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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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현종의 왕녀
명혜공주 | 明惠公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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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혜공주묘 전경 | |||
출생 | 1663년 1월 12일[1] | ||
조선
한성부 궁중 내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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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73년 6월 11일[2] (향년 11세) | ||
조선
한성부 궁중 내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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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명혜공주묘(明惠公主墓) | ||
재위기간 | 조선 명혜공주 | ||
1669년 이전 ~ 1673년 6월 1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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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부모 |
부왕
현종 모후 명성왕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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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부왕 기준
1남 3녀 중 차녀 모후 기준 1남 3녀 중 차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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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東安尉 申堯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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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호 | 명혜공주(明惠公主) |
[clearfix]
1. 소개
조선 현종과 명성왕후의 적2녀. 숙종의 동복 동생이다.2. 생애
1673년(현종 14) 2월 7일 신정의 아들 신요경이 부마로 정해졌다.[3] 그런데 그해 4월 27일 가례를 올리지 못한 상태에서 공주가 갑자기 사망하였다.[4] 당시 현종은 예법에 나오는 절차[5]를 무시하고 먼저 신요경에게 부마의 위호를 주고, 궁중을 출입하게 하는 등 특혜를 주었다.[6] 공주가 죽었으니 현종은 부마의 위호를 이대로 두느냐 마느냐를 두고 예조에 물어보았다.명혜 공주(明惠公主)가 죽었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지금 명혜 공주가 뜻밖에 죽으니, 애통한 나머지 다른 일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 다만 부마(駙馬)에 대하여 생각하면 비록 위호(尉號)를 정했으나 아직 납채(納采)의 예를 행하지 않았으니 이미 정혼하여 길례(吉禮)를 행한 것과는 다른 점이 있다. 고사(故事)의 유무와 위호(尉號)를 그대로 두느냐의 여부를 즉시 예조에게 물어서 아뢰라."
조선왕조실록 현종 14년 4월 27일
조선왕조실록 현종 14년 4월 27일
여기서 납채는 첫번째 절차로서, 혼담이 오고 간 다음에 여자 집에서 이를 허락하면 남자 집에서 사주단자를 보내서 혼약을 맺는 것을 말한다. 사실 왕실의 간택에서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다. 그러나 납채조차 치르지 않았기에 부마로 인정할 수 없었다.
한편 4월 27일, 명혜공주의 상여는 창덕궁 단봉문을 통해 나가서 6월 10일 귀후서[8] 별제 김정이 예장(禮葬)을 맡아 공주는 어린 나이에 땅에 묻혔다.[9]
3. 여담
- 1674년(현종 15) 명성왕후는 금강산에 있던 승려 축존(竺尊)을 불러 명선공주와 명혜공주의 묘 근처에 있는 성부산[10] 아래에 두 공주의 명복을 비는 법당을 세우도록 하였다. 그리고 내관을 보내 공사를 감독하고 '봉국사'라는 사액을 내렸다. 봉국사에서는 두 공주를 위해 봄, 가을로 제사를 지냈으나 일제강점기에 공주의 묘가 이장되면서 중단되었다.
[1]
음력
현종 3년
12월 4일
[2]
음력
현종 14년
4월 27일
[3]
승정원일기 232책 (탈초본 12책) 현종 14년 2월 7일 정미 5/5 기사.
#
[4]
현종실록 21권, 현종 14년 4월 27일 병인 1번째기사.
#
[5]
혼례는 납채(納采)·문명(問名)·납길(納吉)·납징(納徵)·청기(請期)·친영(親迎)의 순서로 진행되어야 하며, 이를 '육례'라고 한다.
[6]
만약 현종이 원칙대로 육례를 순서대로 진행했다면, 신요경에게 부마의 위호부터 먼저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논의가 있지 않았을 것이다.
[7]
요즘도 전통혼례에서 신랑 신부가 표주박에 술을 나누어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합근례다.
[8]
관곽을 만들어 팔며 장례에 관한 물품을 공급, 또는 예장을 담당하던 예조 소속의 종6품 아문. 제조 1명과 별제 6명을 둔다.
[9]
승정원일기 234책 (탈초본 12책) 현종 14년 6월 10일 무신 2/9 기사.
#
[10]
오늘날
경기도
성남시에 있는 영장산을 말한다.
[11]
부여군 향토유적 제113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