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12:00:40

이재명(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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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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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재명 의사.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아명 이수길(李秀吉)
본관 진안 이씨[1] #
출생 1887년 10월 16일
평안도 선천군
(現 평안북도 선천군)
사망 1910년 9월 30일 (향년 22세)
한성부 경성감옥
(現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 서대문형무소)
종교 개신교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 위패-10호
상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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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
이재명 독립운동가의 마지막 유언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본관은 진안(鎭安), 아명은 이수길(李秀吉)이다. 을사오적 이완용을 암살하기 위해 명동성당에서 돌아오는 그를 단도로 습격했으나 미수에 그쳤으며 재판소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910년 9월 30일 순국하였다. 해방 이후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2]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887년 10월 16일 평안도 선천군(현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평안남도 평양부 시내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그러다가 1904년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나 1907년 귀국하였다.

1909년 1월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 순종과 함께 평양부를 방문하기로 하였을 때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안창호의 만류로 하지 못했다.[3] 백범일지》에 이재명의 의거에 관한 내용이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다. 김구 황해도 재령군에 있었을 때 "이재명이라는 자가 을 쏘며 난리를 피우면서 아내를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만났는데 김구와 노백린[4]은 이재명이 단순히 자기 말을 안 듣는 아내를 죽이려고 하는 줄 알고 그의 총을 빼앗아 기차를 타고 가 버렸는데 의거 이후 그것이 이완용을 척살하기 위한 무기였음을 알고 둘다 크게 후회하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사실 말하자면 이재명이 자신이 이완용을 죽이겠다 하자 그의 아내는 만류하였고 이재명은 "이 여편네가 나라가 중한 것을 모른다"고 화를 낸 것. 그리고 나서 나중에 이완용이 칼빵을 당하고도 살았다는 소식을 듣고 후회했다는 말이 있다. 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있다. 김구와 노백린은 이완용을 죽이는 데 사용할 무기임을 알고는 있었는데, 이재명을 헛된 열정에 들뜬 젊은이로 보고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며 말린 것이라고도 한다.

1909년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의 저격으로 죽자 이완용· 이용구· 송병준을 처단하기로 하였는데 이완용은 이재명, 이용구는 김정익, 송병준은 이동수가 담당하여 죽이기로 결정했다. 1909년 12월 22일 서울 종현 천주교회당(오늘날 명동성당)에서 이완용이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5]의 추도식에 참석하였다. 이재명은 신문을 보고 이 정보를 입수한 뒤 밖에서 군밤 장수로 변장하고 있다가 11시 30분에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려는 이완용의 허리 어깨로 3번 찔렀다. 이 과정에서 이완용과 이재명 사이를 막아섰던 인력거꾼 박원문이 칼에 찔려 사망하였고, 부상당한 이완용은 대한의원[6]에서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의 치료와 대 수술을 받은 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이게 한국의 흉부외과 수술 제1호이다. 이때 이완용을 치료한 일본인 의사가 말하기를 " 외과 의술의 발전이 10년만 늦었어도 이완용은 이 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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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앞에 있는 의거비[7]
● "내 목숨 빼앗을 수 있으나 충혼은 못 빼앗아"
경시청에서 조사를 받은 의사는 일본 경찰이 "공범이 있느냐?"고 묻자 "이러한 큰일을 하는데 무슨 공범이 필요하냐. 공범이 있다면 2,000만 우리 동포가 모두 나의 공범이다."고 말했다.

이듬해 4월 열린 재판에서도 "도와준 자를 말하라"는 일본인 재판장 스가하라에게 " 이완용을 죽이는 것을 찬성한 자는 우리 2,000만 동포 모두며, 방조자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엄숙한 목소리로 역적 이완용의 8개 죄목을 거론하며 통렬하게 비판했다.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내 목숨을 빼앗을 수는 있으나 나의 충혼, 의혼(義魂)은 절대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한번 죽음은 슬프지 않다. 생전에 이루지 못한 일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내 결코 죽어서 그 원한을 갚을 것이다."

의사는 1910년 5월 18일 경성지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의사는 사형 선고를 받고 꼿꼿한 자세로 재판장을 꾸짖으며 이렇게 최후 진술을 했다. 부인 오씨는 '국적 이완용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았는데 우리 가부(家夫)는 왜 사형에 처하느냐'며 눈물을 흘렸다.

