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0 21:35:55

임경업

임경업 林慶業
(1594년 ~ 16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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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의 영정. 그런데 이 영정도 그림 주인공의 일생처럼 명나라 조선의 교집합을 보여준다.[1]
1. 개요2. 초년3. 병자호란4. 명을 도와서5. 명나라의 충신이 되어6. 그의 사후7. 비운의 명장? 과대 평가된 인물?8. 대중 매체에서 등장

1. 개요

조선 명나라의 장군.

2. 초년

젊어서 무과에 응시했는데, 특히 실기 시험을 보는 당일에는 등에다가 ' 대장부'라고 써 붙이고 나갔다는 일화가 있다. 과잠

1620년 소농보권관, 1622년 중추부첨지사를 거쳐 1624년 정충신 휘하에서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 1등이 되었다. 그 후 우림위장, 방답진 첨절제사 등을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좌영장으로 병력을 이끌고 강화도로 나갔으나, 이미 화의가 성립된 후였다. 1628년 김류에게 선물을 보낸것 때문에 탄핵을 받는다 간원의 언급에 의하면 임경업은 천얼(얼자)출신이라고 한다.

1630년 평양 중군으로 검산성과 용골성을 수축하는 한편 평안도 철산군 가도에 주둔한 명나라 도독 유흥치의 군사를 감시, 그 준동을 막았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 청군의 요동 공격을 막지 못하고, 조선으로 탈출한 모문룡 이래로 가도 주둔 명군은 섬에 틀어박혀 싸우라는 청군과는 제대로 교전도 안붙고 인근 조선 백성들을 약탈하며 분탕질 치기 바빴다. 반정으로 정통성이 취약했던 조선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명의 도움을 받은 점 때문에 강경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반면 후금 - 청의 입장에서는 배후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 모문룡의 제거가 필요했다. 이는 2번에 걸친 호란의 한 배경이 되었고, 조선 입장에서도 자국 영토에 주둔하여 패악질만 쳤지 정작 호란이 터졌을 땐 청군과는 전투 한번 벌이지 않고 틀어박혀 영향력 확장만 노려 득될 것이 없었다. 모문룡의 뒤를 봐주던 환관 위충현이 제거되면서 모문룡도 원숭환에 의해 제거되지만, 모문룡이 이끌던 이른바 '모군(毛軍)'은 그대로 남아 진계성이 이어받았다가 이를 유흥치가 제거하고 수장이 되어있던 상황이었다. 이 병력은 모문룡을 제거한 명, 뒷통수가 가렵던 청, 주변 고을이 약탈당하고 있던 조선 등 삼국 모두에게 껄끄럽던 상황이었다.[2].

1631년 산성을 수축하던 중 정묘호란으로 허약해진 군사력 등의 이유로 청천강 이북의 방어를 포기하려던 조정의 정책에 반감을 품고, 청북인(청천강 이북 주민)들의 반발을 사주하였다는 이유로 탄핵받고 구금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633년 청북 방어사 겸 영변 부사로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수축했다. 이 시기에 명나라 장수 경중명과 공유덕 등 명나라의 장수들이 후금에 투항하려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임경업이 의주 부윤 윤진경과 함께 명나라 대도독에게 연락하여 합동 공격을 벌였다. 이 공로로 명나라로부터 총병 벼슬을 받았다. 그리고 이 사건은 임경업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된다.

1634년 의주 부윤으로 청북 방어사를 겸임할 때, 백마산성 수비에 자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은 1000냥과 비단 100필을 지원받았다. 이를 자본으로 삼아, 중국 상인과 밀무역을 하여 자본을 축적하고, 둔전을 유지하였으므로 공로를 인정받아 가선대부에 올랐다. 하지만 지나치게 이재를 축적하고 상층부에 뇌물을 제공하였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파직당한다. 하지만 도원수 김자점의 적극적 요청으로 다시 가선대부가 되어, 다시 성곽 보수에 나선다.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임기응변에 능한 병사들을 뽑아 청국인으로 변장시켜 청나라의 수도 심양에 잠입시켜서 첩보 활동도 활발히 벌였다는 일화도 있다.

