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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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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어린 시절3. 관직 활동4. 친일 행적
4.1. 고종 폐위4.2. 정미7적의 필두4.3. 기유각서4.4. 이재명 의사의 암살실패4.5. 다시 살아난 후 경술국치 전야까지4.6. 국권 피탈 이후4.7. 사후

1. 개요

KBS 한국사전 - 독립협회장 이완용, 그는 왜 매국노가 되었나?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완용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

2.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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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은 음력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부 낙생면 백현리(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1] 우봉 이씨 참판공파(參判公派) 집안에서 아버지 이석준(李奭俊, 1822. 3. 16 ~ ?)[2]과 어머니 영산 신씨(1827. 2. 4 ~ ?) 신석우(辛錫祐)의 딸 사이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원래 이완용은 몰락 양반인 잔반이었지만 10세의 나이에 33촌 지간의 족숙(族淑)으로 감찰공파(監察公派) 후손인 이호준(李鎬俊, 1821. 7. 18 ~ 1901. 2. 28)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권력의 핵심부에 들어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의 집안은 고려시대의 잠성부원군 이공정의 후손으로 많은 관직을 배출한 명문이었다.[3] 그러나 이완용의 생가 직계 가문은 9대조 이래로 이렇다할 벼슬살이를 한 사람이 없어 우봉 이씨 가문 중에서도 가세가 가장 빈한한 편에 속했다. 따라서 부친 이호석은 겨우 선비의 체면을 유지하며 어렵게 살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양부인 이호준은 당대의 정계 거물로, 승정원 동부승지 등의 고위직을 지냈고 신정왕후 조씨의 조카인 조성하를 사위로 들였으며 흥선대원군의 서녀와 자신의 서자를 혼인시켰을 정도로 인맥도 튼튼한 인사였다.

3. 관직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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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고종이 축하연주를 하라고 하였으며[4], 훗날 시강원[5]의 시종관이라는 직위로 세자를 직접 가르치면서 순종과는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이후 고종이 국제 업무를 담당할 신진 관료를 교육하기 위해 육영공원을 만들었는데 거기서 헐버트를 만나게 되었고 이 때 영어를 배웠다. 그는 조선인 중에서는 당시 몇 명 되지도 않는 영어 실력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미국은 조선과 거리가 멀어 침입할 우려가 적고, 부국이니 덕을 볼 것이고, 종교 지상주의 국가이니 야심이 적을거라 판단해 미국은 부강함이 천하제일이라는 당시 조선 분위기 속에 1887년 미국 주재 공사 참찬관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이는 청나라의 극심한 반대에도 무릅쓴 고종의 결단이었다.[6] 미국에서 2년 5개월간 주미 외교관으로 근무하며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 관계의 현실과 근대화된 서구 열강의 모습을 보면서 이완용은 친미파 관료로 성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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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5월6일 호러스 뉴턴 알렌과 함께 조지 워싱턴의 생가를 방문한 이완용[7]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일본을 피해 미국공사관으로 고종을 피신시키려 시도한다. 이 사건을 춘생문 사건이라고 하는데 1895년 11월에 있었던 고종의 경복궁 탈출 미수 사건이다. 이범진이 주도하였고 이완용, 이윤용, 윤치호, 민상호 등이 참여하였으며 목표는 고종이 경복궁을 벗어나 미국 대사관으로 가는 것이었지만 병력 동원을 위해서 참여시킨 훈련대 대대장 이범래, 이진호가 이를 일본에 밀고해서 실패하였다. 이완용을 포함하여 이 사건에 참여했던 이들은 이후 고종의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8] 훗날 이 전략은 다음 시도인 아관파천에서 기어이 성공을 거둔다. 이후 이완용은 참찬관으로 미국으로 다시 건너갔으나 외교적으로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이후 위와 동일한 방법을 다시 써 아관파천으로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대피시킨 공로로 외부대신 겸 농상공부 대신의 벼슬을 얻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고종에게 대가를 요구하였으며 이완용은 이를 모두 거부하였는데 이완용은 미국이 도와줄줄 알았지만 미국도 러시아와의 충돌을 원치 않아 거절하였다.

