세운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보다 상대적으로 우세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홈챔피언십에서는 스코틀랜드에 밀린 2인자 신세가 되었지만, 대륙 투어와 대륙 팀 초청 경기에서는 잉글랜드도 지는 법이 없었다. 1920년대에도 꾸준했다. 프랑스, 벨기에, 스웨덴, 룩셈부르크 등 여러 대륙 국가와 홈 원정 가리지 않고 친선전을 진행했는데, 1923년 11월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 치른 원정 경기에서 2-2로 비긴 것을 제외하면 대륙 팀들과의 경기에서는 전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축구계는 특출난 스타플레이어를 배출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에버튼의 딕시 딘, 미들스브러의 조지 캠셀 등 뛰어난 공격수들은 있었으나 스타 수비수가 없었다. 이런 흐름이 이어지다 보니 1928년 홈 챔피언십에서는 자신들의 홈인 웸블리에서 스코틀랜드에게 1-5로 대파당하는 굴욕을 맛보았으며, 알렉스 제임스와 앨런 모튼을 비롯한 그 스코틀랜드 선수들이 이 경기를 통해 '웸블리의 마법사들'이라는 별명을 얻어 가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더해 1929년에는 마드리드에서 스페인을 상대했는데, 리카르도 사모라가 지키는 골문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며 3점밖에(?) 득점하지 못했고, 4골을 내주며 대륙 팀 상대로 역대 최초의 패배를 기록했다. 스코틀랜드와 스페인 때문에 자존심을 구긴 잉글랜드에게 유일한 위안거리로 남은 것은 아직 웸블리에서 대륙 팀 상대로 패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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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올림픽에서 우승한 영국 아마추어 대표팀
참고로, 초창기 잉글랜드는 원래 영국의 이름으로 하계 올림픽 축구 종목에 참가했었다. 1900년, 1908년, 1912년까지 참가하는 대회마다 전부 우승을 거두며 금메달을 차지했을 정도로 강했다(1904년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첫 올림픽이었던 1920년 올림픽에서 분쟁 당사국(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동맹국 불가리아, 터키)은 초청받지 못했다. 좀 더 강한 처벌을 원했던 FA는 FIFA측에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축구 연맹을 아예 FIFA에서 강제 탈퇴시키라고 요구했지만 FIFA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에 열받은 FA는 FIFA에서 탈퇴해 버렸다. FIFA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목의 올림픽 출전국들이 축구 대회에 출전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해 영국 축구대표팀의 참가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1920년 올림픽부터는 상대팀들이 각성했는지 첫 상대였던 덴마크에게 3-1로 패배하며 일찍 떨어졌다. 물론 영국이 출전시킨 선수들이 모두 '아마추어' 선수였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영국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팀은 1924년과 1928년 대회에는 또 불참했다.

3. 비공식 챔피언(1930~1939)

1930년 베를린에서 열린 독일과의 경기에서는 잉글랜드 하프백 빌리 마스덴이 부상으로 아웃되어 후반전부터 10:11인 상태로 경기를 진행했는데도 3-3 무승부를 거두었다. 아무튼 이 경기는 잉글랜드가 대륙 팀을 상대로 A매치에서 지거나 비긴 세 번째 사례였다.

1930년대 들어서 잉글랜드에는 뛰어난 선수들이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클럽 축구계에서도 거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데, 아스널 FC 허버트 채프먼 감독이 그 주인공이었다. 당시 널리 쓰이던 2-3-5 포메이션은 수비수의 수가 적고 미드필더들의 수도 적어 안정적인 경기 운영을 하기가 어려웠는데, 채프먼 감독은 여기에서 2-3-5의 3에 해당하는 하프백들 중 중앙에 위치한 '센터 하프'를 중앙으로 내리고, 공격수 다섯 명 중 2번째, 4번째에 위치한 '인사이드 포워드'를 미드필더처럼 뛰게 하는 대수술을 진행했다. 이 전술은 잉글랜드 축구계를 아예 씹어먹어 버렸고, 세계 각지에서도 이 전술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WM 포메이션이다.

잉글랜드에서는 그 돌풍의 팀 아스널의 주축 공격수였던 클리프 바스틴을 비롯하여 맨시티의 에릭 브룩, 더비 카운티의 새미 크룩스 등 스코틀랜드의 과거 스타들에 견줄 만한 스타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으며, 장군 같은 리더십과 덩치를 가진 레프트 풀백 에디 햅굿도 이 시기에 국가대표팀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주장이자 라이트 풀백인 허더스필드의 로이 구달도 건재했다. 잉글랜드는 어느새 스코틀랜드의 명성을 넘어 영연방 내 최강 전력을 자랑하는 팀이 되어 있었다.

비슷한 시기, 우루과이에서는 1930년 초대 월드컵이 다소 어정쩡한 배경 속에서 개최되었지만, 쥘 리메의 바람과는 달리 유럽 대륙과 영연방에서는 이 대회에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1920년대까지 극강의 면모를 자랑했던 영연방 팀들이 이런 태도를 갖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유럽 팀들도 대부분 참가를 거부한 마당에, 다른 유럽 팀들로부터 축구 제일 잘 한다고 공인받은 영연방이 남미 팀들의 잔치에 굳이 참가하여 진땀을 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 초반, 어느덧 대륙에 축구가 전파된 지는 30년 정도가 지났고, 대륙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강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두각을 드러낸 팀은 단연 오스트리아 국가대표팀이다. 마티아스 신델라라는 세기의 스타, 골키퍼 루돌프 하이덴, 하프백 요제프 스미스티크 등 뛰어난 스타를 보유한 오스트리아는 분더 팀(Wunder team)이라고 불리며 친선전에서 다른 국가대표팀들을 상대로 가공할 만한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오스트리아 국가대표팀에게는 자신들의 진짜 실력을 검증할 상대가 필요했다. 마침 딱 맞는 상대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잉글랜드였다. 오스트리아는 이미 1931년 스코틀랜드를 5-0으로 격파하며 영연방 도장깨기 단계에 접어든 상태였고, 그랬기에 영연방 최강팀 잉글랜드는 오스트리아에게 '최종 보스'같은 상대였다. 잉글랜드는 오스트리아를 홈으로 받아들였고, 1932년 12월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경기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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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잉글랜드 선수들
결과는 잉글랜드의 4-3 승리였다. 골키퍼 해리 힙스, 센터 포워드 지미 햄슨과 아웃사이드 라이트 새미 크룩스의 좋은 활약으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홈에서 단 1점차의 승리밖에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은 잉글랜드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만큼 대륙 팀들의 실력이 올라오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당시 오스트리아에 버금가던 유럽의 강팀으로는 이탈리아가 있다. 이탈리아는 1년 후 월드컵을 개최할 예정이었던 만큼 축구에 나름대로 진심인 나라였고, 제법 훌륭한 자국 리그도 갖추고 있었으며, 주세페 메아차, 조반니 페라리, 움베르토 칼리가리스, 잔피에로 콤비 등 잉글랜드에 밀리지 않는 스타플레이어들도 보유하고 있었다. 1933년 5월, 이탈리아는 잉글랜드를 자신들의 수도 로마로 초대했다.

경기는 조반니 페라리와 클리프 바스틴이 전반전에 한 골씩 주고받은 뒤 그대로 끝나면서 1-1로 종료되었다. 잉글랜드는 역시 이번에도 지지 않았지만, 점점 상승하는 대륙 팀들의 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와의 무승부로 안심하고 있던 잉글랜드는 1934년 5월에 제대로 망신을 당했는데, 5월 10일에 진행된 헝가리 원정 경기와 5월 16일에 진행된 체코슬로바키아 원정 경기에서 나란히 2-1로 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체코슬로바키아에는 최고의 골키퍼 프란티셰크 플라니치카 올드르지흐 네예들리 안토닌 푸치 등 뛰어난 선수들이 있었고 헝가리에도 샤로시 죄르지 등 유명한 스타플레이어들이 있었지만 대륙 팀 상대 2연패라는 사실 자체가 당시 잉글랜드 입장에서는 개망신이나 다름없었다.

예정되었던 1934년 월드컵이 열렸고, 이 월드컵에서는 개최국 이탈리아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잡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탈리아는 한껏 자신감에 차 올랐고, 1933년에 홈에서 잡지 못한 잉글랜드와 또 다시 상대하기를 원했다. 잉글랜드도 이탈리아를 잡고 다시 한 번 자신들의 실력을 세계에 보여주고 싶었기에 이탈리아를 자신들의 홈으로 불러들여 친선전을 갖는다.

이탈리아는 루이스 몬티, 주세페 메아차, 아틸리오 페라리스 등 월드컵 우승 정예 멤버를 거의 그대로 데리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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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버리에 선 젊은 잉글랜드 선수들
그런데 잉글랜드는 이탈리아를 약간 하찮은 상대로 여겼는지, 아직 A매치 경험이 10경기도 안 되는 선수들로만 선발 라인업을 구성하여 이탈리아를 상대하게 했다. 그 중에는 만 19세의 스탠리 매튜스도 있었으며, 심지어 센터 포워드 테드 드레이크와 라이트 풀백 조지 메일은 이 경기가 A매치 데뷔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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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팀 주장 페라리스와 햅굿의 경기 전 악수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경기는 너무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하이버리 관중들을 등에 업은 어린 잉글랜드 선수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노련한 이탈리아를 압도하며 전반 12분만에 에릭 브룩의 멀티골과 테드 드레이크의 추가골에 힘입어 3-0 리드를 잡았다.

몬티의 부상으로 이탈리아 선수들은 거칠어졌고, 잉글랜드 선수들도 덩달아 거칠어지며 양 팀 선수 중 몇몇은 심각한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후반전에는 월드컵 스타 주세페 메아차가 두 골을 넣었지만 경기가 그대로 종료되며 잉글랜드의 3-2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이 경기가 바로 하이버리의 전투이다. 아무튼 이탈리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잉글랜드는 '비공식 챔피언'이 되었으며, 늘 하던 것처럼 떵떵거리면서 대륙 투어 가끔 돌아주고 영연방에서 끼리끼리 놀던 것을 반복하게 된다. 이들은 오랜만에 나타난 자국의 축구천재 스탠리 매튜스와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냈으며, 독일 원정에서 3-6으로 승리하는 등 여전한 실력을 과시했다.
독일 대표팀을 완전히 털어버리는 매튜스의 드리블(25초 부근)

1934년 하이버리 난투극 후부터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잉글랜드가 대륙 팀과 진행한 경기는 총 16경기였는데, 11승 1무 4패를 기록했으며 특히 홈에서는 전승을 거두었다. 1무는 1939년 이탈리아를 상대로 밀란에서 기록했으며 4패는 각각 벨기에 원정, 오스트리아 원정, 스위스 원정, 유고슬라비아 원정에서 기록했다. 이전에 비해 위상이 떨어지긴 했지만 잉글랜드는 여전히 유럽 최강팀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1938년 10월에는 FA 창립 75주년 기념으로 하이버리에서 유럽 올스타 XI와 경기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골키퍼 알도 올리비에리, 스트라이커 실비오 피올라, 미켈레 안드레올로 등 대륙의 쟁쟁한 선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1] 결과는 잉글랜드 대표팀의 3-0 승리.

4.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공백기)

이 시기에는 세계 각지에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잉글랜드도 상황이 다르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공식 경기를 갖지 못했으며, 국가대항전도 비공식으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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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활동을 하던 영국 선수들. 좌측 상단부터 조 머서, 군 교관, 군 교관, 프랭크 스위프트, 스탠리 매튜스, 맷 버스비

이 공백기가 잉글랜드 입장에서는 참으로 뼈아픈 것이, 잉글랜드가 배출한 선수 중 역대 최고의 실력자라고 할 수 있는 스탠리 매튜스가 24세~30세의 전성기 나이 동안 공식전을 치르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스탠리 매튜스는 이미 국가대표팀 고정 선발 멤버일 정도로 인정받는 선수였고,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지션에서는 전쟁 발발 이전에도 이미 빌리 메레디스[2]의 후계자로 거론되었을 정도로 독보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 전체에서 손꼽히는 선수였다. 어떤 느낌인지 상상이 안 간다면, 리오넬 메시의 커리어에서 2011년~2017년을 비공식 경기 처리하고 그 기간동안 쌓아올린 기록을 비공식 기록으로 간주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럼 느낌이 올 것이다.

5. 유럽 최강팀(1945~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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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대표팀의 초대 감독, 월터 윈터보텀
전쟁이 끝나고, 잉글랜드 선출위원회(Select Committee)는 전쟁 이전에도 이따금씩 겪었던 원정 경기 패배를 통해 감독의 중요성을 인식했는지 월터 윈터보텀을 대표팀 감독 자리에 앉혔다. 이 말은 곧 그때까지 쌓아온 잉글랜드의 모든 성과가 감독도 없이, 특별한 전술도 없이 선수들의 실력과 조직력만으로 이루어진 성과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3]

그러나 아직 선수 선발 권한은 감독이 아닌 선출위원회가 가지고 있었고, 선출위원회에서는 전쟁 이전에도 최고의 스타였던 스탠리 매튜스를 중심으로 전후 잉글랜드 팀을 구성했다. 주장에는 미들스브러의 레프트 풀백 조지 하드윅이 임명되었다. 울버햄튼의 유망주 빌리 라이트, 프레스턴의 톰 피니도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빛을 봤다.

잉글랜드가 전쟁 후 진행한 첫 경기의 상대는 북아일랜드였는데,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는 7-2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아일랜드전에서는 1-0 승리, 웨일스전에서는 3-0 승리, 네덜란드전에서는 8-2 대승을 거두며 윈터보텀 감독과 함께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스토크의 완벽한 센터 하프 닐 프랭클린과 맨시티의 골키퍼 프랭크 스위프트[4]는 견고한 수비진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며 잉글랜드의 평균 실점 수를 크게 줄였고, 미들스브러의 윌프 매니언은 인사이드 포워드로 활약하며 득점과 찬스메이킹 모두에 큰 부분 관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스탠리 매튜스는 명불허전이었고, 톰 피니도 그에 버금가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잉글랜드는 전쟁 후 치른 6경기에서 5승 1무를 기록하며 좋은 페이스를 이어나갔다.

잉글랜드를 비롯한 홈네이션 4개국은 1920년대부터 FIFA와 담 쌓고 지내다가 1947년에 FIFA에 재가입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1947년 5월 10일에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스와 함께 영국 단일팀을 구성하여 글래스고 햄던 파크에서 유럽 올스타 팀과 맞대결을 가졌다. 당시 경기 선발 라인업. 군나르 노르달, 군나르 그렌, 카를로 파롤라, 카를 프라에스트 등 초호화 멤버로 구성되어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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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기에 출전한 영국 단일팀 선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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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발매된 안내 책자


손쉬운 승리를 거둔 영국 단일팀

그럼에도 영국 단일팀은 6-1로 유럽 올스타를 박살내며 축구 레슨을 시켜주었다. 아직 축구 종주국으로서 영국의 위상이 굳건하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그 후 스위스 원정에서 치른 전후 7번째 경기에서 1-0 패배를 당해 6경기 연속 무패행진을 마감하며 다소 기세가 꺾이지만, 그 다음 경기에서 바로 전설을 썼다. 1947년 5월 27일, 포르투갈 축구의 성지인 이스타디우 나시오날에서 0-10이라는 충격적인 스코어로 깽판을 쳐놓은 것이었다.

당시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그렇게 약한 팀도 아니었다. 특히 이 경기에 선발출전한 포르투갈 공격수 페르난두 페이로테우, 제주스 코헤이아, 주제 트라바수스는 알바누, 마누엘 바스케스와 함께 스포르팅 리스본의 공격 5각 편대를 구성하여 '다섯 개의 바이올린(Cinco Violino)라는 별명을 갖고 당시 포르투갈 리그를 씹어먹던 선수들이다. 물론 국제전에서도 상당히 뛰어난 득점력을 보여준 바 있었고(대표적으로 페이로테우가 A매치 20경기 15골 기록을 가지고 있다). 골키퍼 주앙 아베제두도 유고의 프라뇨 글라세르, 프랑스의 쥘리앙 다뤼 등과 함께 대륙 최고의 수문장으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홈에서 잉글랜드를 상대로 0-10 이라는 충격적인 패배를 기록한 것이었다. 이 승리 직후, 잉글랜드의 자존심은 하늘을 찔렀다.

이 포르투갈전을 시작으로 잉글랜드는 또 11경기 9승 2무를 기록하며 무패행진을 달렸는데, 그 중 1948년 이탈리아와의 경기가 단연 백미이다. 이 경기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렸고, 이탈리아는 잉글랜드를 상대로 첫 승을 거두기 위해 세리에 A가 자랑하는 최고의 스타들을 내보냈다. 이 시기 이탈리아 최고의 팀은 토리노였고, 전설의 발렌티노 마촐라, 마리오 리가몬티, 에치오 로이크 등 그랑데 토리노의 멤버들이 다수 포진된 이탈리아 팀은 홈에서 잉글랜드를 이기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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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의 잉글랜드 팀
잉글랜드는 이 경기에서 이탈리아의 희망을 산산조각냈다. 발렌티노 마촐라는 닐 프랭클린과 빌리 라이트에게 묶여 아무 것도 하지 못했고, 결국 잉글랜드가 0-4로 손쉽게 이탈리아를 잡으며 월드컵 디펜딩 챔피언의 자존심을 박살냈다.
이탈리아전 승리를 회고하는 월터 윈터보텀 감독

11경기 무패행진 이후 웸블리 스코틀랜드전과 스웨덴 원정에서 연패를 기록하며 자존심을 구겼지만, 이후 노르웨이와 프랑스를 상대로 또 연승을 기록하며 페이스를 되찾는다. 그러나 스탠리 매튜스가 부상으로 결장한 상황에 구디슨 파크에서 열린 1949년 아일랜드전에서는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허무하게 0-2로 패했다. 이것은 잉글랜드가 홈에서 영연방 이외의 국가에게 처음으로 패한 사례이다. 물론 구디슨 파크는 잉글랜드의 주력 홈구장이 아니므로 아직 '진짜' 홈그라운드인 웸블리에서는 무패를 기록하고 있는 상태였다.