3. 병자호란

병자호란 당시에는 의주 부윤으로서 백마산성을 지켰는데 모인 병력은 겨우 400명으로 가짜 병력을 과시하는 형태의 전략을 사용하였고, 애초에 속전속결을 노렸던 청군이 산성을 우회하여 곧장 한양으로 진격했기 때문에 아무런 역할이 없었다. 물론 임경업전 등 민담에선 오랑캐 놈들이 임경업 장군님 무서워서 돌아갔다!라고 뻥튀기를 심하게 한다.[3]

그 후 임경업은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군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청나라의 수도인 심양으로 역침공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 청 태종은 조선 침략에 정예 병력의 거의 대부분을 올인한 상황이였으니 발상 자체는 좋았지만 현실은 암울했다 우선 임경업의 군은 위에 언급됐듯이 고작 400명 밖에 안됐다. 고로 원래는 아마 명나라의 군대나 김자점의 북방군과 연계하여 적의 심장부를 역공을 가할 계획이었을 듯 한데, 김자점은 애초에 청나라군과 싸울 의지가 없었고 명나라는 국내 각종 도적들의 반란들 때문에 신경을 쓸 여력도 없었다[4]. 그래서 임경업이 평안 병사 유림과 함께 연합 전선을 펴고자 했지만 유림은 어명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이 설을 바탕으로 말하자면 임경업의 심양 역침공 발상은 큰 문제가 3가지가 있었다. 우선 유림이 이끄는 병력조차도 2,000명이었다. 합쳐봐야 2,400명, 그나마 거의 조총수로만 이루어진 병력으로 심양을 침공하는 건 큰 무리였다. 애초에 이 설에서 임경업은 본인에게 5,000명의 군사를 준다면 심양을 치겠다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이는 본인이 본래 생각하고 있던 병력의 반도 채 안되는 숫자다. 다음으로 청군은 한덩어리로 움직이는 상황이 아니었다. 임경업이 인근 병력과 합류해서 북으로 진군하려면 인근의 청군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청군 병력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만은 족히 나오기 때문에 설사 임경업이 만약 5,000명의 군사를 모았다고 해도 청이 군의 일부만 보내서 때려잡아도 되는 상황이다. 게다가 청이 아직 명나라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수도를 완전 텅텅 비워놓고 갔을 리가 없으니 심양과 주변에 최소한의 예비 병력이 주둔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지막으로 당시는 이미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포위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것부터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정작 유림은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와 함께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서 남하하던 중에 자모산성 전투에서 4차례에 걸친 청군의 공세를 모조리 격퇴한 활약을 펼쳤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인조가 항복했으니 원대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임경업의 심양 공격론은 2가지 중 하나로 보인다. 하나는 임경업 장군님 만만세 하면서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란 것이고,[5] 다른 하나는 임경업이 전략적 상황 파악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6]

이후 임경업은 이미 화의를 맺고 철군하던 청나라 황제의 조카 요퇴의 병력 300명을 압록강 인근에서 공격하여 격파하고 포로로 잡힌 남녀 120여 명과 말을 회수한다. 의도와 결과는 좋았지만, 자칫 잘못했으면 이를 빌미로 삼아 청군의 재침을 부를 수도 있는 행동이었고, 조선 조정의 의도도 아니었다.

화친을 반대한 삼학사가 청나라로 끌려가는 도중 백마산성에서 머물게 되자 임경업이 찾아가 위로하였다.

4. 명을 도와서

1637년 청은 이 때까지 가도에 머무르고 있던 모문룡의 잔당들들을 제거하기 위한 병력 요청을 하였고, 임경업은 여기서 수군장으로 파견되어서 적극적으로 회전을 피하는 한편으로 당시 명나라 도독 심세괴[7]와 내통하여 그들의 피해를 최소로 줄이게 하였다[8]. 이런 전황을 몰랐던 청은 임경업을 심양으로 불러서 포상까지 내린다.

다시 의주로 돌아온 임경업은 의주의 물자가 불안해져서 방어가 어렵자 이번에도 심양에 상인들을 파견하여 밀무역을 시도하였다가 청에 발각되었고, 이를 전해들은 인조의 분노를 사서 평안도 철산으로 유배된다.