이완용은 독립협회의 위원장, 초대 부회장과 2대 회장을 지냈으며 독립협회 존속 기간의 2/3 이상을 이끌었는데 회비도 가장 많이 냈다고 한다. 독립문 현판도 이완용이 썼으며[9] 기관지 < 독립신문>에서도 매번 이완용을 칭송했는데 독립문 정초식 행사[10] 때 한 그의 연설이 <독립신문>에 남아있다. 이완용은 독립을 하면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지만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 싸운다면 유럽 폴란드같은 나라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독립을 하면 나라가 미국과 같이 세계에 부강한 나라가 될 터이요 만일 조선 인민이 합심을 못 하여 서로 싸우고 서로 해 하려고 할 지경이면 구라파에 있는 펄낸이란 나라 모양으로 모두 찢겨 남의 종이 될 터이라 세계 사기에 두 본 보기가 있으니 조선 사람은 둘 중에 하나를 뽑아 미국 같이 독립이 되어 세계에 제일 부강한 나라가 되든지 펄낸 같이 망 하든지 좌우 간에 사람 하기에 있는지라 조선 사람들은 미국 같이 되기를 바라노라
독립신문 1896년 11월 24일 기사

초기에 독립협회는 청나라의 간섭으로부터 조선을 독립시키기 위해 왕의 지위를 중국과 동일한 황제로 추대하는 등 왕권에 대해 우호적인 성향을 보여왔었지만 러시아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독립협회 수장으로써 이완용의 입지는 난처해졌다. 고종이 끌어들인 러시아 제국에 대해 수구파들은 친러 성향을 보였고 개화파와 독립협회는 반러 성향을 내보이며 갈등을 빚었으며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는데 반해 고종과 수구파는 전제군주제를 지향하는 점에서도 갈등이 있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이완용은 서구 열강에 친숙하고 반러, 민권 행보를 보이는 독립협회의 수장이었던 만큼 독립협회에 부정적인 친러 성향의 주류 근왕파 대신들에게 밀려 1898년 3월 11일 전라북도 관찰사로 발령을 받고 좌천되었다.[11] 관찰사로 부임한지 닷새만에 직무 태만으로 감봉, 공금 횡령으로 파직 위기를 겪었으며 급기야 독립협회에서도 제명되었다.

이완용 실각 이후 윤치호를 수장으로 한 독립협회는 1898년 10월 러시아와 일본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입헌군주제 정착을 위해 힘썼으나 황국협회를 중심으로한 수구파들이 "독립협회가 고종을 폐위하고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한 공화국을 수립하려 한다"는 전단을 뿌리며 방해 공작을 펼쳤고 이에 놀란 고종이 경무청과 친위대를 동원하여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면서 만민공동회와 함께 강제 해산되어 버렸다. 전북 관찰사 재직 이후인 1900년 7월부터 1904년 이전까지 고향에서 아무 관직 없이 은둔하게 되는데 중간에 고종으로부터 복귀 권유가 있었지만 이완용이 이를 거부하였으며 이 때까지만 하여도 이완용은 반일을 외치던 인물이었다.

4. 친일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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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11월 궁내부 특진관 복귀 이후 본격적으로 활약하게 되는데 경술국치 이전까지의 그의 행보는 을사늑약 체결, 헤이그 특사에 따른 고종 황제 퇴위, 군대 해산, 정미 칠조약 등으로 대표된다. 이 시기부터 친일파의 대명사라고 불리게 되는 이완용의 친일 행적이 시작되어 완성된다.

1905년, 이완용은 학부대신으로서 일본군 무력시위를 등에 업고 어전회의를 열어 고종을 대신해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을사오적의 수뇌로 불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 적극성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이완용이 고종을 직접 협박한 것은 아니다. 당시 고종을 협박, 농락한 것은 궁내부 대신 이재극이고, 이완용은 "안 된다고는 할 수 없으니 첨삭 정도로 협상하자"라는 현실 논리를 말하는 식이었다. 고종은 체결 전의 어전 회의에서는 이완용의 이 논리가 타당하다고 말했다! 이런 유유부단한 행보 때문에 을사육적 소리도 듣는다. 다만 해당 시점에서 이미 을사늑약의 거부는 불가능했다. 만약 고종과 모든 대신들이 완강하게 거부했다면 고종 목에 총칼을 들이밀고 내각을 환국시켜서라도 일본은 을사늑약을 체결했을 상황이었다. 즉, 이완용의 문제는 대한제국의 대신으로서 대한제국의 국권을 넘기는 조약에 찬성했다는 그 태도 자체이지 이것을 체결시켰다는 결과론적 문제가 아니었다.

