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22:18:50

비토리오 포초

비토리오 포초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파일: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대, 2대, 5대
클럽
파일:토리노 FC 로고.svg

1대
파일:AC 밀란 로고.svg

10대
}}} ||
이탈리아의 前 축구 감독
파일:Vittorio_Pozzo_2.jpg
이름 비토리오 포초
Vittorio Pozzo
본명 비토리오 주세페 루이지 포초
Vittorio Giuseppe Luigi Pozzo
출생 1886년 3월 2일
이탈리아 왕국 피에몬테주 토리노현 토리노광역시
사망 1968년 12월 21일 (향년 82세)
이탈리아 피에몬테주 토리노현 토리노광역시
국적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신체 185cm | 체중 82kg[1]
직업 축구 선수 (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1905~1906)
토리노 FC (1906~1911)
감독 이탈리아 대표팀 (1912)
토리노 FC (1912~1922)
이탈리아 대표팀 (1921)[2]
이탈리아 대표팀 (1924)
AC 밀란 (1924~1926)
이탈리아 대표팀 (1929~1948)
국가대표 없음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선수 경력2.3. 감독 경력
2.3.1. 초기 감독 생활2.3.2. 30년대의 성공
2.4. 그 이후
3. 평가4. 일화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 기록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29년부터 1948년까지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이탈리아 대표팀을 이끌면서 1934 이탈리아 월드컵 1938 프랑스 월드컵에서 우승, 조국 이탈리아에 2번이나 월드컵 우승을 안겨줬으며 유일하게 FIFA 월드컵에서 2번 우승한 감독이기도 하다.

2. 생애[3]

2.1. 어린 시절

비토리오 포초는 1886년 피에몬테 주 토리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같은 피에몬테 주의 폰데라노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등학생 시절까지는 토리노에서 보냈다. 그 이후 프랑스, 스위스, 잉글랜드 등에서 어학 공부와 축구에 빠져들었으며 특히 맨체스터에서 공부할 때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하프백 찰리 로버츠, 더비 카운티의 레전드 스티브 블루머를 만나기도 했다.

2.2. 선수 경력

선수로서는 스위스 그라스호퍼에서 처음 커리어를 시작하였고, 이탈리아에서는 토리노 FC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1911년, 25살의 젊은 나이에 은퇴하였다.

2.3. 감독 경력

2.3.1. 초기 감독 생활

선수 생활을 마친 포초는 기술위원회 체제 이후 최초로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데뷔 무대는 1912년 올림픽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1라운드에서 핀란드에 연장 혈투 끝에 3대2로 패배하였고, 곧 사임하였다. 포초는 학업을 마치고 피렐리에서 일하는 동시에 토리노 FC의 감독 겸 기술 디렉터로 활동하였다. 이 와중에 제1차 세계 대전도 있었는데 당시 포초는 알피니라 불리는 산악 전투병과에서 중위 계급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1924년 올림픽에서 포초는 다시 대표팀 감독을 맡았지만, 스위스에 8강에서 2대1로 패하고 말았고, 대표팀 감독 자리에서 물러난 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를 병으로 잃고 말았고, 밀라노로 옮겨 AC 밀란의 감독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라 스탐파의 저널리스트로도 활동했는데 저널리스트 활동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하였다.