1638년 청군이 명의 금주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자, 조선은 이를 거절하였으나 병자호란 시기 항복 조건에 병력 파견이 있었으므로 다시 병력 파견이 결정되었다. 이 때 비변사에서는 유배를 가있던 임경업을 용서하여 조방장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이에 3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심양으로 가서 병력 동원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전투를 피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공로로 인조에게 말 1필을 받고 의주 부윤을 거쳐서 평안 병사가 된다.

1640년 청은 명의 금주위를 공격하려는 의도에서 다시 조선에 병력 파견을 요청하였고, 임경업을 주사상장의 직위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이에 임경업은 최명길 [9]과 함께 명의 수군 대도독 홍승주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후 청군과 함께 싸우면서도 싸움도 벌이지 않고 가지고간 군량미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이 문제로 청은 조선 정부와 명이 서로 짜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고, 소현세자는 이를 적극적으로 부인하였다. 이후 청은 임경업을 달랬으나 임경업은 대부분의 병력은 조선으로 돌려보내고, 군량미는 모조리 파기, 여전히 명나라와 전투는 없었다. 결국 임경업은 마지막으로 배까지 버리고 청을 정탐하여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에 청은 임경업이 명과 내통하였다는 심증을 가지고 조선을 닥달하였으나 물증이 없었다. 조선은 청의 압박으로 임경업을 삭탈 관직하였다가 바로 그 해에 동지중추원부사에 임명하였다.

1642년 이런 전말이 결국 드러나게 된다. 결국 청의 금주위 공격이 성공하였고, 임경업과 내통하였던 홍승주가 청에 투항하면서 그간의 서찰들이 모두 청에게 전해진 것이다. 이런 확증을 잡고 청은 조선에 임경업과 최명길 등을 압송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정은 형조 판서 원두표에게 임경업을 청으로 압송할 것을 명령했다. 이미 잡히기 전에 심기원에게 은과 승복, 칼을 받았던[10] 임경업은 압송 도중 금교역에서 탈출하여 미리 맡겨둔 승복을 걸치고 승려로 변장하여서 숨어지내게 된다. 이후 몇차례의 명나라 망명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하였고, 이 과정을 의심한 청의 요청으로 조선 조정은 임경업의 가족들을 청나라로 압송한다.

5. 명나라의 충신이 되어

이후 해를 넘겨서 1643년, 임경업은 결국 김자점의 종이었던 상인의 도움[11]으로 배를 구하여 명나라로 건너간다. 임경업은 명에서 등주 도독 황종예 휘하의 총병 마등고 휘하의 평로 장군으로 4만의 병사를 이끌게 된다. 하지만 이자성의 난으로 북경이 함락되고, 청군이 오삼계의 요청을 받고 뒤이어 입성하면서 도독 황종예도 남경으로 이동하였고, 임경업은 마등고와 함께 석성에 재기를 노리게 된다. 하지만 남경으로 도주했던 명은 결국 남경마저 함락되면서 멸망했고, 이번에는 마등고마저 청에 투항했다. 그리고 1644년 조선 조정에서도 후원자 심기원의 옥사가 벌어지면서 임경업은 국제적 미아가 된다.

이후 임경업은 탈출 시도를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부하였던 한사립의 밀고를 들은 명나라 출신 항장 마홍주에게 1645년 포로로 잡혀서 청군에게 넘겨졌다. 이 시기 청은 예친왕이 섭정왕으로 즉위하면서 대사면을 내렸기 때문에 임경업 역시 죽음을 모면하고 결국 북경의 사옥에 18개월 동안 투옥된다.[12]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에서는 좌의정 심기원과 김자점의 정쟁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결국 김자점이 심기원이 난을 일으키려 했다는 명목으로 심기원 일파를 모두 제거하게 된다. 이에 임경업도 심기원의 일파로 결론이 내려져서 북경에 투옥 중이던 임경업에 대한 송환 요청을 하게 된다. 이 시기 임경업의 죄목은 심기원의 반란에 연루된 것과 국가에 대한 배신죄[13]로 조사를 받았다.