1949-50 홈챔피언십은 월드컵 예선을 겸하여 진행되었다. 1949년에는 홈네이션 국가 중 웨일스, 북아일랜드를 상대했는데, 각각 4-1, 9-2로 대승을 거두며 월드컵 본선행 티켓에 매우 가까워졌다.

그 후 웸블리로 이탈리아를 초청하여 진행한 친선전에서는 또 이탈리아를 2-0으로 잡으며 천적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다만 이탈리아는 수페르가의 비극 이후 발렌티노 마촐라를 비롯한 토리노 선수들을 모두 잃었으므로 전력이 매우 약해진 상태였다. 근데 그들이 모두 건재했던 1948년에 더 큰 점수차로 홈에서 잉글랜드에게 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좀 특이한 경우이긴 하다.

아무튼 잉글랜드는 1950년 4월 스코틀랜드전에서도 승리를 거두며 월드컵 본선행 티켓을 따냈고, 부푼 마음으로 브라질에서 열릴 1950년 월드컵을 준비하게 된다.

한준희 해설위원은 원투펀치에서 이 시기 잉글랜드의 스쿼드가 역대 최강의 잉글랜드 스쿼드였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6. 잔혹사(1950~1966)

그런데 월드컵을 준비하던 도중 작은 사건 하나가 일어난다. 잉글랜드의 핵심 선수였던 닐 프랭클린이 월드컵에 불참하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콜롬비아 리그에 영입되었기 때문인데, 이 시기 콜롬비아 리그는 막대한 영입 자금을 통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비롯하여 수많은 선수들을 끌어모으며 이른바 '엘 도라도' 시기를 맞고 있었다. 닐 프랭클린도 그 중 한 명으로서 콜롬비아 리그의 팀인 인디펜디엔테 산타 페로 이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적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돈'이다. 콜롬비아 리그에서는 프랭클린이 영국에서 받을 수 있는 최대 임금의 4배를 주겠다고 제안했으며, 프랭클린은 거기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FIFA는 돈으로 선수를 모으는 콜롬비아 팀들에게 제제를 가하기로 했고, 이로 인해 콜롬비아 리그의 선수들이 몽땅 월드컵 출전 금지를 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잉글랜드 축구계는 월드컵이 시급한 상황에 콜롬비아 리그 이적과 아내의 출산을 핑계로 조국 대신 돈을 선택한 프랭클린에게 분노했고, 그를 다시는 대표팀에 선발하지 않았다.

잉글랜드는 허무하게 핵심 선수를 잃은 채 자신들의 첫 월드컵에 참가하게 되었다.

6.1.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

프랭클린의 부재는 잉글랜드 팀에 생각보다 큰 악영향을 야기했다.

1950 월드컵 본선[5]에서 잉글랜드는 칠레에게 2-0 승리를 거두었다.

감독은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던 스탠리 매튜스를 아껴두기 위해 미국전에서 쉬게 했다. 사실 미국전에서는 당연히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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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골을 넣은 미국의 조 게이젠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잉글랜드는 축구 '신생아'나 다름없는 미국에게 한 골도 득점하지 못하고 1-0으로 패하는 굴욕을 맛보았다. 이어진 13강 조별리그 3차전에서 스페인에게 1-0으로 패한 게 아예 묻혔을 정도로 미국전 패배의 충격은 대단했다.

결국 절대강자의 위용을 뽐냈던 축구 종주국은 아마추어 팀에게마저 패배하는 치욕을 당하며 탈락(8위)했고 조 1위 4강 리그에 진출 실패하며[6], 세계의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6.2. 1950 월드컵 이후~1954 월드컵 이전

이후 친선전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1951년 아르헨티나전 승리를 시작으로 1953년 우루과이 원정 패배 전까지 16경기 무패행진을 이어가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1950년 월드컵에서의 사태가 '실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

1953년 10월 21일에는 FA 창설 90주년을 맞이하여 오래간만에 유럽 올스타와 경기를 진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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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라이트가 인쇄된 이 경기의 안내 책자 일부


후반전 올스타팀의 골키퍼로 나온 블라디미르 베아라의 뛰어난 활약이 빛났고, 잉글랜드는 유럽 올스타와 4-4로 무승부를 기록했다. 당시 출전 선수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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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티 마자르의 웸블리 방문
그러나 얼마 후 1953년 11월 25일, 자신들의 '무패 홈' 웸블리에서 푸슈카시 페렌츠가 이끄는 매직 마자르 3-6이라는 스코어로 처참하게 깨지면서 자신들의 축구가 이제는 대륙의 축구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말았다.


1932년 오스트리아의 도전과 1934년 이탈리아의 도전은 이겨낸 잉글랜드였으나, 헝가리와의 경기에서는 너무나도 극명한 실력 차를 보여주며 패배하고 말았다.

그 후 언제 그랬냐는 듯 또 다른 팀들을 상대로는 좋은 결과를 내다가 헝가리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이 있었는지, 1954년 월드컵을 한 달 남긴 시점에 부다페스트에 가서 친선 경기를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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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에서 다시 만난 푸스카스와 라이트
그리고 그 결과는... 7-1 이라는 스코어였다. 자존심을 완전히 구기며 패배했고, 축구 종가의 자존심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참고로 이 기록은 현재까지도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점수차 패배 기록이다.

그렇게 잉글랜드는 분위기를 망친 채로 더 이상의 평가전을 치르지 않은 채 월드컵 본선을 준비하였다.

6.3.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벨기에와 비기고, 개최국 스위스를 잡으며 8강에 올랐지만, 디펜딩 챔피언 우루과이에게 4:2로 지면서 허무하게 탈락했다.

그래도 캡틴 빌리 라이트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었고, 브라질 언론 글로부가 선정한 대회 베스트 XI에도 이름을 올렸다.

6.4. 1954 월드컵 이후~1958 월드컵 이전

1954년 12월, 잉글랜드는 또 한 번 '비공식 챔피언'이 되어 보고자 월드컵 챔피언 서독을 웸블리로 불렀다. 서독은 프리츠 발터를 비롯한 대부분의 주축 선수들이 그대로 뛰었고 잉글랜드도 마찬가지였다.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는 역시 서독 천적다운 면모를 보이며 3-1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955년 5월에 있었던 프랑스&스페인&포르투갈 투어에서는 도리어 2패 1무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기며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중 스페인과는 11월에 재경기를 진행하여 4-1의 스코어로 승리를 거두며 1950년 월드컵의 복수에 성공한다.

1955년 8월에는 북아일랜드 축구 협회(명칭상으로는 Irish지만 북아일랜드 대표팀에 해당함)의 창립 75주년을 기념하여 벨파스트에서 또 한 번 영국 단일팀을 구성하여 유럽 올스타팀을 맞이하게 되는데, 잉글랜드 선수들이 주축이 되었던 1947년 경기와는 달리 이번 영국 단일팀의 잉글랜드인은 스탠리 매튜스 로이 벤틀리를 비롯한 4명 뿐이었다. 당시 선발 명단


이 경기에서는 유고슬라비아의 베르나르트 부카스가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이에 힘입어 유럽 올스타가 1-4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유럽 올스타가 영국 단일팀을 상대로 승리를 기록한 첫 사례였다.

이 무렵 유로피언컵이 출범하지만, 이 당시 풋볼 리그 최강팀이었던 울버햄튼은 정작 유로피언컵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잉글랜드 축구협회에서도 자국 팀들이 유로피언컵에 출전하는 것을 그다지 반기지 않았는데, 맷 버스비 감독의 맨유만큼은 새로운 대회에 관심을 보이며 참가했다.

1956년 5월에는 의미 있는 친선전들을 많이 진행했다. 먼저, 잉글랜드는 브라질을 웸블리로 초청하여 첫 맞대결을 가졌다.

이 경기에서 스탠리 매튜스는 만 41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상대팀 주장 니우통 산투스를 경기 내내 탈탈 털어버리며 잉글랜드의 4-2 승리를 이끌었다.[7]

뒤이어 진행된 스웨덴 원정에서는 무승부, 핀란드 원정에서는 1-5 대승을 거두며 나쁘지 않은 결과를 얻었다.

그리고 26일에는 또 서독과 친선전을 진행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서독의 홈구장이었다.


이 경기에서 레프트 하프로 기용된 맨유의 신예 던컨 에드워즈는 하프백의 개념을 부숴버리는 플레이를 보여주었는데, 서독 선수 여러 명이 달려드는 것을 그냥 팔로 제치고 돌파한 뒤 중거리 슈팅으로 골을 만들어내는 미친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또 잉글랜드의 1-3 승리. 잉글랜드는 서독의 홈에서도 어김없이 강한 모습을 보여주며 서독 상대 무패 기록을 이어갔다.

이렇게 뛰어난 재능을 갖춘 선수들이 나타나자, 잉글랜드에서는 다음 월드컵에 큰 기대를 걸기 시작했다. 어느덧 42세가 된 스탠리 매튜스는 던컨 에드워즈같은 어린 선수들에게 잉글랜드의 미래를 맡기고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1958년 2월에 일어난 비행기 사고로 인해 그 모든 희망의 불씨가 꺼져버렸다.

국가대표팀에서 이른바 '닥주전 멤버'였던 맨유 3인방 던컨 에드워즈, 로저 번, 토미 테일러가 모두 이 참사에 휘말려 세상을 떠났다. 같은 팀 소속이자 당시 국가대표팀 로테이션 멤버였던 바비 찰튼은 살아남기는 했으나 월드컵에서 뛸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다.

결국 잉글랜드는 또 기가 팍 죽은 채로 1958년 월드컵에 참가하게 되었다.

6.5.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

참사로 인한 전력 손실에도 불구하고 백업 선수들이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었고, 노장 빌리 라이트와 톰 피니가 고군분투하여 브라질과 무승부를 거두는 등 좋은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조별리그 3경기 전부를 무승부로 마쳤고, 같은 조에서 승점이 같았던 소련과 8강전 진출권을 두고 플레이오프를 진행하게 되었다. 잉글랜드는 상대 소련을 시종일관 압도하고도 야신의 선방에 번번이 막혔고, 아나톨리 일린에게 결승골을 내주며 0-1 패배를 기록했다.

6.6. 1958 월드컵 이후~1962 월드컵 이전

잉글랜드는 서독, 이탈리아 등 다른 여러 팀들과 마찬가지로 1960년 초대 유러피언 네이션스컵에 불참했다.

6.7. 1962 FIFA 월드컵 칠레

당시 잉글랜드 캡틴 조니 헤인즈는 약팀 풀럼 FC 소속으로 1961년 그 어렵다는 발롱도르 포디움에 오르기도 했기 때문에 잉글랜드는 월드컵을 앞두고 많은 기대를 받았다.

조별리그 결과는 괜찮았다. 국가대표팀에 갓 데뷔한 신예 바비 무어가 주전 레프트 하프로 기용되고, 바비 찰튼이 참사의 악영향에서 벗어나 잉글랜드의 아웃사이드 레프트로 완전히 자리잡았고, 헤인스의 클래스는 여전했으며, 지미 암필드도 이 대회를 통해 세계 최고의 라이트백이라는 찬사를 받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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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린샤를 마크하는 레이 윌슨
그러나 8강전에서 가린샤의 원맨쇼에 농락당하며 3-1로 패했고, 4대회 연속으로 토너먼트 무승+4강 진출 실패를 기록하고 말았다. 그래도 1962 월드컵에서는 전 대회보다는 나은 성과를 내는 데에 성공했지만, 잉글랜드는 여전히 고전적인 WM 포메이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새로운 것이 필요했다.

6.8. 1962년 월드컵 이후~1966년 월드컵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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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 램지 감독
결국 이 대회 이후 얼마 못 가 감독이 월터 윈터보텀에서 알프 램지로 바뀌었다. 이는 거의 17년만의 일이었다. 신임 감독 램지는 기자회견에서 잉글랜드가 월드컵에서 우승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램지는 자신의 입맛대로 선수를 기용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램지에게 큰 권한을 주지 않았다. 결국 선수 선발 권한은 감독 램지가 아닌 잉글랜드 선출위원회가 계속 가지고 있게 되었다. 이런 잉글랜드 축구협회의 고지식함은 또 한 번의 참사를 불러온다.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4 예선에서 '이빨[8]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는 프랑스에게 5:2 대패를 당하며 탈락의 굴욕을 또 맛본 것이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잉글랜드 선출위원회는 그제서야 램지에게 입맛대로 선수를 기용할 권한을 주었다.[9] 고삐 풀린 램지는 프랑스전 대패 당시 엄청나게 많은 실수를 저지른 론 스프링겟 골키퍼의 굳건한 주전 지위에 균열을 내 보기로 결심하고 새 골키퍼를 탐색했는데, 당시 리그와 FA컵에서 돌풍[10]을 일으키던 레스터 시티의 수문장인 고든 뱅크스를 1963년 4월부터 국가대표팀 주전 골키퍼 자리에 앉혔다.


1963년에 잉글랜드 대표팀은 FA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진행한 세계 올스타 팀과의 경기에서 2-1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이 경기 전반전에서 세계 올스타팀 골키퍼 레프 야신은 최전성기의 지미 그리브스를 완벽하게 막아내며 영국 언론의 찬사를 받았고, 이것이 연말의 발롱도르 수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램지는 바비 무어, 바비 찰튼을 중심적으로 기용하며 그들을 중심으로 팀을 짰다. 전술 실험도 다양하게 해 보았다. 램지의 팀은 쉽게 지지 않았지만, 뱅크스가 부상으로 결장했던 1964년 브라질전에서는 5:1로 패배하는 굴욕을 맛보기도 했다. 잉글랜드 대표팀은 여전히 자주 흔들렸다. 램지는 월드컵에서 우승하기 위해 팀에 딱 맞는 전술을 찾아야 했다. 그러던 1965년, 잉글랜드 풋볼 리그를 새롭게 강타한 무시무시한 팀이 나타났다. 바로 리즈 유나이티드 FC이다. 리즈가 2부 리그에서 올라오자마자 좋은 성적을 내자 리즈에 소속된 선수들 또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다. 이 당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재키 찰튼이다.

바비 찰튼의 친형이기도 한 재키 찰튼은 키가 크면서도 기술적이고 공격 가담 능력이 좋은 센터 하프였다. 재키 찰튼은 이미 30세나 된 노장 선수였지만, 램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키를 국가대표팀에 승선시킨다. 그리고 기존 센터 하프였던 모리스 노먼 대신 재키 찰튼을 주전 센터 하프로 기용하기 시작했고, 사실상 수비형 미드필더 역할을 하고 있던 레프트 하프 바비 무어의 위치를 뒤로 끌어내려 포백 비슷한 형태를 만들었다. 무어와 찰튼은 센터백 듀오가 되었다. 1930년대에 쓰이던 WM전술을 1960년대 초반까지도 우려먹었던 잉글랜드[11]에서 '포백'의 형태가 완성된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이런 이유로, 주장 바비 무어는 단순 센터백이 아닌 레프트 하프와 센터백의 애매한 경계에 놓이게 되었다. 소속팀 웨스트햄에서도 비슷한 역할을 했던 무어는 이런 역할에 곧잘 적응했고, 평소에는 수비라인을 야무지게 맞추며 굳건한 수비력을 보여주다가도 자신이 원할 때면 언제든 오버래핑하여 중거리 슛으로 골을 넣거나 중장거리 패스로 팀의 공격 템포를 조절하는 역할까지 했다.

그리고 이 전술은 대성공을 거둔다. 재키 찰튼이 출전하고 난 후부터 잉글랜드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1965년 10월 오스트리아전 패배를 마지막으로 잉글랜드는 '패하지 않는 팀'이 되었다. 1965년 11월 북아일랜드전을 시작으로 월드컵 직전까지 무패행진을 달렸다.

7. 최전성기(1966~1970)

7.1.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그렇게 램지 감독의 4-1-3-2 전술이 완성되었다. 지미 암필드가 기용될 수도 있었으나 부상으로 인해 참여하지 못했고, 조지 코헨이 결국 그 자리를 완전히 대체했다. 램지가 구상한 초기 포메이션은 다음과 같았다.
FW
지미 그리브스
FW
로저 헌트
MF
존 코넬리
MF
바비 찰튼
MF
앨런 볼
MF
노비 스타일스
DF
레이 윌슨
DF
바비 무어
DF
잭 찰튼
DF
조지 코헨
GK
고든 뱅크스
여기에서 존 코넬리는 맨유의 레프트윙이었고, 앨런 볼은 블랙풀에서 활약하던 20세의 멀티 미드필더 자원이었다. 여기에 리버풀의 이안 캘러한과 사우스햄튼의 테리 페인[12]이라는 괜찮은 클래식 라이트윙까지 보유하고 있었으니, 볼이 부상당하더라도 다음 경기에서 페인이나 캘러한을 기용할 수 있었다. 언뜻 보기에 이 전술은 잘 통할 것 같았다.