을사조약 과정을 설명한 이완용의 글을 보면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이 모조리 '학부대신과 같은 의견'이라며 물타기를 하는 장면이 잘 드러나있다. 이후에도 자신들은 오적이 아니며 어쩔 수 없이 총대를 맨 충신이며, 남들이 위선 떠는 것이란 식의 자기 변명을 했다. 각국에 파견된 대한제국의 주재 공사를 소환해야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완용.

4.1. 고종 폐위

1907년 6월 고종이 헤이그 특사 사건이 발생하자 총리대신 이완용과 내각대신들은 고종에게 몰려가 물러나야 한다고 말한다.

이완용은 송병준과 함께 이토가 사주한대로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양위할 것을 강요, 내각 회의에서 황제 퇴위를 결정했다. 전화선을 끊고 수라를 거부하는 고종을 협박해 대리청정의 답을 얻어낸 뒤 고종도 순종도 없는 자리에서 강제로 즉위식을 진행시켰다.

사실 그 전부터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오적 일원인 박제순[12]에게 넌지시 고종 퇴위를 제의하나, 의외로 별로 동조하지 않자 그를 물러나게 하고 이완용을 참정대신으로 앉힌 것이었다.

고종은 황제 대리를 주장하며 끝까지 버텼다. 고종이 응원을 위해 임명한 궁내부 대신 박영효마저도 그 꼴을 보기 싫어서 그 자리를 피했으나 이완용은 스스로를 궁내부 대신 서리에 임명하고[13] 그 일을 행했다. 그 직후 (20일) 메이지 덴노의 "순종 즉위" 축하 메시지가 오자 즉각 반응, (22일) 대리청정을 황제로 바꾸어버렸다.

이완용은 1907년 6월 14일 대한제국 총리대신이 되었다.

4.2. 정미7적의 필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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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즉위 직후, 24일 정미7조약(한일 신협약)으로 '내정까지 통감부의 지배를 받는다' 라는 안을 토씨 하나 수정하지 않고 통과시켰다. 황실 보호는 언급되지 않았다. 이렇게 이완용은 정미7적에 이름을 올렸다.

그 해 8월 1일에는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로 말미암아 해산된 한국군이 합류한 정미의병이 한창 일어났을 때 이완용은 일본군 대장 하세가와를 매일 찾아가 의병토벌에 대해 논의했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자리에서 '조선인 현병보조원 제도'를 계획하는 데 크게 일조했고, 의병장 허위가 체포되었을 때, 허위를 처벌할 것을 순종한테 상소를 올린 것도 이완용이었다. 그래서 의병장 허위는 결국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고 만다.

순종 년간에 이완용은 총리대신을 하면서 형 이윤용을 궁내부 대신으로, 사돈 임선준은 탁지부대신으로, 승녕부 총관(고종의 비서실장)은 처남 조민희, 아들 이항구는 승녕부의 시종을 시키는 등 인척 내각을 이룩했고, 황태제( 영친왕) 책봉 문제에도 참여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이완용은 조선 왕조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혔던 인물을 신원, 복권하고 명망이 있으나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재야 인사들에게 시호를 내려주는 등의 작업을 활발하게 행하였다. 이 작업은 경술국치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이완용의 주도로 복권되거나 새로 시호를 수여받은 인사로는 윤원형, 윤휴, 이징옥, 정인홍, 박지원, 정약용 등이 있다. 이 작업 자체는 매국 행위는 아니며 단순한 정리 사업에 가깝다.

4.3. 기유각서

1909년,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에서 물러나면서[14]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사법권을 뺏는 작업을 계획하고 있었고, 심지어 사돈까지도 반대하면서 내각 총사퇴를 주장했다. 내각 내에서도 반대가 빗발치고 내각 총사퇴가 사실상 기정사실화 되자 그는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와 단독으로 조약(기유각서)에 서명했다.