인조는 임경업을 살릴 의사가 있었지만, 원두표[14]김자점[15]은 강력하게 임경업의 사형을 주장한다. 그리고 결국 이로 인하여 문초가 길어지는 와중에 임경업은 형국으로 장을 맞던 중 사망했다. 이에 대해서 장살(杖殺) 당했다고 하지만 사실과는 좀 다르다. 심문 당시 인조는 임경업을 죽일 의도가 없었다. 임경업이 자신은 심기원과 관련이 없다며 자기 변호를 하자, 인조는 임경업이 심기원과 연관이 있다고 해도 심기원이 먼저 일을 일으킨 뒤에 따로 포섭하려 한 정도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 때문에 인조와 대신들이 임경업의 혐의에 대해 토론하는데 그 와중에 임경업이 사망했다는 보고가 올라온 것이다. 의도적인 장살보다는 단순한 옥사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임경업은 “조정에서는 이미 천하의 일이 안정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오늘 나를 죽인다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라고 외쳤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남명 정성공만 남은 시점의 현실에서 임경업의 이 발상은 정세 판단 미스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었다. 삼번의 난을 가정한다 한들 임경업이 살아있었다면 난 당시 나이는 아흔살(...). 실제로 최명길 등 대부분의 인물들은 명나라가 완전히 멸망하기 전까지는 명나라의 멸망보다는 남북조시대의 재현을 현실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명나라에 최명길 등이 협조를 했던 장면이나, 김자점이나 심기원 등이 임경업을 통해서 명에 줄을 대려고 했던 것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남경이 함락당한 시점까지 가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정성공이나 남명 게릴라 만으로 남북조 시대는 불가능하다. 이걸 알았기 때문에 김자점이 친청파로 돌아서고, 소중화사상이 등장하는 것이다.

6. 그의 사후

임경업이 죽었다는 보고를 듣고 인조는 이런 반응을 보였다.
그가 역적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 내가 그에게 알려주려 하였는데 틀렸구나. 그가 제법 장대하고 실하게 보이더니, 어찌 이렇게도 빨리 죽었단 말인가. 그리고 그는 담력이 커 국가가 믿고 의지할 만하였다. 그런데 도리어 흉악한 무리의 꾀임에 빠져 헛되이 죽고 말았으니, 애석할 뿐이다.

임경업이 갑작스럽게 죽은 이유에 관하여 김자점이 임경업과 엮이게 되자 책임 회피를 위해 임경업의 고문을 가혹하게 해서 죽였다는 설이 퍼졌다. 그리 틀린 소문도 아닌 듯 한게, 이후 그와 관련된 자들은 유배하거나 석방되었다. 그 때 김자점이 한 말을 보면 조정의 분위기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알 수 있다
사대(事大)는 반드시 성의껏 해야 합니다. 이번에 청나라가 경업을 보내주고 또 선량(船糧)을 감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신의 생각으로는, 국가에 일이 많지만 만일 절사(節使)를 통해 그 은혜에 사례한다면 소홀하게 될 듯하니 별도로 사신을 보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사망 이후에도 심기원의 반란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여죄를 추궁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이미 사망하였으므로 인조의 뜻에 따라서 심기원과의 연루는 불문으로 돌리고 망명한 죄만을 적용하여 처리하였다.