그러나 조별리그 첫 경기 우루과이전에서 램지는 이 전술로 별다른 이득을 얻지 못했다. 남미 최강 페냐롤의 주축 멤버 네스토르 곤살베스, 페드로 로차 등으로 구성된 우루과이 팀 자체가 강했던 것도 있지만, 이 전술을 그대로 가져가면 중앙의 그리브스와 헌트가 자꾸 고립되었던 것이다. 결국 0:0 무승부로 경기를 마무리짓고 말았다. 그래도 앨런 볼의 드리블 실력이 국제 무대에서도 충분히 통할 만한 수준이라는 것이 제대로 증명된 경기(우루과이 수비진을 혼자 미친듯이 돌파해 들어가는 장면이 자주 나왔다)라는 점, 그리고 막강한 포백 라인의 수비력을 증명했다는 점에서 잉글랜드가 얻어 간 게 아예 없는 경기라고는 할 수 없다.

어쨌든 개최국의 체면을 못 살리고 빈공을 보여주는 안타까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램지는 대책이 필요했다. 결국 아껴 뒀던 웨스트햄의 만능 미드필더 마틴 피터스 카드를 꺼내든다. 피터스는 하프백으로 커리어를 시작하여 감독의 지시에 따라 인사이드 포워드, 센터 포워드, 풀백, 여차하면 골키퍼까지 소화했던 괴물 멀티플레이어였다. 조별리그 2차전이었던 멕시코전에서는 피터스가 코넬리의 자리를 대체하였고, 볼은 캘러한과 바뀌어 기용되었다.
FW
지미 그리브스
FW
로저 헌트
MF
마틴 피터스
MF
바비 찰튼
MF
테리 페인
MF
노비 스타일스
DF
레이 윌슨
DF
바비 무어
DF
잭 찰튼
DF
조지 코헨
GK
고든 뱅크스
멕시코전은 성공적이었다. 바비 찰튼의 시원한 중거리포, 그리고 로저 헌트의 탁월한 위치선정에 이은 깔끔한 마무리로 잉글랜드가 2-0 승리를 거두었다.

피터스의 효과가 확실히 증명되었다. 피터스는 코넬리보다 중앙 지향적으로 움직였고, 그렇게 해서 생긴 빈 공간을 무어와 윌슨이 오버래핑으로 잘 메워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라이트윙이었다. 공격력이 엄청난 조지 코헨이 라이트윙과 동선이 겹쳐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램지는 페인과 볼, 그리고 캘러한을 계속해서 저울질했다. 다음 경기인 프랑스전은 지난 유로 예선 탈락의 아픔을 씻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 경기였다. 램지는 이번 경기에서 라이트윙으로 캘러한을 기용했다. 잉글랜드 선수들은 독기를 품고 경기에 임했다.
FW
지미 그리브스
FW
로저 헌트
MF
마틴 피터스
MF
바비 찰튼
MF
이안 캘러한
MF
노비 스타일스
DF
레이 윌슨
DF
바비 무어
DF
잭 찰튼
DF
조지 코헨
GK
고든 뱅크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프랑스전에서도 잉글랜드는 2-0 승리를 거두었다. 바비 찰튼의 정당한 골이 오프사이드로 취소되는 와중에도 말이다. 그런데, 간판 스트라이커 지미 그리브스가 상대 선수의 거친 태클에 시달리다가 부상을 당해 다음 경기에서 뛸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잉글랜드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지미 그리브스의 유연한 드리블 능력과 완벽한 피니시 능력까지 겸비한 대체자는 당시 잉글랜드 대표팀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백업 공격수라고는 웨스트햄에서 국가대표팀에 승선한 지도 얼마 안 된 제프 허스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선수 부상 회복 기간을 고려하겠다고 월드컵 기간을 늘릴 수는 없는 법. 램지는 결국 신예 허스트를 8강전에 기용하게 된다. 그리브스가 없다는 것은 곧 팀에 드리블러가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했으므로 드리블 실력이 보다 뛰어나고 활동량이 더 많은 앨런 볼이 라이트윙 자리에 다시 기용되었다. 램지는 볼에게 예전보다 중앙지향적으로 움직일 것을 요구했고, 중앙 미드필더 유형의 플레이 스타일을 가진 피터스&찰튼&볼이 함께 2선에서 뛴 잉글랜드는 클래식 윙어가 없는 특이한 포메이션을 구축하게 된다. 이게 바로 'Wingless Wonders'의 시발점이다.
FW
제프 허스트
FW
로저 헌트
MF
마틴 피터스
MF
바비 찰튼
MF
앨런 볼
MF
노비 스타일스
DF
레이 윌슨
DF
바비 무어
DF
잭 찰튼
DF
조지 코헨
GK
고든 뱅크스

허스트는 그리브스보다 훨씬 투박한 공격수였다. 골 결정력이나 스피드는 확실히 그리브스보다 별로였지만, 덩치를 활용한 몸싸움 및 공중볼 처리에는 훨씬 능했다. 그래서였을까? 바비 무어의 롱패스 능력이 8강전부터 빛을 보기 시작했다. 소속팀에서 심심하면 받아먹던 무어의 롱패스를 국가대표팀에서도 받게 되자 허스트는 예상보다 훨씬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아주 견고했다. 특히 주장 안토니오 라틴은 190cm가 넘는 신장을 활용해 완벽한 중원 장악력을 선보이며 찰튼, 피터스, 볼의 활약을 견제했다. 중간중간 거친 파울로 잉글랜드의 공격 흐름을 끊기도 했다.

경기 34분경, 프리킥 벽을 쌓던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자꾸 앞으로 걸어나와 크라이틀라인 주심에게 주의를 받는다. 라틴은 소소한 항의를 했다. 크라이틀라인은 라틴에게 제자리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대. 라틴은 혼잣말을 하면서 주심의 말대로 했다. 약 2분 후, 경기가 진행 중이었던 상황에 라틴은 또 크라이틀라인 주심과 마주치고 대화를 했다.
파일:rattinred.jpg
퇴장당하는 라틴
그런데 갑자기 크라이틀라인 주심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라틴에게 퇴장 명령을 내린다. 라틴은 영문도 모른 채 퇴장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주심의 명령을 거부하며 이유를 설명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독일인인 크라이틀라인은 라틴의 스페인어 항의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결국 통역사와 진행위원, 경기장 경찰까지 경기장에 들어와 라틴을 설득한 후 라틴이 퇴장을 계속 거부하자 강제로 끌고 나갔다.[13]

경기 후 작성된 리포트를 통해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이 날 크라이틀라인 주심은 라틴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의 잭 찰튼에게도 구두로 경고를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영어를 쓰는 잉글랜드 선수 찰튼이 독일 주심 크라이틀라인의 독일어 구두경고를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라틴도 마찬가지였다. 크라이틀라인은 라틴의 퇴장 사유에 대해 '언어 폭력(violence of the tongue)'이라는 대답을 내놓았지만, 이로 인해 더 많은 의혹만 불러일으켰다. 아무튼 이 사건은 선수와 심판 간에 확실한 의사 표현 수단이 없을 경우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지 아주 잘 보여준 사건이었고, 이 사건을 보고 심각성을 인지한 잉글랜드의 켄 애스턴 심판이 옐로카드와 레드카드를 탄생시켰다.

아무튼 전반 35분에 퇴장당한 라틴의 빈자리는 컸고, 라틴이 빠진 아르헨티나는 잉글랜드를 상대하기 버거워했다. 수비 진영에 머물러 있던 바비 무어가 공격 진영으로 오버래핑하여 아르헨티나의 수비가 더욱 힘들어졌다. 마르솔리니와 페레이로를 비롯한 수비진이 굉장히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나, 결국 피터스의 왼발 크로스를 기가 막히게 머리로 돌려놓은 허스트의 결승골로 잉글랜드가 승리를 거두었다.

라틴 퇴장 이후 경기가 급속도로 거칠어졌고, 양 팀 통틀어 50개가 넘는 파울이 나온 경기였다. 라틴의 퇴장 거부와 아르헨티나 선수들의 거친 파울에 격분한 알프 램지 감독안 경기가 끝나고 유니폼을 서로 교환하려는 아르헨티나 선수들과 잉글랜드 선수들을 직접 저지하기도 했으며,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는 아르헨티나 선수들을 'Animals', 즉 짐승에 비유하기도 했다. 근데 사실 따지고 보면 램지의 말은 좀 이상한 점이 있는데,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가 아르헨티나보다 훨씬 많은 파울을 저질렀다. 라틴의 경기 지연과 그로 인한 선수들 간 언쟁으로 인해 흥분한 잉글랜드 선수들이 매우 거친 플레이를 펼쳤는데, 크라이틀라인 주심이 그런 플레이들을 몽땅 잡아내 칼같이 파울 판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경기는 '카드 제도'를 탄생시킨, 월드컵 역사상 가장 중요한 경기 중 하나로 남아 있다.

4강에 진출한 잉글랜드의 상대는 포르투갈이었다. 8강전에서 승리를 맛본 램지는 4강전에서도 완전히 똑같은 라인업을 내보냈다. 포르투갈 대표팀은 대부분 에우제비우와 콜루나를 비롯한 벤피카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을 어떻게 막느냐가 관건이었다. 당시 포르투갈의 4-2-4 전술에서 공격진은 클래식 윙어인 주제 아우구스투와 시몽이스, 그리고 센터 포워드인 에우제비우와 주제 토히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주축은 물론 에우제비우였지만, 그 옆에서 뛰던 주제 토히스도 전술적으로 상당히 중요했다. 190cm가 넘는 신장으로 포스트 플레이를 펼치며 에우제비우에게 슈팅 찬스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 피지컬의 공격수를 제어할 수 있는 수비수는 당시 많지 않았고, 브라질이나 불가리아, 북한은 그래서 토히스와 에우제비우의 막강한 투톱 조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통계를 보면, 주제 토히스가 이 월드컵에서 얼마나 헤더 경합을 많이 했는지 알 수 있다. 무려 75회의 공중볼 경합에서 41회의 승리를 따냈다.. 그것도 공격수가!!

이런 토히스의 폭주를 막을 방법은 단 하나, 비슷한 신장을 가진 수비수를 통해 공중볼을 효과적으로 억제하는 것이었다. 마침 잉글랜드의 주전 센터백은 키 191cm의 재키 찰튼이었다. 찰튼의 존재는 이미 잉글랜드에게 천군만마와도 같았다. 문제는 이제 하나 남아있었다. 바로 에우제비우 그 자체를 어떻게 막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를 위해 램지는 노비 스타일스에게 특별한 주문을 한다. 에우제비우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면서 경기장에서 지워버리라는 것이었다. 노비 스타일스는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거칠고 끈질긴 수비를 펼치는 '투지의 상징'으로 유명했다. 조금 현대의 선수와 비교하자면 젠나로 가투소 타입의 선수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스타일스는 램지 감독의 주문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에우제비우에게는 설상가상이었던 것이, 스타일스를 어떻게든 떨쳐 내더라도 앞에 무어와 찰튼이 버티고 있었던지라 아예 봉쇄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에우제비우는 유효슈팅을 몇 번 날리지도 못하며 경기장에서 지워졌다.

결국 전방으로 적극적인 공격 가담을 한 바비 찰튼이 혼자 두 골을 득점하는 등 원맨쇼를 펼쳤다. 잉글랜드는 또 무실점을 기록할 뻔했으나, 경기 내내 좋은 수비를 펼치던 재키 찰튼이 경기 81분 갑자기 손을 뻗어 골대로 향하던 포르투갈의 크로스를 쳐냈다. 지금 같았으면 바로 퇴장을 당했겠지만, 당시에는 핸들링 파울에 대한 처벌 기준이 모호했기 때문에 페널티킥만 주어졌다.[14] 에우제비우는 뱅크스를 상대로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2:1 추격을 시도했으나, 남은 시간 잉글랜드가 텐백 모드에 돌입하며 뒷문을 단단히 걸어잠갔다. 정말 위험천만한 찬스가 몇 번 나왔지만, 뱅크스가 잘 막아냈다. 결국 잉글랜드는 또 승리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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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포메이션
남은 경기는 결승전. 결승전 상대는 서독이었다. 서독은 강한 팀이었지만 잉글랜드 상대로 홈에서든 원정에서든 이겨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15]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었다. 잉글랜드는 똑같은 포메이션을 한번 더 가지고 나왔다. 당시 원래 주전 스트라이커였던 지미 그리브스가 램지에게 찾아와 자신이 결승전에서 뛸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이미 허스트가 지난 두 경기에서 매우 뛰어난 활약으로 팀의 승리에 기여했기 때문에 램지 감독은 허스트를 그대로 기용했다. 로저 헌트도 마찬가지로 계속 기용했다.

그리고 대회 내내 4골이나 득점한 상대 핵심 미드필더 베켄바우어를 어떻게 제어할지가 굉장한 문제였는데, 램지는 미드필더진의 에이스 찰튼에게 경기 내내 베켄바우어를 1:1 마킹할 것을 요구했다. 재밌는 것은, 서독의 헬무트 쇤 감독도 잉글랜드의 에이스 찰튼을 제어하기 위해 베켄바우어에게 1:1 수비를 주문했다는 것이다.

경기는 이상하게 흘러갔다. 잉글랜드의 강력했던 수비진은 이른 시간 문전에서 우왕좌왕하다가 헬무트 할러에게 선제골을 내줬다.
그러나 몇 분 후, 공격 진영으로 오버래핑하다가 오베라트의 파울로 쓰러진 무어가 완벽한 롱패스 어시스트로 허스트의 헤더 동점골을 도우며 동점을 만들었다. 베켄바우어와 찰튼은 서로를 신나게 마킹하다가 사이좋게 지워져서 별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경기는 전반적으로 잉글랜드가 우세했는데, 바비 무어와 앨런 볼이 미친 경기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서독은 잉글랜드의 견고한 수비진을 좀처럼 뚫어내지 못했으며, 서독 역시 매우 견고한 수비를 뽐냈다. 특히 볼프강 베버와 빌리 슐츠의 활약이 대단했다.

후반전에는 회트게스의 붕 뜬 클리어링을 날렵하게 캐치한 마틴 피터스가 발리슛으로 역전골을 넣었고, 후반 종료 직전 서독이 얻은 마지막 찬스에서 에머리히의 킥이 굴절되어 베버에게 흘렀고[16] 베버가 뱅크스보다 먼저 위치를 잡으며 동점골을 집어넣었다. 뱅크스와 무어는 슈넬링어의 핸드볼 파울에 대해 거센 항의를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7]결국 경기는 연장전으로 흘러갔다.

연장전에서는 허스트가 그 유명한 논란의 골을 터뜨린다. 골대 맞고 골라인 을 때린 뒤 다시 골대를 치고 떨어진 공을 본 주심은 처음에는 이 슈팅을 골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러시아 출신 토피크 바하라모프 부심이 이를 두고 골이라고 이야기하자 판정을 번복하여 잉글랜드의 골을 선언한다. 이후 공격에 모든 힘을 쏟아부은 서독이었지만 잉글랜드는 좀처럼 찬스를 내주지 않았고, 이후 경기 119분 바비 무어가 제프 허스트에게 또 긴 패스를 통해 어시스트를 제공하며 잉글랜드가 4:2 승리를 거둔다. 이 때 서독 진영의 코너 쪽에서 흥분한 팬들이 경기장에 난입하기도 했다.

잉글랜드가 오심 이득을 본 것도 맞고, 엄청난 수의 웸블리 홈 팬들을 등에 업고 이동거리 없이 경기하는 등 개최국으로서 매우 큰 어드밴티지를 누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편파판정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이 대회에서 잉글랜드도 주심들의 판정으로 인해 피해를 본 장면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당장 바비 찰튼의 골 취소만 봐도 알 수 있고, 결승전에서도 슈넬링어의 핸드볼 및 오베라트의 비매너 태클 등 잉글랜드를 상대한 팀들의 강도 높은 파울도 전부 무시되었고, 때문에 잉글랜드도 고스란히 오심의 피해를 봤다. 단순히 결승전에서 골라인 판독기도 없던 시절 라인에 걸친 슈팅 하나 잘못 본 걸 가지고 편파판정이라고 비난하기에는 그 근거가 너무 부족하다. 안토니오 라틴 퇴장 사건도 누가 개입했다는 근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동일한 경기에서 재키 찰튼도 똑같이 구두 경고를 받아 피해를 입을 뻔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단순 오심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고, 편파 판정이라는 프레임을 씌울 수는 없다. 실제로, 당시 서독의 주축 선수였던 베켄바우어도 이 경기 결과에 대해 별 미련을 갖고 있지 않으며, 잉글랜드가 많은 홈 어드밴티지를 가지고 우승했던 것은 맞지만, 잉글랜드가 서독보다 더 나은 팀이었고 잉글랜드에게 우승할 자격이 있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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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리메컵을 들어올리는 주장 바비 무어
우승팀 잉글랜드는 이 월드컵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다. 우선 그 전까지는 '애매한 강팀'이었으나, 이 월드컵을 기점으로 국제 축구계 최강의 팀이 되었다. 실제로 이 월드컵에서 우승한 직후 Elo 레이팅 1위 자리에 올랐고, 1970년 6월 월드컵 서독전 3:2 패배 직전까지 단 한 차례도 1위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출처 그만큼 꾸준히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윙어가 없는 전술을 썼다는 것을 빼면 전술적으로 특이한 점은 없었지만, 실제로 당대 최강의 국가대표팀이었던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브라질과 이탈리아는 이 월드컵에서의 부진 이후 본궤도로 돌아갔으나 월드컵에서 점수를 너무 많이 빼앗긴 터라 Elo 레이팅 같은 지표에서는 잉글랜드와 포인트 차이가 컸고, 상대적으로 월드컵에서 잘 한 서독은 친선전에서 가끔 다크호스들에게 어이없는 패배를 당하곤 했다.