2.3.2. 30년대의 성공

1929년에 다시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이 된 포초의 첫 시합 상대는 포르투갈. 밀라노에서 열린 이 시합에서 이탈리아는 포르투갈을 6대1로 뭉개버렸고, 이 기세를 이어 1930년까지 개최된 중유럽 컵에서 우승하면서 감독으로서 첫 성공을 맛보았다. 대표팀에 오래 재직하다보면 여느 대표팀 감독이 그렇듯 아돌포 발론체리 같은 주축 선수들이 은퇴하는 어려움은 있었지만 포초는 흔들리지 않고 스키아비오와 같은 새로운 선수들을 발굴하였고, 그러면서 아르헨티나 출신 오리운디들인 루이스 몬티, 라이문도 오르시, 엔리케 과이타 같은 선수들도 설득시켜서 이탈리아 대표팀의 파란 유니폼을 입히는데 성공하였다. 그 와중에 토리노에서 오스트리아에 패배하는 등 어려운 시간도 있었지만[4] 꾸준히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준비하였다. 그렇게 새로운 얼굴들이 대거 수혈된 이탈리아 대표팀은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초대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는 여느 유럽팀들과 마찬가지로 불참했는데, 그 동안 포초는 전술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그 결과로 포초는 당시까지 대세였던 단순한 평면 2-3-5에서 센터 하프를 앞으로 좀 더 빼고 인사이드 포워드를 내려서 포메이션에 변화를 주었고, 중원 싸움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분더팀의 감독 후고 마이슬 역시 비슷하게 센터 포워드 마티아스 신델라를 내려 폴스 나인 전술을 사용하였고, 물 건너 아스날 FC에서 W-M 포메이션을 만들어 아스날 최초의 전성기를 이끈 허버트 채프먼과 함께 30년대 축구에 대변혁을 일으켰다. 이 메토도 전술의 핵심은 아르헨티나 출신 센터 하프 루이스 몬티, 인사이드 포워드 듀오 주세페 메아차, 조반니 페라리의 존재였다.

1938년 월드컵을 준비하던 당시 이탈리아 대표팀은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까지 우승을 차지했으며 1935년 10월에 체코슬로바키아에 패한 것을 제외하면 무패 행진을 달리면서 순항중이었다. 스키아비오, 오르시, 과이타, 콤비, 칼리가리스, 로세타 등 많은 선수들이 1934년 월드컵을 끝으로 대표팀을 떠났지만 실비오 피올라, 지노 콜라우시, 알도 올리비에리, 피에트로 라바 같은 새로운 얼굴도 들어왔고, 이들의 활약으로 이탈리아는 월드컵 연속 우승을 차지하는 대기록을 수립하였다. 이 기록은 현재까지 펠레, 가린샤, 지지, 니우통 산투스, 자우마 산투스 등이 활약한 최전성기의 브라질만이 같이 가지고 있다.

2.4. 그 이후

프랑스 월드컵이 끝난 이후, 곧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지만 포초는 감독자리를 그대로 지켰다. 포초의 감독 생활 마지막 경기는 1948년 올림픽으로 런던 아스날 스타디움에서 열린 8강전이었다. 이 경기에서 덴마크에 5대3으로 패하면서 우승컵 사냥에는 실패했지만, 통산 97경기에서 65승 17무 15패. 승률 67%를 기록했다.[5] 특히 1935년 10월부터 1939년 11월까지의 4년간 26경기 무패 행진의 기록을 세운 것이 백미. 포초의 마지막 공식 활동은 수페르가의 비극 당시의 추모식이었다.

감독 생활을 정리한 포초는 그 이후 라스탐파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으며 1950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대표팀의 경기를 분석하기도 했다. 1968년 자국에서 열린 유로 대회에서 이탈리아의 우승을 지켜본 포초는 그 해 12월 21일에 숨을 거두었다.

3. 평가

선수로서는 큰 족적을 남기진 못했지만 감독으로서 최고의 족적을 남긴 인물.

현재까지도 마르첼로 리피, 엔초 베아르초트[6] 등과 더불어 이탈리아에서 FIFA 월드컵을 2차례 이상 참가한 감독 중 한 명이다. 성과로 보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는 말 그대로 역대 최고인데 이탈리아에 5개의 트로피를 안겼으며, 세계 역사에서 유일한 FIFA 월드컵 2회 연속 우승[7][8][9] 감독이면서 유일하게 월드컵과 올림픽 축구에서 모두 우승을 경험한 감독이다.

따라서 아리고 사키, 파비오 카펠로, 조반니 트라파토니, 카를로 안첼로티 등 수많은 축구계의 명감독을 배출한 이탈리아 축구계에서도 그의 위상은 공고하다.