민담이지만, 청성잡기에 보면 임경업이 명나라로 망명하면서 기생 출신 애첩을 지인에게 맡겨두고 갔다고 한다. 나중에 효종이 북벌을 하려는데 입경업 같은 인물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입경업의 애첩을 불러올려 어찌하면 임경업 같은 이를 얻겠냐고 물었는데, 이 첩은 "설사 임경업 같은 이가 있어도 전하께서는 북벌을 하지 못할 것"이라 한다. 효종이 웃으며 어찌 그리 생각하느냐 묻자, 임경업의 첩은 과거 병자호란 때 봉림대군이었던 효종이 능히 김경징을 베어 죽일 수 있었으나 그 간단한 일도 하지 않았거늘 하물며 북벌을 할 수 있겠냐며 이는 계집인 자신도 안다고 대답했다. 효종은 무안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당시 봉림대군이던 효종이 김경징을 자의로 참했으면, 효종은 인조의 분노를 샀을 것이다.[16] 인조는 김경징의 삽질이 드러난 상황에서도 반정 공신 김류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살리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김류가 김경징이 죽어 마땅하다고 해서야 김경징이 사약먹고 죽었다. 봉림대군은 세자도 아니고 차자에 불과했기 때문에, 저 때 인조의 마음에서 엇나갔다면 조선 국왕 효종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외에도 인조에게는 인평대군과 용성대군이라는 대체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이후 북벌과 관련하여서 재평가 시도가 끊이지 않았고, 결국 사후 50년만에 숙종은 그를 옛 관직에 추서하고 충민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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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의 아내 완산 이씨[17]의 경우 청나라의 옥중에서 자살했다. 청나라에서는 아내의 명나라를 향한 충성심에 감동하여, 시신을 정중히 조선으로 돌려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충렬사에 정렬비가 세워져있으며 그 충렬비의 이름은 대명충신 조선 임 장군 경업 처 정부인 완산 이씨 정렬비(大明忠臣 朝鮮林將軍 慶業 妻貞夫人完山李氏貞烈碑).[18] 명나라를 향한 임경업과 그 아내 완산 이씨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함이라고.

다만 명나라에서 세운 것도 아니고, 숙종 때 조선에서 세운 비석에 마치 명나라의 속국을 자칭하는 것처럼 썼으니 이후 후손들이 보기에 영 기분이 좋진 않았을듯. 그래서인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훗날 대통령 박정희도 '대명 충신' 부분을 언짢게 여겨 정렬비는 보관하고, 정렬비의 내용만 한글로 새긴 비석을 따로 세울 것을 검토케 했다고 한다. # 팩트가 있는데 어쩔..차라리 다 치우던지..읍읍..

7. 비운의 명장? 과대 평가된 인물?

이후 설화를 바탕으로 임경업전이 저술되었고 많은 야화가 추가되면서 비운의 명장이란 평이 많아졌지만, 동시에 모화 사상에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보이며[19] 자국을 위험에 빠트렸다는[20] 전쟁에서 제대로 공을 세운 기록도 단 한번도 없는 인물[21]이란 상반된 평가가 따라 다닌다.

사실 임경업은 군사적인 무공보다는 외교에서 더 많이 활약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횡의와 통교 사건이 있기 전까진 대청 외교에서 군사 파견 문제를 놓고 계속 청을 오가면서 조선의 입장을 대변했고 이후 명나라와의 밀외교도 최명길과 함께 담당했다. "맹장"이라기보다는 "수완 좋은 정략형 무인"이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능력 자체는 이미 당대에 인정받았던 것은 사실인데, 청나라조차도 조선에 뭔가를 요구하거나 파병을 요청할 때 처음부터 콕 찍어서 '임경업에게 시켜라', '임경업을 보내라'고 하기도 했다.

연평도에서는 임경업 장군각이라는 사당이 있고 임경업을 풍어의 신으로 모셨다. 연평도 지역의 설화에 따르면 병자호란 때 임경업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세자를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던 중 선원들의 부식이 떨어지자, 연평도에 배를 대고 안목과 당섬 사이의 얕은 바다에 가시나무를 촘촘히 박아서 썰물로 물이 빠져나갈 때 나무 빗살에 걸려서 못 빠져나간 조기를 잡는 어살법을 주민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임경업 장군이 어살법으로 조기를 잡았다는 안목 어장은 오늘날 연평 면사무소가 자리한 마을의 앞 바다로, 당섬, 책섬, 작은 지리 등의 작은 섬들에 둘러싸여 호수처럼 얕고도 잔잔하다. 이곳에서는 썰물 때 조개, , 낙지 등을 아이들과 함께 직접 잡아보는 갯벌 체험이 가능하다. 또 마실 물이 떨어져서 병사들이 목말라 죽겠다며 고통스러워하자 바닷가 한가운데에 배를 멈추게 하고는 그 자리에서 바닷물을 떠서 마시게 했는데, 신기하게도 그 물이 조금도 소금기가 없는 민물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도 섬에는 임경업 장군각에서 주민들이 출어에 앞서 풍어제를 지내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전라남도 순천시의 낙안읍성에서는 임경업이 읍성을 하룻밤 만에 쌓았다는 전설도 있다. 물론 전설은 전설일 뿐이고, 낙안읍성이 현대의 석성으로 만들어진 것은 세종대왕 시기이다. 단, 임경업이 낙안군수에 재직하던 시절 읍성을 중수(고쳐서 개량)한 적은 있다. 이 것이 전설로 이어진 것.