이 대회를 기점으로 WM 포메이션을 사용하는 팀이 거의 다 사라졌고, 그로 인해 포백 축구의 진정한 전성기가 시작되었으며, 그런 토대 위에서 토탈 풋볼이 태동했기 때문에 전술적인 의미에서도 나름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대회이다.

7.2. 1966 월드컵 이후~유로 1968 이전

유로 1968의 예선은 다소 특이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매년 영연방에서 진행되었던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이 유로 1968의 예선 라운드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1966-67 시즌, 1967-68 시즌의 결과를 종합하여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팀이 유로 1968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방식이었다.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참가 팀은 기존과 같았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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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우승의 주역, 허스트, 무어, 피터스
웨스트햄 소속의 위 3명은 월드컵 영웅으로 환대받았고, 이후 국가대표팀에서 거의 고정적인 주전 멤버로 기용되었다.

월드컵 우승 이후 잉글랜드는 약 3개월간 경기 없이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월드컵 우승 이후 잉글랜드가 가진 첫 A매치는 선술했듯 당시 유로 본선의 예선전에 해당하는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이었다. 첫 상대는 북아일랜드였고, 어린 팻 제닝스가 지키는 골문을 피터스와 헌트가 뚫어내며 벨파스트 원정에서 깔끔한 2-0 승리를 거둔다.

1966년 11월 2일 웸블리 체코슬로바키아전에서는 0-0으로 무승부를 거두며 고전했다.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이자 유로 예선 2차전인 11월 웨일스전은 웸블리에서 열렸고, 홈 관중들을 업은 잉글랜드가 허스트의 멀티골에 힘입어 5-1 대승을 거두었다.

1967년 4월 스코틀랜드전은 역사에 남을 명경기였다. 웸블리에서 열린 경기였고, 아주 빠른 템포로 경기가 진행되었다. 유로 1968 본선 진출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는 경기였던만큼 양 팀 팬들의 함성 역시 장난이 아니었다. 가능하다면 이 링크로 들어가서 풀경기를 보자. 아주 재미있는 승부였다.(footballia.net) 바비 무어, 앨런 볼, 바비 찰튼, 데니스 로, 짐 백스터, 바비 레녹스, 고든 뱅크스 등 양 팀의 모든 선수들이 자신들의 특징적인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월드컵 챔피언 잉글랜드는 2-3으로 패했다. 1965년 11월부터 이어오던 19경기 무패행진을 이렇게 허무하게 끝냈다. 이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스코틀랜드의 골키퍼 로니 심슨이 어마어마한 활약을 펼친 것이 주된 이유였다. 심슨은 양 팀 선수를 통틀어 가장 많은 3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선방들을 보여주며 스코틀랜드의 승리를 이끌었다. 참고로 심슨은 당시 셀틱 FC의 주전 멤버였고, 한 달 후에 조크 스타인의 지휘 하에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했다. 유럽 구단 중 최초로 트레블을 달성한 '리스본의 사자들'의 일원이었다는 말이다.

웸블리에서 스코틀랜드 대표팀이 잉글랜드를 잡았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스코틀랜드에서는 완전히 난리가 났다. 물론 당시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도 Elo 레이팅 등 여러 지표로 봤을 때 유럽에서 꽤 알아주는 팀이었던 것은 맞지만, Elo 레이팅 1위이자 월드컵 챔피언인 잉글랜드를 잡은 것은 그야말로 대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스코틀랜드에서는 '우리가 월드컵 챔피언을 이겼으니 '비공식 챔피언'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흥했다.

아무튼 이 경기에서 패하는 바람에 잉글랜드는 1966-67 시즌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 2승 1패를 기록했고, 본선 진출을 위해 꼭 잡아야 했던 1위 자리를 2승 1무를 기록한 스코틀랜드에게 내주고 말았다. 1964년 대회에서 허무하게 탈락했던 잉글랜드의 유로 본선 진출에 또 다시 빨간불이 켜졌다. 유로 1968 본선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다음 시즌의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 이것을 꼭 만회해야 했다.

다행히 1967년 5월에 웸블리에서 진행된 스페인전, 오스트리아 원정에서 진행된 경기에서 모두 무실점 승리를 거두며 페이스를 회복했다.

1967-68 시즌의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은 유로 1968 플레이오프 진출자를 결정해야 하는 문제 때문에 기존보다 단축된 기간 동안 개최되었다. 1967년 10월, 잉글랜드의 상대는 웨일스였다. 웨일스 원정에서 찰튼, 피터스, 볼이 한 골씩 득점하며 0-3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같은 날 열렸던 북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기에서는 북아일랜드가 스코틀랜드를 잡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로써 두 팀의 점수는 역전되었다.

11월 경기에서 잉글랜드의 상대는 북아일랜드였다. 웸블리에서 허스트와 찰튼이 한 골씩 집어넣으며 2-0승리를 챙겼다. 스코틀랜드 역시 글래스고에서 웨일스를 2-1로 꺾었다. 결국, 다음 해에 열리는 마지막 경기에서 유로 플레이오프 진출팀이 결정되는 상황이 되었다.

스코틀랜드와의 경기는 1968년 2월에 글래스고에서 열릴 예정이었고, 잉글랜드는 동구의 강호 소련을 불러들여 친선전을 갖는다. 결과는 2-2 무승부. 토트넘의 시릴 놀스와 맨유의 데이비드 새들러 등 국가대표팀 주전과는 거리가 먼 선수들을 출전시켰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결과를 얻었다.

그리고 1968년 2월이 되었고,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유로 본선 플레이오프 진출자를 결정하는 경기가 열렸다. 정말 중요한 경기였던만큼 양 팀은 최정예 멤버들을 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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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기 직전에 발매된 10페이지 정도 분량의 소개 책자
용호상박의 경기를 펼치던 중, 경기 20분경 마틴 피터스의 선제골이 터졌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존 휴즈가 39분에 동점골을 터뜨렸다. 경기 중 스코틀랜드는 한 차례 더 골망을 갈랐으나 골키퍼 고든 뱅크스를 향한 차칭 파울이 선언되어 득점이 무산되었다. 경기는 그대로 흘러갔고, 결국 더 이상의 득점 없이 종료 휘슬이 울렸다. 1-1 무승부였다. 경기 하이라이트(Youtube)

잉글랜드는 그렇게 난생 처음으로 유로 본선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았다.

잉글랜드의 본선 플레이오프 상대는 파코 헨토가 이끄는 스페인이었다. 본선 참가팀이 4팀으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8강전이나 다름없었다. 1968년 3월 웸블리에서 열린 플레이오프 첫 경기에서 바비 찰튼의 대포알 슈팅을 통해 1:0 클린시트 승리를 거두었고, 2개월 후 마드리드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아만시오에게 선제골을 내주었으나 피터스의 동점골과 하프백 노먼 헌터의 깜짝 역전골로 스페인을 잡아내며 결국 본선에 진출하였다.

잉글랜드는 플레이오프 승리 직후 홈에서 스웨덴과 경기를 가졌고, 홈 관중들과 함께한 잉글랜드는 3-1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잉글랜드는 유로 1968 개최지인 이탈리아로 향하는 길목에서 하노버에 잠시 머무르며 서독 대표팀과 친선전을 갖게 된다. 다만 팀의 간판 바비 찰튼과 핵심 피터스가 부상으로 결장했고 로저 헌트, 지미 그리브스도 모두 없는 상태였기에 그들보다 낮게 평가받던 리버풀의 피터 톰슨, 맨시티의 마이크 서머비 등이 출전하였다.[18]

평소 클래식 윙어 없이 경기하다가 갑자기 윙어(마이크 서머비는 클래식 라이트윙이고, 피터 톰슨은 클래식 레프트윙이었다. 나오지 못한 찰튼과 피터스는 전천후 미드필더 타입의 선수였고.)가 있는 전술 하에서 경기를 하게 된 잉글랜드는 서독을 상대로 예전같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며 좀처럼 골을 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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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골을 득점하는 베켄바우어
결국 경기 82분에 베켄바우어에게 한 방 얻어맞고 패했다. 전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맞붙긴 했지만, 서독을 상대로 역사상 첫 패배를 기록했다는 것이 참 뼈아팠을 것이다.

참고로 이 경기 전까지 잉글랜드와 서독의 상대 전적은 8경기 7승 1무 0패로 잉글랜드가 압도적 우세를 보였으며, 잉글랜드는 서독에게 있어서 천적 그 자체인 존재였다. 그러나 이 첫 패배를 시작으로 그들의 라이벌리는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아무튼 잉글랜드는 독일전 패배 후 뭔가 이상한 느낌을 안고 유로 4강전을 위해 이탈리아로 향했다.

7.3. UEFA 유로 1968

본선 4강에서는 유고슬라비아를 만났고, 예상대로 경기 대부분을 잉글랜드가 주도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는 한 방이 있는 팀이었고, 무어와 뱅크스가 이끄는 잉글랜드의 수비진은 경기가 다 끝나갈 무렵 드라간 자이치의 날쌘 움직임을 놓치며 극장골을 내주고 말았다. 월드컵 챔피언을 잡은 유고슬라비아는 난리가 났다. 잉글랜드는 1:0으로 어이없이 패하며 이변의 희생양이 되었고, 국제대회 2연패의 꿈을 접어야 했다.

덤으로, 경기 종료 1분 정도를 남겨두고 미드필더 앨런 멀레리가 유고슬라비아 선수에게 심한 파울을 당했고, 이에 보복성 걷어차기를 시전했다가 퇴장당했다. 을용타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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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하게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멀레리
이는 잉글랜드 선수가 A매치에서 퇴장당한 첫 사례였다.

그래도 위안거리가 있다면 3-4위전에서 소련을 상대로 2-0 완승을 거두며 3위 안에는 들었다는 점이다.

비록 본선 첫 경기인 4강전에서 패하며 탈락했지만,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 허스트와 무어는 대회 베스트팀에 이름을 올렸다.

7.4. 유로 1968 이후~1970 월드컵 이전

유로 1968에서 우승을 놓친 잉글랜드 대표팀은 부쿠레슈티에 가서 루마니아와 친선전을 진행했는데, 정예 멤버를 거의 다 출전시켰음에도 0:0으로 무승부를 거두며 욕을 먹었다.

그 후 또 한동안 친선 경기를 하지 않다가 12월이 되어서야 웸블리에 불가리아를 불러들였는데, 고든 뱅크스가 결장하고 에버튼의 골리 고든 웨스트가 출전한 이 경기에서 또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또 체면을 구긴다. 물론 게오르기 아스파루호프 등 뛰어난 선수들을 보유한 불가리아도 실력이 나쁜 팀은 아니었지만, 잉글랜드에 비한다면야 패배하는 것이 전력상 당연해 보였기 때문이다. 시메온 시메오노프 골키퍼가 찰튼의 대포알을 몇 개씩이나 막아내는 등 엄청난 좀비수비를 펼친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지만...

그리고 1969년 1월에 가진 1969년의 첫 A매치에서 루마니아를 또 만났는데, 이걸 또 비기면서 3연속 무재배를 했다. 이제 Elo 레이팅 1위 자리도 위태로워진 잉글랜드 대표팀은 챔피언으로서의 명성을 회복할 기회가 필요했다. 잉글랜드 대표팀은 잠시 휴식의 기간을 가졌다.

다행히 그렇게 준비한 게 효과가 있긴 했는지, 5월 프랑스전에서는 5-0 대승을 거두며 월드 챔피언의 폼을 되찾았다.

이후 진행된 홈챔피언십 3연전에서는 모든 경기에서 3득점 이상으로 대승을 거두며 홈 챔피언십 타이틀을 지켜내는 데에 성공했고, 자존심을 살렸다.

1969년 6월, 잉글랜드는 디펜딩 챔피언이었으므로 월드컵 예선은 치르지 않았지만, 월드컵 준비는 확실히 해야 했기에 오랜만에 남미 투어를 진행하기로 했다. 일정은 6월 1일 멕시코, 6월 6일 우루과이, 6월 12일 브라질 순으로 잡혔다.

그러나 상대적 약체인 멕시코를 상대로 또 무승부를 기록하며 자존심을 구겼다. 다행히 다음 경기인 우루과이전에서는 1-2로 승리를 거두며 팬들의 걱정을 잠재웠고, 펠레의 각성과 함께 돌아온 브라질의 홈으로 가서 박빙의 경기를 펼치다가 2-1로 패하며 아쉬움을 샀다. 이 경기는 월드컵 지역예선을 앞두고 있던 브라질에게 유럽 팀 상대로 자신들의 실력을 테스트해 볼 좋은 기회였고, 자이르지뉴, 토스탕 등 젊은 선수들의 좋은 활약으로 월드컵 챔피언을 잡아내는 데에 성공하자 브라질에서도 축제 분위기가 나기 시작했다. 이 경기에서 고든 뱅크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의 낮은 페널티킥을 손쉽게 잡아버리는 등 수많은 선방을 보여주며 자신이 왜 세계 최고의 골키퍼인지 증명했고, 브라질 팬들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했다. 또한 이 경기는 당시 39세였던 브라질 골키퍼 지우마르의 3년 만의 국가대표 복귀전이자 은퇴전이기도 했다.

1969년 11월에는 암스테르담에서 경기를 진행하기도 했는데,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는 콜린 벨의 마수걸이 골로 0-1 승리를 거둔다. 그럼에도 당시 22세였던 요한 크라위프의 활약이 빛났고, 그 매서운 실력을 맛본 잉글랜드의 언론에서는 크라위프를 '제 2의 조지 베스트'라고 부르며 주목하였다. 출처

1969년의 마지막 A매치는 포르투갈전이었고, 3년 전처럼 웸블리에서 무난한 승리를 챙겼다.

1970년, 어느새 월드컵을 6개월 앞둔 시점이 되었다. 잉글랜드는 네덜란드를 상대로 1970년의 첫 경기를 가졌고, 무승부를 거두었다. 벨기에 원정에서는 1-3 승리를 챙겼다. 그 후 한동안 A매치를 갖지 않았다.

1969-70 시즌의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은 시즌을 피해서 진행되었다. 1970년 6월에 월드컵이 열릴 예정이었으므로 정규시즌은 좀 더 앞당겨진 시점에 종료된 상황이었다. 4월 15일에 리그가 종료되었고, FA 컵을 제외하면 모든 대회가 끝난 상태에서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이 열렸다. 대표팀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선수들은 애시당초 리그, 컵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놓친 상황이었으므로, 부담 없이 국가대항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첫 경기는 웨일스전이었는데, 폴란드계 선수 딕 크제비츠키에게 한 골을 허용하며 불안하게 출발했다. 프랜시스 리의 동점골 덕에 승점 1점을 챙기는 데에는 성공했다.

두 번째 경기는 북아일랜드전. 아주 기념비적인 경기이기도 했다. 바비 찰튼이 드디어 국가대표팀 100번째 출장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 경기에서는 특별히 찰튼이 무어 대신 주장완장을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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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번째 A매치를 축하받는 찰튼
피터스와 베스트가 한 골씩 주고받았으며, 허스트가 경기 57분 앞서가는 골을 득점했다. 경기를 완전히 매듭지은 것은 찰튼이었다. 찰튼은 경기 81분에 멋진 골로 득점을 만들어내며 본인의 100번째 A매치를 자축했다.

다음 경기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열렸다. 당연히 상대는 스코틀랜드였다. 양 팀은 수비적으로 경기를 진행했고, 그 결과는 0-0 무승부였다.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가 나란히 승점 4점을 얻으며 우승 트로피를 공유했다. 잉글랜드는 홈 챔피언십이 끝나자마자 코앞으로 다가온 월드컵을 바쁘게 준비했다.