12월 4일에는 일진회의 한일합방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합병조약은 일진회의 계획보다도 한국에게 훨씬 불리했다.[15]

4.4. 이재명 의사의 암살실패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이완용의 집은 민중들이 불태웠다. 자신 또한 12월 22일 명동성당 앞에서 벨기에의 폭군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석했다가 당시 현역 군인이었던 이재명의 습격을 받는다. 하지만 암살은 실패했는데, 앞에 있던 인력거꾼 박원문이 그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박원문은 대신 부상을 당해 그 자리에서 사망한다. 이재명 의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그 자리에서 재차 이완용을 공격했지만 치명상을 입히지 못 하고 체포된다. 이재명의 공격으로 중상을 입었던 이완용은 이때 입은 상처로 말년에 죽을때까지 폐렴을 앓았다. 이재명 의사는 경술국치 이후 박원문을 살해한 죄로 1910년 9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여담이지만 당시 이뤄졌던 외과 수술에 대한 기록은 몇 남아 있지 않은 중요한 의학사 자료로 인정된다. 동 시기의 다른 외과 수술 기록이 전부 파기된 데 비해 재판의 증거로 사용되었기에 남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수술은 대한민국 최초의 흉부외과 수술로 기록되어 있다. 모 의대의 흉부외과 총론 시간 첫 수업에서 이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의업에 충실한 것이 민족과 역사에 죄를 짓게도 한다."라는 농담을 했다고 한다. #

또한 맹꽁이 서당에서도 경술국치 당시 이용직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며 "칼을 맞으려거든 대감 혼자서 맞으시오! 난 그럴 생각 없소!" 라며 디스한 장면도 나온다.

4.5. 다시 살아난 후 경술국치 전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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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0일 부로 테라우치 마사타케가 제3대 통감에 오른다. 군부 출신으로 강경파였던 그는 일방적으로 경찰권 회수를 통보했고, 내각은 테라우치가 한국에 입국하기도 전에 무기력하게 통과시켜버렸다. 7월 23일, 한국 합병에 대한 세부사항 논의까지 마치고 테라우치는 입국했다. 이즈음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는지 이완용도 요양을 마치고 상경했다.

이완용은 8월 4일부로 비서 이인직("혈의 누" 작가)을 통해 합병을 먼저 제의했다. 아마도 송병준의 일진회 등에게 선수를 뺏기기 싫었던 모양. 통감부마저도 "그물도 안 쳤는데 물고기가 뛰어들었다."라는 반응을 보냈다. 합병 조약문에서 이완용은 "국호 한국과 황실의 왕 칭호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라면서 추가를 요구했는데, 황실 보호라기 보다 황실의 지지를 통한 자기 입지 강화로 보인다. 물론 일본 입장에서도 한국 황실이 고분고분한 것은 결코 나쁘지 않은 데다[16] 이를 받아들이고, 더불어 한국 황실을 일본 황실로 편입한다.

주저하는 이들을 테라우치에게 일러바쳐 압력을 행사하고, 반대하는 학부대신 이용직을 일본 수해 위문 사절단으로 동경으로 보내는 등(이용직은 이를 간파하고 가지는 않았다.) 갖은 수단을 써서 순종의 윤허를 받았다. 고종에게는 "신이 하지 않아도 송병준과 일진회가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는데, 이완용이 물러난 후 고종은 "'신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매국의 거사는 하지 않겠다.'고 한 자는 바로 이완용 아니던가! 그가 무슨 낯으로 짐을 본단 말인가!"라고 통곡했다. 한때나마 그를 믿어주었던 주군에게까지 신임을 잃었던 것.

그리고 8월 22일, 이완용은 이용직에게는 통보도 하지 않고 최후의 내각 회의를 열고는 한일합병조약을 통과시켰다. 이후 1주일 동안은 숨겼다가 8월 29일자로 순종의 이름으로 발표된다.