8. 대중 매체에서 등장

그를 주인공으로 한 <임경업전> 또는 <임장군전>이라는 제목의 고전소설이 있다. 주인공 최치원이 사실상 비범한 도사로 신격화된 최고운전과는 달리, 해당 소설의 임경업은 전형적인 조선 영웅상으로 묘사된다. 최후에 김자점의 모함으로 죽는 건 역사와 동일하나, 판본에 따라 김자점이 보낸 자객에게 죽었다고 묘사되기도 하며, 김자점은 청나라로 도피하지 못하고 조선 정부에 붙잡혀 임경업을 죽게 한 대가로 참수형을 받는다. 이때 집행인이 임경업의 세 아들들인데 각기 명 황제에게 받은 상방검, 뱀이 토해낸 단검, 무과 급제할 때 상으로 받은 창 등 임경업이 생전 애용하던 무기로 처형을 집행한다. 김자점이 임경업을 모함하는 대목을 실감나게 읊어주던 이야기꾼이 뿔난 행인에게 목이 잘려 죽었다는 일화도 있다.

네이버 웹툰 칼부림에서 등장하는데 영정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선 굵은 무인형 용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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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언에 따르면, 1640년 명나라 황제가 임경업의 얼굴이 보고 싶다고 해서 명나라 화공이 조선에 와서 그려갔다고 한다. 당시는 임경업이 명나라와 짜고 가짜 전투를 했던 그 시기이다. 이 때 화공이 2장을 그려서 한 장은 명나라로 가져가고, 한 장은 조선에 남기고 갔다고 전한다, 현재의 그림은 임경업 사후 다시 그려진 것이다. 우측에 기재된 <충민공 임장군 유상>이라는 표제도 그렇고, 그림체에 조선 후기의 특징과 명나라 화풍의 특징이 많이 묻어난다고 한다. 여담으로 흉배가 아주 특이하다. 이것은 인조 때에 공이 있다고 판단한 무신들에게 특별히 하사한 것으로, 본래 호랑이와 곰 등 동물을 주로 한 것과는 달리 구름과 방사형등 도상적 이미지가 강하다. [2] 유흥치는 모문룡과 똑같은 뻔뻔한 인물로, 무려 1만의 조선 양민들을 죽여서 청군의 목이라 위장하여 명나라 본국에 보내던 자들이었으며, 이들의 잔악한 조선 양민 학살을 보다 못한 청나라 군사들이 나서서 이들을 물리쳐 구해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3] 박씨전에서도 세자를 잡아간 용골대를 임경업이 발라준다는 스토리가 나온다. 물론 말만 놓고 보면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다. 청군이 임경업을 두려워한 이유는 그가 먼치킨으로 청군을 털어버릴 수 있어서는 아니고(...) 싸우다가 발목 잡히면 인조를 놓치거나 장기전으로 돌입하게 될 수도 있었기 때문. [4] 실제로 명나라는 병자호란 내내 조선에 아무런 지원 병력을 보내지 못했다. 원래는 강화도 방어를 도와주려고 수군이라도 조금 보내주려 했지만, 이 마저도 풍랑으로 무산됐다고 한다. [5] 백성들이야 이런걸 모르니까 "아 그때 심양을 확 쓸어버렸다면..." 이라는 생각을 했을수가 있다. [6] 물론 병력 문제는 김자점의 병력이 2만이었으니 당연히 임경업이 말한 5천을 네배나 뛰어넘는다. 문제는 김자점은 움직일 생각이 없었고 그 한시가 촉박한 시간에 김자점에게 달려가서 협조해달라고 할 타이밍이 없었을 것이다. [7] 앞서 언급된 유흥치를 제거하고 명나라 도독이 된 인물이다. [8] 하지만 이들은 결국 청에 투항하여 청의 요동 정벌에서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9] 병자호란 시기 주화파로 이름 높은 그 최명길이 맞다. [10] 이 때 심기원에게 지원을 받은 것이 임경업의 사망 플래그가 된다. [11] 이 시기 명이 아직 잔존해 있었으므로 임경업을 명에 보내서 끈을 대려는 의도를 가진 세력은 많았고, 심기원과 마찬가지로 역시 임경업을 한 번 도와준 적이 있어서 끈이 있던 