잉글랜드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을 앞두고 남미로 가서 두 차례의 평가전을 진행했는데, 그 상대는 콜롬비아, 에콰도르였다. 남미 팀을 상대하며 더운 멕시코 날씨에 빨리 적응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잉글랜드는 월드컵 디펜딩 챔피언다운 경기력을 보이며 두 경기에서 모두 무실점 대승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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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무어, 체포되다
그런데 월드컵을 코앞에 둔 기간, 갑자기 무어와 바비 찰튼, 그리고 앨런 볼이 호텔 근처의 귀금속 상점에서 금 팔찌를 훔친 혐의로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명 보고타 팔찌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은 영국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잉글랜드 축구의 아이콘인 무어가 월드컵 참가를 못하게 된다면 정말 큰일 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 수상 해럴드 윌슨이 개입하기까지 했던 대사건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바비와 다른 바비가 모두 체포되었음에도 포커스는 온통 무어에게 맞춰져 있던 것으로 보였다는 점이다."
제프 허스트
실제로 모든 언론은 찰튼과 볼은 가만 두고 무어만 공격했다. 찰튼과 볼은 비교적 주목을 덜 받았고, 그래서 멕시코행 비행기에 무리없이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어는 정치적으로도 엮이면서 정말 힘든 시기를 보냈다. 여러 가지 말들이 돌았고 무어는 가택 연금을 당했다. 교도소까지 갈 뻔했지만, 다행히 월드컵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조건부로 풀려나 개인 단위로 멕시코행 비행기를 탔다.
멕시코행 비행기에서 진행한 기자와의 인터뷰
그리고 잉글랜드의 국가대표팀 엔트리에 가까스로 이름을 올린다.[19] 이후 무어와 찰튼은 완전한 무죄였음이 밝혀졌다.
밥은 절대 불평하지 않았다. 멕시코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가? 멕시코에서 그는 공격당했다. 나는 그 때 아래층으로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앨런 볼, 바비 무어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카드 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가게가 많았고, 기다리는 줄이 끔찍하게 길었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줄로 갔다. 그는 손가락으로 다양한 상품들을 가리키며 "이게 좋겠다."라고 말했다. 바비 무어, 바비 찰튼, 앨런 볼이 함께 움직였다. 그들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상품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원하는 상품을 가리킨 뒤 "이게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무어는 당황해서 "뭐야, 뭐야?"라는 말만 내뱉었고, 그 남자는 무어에게 "팔찌."라고 말했다. 그들이 체포된 이유는 그들이 나간 뒤 팔찌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체포된 밥은 3주 동안이나 보고타에 머물러야 했다. 멕시코 월드컵 시작 직전에, 3주 동안이나, 팔찌를 훔친 혐의로. 그는 마침내 팀에 돌아왔고, 돌아온 후에도 그간 있었던 모든 일들에 대해 단 한 마디의 나쁜 말조차 하지 않았다. #
잭 찰튼
당연하지만, 무어는 월드컵 준비 기간을 통째로 날려먹었다. 잉글랜드는 주장이 없는 상태에서 훈련해야 했다. 큰 악재였다.
1970 잉글랜드 대표팀의 훈련 영상 1
그래도 잠시 동안만큼은 팀과 함께 훈련할 수 있었다.
1970 잉글랜드 대표팀의 훈련 영상 2
고든 뱅크스[20]를 비롯한 일부 선수들은 로데오를 즐기며(...) 멕시코 현지 문화 체험을 하기도 했다.

7.5.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

본선 조별리그에서 브라질,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와 한 조가 된다.

잉글랜드의 첫 상대는 루마니아였다. 잉글랜드는 견고한 수비를 통해 1-0 승리를 얻어냈다.

두 번째 경기의 상대는 1962년에 잉글랜드를 탈락시켰던 브라질이었다. 브라질은 지역예선에서 전승을 기록하고 월드컵 무대에 온 팀이었다. 은퇴했던 펠레까지 돌아와 완전히 적응한 상태였고, 아주 강했다. 잉글랜드 역시 월드컵 디펜딩 챔피언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팀을 세계 최강의 국가대표팀으로 간주하였다. # 그야말로 빅 매치였다.

경기가 시작된 지 10분만에 잉글랜드에 매우 큰 위기가 찾아온다. 우측면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기막힌 파워의 땅볼 스루패스를 날렸고, 자이르지뉴는 그것을 받아서 펠레에게 크로스를 올렸다. 무어는 자이르지뉴가 드리블해 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다가갔지만 중앙을 향해 매우 정확한 크로스가 날아가자 크게 당황했다. 펠레는 엄청난 도약력으로 머리에 공을 맞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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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크스의 선방
"What a save! Gordon Banks...!"
케네스 월스턴홈, BBC 해설위원
이 선방 이후 거짓말처럼 잉글랜드의 사기가 오르더니, 브라질보다 우세한 경기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잉글랜드가 마음 놓고 공격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에는 무어의 공이 컸다. 무어는 브라질의 총공세를 죄다 묶어버렸고, 펠레조차도 무어를 뚫어내지 못하고 쩔쩔맸다. 게다가 브라질의 중원에는 제르송이 없는 상태였기에 브라질의 공격은 더욱 풀리지 않았다. 양 팀이 몇 번의 공방을 주고받다가 점수가 나지 않은 채 그대로 전반전이 끝났다.

첫 번째 경기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박살내버린 브라질이었지만 무어와 뱅크스를 상대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런 브라질에게 딱 한 번 더 절호의 찬스가 찾아왔다. 경기 56분, 토스탕이 순간적으로 무어와 뉴튼의 압박에서 벗어나 페널티 박스 중앙의 펠레에게 크로스를 제공했다. 펠레는 슛을 하지 않고 오른쪽의 자이르지뉴에게 약한 패스를 주었다. 펠레의 센스가 빛나는 장면이었다. 대놓고 1:1상황이 되었고, 뱅크스가 빠르게 뛰어나왔지만 자이르지뉴의 슈팅이 좀 더 빨랐다. 잉글랜드의 대회 첫 번째 실점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잉글랜드는 실점한 지 몇 분 안 된 시점에서 다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잉글랜드의 공격 작업이 무위에 그치고 아우베르투의 롱패스를 이어받은 자이르지뉴가 어마어마한 스피드로 달려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완벽한 역습 상황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전에서 비슷한 상황에 세 명을 연달아 제치고 골을 만들어냈던 자이르지뉴였기에 경기장에 있던 잉글랜드 팬들은 경악했다. 자이르지뉴의 앞에는 무어밖에 없었다. 무어는 자이르지뉴 앞에서 침착하게 뒤로 슬슬 물러나면서 태클 타이밍을 노렸다. 무어의 노련한 수비 덕에 자이르지뉴의 스피드가 줄어들었고, 이 덕에 다른 잉글랜드 수비수들이 빠르게 복귀할 수 있었다. 자이르지뉴와 무어는 서로 마주 본 채 페널티박스 안까지 들어왔다. 그리고 무어는 태클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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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적인 태클
"자이르지뉴가 달려 들어오기 시작했고, 1:1 상황이었다. 자이르지뉴는 그 월드컵에서 모두를 박살내버린 바 있었다. 그는 하프라인을 넘어 바비에게 돌진하고 있었고, 나는 생각했다. '오 세상에, 1:1 상황이야. 이건 들어간 거나 마찬가지야.' 바비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타이밍을 찾았을 때, 바비는 미끄러져 들어갔다. Boom."[21]
해리 레드냅, 다큐멘터리 Bobby에서
그야말로 완벽한 태클이었다. 관중석에서는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무어는 이 장면 이후에도 몇 번이나 환상적인 장면을 보여주었다. 제프 애스틀와 앨런 볼 등 잉글랜드의 선수들도 수많은 찬스를 잡았지만 앨런 볼의 슈팅은 골대를 맞혔고 애스틀의 슈팅은 바닥에 깔리며 벗어났다. 결국 잉글랜드는 운이 없게도 득점을 올리지 못했다. 펠레를 비롯한 브라질 선수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고, 심판에게 경기를 빨리 끝내라는 제스처를 보여주기도 했다. 결국 그대로 경기가 종료되었다. 잉글랜드의 아쉬운 1-0 패배였다. 펠레는 경기가 끝나자마자 무어에게 다가갔다. 둘은 서로를 끌어안았고, 기자들이 둘을 둘러싸며 플래시를 펑펑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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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와 유니폼을 교환하는 무어

다음 경기인 체코슬로바키아전에서 잉글랜드는 또 무실점 승리를 거두었다. 루마니아전과 마찬가지로 스코어는 1:0이었다. 잉글랜드는 2승 1패 2골 1실점을 기록했다. 조 2위였고, 8강 진출권을 따냈다.

그러나 8강전을 앞두고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오는데, 세계 최고의 수문장인 고든 뱅크스가 식중독으로 인해 뛸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이 그것이다. 말도 안 되는 악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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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직전, 우베 젤러와의 악수
8강에 올라가게 된 잉글랜드는 서독과 맞붙게 된다. 전력이 온전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는 2-0 리드를 가져가는 데 성공했고, 서독 선수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후 페널티킥이 주어져야 마땅한 상황이 세 번이나 나왔지만 아르헨티나인 주심은 잉글랜드 선수들에게 불리한 판정을 계속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잉글랜드가 우세했기 때문에 알프 램지 감독은 33세의 바비 찰튼을 체력 안배 차원에서 교체하기로 한다. 때마침 베켄바워가 중거리 슈팅으로 만회골을 넣었는데, 이 과정에서 고든 뱅크스 대신 나온 골키퍼 피터 보네티의 다이빙이 다소 아쉬웠다.

이후 얼마 안 가 서독 주장 젤러가 환상적인 헤더를 통해 동점골을 성공시켰고, 연장전에서 뮐러가 골을 넣으며 서독이 역전에 성공했다. 그대로 경기가 종료되어 서독이 4강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경기를 끝으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은 4년간 지켜왔던 Elo 레이팅 1위 자리를 브라질에게 내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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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의 씁쓸함을 느끼는 바비 찰튼과 램지 감독
잉글랜드는 이 경기에 다소 아쉬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전반전에도 영 석연찮은 판정들이 있었던 데다가 연장 22분에 페널티 박스에서 나온 베켄바우어의 파울성 태클마저 주심에 의해 무시되었기 때문이다.[22]또한 당시 4강전 상대로 맞붙을 예정이었던 이탈리아는 당시까지만 해도 잉글랜드를 상대로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고, 다음 경기에서는 뱅크스가 뛸 수 있었기 때문에 이 경기만 이겼더라면 결승전에 진출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이었다. 식중독이라는 어이없는 이유로 주전 골키퍼를 잃은 상태에서 경기를 치러야 했고, 주심의 판정도 이상했으므로 잉글랜드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아쉬웠던 대회.

뱅크스는 팀이 머무르는 호텔에서 늦게 송출되는 방송을 통해 2-0으로 앞서가는 경기 장면을 보고 있다가, 숙소에 일찍 돌아온 써드 골키퍼 알렉스 스테프니를 통해 잉글랜드가 졌다는 소식을 듣고 썩소를 지었다고 한다. 출처

그래도 고든 뱅크스는 이 대회를 통해 '월드 넘버원 골키퍼'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얻을 수 있었다. 캡틴 바비 무어도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통해 연말 발롱도르 투표에서 1위 뮐러와 단 7포인트 차로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8. 잃어버린 시대(1970~1980)

1970년 월드컵 이후 바비 찰튼이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잉글랜드는 그의 후계자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콜린 벨, 앨런 볼, 마틴 피터스 등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미드필더들이 있긴 했지만 아직 찰튼에 비하면 부족한 선수들이었다. 이 셋은 월드컵 이후에도 대표팀 고정 멤버로 기용되었다.

잉글랜드는 탈락의 충격으로 약 5개월 정도 A매치를 갖지 않다가, 1970년 11월 동독을 웸블리로 맞이하여 오랜만에 A매치를 치른다. 고든 뱅크스의 부상으로 인해 피터 쉴튼이 데뷔전을 진행했고, 결과는 잉글랜드의 3-1 승리였다. 잉글랜드는 더 이상 '세계 최강'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Elo 레이팅에서 여전히 브라질에 이은 2위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1971년 2월, 유로 1972 예선이 시작되었다. 첫 상대는 몰타였다. 몰타 원정 경기였지만, 잉글랜드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었으므로 램지 감독은 A매치 경험이 없는 선수를 이 경기에서 무려 네 명(콜린 하비, 마틴 치버스, 조 로일, 로이 맥팔랜드)이나 데뷔시켰고, 주장 무어도 출전시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잉글랜드는 0-1로 승리를 거두었다.

1970-71 시즌의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은 1969-70 시즌과 마찬가지로 프리 시즌 기간에 열렸다. 1970-71 시즌 각국의 리그가 종료된 후 개최되었는데, 유로 1972 예선과 겹친 시점에서 진행된지라 일정 자체가 상당히 빡빡했다. 1971년 4월 21일에는 그리스를 상대했고, 5월 12일에는 몰타를 상대했다. 잉글랜드는 두 경기 모두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5월 15일에 벨파스트 원정에서도 잉글랜드는 북아일랜드에 0-1 무실점 승리를 거두었다.

다음 경기는 3일 후에 열릴 예정이었다. 캡틴 바비 무어가 잉글랜드 내에서 아무리 중요한 선수여도 일주일동안 세 경기를 치르게 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알프 램지 감독은 무어를 휴식시켰다. 이 경기에서는 무어 대신 콜린 벨이 주장 완장을 찼다 #. 잉글랜드는 웸블리에서 웨일스를 상대로 0-0 무승부를 거두었다.
잉글랜드 vs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와 웨일스도 만만찮은 상대지만, 홈 챔피언십 최고의 볼거리는 역시 매 대회 마지막마다 열리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경기였다. 5월 22일 경기였고, 이 경기에서 앨런 볼과 무어 등 베테랑 선수들이 다소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마틴 치버스가 두 골을 득점하는 등 엄청난 활약을 펼치며 3-1 승리를 이끌었다.

10월에는 스위스 원정에서 유로 예선 네 번째 경기를 진행했고, 이 경기에서 2-3로 승리를 거두며 유로 예선 통과가 사실상 확정되었다.

그 후 홈에서 스위스와 무승부를 기록했고, 아테네 원정에서 0-2 승리를 거두며 6전 5승 1무의 압도적인 성적으로 본선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잉글랜드는 이미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헬무트 쇤 감독 휘하에서 귄터 네처 프란츠 베켄바워를 중심으로 '람바참바 팀'을 구축한 서독 정도를 제외하면 잉글랜드의 적수는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최종 플레이오프에서 그 서독을 만났다. 잉글랜드는 무척 긴장했다. 서독 선수들도 잔뜩 긴장해 있었다. 잉글랜드와의 상대 전적이 당시까지도 2승 1무 7패로 압도적인 열세였으며, 특히 잉글랜드의 홈 웸블리에서 펼쳐지는 경기에서는 단 한 번도 승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서독의 핵심 멤버 두 명이 경기 시작 전에 이런 대화를 했을 정도이다.
귄터 네처: "프란츠, 우리가 한 5골보다 적게 내주고 경기를 끝내면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프란츠 베켄바워: "그렇겠지..."
출처

서독은 준비를 많이 하고 나왔다. 귄터 네처와 베켄바워를 중심으로 팀을 구성한 헬무트 쇤 감독의 전술이 잘 맞아 떨어졌고, 잉글랜드를 상대로 좋은 경기를 보여주었다. 전반전은 0-1으로 서독이 한 점 앞선 상황에서 끝났다.

후반전 역시 막상막하였다. 경기 77분 프랜시스 리가 동점골을 득점하며 1-1 동점을 만들었다. 그러나, 동점골을 넣은 지 몇 분 안 된 시점에서 잉글랜드에게 대위기가 찾아온다. 무어는 뛰어들어가는 지그프리트 헬트를 저지하기 위해 다소 깊은 태클을 시도했다. 공을 먼저 건드렸지만, 공은 그대로 앞으로 지나갔다. 소유권을 완전히 가져오지 못한 상황에서 헬트가 무어의 다리에 걸려 넘어졌다. 반칙이었다. 주심은 단호하게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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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의 실수
고든 뱅크스가 네처의 페널티킥을 완벽하게 읽어냈지만 손 맞고 골대 맞고 골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후 게르트 뮐러에게 한 골을 추가실점하며 1:3으로 패배했다. 서독은 자국 축구협회 출범 이후 70년 가까이 이어진 징글징글한 웸블리 징크스를 깼다. 이 경기는 잉글랜드 대표팀이 1967년 스코틀랜드전 이후 5년만에 기록한 홈 패배였다.

서독 홈구장에서 펼쳐진 2차전. 이날 잉글랜드가 입은 유니폼은 1966년에 자국에서, 1970년에는 멕시코에서 입었던 유니폼과 동일한 빨간색이었다. 잉글랜드는 1966년의 좋은 기억을 재현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이 경기에서는 양 팀이 모두 철통같은 수비를 선보였고, 결국 무득점으로 경기를 마쳤다. 그 결과 서독이 최종점수 3:1로 유로 1972 본선에 진출했고, 플레이오프에서 올라온 나머지 팀은 벨기에, 헝가리, 소련이었다. 잉글랜드를 어렵게 이겼던 서독은 본선 두 경기에서 게르트 뮐러 혼자 4골을 때려박으며 손쉽게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제프 허스트는 서독 원정 엔트리에 포함된 것을 끝으로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1971-72 시즌 홈 챔피언십이었다. 웨일스를 상대로는 손쉬운 승리를 거두었으나, 북아일랜드전에서는 피터 실튼, 콜린 토드, 피터 스토리 등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을 내보내고 무어, 피터스, 뱅크스 등 주축 선수들 대부분에게 휴식을 주었는데, 그 결과 웸블리 경기였음에도 불구하고 0-1 패배를 기록하고 만다. 어린 선수들은 너무 부족했고, 잉글랜드는 여전히 1966년의 영웅들을 필요로 했다. 어느덧 무어&뱅크스는 국가대표팀을 위해 100경기 가까이 뛴 상태였다.
잉글랜드 vs 스코틀랜드
램지는 결국 다음 경기에서 무어와 뱅크스, 피터스를 선발 명단에 복귀시켰다. 스코틀랜드전은 아주 재미있는 경기였다. 고든 뱅크스의 선방쇼가 빛났으며, 경기 내내 흥미진진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앨런 볼의 결승골로 잉글랜드가 승리했고, 승점 4점을 기록하여 스코틀랜드와 같은 승점을 기록했다. 결국 홈 챔피언십 타이틀을 계속해서 유지하게 되었다.