이때 나이 52세. 그렇게 한국 역사상 최초로 스스로 나라를 팔아먹었다.[17]

4.6. 국권 피탈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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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6년 8월 4일자 매일신보. 이완용이 기고한 글로 순종의 이복동생, 왕세자 영친왕(이은)[18]과 일본 황족 마사코 여왕과의 강제결혼 결정을 '일선(日鮮) 영구의 친선'으로 미화했다.)

국권 피탈 이후, 일본으로부터 훈()1등 백작 작위를 받았다.

이완용은 그 뒤에도 사망할 때까지 조선인들을 일제가 노예화하여 착취하는 작업에 아이디어를 제시하거나 기존에 있던 조선인 착취를 위한 나쁜 제도를 더 확대하도록 자문하는 등 착취와 핍박의 행위를 주안으로 하는 삶을 계속하였다. 예를 들어 조선인이 조선인을 감시하는 "조선인 헌병제"도 정미의병 때부터 있던 헌병보조원 제도를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는 등 1910년부터 1919년 사이의 헌병 경찰 제도는 사실상 이완용이 만든 것이었다. 또한 그는 명목상의 총독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고문과 부의장을 지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완용은 경고문을 세 차례 발표하였다. 전문

다음 해 후작으로 승급하였고 1921년에는 창덕궁 일본 황실 별궁으로 만들자고 본인 스스로 2번이나 건의했다가 무산되기도 했다.[19] 그 이후 조용히 살았다. 1925년 12월 16일에는 자던 도중 식객 노릇하던 조카를 푸대접한것 때문에 조카한테 침실에서 습격당해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 저항하는 내용의 화장실 낙서 중의 상당수가 이완용을 거명하며 모욕하는 내용일 정도였다. #

1926년 2월 11일, 만 67세의 나이에 폐렴에 걸려 그가 생전에 받아야 할 합당한 벌을 단 하나도 받지 않고 편하게 죽었다.[20] 최후의 군주인 순종이 죽기 4개월 전이었다.

4.7.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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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2월 13일자 매일신보 1면

사후는 생전보다 더 화려했는데, 일본인과 한국인으로 이루어진 50명의 장례위원들이 참석했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정2위대훈위 후작 이 공 지 구란 휘황찬란한 깃발을 들고 장례가 치뤄젔다. 그의 장례 행렬은 그의 3,000평짜리 집 옥인동부터 광화문까지 이어졌는데 고종 사후 이후 최대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21]

당시에도 민중에게 이완용은 증오의 대상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대명사였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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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 1면 사설에 실린 기사.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제목으로 이완용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여기서 동아일보
"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붓들려 갔다. (중략) 누가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능히 누리지 못할 것 누린 이냐. (중략) 이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라는 글귀를 남겼다. 조금만 일제의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을 써도 잡혀가는 시대였는데 대놓고 이렇게 기사에다 비난하는 글을 쓸 정도면 이완용에 대한 조선인들의 증오가 얼마나 컸는지 알만하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가면 해당 기사 부분이 지워져 있는데, 이는 총독부의 검열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음날인 2월 14일자에 '본보압수'라는 제목 하에 "2월 13일 기사 중 당국(當局)의 기휘(忌諱, 금지령)에 저촉된 바가 있어"라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신문자료에 가면 원문 이미지를 볼 수 있으니 참조하자. 옛 신문이라 한자가 좀 많다. 신문 발행일은 당시 일본의 연호인 다이쇼(大正)로 표기되어 있다. # 전문[22]
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갔다. 보호순사(保護巡査)의 겹겹 파수(把守)와 철비전벽(鐵扉磚壁)의 견고(堅固)한 엄호(掩護)도 저승차사의 달려듦 하나는 어찌하지 못하였으며 드러난 칼과 뵈지 않는 몽둥이가 우박같이 주집(注集)하는 중에서도 이내 꼼짝하지를 아니하던 그 달라진 눈동자(瞳子)도 염왕(閻王)의 패초(牌招)[23] 앞에는 아주 공손(恭遜)하게 감겨지지 않지를 못하였구나.