김자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결국 임경업의 2번째 사망 플래그가 된다. [12] 사족으로 예친왕이 임경업을 자신의 수하로 두려 했으나 임경업은 신하가 어찌 두 임금을 섬기겠느냐며 거절했고 그 충정을 보고 감명받아 사형을 면했다는 야사가 존재한다. [13] 명군과의 위전은 임경업의 독자적인 의도로 광해군 시기 강홍립과는 상황이 달랐고, 명나라 장수로 들어간 시기에는 철저하게 명나라 장수로 활동했다는 것 등이 주요 이유였다. [14] 형조 판서로 임경업을 압송하다가 탈출 사건을 만나서 파직되었던 인물로 이 시기에는 원당의 영수가 되어 있었다. [15]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임경업이 심기원의 일파로 몰린 것은 임경업이 심기원의 도움을 받아서 압송 중 탈출하였다는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하지만 이는 결국 자신의 종 출신들로 임경업의 도해를 도왔던 김자점 역시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다. 이에 이미 친청파로 선회한 김자점은 역시 간신은 눈치가 빠르다., 이미 명의 멸망으로 효용 가치가 떨어졌으며 오히려 문제의 소지만 있었던 임경업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16] 분노는 둘째 치고 사람을 죽이고 살릴 권한은 군주에게만 있다고 했으니... 물론 김경징의 병크를 보면 봉건대군이 이적행위를 해서 참했다고 최대한 변명하면 될 가능성나마 없는건 아니지만 [17] 진안 대군의 7세손. [18] 꽤 오랫동안 조선이란 단어가 빠져있었다. 뭐 충렬사를 관리하는 충주시의 디지털충주문화센터 페이지에서도 잘못 적혀 있었으니. 참고로 저 조선이란 것은 단순 출신지 이야기이기 때문에 대명 충신 부분에는 한점의 흐트러짐도 없다. 애초에 저 비석 자체가 임경업을 복권한 숙종 때에 세워졌다. [19] 실제로 임경업의 아내까지도 청나라의 옥중에서 자살할 때 "내 남편은 대명의 충신이요, 나는 그 충신의 아내다. 오랑캐의 옥중에서 욕을 보며 남편의 충절을 욕보일 수 있겠는가?" 라고 까지 했다. 청나라에 끌려갔던 삼학사 중 한 명인 홍익한도 스스로를 대명 조선국의 신하라고 자처했다. 명나라 중심의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이론적으로 조선의 관료들은 궁극적으로 명나라의 신하였던 것이다. 이를 극단주의라고 부르며 고려의 부마국 시절을 드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지적이다. 조선과 고려와 원명관계는 상당히 다르다. 당장 광해군 대에도 신하들이 '중국 조정에 죄를 짓느니 차라리 성상께 죄를 짓는게 낫다'라고 발언했던 것을 생각해보자. 당시에는 이것이 보편적 세계질서였다. 홍익한은 그나마 대명 조선국이었다면, 임경업은 그냥 대명이라는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다. 이 차이는 성리학 기준에서는 엄청난 차이다. [20] 임경업이 한 행동은 최대한 미뤄봐도 병자호란 이후에는 명이라면 몰라도 조선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임경업이 한 무수한 행동들(예를 들면 회군하는 청군을 무단 공격한 것)은 이를 빌미로 청의 재침을 부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청에 볼모로 잡혀가있었던 소현세자는 청의 재침을 막기 위해서 엄청나게 고생했다. [21] 임경업의 전공은 2가지인데, 이괄의 난 당시 정충신의 부하로 참전하여 이름만 올린 것과 앞서 기록된 화의를 맺고 본국으로 철수하던 청군 기병 300을 급습한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