10월에는 유고슬라비아와 오랜만에 경기를 가졌다. 램지 감독은 웸블리에서 1968년의 복수를 하고자 했으나, 1-1로 비기면서 또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10월 22일, 월드 넘버원 뱅크스가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한 쪽 눈의 시력을 잃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리버풀의 레이 클레멘스와 피터 실튼이 미래의 잉글랜드 주전 골키퍼 자리를 두고 경쟁하게 되었다.

이로써 찰튼, 무어, 뱅크스가 이끈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첫 전성기는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잉글랜드의 실질적인 전성기는 끝났지만, 캡틴 바비 무어는 계속 남아 대표팀을 이끌었다. 1973년 발렌타인 데이에 펼쳐진 스코틀랜드와의 친선 경기에서 5-0승리로 본인의 100번째 A매치를 장식했다. 바비 무어는 빌리 라이트, 바비 찰튼에 이어 FIFA 센추리 클럽에 가입한 세 번째 잉글랜드 선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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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번째 A매치를 기념하여 축구 꿈나무 100명과 함께 사진을 찍는 무어
무어가 센추리 클럽에 가입한 그 시점에서 대표팀에 남아있던 1966년 우승 주전 멤버는 무어, 피터스, 앨런 볼 세 명 뿐이었다.

하지만 위의 경기는 어디까지나 친선전이었고,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은 따로 진행되었다. 잉글랜드는 1974년 월드컵 예선에서 웨일스를 상대로 1승 1무라는, 다소 께름칙한 성적을 거둔 상태에서 홈 챔피언십에 참여하게 되었다. 잉글랜드의 첫 상대는 북아일랜드였다. 경기는 구디슨 파크에서 열렸고, 기록상 홈 팀은 북아일랜드였다. 잉글랜드는 마틴 치버스의 멀티골에 힘입어 1-2승리를 거두었다. 무어는 3일 후 웨일스와의 경기에도 참여했다. 잉글랜드는 웸블리에서 3-0 승리를 거두며 홈 팬들을 만족시켜 주었다.
잉글랜드 vs 스코틀랜드
4일 후 웸블리에서 열린 스코틀랜드와의 경기는 박빙이었다. 양팀이 서로 치고받는 양상으로 흘러간 경기였다. 경기 54분, 마틴 피터스가 해결사 면모를 보여주며 득점에 성공했다. 잉글랜드는 1-0 리드를 가져갔고, 훌륭한 수비력으로 무실점을 그대로 지켜냈다. 승리였다.

잉글랜드는 3전 전승을 기록했다. 또다시 우승을 차지하며 6연속 홈챔피언십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

1974년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 잉글랜드는 폴란드, 웨일스와 같은 조에 속했다. 잉글랜드는 홈 챔피언십이 열리기 전 웨일스를 상대로 이미 1승 1무를 기록해둔 상태였다. 하지만 폴란드의 성적도 아주 좋았다. 때문에, 6월에 열리는 폴란드 상대 2연전에서는 무조건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 월드컵에 나갈 수 있었다. 경기는 1973년 6월 6일 폴란드에서 열렸다. 잉글랜드는 역사상 처음으로 노란색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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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초의 노란색 유니폼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폴란드의 로베르트 가도하가 경기 7분만에 프리킥 득점을 터뜨린 것이었다. 잉글랜드는 분전했으나 폴란드의 수비력은 강했다. 후반전이 시작한 지 2분 후, 바비 무어는 잉글랜드 진영에서 폴란드 공격수 브워지미에슈 루반스키의 압박에 그만 공을 빼앗기고 말았다.

치명적인 실수였다. 루반스키는 엄청난 스피드를 자랑하며 실튼을 뚫어내고 스코어 2-0을 만들었다. 추가골을 득점한 폴란드는 걸어잠그기 모드에 돌입했고, 몇몇 선수들은 침대축구를 시전했다. 잉글랜드 선수 대부분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에도 싸움닭 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던 앨런 볼은 로이 맥팔란드와의 경합 이후 바닥에 쓰러진 폴란드 선수 레스와프 치미키에비치의 멱살을 잡아 퇴장당하기도 했다. 잉글랜드는 그렇게 원정에서 패하고 돌아왔다. 무어는 자신이 패배에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고, 며칠 동안 큰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의 얼굴은 상당히 붉어졌고, 그는 고뇌에 빠져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거렸다. 우리는 어느 날 산책을 나갔는데, FA 관계자들을 만났다. 우리는 바비가 공원 벤치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잠도 못 자고 외출도 하지 못하고 밖에 나가지도 못한 채, 벤치 위에서 부랑자처럼 누워 있었다."[23]
나이젤 클라크, 저널리스트
월드컵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폴란드와의 2차전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했다.

그 후 잉글랜드는 여러 차례의 평가전을 가지며 폴란드전을 준비한다. 첫 번째 일정이었던 6월 10일 소련 원정에서는 다행히 승리를 챙겼다. 하지만 또 굴욕을 겪는데, 4일 후 진행된 이탈리아 원정 경기에서 0-2로 패배하며 이탈리아 상대로 역사상 첫 패를 기록한 것이 그것이다. 야신 모드가 된 1973년의 디노 조프가 지키는 골문은 철옹성이나 다름없었다.

잉글랜드는 9월에 오스트리아를 웸블리로 초청하여 7-0으로 두들겨팼다. 이 경기를 본 잉글랜드 팬들은 '잉글랜드가 돌아왔구나' 하는 생각에 안심했고, 한 달 후 웸블리에서 이런 잉글랜드를 상대해야 하는 폴란드 대표팀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폴란드와의 예선 2차전을 진행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경기 전, 브라이언 클러프 감독은 폴란드의 골키퍼 얀 토마제프스키를 특별히 지목하여 광대라고 비난하며 잉글랜드의 대승을 예견했다. 잉글랜드 내의 여론도 클러프의 의견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잉글랜드의 승리를 염원했고, 또 해외에서 많은 사람들이 잉글랜드의 승리를 예견했다.

무조건 이겨야만 하는 매우 중요한 경기였지만, 알프 램지 감독은 주장 무어에게 휴식을 주었다. 무어는 이날 벤치에 앉아서 회의감을 느꼈다. 그리고 램지에게 자신의 역할에 대해 질문했다.
바비 무어: 오늘 내가 벤치에 앉은 것은 내가 더 이상 대표팀에 필요하지 않아서인가요?
알프 램지: 물론 아니지. 난 내년 월드컵에서 팀을 맡아줄 너 같은 주장이 필요해.
무어 대신 완장을 찬 피터스는 주장 역할을 잘 수행했다. 웸블리 관중들의 열띤 응원 속에서 잉글랜드는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경기 57분경에 폴란드 원정에서 겪은 악몽이 데자뷰처럼 되풀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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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자뷰
"바비 무어가 실수하는 것을 보았다면, 당신은 그가 다시는 그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인생을 걸고 보증할 수 있을 것이다. 무어에게 결함이 생기면 그것은 곧 제거되었다. 컴퓨터에 생긴 작은 오류가 지워지듯이. 하지만 끔찍한 아이러니가 있다면, 무어가 아닌 노먼 헌터가 그 실수를 되풀이했다는 것이다."[24]
제프 파월
수비수 노먼 헌터가 지난 경기에서 무어가 보여준 실수를 반복했던 것이다. 헌터는 하프라인 근처에서 그제고슈 라토에게 공을 빼앗겼다. 여기에 더해 피터 실튼의 유명한 옆구리 캐칭실수가 이어지며 어벙벙하게 선제 실점을 내주었다. 이후 얼마 안 된 시점에서 잉글랜드의 앨런 클라크가 페널티킥으로 동점골을 넣었다. 하지만 폴란드의 골키퍼 얀 토마제프스키가 말 그대로 미친 선방쇼를 보여주는 통에 유효슈팅을 열 개 가까이 기록하고도 한 개의 골밖에 기록하지 못했다. 경기는 끝나갔다. 폴란드는 바짝 긴장한 상태로 경기를 뛰었다. 잉글랜드가 한 골이라도 더 넣는다면 월드컵 진출권을 잉글랜드에 내주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벤치가 술렁였다.
바비 무어: 케빈을 투입해요. 케빈을 투입하세요...
알프 램지: 너무 늦었어...
바비 무어: 아닙니다. 아직 늦지 않았어요. 케빈은 할 수 있어요. 왼쪽에 공간이 있잖아요. 케빈은 이 상황에서 누구보다도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출처
램지는 무어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종료를 2분 남겨 둔 시점에서 국가대표팀 기록이 전무한 공격수 케빈 헥터가 경기장에 투입되었다. 무어의 예견은 정확했다. 케빈 헥터는 잉글랜드의 마지막 코너킥 찬스에서 골키퍼 토마제프스키보다도 높게 점프했고, 빈 골대를 향해 헤더 슈팅을 날렸다. 그런데 골키퍼가 없는 공간에는 수비수가 있었다. 결국 이 슈팅마저 골라인을 넘지 못했다. 이 찬스를 마지막으로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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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병상련의 처지
"아마도 나는 그 마지막 휘슬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난 고개를 숙였고, 터벅터벅 걸어나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끝이야, 노먼. 너의 국가대표팀 생활은 끝났어.' 그 때, 바비가 그곳에 있었다. 그는 팔로 내 몸을 감싼 채 무엇인가 이야기했다. 지금은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내가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는 사실 뿐이다."
노먼 헌터, 다큐멘터리 Bobby에서
조 1위는 그대로 폴란드가 차지했다.

폴란드 골키퍼 토마제프스키의 전설적인 활약에 의해 잉글랜드가 탈락하는 대이변이 일어났다. 캡틴 무어의 월드컵 도전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1974년 월드컵은 잉글랜드가 모든 힘을 다 쏟아붓고도 월드컵에 나가지 못한 첫 사례였다. 더군나나 같은 월드컵 때 영연방 내 최대의 라이벌 스코틀랜드가 월드컵 진출에 성공했으니 이만한 굴욕도 없었을 것이다. 알프 램지 감독의 굳건했던 지위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침울해진 잉글랜드는 1973년 11월에 이탈리아를 홈으로 불러들였다. 홈에서는 아직 이탈리아에게 진 적이 없었기에 팬들은 이 경기를 통해 위로받기 원했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시종일관 이탈리아를 압도하고도 조프[25]에게 번번이 막히며 파비오 카펠로에게 결승골을 얻어맞고 패하게 된다. 40년 넘게 잉글랜드의 '밥'이었던 이탈리아도 이제는 더 이상 잉글랜드의 밥이 아니었다.

그리고 바비 무어는 이 경기를 통해 잉글랜드와 자신의 실력이 많이 떨어졌음을 느끼고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1974년 4월 포르투갈전 무승부를 끝으로 알프 램지도 대표팀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임시 감독으로 조 머서가 7경기 정도를 야무지게 커버해 주었고, 후임 감독으로는 리즈의 전설 돈 레비가 부임했지만 레비의 성향은 잉글랜드 대표팀과 잘 맞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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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마틴 돕슨과 경합하는 체코슬로바키아 골키퍼 이보 빅토르
결국 1976년 유로 예선에서는 조 2위를 기록해 탈락. 이 때도 재수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잉글랜드와 같은 조에서 1위를 기록하여 본선에 올라간 체코슬로바키아가 다름아닌 유로 1976 우승팀이었기 때문이다. 유로 본선을 놓친 시점에서, 1966년 월드컵 우승 멤버 중 최연소 선수였던 앨런 볼까지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며 1966년의 우승 멤버는 더 이상 대표팀에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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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친토 파케티와 케빈 키건의 경합
1978년 월드컵 예선에서는 리버풀 유로피언컵 우승의 주역 케빈 키건이 전성기의 기량을 자랑했음에도 불구하고 탈락했다. 그것도 조 1위 이탈리아에 2-0으로 이기고도 골득실 부분에서 3점이 밀려서.[26] 물론 지금보다 예선 통과가 훨씬 까다로웠지만, 1972년, 1974년, 1976년, 1978년 네 개의 메이저 대회에서 매번 아쉽게 본선에 오르지 못했다.

네 대회 연속 지역예선 탈락이라는 아픔을 겪었는데, 그나마 위안거리가 될 만한 점은 자신들을 꺾고 올라간 팀들이 전부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점이다. 질 만해서 졌다
  • 1972년 유로 플레이오프에서 잉글랜드를 막은 서독: 우승
  • 1974년 월드컵 예선에서 잉글랜드를 막은 폴란드: 최종 3위(역대 최고 성적)
  • 1976년 유로 예선에서 잉글랜드를 잡은 체코슬로바키아: 우승
  • 1978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잉글랜드를 골득실로 밀어낸 이탈리아: 최종 4위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고 유로 3위를 달성했던 60년대에 비한다면 70년대의 잉글랜드 축구는 '암흑기를 맞았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9. 부흥기와 암흑기(1980~1996)

1980년대는 잉글랜드의 제2의 전성기이다. 1980 유로 본선에서 비록 조 3위로 탈락했지만[27] 당시에는 유로 본선 티켓이 8장뿐이었으므로 8강에 진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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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를 상대로 득점한 뒤 기뻐하는 브라이언 롭슨, 테리 버처
1982년 월드컵에서는 브라이언 롭슨의 대활약으로 플라티니의 프랑스를 이기며 조별리그 3전 전승으로 2라운드에 오르는 성과를 보였다.[28] 2라운드에서 서독, 스페인과 연속으로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조 2위로 무패탈락해 아쉽게 4강에 오르지 못하였다.

유로 1984 예선에서는 캡틴 모르텐 올센, 유럽 최고의 공격수 프레벤 엘케어, 신동 미카엘 라우드루프가 이끄는 덴마크에 일격을 당하며 탈락했다.

1986년 월드컵에서는 모로코에게 무재배를 하고 포르투갈에 패하는 등 초반 2경기에서 매우 부진하면서 탈락 위기에 몰렸지만 마지막 경기에서 폴란드를 3:0으로 누르고 1974년 월드컵 예선의 복수에 성공하며 극적으로 16강에 합류, 16강전에서는 남미의 복병인 파라과이를 3:0으로 잡아내어 8강에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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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과이전, 득점에 성공한 게리 리네커
잉글랜드 최고의 선수 게리 리네커는 폴란드전 헤트트릭을 포함 이 두경기에서 5골을 뽑아내는 위엄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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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손'
하지만, 8강에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마라도나의 원맨쇼에 눈물을 흘리며 패배했다. 역사상 가장 논란이 있는 신의 손 오심골과 50m 드리블 돌파 역대 최고의 골을 맛본 경기였다.

게리 리네커는 월드컵 득점왕에도 오르고 이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토대로 발롱도르 2위에도 오르는 등 커리어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잉글랜드는 1987년에 큰 상승세를 타며 17년만에 Elo 레이팅 1위에 등극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는데, 평가전에서의 좋은 기세와는 달리 유로 1988 본선에서는 마르코 판바스턴에게 해트트릭을 허용하기도 했으며, 별로 특별한 인상을 주지 못한 채 탈락했다.

두 대회에서의 분전을 디딤돌로 삼아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선 게리 리네커, 폴 개스코인으로 1966년 이후 월드컵에서 24년만에 4강에 진출했다.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조별예선에서는 이집트를 상대로 한점 차로 겨우 이기고 이후 16강에서는 벨기에와 승부차기 직전까지 갔다가 경기 종료 1분을 남기고 극적인 결승골로 8강에 진출, 8강전에서는 당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카메룬 상대로 1:2로 끌려다니다 논란이 있는 편파성 PK를 잇달아 얻으며 극적인 역전을 하는 등 경기 내용에서는 1986년보다 떨어진다는 평가가 많았지만, 4강에서 대회 우승국이자 라이벌 서독을 상대로 승부차기까지 끌고 가는 명승부를 보이면서 이전까지의 비판을 칭찬으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골키퍼 피터 실튼은 서독 키커 네 명의 슛 방향을 모두 맞히고도 한 개도 못 막아서 느림보라고 까이기도 했다. 당시 나이가 40세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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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스코인의 눈물
개스코인은 승부차기에서 패하고 눈물을 흘렸다. 이 모습에 많은 잉글랜드인들이 가슴 아파했다. 비록 승부차기에 패배해 결승진출에는 실패했지만, 1968년 이후 처음 밟아본 메이저 국제 대회 4강 무대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월드컵이었다.

잉글랜드에서 걸핏하면 리네커 개스코인 하고 노래를 부르는 이유가 이 시절의 추억 때문이다. 직접 본 적도 없는 무어나 찰튼을 추억할 수는 없으니까... 이 시절 잉글랜드는 우승은 못했지만, 국가대표팀에서 나름대로 알맹이 있는 성적을 거뒀었다.

유로 1992 예선에서 7조 1위를 기록하며 또 좋은 성적을 쓰나 싶었지만, 본선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조별리그 꼴찌로 탈락했다.