이때이었다. 너를 위하여 준비하였던 것이 이때이었다. 아무리 몸부림하고 앙탈하여도 꿀꺽 들이마시지 아니치 못할 것이 이날의 이 독배(毒杯)이다. (후략)

어허! 부둥켰던 그 재물을 그만하면 내놓지! 앙탈하던(=끝내 피하려던) 이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한자 표현과 예스러운 표현이 많은데, "겹겹이 보호를 하고 굳게 엄호하여도 저승사자의 칼과 몽둥이 찜질은 못 피했고 전혀 감기지를 않던 눈동자도 염라대왕 앞에서는 공손하게 감겨졌다" 정도의 논조를 담고 있다.

그 밖에도 네이버에서도 확인이 가능한 동아일보 "횡설수설" 란에는 이틀 연속으로 그의 죽음에 대한 짤막한 촌평을 달아두고 있다.
* 2월 12일 : 구문(口文 : 흥정을 붙여 주고 그 보수로 받는 돈) 후작 이완용은, 작일(作日 : 어제) 황천객이 되엿다고, 지옥행하노라고 무던이 고달풀걸.
* 해석 : 나라를 팔아먹은 후작 이완용은 어제 죽었다. (나라를 팔았으니) 지옥으로 갈 텐데, 고생길이 훤할 것이다.
* 2월 13일 : 구문 공신 이완용은 염라국에 입적하엿스니, 염라국의 장래가, 가려(可慮 : 걱정이 되어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 해석 : 나라를 팔아먹은 공신 이완용은 염라국에 들어갔는데, (이 작자는 지옥도 팔아먹을 게 뻔하니) 염라국의 장래가 걱정되어 마음이 편치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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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파묘 당시 이완용의 관 뚜껑. 뚜껑 위에 씐 '조선총독부 중추원부의장 정이위 대훈위 후작우봉이공지구(朝鮮總督府 中樞院副議長 正二位 大勳位 侯爵牛峯李公之柩)'라는 글귀가 뚜렷하다.)

그의 묘는 전라북도 익산군(現 익산시) 낭산면에 있었는데 지속적인 훼묘사건이 빈번히 일어났다. 그나마 일제강점기 때는 양반이었고 광복 이후에는 매우 심하게 훼손되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훼묘 사건이 발생한 데다 수풀이 너무 무성하게 자라 관리가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러, 1979년 이완용의 증손자 이석형이 파묘를 하고 유골 화장했다. 오늘날 이완용의 묘가 있었던 곳은 채석장으로 바뀌었으며 위치는 육군부사관학교에서 매우 가깝다. 파묘할 때 지속적으로 훼손된 묘였지만 붉은 명정에 쓰인 '조선총독부 부의장'이란 글은 상하지도 않고 그대로였다고 한다. 다만 이 글은 오히려 보존하는 게 이완용의 매국행위를 후손들에게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내버려뒀을 가능성도 있다.

1992년 <시사저널> 기사에 의하면 이완용의 관뚜껑은 당시 인부가 바둑판을 만들기 위해 가져갔다가 원광대학교 박물관에서 사들인 것을 이완용의 손자뻘 친척이라고 상당 기간 오해받던[24] 국사학자 이병도가 사비로 구입해 자택에서 불태워버렸다고 전해진다. 결국 부관참시로 이완용의 무덤은 사라지고 관과 유해는 불타버렸다.[25][26]

이완용은 일제에 부역하며 다양한 직함을 수여받았는데, 조선귀족원 회원ㆍ 농사장려회 회장ㆍ조선물산공진협찬회 명예회원ㆍ일본제국군인후원회 조선지부평의원ㆍ조선귀족회 부회장ㆍ농림주식회사고문ㆍ교육조사위원ㆍ총독부산업조사위원ㆍ조선미술전람회심사원ㆍ조선사편찬위고문ㆍ조선농업교육연구회고문ㆍ선만노몽(조선ㆍ 만주 러시아 몽골) 연구협회고문 등을 지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그는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이완용과 그의 손자인 이병길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하여 환수 작업이 진행 중이다. 또한 2009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이완용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물론 친일인명사전에 집어넣은 건 형식상 그렇게 했을 뿐 그는 진작 이전부터 당연히 매국노 중에서도 가장 악질 매국노로 간주되고 있었다.

