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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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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5년 1월 5일
경상남도 김해
사망 1958년 3월 10일
묘소
본관 분성배씨
가족
학력
서훈 2005년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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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 생애

1895년 1월 5일 경상남도 김해군(金海郡) 가락면(駕洛面) 죽동리(竹洞里, 부산직할시 강서구 죽동동)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남긴 행현 기록에는 같은 해 1월 8일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관은 분성(盆城), 자는 성팔(聲八), 호는 광암(廣岩)이다.

김해공립보통학교(金海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구마모토현립공업학교(熊本縣立工業學校)를 졸업하였다. 1920년 10월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치과에 입학했으나, 11월에 퇴학을 당하고 국내로 돌아왔다. 상점의 고원(雇員), 지배인, 신문사 지국장 등으로 일하면서 김해지역 청년운동과 농민운동 등 사회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6월 이래 김해청년회(金海靑年會)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12월 2일 서울 중앙기독교청년회관(中央基督敎靑年會館)에서 개최된 조선청년회연합회(朝鮮靑年會聯合會) 창립총회에 김해청년회 대표로 참가하였다. 1922년 2월 김해청년회가 운영체제를 집행위원제로 바꾼 후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3월 조선청년회연합회 정기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5월 김해교육회(金海敎育會) 간사가 되었다. 1923년 7월 사상단체인 제사회(第四會) 결성에 참여했으며, 1925년 3월 경남의 사상단체인 동인회(同人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6년 3월 김해농민연맹(金海農民聯盟) 집행위원이 되었다. 『동아일보』 1926년 9월 17일 자에 「활계(滑稽)의 농교기성회(農校期成會)」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였다. 1927년 5월 16일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朝鮮社會團體中央協議會)에 김해농민연맹을 대표하여 참석하였다. 1927년 9월 7일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이 분립될 때, 조선농민총동맹(朝鮮農民總同盟)의 중앙집행위원 후보가 되었다. 1928년 3월 12일 창원군(昌原郡) 진해청년회(鎭海靑年會)에서 이혼 문제를 중심으로 가부(可否) 양론(兩論)을 나누어 대토론회를 개최했을 때, 부(否) 측 연사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5월 근우회(槿友會) 김해지회에서 개최한 ‘여성문제 대강연회’에서는 강연 도중 일제 경찰에 의해 중지를 당하는 등 강연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또한 김해지역에서 수해 등 재해가 발생했을 때에는 활발한 구호활동을 펼쳤다.

1929년 1월 김해농민연맹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어 김해지역 대중운동을 이끌었다. 2월 김해청년동맹(金海靑年同盟)이 운영하는 노동야학교(勞動夜學校) 대강연회에서 항일적인 연설을 하다가 일제 경찰의 제지를 당하기도 하였다. 3월 5일 김해농민연맹 집행위원장으로서 원산총파업 파업단에 격려 전보를 보냈다는 이유로 김해경찰서에서 구류 처분을 받았다. 또한 8월 김해 시민대회를 준비하다가 ‘치안방해’라는 이유로 일제 경찰의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같은 달 김해청년동맹이 주최한 김해기생조합(金海妓生組合) 설립 반대 연설회에서 연설하였다. 그 즈음 국제청년데이 김해 기념강연회에서는 ‘청년운동의 의의’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1929년 8월 13일 신간회(新幹會) 김해지회(金海支會)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1월 24일 신간회 제2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경남지방 특파원으로 선출되었다. 11월 러시아혁명 기념 대강연회에서는 ‘러시아혁명과 무산계급’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같은 해 12월 김해농민연맹을 대표하여 김해군 상동면(上東面)의 소작쟁의를 주도하였다. 같은 달 13일 허헌(許憲)·한용운(韓龍雲) 등 종교·사회 방면의 주요 인사 30여 명이 서울 종로경찰서와 경기도경찰부에 검거될 때 함께 붙잡혔다가 풀려났다.

1930년 1월 중추원(中樞院) 찬의(贊議)와 친일단체 국민협회(國民協會) 간부 오태환(吳泰煥)과 이동우(李東雨)가 ‘민정시찰과 사상선도’라는 명목으로 김해농업학교(金海農業學校) 강당에서 강연회를 실시하자, 여기에 참석하여 항일적인 질문과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기도 하였다. 2월 16일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보선(補選)되었다. 그 즈음 김해청년동맹 간부들과 함께 ‘김해 반제격문(反帝檄文) 사건’에 연루되어 한때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5월 메이데이 시위로 인해 일제 경찰에 붙잡혀 4일간 구류 처분을 받았다. 김해에 큰 수해가 발생했던 9월 구제의연금(救濟義捐金)을 모집하다가 또 다시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10월 10일 최여봉(崔汝鳳)·한성봉(韓聖鳳) 등과 함께 김해농민연맹을 개편하여 김해농민조합(金海農民組合)을 창립하고, 그 집행위원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11월 23일 부산양화직공조합(釜山洋靴職工組合) 작업부의 운영자금 조달을 위해 김해의 재력가인 허발(許墢)을 ‘공갈’했다는 혐의로 노백용(盧百容) 등과 함께 부산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1931년 5월 메이데이를 앞두고 김해경찰서의 예비검속에 의해 동료 간부들과 함께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한편 김해농민조합 집행위원장으로서 당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진영(進永)의 하사마농장(迫間農場) 소작쟁의를 지원하는 활동을 하다가, 11월 13일과 1932년 2월 28일 두 차례에 걸쳐 일제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

1932년 3월 만세운동 기념일을 앞두고 또 다시 예비검속을 당하였다. 3월 17일에는 4월 개최될 김해농민조합 정기대회를 준비하던 중 김해경찰서 고등계에 불려가 집회금지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4월 14일 개최된 정기대회의 표어가 ‘불온’하다는 등을 이유로 동료 간부 한성봉·허성도(許晟道) 등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혀갔다가 풀려났다.

7월 4일에는 조선공산주의자재건협의회(朝鮮共産主義者再建協議會)와 연계하여 사회과학연구회(社會科學硏究會)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농민조합 간부들과 함께 김해경찰서 고등계에 붙잡혔다. 8월 22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부산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으나, 8월 31일 혼자 무죄로 풀려났다. 당시 김해경찰서에서는 김해농민조합의 해산을 강요하였으나 이를 거부하며 계속 활동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간부진이 모두 붙잡힌 상태에서 결국 위원장 명의로 해산한다는 통문을 각 지부에 보내고, 농민조합의 재산권은 모두 김해체육협회(金海體育協會)로 넘기고 말았다.

1933년 7월 5일 당시 큰 수재로 피해를 입은 상황에 대해, 동아일보사 특파원으로서 답사기를 신문에 보도하였다. 7월 13일 이른바 치안유지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또 다시 일제 경찰에 연행되었다. 동아일보 김해지국장으로 활동하다가, 1936년 2월 이를 사임하였다.

광복 이후 1945년 12월에는 전국농민조합총연맹(全國農民組合總聯盟) 결성대회에 김해군 대표로 참석하였다. 주민들의 추대로 한때 김해군수가 되었으나, 좌우가 대립하는 혼탁한 정국에서 며칠 만에 밀려났다. 서북청년단(西北靑年團) 등 우익의 테러 위협을 피해 서울 등지로 떠돌다가 6·25전쟁 때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1982년에 친족에 의해 사망신고가 되어, 호적에는 1958년 3월 10일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