의사는 조선총독부 체제 발족 바로 전날인 1910년 9월 30일 순국했다. 의사는 "의거를 공모한 사람들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보호하면서 끝까지 단독 범행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김병록 등 동지 10여 명도 최고 징역 15년형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Ⅱ - ▣이재명▣
이때 교수형을 선고받은 그는 곧 공소하였으나 1910년 7월 12일 경성공소원에서 소위 모살미수, 고살 혐의에 대해 공소가 기각되었으며, 이에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15일 고등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교수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경술국치로 국권을 빼앗긴 지 1개월만인 1910년 9월 30일, 결국 경성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했다. 이 때 순국 직전에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여담으로 비록 이재명 의사가 이완용을 그 자리에서 죽이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완용은 이때 입은 상처 때문에 17년간 폐렴을 고질병으로 달고 다니며 고생하다가 결국 1926년에 그로 인해 죽었다. 어찌 보면 17년에 걸친 암살. 참고로 이완용은 을사오적 중에서 오래 산 편이다.[8]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가 세워졌다.

3. 대중매체에서

  • 1995년 KBS 광복 50주년 기획드라마 《 김구》에서는 배우 채용병이 연기했다.

4. 여담

  • 당시 이재명 의사가 의거를 한 장소가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이 열린 명동성당 앞이라는 것 때문에 이완용 개신교 신자 혹은 가톨릭 신자라는 잘못된 정보가 인터넷 상에 퍼지기도 했는데, 그곳은 어디까지나 의거 장소 근처였을 뿐이고 이완용은 총리대신 자격으로 그 행사에 참석했을 뿐 본인은 평생에 걸쳐 독실한 불자였다.
  • 이재명의 사형 사유는 살인이다. 이완용은 살아났지만 인력거꾼 박원문이 죽은 것은 좌우지간 이재명의 살인이 확실하기 때문에 사형이 선고된 것이다. 죄 없는 사람이 죽었다는 점은 공판 과정에서 이재명도 부정하지 않았는데 독립운동이 지닌 폭력성의 정당성을 다툴 때 다뤄지기도 한다.
  • 후대의 동명이인 정치인인 이재명과 한글 이름뿐만 아니라 한자 이름도 똑같으며, 이재명 의사의 의거일인 12월 22일이 이재명의 호적상 생년월일이다. 대신 본관은 다르다.

[1] 22세손. [2] 현재의 건국훈장 대통령장. [3] 그러나 결국 이토 히로부미는 같은 해인 1909년 안중근 의사에 의해 저격당해 죽었다. 이재명 의사가 의거를 하지 않았어도 결국 그 해에 죽을 운명이었다. [4] 당시 김구와 함께 황해도 재령군에 있었던 독립운동가. 일본육군사관학교로 유학간 뒤 조선에 돌아와 육군의 요직에 올랐다. 그 뒤 을사조약에 반대하였고 국권이 침탈되어 군대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뒤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군 육성에 관여하였다. [5] 한국사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으나, 이 작자는 수많은 사람들을 살육하며 세계사에 남을 만한 폭정을 저지른 폭군이자 베를린 회담 당시 콩고를 받으려고 영국 프랑스에 아첨하던 야비한 소인배였다. 당시 레오폴드 2세가 지배하였던 콩고 독립국에서 나치 독일 저리가라 수준의 인종차별적인 폭정과 잔학행위를 일삼는 바람에 같은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도 비난받을 정도였다. [6] 현재 서울대학교병원 의학 박물관. [7] 벨기에 황제라고 나와 있으나 레오폴드 2세는 황제가 아니고 왕이었다. [8] 죽은 시점상 이완용은 을사오적 중 3번째로 죽었지만, 4번째 사망자인 이지용이 이완용보다 훨씬 어렸기에 이완용이 죽은 지 2년 뒤에 이지용이 죽었음에도 나이가 어려서 실제로는 이완용이 2번째로 오래 살았다. 을사오적 중 3명은 큰 테러도 안 당하고 권세를 누렸는데도 그냥 병으로 죄다 50대에 죽었다. 다만 이들 가운데 박제순은 마음의 병으로 외부활동을 삼간 부분이 있었기에 권세를 누렸다 보지 않는 시각도 있다. 즉 60대 후반에 죽은 이완용은 당시 기준으로 어느 정도 장수한 것이며 피습 경력과 후유증까지 고려하면 천수를 누렸다고 할 만큼의 장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을사오적 중 꼴밉상의 제왕 권중현처럼 아예 천수를 누린 수준을 넘어 천수보다 더 살아서 팔순에 가까울 정도로 독보적으로 장수한 어이없는 사례 역시 존재한다.