4. 일화

  • 포초의 감독 생활 최전성기 당시 이탈리아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집권 아래 파시즘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던 시기였다. 하지만 포초는 무솔리니가 대표팀을 파시스트의 선전 도구로 이용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그럼에도 안티 파시스트까지는 아니었는데 당시 이탈리아에서 그런 활동을 대놓고 하는 것은 곧 죽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10]
  • 포초는 1938년 월드컵 당시 4강전을 앞두고 선수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썼다. 포초가 이끌던 이탈리아 대표팀은 당시 파리에서 8강전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한 이후 4강전이 열릴 마르세유에서 브라질과의 일전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4강전 경기 다음날 마르세유에서 파리로 가는 단 한대의 비행기가 전석 매진이 된 것. 그 이유를 알아보니 브라질 축구팬들이 결승전을 대비해서 표를 잔뜩 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포초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코트 디아술에서 일광욕을 하는 브라질 사람들을 만나 이탈리아가 올라갈 수도 있으니 비행기 티켓을 일부 팔아달라고 했다. 하지만 브라질 사람들은 '우리가 이탈리아를 이기고 당연히 파리로 갈텐데 왜 비행기 티켓을 넘겨달라 하느냐'는 식으로 거만하게 대답을 했고, 포초는 이를 선수들에게 그대로 말하여 선수들의 투지를 자극하였다. 결국 이탈리아가 브라질에 2대1로 승리하였지만 브라질 축구팬들은 항공권을 팔지 않았고 이탈리아 선수들은 기차를 이용해 파리로 올라가야만 했다.
  • 후고 마이슬, 허버트 채프먼 등과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다. 그들은 유럽을 대표하는 축구계의 명감독으로 전부 축구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기록

  • 월드 사커 선정 역대 최고의 감독 13위: 2013
  • 베를린-브리츠 10년의 감독: 1930년대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1


[1] 출처 [2] 기술위원회 소속으로 지휘했다. [3] 출처: 영어, 이탈리아어 위키피디아 [4] 이 경기에서의 패배로 이탈리아 대표팀의 주축 수비수이자 주장이었던 움베르토 칼리가리스가 다시는 대표팀에서 활약하지 못했다. [5] 이탈리아 위키의 기록.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63~65승 정도로 기록하고 있다. [6] 베아르초트는 3회 참가로 이탈리아 대표팀 역사상 월드컵에 가장 많이 참가한 감독이다. [7] 심지어 단순 우승 횟수로만 따져도 월드컵 2회 우승은 포초가 유일하다. 다른 감독들은 모두 1회 우승. 월드컵 2회 연속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한 나라는 현재까지 이탈리아와 브라질 뿐인데, 브라질은 연속 우승 당시 비센치 페올라 아이모레 모레이라 감독이 각각 우승컵을 들어올렸기 때문에 감독으로서 2회 월드컵 우승을 한 것은 포초가 유일하다. [8] 포초의 업적보다 급을 낮춰서 살펴보면 월드컵 2회 연속 결승 진출의 업적을 이룬 다른 감독들로는 아르헨티나 카를로스 빌라르도 서독 프란츠 베켄바워, 프랑스 디디에 데샹이 있는데 빌라르도와 베켄바워는 이 기록을 동시에 달성했다. 그러나 1986년 월드컵은 빌라르도가, 1990년 월드컵은 베켄바워가 가져가면서 양 감독 모두 2회 연속 월드컵 우승은 재현하지 못했다. 그리고 2022년 월드컵 결승에서 디디에 데샹이 포초의 업적에 도전했으나 승부차기 끝에 아르헨티나에 석패하며 준우승에 머무르고 말았다. 포초의 업적이 얼마나 이루기 어려운 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시이다. [9] 다만 1934년 월드컵 베니토 무솔리니가 개입해서 만든 부정한 우승이라는 악평도 있다. [10] 출처: G. Ormezzano: Football: a World History: Longanesi, Milan, 1989, ISBN 88-304-09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