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고 마이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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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 ||||
1대, 3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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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 ||||
오스트리아의 前 축구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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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f0f0,#222222><colcolor=black,white> 이름 |
후고 마이슬 Hugo Meis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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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1년
11월 16일 / 보헤미아 왕국 말레쇼프[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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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7년 2월 17일 (향년 55세) | |
국적 |
[[오스트리아|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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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축구선수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워드 / 은퇴) 축구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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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colbgcolor=#f0f0f0,#222222><colcolor=black,white> 선수 | 비엔나 크리켓 축구 클럽 (1895~1903) |
감독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대표팀 (1912~1914) 비너 아마추어 (1912~1913) 오스트리아 대표팀 (1919~19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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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2]
1.1. 선수, 심판 생활
마이슬은 보헤미아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마이슬의 가족들은 후고가 12살 때 빈으로 이사를 갔다. 비엔나 크리켓 축구 클럽에서 아웃사이드 플레이어[3]로 뛰기도 했으며 1905년 무렵부터 은행에서 일하면서 축구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1908년 6월에 잉글랜드와 헝가리간의 A매치에서 심판으로 데뷔하였고 1912년 올림픽 축구에도 심판으로 참가하였다. 마이슬은 총 16회의 A매치에 심판을 보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1.2. 감독 생활
마이슬의 축구에 대한 열정은 갈수록 높아졌고 그 열정은 비토리오 포초, 허버트 채프먼 등과 친구 관계로 승화되었다. 그들은 유럽을 대표하는 축구계의 명감독으로 전부 이름을 남긴 동시에 라이벌이었다.오스트리아 대표팀의 초대 감독이 된 마이슬은 1차 대전이 벌어지자 이손초 전선에서 복무했다. 참전 이후 1919년 다시 오스트리아의 전임 감독에 취임하면서 분더팀의 전설을 써내려갔다.
당시 축구계에서는 동유럽 쪽의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를 묶어 다뉴브 학파라 불렀는데 마이슬은 선수들의 활력과 볼의 소유, 두터운 패스길을 중시했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가 마이슬 체제의 오스트리아 대표팀 기간에서 최고 전성기였고 14경기에서 무패 행진을 펼치면서 54득점, 18실점의 전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우승의 기대를 모았던 월드컵에선 포초와의 라이벌전에서 패하며 오스트리아는 4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마이슬은 1937년,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무덤은 현재 비엔나 중부 공동 묘역에 위치해있다.
2. 전술 스타일 & 평가
Kapellmeister(악장)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20세기 초반의 명감독. 에른스트 하펠과 오스트리아 출신 축구 감독 중 최고를 다툰다.3. 뒷이야기
- 마이슬은 외국어에 재능이 있었다. 모국어인 독일어외에도 체코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를 완벽히 구사했고 스웨덴어, 스페인어, 네덜란드어도 유창하게 말했다. 그 외에도 헝가리어, 세르보크로아트어 구사도 가능했다고 한다.
- 1929년 수술을 받은 이후, 마이슬은 거동이 불편한 관계로 지팡이를 짚고 다니게 되었는데 나중에 분더팀으로까지 불리며 오스트리아가 잘 나가게 되자 이 지팡이가 마이슬의 상징이 되었다.
- 동생 빌리 마이슬은 스포츠 기자로 일했는데, 형 후고의 서포터로 형의 전술과 업적을 종종 기사로 써주었다.
4. 수상
4.1. 감독
- 중유럽 컵 우승 1회: 1931-32
- 중유럽 컵 준우승 1회: 193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