1994 월드컵에서도 노르웨이의 예상못한 돌풍에 예선 탈락을 하고 말았다.[29] 잉글랜드 입장에서 보면 엄청나게 억울한 지역예선 탈락인데 승패 여부를 떠나서 26골이나 넣고도 본선에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좋은 득점력으로 집에서 텔레비전이나 봐야 했다는 사실이 누가 생각해도 처참하기 그지 없다. 이 경기를 중계하던 노르웨이의 해설자는 잉글랜드를 잡은 기쁨에 겨워 "노르웨이가 잉글랜드를 잡았습니다! 우리가 세계 최고입니다!"라고 하면서 "잉글랜드, 위인들의 보금자리... 넬슨 제독, 윈스턴 처칠 경..." 갑자기 영국 위인들의 이름을 읊더니 " 마가렛 대처, 내 말이 들리십니까(Maggie Thatcher, Can you hear me?)라는 감정적인 해설을 대놓고 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홈에서 열린 유로 1996에서는 준결승 진출을 기록했다. 조별 예선에서는 스위스와 1대1로 비기며 불안하게 출발했으나 필생의 라이벌 스코틀랜드를 앨런 시어러와 폴 개스코인의 연속골로 2대0으로 제압했고[30] 히딩크의 네덜란드마저 막강 화력으로 4대1로 떡실신시키며 예선을 가뿐히 통과한다. 이 경기에도 의미가 부여되는게, 잉글랜드 입장에서는 유로 1988에서 반 바스텐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한 분풀이를 하였다. 더욱이 당시 신예였던 토니 애덤스는 그 충격으로 알콜중독까지 갔다가 재기해낸 상황이었고 이 경기에서 그야말로 팀의 주장으로서 완승을 이끌어내며 악몽을 털어냈다.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는 역대급 홈버프 편파판정이라는 오명을 듣기도 했으나[31] 0대0 무승부 후 승부차기에 승리해[32] 1968년 이후 28년만에 유로 4강에 진출했다. 4강에서는 경기 초반부터 화끈한 화력으로 독일에 우위를 보였으나 결국 1대1 무승부 후 그 유명한 가레스 사우스게이트의 실축으로 승부차기에서 패배하고 말았다.[33] 여담으로 1996년 8강 스페인과의 승부차기가 2018 러시아 월드컵의 승부차기 승리 이전 잉글랜드가 유일하게 승부차기에서 승리한 경기이다.

10. 이름값 못하는 세대(1996~2016)

잉글랜드에게 승부차기의 악령은 1998 월드컵까지 계속되는데, 예선에서 무난한 경기력으로 튀니지와 콜롬비아를 각각 2대0으로 제압했으나 하지의 루마니아에게 1대2로 석패[34]한 것이 화근이 되어 조 2위로 16강에 올라 바티스투타의 아르헨티나와 만난다. 메이저대회에 화려하게 첫선을 보이며 콜롬비아전에서 멋진 프리킥 골을 성공시킨 데이비드 베컴이 확실히 다른 차원의 볼 공급을 보여줬고 이를 골결정력으로 완성시킨 신성 마이클 오언의 활약을 바탕으로 아르헨티나에 약간 우위라고 할 수 있는 경기력을 보였으나, 숄 캠벨의 세번째 골이 무효처리되고 베컴이 시메오네와 시비로 퇴장당하는 등 불운 끝에 승부차기에서 미드필더 배티의 실축으로 허무하게 조기탈락하고 만다. 이 대회를 기점으로 잉글랜드 국가대표는 세대교체가 본격화되었고 기존의 터줏대감들인 토니 애덤스, 폴 개스코인, 데이비드 플랫 등이 대표팀에서 하차하게 된다.

그러나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 중반까지 잉글랜드 대표팀에는 후술될 실력 좋은 선수들이 리그에서 쏟아져 나왔고, 이를 토대로 2006년 월드컵까지 꾸준히 8강권 전력을 유지하게 된다.

이미 간판 스타였으며 원숙해진 절정의 기량에 오른 데이비드 베컴은 말 할 필요도 없고 마이클 오언의 폭발적인 드리블과 득점력은 강력한 공격 옵션이었다. 게다가 베컴과 함께 한참 전성기였던 패스 마스터 폴 스콜스가 중원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베컴, 오언과 스콜스 보다 더 무시무시했던 건 이 당시 잉글랜드의 막강한 수비진. 무시무시한 피지컬로 상대 공격진들을 씹어먹던 솔 켐벨과 리오 퍼디난드가 버티는 센터백 라인은 당대 최강급이었고, 이 당시 기량이 절정이었던 애슐리 콜은 왼쪽으로 들어오는 윙어를 보이는 족족 지워버리는 맹활약을 했다. 하지만 수비력이 뛰어난 대신 공격력은 이러한 수비력에 비해 약했기 때문에 2002년 한일 월드컵 본선 개막직전 당시에 남미 예선을 말 그대로 씹어먹으며 우승후보 0순위로 뽑히던 아르헨티나의 세계 최고 공격수들을 상대로는 아쉽게 득점을 내진 못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마르셀로 비엘사 감독은 가브리엘 바티스투타를 빼지 않는 판단을 했는데 오히려 이 때문에 잉글랜드가 반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8강에서는 브라질의 외계인 신성 호나우지뉴에게 무너지며 2:1로 탈락했지만[35] 이 때만큼 잉글랜드가 퍼포먼스적인 측면으로 보나 조직력으로 보나 화려했던 시절은 2006년 이후 그 후로 오지 않았다. 그나마도 잉글랜드가 수비 위주의 팀이었을 뿐 공격력은 수비에 비해 약했기 때문에 잉글랜드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화력을 보여준 것이라고는 유럽 지역 예선 독일전에서 5-1로 대승을 거둔 것과 본선 16강 덴마크전에서 3-0으로 덴마크를 농락한 게 전부다. 2006년 월드컵 당시에도 램파드-제라드-베컴이라는 네임밸류만 놓고보면 카카-호나우두-아드리아누-호나우지뉴 판타스틱 4의 브라질 다음가는 미드필더진을 보유해 우승후보라고 불렀지만 2002년때 죽음의 조를 돌파했고 유로 2004에서 10득점 6실점 했던 모습과는 다르게 조별리그는 물론 16강 에콰도르전에서도 부진한 경기력을 선보였고 베컴이 교체당하고 루니가 퇴장당한 포르투갈과의 8강경기에서 10명이서 연장전까지 분투하고 승부차기까지 넘어갔지만 히카르두의 신들린 선방으로 탈락했다.
다만, 2005년경부터 생성된 해축빠들에게는 역대급 전력이라 평가받았지만 제라드-램파드 라인의 공존 실패 및 EPL에서 발전된 잉글랜드 선수 과대평가까지 겹쳐서 이름값에 비해 별로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물론 잉글랜드 선수들은 과장된 면이 매우 큰데다[36] 이름값에 비해 성적 못내는 전통으로 인해 올드 해축빠, 전문가, 종사가들에겐 실망감만 안겨주었다.

2010년 초기에는 데이비드 베컴이 은퇴하고 마이클 오언 스티븐 제라드, 프랭크 램파드 등의 스타 선수들의 노쇠화가 진행된 이후로는 세대교체에 난항을 겪으며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라이벌 팀들 중 미로슬라프 클로제의 등장 이후 스타 플레이어들이 뭉텅이로 등장한 독일 대표팀이나 리오넬 메시라는 축구사에 길이 남을 선수가 등장한 아르헨티나와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2010년대 초반 잉글랜드 최고의 선수라는 웨인 루니도 이상하게 국가대표 경기에서는 버로우... 사실 월드컵에서 10경기만에 첫골을 기록한 웨인 루니는 리오넬 메시는커녕 곤살로 이과인보다도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하지만 현재는 잉글랜드의 젊고 유능한 유망주들이 많이 등장해 현재는 세대교체에 성공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선 우루과이, 이탈리아, 코스타리카와 같이 죽음의 조에 편성되어 탈락 가능성도 점쳐졌다. 최약체로 꼽히던 코스타리카가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우루과이와 이탈리아를 연이어 이기면서 가장 먼저 16강에 진출함과 동시에 이탈리아와 우루과이에게 이미 패했던 잉글랜드는 가장 먼저 탈락이 확정됐다. 잉글랜드가 1라운드에서 탈락한 건 무려 56년 만이지만 반면 잉글랜드가 16강에 못간건 지역예선조차 광탈했던 1994 FIFA 월드컵 미국 이후로 20년 만의 일이다. 프리미어 리그의 전현직 선수들[37]의 골들로 잉글랜드는 1994 FIFA 월드컵 미국 예선 탈락 이후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고 말았다.

하지만 2015년 현재 유로예선과 A매치에서 연승 무패를 기록하며 순항중. 2015년 9월 5일, 예선 7연승을 기록하며 개최국인 프랑스를 제외한 유로 2016 본선 진출권을 가장 먼저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스위스에서의 경기에서 해리 케인의 활약으로 예선 1위를 확정지었다. 그리고 이 A매치 무패기록은 2015년 11월 13일 벌어진 스페인과의 평가전에서 2:0으로 무난하게 발리면서 끝났다. 델 보스케 감독은 잉글랜드는 훌륭한 선수들이 많지만 팀의 조직력만 키운다면 현재 스페인처럼 우승컵을 들어올릴수 있다고 말했다. 테러때문에 취소될 뻔 했던 프랑스와의 평가전이 17일에 잉글랜드에서 열린다. 결과는 잉글랜드의 2:0 승리. 첫 a매치 득점자인 델레 알리 같은 어린 선수들이 빛나는 경기였다.

하지만 이름값 못하는 전통 때문에 사람들은 별 기대를 안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UEFA 유로 2008에서의 스페인처럼 반전을 일으켜 달라진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사람도 있다. 물론 대회가 시작안했기에 결과를 단정짓는것은 금물 데이비드 베컴은 잉글랜드가 어린선수들로 많이 구성되었지만 브라질 월드컵 실패 후 유망주들의 기량이 크게 향상되고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고 있으며, 어리지만 끈끈한 조직력을 선보이고 있다고 말해 잉글랜드의 성공을 확신하고 있다. 과연 베컴과 일부 사람들의 말처럼 잉글랜드가 2008년 전에 이름값 못했던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처럼 반전을 일으킬 수 있을지 주목되고 있다.

리오 퍼디난드, 존 테리라는 최강의 벽을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보유했으나 이후부터 수비 상태는 좋지 않다. 하지만 현재 2015년 크리스 스몰링, 루크 쇼, 필 존스, 존 스톤스 나다니엘 클라인 등의 수준급 수비수 유망주가 많이 나오면서 수비에 강점을 조금이라도 보이고 있는것이라면 다행. 특히 크리스 스몰링, 루크 쇼, 필 존스, 존 스톤스, 나다니엘 클라인 모두 좋은 기량을 발휘하고 있다.

현재로서 전체적인 평가로는 그나마 스타 플레이어들의 힘으로 기대에는 못 미쳐도 2016년대 들어서 해리 케인, 라힘 스털링, 제이미 바디, 로스 바클리, 조던 헨더슨, 델레 알리, 래쉬포드, 잭 버틀랜드 등 그외에 수준급 유망주들이 수많이 등장하며신구조화를 잘 이루어 세대교체에 성공한 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38] 특히 최근에 기량을 발휘하고 있는 젊은 선수들의 미드필더와 포워드가 막강하다. 게다가 조 하트 잭 버틀랜드가 현재 EPL 대활약중이다. 골키퍼 문제도 해결했다. 이런 면으로 잉글랜드에게 기대를 거는 사람도 있는 편이다.

1968년 이후부터 단 한 번도 스웨덴을 이기지 못한 징크스가 있었다. 이 징크스는 2011년 11월 15일 잉글랜드가 스웨덴을 1-0으로 꺾으며 깨졌다. 또한 UEFA 유로 2012 조별 리그 두 번째 경기에서 잉글랜드는 스웨덴을 상대로 3-2 승리를 거두었다. 역대전적은 8승 9무 7패로 잉글랜드가 앞선다. 그리고 2018년 러시아 대회에서 다시 격돌하게 되었다.

라이벌 팀은 , 독일[39], 프랑스, 아르헨티나등이 있다.

그리고 잉글랜드는 승부차기에서 패배하는 징크스가 있다. 1990년 월드컵 준결승전을 시작으로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이전까지 승부차기에서 1승 6패라는 저조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월드컵과 유로 대회에서 각각 3번 패배하여 정상의 자리에서 늘 승부차기는 잉글랜드의 발목을 걸어왔다.[40] 참고로 독일 월드컵 포르투갈전에서는 선수들 모두 슛을 잘 찼는데 골키퍼가 4번이나 막아서 1:3으로 탈락했다. 하지만 최근 조 하트 잭 버틀랜드 프레이저 포스터가 등장하면서 골키퍼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드디어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무대에서 승부차기로 승리를 거두어 전적이 2승 6패로 기록이 올라갔긴 하지만, 아직도 많이 저조하다.

대표팀 명단을 보면 대부분 해외파가 아닌 자국 리그 소속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epl이 크게 발전하면서 많은 돈을 주기 때문에 자국 선수들이 굳이 해외로 나갈 이유가 사라졌으며 해외선수만으로 팀을 꾸릴수 없기 때문에 적당한 실력만 있으면 많은 돈을 받으며 용병으로 나갈 필요 없이 국내리그인 epl에서 뛸 수 있으므로 이로 인해 실력이 정체되고 있다. 혹자는 이것이 잉글랜드 축구 대표팀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보기도 한다. 2019년 기준으로 키런 트리피어 제이든 산초 해외파 2명뿐이다.

유로 2016에서 러시아 웨일스 슬로바키아와 함께 B조의 편성되었다.프랑스처럼 꿀조는 아니지만 독일과 마찬가지로 D조와 E조와 비교적으로 무난한조를 받았다. 3나라와의 상대전적이 우세하기 때문에 독일과 마찬가지로 조 1위 후보로 점처지고는 있다.[41] 그리고 국제대회에서 명성에 비해 워낙 신통치 않은 결과를 내기 때문에 높은 인기만큼 안티도 꽤나 많다. 한마디로 애증 그래서 한국에서는 뻥글랜드라는 멸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2016년 3월 26일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에서 열린 독일과의 친선전에서 3:2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전반 43분 토니 크로스에 선제골, 후반 12분께 마리오 고메스에 추가골을 허용한 잉글랜드는 후반 19분에 해리 케인이 추격골, 29분에 제이미 바디가 동점골을 터뜨려 승부를 원점으로 돌린 상황에서 경기종료를 앞둔 추가시간께 조던 헨더슨의 코너킥 크로스를 에릭 다이어가 그대로 헤딩슛, 골로 연결시켜 3:2 역전승을 안겨 충격을 주었다. 특히 추격골과 결승골을 모두 토트넘소속 선수들이 넣었다는 사실로 인해 토트넘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을 것 같다. 특히 차세대 선수들의 부재로 나름 애먹던 잉글랜드가 해리 케인, 나다니엘 클라인, 제이미 바디, 그리고 조던 헨더슨같은 신예들의 활약에 무척이나 고무되어있을 듯 하다.

그러나 3월 29일에 있었던 네덜란드의 평가전에서는 대니 로즈를 빼고 전부 교체해서 플랜 B의 스쿼드로 선수실험을 했다. 전반전에는 경기의 주도권을 잡았고 제이미 바디의 선제골로 앞서가지만 후반전에서 수비가 무너지는 바람에 네덜란드에게 2:1로 역전패 당했다. 패배의 원인은 수비의 불안이였다 여기에 유로 2016 본선 진출이 좌절된 분풀이를 잉글랜드에게 한 것이라 카더라.그리고 대니 로즈의 핸드볼 파울로 페널티 킥을 준것도 패배의 요인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유로 2016에서는 언제나처럼저질스런 경기를 보여주면서 조 2위로 간신히 16강에 진출했으나 16강에서 꽤 약체(?)인 아이슬란드에게 1-2로 역전패를 당하며 세계 각지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브렉시트 2 대회 전 역대 최고의 대표팀이니 우승후보니 떠들었던게 너무나도 쪽팔릴 정도.결국 경기 후 로이 호지슨 감독이 사임했다.참고로 잉글랜드는 2006 독일월드컵 16강 에콰도르전 1:0 승리를 끝으로 10년째 국가대항전 토너먼트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

2000년대 들어서는 덜한 편이긴 하나 월드컵, 유로 같은 국제대회에서 개최국에게 상당히 기피되는(...) 국가대표팀 중 하나였다. 이유는 다름아닌 악명높은 영국의 훌리건들.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서는 훌리건 창궐을 우려하여 조직위에서 아예 잉글랜드의 조별리그 3경기를 샤르데냐 의 칼리아리에 박아버린 적이 있고,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는 영국의 4개 대표팀이 모두 지역예선에서 탈락하자 대놓고 쾌재를 부를 정도. 2000년대 들어서도 그 명성 어디 가는게 아니라 유로 2016에서 러시아 훌리건들과 대판 붙기도 하여 프랑스 당국을 긴장시켰다. 다만 이 때는 상대가 상대인지라 잉글랜드 팬들이 대거 병원에 실려가는 등 충돌이라기보단 피해에 가깝다.

11. 재도약(2016~)

러시아 월드컵 조별리그에선 무난한 조편성으로 탑시드인 벨기에와 함께 조 1위 싸움을 할 것으로 예상되었고, 그 기대를 충족시키며 토너먼트 진출을 확정했다.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지역예선(유럽)/F조 참고. 16강에서 콜롬비아를 제물로 월드컵 첫 승부차기을 따내고, 8강에서 과거의 천적 스웨덴을 2-0으로 완파하며 4강에 진출했으나 크로아티아와의 4강전에서 1-2로 역전패하며 또 우승에 실패했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에서는 과거의 부진을 떨쳐내고 자국의 수많은 징크스들을 격파하며 최종 4위를 했다. 잉글랜드의 입장에서는 20년 만에 재도약한 셈이다.