이완용은 1910년대 토지, 임야 등 확인된 것만 여의도 면적의 약 2배에 해당하는 1,300여 필지, 1,600만㎡를 소유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완용은 일제때에 구입한 토지를 현금화하였으나 총 규모는 아직까지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이완용의 증손자인 이윤형은 친일파 후손 중 최초로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하여 1997년 7월 승소하였으며, 반환된 북아현동 일대의 토지는 당시 시가로 30여억 원에 달하였다. 이윤형은 곧바로 이 토지를 처분하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고, 2005년 한국으로 돌아온 후 적어도 2006년까지도 토지 반환 소송을 지속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윤형의 증언에 따르면 해방 후 이완용의 후손들은 집이 돌팔매질당하고 외출도 두려워할 정도로 핍박에 시달렸다고 하며, 이 때문인지 이완용뿐 아니라 악질 매국노 후손들 대부분은 해외로 떠나 숨어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27]
[1] 이완용의 고향에 대해선 약간 논란이 있다. 현재 역사학계에서 정식으로 인정되는 고향은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현재의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이지만 #, 역사학자 이병도는 이완용의 고향이 전라북도 익산시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병도의 발언은 근거가 무덤이 전북 익산에 있다는 것 정도이며 자기도 전해들었다는 카더라이기 때문에 신뢰성이 그리 높지 않다. 게다가 이완용과 전라도의 접점은 이완용의 양부 이호준이 이완용을 입양한 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몇 년을 그곳에서 지낼때 이완용이 종종 양부를 문안하러 갔었던 정도만이 있을 뿐이다. [2] 족보명은 이호석(李鎬奭). [3] 이공정의 아들 이자의는 문하시중을 지냈고, 조선조로 와서도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고관을 역임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이완용의 생가 15대조인 이길배가 태종 때 도관찰사를 지낸 것을 비롯해 문과 급제자 40명, 우의정 1명, 대제학 1명을 배출한 대표적 양반 씨족 가운데 하나다.[28] 16대조 이교(李喬)는 판서, 15대조 이방년(李芳年)은 밀직이며 14대조 이순(李淳)은 과거에 급제해 감사를 역임했으며, 조선 성종 때의 유명한 청백리였다. 생가의 11대조 이세명(李世銘)은 기묘사화에 연루된 선비였으며, 10대조 이한(李僴)은 무과에 급제해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9대조 이의원(李義元)이 동지중추부사였고 그러나 8대조 이우(李寓)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것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관직을 배출하지 못하였다. [4] 고종실록 1882년 11월 2일. [5] 왕족을 교육하는 기관. 소속 공무원은 왕족의 선생님이 되므로, 과거시험을 다 봐서 전시까지 5차시험을 모두 다 합격한 사람 중에서도 똑똑하다고 소문난 사람들만 뽑았다. 이완용도 과거시험 정통파라 증광문과 전시까지 공식적으로 다 합격한 사람이다. 음서 계열 쪽들은 넘볼 수도 없는 자리였다. 애초에 음서들이 그렇게 탐한 자리도 아니기는 하지만 [6] 당시 조선에게 이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1880년대에 조선은 청나라 위안스카이의 간섭으로 대외 활동이 매우 힘들었던 상황이었기 때문. 그런 상황에서 주미 공사를 설립하고 이완용을 공사관으로 파견한 것은 그만큼 고종이 그를 신뢰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7] 오른쪽 세번째 갓 쓴 사람이 이완용이다. [8] 작가 송우혜는 이 사건의 주도자를 엄귀비로 보고 구국의 화신 엄비 운운한다. 북한에서는 미국이 개입했다는 것과 이완용이 참여했다는 점을 들어 미 제국주의자로, 대위이자 훈련대장인 다이(Dye, W. Mc)와 매국노 이완용, 윤치호가 작당한 고종 납치극이라고 주장한다. [9] 아직까지 이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근거로 드는 당시 동아일보 기사의 내용은 독립문 근처에사는 주민의 말을 빌어 '이 현판은 이완용 후작이 쓴 거 랍디다' 라는 것이서 엄밀한 근거로 보기는 힘들다. [10] 건물의 주춧돌을 처음 세우는 행사 [11] 당시 러시아 제국 공사관이었던 스페에르(베베르의 후임으로 부임)는 이완용을 어떻게든 쫓아낼려고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넣었다고 한다. [12] 을사조약 시기 외무대신. 이후 참정대신 한규설이 항의표시로 물러나면서 참정대신을 맡게 된다. 을사조약 시기에도 초기엔 반대하던 입장이었다. 그래봐야 매국노지만. 경술국적도 된다. [13] 이는 이완용이 맡은 총리대신이 대신의 임명, 파면이 가능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이 고종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부여한 권한으로, 사실 을사조약 때도 참정대신 한규설이 을사 오적들을 파면시키려 했던 것도 이런 제도에서 근거한다. 하지만 한규설은 역으로 쫓겨났다. [14] 대신 추밀원 의장이 되면서 실질적인 실세 자리는 유지했었다. 추밀원은 명목상 황제의 상임고문 단체이지만 기본 권력기반만 있다면 실질적으로 총리처럼 행동할 수 있었고, 이토 히로부미가 그랬다. [15] 일진회는 일본의 병합 계획을 착각하고 있어서, 마치 대영제국 스코틀랜드처럼 독자적인 내각 의회를 가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6] 프랑스에서도 베트남 황제 바오 다이의 지위를 인정한 바 있다. [17] 물론 예식진처럼 이완용 이전에도 막판 대세가 기울자 왕을 잡아다 바치고 항복하는 등의 행위를 한 매국노들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나, 이완용은 이런 고위직 투항 등의 방식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를 스스로 주도하여 일제에 병합시킨 점에서 같은 매국이라도 질이 훨씬 나쁘다. 매국노가 수도 없이 많은데 다 기억 못하는 사람들이 이완용만큼은 기억하는 건 이유가 있는 것이다. [18] 사실 왕세제가 바른 호칭이지만 고종이 왕세자로 부를것을 고집했다. 물론 경술국치 전의 호칭은 황태자. [19] 일제가 보기에도 조선 민심은 극히 부정적이었을 것이다. 이완용이 얼마나 일본 제국주의에 유착한 인물이었는지 보여주는 부분 중 하나. [20] 이재명의 암살시도로 인한 후유증이었다. [21] 드라마 각시탈에서도 이 장면이 나오는데, 행렬에서 장례위원들이 들고 가던 그의 영정사진에 오목단이 투척한 짱돌이 가격당한다. 정확히는 시신이 짱돌을 맞은게 아니라 장례 행렬에서 부하가 들고 가던 영정사진이었다. 드라마를 보면 확실히 상여(관)자체에 피격당한 것이 아니라 앞에 한 사람이 들고 가던 영정사진에 맞는 걸 알 수 있다. [22] 철비전벽을 금성철벽으로, 앙탈하던을 악랄하던으로 옮기는 등 일부 오류는 있는 자료이나 대강의 내용은 참고할 만 하다. [23] 왕의 명령을 받아 승지가 신하를 부르는 것 [24] 이병도의 조부와 이완용의 항렬이 같아 손자뻘이란 거지 실상은 그냥 남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머나먼 친척이다. 촌수로 따지면 30여 촌 정도 될 거라고 하니. [25] 다만 이에 대해 정지환 기자는 이병도가 자신의 실증주의를 져버린 행위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이병도의 이러한 행동은 역사학자로서 적절치 못하게 보일 행동이었음은 사실이다. 이병도의 전후 행보와 성향을 볼 때 단순히 이완용의 친일 행태에 대한 분노로 그러한 행동을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이완용의 흔적을 지우려는 행위로 읽힐 수도 있다.게다가 이병도도 친일이력이 있었으니.. [26] 어찌됐건 이완용은 이렇게 해서 가문에서 폐적되었다. [27] 사실 친일파와 그 후예가 권력을 잡은 나라니 뭐니 해도 이완용 같은 자들과 그들의 후손이 해당되는 게 아니라 대부분은 일제강점기 중기 이후 실무 부역자들이 권력을 잡은 것인데, 일례로 잘알려진 매국노의 후손 중에서도 해방 후에도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이순용, 박승유나 증손대 이후는 논외로 치면) 일제강점기에 실무 부역자(판사)로 일했던 민복기 1명밖에 없다. 그래도 계속 말이나온건 친일파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게 너무큰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