하나 긍정적인 부분도 있는데,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초로 승부차기를 이겼다는 것과 월드컵 최다 점수 승리차를 기록한것[42]. 그 동안 승부차기만 나왔다 하면 맨날 깨지기 일수였던 잉글랜드가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에서 콜롬비아를 상대로 사상 최초로 승부차기에서 이겼다. 그 이후 8강에서 숙적인 스웨덴을 경기력에서 압도하며 완승을 거두면서 바이킹 징크스에서 벗어났으나, 4강에서 쌩쌩한 잉글랜드가 16강, 8강 두 경기 연속으로 승부차기끝에 승리를 거두고 4강에 진출한 덕분에 경기력 너덜너덜해진 크로아티아에게 연장 혈투까지 간 끝에 역전패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축구 약소국이라던 크로아티아는 사상 처음으로 결승전에 진출하게 되었다.

또 하나는 코너킥이나 프리킥 등의 세트피스 상황에서의 득점률이 많이 올라 공격 옵션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도 조별리그 최종전과 3위 결정전을 제외하면 모든 경기에서 세트피스로 득점했다. 이는 가레스 사우스게이트의 신박한 세트피스 철학 덕으로, 농구 미식축구 등의 데드볼 상황을 연구하여 낸 성과라고 한다. 잉글랜드만의 특색을 대표팀에 입혔다는 부분에서 장기적으로도 매우 긍정적인 부분.

UEFA 네이션스 리그에서도 호성적을 내며 순항 중이다. 초반에는 스페인에게 1-2로 치이고 크로아티아에게는 무재배를 하며 기복이 있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그 다음 2경기를 내리 승리하며 조별리그를 통과했고, 2019년 6월에 네덜란드와 결승 티켓을 놓고 겨루게 된다. 이번 토너먼트에서도 세트피스에서의 득점들이 굉장히 많았다. 또한 전통적인 강호들이 조별리그에서 줄줄이 떨어져나간 덕에 대진표 또한 지금 잉글랜드 대표팀의 수준으로는 나쁘지 않은 상황.[43][44] 그러나 4강에서 네덜란드에 연장 끝에 1:3으로 패배하였다. 이후 3위 결정전에서 스위스 상대로 승부차기 끝에 승리해 3위에 안착했다.

요약하자면, 2018년 들어 두 개의 큰 대회들에서 연속으로 4강에 진출하여, UEFA 유로 2008부터 UEFA 유로 2016까지 이어졌던 잉글랜드 역사상 손에 꼽을 만한 부진에 종지부를 찍어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다가 스위스와의 네이션스리그 3 4위전에서 승부차기에서 승리해 최초의 네이션스리그에서 3위를 차지한것과 승부차기 승률을 올린것도 긍정적인 부분.

세대교체 또한 순조로운 편. 사실 잉글랜드에 어린 재능이 많이 보였던 때가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유망주 가뭄에 시달렸지만, 요즘은 상황이 달라졌다. 해리 케인, 조던 헨더슨, 라힘 스털링, 루크 쇼, 해리 매과이어, 에릭 다이어, 루이스 덩크, 키어런 트리피어, 카일 워커, 조던 픽포드, 코너 코디 같은 현재 대표팀의 중심세대부터 존 스톤스, 제임스 워드프라우스, 칼빈 필립스, 델리 알리, 마커스 래시포드, 제임스 매디슨, 피카요 토모리, 아이반 토니, 태미 에이브러햄, 잭 그릴리쉬, 재러드 보언, 올리 왓킨스 같은 중간세대를 거쳐서 리스 제임스, 트렌트 알렉산더아놀드, 코너 갤러거, 데클런 라이스, 마크 게히, 필 포든, 메이슨 마운트, 캘럼 허드슨오도이, 주드 벨링엄, 부카요 사카, 제이든 산초, 아론 램스데일, 콜 파머, 코너 갤러거, 리코 루이스, 앤서니 고든, 커티스 존스와 같은 젊은 유망주들까지 등 빅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이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으며 현재 잉글랜드 수준의 선수풀과 유망주를 보유하고 있는 축구 국가대표팀은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정도뿐이다. 특히 공격진은 가히 전세계 최고 수준이며 사실상 센터백 정도를 제외한 거의 모든 포지션에서 전 세계 최고의 선수풀을 보유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 2024년 기준, 안타깝게도 상기한 선수들 중 급속한 몰락을 겪은 선수 들이 은근히 있지만 이 선수들을 제외하고서라도 좋은 선수들이 매우 많고 유망주들도 꾸준히 나오고 있는 상황이라 잉글랜드 국대의 선수풀 걱정은 당분간은 전혀 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재능들의 활약에 힘입어 유로 2020에서 드디어 잉글랜드가 유로 역사상 처음으로 유로 결승전에 올랐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수문장 잔루이지 돈나룸마에 의해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UEFA 네이션스 리그/2022-23 시즌에서는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와 같은 리그 A 3조로 편성되었다. 시합 전까지는 잉글랜드가 파이널 진출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았지...만 현실은 시궁창. 3무 3패 승점 3점으로 리그 A에서 유일하게 5차전만에 리그 B 강등을 확정짓고 말았다. 특히 4차전의 헝가리전에서는 홈에서 0:4라는 막장 스코어를 내면서 울버햄프턴 대참사라 불리며 전세계를 경악시켰다. 독일에게는 다 무승부였다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이로 인해 과연 1달 뒤에 있을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B조를 통과할 수 있을지 걱정하는 반응이 많다.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에서 이란을 6:2로 대파하는 등 순항하며 조별리그를 2승 1무로 가볍게 통과한 뒤 16강에서 세네갈을 3:0으로 누르고 8강에 진출했다. 그런데 하필 8강에서 만난 상대가 디펜딩 챔피언 프랑스... 프랑스전에서 해리 케인의 뼈아픈 PK 실축으로 인해 동점을 만들지 못했고 결국 2:1로 패하며 8강에 머무르고 말았다.

유로 2024는 대회 내내 답답하고 불안한 경기력이였지만 다소 수월한 대진에 힘입어 꾸역꾸역 결승전까지 진출했으나, 이번에도 패배하며 2대회 연속으로 준우승에 머무르게 되었다.

[1] 당시 잉글랜드와 유럽 올스타 XI의 선발 라인업이다.
파일:1938FAvsUEFA.jpg
[2] 축구사 최초의 슈퍼스타라고 할 수 있는 선수로, 매튜스의 현역 시절까지만 해도 역대 최고의 아웃사이드 라이트로 간주되었던 인물이다. [3] 전쟁 이전에도 오스트리아 분더 팀의 감독 후고 마이슬, 이탈리아 월드컵 2연패를 이끈 비토리오 포초, 리베로의 모태가 되는 볼트 시스템을 개발한 카를 라판 등 유명한 감독들은 있었는데, 잉글랜드는 아예 감독도 없이 최강팀으로 군림했던 것이다. [4] 당시 대표팀 부주장이었으며, 손이 커서 '프라잉팬 손'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5] 13개국 본선 진출 대회 [6] 당시 대회는 13개국이 본선에 진출하였고 8강전 없이 각 조 1위만 4강 결승리그(조별리그 방식)에 진출하는 대회였다. [7] 이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는지, 그는 유럽 각지의 기자들로부터 많은 선택을 받아 당시 최고의 선수였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제치고 초대 발롱도르를 수상하였다. 초대 발롱도르는 공로상의 성격을 많이 띠므로 디 스테파노보다 더 많은 세월동안 축구에 헌신한 매튜스에게 표가 더 많이 간 것도 있지만. [8] 이 '이빨'에 비유될 만한 선수로는 레몽 코파, 쥐스트 퐁텐, 로저 피앙토니, 장 뱅상, 로베르 종케 등이 있는데, 이들 모두가 이미 대표팀에서 은퇴한 데다가 제대로 된 후계자가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9] 사실 팀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당연히 감독이고, 그런 감독이 팀의 선수들을 직접 뽑고 전술을 짜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선출위원회와 감독의 특이한 관계로 인해 감독이 팀을 직접 뽑지 않았던 잉글랜드가 그동안 국제대회에서 성적이 좋지 않았던 이유가 이것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10] 리그에서 치열하게 우승 경쟁을 하다가 뒷심 부족으로 4위를 기록했고, FA컵에서는 맨유에 밀려 준우승했다. [11] 다만 다른 국가대표팀들도 1960년대까지 WM 포메이션을 자주 사용했다. 4-2-4를 도입한 벨라 구트만 감독이나 브라질의 비센치 페올라 감독이 굉장히 시대를 앞서나갔을 뿐... [12] 사우스햄튼이 2부 리그 시절일 때부터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얼을 정도로 대단한 실력을 가진 선수였고, 결국 마틴 치버스와 함께 팀을 1부리그로 승격시켰다. 참고로 현재까지 사우스햄튼 유니폼을 입고 가장 많은 경기를 소화한 선수이기도 하다. [13] 각목으로 맞고 이빨이 부러진 채 끌려나갔다는 헛소문도 있는데, 말 그대로 완전 헛소문이다. 라틴은 그냥 소소하게 유니언 잭을 한 번 비틀어 쥐고 평온하게 끌려 나갔다. [14] 당시 핸드볼 파울에 대한 처벌 기준을 알 수 있는 장면은 여럿 있는데, 1968년 브라질 vs 서독 경기에서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가 대놓고 패스를 손으로 잡아 경기 흐름을 끊는 장면이 나왔으나 주심은 구두주의 선에서 끝냈다. 그리고 1974년 월드컵 칠레와 서독의 경기에서도 칠레 선수가 베켄바우어의 로빙패스를 손으로 직접 잡으며 가로챘다가 옐로카드만 받고 끝나는, 지금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 나온다. 지금은 핸들링 파울에 대해 굉장히 엄격해진 것이다. [15] 1968년 하노버에서 열린 친선 경기에서 베켄바우어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거둔 것이 잉글랜드 상대 첫 승이었고, 1972년 유로 플레이오프 1:3 승리가 웸블리에서의 첫 승이었다. [16] 이 과정에서 슈넬링어의 손에 맞았기 때문에 잉글랜드의 프리킥이 선언되었어야 한다는 말도 있다. [17] 이는 잉글랜드의 월드컵 우승이 '편파판정'이 아닌 '오심'의 결과로 이루어졌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주심이 처음부터 잉글랜드 손을 들어 줄 생각이었다면 당연히 무어와 뱅크스의 항의를 받아들여 판정을 번복하고 베버의 골을 취소했을 텐데, 오브레보 쫓아가는 미하엘 발락처럼 무섭게 자신을 따라온 바비 무어를 쿨하게 무시하며 베버의 골을 인정했다. [18] 1967-68 시즌에 맨시티가 리그 우승을 거두었고, 그 때문에 맨시티 선수들 중 콜린 벨, 프랜시스 리, 마이크 서머비를 비롯한 몇몇 선수가 이 시기에 국가대표팀에 처음 선발되는 영예를 누렸다. [19] 이 사건의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이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 파일:rodeoBanks.jpg [21] and Jairzinho had been murdering everyone in 1970 World cup. And he's running at Bobby from just over the halfway line and, I thought, "Oh, my God, one against one, he's clean in." And he just waited and waited. And Bobby slid in... When his timing was right. Boom. [22] 판단은 알아서 해 보자... 걸려 넘어지는 선수는 콜린 벨이다.
파일:Honeycam 2020-09-09 23-57-55.gif
[23] The first time I'd see him even come close to losing it, he was pacing up and down, quite red-faced and agonising over it. We went for a walk one day and we met these FA counsellors and they'd found Bobby fast asleep on a park bench. Couldn't sleep, gone out, went out, laid there like a tramp on a bench. [24] Having seen Bobby Moore make one mistake, you could guarantee, with your life, that he would never do the same thing again. It would be removed, that little, tiny glitch of the computer would have been deleted and by terrible irony, Norman Hunter replicated that mistake. [25] 참고로 1973년의 조프는 A매치 8경기 무실점이라는 정신 나간 기록을 세웠다. [26] 핀란드를 홈에서 불러들인 2R 경기에서 2-1로, 1점차 승리밖에 거두지 못한 것이 치명타였다. [27] 당시 벨기에 이탈리아 스페인과 한조가 되었는데, 이탈리아에게 패하고 벨기에와 비겼고, 스페인을 상대로는 이겼다. 하지만 벨기에와 이탈리아가 승점이 같아서 조 3위로 탈락했다. [28] 당시 플라티니의 프랑스를 3:1이란 스코어로 떡실신 시켰다. [29] 참고로 네덜란드도 노르웨이에게 한번 패했으며 노르웨이는 조 1위로 예선을 통과했다. [30] 당시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스코틀랜드 팬들의 난동사건이 있기도 했다. [31] 전반전에서 살리나스가 완벽하게 옵사이드 트랩을 무너뜨리고 골을 넣었으나 옵사이드 오심, 후반전 폴 개스코인이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알폰소를 완전히 걸어 넘어뜨렸으나 오히려 알폰소에게 시뮬레이션 경고를 줬다. [32] 90년 월드컵 4강전에서 실축한 스튜어트 피어스가 키커로 나서 완벽하게 성공시켰다. 피어스는 독일과 4강전 승부차기에서도 키커로 나서 성공시켰다. 홍명보가 이겼던 영국 단일팀 감독 그 피어스 맞다. [33] 그러나 이 경기 역시 잉글랜드 입장에서는 홈버프 논란에서 자유롭기 힘든 것이 연장전에서 독일의 스테판 쿤츠가 완벽한 헤딩골을 넣고도 주심의 석연찮은 판정으로 골이 취소되기도 했다. 이 당시는 골든골 제도.. [34] 당시 루마니아의 위상은 지금의 벨기에급이었다. 당시 잉글랜드가 루마니아에 1골차로 패한 것도 기적이다. [35] 당시 호나우지뉴는 저 솔 켐벨과 퍼디난드가 버티는 잉글랜드 수비진을 플립플랩으로 헤집으며 1골을 어시스트 했고 특히 말도 안 되는 장거리 프리킥 골까지 성공하며 기어이 잉글랜드를 탈락시켰다. [36] 당장 루니만 해도 출중한 실력을 갖추었으나 국대에서는 월드클래스라는 호칭이 아까울 정도. 게다가 시어러 은퇴후 루니의 파트너는 마이클 오웬이 지독한 유리몸이라 에밀 헤스키, 가브리엘 아그본라허, 저메인 데포, 대런 벤트 등 라이벌들에 비해 클라스가 떨어지는 선수들 뿐이다. 현재 다니엘 스터리지가 주목받는다 해도 아직까진 정상급 레벨이 아니지만. [37] 이탈리아의 마리오 발로텔리(전 맨시티), 우루과이의 수지 루이스 수아레스(리버풀), 그리고 코스타리카의 브라이언 루이스(풀럼)와 조엘 캠벨(아스날) [38] 그런데 제이미 바디는 1987년생으로 2016년 현재 29세. 나이만 보면 오히려 중견급 선수이지만 늦게 포텐이 터진 탓에 신세대의 일원 취급을 받게 됐다(...) [39] 세계대전 더비 [40] 2012년 자국에서 열린 런던 올림픽 축구 종목에서는 웨일스와 힘을 합쳐 영국 축구 국가 대표팀으로 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니얼 스터리지의 실축으로 대한민국을 상대로 승부차기에서 졌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성인 대표가 아닌 올림픽 대표 얘기다. [41] 그러나 러시아의 경우 가장 최근에 만난 경기가 앞서 구술된 유로 2008 예선전인데, 잉글랜드는 여기서 러시아한테 짓밟혀 본선행이 좌절된 바 있었다. [42] 파나마전 승리가 그것이다. [43] 월드컵에서 결승행을 좌절시켰던 크로아티아와 또 다른 강호 스페인은 조별리그에서 직접 제압했고, 이제는 탑 티어 강팀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이탈리아 또한 잔류에 만족해야 했으며, 국가대항전에서 거듭 잉글랜드의 발목을 잡았던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은 2018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작년보다 상당히 선수들의 평균 경쟁력및 레벨 등이 하향되었고 이 때문에 2018 러시아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에서 1승 2패로 광탈당한다. 또한 이후 유럽 네이션스 리그 조별예선에서는 한 경기도 이기지 못하며 처참하게 탈락하고 강등까지 당했다. 러시아 월드컵에서 2번 만나 2번 모두 잉글랜드를 패배시킨 벨기에는 초반에는 준수했으나 후반에 뒷심이 떨어진 탓인지 스위스에게 패해서 조별리그 탈락. 월드컵 우승국인 프랑스 역시 벨기에처럼 뒷심이 떨어져 네덜란드에게 밀려 탈락하고 말았다. 같이 4강에 진출한 네덜란드, 스위스 그리고 포르투갈의 경우 미리 탈락한 국가대표팀들에 비해서 한 수 아래라고 평가받는 팀들이다. [44] 네덜란드는 러시아 월드컵 예선에서 탈락한 뒤 리빌딩이 진행 중이고, 스위스와 포르투갈 역시 조별리그 통과는 했으나 16강에서 무력하게 패배한 탓에 잉글랜드를 확실히 기세에서 누를 수 있는 강팀들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잉글랜드는 4강에서 유일한 월드컵 우승국이기도 하고 현재 무서운 기세로 재기에 성공했기 때문에 오히려 상대 팀들에서 바짝 긴장해야 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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